터키 민족 2천년 사
쉴레이만 세이디 지음, 곽영완 옮김 / 애플미디어(곽영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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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5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라 왠만하면 읽어 보려고 했는데 포기했다.

한 번에 쭉 읽어야 집중도가 있는데 중단하고 한참만에 보니까 도저히 후반부는 읽기가 어려워 덮어버렸다.

통사 식으로 터키 역사를 쭉 나열하는 방식이라 흥미가 떨어지는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수많은 투르크족 칸국의 흥망성쇠까지 읽다가 포기했다.

너무 아쉽고 다른 책으로 도전해 봐야겠다.

역자가 전공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어색한 번역이 종종 눈에 띄여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14p

투르크족은 아시아 중심부에 있던 근거지에서 다른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는데, 대부분은 서쪽으로 향했다. 이들의 이주는 수세기 동안 지속됐다. 비좁은 땅 문제와 인구 증가에 따른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또 가축 방목을 위한 목초지를 찾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외부 세력과의 전쟁이나 내부 구성원 간의 전쟁을 겪게 되자 이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48p

투르크족의 역사는 중동과 소아시아를 향해 서쪽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우마이야와 아바스 등 이슬람 왕조를 만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이들과 접촉하면서 대대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59p

가즈나 제국은 인도까지 원정대를 보내는 등 이슬람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인해 투르크족의 이슬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62p

투르크족의 모든 이주 역사에서 보듯 그가 떠난 이유도 부족원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새로운 거주지와 목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66p

셀주크 제국의 영토 확장과는 별도로 투그룰 베이가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은 투르크멘들의 도움을 받아 소아시아로 진입한 것이다. 오구즈족은 셀주크의 통제 아래 이 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했다. 이 지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항상 주변 지역을 혼란에 빠트리곤 하던 투르크멘들의 정착지를 찾기 위해 투그룰 베이는 투르크멘들을 비잔티움이 지배하던 소아시아로 인도했던 것이다. 거듭된 침략과 정복을 통해 소아시아는 점차 투르크족의 근거지가 됐다.

 투그룰 베이 시대에 이뤄진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아바스 칼리프 조와의 우호적인 관계 성립이었다. 이 우호적인 관계를 발판으로 셀주크는 이슬람 세계의 유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그는 재위 초기부터 칼리프를 따를 것임을 선언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쿠바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69p

만지케르트 전투의 가장 중요한 결과물은 투르크족이 소아시아를 영구적인 근거지로 만들기 위해 밀고 들어왔다는 점이다. 소아시아를 투르크족의 근거지로 만들려는 움직임은 만지케트르 전투 승리와 함께 시작됐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알프 아르슬란은 휘하 지휘관들에게 소아시아를 점령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만지케트르 전투가 남긴 또 하나의 결과물은 유럽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투르크족의 만지케르트 전투 승리가 이슬람 세계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반면, 유럽 기독교 세계에는 분노를 불러 일으켜 투르크로부터 비잔티움을 구하자는 십자군 구성이 촉발된 것이다.

 


<오류>

24p

돌궐은 동 돌궐에 이스테미가 있고, 서 돌궐에 무칸이 있을 당시가 최전성기였다.

->동 돌궐이 무칸이고, 서 돌궐이 이스테미다.

26p

쿠툴룩의 아들인 카프간은 부왕의 정책을 이어

-> 카프간은 쿠툴룩의 아들이 아니라 형제이다.

79p

셀라하딘은 동생 투란 샤와 함께 시리아를 정복하고 이라크까지 통치권을 넓혔다.

-> 셀라하딘이 곧 십자군 전쟁으로 유명한 살라흐 앗딘이고 그의 동생은 알 알아델이다. 투란샤는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술탄이다.

81p

반란군은 피에세르-우드-두르를 새 술탄으로 옹립했다. 피에세르-우드-두르는 선대 술탄인 말릭 네크메틴 샤리의 미망인이었다.

-> 샤자르 알 두르는 앗 살리흐 나짐 앗 딘의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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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 2019-10-10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 책에 저런 오류가 있는 것은 심한데요. 쿠르드족이 미국의 암묵적 지원을 받는 터키군에 의해 학살 당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리네요.
 
한 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 - 우리에게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스페인 이야기
서희석 지음, 이은해 감수 / 을유문화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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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전작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은 스페인의 중세 이야기였고, 이 책은 후속판 격으로 근현대사에 관해 쓰고 있다.

전공한 학자도 아닌데 이런 자세한 역사책을 발간했다는 게 신기하다.

아무래도 스페인 현지에 있다 보니 스페인에서 직접 발간된 책들을 참조해서 내용의 충실도가 높은 듯하다.

스페인 역사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쉬운 문체로 소개하는 책을 본 적이 없다.

스페인 역사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저자의 두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20세기 역사는 다소 지루했다.

세계사적인 중요도가 떨어지는 시대라 더 그런 것 같다.

온건파와 공화파의 대결 속에서 군부 쿠데타가 지속되고 프랑코가 근 40여 년에 걸친 독재를 자행하고도 유럽 민주주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인상깊은 구절>

33p

알바 공작이 1할세를 걷지 않았으면 아무 문제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알바 공작으로서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펠리페 2세가 보내는 돈은 군대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알바 공작은 네덜란드를 일반적인 식민지로 생각했다. 본국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식민지에서 세금을 걷는 것은 그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36p

이러한 약탈이 계속된 이유 중 하나는 스페인 용병들의 급여가 제때 지불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국적 출신의 용병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군인들은 애국심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군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을 뿐이다. 스페인에서 급여가 지급이 안 되니 도시를 약탈해서라도 이득을 챙기고 보급을 해야만 했다. 이는 딱히 스페인만의 문제점은 아니었다. 이 시기 유럽의 대다수 나라는 용병을 주로 이용했는데 문제는 용병의 경우 군기가 엉망이었고, 급여를 지급받지 못하면 점령지를 약탈하는 일도 흔했다는 사실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많은 금과 은을 가져올 수 있었던 스페인이 왜 군인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못했을까? 물론 아메리카 대륙에 많은 금과 은이 있었지만, 은행에서 필요할 때처럼 꺼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메리카 대륙과 스페인을 왕래하는 배편은 일 년에 많아야 두 편이었다. 게다가 해적들은 그 배를 약탈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수송선이 무사히 세비야에 도착했다고 네덜란드에 바로 보급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금과 은을 다시 네덜란드의 지역으로 수송해야 했다.

59p

펠리페 2세는 열심히 일하는 군주의 전형이었다. 루돌프 2세가 이처럼 수집에 열중하는 동안 한 시대를 풍미했던 펠리페 2세도 결국 죽고 말았다. 펠리페 2세는 평생 춤이나 술, 파티 등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취미는 책을 읽고 미술품, 시계, 무기, 특이한 물건 등을 모으는 일이었다. 부인과 친밀하게 지내지 않았고 거리를 두는 편이었으며 금요일, 토요일, 종교 축제 전날에는 혼자 저녁을 먹을 정도였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왕이 된 후에 나라 걱정으로 쉴 새가 없었다. 그는 통치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싶어 했다. 일 중독자였던 펠리페 2세는 아침 일찍 기상해서 점심 때까지 수많은 보고서를 검토하고 결재했다. 가족과 거리를 두고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때문에 펠리페 2세는 차갑고 감수성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펠리페 2세 시절만 해도 귀족들은 궁정에서 큰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펠리페 3세는 아버지와 달리 정치 능력이 뒤떨어졌고 정치에는 큰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를 대신해 줄 사람, 섭정이 필요했다. 권력을 휘두르고 싶던 레르마 공작과 누군가 대신해서 나라를 통치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펠리페 3세는 서로에게 딱 필요한 사람이었다.

 현재를 즐기자는 자세는 펠리페 3세가 왕이 아니었더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광대한 영토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왕이었다. 그가 나랏일을 외면하자 신하들도 나랏일을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느라 바빴다.

67p

전쟁, 전염병 외에 스페인 본토에서 신대륙으로 주민들이 많이 이주했다. 인구가 줄어드는 시점에 모리스코를 추방하자 스페인 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제일 큰 피해는 농촌에서 나타났다. 모리스코는 주로 농촌에 힘든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모리스코가 추방당해 스페인을 떠나자 대체 인력을 구할 수 없었던 농촌 경제는 파탄이 났다. 인구가 줄어들어 작물을 기르고 가축을 돌볼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 17세기 초중반에는 포르투갈과 카탈루냐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많은 농경지와 목초지도 파괴되었다. 

74p

올리바레스의 연합군 제도에는 군대 유지비용도 절약하고 스페인 출신의 강력한 국민군을 육성하여 유럽을 지배하겠다는 거창한 목적이 있었다. 19세기 초 유럽 전역을 휩쓴 나폴레옹 군대도 용병이 아닌 프랑스의 국민군이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만약 스페인이 올리바레스 대공의 원안대로 연합군을 마련할 수 있었다면, 스페인은 프랑스와 영국을 공략하여 다시 한 번 유럽의 패권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08p

30년 전쟁의 희생자 수는 750만 명에 이르렀다. 신성로마제국은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30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2100만 명이던 신성로마제국의 인구는 135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종교가 전부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30년 전쟁을 겪으며 종교 때문에 지옥과 같은 일들이 현실 세계에 펼쳐지자 신과 종교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아무리 종교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수백만 명의 사람이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17세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위대한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속속 등장해서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고 과학 발전에 기여해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종교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흐름이 생겨나며, 종교의 힘은 약해졌다.

 스페인은 신성로마제국처럼 초토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른 유럽은 신교를 인정하며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며 발전해 나갔다.

238p

스페인이 절대왕정으로 돌아가자 제일 먼저 신분제가 다시 생기고, 종교재판이 부활했다. 19세기 초반 스페인은 자유주의 무역으로 부를 쌓고, 교회보다 이성을 중시하여 발전하던 다른 유럽 국가와 정반대의 길 걸었다. 카디스 헌법이 무효화 되면서 자본주의 방식과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인 길드가 부활하여 생산을 통제했다.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활보하는 바람에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 이념이 전파되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프랑스 중심으로 통일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그는 유럽을 제패하면서 한 나라를 점령하면 그 나라의 왕을 유폐시키고 그의 친척을 왕위에 올린 뒤, 프랑스식 근대화된 제도를 도입했다. 나폴레옹이 점령한 나라를 프랑스식으로 바꾼 이유는 거대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 덕분에 유럽의 근대화가 앞당겨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한계는 명확했다. 프랑스 혁명은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프랑스 시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다른 나라에 무력을 동원해 강요했다. 나폴레옹의 강제적인 근대화는 그게 얼마나 좋든 간에 많은 사람이 불만을 품었다. 그런 이유로 나폴레옹이 사라지마자 다시 절대왕정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유럽 곳곳에서 생겨났다. 

 페르난도 7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스페인은 전쟁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농업은 말할 것도 없었고, 모든 상업 활동이 마비되어 있었고, 은행은 파산 상태였다. 스페인이 사상적으로 뒤처져 있었지만 강대국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에 거대한 식민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힘이 약해지자 스페인령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시도했다. 예전에는 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미국이 1776년 7월 4일 독립을 하는 것을 보고 스페인 식민지들도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247p

개혁이 성공한 뒤 집단 간 의견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고 격해지면서 일상생활은 위협을 받는다. 일상생활이 위협받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개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개혁을 지지한 이유는 잘살기 위함이었으나, 결국 혼란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면 차라리 절대왕정 시절의 안정적인 사회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나타났으며, 뒤늦게 근대화된 스페인에서도 반복되었다.

268p

자유 진영이 진보파와 온건파로 분열하고, 온건파와 진보파의 대결로 정국이 혼란해지는 상황은 스페인에서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전 유럽에는 자유주의가 자리를 시작해서 역사가 짧았기 때문에 다른 유럽 나라에서도 자유주의 내 갈등이 심했다. 자유 진영 내부에서 갈등이 생긴 이유는 정치 참여와 직결되는 투표권을 국민 누구에게 얼마만큼 주느냐에 대해서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온건파는 될 수 있으면 투표 자격을 까다롭게 하여 소수에게 주려고 했고, 진보파는 더 많은 국민에게 투표권을 주기 원했다. 진보파도 여성의 참정권은 제한했지만, 일반적으로 진보파의 입장이 오늘날 민주주의에 더 가까웠다. 

291p

공화국 정부는 사회 전반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려 했으나 실제 이룬 성과는 별로 없었다. 농민과 노동자의 요구에는 귀를 기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래에서부터 큰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공화정 출범 이후 짧은 시간 여러 명의 대통령이 바뀌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에 지친 상태였기에 안정을 원했다. 최초 공화정은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실패한 바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이 있어서 안정적이기만 하다면 약간의 불합리함이 있더라도 기존 방식을 선호했다.

 스페인에서 정치적 안정이란 기존 방식대로 다시 왕을 옹립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하고 국민에게 제한적인 자유를 주는 것을 뜻했다.

300p

당시 정부를 이끌었던 카노바스는 보통선거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일정 조건을 지닌 사람만 투표와 선거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정부에서는 의회에 들어갈 수 있는 의원 후보자의 자격과 의원을 뽑기 위해 투표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했다. 그 자격 요건의 핵심은 돈이었다. 돈이 있어야 의회에 들어갈 수 있었고, 투표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졌다. 돈이 없는 농민이나 노동자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온건파 정당은 자본가의 편에 서서 자본주의를 숭상했다. 



<오류>

48p

그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빈자리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촌이며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를 앉히려고 했다.

-> 헨리 7세의 딸인 마거릿 튜더가 제임스 4세와 결혼했고 그 손녀가 바로 메리 스튜어트다. 마거릿 튜더는 엘리자베스 1세의 고모이므로, 메리 스튜어트는 그녀의 5촌 조카이다.

121p

마르가리타 공주는 21년을 살았는데 그동안 네 번 임신했고 그중 두 번을 유산했다. 

-> 레오폴트 1세의 배우자인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네 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그중 뒤에 낳은 두 명이 그 해에 사망했으므로 유산은 아니다.

201p

카를로스 4세는 사촌인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와 결혼했다. 그녀는 펠리페 5세의 두 번째 부인 파르네제와 같은 파르마 출신이었고,

-> 마리아 루이사의 할머니가 곧 파르네제이고 아버지인 필리포와 카를로스 4세의 아버지 카를로스 3세가 친형제이므로 특별히 마리아 루이사만 파르마 출신이라고 말하는 게 이상하다.

217p

페르난도 7세는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의 아홉 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 페르난도 7세는 여덟 번째 아이이고, 장남이다.

251p

페르난도 7세의 두 번째 부인은 브라간사의 마리아 이사벨이었다. 그녀는 포르투갈 왕 주앙 4세와 그의 누나 카를로타의 딸이었다.

-> 마리아 이사벨은 주앙 6세의 딸이다.

298p

알폰소 12세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사촌이었다.

->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아버지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버지가 사촌간이므로 둘은 6촌 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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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머리 독서법 - 실현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독서교육의 모든 것 공부머리 독서법
최승필 지음 / 책구루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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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 도대체 왜 내가 이 책을 읽으려고 했을까?

인기있는 신간이라 몇 달을 기다려 드디어 읽었는데 역시나 알맹이가 없다.

아이들 독서보다는 내 독서법이 궁금해서 읽은 책인데 큰 도움이 안 됐다.


느낀 점 몇 가지만 간략하게 적어 보면

1) 조기 교육은 큰 의미가 없다.

아이들 키우면서 항상 고민하는 부분이다.

공부를 특출나게 잘한 건 아니었지만 왠만큼은 했던 나 자신에게 비춰 볼 때 선행학습이나 학원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치원 때 낑낑대며 배울 것을 초등학교 가면 금방 터득해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 나온대로 나도 학교나 학원에 앉아 있는 시간만 많았지 실제로는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에 간 후 아무도 도와 주거나 강요하는 사람이 없을 때 미친듯이 공부했던 것 같다.

정말 중요한 것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본인이 필요성을 느끼고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만 약간의 도움을 받는 게 진짜 공부일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을 키워 보면 사교육을 무시할 수가 없다.

나한테 적용됐던 방법이 애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일까 판단이 안 선다.


2) 독서는 유튜브 보는 것보다는 사고력도 키울 수 있고 독해 능력이 있어야 학습 능력도 오를 것 같긴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재밌는 책을 읽는 것이다.

내가 책을 열심히 읽는 까닭은 활자중독이기도 하지만, 왕성한 호기심 때문이다.

너무 궁금하기 때문에 책을 통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읽고 싶은 책이 무궁무진하다.

요즘은 다큐멘터리나 영상물도 많지만 한 권의 책만큼 깊이있고 폭넓은 지식을 제공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또 책을 읽으면 영상물 볼 때보다는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이 훨씬 많고 에너지 소모도 매우 크다.

공부도 그렇지만 독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흥미를 갖게 하는 것 같다.


3) 책에서는 속독하지 말고 정독을 하라고 했는데, 교과서도 아닌 책을 정독하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대충 빨리 한 번 읽고 간격을 두고 재독하는 게 훨씬 효율적일 것 같다.

쉬운 책은 정독하고 말 것도 없이 한 번에 쓱 읽을 수 있는데 어려운 책의 경우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읽으면 자칫 지루해지기 쉽다.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지 몰라도 매일 10분 독서는 큰 도움이 안 된다.

책은 일종의 영화 같은 매체라 한 번에 쭉 몰입해서 읽어야 재미도 있고 집중력도 생긴다.

제일 좋은 건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는 것인데, 힘들다면 최소 2일 안에는 읽어야 한다.

3일째 되면 벌써 앞의 내용을 잊어버리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책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딴생각도 좀 하면서 산만하지만 어느 순간 몰입하게 되는데 그 몰입점에 도달할 때까지 진득하게 앉아 있고 그 다음부터는 끝까지 읽어 가는 것이다.

어려운 책을 너무 열심히 읽으려면 금방 지친다.

스킵해서 대충 한 번 읽고 시간차를 두고 다시 읽는다.

그러면 훨씬 이해도 잘 되고 놓친 부분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읽게 되면 간섭효과 때문에 지루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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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의 라이벌 - 감성과 오성 사이 석학인문강좌 46
이태호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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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창출판사에서 나온 석학인문강좌 시리즈는 주제가 참 좋고 내용이 깊이가 있으면서도 청중들을 대상으로 쉽게 쓰여져 편안하게 읽힌다.

표지 디자인을 좀더 세련되게 바꾸면 훨씬 더 독자들에게 많이 읽힐 것 같다.

한국 미술사의 라이벌이라는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내용이 참 좋다.

특히 박수근과 이중섭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표현주의 미술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이중섭 그림이야 워낙 유명하고 직관적으로 강렬한 감동을 주지만, 사실 박수근 그림은 너무 소품이 많고 비슷한 스타일이라 크게 관심이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박수근의 작품이 주는 미적 가치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흑백 도판이라 무척 아쉽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가 그린 유화들의 색감이 얼마나 조화롭고 따뜻한지 새삼 알게 됐다.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의 수묵화 비교도 참 좋았다.

컬러 도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김정희 예술론에 대한 비판은 무척 신선했다.

유홍준씨의 <완당평전>을 읽으면서도 너무 지나친 찬사는 아닐까 의아했는데 역시 저자도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고루한 부분을 지적한다.

국제화라고 보기에는, 그가 접했던 청나라 문인들도 당대 일류가 아니었고 예술가로서의 작품보다는 문인화가로서의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예술론과는 맞지 않는 듯 싶다.

진경 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진 겸재 정선의 그림이, 실경을 그대로 그렸다기 보다는 중국이 아닌 우리 산천을 대상으로 삼았으나 과장과 변형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향을 표현했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오히려 실경을 그대로 화폭에 옮긴 이는 가히 조선 최고의 화가라 할 수 있는 김홍도였다.

그야말로 진정한 환쟁이로 현대적인 의미의 화가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책에서는 정선에게 김홍도가 배웠다고 되어 있던데 이 책에서는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정선은 김홍도 같은 화원, 즉 직업적인 화가라기 보다는 고위 관료들과 어울린 정통 양반이었기에 작품 세계의 결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중앙 정계에서 활약한 김정희 역시 정선이나 김홍도 등과는 전혀 다른 예술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저자는 정약용이나 박지원을 성리학을 넘어선 이들로 묘사하는데, 그 부분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약간의 개성은 있을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근본적인 성리학자였고 그 틀 안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상깊은 구절>

5p

작품의 감상 또한 창조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눈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 개입되기 때문에, 예술은 눈과 손의 원초적인 감각행위인 동시에 이성작용으로 완성되지요. '창작'이나 '감상'이라는 예술행위 하면 감성적 측면이 먼저 떠오르지만, 실제로 그림을 읽거나 해석할 때는 이성으로 마무리되거든요. 이처럼 작품의 구상부터 붓을 떼고 마무리하기까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물론이고,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는 단계에서도 오성과 감성이 함께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단순히 한 개인이 느끼고 즐기는 방향으로만 흘렀다면, 예술이 인문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동시대는 물론이려니와 후대 사람들과도 함께 미를 공유하면서 예술이 인문학 영역에서 큰 위치를 차지해 왔지요. 인문학이 인간을 탐구하거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할 때, 인류사회에서 가장 인간다운 사람은 바로 화가, 곧 예술가 아닐까요. 보통 예술가라고 하면 동물적인 몸의 반응과 직관이 남들에 비해 조금 더 예민하고, 자유의지대로 자신을 표현하며 감정을 앞세워 행동하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그만큼 예술가에게 자율성이 부여되고 창조성은 배가되지요. 

55p

강세환은 정선의 과장 방식에 대하여 "평생 익힌 대로 필법을 휘둘러 바위의 형세나 봉우리 형상의 구분 없이 한결같이 열마준법으로 어지러이 그려냈기에 '사진'이라 하기에는 부족했다"라며 현장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적 평가를 남겼지요.

105p

정선은 실경의 리얼리티를 뛰어난 직관으로 구성하여 누구나 공감할 '진경'산수화를 창조하였습니다. 정선이 완성한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대지, 나아가 조선의 명승을 통해 더 나은 이상을 꿈꾼 이들의 회화형식을 대표하지요. 그 중심이념은 물론 성리학이었을 터이고 정선이 易理 를 원용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증언도 맞물립니다. 또 정선이 고위관료서 당시 집권층인 서인, 노론계 문사들과 친밀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지요.

136p

김정희는 까다로운 안목에 걸맞게 지필묵과 문방구류도 명품을 선택했고, 그것들의 사용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正道 를 지켰던 것 같습니다. 최고와 완벽을 추구하는 귀족적 인간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171p

얼마나 썼길래 1000자루의 붓을 닳아 없앴을까요. 이는 김정희의 추사체가 단순히 감성에 의존한 게 아니라 엄청난 훈련과 투혼으로 이루어진 업적임을 시사합니다. 물론 스스로가 글씨 쓰기를 크게 즐기고 일상화했던 삶이 밑바탕에 깔렸겠지요. 추사체의 위대함과 자랑거리는 바로 그런 장인정신에 있습니다.

193p

김정희는 제자들에게 정선이나 심사정처럼 그림공부를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그림이 송,명의 고전적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제시한 그림이 주학년의 작품들입니다. 김정희가 직접 만난 주학년의 회화는 송~명대 이후 남종문인화풍의 갈필로 그린 피마준 작품으로 남종산수화풍에 해당하지요. 그런데 주학년은 중국화회사 관련 도록을 아무리 열심히 뒤져도 걸러 도판 하나 찾기 힘든 화가입니다. 김정희는 자기가 만난 화가가 중국의 전부라고 인식했던 셈이지요. 외래문화가 들어올 때 흔히 일류가 아닌 삼류와 접하기가 쉬운데 그 경우 중 하나라고 생각해 봅니다. 즉 김정희는 삼류의 외래문화로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의 기준을 설정한 것이지요. 그러니 원교체에 대한 불만과 마찬가지로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나 문인화풍에 눈길이 갈 리가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자신의 서화 창작론을 토대로 김정희 스스로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커다란 업적이지요.

195p

정약용이 형사나 사실 표현을 강조한 화원이나 직업화가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고, 그림다운 그림으로서 회화의 '기능'적인 면을 우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진정한 회화의 가치가 사의나 문기를 중시하는 여기적 '취미로서의 그림'이 아닌 전문 화가들의 잘 그린 '業 으로서의 그림'에  있다고 여겼지요.

205p

김정희의 '완당 바람'은 19세기 문예계에 대한 막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18세기 회화의 신경향에 대한 반작용을 일으켰습니다. 문인화가는 물론 화원이나 중서층 서화가들까지도 김정희식 서권기, 문자향에 경도될 정도였지요. 이들의 남종화풍은 간결하고 감각적인 필치와 수묵 처리로 회화성을 구가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중후반에는 북산 김수철, 석창 홍세섭 등 기괴론에 어울리는 독특한 개성주의 작가들이 부상했지요. 결국 '완당 바람'은 19세기에 사실주의 회화를 퇴조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8세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사실정신, 그리고 이광사의 조선적인 서체 등 국풍의 문예를 잠재운 19세기 김정희 예술에 담긴 철저히 고고한 격조의 귀족 취미와 후대에 미친 큰 영향, 그리고 시대조류 방향에서 어긋나는 비현실적인 미감에 대하여 술회하였습니다.

 장승업은 중국의 고사인물도와 기명절지, 화조, 영모화 등을 즐겨 그려, 이미 그 주제가 시대정신이나 18세기 조선풍의 회화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하지만 필묵을 다루는 데 있어 수준급 기량을 발휘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233p

이상범은 제1회 선전에 출품하면서 일본화를 직접 익히려 이듬해인 1923년경 일본을 다녀오지요. 나는 우연히 1930년대 일본 교토지방의 전시회 팜플렛을 본 적이 있는데, 이상범의 <초동>을 비롯한 당대 산수화풍이 거기에 나온 삼류 화가들의 그림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이상범이 일본의 유명한 일류화가의 그림보다 당시 조선인이 잘 모르는 삼류화가의 그림을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요. 지금도 공모전에 나오는 작가들이 유명하지 않은 외국의 스타일을 베끼는 경우가 종종 불거지기도 하지요.

287P

고희동이 조선총독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자신이 이 혜택을 이용해 특례입학자로 갔다는 설이 있지요. 그의 그림들을 보면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처음부터 회화적 역량이 떨어진 화가라고 판단됩니다. 일본에서 유화를 배워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유화작업을 포기하고 수묵화가로 전향했는데, 이마저도 회화적 수준이 낮았지요. 실력 있는 화가로 인정받기보다는 원로라는 정치적 위상을 갖는 데 그쳤습니다.

291p

한국문화에 내재된 야수파적인 혹은 표현파적인 기질이 선명히 드러나네요. 흥과 신명이 넘치는 한국인의 가슴에 야성이 가득차 있는 것일까요. 자극적이거나 거칠면서 단순한 형상을 선호하는 민족입니다. 서구 모더니즘 사조에서 표현주의가 큰 갈등 없이 쉽게 젊은 화가들에게 소화된 연유도 그러한 데 있지 않을지요. 

348p

박수근은 이중섭처럼 격정적이지도 않았고, 시대를 심하게 앓던 화가도 아니었지요. 그림도 잘 팔리는 편이어서 인정된 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림 그리는 노동을 통해 만든 예술작품을 팔아서 내 삶과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는 역할을 할 수 있었지요. 때문에, 박수근은 이중섭보다 크게 유복했다고 봅니다. 이중섭이 자기 그림이 안 팔리는 현실에서 "나는 밥 먹고 살 인간이 못 된다"며 삶을 포기하려 거식증까지 걸렸던 데 비하면 더욱 그러하지요.

 1957년 박수근을 힘들게 한 사건이 생깁니다. 국전에서 박수근 그름이 낙선을 한 것이지요. 사실 그 당시 박수근 나이면, 친구들이 다 국전 초대작가나 심사위원을 할 때입니다. 출품하기가 껄끄러웠을 법한데, 그럼에도 자꾸 작품을 출품했지요.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열등감 내지 학벌이 없는 점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요. 국전에서 큰 상을 받으려 했을 터인데, 심사위원들이 1857년에 낙선을 때린 것입니다. 국전 탈락은 박수근에게 큰 치명타였지요. 청빈한 기독교인으로 약주도 안 들던 박수근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이는 자기 몸의 손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백내장에 걸리게 되었고, 그 때문에 말년 그림이 범벅이 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요. 내향적 인간의 전형이었던 이중섭이 개인과 시대적 아픔의 복합으로 다른 사람처럼 변해갔듯이, 박수근도 잘 나가다가 얻은 개인적 외상이 회화 세계보다 몸을 치게 만드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너무나 안타깝다. 한국 최고의 화가로 숭앙받는 이중섭이 나는 밥 먹고 살 인간이 못 된다면서 거식증까지 걸리고, 그림값이 제일 높아진 박수근이 친구들은 국전 심사위원인데 거기에 작품을 출품하고 낙선됐을 때 그 좌절감이란... 인생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모르겠다. 고흐만 안타까운 삶을 산 게 아니었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그 괴로움에 일찍 세상을 떴지만 영혼이 있다면 훗날에라도 인정받고 있음에 위안을 얻으려나. 너무 마음이 아픈 대목이다)

365p

뉴욕 시절 작업일지에 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점화는 낯선 타국의 하늘 아래에서 그 외로움을 별들과 함께 달랬던 결과입니다. 한국의 자연을 연상하며 목 놓아 부른 김환기의 연가이고요. 비록 김환기가 뉴욕생활을 통해서 세계적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조국의 이미지를 영감으로 삼아 풀어 놓은 추상화는 20세기 한국 모더니즘 미술사에서 우뚝한 성과입니다. 어렵고 낯설어서 감상자를 유리시키는 보통의 추상화와 달리, 한국인의 마음에 편안한 공감을 던져줍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김환기의 추상화는 그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파란 색감과 달항아리, 하늘, 별 같은 소재들이 마음을 울린다. 뉴욕이라는 현대미술의 최첨단인 곳에서 작업했음에도 너무나 한국적인 감성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오류>

83p

정조의 어명으로 김홍도가 그린 금강산과 4군의 풍경을 담은 <해신첩>, 선조가 그 화첩을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에게 선물한 일

-> 선조가 아니라 순조가 매형인 홍현주에게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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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한국 현대미술
정하윤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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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신간이 나왔을 때 도서관에 신청했던 책인데 이번에서야 읽게 됐다.

표지 디자인은 다소 맥빠지고 촌스럽지만 내용은 참 좋다.

다소 현학적이고 어려울 수 있는 한국 근현대 미술가들 소개를 흥미롭게 읽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고 불리는 고희동부터 현역으로 활동 중인 이불, 서도호, 강익중 등 중견 미술가들까지 30인의 유명 화가들이 소개된다.

이중섭, 박수근, 이응노 이 정도까지는 직관적으로 공감이 되는데, 1970년대 이후 추상 미술부터 80년대의 설치미술로 넘어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어느 부분에서 감동을 느껴야 하나 여전히 모호하고 말 그대로 지적 유희라는 생각이 든다.

민중 미술가로 소개되는 오윤이나 신학철 등의 예술론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예술에, 특히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민족주의라는 말이 여전히 생명력이 있을까?

철지난 자본주의 비판론 같아 공감하기 어려웠다.

소비 사회를 풍자하면서 자신들은 최첨단 소비 생활을 영위하는 모순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예술도 결국은 문화 엘리트들이 대중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닐까?

제일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현대미술은 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는 점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예술이 될 수 있는데, 그럼에도 관람객에게 시적 감흥을 일으킬 수 있어야 예술로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도판이 다소 어두운 색감이라 아쉽다.

<82년생 김지영>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2017년에도 남성이 100만원을 받을 때 여성은 68만원을 받는다고 비난하는 부분에서는 공감이 참 어려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천정이 여전히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100만원을 받는 사람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68만원을 받는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고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을 좀더 즐기기 위해서는 직접 관람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테니, 한국 미술계의 규모가 더 커져서 좋은 전시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


<인상깊은 구절>

16p

고희동은 일본으로 유학가지 전에 한국에서 전통화를 배웠거든요. 게다가 문인 집안의 끝자락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성장 배경에서 고희동은 '문인화로서의 그림'이라는 개념을 먼저 정립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고희동은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관리 생활을 버리고 현실도피책으로 그림을 시작했어요. 마치 옛 선비들이 혼란한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시서화에 몰두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고희동이 교육받은 서양화는 손의 기술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서양화에서 그림은 정신이 아닌 기술, 화가는 문인이 아닌 장인에 가까웠습니다. 고희동은 여기서 혼란을 겪으며 서양화를 그만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81p

현대미술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아름답지도 않고, 도대체 뭘 감상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요. 현대미술이 우리의 고정관념 속 미술과는 다른 점이 많지요

 그것은 현대미술이 '미술의 확장'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재료도 이전과는 다른 것을 쓰고, 형식도 과거와는 달리해서 '미술'이라는 틀을 계속 깨는 것이 현대미술의 주된 흐름이었습니다.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이 아닌 설치, 퍼포먼스, 비디오와 같은 새로운 매체를 활용한 것이지요. 이런 시도가 가끔 지나치게 개념적으로 흐르면서 시각적인 감흥을 기대하는 대중으로부터 미술이 멀어지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이승택은 시각적인 요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붉은색 천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휘날리는 모습은 분명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미술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어 하는 우리의 기대에 부응합니다. 바람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감상이 가능하니까요.

 이승택의 작품은 미술사적 의의가 있으면서도 보편적 감성을 건드리고, 개념적이면서도 감각적입니다. 

199p

단색화 화가들도 한국적인 미술을 추구했습니다. 그렇지만, 단색화 작가들은 여백, 흰색, 수양, 정신성과 같은 보다 엘리트적인 전통에서 한국성을 찾았던 반면, 오윤과 같은 민중미술가들은 불화, 탈춤과 같은 민중의 문화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점이 큰 차이점입니다. 민중미술가들은 민중과 함께 호흡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사람들은 코카콜라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받고 괴로워합니다. 요괴들은 '맛기차', '비빔면', '아아차'와 같은 소비사회의 제품을 소비하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오윤이 이를 통해 전달하려는 것은 명확합니다. '외국자본의 제품이 판치는 1980년의 한국 사회는 사람을 괴롭게 한다. 그것은 마치 지옥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사회의 제품들을 누리고 즐기면서 살고 싶어한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민중을 자기들 멋대로 재단하고 정의내리려는 선민적인 사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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