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명작 100선 - 유럽 5개국 10대 미술관에 소장된
김상근 지음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기대했던 제목보다는 임펙트가 약해 아쉽다.

서점에서 보고 읽고 싶은 목록에 올려놨던 책이다.

표지 디자인도 좋고 무엇보다 도판이 화려하다.

연세대학교 신학 교수라는 저자의 약력도 전문적인 느낌이 들어 좋았는데 역시 전공자가 아닌 애호가의 한계가 있는 책이다.

가벼운 감상문 수준의 유럽 미술관 관람기가 범람하는지라 이 책 정도만 돼도 훌륭하긴 한데 그림 자체에 대한 설명보다는 관련 지식들을 적당히 버무린 수준이라 아쉽다.

유럽 5개국,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오스트리아의 유명 미술관들의 작품들을 선정해 르네상스라는 시대 배경과 함께 기술하고 있다.

독일이나 네덜란드, 벨기에 등 북유럽 르네상스가 빠져 아쉽다.

뜬금없이 보이는 삼성이나 미국에 대한 적대감은 공감이 어려웠다.

저자는 메디치 가문을 조건없는 예술 후원자로 설명하는데 얼마 전에 읽은 <상인과 미술>, <르네상스 미술과 후원자> 등에 따르면 위대한 로렌초 역시 오늘날의 삼성 일가와 다름없이 부의 과시, 재산 형성 등을 목적으로 예술 작품들을 사들였다.

메디치 가에 빗대어 삼성을 비난하는 것은 피상적인 평가로 보인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미남 미녀가 많다는 부분은 좀 의아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주걱턱으로 대표되는 기묘한 얼굴이 특징인데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외국에서 번역된 미술관 작품 소개책들은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 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정도 수준은 유지할 수 있는 우리나라 책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인상깊은 구절>

11p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초대교회의 공의회는 성모에게 "하나님의 어머니"란 호칭을 부여하였다. 예수가 하나님이므로, 예술을 낳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마리아를 신격화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다.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다가 생긴 확장논리였다. 

348p

사실 <쾌락의 동산>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것은 남녀의 무분별한 성적 접촉과 탐욕의 추구였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나는 보스를 좀 더 보수적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가 살았던 16세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과격한 표현으로 성적 타락을 경고해야만 하는 막가는 사회는 아니었다. 중세적인 절제가 남아있던 시대였으며 여전히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맹위를 떨치는 때였다. 보스의 고향인 네덜란드에서는 전체 인구의 단 1%만이 라틴어를 이해하는 성직자들이었으며 또 다른 1%만이 귀족으로 생활했다. 나머지 98%는 모두 중세적 신앙을 간직하거나 종교개혁자들의 새로운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였다. 그래서 나는 보스의 <쾌락의 동산>을 어떤 과격한 신조를 내세우기 위한 선전 포스터가 아니라 성서의 내용, 특별히 <잠언>에서 언급되고 있는 도덕적 삶에 대한 교훈으로 이해하고 싶다.

350p

정면으로 관람객을 응시하는 이 유명한 초상화를 신성모독의 징표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당시에 북유럽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 사는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뒤러는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그림으로써 자신의 경건한 신앙심을 표현한 것이다.


<오류>

13p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에게 시집 온 밀라노의 공주는 별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줄줄이 딸만 여덟을 낳았기 때문에

-> 몬테펠트로의 부인인 바티스타 스포르차는 딸 여섯을 낳고 죽기 직전 아들 구이도발도를 낳았다.

17p

코시모의 아들이었던 조반니 데 메디치 (1421~1463) 혹은 피에로 데 메디치 (1449~1469)로 추정된다.

-> 코시모 데 메디치의 큰 아들 피에로는 1416년 생이다.

71p

교황 레오 10세의 조카였으며 나중에 자신도 역시 교황 클레멘스 7세로 등극하게 되는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 클레멘스 7세는 레오 10세의 조카가 아니라 사촌이다.

241p

루돌프 2세는 삼촌이자 동시에 형제가 되는 펠리페 2세가 통치하던 에스파냐에서 성장했다.

-> 펠리페 2세는 루돌프 2세의 외삼촌이고, 루돌프 2세의 누나인 안나가 펠리페 2세와 결혼했으니, 형제가 아니라 매형이다.

306p

147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3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2세가 결혼함으로써~

-> 페르난도 3세가 아니라 페르난도 2세이다.

307p

스페인을 상속받고 나중에 포르투갈까지 통치하게 되는 펠리페 2세는 아버지와 이모의 예술적 취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 아버지 카를 5세의 여동생인 헝가리의 마리아를 가리키므로 이모가 아니라 고모이다.

332p

널리 알려져 있는 귀도 레니의 또 다른 명작은 <베아트리체 첸지의 초상화>이다.

-> 이 작품은 귀도 레니가 아닌 그의 제자 엘리자베타 시라니의 작품으로 판명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라의 고분문화와 여성
김선주 지음 / 국학자료원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역시 논문을 바탕으로 한 책들은 신뢰도가 높고 주제에 대한 명확한 근거와 논리적 추론이 뒷받침 되어 흥미롭다.

본문에 소개된 실측 자료들은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기승전결이 명확하고 왜 유독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책이다.

제목을 좀더 흥미롭게 바꾸고 일반 독자를 상대로 쉽게 쓴다면 널리 읽힐 수 있을텐데 아쉽다.

딱딱한 제목보다는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 이런 식의 제목을 달고 교양서로 다시 나오면 좋겠다.

저자가 여성학자라 그런지 신라에만 여왕이 존재했던 사회적 배경을, 고분 양식의 변화를 통해 추정한다.

오탈자가 많은 부분이 아쉽다.

편집자의 세심함이 부족한 듯하다.


1) 마립간 시기의 적석목곽분에는 피장자의 성별을 구별할 수 있는 부장품이 많지 않다.

금관은 오히려 여성의 추정되는 무덤에 많고, 반지나 귀걸이 같은 장식류와 마구류는 성별에 상관없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많이 매장되어 있다.

무구류는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흔히 보이는 반면, 장식류와 마구류는 일종의 주술적 도구로써 높은 지위자들의 위세품으로 작동했을 것으로 본다.

금관이 제사장 기능을 하는 여성에게 부장됐다는 가설이 흥미롭다.

저자는 혁거세와 함께 알영을 二聖 으로써 받드는 문화나, 원화 제도 등을 통해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활동할 여지가 있었다고 본다.

그런 배경에서 여왕의 즉위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적석목곽분에서 석실분으로 넘어오면서 합장이 가능해지는데, 이 때도 비슷한 시기의 고구려와 백제가 부부장이 중심인데 반해, 신라에서는 다인장이 유행했다.

석실분은 추가장이 가능했기 때문에 가족으로서의 승계 의식이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추가장이 불가능한 적석목곽분 시대가 씨족 사회라는 공동체 의식을 기반으로 했다면, 그 후 왕권이 강화되면서 종족이 해체되고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분화되어 묘지의 형식도 다인장을 할 수 있는 석실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백제나 고구려처럼 부부가 합장을 하는 것보다 여러 가족이 함께 묻히는 다인장이 주가 됐고, 오히려 배우자는 원래의 친족이 있는 곳으로 귀장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좀더 확인이 필요할 것 같은데, 어쨌든 저자는 신라에서 부계 중심의 출계 의식이 명확하지 않았고 이런 배경에서 여왕의 즉위가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2) 진흥왕은 7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했으나 어머니 지소태후의 섭정을 통해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신라에서는 여성의 공적 활동이 권위를 갖고 있었으나 통일기에 유교적 전통이 강화되면서 성별 분업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로 바뀐다.

혜공왕 역시 7세의 나이로 등극하여 모후 만월부인이 섭정하였으나 피살당했고 진성여왕 역시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해 신라 멸망을 가속화 시키고 말았다.

지소태후나 선덕여왕, 진덕여왕 등이 최고 통치권자로서 권위를 가진 반면, 후대에는 사회적으로 부정시 되면서 개인의 역량 미달도 있었겠으나 통치자로서 실패하는 배경이 된다.

진흥왕이 어린 나이에 법흥왕의 아들도 아닌 외손으로서 즉위하여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군사적 배경으로 저자는 내물왕계의 후손인 이사부를 든다.

신라 최초로 병부령에 임명된 이사부가 진흥왕과 지소태후를 후원했고, 습보 갈문왕의 후손인 이차돈 역시 법흥왕 대에 왕실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내물왕계에서 분화되어 지증왕을 배출한 습보갈문왕계가 왕실 후원 세력이었다는 주장이 신선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양 문화사 깊이 읽기 우리 시각으로 읽는 세계의 역사 1
서양사학자 13인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이다.

여러 명의 학자들이 모여 서양 문화사에 대한 다양한 주제들을 기술한 책이라 깊이가 있고 무척 흥미롭다.

대학에서 수업 교재로 이용할 수 있게끔 따로 정리해 뒀다고 한다.

맨 앞 부분의 블랙 아테나는 미케네 그리스인의 기원이 바로 이집트인이라는 주장이라 신선하면서도 학계에서 얼만큼 받아들여지는지 궁금하다.

그리스 신화가 곧 이집트와 페니키아 등에서 건너온 조상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스탈린의 폭력 정치가 단순히 그가 미치광이 살인마여서가 아니라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산업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국가의 힘을 절대화 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견해가 기억에 남는다.

그에 동조한 집단이 바로 중간 인텔리겐차들인데 전문적 관료들로 양성했으나 실력보다 당파성을 앞세웠기 때문에 비효율성을 피할 수 없어 결국 소련은 망하고 만다.

이런 주장에는 깊이 동의하지만, 맨 마지막에 미국 때문에 지역 분쟁이 악화됐다는 주장은 뜬금없다.

잘 나가다가 느닷없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는 식의 결론이라 황당하다.

중세 신학의 발전이 근대과학 혁명을 견인했드는 주장도 인상적이었다.

산업화가 아무런 배경 없이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의 발견 만으로 갑자기 일어났던 게 아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로 보는 영국사회와 문화
최영승 지음 / 석당(동아대학교출판부)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재미없는 제목과 표지 디자인과는 달리 내용은 아주 알차다.

그런데 솔직히 저술이 아니라, 거의 다 번역한 건 아닌지 의심이 많이 된다.

이를테면 

136p

"노년기에 접어들자 엘리자베스와 벌리는 인지능력이 저하되면서 더 현명하지 못해 정책과 업무 결정을 하는데 있어 더 부주의하고 더 느려졌다. 잉글랜드는 의회에 동의로만 수행될 수 있는 세금 개혁이 필요했다. ... 치안판사가 지불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인기 없는 세금을 거두어야 할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밑줄 친 문장 같은 수동태의 어색한 부분들이 책 전반에 걸쳐 아주 많다.

번역서라면 또 이해를 하겠는데, 명백히 저자가 있고 더군다나 이 분은 전공 교수가 아닌가?

저술과 인용은 명백히 다르며, 출처 표기를 분명히 해야 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철저한 저자를 많이 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영국이 프랑스와 다르게 시민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명예혁명 즉 일종의 의회 쿠데타를 통해 입헌군주제에 성공하고 최고의 국가로 성장했는지 사회적 배경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16세기 이후 헨리 7세부터 스튜어트 왕조에 이르기까지 부의 핵심이 바로 무역에 있고 섬나라로써 국가가 상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강력한 해군이 필요함을 일찍 깨달았다는 점이 놀랍다.

스튜어트 군주들이 과학적 실험과 합리주의 정책을 왕립 학회 등을 통해 지원했다는 사실도 놀랍다.

뉴턴이 갑자기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게 아니었다.

사회적 분위기가 특히, 지배층에서 후원했기 때문에 창의력이 만개했던 것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부를 증강시키고 삶을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실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성리학이라는 정신적 가치에만 매몰됐기 때문에 구체제의 일원으로 몰락하고 말았고, 대항해 시대 이후의 영국 지도자들은 눈에 보이는 발명품과 과학적 합리주의를 지지했으니 결국 나라가 부강해졌던 것이다.

영국의 의회제도나 정당 정치가 조선 시대의 신권론과 비슷하다고 서술한 책도 봤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명백히 다른 개념임을 깨달았다.

조선은 대한제국 성립시에도 여전히 고종이라는 한 절대 군주의 전제국가였고, 영국의 의회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회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지는 오늘날의 민주국가의 원형이었다.

좋은 대목들이 너무 많아 1/3은 옮겨 적은 것 같다.

유익한 독서 시간이었다.


<오류>

127p

제임스 4세, 제임스 5세, 그리고 그녀의 사촌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에 의해 처형된 메리

->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 1세의 사촌이 아니라 5촌 조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왕실의 책봉의례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1
신명호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루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생각보다 흥미롭고 유익했다.

역시 본격적인 연구자들의 저작은 역사를 움직이는 내면의 원리들에 대해 잘 짚어준다.

자세한 의례 절차는 어렵기도 하고 지루해서 많이 건너 뛰었지만 책봉와 봉작이라는 제도가 관료제와 더불어 조선 시대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새롭게 알게 됐다.

단순히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외교적 절차가 아니라 대외적인 승인은 물론 국내에서도 책봉시 받은 교명과 금보 등을 통해 독보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공신과 왕족들을 봉작하였다.

봉작을 받은 이들은 세습되는 특권과 경제적 부를 향유하면서 조선을 받드는 울타리가 됐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명나라가 세워진 후 공민왕이 자청하여 명의 제후국으로서 책봉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공민왕이라고 하면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나라를 세우려 한 왕이 아닌가?

원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니 간섭에서 벗어나야 하고, 명나라는 중화의 나라니 자청하여 제후국이 되려 한 것인가?

역사책에서 흔히 보는 당당한 국왕의 모습이 전혀 아니고, 오늘날 후손들이 생각하는 외교적 측면의 사대는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4p

역사적인 측면에서 조선왕조 500년을 드러낼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일까? 필자의 소견으로는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성리학적 유교문화와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체제가 아닐까 싶다.

12p

주 대와 춘추시대의 봉건제도 입각한 봉작제에서는 의례가 매우 중요하였다. 사실상 독립국의 통치자인 제후들을 평화적으로 연대, 협력하게 만든 매개체가 바로 의례화된 서열로서의 봉작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례>에 수록된 의례 중의 많은 부분이 봉건 제후들의 연대, 협력에 필요한 의례였다.

 한국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통치자들이 각각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을 거행함으로써 조공, 책봉 체제에 편입하였다. 삼국시대의 통치자들은 대외적으로 중국 황제에게 국왕으로 책봉되었고, 그것에 입각하여 대내적으로 왕족과 공신들을 봉작하였다. 

 조선시대의 봉작제와 책봉의례는 단순히 양반관료 체제를 보완하는 부차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국왕의 정통성은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으며, 나아가 조선왕조의 핵심 세력인 왕족과 공신들을 포섭, 예우하던 제도 역시 봉작제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봉작제와 책봉의례는 관료제와 함께 조선왕조를 규제한 가장 강력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27p

"우리 중국은 강상이 있어 역대의 천자가 서로 전하여 지키고 변경하지 않는다. 고려는 산이 경계를 이루고 바다가 가로막아 하늘이 동이를 만들었으므로, 우리 중국이 통치할 바는 아니다." 

77p

조선과 명의 조공, 책봉관계가 조선의 요청으로 시작하고, 이에 명이 반응하고, 또다시 조선이 반응하는 연속적인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조선과 명의 조공, 책봉제도라는 것은 조선에서 책봉을 요청하는 조공 사신의 파견, 그에 따라 명에서 조선국왕을 책봉하는 조사 또는 칙사의 파견, 이후 조선에서 명의 조사 또는 칙사 파견에 대한 사은사의 파견 등이 연속적올 맞물려 있는 의례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명에서 조사 또는 칙사를 파견하여 조선국왕을 책봉하는 의례는 기본적으로 명에서 제정한 의례를 기준으로 거행되었다. 즉 명은 조사 또는 칙사를 파견할 뿐만 아니라 피책봉국에서 거행해야 할 조사 또는 칙사의 영접의례 및 책봉의례까지 <대명집례>에 규정하였던 것이다.

114p

중국에서 봉작제의 형식과 기능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상관없이 봉작의 대상자는 왕족과 공신에게 한정되었으며 봉작에 수반되는 경제적, 형사적 특권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는 봉작제가 왕족과 공신 등 왕조의 핵심 세력들을 포섭하고 봉작에 따른 기득권을 인정해 줌으로써 왕조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제도로 이용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20p

종친, 부마, 국구는 왕의 가까운 친족이라는 점과 함께 왕권에 직접 도전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왕실 봉작제는 이들을 봉작함으로써 이들에게 최고의 명예와 부를 허락하는 대신에 사환과 정치활동은 철저하게 금하여 왕권을 안정화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비되었다고 하겠다.

175p

빈에게는 비록 왕비에 비해 격하된 임명의례를 거행하였지만 다른 후궁들에 비해서는 임명의례를 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특권이었다. 빈 이하의 후궁들은 임명의례 자체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빈이 임명의례를 통해 교명을 받았다는 것 역시 커다란 특권이었다. 물론 빈 이하의 후궁들은 교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 간택빈의 임명의례는 왕비 바로 아래 위치이자 후궁 중 최고 위치인 빈의 위치를 분명하게 드러낸 의례라고 할 수 있다.

202p

왕자 봉작 이후에 교지와 녹봉 그리고 공상과 전결을 받는 것은 왕자 봉작이 일종의 관료 임명으로 간주되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따라서 대군이나 군 또는 공주, 옹주는 비록 어린 나이에 봉작되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봉작 이후에는 독립적 생활단위인 房 으로 간주되었다. 정식으로 봉작된 후 방을 구성하면 그에 상응하여 공상과 전결을 지급했던 것이다.

219p

지방의 군현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많았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지방 군현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은 현지의 향리들이었다. 고려시대 군현의 잡공 즉 상공과 별공 및 삭선, 별선 등을 징수하여 중앙정부 또는 궁중에 상납하는 책임 역시 군현의 향리들이 지고 있었다.

220p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군현 향리가 잡공을 징수하여 중앙 각사에 상납하면, 이를 중앙 각사에서 궁중에 공상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모든 군현에 수령이 파견됨으로써 고려시대의 잡공을 계승하는 공물 징수와 상납을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책임지게 되었다. 

230p

형평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한양도성을 무단으로 이탈하지 말아야 하는 규정을 어긴 종친보다 이들을 서울로 돌려보내지 못한 수령이 더 중벌을 받도록 한 것이다. 이는 물론 지방 수령과 종친을 극단적인 대립관계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들이 공동이익에 근거한 일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 장치였다.

341p

을미개혁으로 각 전궁에 소속되었던 환관과 궁녀는 거의 대부분 도태되고 그 대신 기왕의 환관과 궁녀의 10% 정도에 불과한 관료들이 배속되었다. 이는 기왕의 환관과 궁녀를 보유하던 조선왕실 구성원들의 권리가 을미개혁을 통해 크게 위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숫자가 줄었다는 측면에서의 권리 위축이 아니라 배속된 사람들의 성격에서 나타나는 권리 위축이었다. 왜냐하면 각 전궁에 소속된 환관과 궁녀는 기본적으로 각 전궁의 주인에게 충성하는 존재지만, 관료들은 충성보다는 오히려 관리 또는 감독에 치중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367p

조선시대의 왕비 책봉의례에서는 고려시대의 왕비 책봉의례에서 사용되지 않던 명복이 추가로 사용되었다. 왕비의 명복은 근본적으로 명에서 받은 것이므로 이를 책봉의례에 사용한 것 역시 조선왕실의 의례가 제후국 체제에 보다 충실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명의 황자와 황녀에 대한 책봉의례가 있음에 비해 조선시대 왕자와 왕녀에 대한 봉작의례가 없었던 이유는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왕실이 명과 동일하게 왕자와 왕녀를 책봉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왕자와 왕녀의 봉작 자체가 책봉의 효과를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책으로 작위를 임명하던 대상은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에 한정되었다. 나머지 후궁, 왕자, 왕녀는 비록 왕실 작위를 받는 대상이기는 했지만 책으로 임명하지 않고 교지로 임명했다. 이는 왕의 배우자 중에서 처첩을 구별하고 자녀들 중에서 장자와 중자 그리고 적자와 서자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372p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에도 황실 구성원들은 환관과 궁녀를 받지 못하였고, 나아가 진상과 공상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기의 황실 구성원들은 책봉된 후 인적 측면과 물적 측면에서 큰 권리를 향유하였다.

 대한제국기 친왕의 물적 권리를 오히려 조선시대 왕자군의 물적 권리보다 더 커졌다. 의친왕은 친왕에 책봉된 후 대략 40만 평의 토지를 확보했는데, 이 규모는 의친왕이 의화군에 책봉된 후 확보한 42만 평과 근사한 규모였다. 따라서 의친왕은 의화군에 책봉된 후 42만여 평, 친왕에 책봉된 후 40만여 평 합하여 82만여 평에 달하는 막대한 토지를 확보했다고 할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