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의 함정 - 중산층 가정의 위기와 그 대책
엘리자베스 워런, 아멜리아 워런 티아기 지음, 주익종 옮김 / 필맥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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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는 책들은 유별나게 나의 감성을 깨우는 것 같다

어제도 이 책을 읽은 후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세상 살기 정말 만만치 않아...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맞벌이의 함정"이라...

왜 둘이 버는데 계속 빚을 지고, 사는 건 더욱 척박해지는 것일까?

정말 우리들은 신용카드가 주는 과소비에 취해 있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더욱 불행하게도) 저자들은 우리 사회가 "악덕 채무자 신화"에 속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우리가 지난 세대보다 조금 더 많이 쓰고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아주 조금일 뿐이다

두 사람이 함께 버는 소득에 비하면 소비가 크게 증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과소비 부분은 가정 경제가 어려워지면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실직, 질병, 이혼 등으로 한 사람의 소득이 사라질 때 절대 줄일 수 없는 고정 비용의 증가 때문에 많은 미국의 중산층 가정들이 파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정 비용을 차지하는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집값이다

땅덩어리 넓은 미국도 우리처럼 집값을 지불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우리나라가 강남에 입성하기 위해 허리가 휘도록 대출금을 갚아가는 반면, 미국은 시내를 떠나 교외의 주택지구로 나가기 위해 애를 쓴다

도심은 슬램화 되어 범죄가 들끓고, 무엇보다 가난하고 위험한 유색 인종들이 많아 공립학교 교육이 형편없기 때문에 부유하고 안전한 백인들이 사는 교외로 나가 자녀들을 좋은 학교로 보내기 위해 미국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소득 대부분을 집값에 쏟아 붓는다

더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한 부모들의 노력은 비단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강남 엄마"의 반대말이 "그냥 엄마"라고 하더니만, 미국 엄마들도 교육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대학을 나와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21% 정도 됐는데, 요즘은 97% 이상이 대학과 성공이 정비례 관계라고 믿는다

주립 대학은 받을 수 있는 학생 수가 한정되어 있고, 사립 대학은 등록금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미국 중산층들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좋은 학교에서 공부시키길 원한다

 

미국 공립 교육이 사립에 비해 얼마나 형편없는가는 여러 연구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도심의 학교들은 총기 난사 등으로 대표될 정도로 자녀들에게 위험하기까지 하다

당연히 부모들은 교외의 안전한 주택 지구로 옮겨 자녀들이 좋은 학군의 학교로 다닐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교외 지역의 주택들은 한정되어 있고, 수요는 늘어나기 때문에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건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여기서 맞벌이들이 함정에 빠지게 된다

혼자 벌 때는 비싼 교외 주택을 갖는 걸 상상도 못 하다가, 한 사람이 더 벌게 되자 그 소득을 집값에 쏟아 부을 수 있게 된다

입찰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집만 맞벌이를 하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집이 둘 다 벌기 때문에 다들 입찰 경쟁에 뛰어들 수 있다

당연히 집값은 계속 오를 수 밖에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붉은 여왕의 세계가 나온다

이 곳은 워낙 빨리 돌기 때문에 부지런히 뛰어도 여전히 제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뛰지 않으면 그나마 제자리에도 못 있고 뒤처지게 된다

맞벌이 중산층들이 이 붉은 여왕의 세계에 빠져 있는 셈이다

 

저자들이 내 놓은 해법은 학군제를 폐기하고 원하는 학교에 보낼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공교육의 질을 높히고 프리 스쿨을 공교육화 시키라고도 한다

조기 교육 열풍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게 아닌 모양이다

미국도 교육 개념이 바뀌어 7세부터 시작하는 공교육은 너무 늦기 때문에 다들 프리 스쿨에 미리 보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유치원 개념의 프리 스쿨에 엄청난 사교육비가 쏟아지고 있다

또 대학 등록금도 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은 방만한 경영을 지양하고 스포츠 팀 운영처럼 돈이 많이 드는 일은 과감하게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해마다 등록금 인상을 놓고 진통을 앓는 것 역시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셈이다

기부금 입학은 사립 대학 운영에 필수라는 말이 실감난다

대학 총장의 능력은 얼마나 많은 기부금을 모아 오느냐로 결정된다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제일 우스운 건 이 모든 문제들의 현실적인 해결책이 자녀를 안 갖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난 세대까지만 해도 자녀는 집안 경제의 노동력이 되고,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는 보험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자녀가 없으면 안전한 노후를 보낼 확률이 늘어나고, 자녀를 키우는 가정은 무자녀 가정보다 파산할 확률이 세 배나 커진다

자녀가 주는 이득을 예전에는 개인이 취했으나, 이제는 세금을 내고 노인 인구를 부양하며 나라를 지키는 등의 이득을 사회가 갖게 된다고 분석한다

자녀는 이제 품질 보증서가 없는 비싼 소비재가 되어 부모를 파산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인이 되버렸다

자녀 양육의 책임을 계속 개인에게만 돌리면 현명한 선택을 하려는 개인들은 요즘처럼 출산률 저하로 대응하는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출산률 저하는 여성들의 스트라이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중산층의 strike로 그 범위가 넓어진 셈이다

사회가 이런 식으로 자녀를 안 낳는 가정에게 상을 주고 (경제적 이득), 낳는 가정에게 벌을 준다면 (파산과 같은 경제적 불이익) 출산율은 계속해서 저하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맞벌이를 하기 전 아내의 역할은 가정 경제의 안정망이었다

남편이 실직하면 곧 아내가 돈벌이에 나설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이 말이 통용될지는 의문이지만) 그런대로 가정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는데, 요즘처럼 둘 다 버는 시대에 한 명이 실직하게 되면 두 사람의 소득에 맞춰 고정 비용을 지출하던 가정은 파산의 위협에 처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또 아내는 가족이 아프면 간호사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둘 다 직장에 나가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아프면 돌보는 사람을 돈으로 살 수 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이것 역시 가정 경제에 치명타를 안기게 된다

그러므로 맞벌이 가정이 안전한 경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고정 비용의 지출을 줄이는 게 최선이라고 진단한다

고정 비용이란 일시적인 사치나 과소비가 아니라 소득이 줄어들어도 절대 줄일 수 없는 모기지 대출금 같은 것을 말한다

두 사람의 소득을 기준으로 경제 계획을 세우면 안 되고, 한 사람의 소득은 안전망으로 남겨 두는 게 최선이라고 한다

또 국가에서 제공하는 의료 보험이나 실험 보험 등 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장애 보험이나 간호 보험 등 가능하면 보장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보험에 미리미리 가입하라고 충고한다

(간호 보험은 새로운 개념이라 신기했다 연로한 부모가 아플 때 당신이 직장을 팽개치고 간호하러 갈 수 없다면 당장 간호 보험에 가입하라고 한다)

36개월 자동차 할부보다 60개월 장기 할부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빨리 간파하라고 한다

고정 비용이 많을수록 가정 경제는 안전망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해결책은 중산층들이 이익 집단으로서 단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은행들은 이자율의 규제를 없애기 위해 정치인들에게 끊임없이 정치 자금을 헌납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광고를 내보낸다

이제 중산층들도 단결해서 대학 등록금 인상을 막고, 파산 신고를 보다 쉽게 할 수 있게끔 법을 고치라고 정치인들을 압박하라고 한다

은행에게는 채무자에 불과하지만, 정치인에게는 한 표를 가진 유권자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한 해결책이 전부 현실적이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기한 문제들은 분명히 중요하고 간과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것들이다

특히 개인이 과소비를 하기 때문에 그들은 빚에 허덕이고 있다는 식의 표면적이고 쉬운 도덕주의적 해결책을 지양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오히려 소비를 줄이면 내수가 침체된다는 건 기본적인 경제 상식이라고 한다)

하버드 대학에서 파산법을 강의하는 법대 교수인 저자와 그녀의 딸이 함께 쓴 이 책은 쉽지만 날카로운 문제 제기로 뉴스위크지에 의해 10대 경제서로 선정됐다

우리 나라 현실에도 아주 적합한 지적들이 많기 때문에 읽어 보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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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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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새벽까지 책을 읽느라 아침에 늦잠을 잤다

도서관에서 세 권을 빌려 왔는데 한 권만 읽으려다 다음 책이 궁금해 잠깐 본다는 게 다 읽어 버렸다

그만큼 저자의 기술 능력이 뛰어난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게끔 만드는 얘기 솜씨가 대단하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 단국대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학위 논문이 광해군인만큼 시원스럽게 그 시대를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제목이 "광해군"이라 요즘 실리 외교 전문가 어쩌고 하면서 비운의 왕이었다는 식으로 미화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

광해군의 진면목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역사, 정치 이야기를 마치 소설 쓰듯 재밌게 풀어내고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알고 있는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된 나라를 살리고, 명, 청과의 관계에서 실리 외교를 추구한 한마디로 개혁적이고, 현명한 임금이었다

폐모살제 같은 유교적 업보를 지녔으나, 세조 역시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것처럼 그것이 폐주가 된 치명적인 하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개혁적이고 실리를 추구한 왕이 명분론자들에게 쫒겨났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정치 상황을 살펴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의외로 광해군 역시 명나라에 많은 집착을 보인다

여태까지 알고 있기로는 명나라의 국운이 다한 걸 알고 명을 배척했다고 믿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명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하루 아침에 여진족에게 무너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200백년 동안 명을 섬긴 조선으로서는 명이 망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광해군 역시 기본적으로 명을 섬기면서도, 무리하게 파병 요구를 하자 국내 사정을 봐 가면서 가능하면 미루려고 했을 뿐이다

재야 유림들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해 준 명에 대한 보답을 소홀히 한다고 당장 파병하라고 요구했지만, 정치 일선에 있지 않는 사람들의 명분일 뿐이었다

명을 배신했다고 반정을 한 세력 역시 명의 파병 요구를 거절했을 정도로 현실과 이상은 늘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명의 파병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광해군은 결국 임진왜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1만 병력을 모아 요동으로 보낸다

이 파병은 백성들의 삶을 대단히 피폐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무리한 궁궐 확장 공사와 더불어 대대적인 원망을 받게 된다

인목대비 유폐와 중립 외교가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게 했다면 궁궐 건립과 파병은 민심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래도 광해군은 전투에 패배한 후 감금된 총사령관 강홍립의 밀서를 받으며 청의 정세를 관찰한다

강홍립이 일부러 투항했는가에 대한 진위는 아직도 가려지지 않는데, 어쨌든 우리 군사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싸울 필요는 없다는 식의 언지를 광해가 내렸음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포로가 된 강홍립의 가족을 국내에서 보호해 줄 필요가 없었을테니까

 

모문룡이라는 사기꾼 얘기는 명나라 환관들의 은 요구와 더불어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명나라 장수였던 모문룡은 청에 패한 뒤 요동을 정벌하겠다고 남은 군대와 유민을 이끌고 조선 땅으로 들어온다

그 뒤 무려 8년 동안이나 조선에 눌러 앉아 걸핏하면 군량미와 자금을 요구한다

심지어 인조가 집권한 후에도 말이다

도대체 정부에서는 왜 모문룡에게 끌려 다녔던 것일까?

은혜를 베푼 나라의 장수이기 때문에?

아니면 청나라를 치기 전 오히려 조선을 먼저 칠까 두려워서?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단순히 외교 관계가 아니라 마음 속으로부터 내제화 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필요하면 취하고 필요없으면 버리는 태도는 유학을 숭상하는 조선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까?

아마도 17세기 조선인들로서는 중원을 지배하는 명이 여진 같은 오랑캐에게 망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 망해 가는 명나라를 끝까지 받들어 온 나라가 청나라 군대의 쑥대밭이 되게 만들었겠는가?

 

광해군이 성군은 못 되더라도 연산군처럼 왕위에서 패악의 정치를 한 것도 아닌데, 왜 왕위에서 쫓겨났는지에 대한 약간의 답을 얻은 기분이다

그것은 그의 지지 기반이 약했다는 것이다

즉 광해군은 비록 왕이었지만 정치 기반은 소수 집단에 불과했다

이황이나 이이처럼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서인 대신, 경상도 일부에서 명망을 얻는 조식을 받드는 북인 세력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여론에서 밀렸고 아버지 선조가 세자의 위치를 흔들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기반도 약했다

말하자면 세자 때부터 그의 지지 세력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였던 것이다

그럴수록 정치력을 발휘해 자기 편으로 끌어 들여야 하는데 유약하고 소심한 광해군은 자신을 떠받드는 소수 정치 세력에 의존해 자꾸 무리수를 두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인목대비 폐위 사건이다

광해가 세자 시절 목숨을 걸고 그를 지지했던 정인홍이나 이이첨 같은 세력들은 집권 후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 그 때의 공을 내세우며 옥사를 일으킨다

인목대비를 유폐한 것이나 선조의 적자였던 영창 대군을 죽인 일 등은 격렬한 반대를 불러 일으켜 여론을 완전히 돌아서게 만들었다

더구나 광해군은 왕권 강화에 대한 집착을 궁궐 건축을 통해 드러냈다

전쟁 후 피폐해진 살림에 몇 개의 궁궐을 한꺼번에 지으려 들었으니 재정이 남아날 턱이 없다

급한 김에 사대부들에게까지 고통 분담을 요구하자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다

마치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증축 과정을 보는 듯 하다

 

어쨌든 광해군은 소수 세력의 지지를 받았고, 정치력 부족으로 다수파를 아우르지 못해 결국 실각하고 만다

후대로 갈수록 신하들의 입김이 세진 것은 인조 반정 이후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실각 후에도 무려 19년을 더 산 광해군은 복잡한 국내외 정세를 관망하며 다시 복위할 꿈을 꾸었을 것 같다

실제로 몇 차례 광해군을 복위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런 희망이 없었다면 재위 당시 병약했던 왕이 제주도 등의 험한 유배지에서 19년이 버티고 살 힘이 없지 않았을까?

광해군과 그의 시대에 관해 객관적으로 소설처럼 잘 풀어 쓴 책이라 무척 재밌다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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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이야기
임용한 지음 / 혜안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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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용의 눈물"이 한참 뜰 때 나온 책인데, 시류에 편승하는 일부 책과는 달리 수준있고 재밌는 역사 에세이입니다

저자는 목사이면서 역사학을 전공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인데, 글을 쓰는 솜씨가 아주 탁월합니다

야사 대신 실록을 근거로 삼으면서도 행간에 숨어 있는 왕들의 인간적인 이야기를 찾아 내서 독자들을 즐겁게 합니다

1권은 태조 이성계의 생애부터 8대 예종까지 이야기이고, 2권은 9대 성종부터 12대 인종까지 이야기입니다

1권에서는 특히 조선이 건국되기까지의 과정과,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2권의 압권은 역시 연산군 이야기죠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저자는 태종을 높게 평가하고, 세조는 깍아 내립니다

세조가 큰 아들이었을지라도 아버지 세종은 문종을 선택했을 거라는 식이죠

세조는 아버지 세종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합니다

 

이 책의 장점은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에 있습니다

제일 놀랬던 건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입니다

다들 조광조는 훈구파들에게 제거됐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적 사실을 꼼꼼하게 따져 보면 중종이 급진적인 조광조에게 질려서 훈구파를 이용해 버린 거라고 해석합니다

단종이 집권했을 때도 일반적인 해석과는 달리 정국은 불안정 하지 않았고, 김종서나 황보인이 전권을 휘두르지도 않았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단종에게 착실히 이양된 안정된 대권을 수양대군 개인의 야심 때문에 뺏었다고 보는 거죠

결국 수양대군이 등극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봉하면서 동맹 관계 유지를 위해 많은 권력을 나눠 주다 보니 훈구파라는 세력이 본격적으로 형성됐다고 봅니다

일찍 죽었기 때문에, 또 예종이라는 묘호 때문에 유약했을 것 같은 예종 역시 남이의 옥사를 일으킬 만큼 만만한 왕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래 살았으면 아버지 세조처럼 철권 정치를 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는 거죠

사육신 역시 방에 앉아서 명분만 앞세운 허술한 계획으로 단종 복위 계획은 실패할 수 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단종의 명을 재촉했다고 봅니다

 

3권이 나오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는데 책이 많이 팔리지 않아서인지, 아직도 감감무소식 입니다

읽어 본 역사 에세이 중 제일 재밌고 나름대로 수준 있는 책인데 홍보가 덜 되서 그런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웠어요

이번 기회에 한 번씩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조선 국왕들의 인간적인 면모가 흥미롭게 펼쳐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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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oma 2005-06-15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권 기다리는 사람이 저말고도 제 주위에 한 명 더 있는데... 메일이라도 보낼까봅니다. 진짜 관심많은 왕이 컴플렉스 덩어리 선조와 그 아버지 밑의 광해군인데...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 손자마저 죽이는 비정한 왕인 인조까지... 아흑...

ranoma 2005-06-15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박시백씨의 만화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한 번 보세요. 이 책과 이덕일씨의 책이 적절히 혼합된 듯한 느낌의 책입니다.

greentea 2006-10-18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척이나 3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판사에 전화해서 물어 보았더니 계획이 없다고 하더군요.
 
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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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다

처음 서점에서 봤을 때는 베르메르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표지를 장식한 그림은 "우유를 따르는 여인"과 더불어 무척 좋아하는 그림이었기 때문에 소설인지도 몰랐다

책을 편 후 한 번에 다 읽어 버릴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하다

간만에 본 흥미있는 소설이었다

 

책에 나온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무척 예쁘다

주인공 그리트, 카타리나, 프란스, 아그네스, 코넬리아 (빨간머리 앤이 갖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이름) 등등...

마을 이름인 델프트도 참 예쁘다

 

그리트는 타일공인 아버지가 사고로 장님이 되자, 돈을 벌기 위해 화가 베르메르 집에 하녀로 들어간다

하녀라고 하면 조선 시대 머슴과 주인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말로 치면 단순히 파출부 정도인 것 같다

그리트가 처음 베르메르 집으로 들어간 후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 무척 사실적으로 잘 묘사됐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사람들과 새로운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 긴장된 상태로 24시간을 보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손에 잡히듯 그려진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잘 해내면서 서서히 자기 자리를 잡아간다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기지도 보인다

먼저 일한 하녀 타네커의 시기심이라든가, 젊은 하녀를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 보는 안주인 카타리나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빨래가 깨끗하다고 칭찬을 하면 햇빛이 좋아서 잘 말랐다는 식으로 넘기는 것이다

사려깊고 분별력 있는 영리한 그리트의 모습이 작은 삽화들을 통해 잘 그려진다

 

그리트의 불행은 주인 베르메르의 그림 그리는 일에 빠져 든 것이다

영리한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구도 잡는 일이나 물감 만드는 일 등을 도와 주면서 점점 베르메르에게 빠져든다

어린 소녀에게 화가 베르메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영혼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청혼하는 푸주간집 아들 피터 대신, 다섯 아이의 아버지인 베르메르에게 마음을 주는 어린 그리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베르메르가 자신을 고용할 만큼 돈이 많은 남자라서가 아니라, 그가 그리는 예술의 세계를 그녀가 동경했기 때문에 마음을 뺏겼던 것이다

그럼에도 베르메르는 그리트를 단순히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영리한 하녀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일 외에는 남에게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 예술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문제는 그의 아내 카타리나가 그리트를 질투한다는 사실이다

하녀와 남편이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하녀가 남편의 그림을 돕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카타리나는 심한 질투를 한다

계속 돕다 보면 연애 사건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남편의 예술 세계에 전혀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지에 화가 나서일까?

 

가난한 그리트의 부모는 딸이 푸주간집 아들 피터와 연애하는 걸 환영한다

피터와 결혼하면 고기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고기를 먹기 위해서만은 아니겠지만, 가난하면 자식에게 바라는 것도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리트는 피터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베르메르를 동경하면서도)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피터를 거부하지 못한다

사는 건 늘 이런 식으로 사랑을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트가 베르메르의 모델이 되고, 카타리나의 귀고리를 빌린 사실이 알려지자 결국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집을 뛰쳐 나가게 된다

우습게도 아내의 귀고리를 가져 와 자신의 모델인 그리트의 귀에 걸어 준 베르메르는 그리트를 위해 단 한 마디 변명도 해 주지 않는다

마치 그리트가 직접 귀고리를 훔쳐 온 것처럼, 자신은 모른다는 식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태도가 아내가 원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귀고리를 훔치고, 주인을 유혹한 하녀가 되어 집을 뛰쳐나간 그리트는 델프트 시청의 광장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고심한다

피터의 청혼을 받아 들여 푸줏간집 안주인이 될 수도 있고, 다시 주인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할 수도 있고, 먼 도시로 떠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리트는 운명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당연한 얘기지만, 그리트는 피터와 결혼한다

10여 년 후 그리트에 대한 죄책감을 버릴 수 없었던지, 베르메르는 죽기 전 그리트에게 진주 귀고리를 남긴다

푸줏간 주인에게 진주 귀고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트는 전당포로 가지고 가 20길더로 바꾼다

15길더는 베르메르네 집에서 결혼 전 피터의 푸줏간에 진 빚을 갚는 걸로 치겠다고 생각하고, 나머지 5길더는 간직한다

내가 그리트였다면 나는 아마도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리트가 진짜로 사랑한 것은 베르메르라는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베르메르가 그려내는 예술의 세계였음이 분명하다

하루 종일 빨래더미와 설거지 할 그릇들에 치여 사는 그녀에게, 물감을 만들거나 구도를 잡는 일은 삶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을 것이다

 

한 편의 그림을 두고 이렇게 멋진 소설을 쓴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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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드디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었다

"드디어"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은 그 유명세에 비해 일본 작가라는 편견 때문에 읽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들의 책은 주로 실용서가 많은데, 그 내용이 조잡하다는 생각이 들어 별로 안 좋아한다

소설은  "실낙원"만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무라카미 외에는 한국에 뿌리 내린 작가가 없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접할 기회가 더 적었던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해변의 카프카"를 읽을까 했는데, 도대체 그가 유명세만큼 괜찮은 작가인지 궁금해 먼저 에세이집을 읽기로 했다

결론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역자 후기처럼 확실히 그를 대표하는 무국적성, 상실감 등등의 언어가 딱 들어맞는 책이다

제목도 너무 멋지다

"슬픈 외국어", 참 감각적이다

그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교환 교수로 4년간 있으면서 느낀 점을 쓴 에세이들인데, 확실히 작가의, 그것도 베스트셀러 작가의 기행문은 다르다

미국 사회를 보는 깊이가 있다고 해야 할까?

 

미국 문화에 젖어 산 세대지만, 또 기꺼이 외국 생활을 원해서 간 거지만 외국어는 외국어일 따름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외국어를 아무리 잘 해도 절대 모국어의 "자명성"을 가질 수는 없다

사실 내가 외국 나가서 살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는 까닭도 바로 그 모국어의 "자명성"을 외국어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명성"이라는 일본어가 우리말로 적당히 번역되지 않은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의미는 충분히 전달된다

이 나이에 영어를 아무리 잘 한다고 내 사고 체계가 영어식으로 바뀌지는 않겠지

한국어가 아니면 도저히 사유할 자신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 생활을 기꺼이 자처하는 하루키에게 영어는 유창한 실력과는 별개로 "슬픈 외국어"일 뿐이다

 

미국 대학 교수들의 스노비즘은 좀 의외였다

내가 생각하는 미국 교수들은 자유롭고 격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서부 쪽은 그렇다고 하는데 하루키가 있었던 동부 지역은 교수라면 이러이러 해야 한다는 격식들이 많았다고 한다

제일 웃긴 건 버드 와이저를 마시면 싸구려 느낌이고 교수는 하이네켄 같은 유럽 맥주를 마셔야 한다는 거다

물론 상표가 주는 이미지는 있을 수 있지만, 최고의 지성인 집단에서 맥주 따위로 인격을 논한다는 건 너무 우습다

차도 BMW 같은 걸 타고 다니면 역시 속물로 보일 수 있고, 옷 역시 아르마니 같은 걸 입으면 지성인 답지 않다고 생각한단다

스티븐 킹의 소설 대신 에이미 탄 등의 소설을 읽어야 하고, 케니 지 대신 클래식을 들어야 한단다

교수는 돈 대신 명예를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또 지성인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교양은 있어야겠지만, 틀에 끼워 맞추는 건 너무 억지스럽고 유치하다

그런데 하루키는 전통을 던져 버린 일본 교수들도 썩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미국 동부 대학의 교수들은 돈에 초연하고자 하는 제스쳐라도 취하는데, 일본 교수들은 그야말로 돈이 최고다는 걸 공공연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서구 사회에 완전히 정착됐다는 것도 알게 됐다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에서도 저자가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을 받을까 봐 대단히 조심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서 페미니즘이 공공연한 지배 이념이 됐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아내는 유명한 동양 남자들의 아내들처럼 남편을 support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미국인, 특히 미국 여자들에게 납득시키기란 대단히 어렵다고 한다

작품을 쓸 때 거의 아내와 공동 작업을 한다고 하면, "책에는 당신의 이름만 나오잖아요" 라고 반문한다는 것이다

대신 미국 여자들은 오노 요코를 support 하기 위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한 존 레논 같은 경우에는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고 한다

하루키는 여자도 자기 일을 가져야 한다는 일정한 틀 속에 끼워 맞추려는 페미니즘에 반발심을 드러낸다

벌써 이런 부작용이 생길 만큼 페미니즘이 성장했나 싶으니까 세월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다

물론 하루키의 생각에 나도 동의한다

개인은 그저 개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사회적 틀 속에 개인을 끼워 맞추려고 하면, 맞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늘 개인을 피곤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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