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밀밭의 파수꾼"은 "위대한 게츠비"처럼 고전의 위치를 확립했으면서도, 트렌드 소설처럼 인식된다

그래서 가끔 편집을 예쁘게 해서 출판되기도 한다

고전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현대적 감각을 지닌 재밌는 소설일 거라 기대했는데, 상당히 의외의 책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단 읽기는 쉽다

300페이지짜리 책인데, 세 시간 만에 다 읽었다

1인칭 독백 시점으로, 심리 묘사도 별로 없고 사흘 동안 일어난 일들을 그저 담담히 서술할 뿐이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퇴학 결정이 내려진 후 집에 통보가 오는 수요일 전까지, 집에 들어 가지 않고 며칠간 밖에서 지내는 얘기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었을 때 기분이 난다

특정 사건이 없이도 하룻동안 있었던 일들을 담담히 서술해 가는 그런 종류의 소설이다

이 작품이 인정받는 이유가 혹시 그런 묘사력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주인공 홀든은 벌써 네 번째 고등학교에서 성적 불량으로 자퇴하는, 그렇고 그런 놈이다

이 책이 발표된 게 1951년인데, 50년대 미국 고등학교는 성적이 나쁘면 자퇴를 시킨 모양이다

머리가 아주 나쁜 건 아닌데 (그의 형제들은 비교적 똑똑하다고 묘사된다), 공부에 큰 의욕을 안 보여 늘 낙제를 한다

그렇다고 깡패들과 어울리는 불량 학생도 아니다

불량 학생이 되기에는 몸집이 너무 왜소하다

 

확실히 우리 고등학생들과는 다른 점이 많이 나오는데, 일단 담배 권하는 사회라는 게 놀랍다

술은 스물 한 살이 되기 전까지 절대 안 되는데, 대신 겨우 열 여섯 먹은 주인공에게 담배는 허용된다

허용 정도가 아니라, 기차에서 만난 친구 어머니에게 담배를 권할 정도다

"위대한 게츠비"에서도 데이지가 손님들에게 담배를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단 우리 상식으로 보면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안 피우는 법이고, 더구나 여자들이 길거리에서 혹은 남자 앞에서 담배 피우는 걸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는데, 우리 정서와 상당히 다른 모양이다

마약 보다는 낫다고 생각되서 그런가?

 

변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특히 동성연애자가 변태로 등장하는데, 아마도 195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그럴 것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성적 취향으로 인정받는 추세지만 (요즘은 동성애를 공적인 자리에서 비난하지 못한다), 당시만 해도 변태적인 성향으로 받아 들이는 분위기였나 보다

참 깨는 이야기인데, 홀든이 퇴학 후 엔톨리니 선생님을 찾아 간다

그 선생님 댁에서 좋은 이야기를 듣고 잠자리에 드는데, 놀랍게도 선생님이 홀든의 머리를 은근히 쓰다듬는다

홀든은 그가 변태성욕자임을 깨닫고 밖으로 뛰쳐 나간다

혹시 남선생과 여제자 사이면 몰라도, 남선생과 남제자 사이에 이런 에피소드를 집어 넣다니, 더구나 엔톨리니 선생님은 홀든의 방황을 잡아 주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불경하기 이를 데 없는 설정이다^^

 

엔톨리니 선생님의 충고가 기억에 남는다

여러 학교를 돌아다니며 자기 삶에 열정을 갖지 못하는 홀든에게 그는 이런 충고를 한다

너는 바닥이 없는 추락을 계속하고 있다,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하는 환경에 처하기도 하는데, 너는 니가 처한 환경이 줄 수 없는 것만 찾고 있다, 너는 실제로 그것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니 환경이 절대 주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미리 체념해 버린다...

또 교육이란 자기 머리에 어떤 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지 일일이 시험해 보는 시간을 줄여 주고, 자기 역량을 정확히 측정해 주는 과정이다, 자기 역량을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지식의 습득이라는 표면적인 기능에 대한, 제대로 된 반론인지도 모른다

지식의 습득은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기능에 불과하다

교육이 흔히 생각하듯 지식의 습득에 불과하다면, 학원 다니면서 검정고시 치는 게 훨씬 이익일 것이다

단순히 학력을 쌓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이 어느 정도이고 나에게 맞는 것은 무엇인지 찾는 과정이며 교육이 그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선생의 정의가 가슴에 와닿는다

이렇게 따지면 성적 지상주의에 물든 교사들이나, 대학 안 갈 건데 학교 다닐 필요 있냐는 학생들이 학교의 기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네 번이나 학교를 전전하는 홀든에게 너는 지금 바닥이 없는 추락을 계속 하고 있다고 지적한 선생의 말도 무척 인상적이다

바닥이 없는 추락처럼 무서운 게 또 있을까?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고 자포자기한 사람에게 여전히 지금보다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충고는 무척이나 겁나는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늦었다고 자기 인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를 때라는 얘기는, 지금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경고인지도 모르겠다

 

홀든이 이 선생님으로 인해 구원받나 했는데, 변태 성욕자로 판명되면서 그의 방황은 계속된다

그는 어지러운 도시를 떠나 광활한 서부로 가서 평화롭게 살고자 한다

사실 그는 변호사의 아들로 무척 유복한 편이다

또 그의 형제들이 똑똑한 걸로 봐서 그도 머리가 아주 나쁜 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처한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걸 보면, 아직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는 서부로 간다 해도 여전히 방황할 게 뻔하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를 구원해 준 것은 놀랍게도 열 살 짜리 여동생 피비다

홀든은 특별히 이 동생을 사랑하는데, 부모가 무서워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오빠를 위해 크리스마스 용돈을 모두 건네 준다

서부로 떠나기 전, 피비에게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편지를 보내는데 뜻밖에도 오빠를 따라 가겠다고 옷을 챙겨들고 나타난다

인생에 대한 겉멋이 잔뜩 든 열 여섯 짜리 홀든의 눈에도 열 살 먹은 여동생의 가출은 어이없게 보였을 것이다

그는 한사코 떠나겠다는 어린 동생을 달래 회전 목마를 타러 간다

피비가 회전 목마 위에서 손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그는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다

어쩌면 행복이란, 혹은 삶의 의미란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자잘한 일상인지도 모른다

홀든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지도 않고, 파란 외투를 입고 해맑게 웃으며 회전 목마 위에 앉아 있는 여동생을 행복하게 바라 본다

 

결국 홀든은 이 날 맞은 비로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도덕 교과서처럼 홀든이 갑자기 철이 들어 다시 학교로 가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한 건 아니다

다만 서부로 떠나겠다는 식의 현실도피적인 유치한 생각은 접고, 좀 더 성숙한 태도를 보이긴 한다

정신과 의사가 열심히 공부하겠냐고 자꾸 다그치자,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긴 하지만 나중에 무엇을 할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조소하기도 한다

사실 어른들의 이런 다짐들은 별 의미없는 소리이기 일쑤다

당위가 현실이 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계발서나 공부 잘 하는 법, 돈 잘 버는 법 등도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속어들을 써 가며 평이하게 쓴 책이지만 미국 교과서로 인용되는 고전이라고 한다

빠르게 전개되는 표현력은 높이 살 만 하다

혹 묘사력을 기르고 싶은 사람이라면 유심히 볼 만한 책이다

열 여섯 소년이 겪는 방황을 과장하지 않고 산뜻하고 담백한 문체로 가볍게 그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시절에 제대로 된 방황을 했는지 궁금하다

성인이 되기까지 나름대로의 고통과 방황이 있었을텐데, 나는 그 시기를 어떻게 넘겼는지 새삼 돌아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중록 - 내 붓을 들어 한의 세월을 적는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4
혜경궁 홍씨 지음, 이선형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사 중 가장 흥미진진한 사건을 꼽자면 인현왕후 폐위 사건과 사도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일일 것이다

드라마로도 수없이 만들어졌는데, 사건 자체의 극적 전개는 물론이거니와 이 두 사건을 자세히 기록한 한글 기록이 있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끈다

특히 한중록은 사도 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기록으로써, 신원이 확실하고 당시 정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더욱 그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조선사를 돌이켜 보면 비단 그녀 뿐 아니라 한맺힌 비빈들이 많을 터인데, 기록으로 남긴 것이 겨우 한 질 뿐이니 (계축일기와 인현왕후전은 궁녀가 쓴 것이라 제외하고), 유달리 문학성이 뛰어난 분이라 생각된다

비록 자기 가문의 신원 회복을 위해 썼다고 하지만, 조선 왕조 5백년 역사 중에 이런 기록을 남긴 분은 그 분 혼자이니, 그 가치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한중록의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이덕일의 역사 에세이 "사도세자의 고백"을 통해 처음 접했다

그 책을 보면 단지 한중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료로써의 가치조차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투다

사도세자는 정신병이 없었고 혜경궁은 남편을 버리고 친정을 택한 비정한 여인으로 나온다

사도세자는 영특하기 그지없는 훌륭한 왕재였는데, 노론의 탄압을 받아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아내인 혜경궁은 노론인 친정 편에 서서 남편 죽이는데 앞장 섰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 홍봉한은 외손인 정조 대신, 사도세자의 서자를 옹립하려고까지 했으나 어미 된 심정에 차마 그러지는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선뜻 동의하기 힘든 구석이 많아 직접 "한중록"을 읽고 싶었다

다행히 국문으로 쉽게 번역된 책이 나와 흥미롭게 읽었다

 

이덕일의 책을 보면 한중록이 한스럽다 "恨"자가 아닌, 한가할 "閑"자를 쓴다면서 절대 남편을 위한 사모곡이 아님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실제 한중록의 원본이 전해지지 않는 상태에서 여러 이본에는 두 가지 한자가 다 쓰인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어떤 한자를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을 이덕일이 왜 굳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하는지 모르겠다

 

한중록은 총 6권으로 혜경궁 말년 10여년에 걸쳐 쓰여졌는데, 각 권마다 기술한 내용이 다르다

아마도 글을 쓰는 목적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가 승하한 후 쓴 책을 보면 확실히 가문의 회복을 위해 손자 순조에게 탄원하는 형식이긴 하다

그렇지만 모든 책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즉 반드시 그 목적만으로 쓴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편으로 그녀의 처지가 얼마나 곤궁했는지 이해도 간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당연히 즉위하여 왕비가 되리라 믿었을텐데 (더구나 세손까지 낳았으니 무슨 근심이 있었으랴!), 어처구니 없이 남편이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후 오직 아들에게 의존하며 살얼음 걷듯 살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정승을 역임하던 친정가문은 멸문지화에 가까운 화를 입고, 왕이 된 아들이 원한을 풀어주리라 믿었는데 느닷없이 아들이 급서한 후 어린 손자가 왕위에 올랐는데, 정작 정사는 대왕대비의 손에 있고 자신은 궁에서 아무 위치도 아니었다

아들 죽고 나니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였을 것이다

철천지 원수로 보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신원 회복은 커녕, 오히려 동생 홍낙임이 죽임을 당했으니 70 넘은 그녀가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 있겠는가!

어린 순조의 자비를 바라며 친정의 억울함을 밝히려 피로써 한중록을 써 가던 그녀의 안타까운 노후가 눈에 밟히는 듯 하여 마음이 아팠다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희생됐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그에게 문제가 있음은 분명하다

아무리 편파적이다 할지라도 한중록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조 역시 다소 독특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보통 아들을 귀히 여기는 법인데, 큰 아들을 잃고 늘그막에 본 하나 뿐인 아드님을 그토록 박대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여러 옹주들 중에서도 유독 화평과 화완만 총애하고, 화협과 화순 옹주 등은 세자처럼 극도로 미워했다니 애정의 편파가 심했던 모양이다

특히 화순 옹주는 남편이 죽고 나자 곡기를 끊고 따라 죽었는데, 아무리 아비 먼저 죽은 자식이 밉더라도 당시의 충효 사상을 따르자면 열녀비 하나는 세워 줄 만 하다

그런데도 밥 먹으라는 하교를 거부했다고 끝까지 모른 척 했다니, 영조가 얼마나 호불호가 뚜렷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 가엾은 옹주의 열녀비는 나중에 조카 정조가 세워 준다

 

영조의 극단적인 자식 편애에 괴로워 하던 사도 세자는 점점 어긋가는 쪽으로 나가 나중에는 의대병이라는 희한한 병이 생기고, 화를 못 이겨 주변 내인들을 여럿 죽였다고 한다

의대병이란 옷을 한 번에 못 입는 병인데, 이 옷을 입혀 주려다 세자의 후궁 빙애도 칼맞아 죽고 말았다

(그녀는 아들을 낳아 준 여자다)

혜경궁 역시 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눈을 찧어 자칫 눈알이 빠질 뻔 했다고 하니, 사도 세자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급기야 생모인 선희궁이 아들의 상태를 직접 영조에게 고할 정도였으니, 사도 세자의 병증이 심각했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영조는 아들이 모반하지 않을까 겁냈던 것 같다

무기류를 처소에 쌓아 놓고 관서 지방으로 여행한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 되어 참변을 당했으니 말이다

권력 앞에서는 부자지간도 소용없다고 하지만, 혼란스런 시대도 아니고 예와 문치의 나라 조선에서 하나 뿐인 아들을 뒤주 속에 넣고 굶겨 죽인 영조도 보통 사람은 아니다

폐서인 시킬 수도 있고 (양녕대군처럼) 사약을 내려 한 번에 죽게 할 수도 있는데, 굳이 뒤주를 내와 그 안에 들어가게 한 뒤 8일 동안 고통 속에서 죽게 해야 했을까?

더구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삼복 더위였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안에서 대소변은 또 어떻게 해결했을까? 한 나라의 세자가 이토록 비참하게 죽을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애통하다)

할아버지에 의해 아버지가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 본 정조가 얼마나 가슴 졸이며 동궁 시절을 보냈을지 짐작이 간다

또 정조가 사도 세자의 죽은 형인 효장 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후, 왕실 내의 어떤 지위도 얻지 못하고 오직 아들에게 신세를 의탁하며 시아버지 눈치를 살피고 살얼음 걷듯 세월을 보낸 혜경궁에게도 동정이 간다

 

사도 세자가 죽은 후 영조가 유일하게 총애하던 화완 옹주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혜경궁의 처지가 참 가엾다

사도 세자가 무사히 왕위에 올랐으면 중전이 되어 옹주와는 비교도 안 될 높은 처지가 됐을건만 (인원왕후는 왕실의 법도를 엄히 세워 옹주는 세자빈과 감히 어깨를 나란히 앉지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남편이 시아버지 손에 죽고 나니 왕실에서 그녀를 보호해 줄 방패막이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영조가 그녀를 귀여워 했다고는 하나, 정치적인 이유로 하나 뿐인 아들 정조를 뺏어가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으니, 아무리 아들이 왕위에 올라도 그녀는 대비 칭호를 받을 수 없고 그저 한낱 "빈"에 불과했다

더구나 친정집은 남편 일에 연루되어 아들 정조로부터도 배척받게 되니, 고립무원이었을 그녀 처지가 안타깝다

정조가 오래 살았으면 말년에 행복했으련만, 하필 50도 못 되어 어머니 앞에 죽으니 얼마나 애통했을까?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혜경궁 보다 10세나 어린데, 이 집안이 사도 세자 죽음에 한 몫을 하고 나중에는 홍씨 가문을 공격한다

정조가 등극한 후는 모두 유배되고 사사됐으나,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한 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다시 혜경궁의 집안은 공격을 받는다

이미 70이 넘은 혜경궁은 어떻게든 동생의 죽음을 막아 보려 곡기를 끊고 자살하겠다고 시위하자, 오히려 정순왕후는 부추기는 놈을 찾아 내라고 성화니 그녀는 한중록에 그 서운함을 토로한다

"너무 이리 마십시오"

한중록을 보면 온통 좋은 말 투성인데, 시어머니 정순왕후에게 이리 말한 것을 기록한 걸 보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 악에 받쳐 내뱉은 말처럼 느껴진다

 

혜경궁 홍씨의 일생을 살펴 보면 참으로 파란만장 하고, 한맺힌 삶이다

10세 때 세자빈으로 뽑혀 궁으로 들어간 후, 윗전들이 다 귀애하고 아들딸 무사히 순산하고, 본인도 80세까지 살았으니 (조선 시대 80세면 정말 건강했을 것이다) 큰 이변만 없었으면 대단히 복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독특한 성격의 남편을 만나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겪었으니 그녀의 한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간다

다행히 자신의 일생을 자세히 기록한 저서를 남겨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후손에게 전하니, 헛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어로 번역했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권선징악 식의 서술이 너무 많아 아주 재밌지는 않다

어떤 인물을 논할 때 무조건 착하고 바른 사람, 혹은 악하고 못된 사람이라는 식으로만 묘사하고 충효를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도덕 교과서를 읽는 기분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궐의 자잘한 에피소드들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또 당시 정세에 대해 소상하게 기록해 왕실 여인의 눈으로 본 조선 당쟁사를 읽는 새로운 기쁨도 준다

책 편집은 썩 훌륭한 편이다

주석도 많이 달고 당시 제도나 관습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깡통 2006-03-27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헌책방에 갔다 사놨던 사도세자의 고백을 며칠전에 읽었는데..
그랬을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중록을 꼭 읽어보고 싶어지더라구요.
님의 말처럼 선뜻 동의하기 쉽지도 않았었고요..
암튼.. 한중록은 주문은 했는데... 반전을 기대해보려고요!!
 
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
고종희 지음 / 한길아트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오랫만에 읽는 르네상스 그림 이야기다

한동안 서양화에 빠져 르네상스 시대와 근대 그림들만 열심히 탐독했는데, 몇 권 읽다보니 중복되는 얘기가 너무 많아 잠시 밀쳐 뒀는데, 마침 도서관에 주문한 책이 도착해 열심히 읽었다

피사 대학에서 르네상스 그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의 약력이 말해 주듯, 꽤 수준있고 좋은 설명들과 엄선한 그림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현학적이지 않아 더욱 좋다

 

조토 이후 갑자기 뛰어난 솜씨를 보인데는, "명화의 기법"에서 호크니가 지적했듯 광학의 발견이 한 몫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거장들의 솜씨는 놀랍기 그지없다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만 다뤘는데, 앞뒤 표지에 모자이크 식으로 배치된 수많은 초상화들을 보면서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그렸다는데 놀라는 게 아니라, 인물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느낌이라 감동적이다

그 순간의 인상과 느낌을 포착해 수백년 후의 독자들에게도 그림 속의 주인공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느끼게 해 준다

 

특히 독일의 위대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초상화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가 직접 그린 세 점의 초상화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도를 도입했는데, 정말 성자처럼 보인다

또 그의 후원자였던 막시말리안 1세의 초상은 푸른 배경과 어울려,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율리우스 2세"라든가,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 등을 보면, 고집스럽고 권위적이며 탐욕스럽기까지 한 역대 교황들의 이미지가 잘 포착된다

사진처럼 정교하다고 하지만, 사진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르네상스인들에게 사진과 대가의 초상화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으면, 역시 초상화 쪽을 택했을 것 같다

라파엘로는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보다 후대에 훨씬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한다

무릎까지 보여주는 도상이라든가, 대각선 방향으로 앉아 시선을 아래로 두는 방식 등, 기존 초상화 형식을 탈피해 후학들에게 라파엘로 양식을 모방하게끔 했다

그는 홀로 작업한 미켈란젤로와는 달리, 중소 기업 수준의 공방을 거느리고 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눴다는데, 붉은 색의 강렬한 색감이나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본떴음에도 신비한 분위기 보다는 인물의 사실적 분위기를 강조한 "마그달레나 스트로치" 등을 보면 과연 세속적인 영광을 누리고자 한 적극적인 성격이었을 것 같다

 

흔히 화가라고 하면 고흐처럼 예술혼이라는 광기와 싸우면서 세상과 대립하는 외로운 존재라 인식되기 쉬운데, 르네상스 화가들을 보면 그림이 출세의 방법이라는 느낌이 든다

(사실 화가도 직업인 이상, 세속적 성공을 지향하는 걸 탓하는 사람이 이상하기도 하다)

루벤스가 17세기에 유럽 왕실을 돌아다니며 외교관 역할을 한 것처럼, 르네상스 화가들도 교황과 제후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해 갔다

특히 티치아노 같은 경우는 그의 초상화 모델이 되기 위해 서로 경쟁할 정도였다고 한다

교황 파울루스 3세 같은 경우는 그를 로마로 부르기 위해, 티니아노의 아들에게 성직을 수여한다고 꼬실 정도였으니 가히 그 명성을 알 만 하다

(티치아노는 아들의 성직 수여가 차일피일 미뤄지자, 교황의 초상화를 스케치만 하고 베네치아로 돌아가 버린다 감히 교황의 초상화를 그리다 말다니, 대단하다!!)

뒤러나 라파엘로 등도 화가로서의 명성을 이용해 작위까지 수여받았을 정도로 교황과 제후들의 총애가 대단했다

 

오늘날 르네상스 시대의 명작들을 보면서 그 위대함에 감탄하지만, 실은 대중에게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됐다는 속사정을 듣고 보면 왠지 모를 허탈감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 경위나 화가의 돈벌이 수단이었다는 외적인 환경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림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고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이야 말로, 아무 소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부르주아들의 경제적 여유를 피력하기 좋은 장르라고 한 부어스틴의 정의를 다시금 확인한다

베네치아나 피렌체, 플로방스 등의 산업 발전이 없었다면 르네상스의 화려한 예술도 부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예술 후원을 당연시 하는 그 전통이 부럽다

돈만 많으면 대접받는 게 아니라, 예술을 이해하고 후원할 수 있는 심미안까지 갖춰야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셈이다

 

다 빈치는 초상화를 겨우 다섯 점 밖에 그리지 않았는데 (그는 할 일이 너무 많아 그림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그 명성에 걸맞게 신비롭고 긴 여운이 남는다

"모나리자"야 워낙 유명하니까 달리 말할 필요도 없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지네브라 데 벤치"라든가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등의 매력도 상당하다

이 두 여인의 초상을 한 번 보면, 쉽게 그 형상이 잊혀지지 않는다

"모나리자"의 매력이 보일듯 말듯 한 신비로운 미소에 있듯, 다른 두 그림도 독자에게 묘한 인상을 준다

입술을 앙 다문 지네브라 데 벤치나, 담비를 안고 있는 우아한 체칠리아 갈레라니의 인상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특히 체칠리아는 스포르차 궁의 가장 매력적인 여인이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 미모를 짐작할 만 하다

다 빈치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세 초상화에 모두 잘 드러난다

 

명작에 관한 책은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인쇄된 그림으로 봐도 가슴이 설레는데, 실제로 보게 되면 얼마나 흥분할지 모르겠다

(내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고흐의 "해바라기"를 직접 본 이후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림에 대한 지식을 좀 더 쌓고 미술관에서의 관람에 도전해 보고 싶다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정말로 인간의 기본 욕구인 모양이다

이렇게 많은 그림책들이 나와 눈을 즐겁게 해 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뮈를 위한 변명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부어스틴이 쓴 "이미지와 환상"에 이런 말이 나온다

위대한 문학 작품의 명성은 다 알고 있고 수없이 인용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읽지 않는다

베스트셀러와 고전의 차이는 사람들이 읽느냐, 읽지 않느냐의 차이라고까지 한다

그의 지적처럼, 카뮈는 흔히 회자되는 작가이면서도 정작 그의 작품인 "이방인"이나 "페스트" "반항인" 등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쩌면 이 책을 쓴 저자의 말처럼, 위대한 작품을 어렵게 해석함으로써 먹고 사는 평론가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카뮈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평범한 독자인 나로서는 참 어려운 일이다

그 카뮈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평론집을 집어 들었다

적어도 저자 박홍규는, 복잡하고 난해한 말로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노벨상 수상자 혹은 프랑스 문학의 대가라는 점 때문에 무조건 찬양되고 숭상되는 우리 평론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고 싶어 한다

 

제목은 "카뮈를 위한 변명"이지만, 전반적으로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저자는 카뮈에게 씌워진 지나친 찬사를 벗겨 내고 그 안에서 인간 카뮈를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첫 장에서 저자는 알제리와 식민 조선의 비교를 장황하게 늘어 놓으면서 카뮈의 식민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저자의 이런 시도는, 어찌보면 참 위험할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이며, 온통 그에 대한 찬양 일색인 우리나라 주류 평론가들을 무시하는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변증법의 논리대로 참이라고 인정되는 모든 명제에는 반드시 반론이 따르는 법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사상이라도 제발 이런 기본적인 법칙은 수용되었음 좋겠다

세상에 100% 완전무결한 게 도대체 존재하기나 한단 말인가?

 

저자는 카뮈를, 식민지 조선에 살던 일본 작가로 비유한다

일제가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를 참조한 것만 봐도 상당히 적절해 보인다

식민지 조선에 태어나 자랐고 조선의 자연을 사랑했음에도, 정작 식민지인으로서 느껴야 할 조선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작가의 소설에 어떤 조선인이 감동할 수 있겠는가?

카뮈는 할아버지 때부터 알제리로 이주해 젊은 시절을 그 곳에서 보낸 만큼, 알제리의 자연을 사랑하고 평생의 고향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소설에서 식민지인 알제리 국민이 느꼈을 고통과 억압에 대해서는 일절 서술하는 법이 없고, 알제리가 독립 전쟁을 치룰 당시도 그의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독립을 반대한다

이런 카뮈의 작품은 당연히 알제리에서 금서 목록에 올랐다

우리 역시 일제 치하의 식민지를 경험한 이상, 제국주의자인 프랑스 보다는 식민지 알제리에 더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평론가들은 그저 카뮈를 일방적으로 찬양하기만 하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저자는 통탄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강대국 프랑스와 동일시하고, 예술과 자유와 평등, 인권의 나라에 대한 동경심에 비롯된 문화 사대주의가 아닌가 의심한다

흔히 프랑스 하면 떠올리는 문화의 나라라는 이미지도 실은 파리의 일부 상류 계층에 국한된 것이고, 우리는 지나치게 큰 환상에 쌓여 있다고 꼬집는다

문득 최연구가 쓴 "프랑스 문화 읽기"가 생각난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최연구는 미국 자본주의와 대립되는 프랑스의 위대한 문화에 대해 찬탄을 아끼지 않고, 미국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미국 사대주의 의식을 비판했는데 정작 그 역시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 냄새를 풍긴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화, 세계화는 좋지만, 미국 대신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 문화가 대장이 되는 것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적인 찬양이나 비판은 지양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과 같은 비판 방식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히려 정말로 카뮈가 원했던 것, 진짜 카뮈의 모습을 찾길 바란다

실제로 카뮈는 꽤 잘 생겼다

험프리 보가트를 평생 좋아했다고 하는데, 나란히 배치한 사진을 보니 세계적인 영화배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준수한 외모다

더구나 노벨상을 탈 만큼 글도 잘 쓰고 프랑스의 지성인이라 인정받았으니, 여자들이 많이 따를 법 하다

카뮈는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는지, 수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눴다

절대 못 끊는 게 있다면 담배와 섹스(혹은 사랑)였다고 하니, 그의 성향을 알 만 하다

결혼하지 않고 보부아르와 계약 결혼 상태에서 자유로운 사랑을 나누던 샤르트르와는 달리, 결혼한 상태에서 간통한 셈이 된 카뮈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분방한 연애를 하고 싶으면 샤르트르처럼 결혼이 주는 안정과 특혜도 거부해야 "양심에 꺼리끼지 않는" 게 아닐까?

민중의 자유와 인권을 논하면서도 정작 함께 사는 배우자에게는 간통으로 인한 끊임없는 괴로움을 주는 이중적인 심리 구조를 보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의 두 번째 아내 역시 십 여살이나 어린 아름다운 여배우였던지라, 카뮈도 아내 마리아를 둘러 싼 남자들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저자는 카뮈를 아나키스트로 본다

아나키스트란 무정부주의자라기 보다는 권력과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로 보는 게 옳다고 한다

그는 알제리의 독립을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프랑스의 지배를 지지한 것도 아니다

알제리인과 프랑스인이 모두 화합하여 국가의 지배가 없는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자고 했다

이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저자의 표현대로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에게 일본인과 함께 사는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자고 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다

카뮈는 자신이 낳고 자란 알제리의 현실에 너무나 둔감했다

늘상 옆에서 지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식민지인으로 겪어야 할 알제리인의 고통과 억압에 항상 무지했다

그의 소설 "이방인"을 봐도 태양 때문에 무심코 저지른 살인의 희생자 알제리인에 대해서 어떤 묘사도 없다

 

카뮈가 식민지 알제리에 대해 어떤 문제 의식도 안 가졌던 것처럼, 그는 조국 프랑스에 대해서도 별다른 자부심을 갖지 않았다

프랑스는 그저 우연히 태어난 곳일 뿐이다

카뮈는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자유를 옹호하는 신념에 따라 레지스탕스 활동도 하고,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한다

물론 공산주의가 더 큰 억압을 가한다는 것을 깨닫고 당령에 반항하다 추방당한다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를 찬미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려고 입대하나, 결핵 때문에 거부당한다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 확실히 카뮈는 권력과 억압에 저항하고 부르주아 속성을 비판한 비공산주의 좌파였던 모양이다

샤르트르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이 속한 계급의 모순을 깨닫고 좌파 지식인의 선봉에 섰던 것과 달리, 카뮈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이 주는 괴로움을 내적으로 승화시켜 노동자 편에 선 인물이다

그러나 저자의 지적처럼,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 선 사람은 반드시 그 내부에 극복하지 못한 콤플렉스가 자리잡기 마련이다

저자는 표현은 안했지만, 카뮈보다 샤르트르를 더 높게 평가하는 듯 하다

 

연극을 사랑한 카뮈는 여러 소설을 각색하고 연출했으며, 스스로 배우가 되기도 하고 연극의 여주인공들과 실제로 사랑을 나눈다

문학이 지배자로 군림하려고 하나, 실상 허공에 군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반면, 연극이야 말로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대등한 관계 속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룬다고 예찬한다

그가 정말로 원했던 사회는 바로 이런 평등한 공동체, 혹은 권력과 억압이 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연극 같은 세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연극에서나 가능한 이상향일 뿐이지만 말이다

 

300페이지가 채 못되는 길지 않은 평전인데, 역시 위대한 작가의 평전이라 쉽지는 않다

비교적 저자가 쉽게 풀어 쓰긴 했지만, 카뮈가 나타내려고 한 부조리한 세상의 고발이 쉽게 이해되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이방인"과 "페스트"를 새롭게 읽어봐야 할 모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1년 8월
평점 :
품절


아주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함께 비디오로 "위대한 게츠비"를 본 기억이 난다

전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고, 자기 집 수영장 에어 매트 위에 엎드려 쉬고 있을 때 한 남자의 총을 맞고 그대로 죽어 버린 가엾은 개츠비 역의 로버트 레드포드만 생생히 기억난다

그 장면이 어찌나 인상적이었는지, 그 후 나는 레드포드의 팬이 되어 그가 나오는 영화는 모조리 섭렵하곤 했다

오래 전부터 숙제처럼 미뤄 두던 "위대한 게츠비"를 이제서야 비로소 읽게 됐다

늘 그렇지만 영화는 소설과 참 다르다

 

한 여자에게 일생을 걸어 성공한 뒤 다시 그녀에게 나타났으나, 그녀가 낸 교통사고에 휘말려 희생자의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내용이라 알고 있었는데 소설은 독특하게도 제 3의 인물에 의해 서술된다

개츠비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 데이지의 사촌인 닉이 화자이다

단순한 서술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주인공이고 게츠비와 데이지 이야기는 그저 한 사건에 불과한 느낌까지 준다

어쩌면 피츠제럴드가 말하고 싶었던 건 단순한 사랑 얘기가 아니라, 서부의 시골 청년이 동부의 뉴욕으로 건너와 성공했으나, 치정 사건에 휘말려 허망하게 죽고 만 부질없는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1920년대 미국의 서부는 시골이고 동부는 출세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야망이 숨쉬는 곳이었나 보다

화자인 닉 역시 증권맨으로 성공하고자 뉴욕에 건너 오지만, 게츠비 사건을 계기로 동부를 떠난다

그는 아마도 출세와 성공의 덧없음을 봤을 것이다

 

데이지란 이름은 흔한 것 같으면서도 산뜻하고 귀여운 느낌을 주는데, 게츠비가 사랑한 여인은 그 이름에 잘 어울린다

어떤 평론에서 본 것처럼 그녀는 물질주의에 경도되어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도 없는 부박한 영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저 비난만 하기에는 뭔가 허전하다

그저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복잡한 것을 꺼리는 태도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데이지는 부잣집 딸인데다, 사교계에서도 촉망받는 여성이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개츠비는 부유하고 아름다우며 세상 근심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이 아가씨에게 넋이 나간다

아마도 데이지는 게츠비에게 이루고 싶은 꿈이고 목표였을 것이다

게츠비는 데이지를 통해 자기가 얻고 싶은 구체적인 미래를 실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돈 때문에 데이지를 사랑한 것은 절대 아니다

데이지가 그의 곁을 떠난 후 5년 동안 돈을 모아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난 후 사랑을 고백했듯, 게츠비는 기본적으로 신실하고 순수한 청년이다

게츠비에게 있어 데이지란, 평생 이루고 싶은 소망과 목표의 결정체였고 하나의 이상형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돈이라고 가볍게 치부할 수 없다

만약 그가 데이지를 동경했던 것이 단지 돈 뿐이었다면, 부자가 된 후에 다시 데이지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돈만 많으면 다른 여자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법이니까

 

이 소설을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이야기라고도 하는데, 그 역시 부유한 판사의 딸이었던 젤다를 얻기 위해 많은 애를 쓴다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젤다는 가난한 청년 피츠제럴드에게 별 관심이 없고, 그는 젤다를 얻기 위해 열심히 글을 써서 마침내 사회적 명사가 된 후 그녀와 결혼한다

이 두 부부는 사교계의 유명한 커플이었다고 한다

연예인과 비슷할 정도로 그들의 동정은 뉴스의 대상이 됐다

비록 결말은 불행하지만 말이다

 

데이지는 그저 게츠비를 사랑할 뿐이다

게츠비가 그녀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과는 다르게, 가벼운 연애 감정을 대한 것 뿐이다

사실 우리 주변의 사랑이란 데이지가 한 때 게츠비에게 끌렸던 것처럼, 호감을 느끼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수준이다

게츠비처럼 자기 삶 전체를 바치는 그런 사랑이 오히려 드물고 특이하다

문제는 게츠비의 이 열정과 지고지순함을 데이지가 알아 줘야 하는데, 이 데이지란 여자는 목숨을 건 사랑의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아주 단순한 여자라는 사실이다

게츠비가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났을 때, 바람 피우는 남편에게 진절머리가 난 그녀는 또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그와 어울리고 자신이 낸 사고를 게츠비가 덮어 썼을 때도 그에게 일절 말 한 마디 없다

오히려 그녀는 복잡한 사건을 피하기 위해 남편과 여행을 떠나 버린다

게츠비가 희생자의 남편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했을 때 조차 그녀는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될까 두려웠을 것이다

도대체 게츠비는 겨우 이런 평범하고 소심하며 도덕성이 결여된 한심한 여자를 우상으로 섬겼단 말인가!!

그의 열정과 순수함이 가엾다

결국 그녀가 저지른 죄값을 대신 치른 게츠비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아무 의미도 보람도 없는 개죽음에 불과했다...

 

데이지의 남편이란 작자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그녀의 남편 톰은 데이지 차에 치어 죽은 머틀의 정부였다

뻔뻔하게도 톰은 머틀이 죽은 후, 남자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던 그녀의 남편 윌슨에게 게츠비를 들먹거린다

데이지가 개츠비의 차를 타고 있었는데, 물론 톰은 운전자를 게츠비로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남편에게라도 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윌슨에게 차의 주인이 게츠비라고 알려 주고, 사실은 그가 머틀의 정부였다고 거짓말까지 한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머틀과 자신의 관계가 탄로날까 봐 조마조마 하던 톰은, 이 기회에 게츠비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신은 쏙 빠져 나온 것이다

정부와의 관계에 진실한 사랑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죽은 머틀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게 아닐까?

한 때 사랑을 나누던 여인이 차에 치여 죽었는데, 자기가 빠져 나올 궁리만 하다니, 그 아내에 그 남편이라 할 만 하다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던 닉은, 진실을 알리지도 못한 채 조던에게 이별을 고하고 뉴욕을 떠난다

조던 베이커는 골프 선수에다 사교계를 주름잡는 멋진 뉴욕 여성인데, 데이지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는 뉴욕에 머물면서 조던을 사모하기도 했으나, 진실함이 결여된 화려한 겉모습은 부질없는 짓이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닉은 조던의 모습에서 데이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데이지나 조던은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편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그저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개츠비의 사랑과 헌신이 너무나 위대해, 평범한 우리들은 부끄럽고 초라해진다

데이지가 그 사랑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만이라도 깨달았다면, 가엾은 개츠비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텐데...

 

게츠비의 장례식은 부와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일부러 신문의 부고란에 개제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대저택에서 놀고 마시던 사교계 인사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진실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고 오직 데이지에 걸맞는 남자가 되기 위해 애쓴 그의 삶은 이렇게 덧없다

그의 아버지가 닉에게 보여 준 젊은 시절 게츠비의 낙서는 내 가슴을 무척 아프게 한다

가진 것은 없으나 꿈과 야망을 간직한 이 신실한 청년은 새벽 5시에 기상해 잠들 때까지 빡빡한 시간표 속에서 자신을 단련한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앞을 향해 달리던 게츠비는, 데이지라는 잘못된 목표를 세우는 바람에 허망하게 죽고 만다

인생이란 이렇게 덧없는 것인가...

 

게츠비나 데이지의 심리 묘사가 뛰어날 거라 생각했는데, 화자가 닉이다 보니 그저 관찰자의 입장에서 짤막하게 서술될 뿐이다

오히려 닉이 느끼는 삶에 대한 통찰이 주를 이룬다

게츠비를 만나고 그의 죽음을 통해 인생을 다르게 본 닉의 성장기 같기도 하다

독특한 서술 구조가 이 소설의 매력인 것 같다

다시 한 번 로버트 레드포드의 멋진 연기로 게츠비를 만나 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