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벨 다이어트
스즈키 마사시게 지음, 이근아 옮김 / 넥서스BOOKS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생각보다 운동 효과가 좋습니다

꽤 땀을 흘리게 되요

좀 힘든 자세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할 만 합니다

직장에서 시간날 때 하기 좋아요

살 빠지는 건 몰라도, 어쨌든 운동은 꽤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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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정독해야 할 책이다

이런 철학적이고 직관적인 책을 겨우 25세의 어린 나이에 썼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체 나는 25세 때 뭘 하고 있었을까?

사랑이라는 이름이 가려주는 유치하고 치졸한 감정에 휩싸여 정체성을 잃고 방황했을 뿐이다

저자가 철학을 전공하고, 또 가르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경력보다는 오히려 그의 성향과 관계있는 것 같다

사랑의 실체를 파헤치는 그의 철학적 소설을 읽으면, 우리 안에 숨겨진 위악성과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강한 이기주의, 혹은 나르시즘을 보는 기분이 든다

은희경 소설을 읽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사랑과 철학에 대해 쉽고 간결하게, 그리고 탁월하게 멋진 해석을 제공한다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 "나"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클로이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나"는 그녀가 데이트 신청을 받아 줄지 어떨지에 관한 심각한 고민의 시간을 보낸 후, 마침내 정식으로 사귀게 된다

유럽 사람들은 성에 대해 참 솔직하고 화끈하다

겨우 24에 불과한 처녀가 첫 데이트 후 상대가 마음에 들자 자기 집 침대로 데리고 간다

가벼운 굿바이 키스를 남기고 점잖게 돌아서려는 남자에게 클로이는 멋진 한 마디를 날리며 그를 붙잡는다

"우린 더 이상 어리지 않잖아"

섹스를 통한 사랑이 가능한 나이라는 뜻이다

 

아직도 처녀막 재생술이 성행하고 동거 커플을 백안시 하며 (당장 TV 드라마만 봐도 동거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옥탑방 고양이"를 두고 동거를 일반화 시켰다고 비판하는 신문 기사나, 동거했던 과거 때문에 마음 졸이는 한가인이 나오는 "애정의 조건"을 보라!!)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처녀성 신화가 넘쳐나는 대한민국에 사는 젊은 여자들에게, 클로이의 한 마디는 쇼킹할 수 밖에 없다

모든 문화권에는 나름의 터부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성에 대한 이중 잣대는 사라져야 마땅할 덕목이 아닌가 싶다

또 주인공 "나"는 클로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좋아하는데, 다른 여자는 피워도 상관없지만 내 여자 친구는 안 된다는 한국 남자들의 이중성과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심지어 여자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의 논쟁이 붙을 정도니,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클로이와 "나"는 서로의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동거에 들어간다

같은 공간에 사는 것을 동거라 정의한다면, 확실한 동거는 아니다

사실 어찌 보면 이게 더 편안한 관계인지도 모른다

동거나 결혼이나 법적 구속력만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정도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모텔 대신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관계라면, 좀 더 친밀하고 안정된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나"는 클로이의 모든 면에 반한다

그러나 함께 살다 보면, 혹은 상대에 대해 좀 파악하고 나면 자신의 얼마나 근거없는 환상에 시달렸는지 금방 알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에게 부족한 면을 상대에게서 발견하고자 한다

실제 상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이상화 시킨 뒤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상대의 본모습을 알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상대는 그저 일관된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나의 환상이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하고, 또 실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는 클로이의 구두에 화를 내지만, 정작 같은 구두를 신은 우유 가게 주인에게는 아무런 적대감도 느끼지 않는다

사랑에 빠지면 그의 취향까지도 내 스타일로 만들고 싶은 어처구니 없는 소유욕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연인의 사소한 일상까지 규제하려고 드는 독재적인 태도에 대한 단 하나의 근거는,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소유욕이 없다면,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분석도 빼놓지 않는다

 

"나"는 결국 클로이에게 버림받는데, 이별을 극복하는 과정은 흡사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것과 같은 길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클로이를 사랑하면서 그녀가 자기 삶의 일부가 됐다는 얘기는, 그녀가 떠나면 자신의 일부도 무너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클로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의 새로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앤서니 라빈스가 말한 바로 그 신경회로를 끊는 과정일 것이다 클로이에게 길들여진 신경회로를 말이다)

저자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내리는데, 누구와 함께 있든 혹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변하지 않는 내적 안정감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처음 클로이와 데이트 할 때 그녀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서스럼없이 거짓말을 하며 불안해 한다

모든 신경이 오로지 클로이에게 쏠려, 정작 자기 자신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나의 취향을 드러내기는 커녕 그녀에게 맞춰 급조해 내는 것이다

어떤 자리에서든, 누구와 함께든 나 자신에 대한 변함없는 안정감과 평화를 가질 수 있다면 아마 그는 도를 터득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클로이게 버림받은 후 자살을 시도하는데, 여기에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클로이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그러므로써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 스스로를 죽이려 들지만 정작 그녀가 돌아온다 해도 이미 나는 세상에 없다

그녀의 뉘우침을 받아들이려면 나란 존재가 숨쉬고 있어야 하는데, 자살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고 반면 그녀를 돌아오게 하려면 내가 죽어야 한다

결국 "나"는 비타민제를 몽땅 털어 넣었다가 뱉어내는 어리석은 과정을 통해 이 모순을 깨닫고 다른 전략을 택한다

 

그것은 "예수 컴플렉스"라 명명할 수 있는데, 클로이를 나쁜 여자로 나는 선량한 희생자로 만드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내가 부족하고 못나서 모든 게 완벽한 클로이가 자신을 떠났다고 믿었지만, 이 컴플렉스를 적용하면 "나"는 어리석은 클로이에게 배신당한 가엾은 순교자가 된다

예수를 못박아 죽인 유태인들처럼, 클로이는 "나"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내 친구인 윌에게 가 버린 것이다

기독교가 번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 순교 정신에 있다고 한다

옳은 것을 이야기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핍박해 죽임으로써, 거룩한 순교자가 되어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는 것이다

(좀 불경스럽지만) 만약 예수가 나사렛에서 책상을 만들다가 죽기 전 진리에 대한 책 한 권을 썼다면, 과연 사람들이 그의 사상에 열광했겠냐는 얘기다

 

사실 이런 식의 아전인수 격 논리는, 이별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친구와 바람나 미국으로 떠나 버린 애인을 두고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나쁜 여자로 만들고 나는 희생자라 위로하는 게 정신 건강에 훨씬 이로울 것이다

그녀는 떠나갔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나"는 끊임없이 자신이 부족한 인간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스스로를 학대한다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떠나간 파트너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를 되새기는 게 현명한 처사다

(소설에서 "나"는 클로이가 없는 쓸쓸한 크리스마스를 지내기 위해 책을 몽땅 싸 들고 호텔로 들어가는데, 기회가 되면 나도 한 번 시도해 보고 싶다)

 

저자는 이런 "나"의 심리에 내제된 이기적인 심리를 잊지 않고 지적해 준다

칸트는 도덕적 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 결과보다 중요한 것이 동기라고 했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 정당화 되는 공리주의와는 달리, 칸트는 그 행동을 취한 내적 동기가 불순하면 결과가 좋더라도 칭찬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나 자신의 감정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클로이를 사랑한 것이므로 그녀가 "나"를 배신하고 떠났다 해도 그녀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처지가 못 된다

"나"나 클로이는 각자의 감정 욕구에 가장 충실히 부합되는 파트너를 찾았을 뿐이다

그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했다고 자부하는 "나"의 동기가 실은 클로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라면, 특별히 내가 클로이 보다 도덕적으로 나을 것은 없다는 얘기다

 

어쨌든 "나"는 남녀간의 사랑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기는 금욕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사랑이란 어린 시절 부모에게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채우기 위한 과정이라 믿는 낭만적 실증주의에 경도되기도 하지만, 결국 이런 이론들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금욕주의는 사랑이 주는 고통을 현명하게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피할 따름이고, 낭만적 실증주의 역시 원인을 찾는다고 해서 해결책까지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성간의 사랑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대신, 새로운 연인을 찾으므로써 다시 용감하게 사랑에 대항한다

"나"가 이번에는 보다 현명하게 처신할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법이니까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목은, 연인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유머가 필수라는 문장이다

이거야 말로 연인 사이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 생각되는데,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나르시즘에 빠져 사는 동물이라면 아무리 사랑이란 이름을 포장한다 해도 나보다 열등해 보이는 상대의 단점들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차이점을 나보다 못하다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중요하지 않은 결점들을 참고 넘어가려면 문제를 심각하게 의식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가 클로이의 구두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자 그녀는 창 밖으로 구두를 던져 버리는데, 그 후 그들은 상대의 취향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마다 "날 창 밖으로 던지지는 말아 줘"라고 애교를 부린다

연인 사이에 유머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면, 실상 심각하게 고민할 일들은 아주 적어질 것 같다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은 연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생각과 감정들을 철학적으로 끌어냈다는데 있다

그 흔한 남녀간의 사랑을 얘기하면서도 저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칸트 같은 대철학자들의 이론을 쉽게 인용한다

동화를 통해 철학을 쉽게 설명하는 기분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인간에 대한, 혹은 "우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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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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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있다면, 좀 알려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나로서는 도저히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없다

한 번 더 읽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다만 오스터의 그 놀라운 문장력과 풍부한 예화들에는 감탄을 보낸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도 고전 읽기를 강조했지만 (사실 그가 많이 읽는 것 외에는 소설 잘 쓰는 별 비법이 없다고 한 게 아주 마음에 든다), 폴 오스터 역시 아주 많은 고전들을 읽는 것 같다

그가 읽은 책들에 대한 느낌들이 책에 자주 등장한다

또 그의 주인공들은 탐욕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이다

쉽게 공감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계속 읽는 까닭은, 책에 몰두하는 바로 그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뉴욕 3부작"이라는 제목으로 세 중편들이 엮어졌기 때문에, 나머지 두 편을 다 읽으면 뭔가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역시 아무 소득이 없다

세 편의 이야기는 다만 화자가 같을 뿐, 사건 자체로 보면 큰 연관성은 없다

역자의 해설을 보면 오스터가 사건의 전개 보다는 쫒는 자의 심리 묘사에 치중하고 문체를 중요시 했다고 하는데, 소설의 문체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오스터의 작품을 적극 추천하는 바다

적어도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문체나 묘사력에 있어서는 아주 훌륭하다

사건 전개나 결말은 다소 마음에 안 들지만 말이다

세 편은 연관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별 상관이 없는 독립된 이야기다

다만 세 편 모두 은둔해 버린 누군가를 찾는 과정이고, 쫓기는 사람 보다는 쫓는 사람의 입장에서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령들"에서는 색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블루, 화이트, 그레이, 브라운, 바이올렛 등등

주인공 블루는 사설 탐정인데 화이트라는 사람의 의뢰를 받아 블랙을 감시한다

왜 감시하는 가는 모르고, 다만 화이트가 얻어 준 아파트에서 블랙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매주 보고서를 보내기만 하면 된다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이 일은 1년을 넘기고, 그 사이 일에 충실하기 위해 연락을 끊는 바람에 그의 애인은 다른 남자와 만나 버린다

어느 날 블랙을 미행하던 도중, 거리에서 다른 남자와 팔짱 끼고 가는 애인을 보는 순간 (블루는 그녀와 결혼할 예정이었다) 이성을 잃고 의뢰인 화이트에 대한 분노를 폭발한다

대체 나는 왜 이 짓을 1년씩이나 하고 있었던가?

나는 왜 블랙이란 놈을 쫓고 있는가?

혹시 블랙과 화이트가 한통속이 되어 나를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소설은 어이없이 이렇게 끝나고 만다

사실 블랙은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블루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블랙과 화이트가 동일 인물인지도 모른다

혹은 화이트가 블랙에게는 블루의 미행을, 블루에게는 블랙의 미행을 지시했을 수도 있다

다만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인간을, 왜 감시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1년이 넘게 매달리는 남자의 심리 묘사는 그럴 듯 하다

결국 그 과정 속에서 블루란 인간의 삶은 완전히 파기되어, 현실로부터 고립되어 갔던 것이다

 

마지막 "잠겨 있는 방"에서 이 모든 사건의 본질이 자명하게 드러날 거라 기대했는데, 역시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유령의 도시"에서 등장한 화자는 이제 주인공이 되어 팬쇼라는 어린 시절 친구를 쫓는다

어느 날 그는 팬쇼의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는데, 팬쇼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거의 형제처럼 자란 두 사람은 성장 후 연락이 끊긴 채 살아가는데, 팬쇼가 행방불명 되기 전 평생 써 온 글을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팬쇼의 아내 소피는 임신 중이었다

팬쇼가 쓴 책은 큰 히트를 치고, 주인공 "나"는 소피와 가까워져 그녀와 결혼한다

어느 날 팬쇼가 쓴 편지가 도착하는데, 그녀와 어린 아들을 니가 책임져 주길 바랬다면서 책을 펴 낸 인세로 잘 살라 당부하고, 절대 자신을 쫓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일까?

팬쇼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편집자는 그의 전기를 써 보라고 "나"에게 제안하고 "나"는 꺼림칙 하면서도 승낙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는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되고, 소피와도 멀어진다

마치 사라진 팬쇼가 "나"를 지배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유령의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실상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인데 괜한 당의성을 느껴 주인공들은 누군가를 쫓는다

퀸은 스틸먼을 쫓고, 블루는 블랙을 쫓으며, "나"는 팬쇼를 쫓는다

처음에는 다 그렇고 그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 내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것이다

 

팬쇼를 찾아 파리에 갔을 때, 피터 스틸먼이라는 젊은이가 등장하는데 혹시 그가 "유령의 도시"에서 나온 바로 그 스틸먼인가 궁금했다

이 스틸먼의 등장으로 사건이 풀어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실망스럽게도 그냥 등장했을 뿐이다

사실 모든 것이 딱딱 들어맞아 풀어진다면 그렇고 그런 추리 소설 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렇게 위안을 해도, 한숨이 나오긴 마찬가지다

도대체 개연성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처음에 소피가 팬쇼를 찾기 위해 고용한 사설 탐정 이름이 퀸으로 나오는데, "유령의 도시"에서 스틸먼을 쫓던 바로 그 퀸인가 기대했다

그렇지만 그 퀸으로 생각하기엔 정황이 안 맞는다

혹시 또 모르지, 텅빈 스틸먼의 집에서 사라진 퀸은 다른 곳에서 탐정 노릇을 하고 있었을지

오스터는 독자들에게 너무 불친절 하다

어쨌든 퀸은 스틸먼을 쫓았던 것처럼, 자기 삶을 버린 채 또 평생 팬쇼를 찾는다

 

마지막에 팬쇼가 "나"와 만난 후 그 동안의 정황을 기록한 빨간 노트를 주는데, 난 여기에 세 편의 이야기에 대한 해설이 들어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주인공 "나" 역시 그 노트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려 버리니, 나같이 추리력 부족한 독자는 당연히 모를 뿐이다

팬쇼는 자살하겠다고 말했는데, 실제 그가 죽었는지 어땠는지는 안 나온다

 

다만 이런 추리는 할 수 있다

팬쇼는 자신을 둘러 싼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어느 날 종적을 감춘다

남겨진 아내와 아들에게 미안했던 그는 친구 "나"에게 이 책임을 떠 넘긴다

만약 "나"가 조용히 살아 줬으면 그걸로 만족할텐데, 뜻밖에도 "나"는 자신을 뒤쫓는다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었던 팬쇼에게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반면에 "나"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긴 팬쇼로부터 아름다운 아내와 아이와 인세를 선물받게 된다

그로서는 팬쇼가 제공한 이 행복들이 불편했을 수도 있다

지금 가진 것에 충분히 만족하지만, 거저 얻은 것인 만큼 뭔가 꺼림칙 했을 것이다

기왕이면 팬쇼가 완벽하게 사라지길, 즉 죽기를 바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팬쇼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에 팬쇼의 어머니와 섹스를 한다

팬쇼의 어머니 역시 아들로부터 소외당했다는 피해 의식에 젖어 사는 여자인데, 형제처럼 지내고 손자의 아버지까지 된 "나"를 아들과 동일시 한다

그러므로 "나"와 관계하는 것은 곧 아들 팬쇼에 대한 복수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두어 차례 관계를 가진 후 죄책감에 소피를 피하게 되고, 결국 팬쇼를 찾는데 더욱 몰두한다

말하자면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입증할 때까지, 미친듯이 매달리는 것이다

이런 "나"의 행동을 보면서 팬쇼는 분노했을 게 틀림없다

 

오스터는 은둔자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달의 궁전"에 등장하는 에핑과 "신탁의 밤"에 나오는 닉 보언에 이어, "뉴욕 3부작"의 팬쇼에 이르기까지 다들 자신을 알고 있는 사회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되고자 한다

이런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는 부류인데, 과연 이게 가능할까 나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 상황에서 어디론가 증발해 다른 인물로 산다는 것, 글쎄 평범한 이들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스터의 소설에 열광하는 것일까?

오스터가 좋아하는 배경은 야구에 이어 뉴욕인 것 같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뉴욕은 살아 있는 하나의 캐릭터로써 다가 온다

다음 소설은 좀 더 독자에게 친절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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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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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뉴욕 3부작"을 어려운 소설이라고 했는데, 나 역시 그런 느낌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모르겠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쉽게 몰입이 안 된다

특히 잘 봉합되지 않은 듯한 결말이 마음에 안 든다

"달의 궁전"에서는 환상적으로 딱딱 들어맞는 결말을 맺었는데, "신탁의 밤"이나 "유리의 도시"는 다소 허무하다

 

폴 오스터는 인간이 처한 극단적인 가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가 노르웨이의 노벨상 수상자 함순이 쓴 "굶기"에서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의 소설에는 꼭 극단적인 기아가 등장한다

그것도 주인공이 선택해서 겪는 가난과 기아다

말하자면 해결책이 있는데도, 자신의 극기 정신을 시험이라도 하듯 스스로를 극한적인 상황으로 몰아 세운다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 퀸은 스틸먼 부부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아파트 앞에서 거의 24시간 내내 보초를 선다

수중에 있는 돈이 300달러였는데, 그것을 다 쓰고 나면 현금지급기까지 가는 동안 침입자가 등장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는 최대한 아껴서 쓴다

극단적인 단식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으로 남겨 두고 (사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거기에 가까이 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

말하자면 생존할 수 있는 가장 적은 양의 식사로 버티는 것이다

또 잠자는 사이에 침입자가 나타날 수 있으므로 수면 시간도 최소한으로 줄인다

그는 15분 간격으로 잠든다

15분 마다 울리는 교회 종소리에 생활 리듬을 맞춰 깨고 일어나다 보니, 나중에는 종소리와 맥박 소리를 구분하기 힘들다고까지 한다

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철제 쓰레기통 안에서 지낸다

청소부가 오기 직전에만 쓰레기통을 벗어날 수 있다

 

대체 그는 왜 이런 극단적인 일을 하는가?

스틸먼이란 남자를 지킬 필요가 뭐란 말인가?

피터 스틸먼은 생명의 은인도 아니고 국가 기밀을 알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설사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대체 퀸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를 지킬 필요가 있을까?

작가는 여기에 대해 별다른 설명이 없지만, 아마도 자기 암시에 빠져 스스로를 세뇌시킨 것 같다

 

처음 퀸의 집에 전화가 걸려 오는데, 폴 오스터라는 사설 탐정을 찾는다

피터 스틸먼의 부인 버지니아는 폴 오스터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퀸에게 자꾸 부탁을 하고, 결국 퀸은 호기심이 일어 탐정 행세를 하게 된다

상대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철썩 같이 믿고 있다면, 때로는 그 사람 행세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기도 하다

사실 퀸은 추리 소설 작가로, 윌리엄 윌슨이라는 필명으로 은둔 생활 중이었다

말하자면 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아내와 아들은 일찌기 죽었고, 사람과의 접촉을 꺼려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겼으며, 출판사와의 계약 문제도 대리인을 시키는데 그 대리인과도 직접 만나지 않고 우체국 사서함을 이용할 정도다

이처럼 자신을 숨기는 데 익숙한 퀸은, 다시 폴 오스터라는 탐정 역할를 어렵지 않게 받아 들인다

(은둔하는 사람도 작가가 좋아하는 캐릭터다)

 

그의 의뢰인은 아버지에 의해 가둬진 가엾은 아들인데, 아버지 스틸먼은 신학 교수였다

인간 본연의 고유한 언어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스틸먼은 두 살 먹은 아들을 9년 동안 방에 가두어 기른다

사회에서 말을 배우지 않아도 언어가 본능이기 때문에 스스로 말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스틸먼은, 과연 그 언어가 어떤 것인지 (바벨탑을 쌓기 전 모든 인류에게 단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은 바로 그 언어)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실험들이 과거에도 몇 번 행해졌는데 그들은 모두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지 못했다

또 늑대 소년 같은 case가 몇 건 발견되면서, 인간들과 함께 살지 않으면 언어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

(그런데 이 늑대 소년들은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몇 가지 언어를 배우긴 했지만, 물질과 섹스에 대해서는 별다른 흥미를 갖지 못하고, 그 개념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질이야 그렇다 치치만 왜 섹스에 대해서 무감했을까?)

그런데도 스틸먼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성경에 근거해 바벨탑 이전 최초의 언어를 알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책에 장황하게 소개된 여러 논문들을 읽으면서, 오늘날 인류의 번영을 이끈 건 어쩌면 과학 기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현학적이고 사변적이며 종교적인 담론들은 실상 우리 일상의 편안함에 별 기여를 못하는 것 같다)

 

결국 9년 만에 미치광이 아버지는 경찰에 붙들리고, 13년형을 산다

피터는 언어 치료사와 결혼해 그녀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런데 스틸먼이 출소하면서 협박 편지를 보냈고, 이 부부는 폴 오스터라는 유능한 사립 탐정에게 스틸먼의 동향을 살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퀸은 스틸먼을 집요하게 따라 다닌다

그는 스틸먼의 모든 행동들을 빨간 노트에 기록하고 감시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사라져 버린다

호텔에서 그를 놓친 퀸은 강박증에 휩싸여 아들 스틸먼 부부의 아파트 앞에서 거의 24시간 동안 감시를 한다

말하자면 스틸먼이 아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입구에서 원천봉쇄 하는 셈이다

 

나는 스틸먼이 퀸을 따돌리고 결국 아들을 죽일 거라 생각했는데, 작가는 뻔한 결말을 거부한다

스틸먼은 자살했고 (신문에 난다), 그가 열심히 지키던 아파트는 텅 비어 있다

스틸먼 부부는 진즉 이사를 갔던 것이다

공포에 시달려서였던지,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전화 번호도 먹통이 되서 찾을 길이 없다

더구나 퀸에게 사례금으로 준 수표는 부도 처리 됐다

몇 달 동안 집을 떠나 있자, 집주인은 아파트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 버렸고 갈 곳이 없는 퀸은 텅 빈 스틸먼 부부의 아파트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버지 스틸먼을 추적할 때 쓴 빨간 노트에 그 동안의 일을 기록하면서 햇빛이 비치면 글을 쓰고, 어두워지면 자는 식의 일상을 반복한다

신기하게도 음식은 항상 따듯하게 데워져 옆에 차려져 있다

그는 누가 가져다 놨는지 궁금해 하지도, 신기해 하지도 않는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3인칭 시점인 줄 알았는데, 역시 화자는 따로 있었다

퀸의 행방을 찾던 책 속의 화자는 그가 남긴 빨간 노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었던 것이다

그 집에 갔을 때 퀸은 사라지고 노트만 남는다

화자는 퀸의 행운을 빌면서 이 어이없는 이야기의 결말을 맺는다

사건의 개요가 밝혀질 거라 믿었던 나 같은 순진한 독자는, 그저 황당할 뿐이다

어쩌면 퀸은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처럼 어느 낯선 도시로 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오스터는 뉴욕을 떠난 퀸을 대상으로 또 다른 소설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소설에서는 특이하게도 작가의 실명이 등장한다

아멜리 노통의 "로베르트 인명사전"에서도 저자가 직접 등장해 주인공으로부터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폴 오스터는 사립 탐정이자 동명이인의 작가로 나온다

이 소설의 화자는 폴 오스터의 친구다

작가가 직접 등장한 만큼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 기대했는데, 결과적으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름만 빌렸을 뿐

독자에게 새로운 재미를 주기 위해서였을까?

 

뉴욕 3부작이라는 제목으로 세 가진 중편을 엮은 작가의 편집이 신선하다

그렇지만 "신탁의 밤"처럼 크게 공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그 독특한 아이디어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다

확실히 오스터는 내공이 깊은 작가임이 분명하다

그가 읽었던 소설과 시 평론집 "굶기의 예술"에서도 느낀 바지만,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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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냉정과 열정"이 한 때 무척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일본 소설은 왠지 정이 안 가 (스타일이 나랑 안 맞는다고 해야 하나?) 안 읽고 영화로 봤다

아주 재미없었다

진혜림이 예쁘다는 생각만 했다

그 작가 에쿠니 가오리가 쓴 소설을 읽게 됐다

제목에 우선 끌렸다

"낙하하는 저녁"이라...

"울 준비는 되어 있다"처럼 제목 짓는데 대단한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첫 도입부는 괜찮았다

툭툭 끊어지듯 묘사하는 서술 스타일이 신선했다

그렇지만 갈수록 이야기의 힘을 잃고 방황한다

줄거리의 축이 없다고 해야 하나?

특히 하나코의 자살 장면에서는 좀 황당했다

왜 죽었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혹은 개연성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정말 실망스런 결론이다

꼭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툭툭 끊어지는 서술들, 일정한 줄거리가 없이 그저 주인공 마음대로 흘러가는 전개, 그리고 늘 황당하리만큼 어이없는 결론들

플롯이 사라진 것도 현대 소설의 특징인가?

혹자는 CF를 보는 듯한 영상미에 치중하는 소설들이라고 하는데, 그런 소설은 읽고 싶지 않다

 

하나코란 여자에 대해 좀 더 개연적인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일상을 스케치 하듯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독자에게 아주 부족하다

하나코라는 캐릭터에 전혀 공감이 안 간다

마지막에 자살한 걸 보고 혹시 친동생을 사랑하는데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결국 죽음으로 끝을 보나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에 대한 작가의 해설이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독자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또 나카지마에 대한 설명도 거의 없다

그저 막연히 하나코의 뒤를 봐 주는 후견인 비슷하구나, 느낄 뿐이다

 

다만 다케오에 대한 리카의 애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15개월에 걸친 실연"이라는 광고 문구가 마음에 와 닿는다

1년을 사랑하면, 그 배가 되는 시간이 흘려야 비로소 이별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익숙해진 신경 회로의 고리를 끊는데 꽤나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래서 혹자는 사랑이란 느낌에 속지 말라는 얘기도 한다

습관적으로 문자를 보내고, 만나서 영화를 보고, 전화하는 등의 일상적인 행동들에 얽매여 그 상대가 없어질까 봐 헤어짐을 미루지 말라는 것이다

리카가 8년 동안 함께 산 다케오를 잊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15개월이 안쓰럽다

그렇지만 참 용감하게 잘 이겨낸다

지나친 비련에 빠지지 않고 자기 생활을 견지하면서 비교적 꿋꿋하게 견뎌 나간다

하루 쉬라고 하나코가 권했을 때, 단 하루라도 쉬게 되면 영영 일상의 궤도를 일탈해 버릴 것 같다고 굳이 휴가지에서 직장으로 출근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마지막에 하나코가 죽은 후 다케오네 집에 찾아가 그에게 덤비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확실히 일본은 섹스에 자유로운 것 같다

리카는 거의 다케오를 강간하려고 하는데, 럭비 선수 출신인 남자를 강간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남자들은 섹스의 본능에 대해 누누히 강조하지만, 막상 하고 싶지 않을 때 여자가 덤비면 아주 싫은 모양이다

(문득 강간당할 때 너도 즐기지 않았냐는 뻔뻔한 놈들의 얼굴을 갈겨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결국 리카는 그렇게 거절당한 후 비로소 다케오를 마음에서 접는다

이제 정말로 그를 잊은 모양이다

 

다케오가 단 사흘 만에 반한 하나코와 (리카와는 8년을 살았는데) 리카가 함께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생각해 봤다

거의 남편이나 다름없던 남자의 새로운 애인과 한 집에 산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하나코의 캐릭터를 미루어 보면 충분히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는데, 만약 이런 독특한 여자라면 나도 제지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것 같다

하나코가 정작 다케오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다케오가 가엾어 마음아파 하던 리카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너무 사랑하면, 비록 내가 버림받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가 행복하길 바랄 수 있는 법이다

나의 비참함은 그대로 놔 두고, 그의 불행에 가슴아파 할 수 있다

 

꽤나 인기가 있어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도 된 모양인데 내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15개월에 걸친 이별 과정은 공감이 간다

(물론 진짜 이별은 단 사흘 만에 결정됐지만, 마음으로부터의 이별은 길었다)

리카처럼 실연을 견디는 순간들을 담담히 글로 써 간다면 조금은 편하게 이겨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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