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
알랭 드 보통 지음 / 한뜻 / 199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은 일상적인 감정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데 탁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다

"생활 속의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붙여 줘도 괜찮을 작가다

"삶의 철학 산책"이라는 에세이에서도 대가들의 철학을 일상성 속에 잘 녹여 놓더니만, 이 책에서도 사랑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철학적으로 훌륭하게 풀어 놓는다

이 책과 더불어 그의 첫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꼼꼼히 읽는다면 다른 연애 지침서는 평생 안 봐도 좋을 듯 싶다

 

이 철학 소설의 주인공은 앨리스라는 24세의 영국 여자다

그녀는 일곱 살이나 많은 에릭이라는 부유한 금융가와 사귀고 있다

(개인적으로 놀라운 것은 에릭이 원래 의사였으나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어 금융계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의대 6년과 수련 5년을 다하고 군대 3년까지 다녀 와야 비로소 정상적인 의사로 대접받는 우리 사회에 비하면 영국 의사들의 성취는 왜 이렇게도 빠른 것인지!!

우리 나라에서도 의사라는 직업이 예전같은 대우를 못 받고 있지만, 의사가 국가 공무원 신분인 영국 역시 돈을 벌기 위해 금융계로 향하는 현실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지난 번 보통의 소설을 읽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섹스는 결혼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앨리스는 이미 고등학교 때 성관계를 경험한 것으로 나온다

누가 처녀 딱지를 떼 줄 것인가에 골몰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마치 총각 딱지 못 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우리나라 남자들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성에 대한 이중적 잣대 때문에 우리나라의 매매춘이 활발한 것인가?)

앨리스는 에릭과 만난 첫 날, 그와 섹스를 치루므로써 사귀기로 한다

사귄다는 의미가 곧 섹스를 해도 좋다는 뜻인 셈이다

 

에릭은 나이도 많고 돈도 많기 때문에 앨리스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다

오랫동안 남자 친구가 없던 앨리스는 한껏 비관해 있던 처지라, 신문에 소개된 멋진 레스토랑을 데려가는 에릭에게 완전히 빠져 든다

이 레스토랑의 음식맛에 대한 평가에서 성격이 드러난다

앨리스처럼 타인의 평가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는 사람들은 신문의 극찬을 받은 곳이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그녀와 함께 사는 친구는 자기가 맛있다고 느낀 곳만 훌륭하다는 평가를 한다

아무리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실려도 자기가 맛없으면 형편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에 영향받지 않고 내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주체성을 갖기란, 요즘같은 대중 매체 시대에는 참 어려운 문제다

 

앨리스는 직장 생활에 주는 억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 곳을 휴가를 떠난다

그러나 휴가지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피곤하고 괴롭다

사람들은 흔히 휴가지로 떠날 때 일에 지친 자신은 버려 두고 가길 원하지만, 근심까지 함께 비행기에 싣곤 한다

즉 우리는 여행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 자신을 며칠의 휴가를 통해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다

약간의 기분전환은 될 수 있을지라도 결국 나를 둘러싼 일상은 늘 반복되기 마련이다

 

앨리스는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랐다

그래서 그녀는 전형적인 런던인인 에릭과는 취향이 사뭇 다르다

에릭의 취향은 주류이고 앨리스의 취향은 비주류다

앨리스는 끊임없이 에릭에게 자기 취향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하는 당위감을 느낀다

은연 주에 에릭은 비주류 문화권자인 앨리스의 취향을 얕보는 것이다

만약 그들 사이의 주도권이 앨리스에게 있었다면 에릭은 그녀의 색다른 취향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일반적인 취향이 얼마나 평범한가 따위로 우울해졌을 것이다

 

에릭은 사회적 성취를 중요시 하는 사람이라 앨리스와의 약속을 일 보다 하찮게 여긴다

앨리스와 주말에 만나기로 했어도, 바이어와 약속이 잡히면 그녀와의 약속을 펑크낸다

그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앨리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 그는 앨리스가 회사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 한다

그런 까닭에 회사일을 열심히 하는 앨리스는 사랑하지만, 회사일로 징징 대는 꼴은 못 본다

그는 자랑스런 커리어 우먼을 원하는 것이다

 

이 둘의 역학 관계는 앨리스에게 새로운 남자, 필립이 나타나면서 깨진다

고가구를 좋아하는 앨리스의 취향을 에릭이 비웃었기 때문에 그녀는 필립과 전시회장에 간다

그녀는 자신의 자잘한 얘기들, 에릭이 하찮게 여기는 일상의 문제들을 열심히 들어 주는 필립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스타일을 존중해 주지 않는 에릭에게 점점 분노를 표출한다

대안이 생기면 당당해지는 법이다

에릭은 그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지만, 관성의 법칙에 익숙한 그는 계속 앨리스에게 주도권을 행사하려 들고, 결국 앨리스는 그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에릭 없으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가 될 것 같던, 이 타인지향적 아가씨는 이제 에릭의 거드름을 받아 주기에 넌더리가 난 것이다

결국 그녀는 몇 달 후 필립과 식료품점에서 재회한 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이제 좀 더 평등한 관계가 시작될 것임이 분명하다

 

타인의 평가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앨리스라는 캐릭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고 남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애쓴다

이런 여성이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되는 남성을 만날 경우, 주도권을 상실한 채 불평등한 관계가 되는 건 뻔한 수순이다

보통은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또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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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16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게 읽은 책이에요.

가끔 들러서 리뷰 곶감 빼먹듯 하나씩 읽어보겠습니다.
 
남자 -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 / 들녘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정말 힘들게 읽은 책이다

독일어 책들은 대체적으로 지루하다

왠지 감성이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쉽게 몰입이 안 된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다가, 희곡 등이 추가되서 읽기 더 힘들었다

어지간해서는 책을 가운데 놓지 않는 약간은 강박적인 성격 때문에 간신히 읽은 책이다

 

요즘 유행하는 주제인 본성과 양육 중, 본성 쪽을 신뢰하는 나로서는 남녀간의 일반적인 차이도 슬슬 인정해 가고 있다

소위 남자다움이라는 것은 우리 문화에만 있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자주 접한다

다만 우리 문화가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유달리 그 차이를 강조한다는 생각이 든다

독이 남자들 역시 한국의 남자들처럼 내면적 세계 보다는 외면적 세계를 더 중요시 한다

저자는 재밌는 예를 드는데, 동창회에서 남자들이 수십년 전의 장난꺼리나 선생님 얘기를 떠드는 이유는 자기 속마음을 얘기하기 싫어서라고 한다

여자들이 감정의 교류를 중시하는 반면, 남자들은 외부적 성취를 더 우선시 한다

남자가 여자의 감성에 귀기울이고 동감하는 때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애쓸 때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남녀는 아주 다른 족속이 아닐까?

 

남자가 사회성을 중시하고 여자가 친밀함을 우선시 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오래 통용된 것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오히려 지나치게 오랜 시간 동안 지배 이념이었던 까닭에 남녀평등주의자들의 공격을 받는 형편이다

확실히 최근까지 여성은 사회적 성취로부터 소외되어 가정을 활동 무대로 삼았다

진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자가 사회적 성취 보다는 개인간의 친밀함을 중요시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여성들이 가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 사회는 패러다임의 거대한 전환을 겪고 있다

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의 자연스럽 결합도 가능해질 것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같은 실용 지침서 보다는 수준이 높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의 분리라는 근본적인 맥락에서는 같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로 이제는 남성학이 연구된다고 하는데, 한 번쯤 관심을 가져 볼만한 문제다

남성들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도를 시작한 걸 보면, 이제 그들도 사회의 절대 강자는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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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녀 혁명 - 아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메들린 케인 지음, 이한중 옮김 / 북키앙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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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을 이기주의자로 몰아 세운다면, 아이를 낳은 사람의 이기심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연 아이를 낳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국가 발전에 이바지 하고 인류의 영속성을 이어 가려는 고귀한 사명감 때문에 출산을 결정하는 것인가?

사회 구성원을 키워 다음 세대를 안정화 시키는 가정의 노력을 폄훼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자녀 가정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서는 안 될 것이다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전적으로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에 달린 문제이므로 스스로에게 선택권을 줘야만 한다

더불어 여성과 모성애의 관계는 남성과 부성애의 관계 수준으로 좀 떨어뜨릴 필요가 있다

실제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권리는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하지 않으면서 (즉 남자의 성씨를 따른다거나 친권이 아버지에게 있는 것 등), 정작 출산과 양육에 따른 의무감은 온통 어머니에게 부과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생각만큼 혁명적이거나 주장이 강한 책은 아니다

"무자녀 혁명"이라는 책 제목만큼 충격적인 책은 아니다

아마도 저자 자신이 늦은 나이에 출산을 경험한 어머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더욱 중립적이고 올바른 시각을 제시한다

늦은 나이에 결혼해 아이를 간절히 희망했기 때문에 아이가 주는 기쁨을 충분히 알고 있는 저자는, 가정에서 아이의 역할을 과소평가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무자녀 여성들을 편견없이 바라 보자고 제안한다

이제 무자녀 가정은 동성애 커플처럼 보호받아야 할 소수 세력이 됐다

실제로 2001년 현재 미국 가임기 여성의 53%가 아이를 갖기 않는 상태일 정도로 수적으로 증가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주류가 아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힐 수가 없는 처지인 것이다

 

저자는 아이가 없는 상태를 세 가지로 분류한다

먼저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childless 대신 chuldfree라는 용어를 쓴 저자는 종교적, 환경적, 확신 등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종교적인 경우야 수녀들을 떠올리면 되고, 확신에 의한 경우라면 아이를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해당된다

그런데 재밌는 건 환경적인 이유를 아이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출산률 저하가 국가 경쟁력을 악화시킨다고 걱정하지만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보면 인구는 포화 상태다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그들은 인구를 줄이는 것이 자원을 보다 많이 나눠 가지는 길이라고 믿는다

환경의 개념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된 셈이다

 

확신에 의해 아이를 안 갖는 사람들은 모성 신화와 부딪치게 된다

우리 사회는 모성이 본능임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자는 뭔가 잘못된 거라는 편견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쥐 실험을 통해 새끼를 키우고자 하는 모성 유전자가 없는 쥐들도 발견된다고 한다

즉 모든 여성이 다 아이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이 이성을 사랑하지만 동성에게서만 애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듯, 대부분이 자신의 아이를 원하지만 그렇지 않는 소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건 타고난 정서를 도덕적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아이를 못 낳는 불임 여성의 사례들은 눈물겹다

워낙 입양이 활발한 나라라 불임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은 미처 몰랐다

3세계 국가에서까지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는 사람들이라 불임이면 간단히 입양을 결정하는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 역시 자기를 닮은 2세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한 평범한 정서를 가진 사람임을 알게 됐다

불임 시술에 들어가는 엄청난 경제적, 감정적, 시간적 노력들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부분은 10년 가까이 고통을 맛본 후에야 비로소 포기를 한다

그리고 주변 아이들에게 눈을 돌린다

나는 아이에 대한 욕구가 약한 사람이라 만약 나나 파트너가 불임이라면 담담하게 받아 들일 것 같다

그렇지만 실제로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입양도 활발하고 대를 잇는다는 생각이 약한 미국에서도 불임 부부의 고통이 이 정도라면, 불임 정도가 아니라 아들 못 낳는 것을 칠거지악의 으뜸으로 여기던 우리 나라는 어떨지 알 만 하다

아들을 못 낳아도 쫒겨 날 판인데, 아예 임신 자체를 못한다면 그녀는 정상적인 여자로 간주되지 못할 것이다

혈통의 순수함을 강조해 입양을 매우 꺼리는 (그래서 고아 수출국이 된) 우리 정서상 불임으로 판정나면 다른 대안 없이 상실감 속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가능성이 크다

 

요즘은 어쩌다 보니 무자녀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도 늘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사회적 성취를 위해 출산을 늦추다 보니 임신하기 힘들어 지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 이유 때문에 출산을 미루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DINK 족이 늘어 양육에 드는 비용을 스스로에게 투자하고자 한다

 

무자녀 가정에는 이처럼 많은 사연이 숨겨져 있다

단순히 그들을 이기적이다고 몰아 세울 수 없다

오히려 아무 준비 없이 부모가 된 후 아이들을 팽개쳐 두는 것 보다는, 과연 내가 부모 노릇을 하기에 적합한가를 먼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사회는 점점 다양해지고 구성원들의 욕구를 가능한 많이 수용하는 쪽으로 흐르는 것 같다

과거와 같은 획일적인 잣대로 무자녀 가정의 이기주의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인종차별이나 남녀차별 등과도 비슷한 문제다

각자의 선택을 존중해 줄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다

좀 더 많은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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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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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서평이 워낙 좋아 기대를 많이 한 책인데, 생각만큼 재밌지는 않다

열하일기라는 거대한 텍스트를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저자의 서술 태도는 아무래도 과장과 비약이 심하다

고전의 현대적 해석은 많이 시도되야 할 일이지만, 평범한 독자들에게까지 그 감동을 전하는 일은 녹녹치 않다

지금까지 읽은 역사 에세이 중 가장 재밌고 원본에 충실한 책으로 나는 늘 "조선국왕이야기"를 꼽는데, 실록의 행간을 이 책처럼 잘 짚어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덕일이 쓴 에세이들에서도 늘 느끼는 것이지만, 과장이나 논리의 비약이 지나치면 원본의 가치까지 훼손되는 법이다

 

저자는 박지원을 유목민으로 본다

하나의 사상에 정착하지 않고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적인 노마드로 여긴다

패관잡기로 분류될 정도로 박지원은 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한다

문체반정이라는 사건으로 유명한데, 고문 대신 잡문을 쓴다고 정조로부터 반성문을 제출하라는 명을 받는다

지금 생각하면 고문이야 말로 정형화 되고 딱딱한 죽은 글처럼 느껴지는데, 18세기 조선은 소설이나 개인적 감상의 묘사마저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였던 것 같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이국땅에서 낯선 문물을 보고 느낀 점이나 여정, 들은 이야기 등이 어우러진 재밌는 여행기인데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이런 식의 잡문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글이란 모름지기 학문적이고 나라에 도움이 되며 충효 사상을 구현하는 당위성을 지녀야 한다는 분위기 탓이었다

오늘날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 죽은 글로 치부할 것이다

박지원은 개인의 감정을 가장 중시하는 현대적 감각을 가진 사람인 셈이다

 

박지원은 과거에 뜻을 버리고 자유로운 학문을 추구한다

노론의 명문 대가에서 태어났는데도 과거 시험을 거부한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출세로부터 자유롭기는 참 어렵다

집안 환경이 좋아 친구나 친적들이 높은 자리에 있는데 자신만 뒤처졌다고 생각하면 심적 압박을 이기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안이 좋고 학식이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으면 스스로 선택한 자유에 대해 당당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능력이 되도 안 하는 것이니, 오히려 더 멋지게 보일 수도 있다

패문잡기를 즐겨 쓴다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반성문까지 요구받을 정도이면, 과거라는 시험 제도 자체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저자는 박지원과 정약용을 나란히 비교한다

두 사람은 일생이 불우했다는 점만 빼고는 겹치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다

박지원이 노론 출신이고 정약용이 남인이었다는 점만 봐도 벌써 그 성향을 알 만 하다

덩치가 커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박지원은 과거를 거부하고 일평생 벗과 교우하며 자유로운 학문을 추구한 유목민이었던 반면, 단아한 풍채의 선비였던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당시의 지배 이념을 쫒아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애쓰던 사람이다

둘 다 18세기 조선이 낳은 위대한 천재들이라 인정받는 만큼 누가 옳으냐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둘의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는 게 흥미롭다

남인들은 조선 사회에서 계속 소외당하면서 천주학을 스스로 받아들이는데, 저자는 천주교 자체의 배타성을 지적하면서 남인 역시 사상의 경직성을 피할 수 없었다고 논평한다

 

사실 이 문제는 실학이 정말 근대성을 지니고 주자학을 벗어나고자 하는 주체적 학문이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18세기에 부흥한 실학을 두고 근대의 맹아가 보였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주자학의 극복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 먼 과거로 회귀를 바란다고 한다

즉 현재의 폐단을 바로 잡아 과거의 명징함과 옮음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다

저자를 완전히 사로잡은 이 멋진 연암 선생도 청나라 학자에게, 조선의 자랑은 부녀자들이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것이라고 했다니, 그들의 기본적 사상이 주자학이였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가 이 부분에 대한 논평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열하일기를 여러 번 읽었을텐데도 아무런 언급이 없어 아쉬웠다)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사상이 혁명적이었다기 보다는, 기존 질서의 경직성을 탈피해 보다 자유로운 학문 추구를 원했다고 해 두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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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4-11-11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이책도 인문학 베스트 셀러인데 아직 보지 못한... 보고픈 책이죠. 고전의 리라이팅붐에 한 몫 한 책.
 
음식혁명
존 로빈스 지음, 안의정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책을 접할 때마다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늘 가치관의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웰빙 열풍이 불면서 운동을 중요시 하고 유기농 야채를 먹는 채식주의자가 되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육식이 건강을 망칠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도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심지어 육식이 지구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정말 그럴까?

 

차를 타는 대신 가까운 거리는 걷고, 칼로리가 높은 패스트 푸드 섭취를 줄이는 대신 야채를 많이 먹으라는 기본적인 명제는 동의한다

사실 우리는 지나치게 편하고 풍족해진 탓에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다

사무직에 종사하는 오너 드라이버라면 주차장에서 사무실까지의 거리 외에는 거의 걷지 않을 것이다

대신 맥도널드나 T.G.I.F.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을 즐기는 신세대라면 그는 틀림없이 넘쳐 나는 칼로리를 배나 허리에 저장하고 다닐 것이다

요즘처럼 음식이 넘쳐 나는 시대에 적정 체중을 유지하면서 건강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전통적인 식단으로 돌아가는 길 뿐이라고 생각한다

식욕을 억제하지 않고도 살이 찌지 않기 위해서는 채식을 즐길 수 밖에 없다

또 자동차를 멀리 하고 가까운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굳이 수십만원을 피트니스 클럽에 갖다 바치지 않아도, 자동차가 주는 편안함을 포기한다면 얼마든지 날씬한 체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전제들에는 동의하지만, 그 이상의 논의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어쩌면 아직까지 내 가치관 정립이 안 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환경을 살리고 동물들을 인도주의적으로 대하기 위해서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외치는데, 환경주의자가 곧 채식주의자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

또 유전자 변형 식물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내지만, 그의 주장들을 모두 받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인류가 기아로부터 벗어난 가장 큰 이유는 화학 비료와 품종 개량 덕이 아닌가?

전체적인 이익 대신 부분에 집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연 저자의 주장대로 모든 곡물에 유기농 기법을 도입하고 자연 그대로에 맡겨 둔다면 요즘 같은 생산량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우유와 달걀의 폐해를 주장하는 대목에서도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완전한 채식주의자라는 신념에 따라 안 먹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이 식품 자체가 우리 몸에 피해를 준다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은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다

우유나 달걀은 영양학적으로 완전 식품에 가깝다고 여겨져 왔다

그런데 단순히 이것이 낙농업자들의 로비 탓이었다는 식으로 넘길 수 있는 문제인가?

기존의 학설을 뒤엎으려면 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근거와 많은 자료들을 제시해야 하는데, 저자는 그저 관념에 의존해 몇몇 사례들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칼슘 섭취가 적은 사람이 오히려 골절 위험이 낮다는 도표에서는 솔직히 할 말을 잃었다

저자가 정말로 이런 주장을 독자에게 납득시키고자 한다면 이 조사가 얼마나 많은 표본 집단을 대상으로 했는지, 변수 통제는 어떻게 했는지, 가설과 결론에 어느 정도의 상관 관계가 있는지 등 수많은 고려 사항들을 다 언급해야 할 것이다

즉 학술적인 책임감이 뒤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가축들의 끔찍한 사육 환경에 대한 성토는 깊이 공감한다

흔히 서양인들은 우리나라의 보신 문화를 경멸하는데, 만약 개를 가축에 포함시킨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 역시 가축에 대해서는 끔찍할 정도로 잔인하게 대한다

소나 돼지는 잡아 먹으면서 왜 개는 안 되냐는 주장은, 개를 가축의 범위에 넣는다면 문화적 상대성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브릿지 바르도가 채식주의자라면 그녀의 비판은 일관성이 있다

만약 그녀가 육식을 하면서 한국의 보신 문화를 야만적이라고 비판한다면, 그녀는 자기 모순에 빠진 셈이다

 

동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걸 보면 확실히 도덕 관념은 진보하는 것 같다

백년 전만 해도 버젓이 노예제가 시행됐는데 이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다는 개념을 당연시 하고, 수천년 동안 약자였던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투표권을 준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대명제가 받아들여지자, 이제는 그 개념을 동물에게까지 확장시킨다

어쩌면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동물들 역시 인간에 준하는,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받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육식을 즐기는 사람에게도 가축 사육의 열악한 환경은 분노할만 하다

언젠가 한 박물관 앞에서 자연 체험의 일부로 곰 두 마리를 우리에 가둬 놓은 걸 본 적이 있다

아직 새끼인데도 우리가 비좁아 보이는데, 과연 저들이 자라게 되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이 갔다

동물 학대라고 분노했는데, 가축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저자가 자세히 기술한 축사 환경은 말 그대로 움쩍달싹도 할 수 없는 최소한의 공간이다

닭 같은 겨우 수백마리를 한 우리에 집어 넣으면 날개를 못 펴는 건 물론이고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를 쪼게 되므로, 심지어 부리까지 잘라 버린다고 한다

송아지는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운동을 못하도록 체인을 감아 놓는다

돼지들이 좁은 축사에서 배설물과 한 덩어리가 되야 함은 물론이고 너무 좁은 나머지 서로의 꼬리를 물기 때문에 단미까지 한다고 한다

 

체중 증가를 위해 지나치게 사료를 먹이고 운동을 못하게 하므로 대부분의 가축들은 심장병에 걸린다

이들에게 먹이는 항생제가 사람에게 축적됨은 물론이다

도살할 때 전기봉을 쓰는데 한 번에 죽지 않는 경우는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절단한다

돼지 같은 경우는 항문에 쇠꼬챙이를 집어 넣어 던진다고 한다

사진까지 실린 설명들을 읽으며 우리가 단지 그들을 먹는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이런 식으로 훼손시켜도 되는지 부끄러워졌다

이미 유럽에서는 공장식 축산제가 금지되어 좁은 우리에 가두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죽지 않은 상태에서 도살하는 것도 금지됐다고 한다

그들이 외치는 동물 보호가 단순한 구호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야생 동물만 보호되야 하는 게 아니라, 가축들 역시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살 권리가 있다는 얘기다

 

개를 먹는 것은 분노하면서 왜 돼지나 소, 닭등이 끔찍한 환경에서 사육되는 것에는 무심하냐는 저자의 비판에 깊이 공감하는 바다

사실 나도 우리의 보신 문화를 혐오하긴 했지만, 가축들이 그런 환경에서 사육되고 도살되는지는 미처 몰랐다

저자는 고기 먹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목축업자들과 맥도널드 같은 자본가다

가축에게 최소한의 환경도 제공하지 않은 채 광고의 이미지를 이용해 돈을 버는 그들의 뻔뻔함을 비난한다

저자 같은 환경주의자들이 힘을 합친 덕에 맥도널드는 닭에게 좀 더 넓은 평수의 계사를 제공하기로 했다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사실 내가 패스트푸드를 안 먹는 까닭은 지나친 칼로리 과잉 때문이었다

정크 푸드라는 명칭답게 영양소는 적으면서 칼로리는 많은 햄버거 등이 콜레스테롤을 높히는 등 몸에 좋은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음식의 영양학적 가치를 떠나 이렇게 끔찍한 환경에서 기른 가축으로 햄버거를 만든다면,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불매 운동을 벌일 만 하다

이제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 푸드 기업들은 가축에게 좀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야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소비자들이 생명의 존엄성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문제는 남는다

가축들의 고통에 공감을 느낀다면, 햄버거 뿐 아니라 계란과 우유 등도 먹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가축 그 자체를 먹는 건 아니지만, 역시 우유와 달걀을 얻기 위해 소와 닭 등은 좁은 우리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한다

양식장에서 항생제로 길러지는 생선은 또 어쩌란 말인가?

결국 동물들이 갖는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저자처럼 완전한 채식주의자, 즉 배전이 되야 한다는 결론이 난다

음식에 대한 욕구를 떠나서 동물성 단백질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게 과연 저자의 주장처럼 오히려 건강에 이롭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심지어 저자는 꿀도 벌을 가둬 키워 얻는 것이라고 제한을 두려 하는데, 참 난감하다

(다행히 난 꿀은 싫어한다)

먹이 사슬이라는 자연의 법칙 면에서 봐도 우리가 육식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부당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면서 생태계가 파괴되지 않을 정도의 도덕적 의무를 병행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동물을 다스릴 권한을 줬다고 하지만, 그들을 마음대로 짓밟고 멸종시키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나는 완전한 채식주의자는 될 수 없고, 또 도덕적으로나 환경적으로도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범위를 좀 더 확장시켜 동물에게, 또 가축에게도 적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보다 생태적인 사육 환경을 제공하고 (영국이나 스웨덴처럼 공장식 축사를 금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도살할 때도 최소한의 고통으로 끝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바다

더불어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축산 자본 역시 환경과 가축들을 위해 보다 많은 기여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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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슴 2005-12-03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유와 달걀의 폐해를 주장하는 대목에서도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칼슘 섭취가 적은 사람이 오히려 골절 위험이 낮다는 도표에서는 솔직히 할 말을 잃었다-
-동물성 단백질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게 과연 저자의 주장처럼 오히려 건강에 이롭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선생이 지적하신 이 3가지는 부연설명이 빠졌지만 사실입니다. 이 부분은 선생께서 무지하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marine 2005-12-0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할 때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이고 과학적인 근거가 필요합니다 현재 의학책에서는 위의 세 가지 주장을 그르다고 봅니다 댓글 쓰신 분께서 기존의 학설을 부정하시려면, 기존 학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정확한 근거를 대는 게 먼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