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의 제국
그렉 크리처 지음, 노혜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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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이 점점 더 뚱뚱해지는 이유는 패스트 푸드점의 판매 전략 때문이라는 분석은 이미 수많은 책에서 다뤄졌다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패스트 푸드점은 비만에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세트 메뉴나 라지 사이즈의 개발로 가격을 올리면서 칼로리도 엄청나게 늘리고 있다
솔직히 1인분 양으로 너무 큰데도 패스트 푸드점은 계속 큰 사이즈만 내 놓는다
T.G.I.F.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도 마찬가지다
1인분 양으로는 지나치게 많다
그런데도 한꺼번에 많은 양을 주면서 값도 올린다
양을 절반으로 줄이고 가격을 내리면 좋을텐데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는 더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 점점 더 뚱뚱해진다
패밀리 레스토랑이 칼로리 공개를 안 하는 건 너무 당연하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면 그 엄청난 칼로리의 음식들을 아무 부담감 없이 먹을 수 있겠는가?
한 끼 식사에 천 칼로리가 넘을 정도라면 말 다했지, 뭐
그래도 패스트 푸드점은 가격이라도 싸고 칼로리도 패밀리 레스토랑 보다는 더 낮다
물론 패스트 푸드점처럼 자주 가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 놈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값도 무지하게 비싸지, 칼로리도 엄청나게 높지, 1인분 양도 지나치게 많지, 좋은 게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고 마케팅 때문에 왠지 거길 가야 세련되고 신세대 문화에 동참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켜 비싼 돈 주고 뚱뚱해지려고 기꺼이 간다
패밀리 레스토랑이야 말로 타도의 대상이다

요즘은 돈을 벌어서인지 패스트 푸드점에 갈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직장에서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맥도널드를 많이 찾는 것 같다
하긴 그 사람들이야 고기가 주식이니까 간단히 해결하는 좋은 식당일 것이다
우리처럼 우르르 몰려가서 같이 밥 먹는 게 아니니까 혼자 편하게 회사 근처 맥도널드 가서 싸게 한 끼 때울 것이다
그래서 다들 맥도널드의 폐해에 대해 목소리를 높힌다
맥도널드 세트 메뉴를 먹으면 기본적으로 5천원은 넘으니까 절대 싼 건 아니다
그런 허접한 음식을 먹으려고 5천원을 지불하느니, 차라리 한식을 제대로 먹는 게 낫다
이건 우리나라 현실이고 미국은 5천원 가지고 한 끼 식사하기가 힘들 것이다
미국에서는 맥도널드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싼 식당이란 얘기다
마치 우리나라의 백반집처럼 말이다

아직도 굶어 죽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넘쳐 나지만, 왠만큼 사는 나라에서는 칼로리 과잉이 심각한 문제다
생산력 향상으로 더 이상 못 먹어 죽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값싼 군것질거리가 얼마나 많은가?
저자의 지적처럼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사회 복지를 받는 대신, 싸구려 먹거리로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기분이 우울할 때 먹는 것과 텔레비젼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그게 제일 돈이 적게 들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하루 평균 4시간 동안 TV를 시청한다고 한다
5시에 퇴근해서 집에 가면 7시부터 11시까지 줄곧 TV를 시청한다는 소리니, 운동할 시간이 없는 건 너무 당연하다
비디오 게임, 인터넷, TV 등이 더해져 우리는 소파에서 꼼짝달싹도 안 한다
싸구려 군것질거리들로 입을 만족시키면서 우리의 신체는 휴식이랍시고 그걸 즐기고 있다
다른 여가 활동은 돈이 많이 드니 시도할 엄두가 안 날 것이다
당장 운동 하나만 하려고 해도 돈이 든다
이러니 흑인이나 멕시칸들의 비만이 심각할 수 밖에

못 사는 동네는 공원 하나 제대로 없다
그러니 운동할 공간이 없는 셈이다
치안도 형편없어 어두워지면 나가지도 못한다
어디서 운동을 하겠는가?
잘 사는 동네는 치안도 확실하고 공원 조성도 잘 되어 있다
백인일수록 날씬하고 유색 인종일수록 뚱뚱한 건 필연적인 결과다
더구나 백인 중산층들은 시간이 나면 돈을 들여 스포츠 활동을 즐긴다
또 그들은 칼로리가 높은 싸구려 음식 대신 영양이 풍부하지만 칼로리는 낮은 좋은 식품들을 섭취한다
비만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다르다
못사는 사람들은 먹는 게 남는 거라고, 마음껏 멋기라도 해야 한다면서 비만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잘사는 사람들은 뚱뚱한 것은 곧 자기 관리의 실패라고 보기 때문에 날씬해질 것을 서로 격려한다
인식부터 다른 셈이다

HFCS, 이른바 액상과당은 설탕보다 칼로리가 월등히 높고 팜유 역시 콩기름 보다 훨씬 높다
그렇지만 값이 싸기 때문에 (설탕은 3세계 국가 보호 차원에서 높은 가격에 묶여 있고 싸구려 팜유는 말레이사아와의 무역을 위해 많이 수입했다) 식료품 가격을 내리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다량 유통됐다
더구나 이들은 맛이 더 강하다
훨씬 바삭바삭 튀겨지고 단맛도 강하다
식료품 회사들은 앞다투어 이것들로 바꾸었다
칼로리가 올라간 건 당연하다
정부가 비만을 유도한 셈이다

코카 콜라나 맥도널드의 광고 작전도 대단히 공격적이다
그들은 학교에 광고판을 세우고 배달하는 대신 엄청난 기부금을 제공한다
돈이 없어 체육 시간까지 없애는 마당에 억 단위의 기부금을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학교 급식을 직접 하는 대신 맥도널드나 핏자헛 등에서 직접 배달을 한다고 하니, 칼로리가 얼마나 올라갈지 알 만 하다
이런 이미지 광고는 소비자들도 현혹시킨다
이런 음식들을 먹어야 유행에 뒤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이미지 광고를 한다
패스트 푸드이 폐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소비자라면 이 대열에 합류해야 할 당위성을 느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정착되는 것이다

비만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혹은 반짝하는 아이디어로 돈을 벌어 보려는) 잘못된 다이어트 책들도 문제다
다이어트가 돈이 되니까 여기저기서 그럴듯한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독자들을 현혹하는 것이다
진실은 하나, 적게 먹고 땀이 날 정도의 강도로 한 시간 이상 운동하는 수 밖에 없다
운동으로 일주일에 2500 칼로리를 소비해야 심장병 발생 위험도 줄어든다고 한다
2500칼로리면 적어도 하루에 400칼로리는 소모해야 한다는 얘긴데, 이게 만만치 않을 것이다
걷기로는 힘들 것이고 조깅 정도의 강도로 뛰어야 한다
결국 노력을 해야 이 풍요의 시대에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얘기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나이 들어서 살 찌는 건 괜찮다고 하는 얘기도 다 신화에 불과하다
나이와 상관없이 비만은 위험하다
왜 기독교에서 탐식과 게으름을 7대 악의 하나로 꼽았는지 알 것 같다
탐식은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특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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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밀레니엄 북스 31
제인 오스틴 지음, 성기조 옮김 / 신원문화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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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결론은 다소 실망스럽다
솔직히 재밌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18세기 영국 사회의 결혼 풍속도를 엿보는 재미는 있다
그 당시 시대상을 알려면 소설책을 읽으라는 말은 이 책에 딱 들어맞는다
왜 이 책이 고전이 됐을까?
겨우 21세 때 초고를 쓴 후 36세 때 출간하기까지 여러 번 수정 작업을 거쳤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통속 소설과 고전과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있는 것 같다
젊은 여자 작가의 가벼운 애정 스케치라고 해야 하나?
물론 지나치게 통속적인 줄거리 따위는 없다
그런 담백한 점이 마음에 들기는 하다
그렇지만 고전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 나에게, 이런 가벼운 필체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마치 "호밀밭의 파수꾼" 을 읽었을 때의 기분이랄까?
"위대한 개츠비" 나 "이방인"  혹은 "파리 대왕" 처럼 현대 소설들은 장중한 문체로 승부를 내지 않나 보다
소설의 내용 뿐 아니라 문체도 중요하다고 보는 나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이런 가벼운 문체에는 감동하기 힘들 수 밖에...

엘리자베드는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다
언니 제인은 착한 여자 컴플렉스에 걸렸거나 아니면 너무 순진해서 사람을 무조건 좋은 쪽으로만 보는, 어찌 보면 좀 답답한 여자다
막내 리디아는 열 다섯에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간 어처구니 없는 여자애다
로미오와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 줄리엣이 겨우 열 세살이었다고 하지만, 18세기 영국에서 15세면 결혼해도 괜찮은 나이였나 보다
오래 못 살아서 조혼이 유행했을까?
그러고 보면 이들은 학교도 다니지 않고 집에서 가정 교사나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학교가 생긴 게, 혹은 학교에 당연히 다닌다는 개념이 생긴 게 얼마 안 됐나 보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200년 전인데도 소설에는 학교라는 교육 기관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긴 우리나라로 치면 영,정조 시대니까 지금과 다른 게 당연하긴 하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도 참 옛날 이야기다
서양 소설은 근대 소설이라고 해도 왠지 현대 소설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 같다
서구식으로 현대화가 진행되서 그런가?
영정조 시대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오만과 편견" 이 이 정도의 현대성을 갖는 것도 신기한 일이긴 하다
당시 써진 우리 고전 소설은 아예 공감 자체가 안 되니까 말이다

결혼은 정말 사회적 결합인가 보다
하긴 두 사람만의 사랑이 전부라면 굳이 결혼이라는 복잡한 예식을 치룰 필요도 없다
연애와 결혼이 별개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인지도 모른다
일부일처제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다는 말은 명백히 무책임한 얘기다
본성에 어긋나지만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 있는 파트너들을 포기하고 한 사람과 평생 살겠다고 만인 앞에서 서약하는 게 아닌가?
연애 결혼이란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면서 생긴 새로운 결혼 제도라는 말이 생각난다
이 소설을 보면 재산과 신분, 영향력 있는 친척 등 결혼의 외적 조건들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심지어 가장 분별력 있게 그려진 주인공 엘리자베드 역시 위캄이 청지기의 아들이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그와의 결혼을 쉽게 고려하지 않을 정도다
위캄이 리디아를 데리고 도망간 것은 빚쟁이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지참금을 얼마 정도 가져 오면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그 액수가 적은 것에 감격한다
너무 어이가 없어 당황스럽기까지 한 내용이었다
딸을 데리고 도망간 것도 황당한데, 감히 지참금을 요구하다니!
그런데 가족이란 사람들은 그 지참금이 적다고 횡재했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설정이다
여자는 지참금을 들고 오고, 남자는 평생 그녀를 먹여 살리는 일종의 계약이었나 보다

지참금 이야기는 끊임없이 나온다
평범한 가문의 딸인 엘리자베드는 지참금을 많이 가져갈 수 없기 때문에 남자들이 자기와 결혼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돈과 사랑에 대한 함수 관계는 비단 요즘의 문제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
다섯 딸의 어머니 베네트 여사는 속물 중의 속물로 나온다
그녀는 제일 예쁜 큰 딸 제인을 부자인 빙리와 결혼시키려고 애쓰고 막내 리디아가 위캄과 도망갔을 때도 지참금을 적게 요구한다는 사실 때문에 크게 기뻐한다
부유한 다아시가 건방지고 오만하다고 싫어하지만 둘째 엘리자베드에게 청혼한 사실을 알고 얼마나 큰 횡재를 했냐고 금방 자세를 바꾼다
다아시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어머니를 엘리자베드는 한심하게 쳐다 본다
혹시 사윗감을 계속 싫어하면 어쩌나 고민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 베네트씨는 좀 낫다
엘리자베드가 콜린즈에게 청혼받았을 때 비록 그가 부자지만 인격이 형편없기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사실 그 집안의 땅은 베네트가 죽고 나면 콜린즈에게 상속될 예정이었으므로 베네트 여사는 엘리자베드에게 청혼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베필이라고 승낙을 거부한다
부자인 다아시가 청혼했을 때도 평소 그녀가 그의 오만한 성격을 싫어했던 걸 기억하고서, 넌 네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고 충고한다
이 정도 분별력을 가진 부모라면 자식이 존경할 만 하다
그렇다고 베네트 여사가 자식 앞날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다소 속물적이긴 한데, 베네트 여사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결혼이란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서 일생을 편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사윗감을 볼 때 재산을 최우선시 할 뿐이다
저자 역시 베네트 여사를 나쁘게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철이 좀 없다는 식으로만 얘기한다
당시 가치관이 결혼은 돈과 지위와 신분을 보고 한다는 관념이 강했던 것 같다

빙리와 제인이 맺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빙리가 일방적으로 마을을 떠난 후 둘의 관계가 끊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랬다
점잖게 묘사된 빙리가 실은 난봉꾼으로 제인을 데리고 논 건가?
아니면 숙녀에 대한 단순한 호의를 제인이 오해한 건가?
빙리의 여동생은 제인에게 호의를 베풀면서도 정작 그녀 대신 부자인 다아시의 여동생과 오빠가 맺어지길 노골적으로 제인에게 말하는 위선적인 태도를 취한다
어쩌면 친구로서 제인은 좋지만, 올케로서는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제인이 아름답고 착하지만 돈이 없으니까 오빠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엘리자베드는 그녀의 위선을 간파하고 교제를 끊으라고 하지만,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제인은 빙리와 헤어지더라도 그의 동생과는 계속 좋은 관계를 맺길 원한다
또 나중에 둘이 결혼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제인은 막연히 시누이와의 관계가 좋아지리라 믿어 버린다
도대체 이 소설에는 복잡할 게 없다
원래 당시 사교계가 왠만한 것은 이해하는 분위기였는지, 아니면 오스틴 자체가 복잡한 갈등 구조를 싫어하고 주변 상황에 크게 상심하지 않는 캐릭터를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은 건 마음에 든다
일반적으로 갈등 구조 유발을 위해 등장 인물간의 지나친 신경전이 벌어지곤 하는데, 이 소설은 그런 면에서 참 담백하다
엘리자베드는 자신에게 좋은 과거만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다아시는 고통스러운 기억은 원래 잊고 싶어 하는 거라고 답한다
마음에 드는 문답이다
엘리자베드는 다아시의 이모인 드 버그 부인에게 당당히 맞선다
사촌간의 결혼도 흔했는지 (하긴 찰스 다윈도 사촌 동생과 결혼했다) 그녀는 자기 딸과 다아시를 맺어 주려고 한다
자매끼리 서로 자기 자식을 맺어 주자고 약속하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진다
우리도 사촌끼리 결혼할 수 있다면 가족의 범위가 훨씬 더 확대될텐데...
드 버그 부인은 감히 너 같은 게 다아시의 베필이 될 수 없다고 모욕을 주지만, 엘리자베드는 전혀 기죽지 않고 다아시가 선택할 문제라고 대꾸한다
결혼 문제가 나오기 전,드 버그 부인의 화려한 저택에 초대받았을 때도 엘리자베드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부잣집 풍경을 즐긴다
가정 교사가 없어서 안됐다는 부인의 말에 배울 건 다 배웠다고 아무 모욕감 없이 말하는 그 여유라니!!
대단한 후원인을 얻었다고 드 버그 부인을 하늘 같이 받으는 콜린즈와 왜 이렇게 비교되는지, 그녀가 콜린즈를 택하지 않은 건 정말 잘한 것 같다

만약 우리나라 소설이나 드라마였으면 드 버그 부인이 결혼을 방해할 것이고 다아시는 이모를 설득하기 위해 괴로워 할 것이다
대체 성인인 다아시가 왜 이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그런데도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 극적 갈등 구조를 위해 사실은 별 영향력도 없는 가족의 허락을 얻기 위해 애를 쓴다
다아시는 결혼한다는 편지 한 장을 드 버그 부인에게 보내므로써 간단히 해결한다
이게 정상 아닌가?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 다들 마마보이 같다
성인이면서도 자기가 선택한 결혼을 책임지지 못하는 어린애들 같다
물론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억지로 설정한 거겠지만 말이다
(일본 드라마는 아예 가족은 등장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청춘물에 출연하는 배우 수도 적고 횟수도 아주 짧다고 한다 산뜻하게 남녀 간의 사랑에만 집중한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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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금난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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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재밌는 책이다
그림이 많아서 읽기도 쉽고 서양 고전 음악의 흐름을 잘 정리해 놨다
음악가들의 초상화가 많이 실려 보는 즐거움이 있다
오페라를 소개하는 책의 저자가, 그림에 관한 책이라면 그림을 보여 주며 설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음악은 들려 줄 수도 없고 안타깝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은 음악가의 초상화를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간다
더구나 경어체를 사용해 누구나 금방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내용도 정말 쉽다
클래식에 대한 내 지식이 짧아서 그런가?
나에게 딱 맞는 책이다

정명훈 같은 세계적인 지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금난새 정도면 꽤나 성공한 지휘자다
대중적인 명성도 얻고 이런 책도 쓰는 걸 보면 말이다
그가 부러운 이유는 이런 성공 보다도 음악을 진짜로 즐긴다는 느낌 때문이다
간간히 삽입되는 음악에 관한 에피소드와 감상들이 참 정겹게 느껴진다
음악에 대해 이 정도의 애정과 느낌을 가질 수 있다면 유명한 음악가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큰 불만은 없을 것 같다
뭔가를 진짜 좋아해서 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랄까?

두 명씩 비교해서 설명하는 방식도 마음에 든다
바흐와 헨델은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비슷한 시대에 활동한 반면 아주 다른 성격이었다고 한다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하고,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고 해서 바흐가 더 유명한 줄 알았더니만  의외로 바흐는 독일 시골 교회에 처박혀 당시에는 거의 무명이었다
반면에 헨델은 유럽을 종횡무진하며 나중에는 영국 국왕의 총애를 받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다
그나마 바흐가 작곡한 음악은 다 흩어져 후대에 멘델스존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면 영영 묻힐 뻔 했다고 하니, 당시 바흐의 위치를 알 만 하다
무려 20여명의 자식을 낳고 소박한 행복을 꿈꾸었던 바흐!!
그는 대위법 등 고전 음악의 형식미에 충실했고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만큼 대부분 신앙 고백 식의 음악을 작곡했다
첫부인과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과도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던 반면 헨델은 평생 독신이었다고 하니, 거의 모든 면에서 다 비교가 된다
음악을 비교해 가며 듣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슈베르트와 멘델스존도 큰 대비를 이룬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고 서른 한 살에 죽은 비극적인 삶을 산다
그는 알려진대로 가곡의 아버지다
멘델스존은 오케스트라를 운영할 정도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멘델스존은 음악 역시 고전미에 충실해서 아름답고 듣기 편하다
음악가들의 생애를 알고 나니 직접 듣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음악사 최고의 천재라면 당연히 모짜르트와 베토벤을 들 것이다
모짜르트는 워낙 어릴 때부터 유명했고 수많은 곡과 오페라를 남겼다
결국 천재들은 어려서부터 티가 나는 모양이다
노력해서 나중에 유명해진 사람은 역사에 길이 남기 힘든 것 같다
아홉살 때 교향곡을 작곡했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모짜르트는 모든 종류의 음악사에 안 나올 때가 없다
베토벤은 청력이 사라진 후에도 교향곡을 작곡한 대단한 인물이다
음악가에게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건 화가에게 눈이 안 보이는 것과 같은 형벌인데 어떻게 극복했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기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참 대단하다

로시니는 매우 활달하고 경쾌한 작곡가였다
로시니라면 베르디와 함께 오페라로 유명한 사람이다
젊었을 때 잠깐 번 돈으로 평생 먹고 살았다고 하니, 참 속 편한 사람이다
더구나 늙그막에는 먹는 재미로 살았으면서도 장수한 복받은 음악가다
오페라 작곡할 시간이 6주가 주어지면 4주는 먹고 마시고 놀다가 5주째 급하게 작곡하고 나머지 한 주에 대충 노래를 붙이는 식으로 작업하고도 음악사에 길이 남은 걸 보면 진짜 행복하게 인생을 산 남자다

스승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평생 사모한 나머지 독신으로 살았던 브람스는 성격답게 고전주의 형식을 중시했고, 조르주 상드와 9년 씩이나 연애한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었다
리스트는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닐 정도로 파리 음악계의 스타였는데 헝가리 출신인 줄은 몰랐다 (프란츠 카프카가 체코 사람인 걸 몰랐던 것처럼)
그래서 헝가리안 랩소디를 작곡했나 보다
리스트의 딸이 남편과 이혼하고 남편의 스승인 바그너와 결혼한 것도 재밌는 스캔들이다
바그너는 종합예술주의라고 해서 음악은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여겼다
그가 시도한 악극도 음악 중심의 가극 오페라에 비해 극적인 요소를 중시했다
그러니 히틀러나 니체 등이 좋아할 수 밖에!!
바그너는 오페라로 더 유명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등 귀에 익은 오페라가 많다

드뷔시나 라벨이 인상파 음악가이고 프랑스 음악의 자존심을 높힌 사람이라는 것도 새롭게 알았다
여기서부터 현대 음악가인가 본데 금난새의 설명은 여기까지다
음악가의 초상이 실렸는데 제일 멋진 건 슈베르트였다
다들 음악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자존심 세고 섬세하게 생겼다
아니면 브람스처럼 장중하고 거대하게 생겼거나
멘델스존은 유태인이었고 쇼팽의 아버지가 프랑스인이었다는 것도 새로운 사실!!
소나타가 3형식으로 이뤄지고 현악 4중주가 바이올린 두 대, 비올라, 첼로로 된 것도 새삼 알게 됐다

역시 알고 나니까 더욱 흥미가 생긴다
금난새처럼 음악에 내 느낌을 부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는 재밌는 놀이가 될 것 같다
음악에 관한 책을 좀 더 읽어 봐야겠다
처음 접할 때는 어렵기만 하더니 자꾸 보니까 중요한 내용이 반복되서 그런지 이제야 감이 잡힌다
앤서니 라빈스의 말처럼 뇌에 새로운 신경 회로가 생기기 때문일까?
기왕이면 음악에 관심이 많은 남자를 만나면 좋겠다
러시아 5인조처럼 아마추어 음악가라면 더 바랄 게 없고
가장 수준 높은 여가 활동은 직접 취미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음악을 듣기 보다는 직접 연주하고 그림을 감상하기 보다는 직접 그리며, 책을 읽기 보다는 직접 쓰는 시긍로 말이다
한차원 높히기 위해 일단 열심히 읽고 듣고 감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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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첸의 세계명화비밀탐사 탐사와 산책 8
모니카 봄 두첸 지음, 김현우 옮김 / 생각의나무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르네상스 그림 설명에 슬슬 질려가던 나에게 재미를 주는 책이다
새로운 각도로 미술사에 아이콘으로 작용할만한 그림 여덟 점에 대해서 다각도의 분석을 시도했다
일단 시도 자체가 새롭고 흥미롭다
외국 사람이 쓴 책은 아무래도 우리 정서와 달라서 그런지, 2%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공감을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도 이 책은 괜찮은 편이다
작품이 주는 미술사적인 의의 뿐 아니라 외적인 가치와 발표 당시의 상황 등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여덟 점의 그림만을 깊게 분석한 시도가 신선하게 느껴진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 미술까지 폭넓은 범위를 아우르고 있다

이 책의 첫 등장인물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다
피렌체의 아카데미노 미술관에 있다는데 이탈리아 갔을 때 가 볼 생각조차 안 했다
지금이라면 기를 쓰고 유명 그림이나 조각을 찾아 다닐텐데, 그 때는 워낙 무지할 때라 피렌체를 왜 가나 했었다
여행 일정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참 아쉽다
어쨌든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조각품을 제작한 미켈란젤로의 성이 부나로티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또 처음 이 조각이 제작됐을 때 성당 바깥에 세워져 왠 미치광이의 돌에 맞아 팔이 세 조각으로 부서진 일도 있었을 정도로 허술하게 관리된 걸 보고 놀랬다
걸작들이 처음부터 가치를 인정받고 대우받기는 어려운가 보다
시간의 무게를 이겨내고 여러 세대들에게 감동을 준 후에야 비로소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 같다
다비드상은 늘 완벽한 신체 구조의 대표로 언급되곤 하는데, 실제로는 해부학적 비례에 어긋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처음 계획은 천정에 매달아 놓을 생각이었으므로 (불안정 그 자체가 아닌가!!) 아래서 위를 올려다 보는 양식으로 제작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겨우 155cm에 불과한 미켈란젤로가 4m에 이르는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야 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다비드상 제작에는 피렌체 공화국에서 메디치 가문과 교황 세력을 몰아내던 혼란의 시기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돌팔매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처럼 독재 가문에 대항하는 공화국의 승리를 빗댔다는 것이다
예술가라면 돈과 상관없이 작품에만 매달릴 것 같은데,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명성을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얘기를 읽을 때면 의사가 돈벌이에 눈이 어둡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예술도 다 밥 먹고 살자고 하는 직업인데, 왜 예술가가 돈 버는 것에 사람들은 민감한 걸까?
명성에다 돈까지 얹혀지면 배가 아픈 시기심 때문일까?
어쨌든 평생을 가난과 싸운 고흐와는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르네상스 화가들은 그림을 신분 상승의 도구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걸작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바꿔야 할 따름이다

제일 관심있던 화가는 고야였다
유명세에 비해 내가 느낀 감동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고야의 그림에 대한 평가가 더욱 궁금했다
그런데 역시 그냥 얻은 명성은 아닌 모양이다
고야의 유명한 "1808년 5월 3일" 에 대한 해설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총을 맞는 흰 옷의 사내와 총을 쏘는 군인이 각각 두 개의 광원에 의해 비춰지고 있다는 식의 해설은 무척 유용했다
이런 전문적인 해설이 아니라면 절대 내 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피카소나 폴락 등도 그렇지만 어떤 형식이든지 처음 시도한 사람의 창조성은 늘 감탄의 대상이 된다
이 그림에서 보여 준 구도는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재창조 되고 하나의 영감으로써 작용했다
마네만 해도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에서 이 그림의 구도를 그대로 인용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그림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흰 셔츠와 노란 바지를 입은 희생자가 두드러져 보이면서 그 손바닥에 있는 혈흔까지 눈여겨 보게 되고, 결국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눈을 가리지도 않고 아무 무기도 없는 가엾은 시민에게 총을 들이대는 프랑스 군인들의 잔혹함에 나도 치를 떨게 됐다

그런데 정말 훌륭한 것은 이 그림과 짝이 되는 "1808년 5월 2일" 이다
페르난도 7세를 프랑스 군인들로부터 구하기 위해 시민들이 왕궁을 습격한 사건을 그린 것인데, 고야는 한 사람의 영웅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민중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보통 민중의 반란은 좋은 쪽으로 미화되기 마련이고, 어떤 그림이든 사건을 주도하는 영웅들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고야는 있는 그대로 폭도의 모습으로 민중을 그린다
그림만 봐서는 프랑스 군인이 옳은지, 민중이 옳은지 분간이 안 간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된 폭력 사태를 화가의 냉철한 시선으로 그린 것이다
이념에 물들지 않은 이런 구도가 마음에 든다
사실 고야는 왕실의 전속 화가였고 그림 그려서 먹고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적군인 프랑스 장군의 초상화도 기꺼이 그려줬다
그가 그린 프랑스 장군의 초상은 퍽이나 인자하고 멋있어서 그 장군은 자기 조카의 초상화까지 의뢰했다고 한다
이념 지향적인 화가보다는 그림 자체로 승부하는 생각없는 천재들이 더 끌린다
인간성 나쁘고 별 노력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작품은 기가 막히게 만드는 사람이 보통 사람과 구별되는 천재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고야가 전혀 의식이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쨌든 피카소와 함께 스페인 최고의 화가인 고야의 그림을 꼭 보고 싶다

에두와르 마네의 올랭피아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다
나는 격렬한 그림보다 마네 그림처럼 냉정하고 차분한 시선이 더 끌린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고흐 그림에 관심이 덜 간다
올랭피아를 보면 색깔이 선명하고 선이 아주 분명하며 평면적이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마네의 현대성을 드러내는 특징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에서 보여지는 그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이 마음에 든다
저자의 설명처럼 너무 냉정하기 때문에 (화가의 감정이 전혀 삽입되지 않은 듯) 더욱 비극성이 강조된다

올랭피아가 그토록 무수한 비난을 들은 까닭은 일반적으로 그려지던 누드가 성적인 측면을 완전히 배제한 여신의 이미지였던 반면, 올랭피아는 매춘부였기 때문이다
마네는 흑인 하녀를 등장시켜 매춘부의 하얀 피부를 더욱 뚜렷히 대조시킨다
대놓고 몸 파는 여자의 나체를 그렸으니, 19세기 파리 시민들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알 만 하다
르네상스 그림에서 흔히 등장하는 나신들과는 다르게 완전히 평면적이고 선명한 색과 분명한 선으로 등장한 올랭피아가 얼마나 뻔뻔하게 보였을까?
더구나 유순한 개 대신 음흉한 고양이를 등장시켰으니 더욱 느낌이 안 좋았을 것이다
선구적인 그림들의 혁명성과 창조성을 제대로 평가해 줄 비평가란 이렇게 귀한 것일까?

가장 많이 패러디된 그림은 아마도 모나리자일 것이다
웃을 듯 말듯 한 신비한 미소와 함께 정확히 누구를 그린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비밀에 싸인 이 그림은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재창조 되고 있다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하나의 우상이 되어 모나리자의 가치를 깍아 내리는 식의 우상파괴도 성행한다
저자는 그것도 위대한 그림에 대한 변형된 예찬이라고 본다
물론 동의하는 바다
뭐가 됐든 평가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인구에 회자되고 아직도 생명력을 지닌 것이리라
모나리자를 남성으로 만들어 콧수염을 붙이거나 다리미판으로 그리는 등의 시도는 우상 파괴의 의미로 시도됐다
그런데 재밌는 건 한 마르크스주의 화가가 걸작들을 노동자도 볼 수 있도록 야간 개장을 하라고 미술관에 촉구했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모나리자 그림 앞에만 몰려 들어 다른 그림은 보려고 생각도 안 했다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들은 그림을 음미할 수준이 안 됐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래도 또 누군가의 말처럼 유명한 작품이 관객들을 미술관으로 이끌면 다른 그림도 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스타 작품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기현상일 정도의 모나리자 숭배는 좀 우습기도 하다

지나친 가치 평가의 대표적인 예로 고흐 그림을 들 수 있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일본의 한 기업에게 약 4천만 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4천만 달러라면 무려 5백억원이다
해바라기 그림이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절박감도 없이 그저 재산 가치로서 소유하려 하는 일본 기업을 비판하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는 바다
뭐가 됐든 제대로 평가받는 것이 그 작품의 진짜 가치를 올려주는 일이다
지금처럼 지나치게 고평가 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모나리자 열풍처럼 결국 고흐 그림도 또 하나의 우상이 되는 게 아닌가?
"가셰 박사의 초상" 은 약 8천 달러에 팔려 "해바라기" 의 기록을 가볍게 경신했다
그런데 웃긴 건 이 어마어마한 그림들이 위작 논란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100억 가까운 돈을 처 바른 그림이 실은 가짜일 수도 있다니, 고흐가 들으면 뭐라고 할까?
평생 단 두 점의 그림을 팔았을 뿐인 고흐가 사후 이러한 가열 현상을 본다면 기가 막힐 것 같다
마치 네덜란드를 미치게 만든 튤립 광풍을 보는 기분이 들어 씁쓰름 하다

뭉크의 "절규" 도 기념비적인 작품인데 이번에 다시 도난당했다
아직까지 찾았다는 소리가 없는 걸로 봐서 혹시 전설로 남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하긴 모나리자도 4년 만에 되찾았으니 다시 찾긴 하겠지
개인의 체험이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본성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는데 뭉크와 같은 상황이면 우울해질만 할 것 같기도 하다
뭉크는 폐결핵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잃고 누이 동생은 정신 병원에 수용됐으며 본인도 우울증과 폐병을 앓았다고 한다
더구나 북유럽의 자연 환경은 화가들의 우울한 성격 형성에 일조한다고 한다
특히 자연 환경에 개인의 내면을 투영하는 낭만주의적 감상법이 일반화 되서 뭉크처럼 우울 경향이 강한 사람은 더욱 주변을 우울하게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스크림"이나 "나홀로 집에" 등도 실은 뭉크의 "절규" 를 패러디 한 거라고 한다
설명을 듣고 보니 그림 속의 남자가 외치는 절규는 무엇일까 관심이 생긴다
견딜 수 없는 마음의 불안감, 고통, 괴로움 등등 안으로 삭일 수 없는 무언가가 그를 짖누를 것이다
원래 인생은 다 그렇게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법이다
자기만의 고통을 안고 사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도 실은 그렇게 절규하고 있는 건 아닐지...

잭슨 폴록의 그림은 솔직히 별 감동이 안 온다
추상주의는 아직 나에게 무리 같다
그렇지만 그 의의에 대해서는 조금 알 것 같다
사물의 이미지를 탈피해 완전히 추상적인 것으로만 작품을 완성하고 또 제작 과정이 최종 작품 못지 않게 중요시 되는 그림 형식은 가히 혁명적이다
뭐든지 처음 시작한 사람의 창조성이 평가받는 법이다
캔버스에 그림을 흘리는 식으로도 예술품을 만들 수 있으리라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여섯 살 짜리 애도 그릴 수 있는 거라고 혹평을 한다지만, 여섯 살 짜리 애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현대 미술이 완전 비구상을 추구하는 건 당연한 결과 같다
사진기가 발명된 이후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르네상스 기법이 퇴색한 것처럼, 요즘 같은 이미지의 시대에 더 이상 구상이 예전 같은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과 예술성을 표현하는 길은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독립되어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비구상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현대 미술의 감상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이 생긴다

피카소 역시 아직은 감동스럽지 않다
그 유명한 "게로니카" 나 "아비뇽의 처녀들" 이 가지는 의의는 알겠지만 마음으로부터 감동은 없다
큐비즘이라는 새 사조를 만들었고, 인체를 다각도에서 분해하여 그렸다는 것 정도는 알겠는데 솔직히 별로 마음에 안 든다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대상이 해체되어 통일된 느낌이 없다
차라리 "세 무희" 쪽이 더 낫다
어찌 됐든 조금이라도 이미지가 남아 있어 통합된 느낌을 주는 그림이 대하기 편하다
피카소 그림에도 감동을 못하는데 잭슨 폴록을 이해하는 건 무리지, 싶다
어쨌든 90이 넘게 장수하고 당대에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으니 가장 행복한 화가임은 분명하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그림들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접할 수 있게 되서 좋은 시간이었다
백 번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못 하리라
언젠가 이 그림들을 직접 보고야 말리라는 새로운 결심이 생긴다
그와 더불어 그림에 대한 내 나름의 느낌들이 형성되어 가는 것 같아 기쁘다
이제 나도 전문가들의 천편일률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나만의 고유한 감상법을 터득해 가는 것 같다
역시 아는 것 만큼 보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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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새뮤얼 헌팅턴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새뮤얼 헌팅턴이라면 홍정욱의 에세이 "7막 7장" 에서 봤던 사람이다
한국학의 대가라고 알고 있는데 미국 내에서 꽤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하긴 하버드대라면 우리나라의 서울대랑 마찬가지니까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 가서 느낀 거 쓴 책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무래도 외국인과 내국인의 차이겠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를 읽으면서 평범한 미국인의 일상을 느꼈다면 이 책에서는 미국인의 의식과 문화에 대해 또 역사와 그 배경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강한 주장을 펴지 않으면서도 한쪽으로 몰고 가는 기술이 탁월하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은 감정적이고 당위를 논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 책은 학자풍의 느낌이 난다
그래서 더 신뢰가 간다

그렇지만 솔직히 옳은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진보란 국가와 인종, 또는 민족을 넘어 전인류애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헌팅턴은 기존의 개척자 문화로 통일하길 원한다
대표적인 것이 이중언어 정책이다
효율성으로만 따지면 이중언어는 명백히 낭비다
스위스처럼 4개 국어가 쓰이는 나라를 보라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프랑스어를 쓰는 스위스인과 독일어를 쓰는 스위스인이 만나면 영어로 대화한다는 말이 농담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히스패닉인들의 권리를 무시할 수 있을까?
어차피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인데 언제까지 기득권층 문화만 강조할 것인가?
그래서 헌팅턴은 엘리트 집단이 나서서 이중언어 정책을 추진한다고 비판한다
실제 국민의 80%가 영어 단독 사용을 지지하는데, 다원화 문화에 경도된 엘리트층이 스페인어 사용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또 이들은 공직에 출마하기 때문에 전 미국인의 12%에 달하는 히스패닉인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스페인어 사용을 지지하기도 한다
글쎄, 뭐가 옳은 것일까?

개척자 문화와 이민자 문화의 정의는 참 유용했다
개척자 문화란 17세기 영국 정부의 억압을 피해 신세계로 건너와 신앙의 자유를 지킨 앵글로 색슨 청교도를 일컫는다
이들은 인디언과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혔고 지배 문화를 형성했다
땅은 넓은데 사람은 적으니 노동 인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무분별한 이민자 유입이 좋게 말하면 미국 문화의 다양성을 가져 왔고, 나쁘게 말하면 단결심을 해치게 됐다
이것은 비단 미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독일의 터키인들이나 프랑스의 북아프리카인들도 마찬가지다
노동력은 필요한데 정식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위선적인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이민자 문제는 계속 심각할 것이다

그런데 "관용에 대하여" 를 읽어 보면 집단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은 또다른 민족주의에 지나지 않다
개인으로서 차별받지 않는 것은 중요한 문제지만, 집단으로 뭉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진짜 진보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헌팅턴은 집단으로서의 권리를 외치는 민족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부수적인 이익을 위해 애쓴다고 비난조로 말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난하는 아라파트 같은 행태라고 할까?
궁극적으로 프랑스처럼 개인으로서는 차별하지 않고, 집단으로서 뭉치는 것은 제재하는 것이, 즉 완전한 동화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 이중언어 정책은 폐지해야 할 것이다
영어 못해서 난리치고 심지어 영어 공용론까지 펼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다

완전한 동화는 가능할까?
이민 1세대야 어쩔 수 없다지만 2세대, 3세대가 되면 자신의 뿌리가 되는 문화를 지킨다는 것이 어려워진다
어차피 그 사회에 살면 동화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실제로 얼굴색이나 민족적 이유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면 이들이 뭉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또 소수 민족의 수가 많아져 어느 정도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면 당연히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까?
개인은 약하지만 집단은 강한 법이니까
그러므로 헌팅턴 같은 국가주의자, 혹은 기득권층은 소수 민족주의자들을 비난할 게 아니라 이들이 개인으로서도 차별받지 않도록 사회 정책들을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한 동화를 이루도록 애쓰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을 정의하는 가치관 중 하나는 기회의 평등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실체도 바로 이 기회의 평등일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대부분의 사회에서 계급 이동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기득권층에 편입한다는 것은 사실 대단히 힘들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이고 기득권층 형성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계급 이동이 활발한 편이다
자신만 열심히 한다면 말이다
헌팅턴은 이것을 강조한다
즉 미국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준다고 주장한다
철저한 개인주의와 기회의 평등이 미국의 신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미국은 유럽보다 빈부 격차가 월등하게 큰 나라다
이민간 한국인들을 생각하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자기만 열심히 일하면 왠만큼은 살 수 있으니까
반면 흑인들은 워낙 게으르기 때문에 계급 상승이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헌팅턴은 결과의 평등까지 보장해 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미국은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는 나라인가?

세계 대전이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했다는 사실은 좀 놀랍다
전쟁이 때로는 득이 되기도 하나 보다
2차 세계 대전은 핵폭탄의 사용으로 인간성이 파괴된 전쟁으로 유명한데, 오히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애국심을 드높히는 좋은 기회였다고 한다
2차 대전을 수행하면서 소련 국민들이 행복했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과장일까?
어쨌든 2차 대전 때 자발적으로 천여만명의 사람들이 지원하면서 인종, 민족 등을 초월해 미국인의 정체성 아래 뭉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치 남북 전쟁을 통해 모든 백인들이 하나의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은 것처럼 말이다
혹시 6.25도 뭔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까?
전쟁을 하면 빈부 격차가 줄어든다고 한다
다 같이 못 사는 게 상대적 빈곤보다 더 좋은 것인가?

저자는 미국의 선택 영역을 셋으로 나눈다
세계화를 주장하는 엘리트들이 원하는 초월적 국가주의, 아니면 제국주의, 일반 대중이 원하는 국가주의가 있다
물론 저자는 앵글로-기독교 문화가 지배하는 국가주의를 원한다
저자는 이것을 애국심이라고 표현한다
이 책의 미덕은 서문에 밝힌대로 애국심과 학문적 분석을 혼동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간극은 날이 갈수록 커진다
일찌기 플라톤이 한탄한대로 대중은 어리석고 민주주의는 인기에 영합한 포퓰리즘으로 갈 확률이 다분하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국가 정책을 맡겨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선출직으로 뽑힌 엘리트들이 대중과 분리된 정책을 고수할 경우 그들의 특권 유지에 급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의 민주정치라는 기본 이념이 빛을 바랠 수 있다
선출직 관리들이 입법하고 집행할 때는 어느 정도 대중의 뜻을 반영한다는 기본적인 신뢰가 깨진다면 결국 민주주의는 붕괴되는 게 아닌가?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세계화는 곧 우리 지식인들이 자주 거론하는 진보의 실체다
박홍규가 늘상 얘기하는 아나키즘도 같은 맥락이다
국가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민족과 인종을 초월해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수용하는 것이 바로 세계화이고 진보가 아닌가?
왜 대중들은 진보적 사고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나마 있는 기득권이 뺏기리라는 두려움 때문인가?
하긴 헌팅턴의 분석을 읽으면 이해가 간다
헌팅턴은 "폴링 다운" 에 등장하는 노동직 백인 남성을 예로 든다
이제 그들은 소수가 되어 비백인들에게 일자리를 뺏기고 무력하게 거리로 나앉았다
이 영화는 한국인을 비하한다고 문제가 됐는데, 아시아인에 대한 일반적인 분노를 표현했다는 걸 알게 됐다
엘리트로 편입한 것도 아니고, 밀려 오는 이민자에게 치이는 판국에 그나마 정부에서는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급급하니, 능력없는 기존의 백인들로서는 불안감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헌팅턴은 이들이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처럼 집단으로 단결할 수 있음을 우려한다

미국이 종교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서구 사회가 종교 전쟁을 통해 공적인 영역에서 (심지어 사적인 영역도) 종교를 완전히 몰아 냈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적 압박을 느끼지 않은 미국인은 훨씬 더 종교적이다
하긴 종교의 자유를 찾아 그 먼 영국땅에서 미지의 나라로 배를 타고 건너 올 정도면 그들이 얼마나 종교적이었을지 알만 하다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는 개척자 문화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종교가 도덕적 해이를 막는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종교와 도덕이 과연 얼만큼의 상관 관계를 갖는지 의심스럽다
하나님의 선과 인간의 선은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종교는 세속 생활의 원리가 될 수 없다고 믿는다
미국인들은 공적 영역에 종교를 집어 넣고자 한다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개개인의 믿음을 표현하고 그 원리에 따라 사는 건 자유지만, 또 한편으로 바람직한 면도 있지만 종교가 집단을 지배하는 것은 교조주의의 부활에 불과하다
중세 천년을 겪고도 여전히 종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지, 참 한심스럽다
하긴 우리나라가 유교의 폐해를 알면서도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버리지 못하듯, 미국 역시 자신들의 뿌리가 되는 지배 이념을 한순간에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사회를 지배하는 중심 원리가 필요하다면, 기존의 것을 대체할 강력한 이념이나 질서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함부로 기존의 원리를 버릴 수 없겠지

그렇다면 미국을 지배할, 혹은 우리를 지배할 바람직한 가치관과 이념은 무엇일까?
헌팅턴은 실망스럽게도 국가주의를 거론한다
애국심을 바탕으로 미국인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단일 언어를 사용하며 민족의 뿌리를 부정하고 기독교와 앵글로 색슨 족의 전통 위주로 뭉치는 그런 사회 말이다
비록 헌팅턴은 앵글로-개신교인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문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결국 다원화 대신 기존 질서의 유지를 주장하는 게 아닌가?
통합이라는 명분 아래 하나의 지배 원리만을 중시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태도다
물론 세계화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강력하게 혹은 빠르게 진행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국가에 대한 헌신이 부족한 엘리트 계층이 세계화를 선도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여전히 민족과 인종, 종교 같은 자신의 뿌리에 집착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시대든 거스를 수 없는 시대 정신과 흐름이 있는 법이다
애국심에 기초한 헌팅턴의 국가주의는 왠지 시대에 역행하는 기분이 든다

헌팅턴이 지적하는 다원화주의의 문제점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이중 언어 정책이 국가 정체성을 해치고 결국 미국을 둘로 나눌 것이라는 견해는 결코 엄살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헌팅턴 식으로 국가 정체성을 강조해서 문명의 충돌 어쩌고 하는 식으로 이슬람을 적으로 규정해서 미국인의 단결을 촉구한다면 세계는 계속 전쟁을 치뤄야 할 것이다
자꾸 우리를 강조하면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지금이야 말로 관용의 정신을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닐까?
왈짜의 말처럼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평화를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수 민족의 집단주의 역시 반대다
민족의 권리를 내세우며 개인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사회를 분열시킨다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지도자란 사람들이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개인이 선택하고 사회는 그것을 존중해 줘야 한다고 믿는다
집단으로서의 다원화는 반대지만, 개인으로서의 다원화는 인정해 주는 문화, 결국은 아나키즘과 자유 정신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레가 주창한 자유주의 교육을 받아야 할까?
권력과 억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자유인이 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얘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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