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열린책들에서 블루 리커버리 컬렉션을 시리즈로 냈는데, 이 시리즈의 표지들이 마음을 끌었다. 열린책들에서 특별히 블루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여덟 개의 책을 냈는데,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나열해보니, 모두 프랑스 현대 작가의 소설이고, 어디로 통통 튕겨갈 지 모르는 유쾌하면서도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들이 있는 중편 분량의 작품들이다. 리커버리 블루 컬렉션의 중 [밑줄 긋는 남자] 외에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와 [달리기]를 읽었는데, 각각의 작품 분위기는 다르지만 대략 열린책들에서 어떤 작품들을 함께 모았는지는 알 듯하다. 프랑스대통령의 모자는 그 전에 읽었고 블루 컬렉션에 있는 책들이 취향저격이어서 나머지도 읽을 예정이다. 오늘은 [밑즐 긋는 남자]부터 소개한다. 


스물 다섯의 싱글. 애인없음. 직업없음. 주인공 콩스탕스의 톡톡튀는 재기발랄함과 솔직함, 그리고 엉뚱함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이야기가 어디로 어떻게 튈지 궁금궁금. 빠르게 책장을 넘기다 보니 아쉽게도 이야기가 끝나 있고 해피엔딩이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기로 한 상대는 로맹 가리인데 서른 몇 개의 작품만을 남겨놓고 죽었다. 이미 읽은 대여섯 개의 소설을 제외하면 1년에 한 권씩 읽는다고 해도 평생 끌어안고 살아갈 만큼의 갯수가 되지 않는다. 다른 책들을 섭렵해 보기로 하고 도서관에 가서 이런 저런 책을 빌려 오지만 빈번한 시점 교차와 수많은 등장인물에 집중하지 못한 채 안구 운동만 하다가 마지막 책인 [오렌지 빛]을 펼치는데 조금 읽다가 다시 흥미를 잃고 책장을 휘리릭 넘기다가 밑줄 친 부분을 발견한다. 


"당신을 위해 보다 좋은 것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혹은 중고 서적을 샀을 때, 이전 사람이 밑줄친 것을 보면, 나 역시 왜 이 사람은 이 부분에 밑줄을 쳤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이전 독자의 밑줄의 위치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혹은 반대로 맞아 맞아 하며 공감하기도 한다. 그렇게 때로 밑줄은 같은 책을 읽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약하고 느슨하게 연결한다. 우리의 사랑스런, 심심했던 콩스탕스는 이 밑줄을 계시로 해석하기로 한고 반납을 결정한다. 도서관 직원 지젤은 반납 책을 검사하다가 낙서를 했다며 핀잔을 준다. 억울한 콩스탕스는 펄쩍 뛰다가 자신이 발견한 밑줄 말고 마지막 장에 글자가 써져 있는 걸 알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 좋은 책입니다. 그걸 당신에게 권합니다."(27쪽)


마침 노름꾼은 대여중이고 도스코예프스 특별 전집에도 그 작품이 있을 거라는 지젤의 권고를 사양하고 꾸역꾸역 대여중인 일반판 노름꾼을 찾아 대여를 하고 밑줄을 찾는다. 여러 부분에서 발견된 밑줄은 자신을 사랑하는 새로운 사랑의 등장이라 믿고 설레발을 친다.  집에 와서 밥만 홀딱 먹고 설겆이 한 번 안하고 돌아가던 남친을 차버린 후 아버지와 아저씨와 생일을 보낸 후 외로움에 지쳐 홀로된 처지를 비관하던 중 밑줄은 새로운 사랑을 암시하는 것이 틀림없다. 밑줄은 계속 그녀를 흠모하여 멀리서 지켜본다는 듯한 암시를 준다. 참을성 없는 콩스탕스는 책의 끝에서 가리키는 다른 책을 계속 찾아가며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남자를 쫓는다.


메시지가 끊기기도 하고 궁금증을 참지 못해 지젤을 통해 길고도 절절한 편지를 전달하고자 했지만 뜻대로 밑줄 긋는 남자를 만나지 못하던 어느날. 짜잔 자신이 그 밑줄 긋는 남자라며 나타났는데 기대했던 것처럼 시적이고 괴팍한 천재적 중년이 아니라 다소 소심하고 젠틀하고 배려심있는 평범한 학생이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크게 실망을 하고는 돌아선다. 여기까지가 초중반의 내용이고 이후에 잔잔한 반전과 반전이 계속되면서 결국 콩스탕스의 사랑이 진행되는 이야기다. 


천진난만한 스물 다섯 살 싱글 여성의 변덕스런 사랑의 심리를 어쩌면 이토록 사랑스럽고도 솔직하게 그려놓었는지 만족스런 결말임에도 너무 짧아 작가를 살짝 원망할 뻔했다. 한국어판에 붙이는 서문부터 평이한 듯하면서도 참 맘에 들었는데 다른 책은 번역된 것이 없음에도 20년째 절판되지 않고 계속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 있어줘서 기특하다고나 할까 하는 기분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 작가지만 개성넘치는 캐릭터 드리븐의 유쾌한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결코 실망하지 않늘 작품이다. 가독성도 좋아서 정말 술술 읽히고 여러 문학 작품을 매개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많은 소설들의 일부를 엿볼 수도 있다 특히 로맹가리는 콩스탕스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니 모아둔 책에서 한권 꺼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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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걸어도 나 혼자
데라치 하루나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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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좋은 이웃을 만나는 행운이 생기기도 한다. 좋은 이웃이란 무얼까. 핵가족 시대의 좋은 이웃이란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한다. 유미코와 카에데는 40대 여성으로 낡은 아파트를 마주보는 이웃이다. 두 사람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며 처음엔 책이 간질간질한 에세이처럼 생겨서 유미코의 첫번째 챕터가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인줄 알았다. 시점이 바뀌고서야 이 책이 소설이란 걸 알았는데 알고 나서도 마치 잔잔한 자기 고백적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으로 읽어나갔다. 


유미코의 이사날 슬쩍 스쳐간 인연은 어느 날 발코니에서 서로를 알게 되는 계기로 이어지고 요리를 좋아하는 유미코는 카에데를 자주 집으로 부르게 되고 둘은 친구가 되었다 첫 이야기에서 유미코의 들려준 그간의 사정은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에게서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자주 집을 비우고 밤을 지내고 들어오는 일이 많아지면서 생긴 갈등과 별거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이다. 딸은 사춘기로 보이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인데 이때부터 남편의 태도가 달라지고 전가족과의 사이에서 생긴일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다가 결국 이혼을 결심하는데 쿨한 시어머니가별거부터 해보라는 식으로 말하고는 집값이 저렴한 자신이 사는 동네의 낡은 아파트 메종 드 리버라를 소개해준다.


절임 회사에 서무직으로 근무하는 카에데는 눈에 띄는 미인에 옷차림도 과감한 직장녀지만 사장이 추근덕거려 고민하다가 다른 직원에게 상담을 하니 구럴 빌미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등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하는 직원들의 눈초리를 받고 결국 사퇴하기에 이른다. 요리나 가사일에는 관심이 없고 화장과 몸을 가꾸는 데에는 신경을 쓰는 카에테는 남친도 가볍게 사귀며 자주 바뀌는 편이지만 얼마 전 쿨하게 헤어진 전남친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정이 있었음을 깨닫는 중이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 속에서 중년이 된 두 여성이 서로를 처음 만났늘 때 첫인상은 그들이 얼마나 다른 지를 말해준다. 카에테가 본 유미코의 첫인상이다.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 뭐랄까, 전혀 기름지지 않아 놀랐다. 선선했다. 교태나 애교가 전혀 담기지 않았다. 어쩌면 본인은 담으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의도가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발성법이었다. 무뚝뚝하거나 붙임성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눈썹을 대충 그렸다. ‘귀찮지만 화장을 하는 게 규칙이니까 일단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 의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화장이라고 생각하며 지금 막 옆집 주민이 된 여자를 바라보았다."


화장은 대충하지만 뜨게질과 수예 같은 걸 즐기는 따스하고 가정적인 유미코. 그건 이해가 가겠는데 목소리에 교태나 애교가 없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럼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디폴트로 교태와 애교가 장착되어 있다는 건지. 일본 사람들의 여성상은 알다가도 모르겠ㅋ. 반면 유미코의 눈에 카에데의 차림새는 와 대단하다 정도였고 이후 함께 밥을 먹으면서 카에데에 대해 처음 느낀 감정은 호감으로 결론이 나는 분위기다.


"생김새가 단정해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위압감이 느껴지는데, 사귀어보니 이른바 고양잇과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간섭하려는 사람에게서는 필사적으로 멀어지려고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대하면 친근하게 다가온다."


어느 날 유미코의 별거 중인 남편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과 그 이후 고향 섬에서 본 사람이 있다는 시어머니의 말을 전해듣고 싱숭생숭하던 중 카에데는 전회장에게서 매우 심각한 스토킹의 위협을 받아 경찰을 부르는 소동까지 생기고 둘은 직장을 구하는 일과 편의점 알바 등을 전전하며 중년 여성이 겪는 소외감과 사회적 편견, 젊은이들의 불편한 시선 등을 경험한다.


특히 재취업이 잘 안돼서 슈퍼마켓의 시식코너에서 젊은 여성과 알바를 하며 겪은 일은 중년 여성 아줌마라 불리는 사회적 계층에 대한 젊은층의 곱지 않은 시선이 가차없이 드러나지만 카에테의 거침없는 대응으로 속시원히 처리하는 대목이 성격 묘사를 생생하게 잘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솜털 하나하나도 빛나 보이는 젊은 여성이 씩씩하게 시식 알바를 잘 하는 걸 보고 귀엽다는 생각에 쉬는 시간에 칭찬을 해주었는데 뒤늦게 들어온 슈퍼마켓 정직원이 카에테가 화장실을 간 틈을 타 이 젊은 여성에게 괜찮냐고 정말 괴롭힘을 당한 거 아니야?라고 다그치듯 묻고 있었다. 젊은 여성은 극구 아니라고 부인하는데도 말이다. 


"괴롭히는 주체가 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임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오타의 바짝 긴장한 얼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얘, 괜찮니?” 

초콜릿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이 사람이 괴롭히거나 하지 않았어?”


이렇게 가볍게 비꼬며 넘어가려고 했더니 나름 변명이라고 내놓는 말이 더 가관이다. 


‘아줌마’는 다른 아줌마 아르바이트들을 말하는 거고요, 시마다 씨는 아직 젊으니까 당연히 괜찮지요.”


아줌마를 폄하하는 이같은 말에 카에테는 뚜껑이 열린다. 


이봐요, ‘아줌마’란 단순히 ‘중년기 이후의 여성에 대한 호칭, 혹은 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야. 사전을 보면 그렇게 적혀 있어요. ‘아줌마’를 욕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쪽이 젊지 않은 여자에게는 가치가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이잖아요? 댁이 사귈 여자를 고를 때라면 그래도 상관없어요. 나이든 뭐든 댁이 좋아하는 기준에 따라 마음껏 고르라고요. 하지만 나는 여기에 그냥 일하러 왔어요. 당신의 그 웃기지도 않은 성적 대상 선정의 장에 나를 멋대로 끌어들여서는 아줌마는 안 되겠다느니 뭐니 생각한다면 불쾌하고 불편하니까 그만둘래요? ‘당연히 괜찮지요’라니 뭐가 괜찮아? 그게 위로랍시고 하는 소리야?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래, 나는 아직 괜찮구나. 다행이다’ 하고 기뻐할 줄 알았어?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당신이 나를 감정해줄 필요 없어요.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내가 정하니까.”


카에테와 유미코는 함께 유미코의 남편을 찾으러 섬으로 떠난다. 민박을 정해 함께 지내면서 둘은 서로가 나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을 자잘한 일에서부터 깨닫기 시작한다. 지저분한 식당에서 누님 누님하는 남성과 만나 바로 호텔로 향하는 카에테가 못마땅한 유미코 게다가 그 남자에게 지갑까지 털리고 무인여관에서 나오지 못해 데리러 가야 한 유미코. 이런 해프닝에 전남편의 그림자는 섬 어딘가에서 어른거리는데..


잔잔하며 유쾌한 면도 있는 소설로 일상을 소재로 하다 보니 다소 가볍다는 느낌도 들지만 중년 여성들의 우정과 삶이 짊어져야 하는 고독의 무게와 우정이 감내해야 하는 서로에 대한 차이. 전통적 사회의 눈으로 바라보눈 핵가족 시대의 홀로 선 여성들. 거기에 여성에 대한 가차없는 편견과 기울어진 성도덕 등을 잔잔하고 친숙한 기법으로 잘 버무려놓았다. 중편 정도의 길이로 1~2시간이면 읽을 양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잘읽힌다. 가독성은 만점. 개성도 만점. 일본체 닭살 대화 없음. 인물만 수십여명에 돌고래 침팬치등 여러 종류의 외계종족들이 등장하는 복잡한 SF 읽다가 팽개치고 이거 읽으니 힐링된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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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12-24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REBBP님, 2019년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CREBBP 2019-12-26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축하드립니다
 

요즘 트랜드에 맞춤 제작한 듯한 표지와 제목, 젊은 감각과 가볍고 쉽게 읽히는 인문서도 아니고 심리서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이런 류의 책을 리뷰에 쓰면 '글자 옆에 공간많아요' 때문에 가차없이 별점을 깍고 싶었을텐데, 젊(어보이는)은 저자의 두번째 책 이라는 눈높이에 맞춰볼 때, 그리고 이런 트랜드의 책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괜찮은 편이다. 


페이지는 종이책 기준 250쪽 정도인데, 챕터 사이의 공백 페이지와 일러스트 빼고 나면, 책을 싫어하는 독자라고 해도 충분히 쉽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개인적으로 일러스트를 좋아하는데, 문제는 종종 이런 일러스트가 책의 이미지에 크게 이바지함에도 불구하고 일러스트 작가의 이름이 당당히 저자로 이름을 못올리고, 단지 편집자 난에 조그맣게 실리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불만이다. 한 때 문단에서는 (신춘문예) 데뷔 작가와  비데뷔 작가를 구별 혹은 차별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신춘문예 작가가 아닌 그 글을 쓴 작가에게 어떤 기자인지 기래기인지 혹은 다른 작가인지가 작가님이라고 안부르고 누구누구씨 라고 하더란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와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구별(혹은 차별)이 존재하는 곳이 출판계가 아닐까 하고 의심해본다. 


이 책은 솔직히 글보다 일러스트가 더 좋았다. 글이 별로였다는 게 아니라, 책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러스트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일러스트에서 풍기는 잔잔한 감각이 글과 함께 어우러지는 느낌이다. 글 빼고 그림만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러니까 책에 대한 평가에 있어 그림을 빼고 생각할 수가 없는데, 저자 란에는 김혜령 작가만 나오고 일러스트의 이름은 표지 디자이너처럼 작게 표시되어 있는 게 뭔가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지만, 글자옆에 공간많게 하려면 적어도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시적 상상력과 표현력이 심금을 충분히 울려, 그림조차 필요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책 내용이 허접하다면 일러스트마저 허접해보였을 것이겠지만. 암튼 그런 생각들을 해봤고.




친숙한 형태의 글이지만 동의하는 대목들, 공감가는 구절들이 자주 눈에 띄어 몇 개 긁어와본다.


사회적 관계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으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로부터 건강하게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서 정신적 자립이 되어야 타인에 의한 기쁨에 전염될 수 있다. 연결고리가 그저 손을 잡고 있는 정도라면, 온기를 느낄 수 있고 마주 보고 미소를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얽히다 못해 엉켜 있는 경우라면 다르다. 타인으로 인해 일희일비하거나, 내 감정이 나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타인에게 내맡겨진 상태는 위험하다.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남녀나 부부사이 혹은 자식과 부모 사이라고 하더라도, 그 관계가 너무 엉키고 섥힐만큼 의존적이라면 곤란하다는데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홀로는 고독하지만, 둘이서 하나가 되어 버리면 둘 중 하나는 억제되거나 의존적이되어 버려 한 사람에게는 부담으로 한 사람에게는 의존으로 분리 불가능한 관계 속에 갈등을 숨기고 살아갈 것이다. 


책이나 영화, 시, TV 컨텐츠 등에 약간의 심리학적 지식을 버무려 행복이라는 주제에 맞게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책은 진행된다. 언급하는 책들이 많이 읽히는 책들이라 친숙하고, 읽었는데도 까먹었던 내용을 복습하기도 하고, 기억하지만 저자가 얘기했던 방향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읽은 책과 영화에 대해 책에서 이야기하면 참으로 즐겁다. 작가와 뭔가를 공유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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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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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지식이 자유자재로 뻗어 있는 에코의 글은 산만해서 집중을 요구할 때가 많지만, 대신 항상 유머와 해학으로 즐거움을 서비스해준다. 블랙 유머는 독일어를 잘해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 시절, 지도교수를 잘못 만나면서 꼬이기 시작하던 시기를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한번 꼬인 인생은 성공으로 가는 우연의 길목을 만나지 못하고 계속 꼬인 채로 중년에 이르렀다. 고스트라이터에서부터 시작해서 번역 일과 온갖 잡동사니 신문에 닥치는 대로 글을 쓰며 그럭저럭 입에 풀칠하며 사는 50세의 콜론나가 자신의 인생을 실패자로 규정하는 대목은 잘 안나가는 독자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준다. 

패배자는 독학자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승리자보다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승리하고자 한다면 그저 한 가지만 잘 알아야지 무엇이든 다 알겠다고 시간을 허비에선 안 된다. 박학다식하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건 패배자들이 겪는 업보이다. 어떤 사람의 지식이 늘면 늘수록 잘못 돌아가는 일들도 자꾸 늘어간다는 것이다. 24


그러던 어느 날 시메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제안을 한다. 콤멘다토레가 발행하게 될 새로운 신문의 창간 멤버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인데, 제시하는 액수가 엄청나다. 이렇게 뜬금없는 금액을 제시할 때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이 있다. 시메이는 이미 세상 쓴 맛을 두루 섭렵했을 콜론나에게 숨김없이 계약 조건을 이야기한다. 

창간 준비만 하다가 발행인의 결정으로 사업이 끝나버리면, 나는 책을 출간할 겁니다. 책은 폭탄이 될 것이고 나에게 거액을 인세를 안겨줄 겁니다. 그런데 책이 출간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내가 책을 출간하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주겠지요 (p33)


이 책은 우선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타블로이트 신문의 창간 준비호가 제작되는 과정의 세부 논의 과정들을 통해 뉴스가 제작되는 생태계를 조롱하고 비판한다. 재능있고 경험이 풍부한 콜론나는 데스크를 맡으며 창간을 준비하기 위해 고용된 기자들과 친해진다. 그 중 한 편으로는 브라가도초와 뜻하지 않게 자주 얽혀 그의 장황하고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음모론의 청취자가 되고 술값까지 내게 되는 상황이 자주 생기고 한편으로는, 연예인 뒤꽁무니만을 따라다니던 전직 연예계 기자 마이아와 썸을 타게 된다. 브라가도초가 기레기를 대표한다면 마이아는 아직까지 대중에게 진실을 전하고 싶은 순수한 기자 정신을 대표한다. 

나오지도 않을 신문이지만, 시메이 주필과 콜론나는 기자들에게 신문의  이상적인 모습보다는 신문의 실제적인 요구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발행인인 콤멘다토레가 요양원을 소유했는데 한 판사가 요양원의 운영실태 수사를 하는 것을 알게 되고 발행인에게까지 수사의 영향력이 미치게 될 것을 미리 염려해, 수사관의 뒤를 캐는 것이 신문이 할 일이라는 것이다. 신문이 할 일은 무엇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옳지 않'을 때 취해야 할 것은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그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의 정당성을 떨어뜨릴 만한 것을 찾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청렴하다고 해도 수상쩍은 일을 한가지쯤은 했을 거에요. 그것도 아니라면..그가 매일 하는 일을 수상해 보이도록 만드는 겁니다...상상력을 발휘해 보세요. 188

이 얼마나 익숙한, 사실 진부하기까지 한 수법인가. 어제도 오늘도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로 얼마나 많이 처형해왔던가. 오늘도,  미디어를 장악한 베를루니코스가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각종 비리와 부패의 파티장으로 벌였던 10년의 장기집권 기간 중의 범행은 우리나라가 겪은 10년의 개막장이게나라냐정부와 여러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이탈리아에서 꺼진불도 다시보지 않고 재활용했던 파시스트들의 잔존 여파가 부패 극우로 변신하는 과정과 혈서 쓰고 친일을 한 후 공산당까지 골고루 돌아가며 했던 자랑스런 아버지를 둔 덕에 허황된 지역주의에 목을 맨 세력과 이에 호응하는 대중을 업고 대통령까지 했던 박씨의 성공담과 구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경우 미디어가 아무리 잔머리를 굴리고 노력해도, 적당히 해먹었어야 덮는 게 가능하지라는 본보기를 근과거의 역사가 흔들리는 촛불의 잔영속에 비추지만, 미디어는 오늘도, 진실을 전하기 보다는,  목적을 위해 사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 잘라내기 오려붙이기를 통해 대중의 눈을 속이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월호 이후 세월호에 탔던 어린 아이들이 전국민이 보는 앞에서 가라앉았다는 그 엄청난, 믿기지 않은 사건의 본질은 실종되고 숨은유병원찾기놀이로 일제히 여론이 움직였던 일을 잊은 듯 본질을 호도한 보도들에 묻혀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을 의심하고 비방하고 검찰의 권력 앞에 꼭두각시처럼 부화뇌동하고 있다.

악한 사람을 신문에서 착하다고 부르면 그 사람은 착한사람이 되고, 사람들은 신문을 따라 착한OO라고 부른다. SNS 시대에도 여전히 신문과 뉴스의 효과는 그 무엇보다 막강하고, 우리는 그들이 하는 말이 개인 1인 미디어가 외치는 말보다 진실성 있다고 믿는다. 아니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음모가 어떤 세력을 와해하고 혹은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사소한 거짓을 퍼뜨리는 방법은 교묘해서 알아차리기 힘들다. 1의 거짓을 전달하기 위해 99의 하찮은 진실에 1의 중대한 거짓을 섞어 전달하면 99의 하찮은 진실이 휘발한 후 1의 거짓만이 99만큼의 진실성을 확보한다. 이 짓거리들에 한국의 신문들은 최고가 되었다.

맞아요 신문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145

신문들은 뉴스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뉴스를 덮어서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 250

가짜뉴스가 판을 치다 보니,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달에 가지 않았느니, 에이즈라는 질병은 존재하지 않는다느니, 미국정부가 UFO니 외계인을 숨기고 있다느니 하는 여러가지 음모론 속에 0.1%의 몰랐던 진실, 매우 역사적으로 중요한 진실이 숨어있다면 음모론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브라가도초는 어이없게도 처형당한 무솔리니가 대역이었다는 음모론을 개발(?) 중이다. 뭔가를 믿기 시작하면 확증편향으로 이어져, 연관된 모든 것을 의심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게 된다. 물론 본인은 개발이 아니라 진실을 캐는 과정이지만, 브라가도초가 제시하는 무솔리니의 대역 음모론은 말처럼 그리 황당하지만은 않다. 그는 무솔리니 체포 및 처형 당일의 행적을 깨알같이 조사하며 꿰어맞추면서 클론나에게 음모론의 진실(자기가 믿는)을 이야기하지만, 역사는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그게 진실이라 하더라도 드러나는 몇몇 군데 구멍들은 상상력으로만 메꿀 수 없다. 결국 그 구멍들을 메꾸기 위해 조사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연관된 인물과 사건이 활보하는 시간 범위는 더 가까와진다. 

두체 무솔리니 파시스트 스토리는 참으로 흥미로왔다. 서너 페이지에 걸쳐 거의 칼럼 기사처럼 브라가도초가 조사한 무솔리니의 행적이 정리되어 있는데, 이를 간략하게 옮겨보면 이렇다. 짧은 지면이지만 등장인물도 많고, 이동 경로도 계속 바뀌기 때문에, 주의깊게 읽었다. 

무솔리니 대역 처형 재구성 시나리오 등장 인물

카벨라 : 마지막 충신, 파시스트 신문 
산드로 페르티니 :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영웅 
라켈레 : 아내
클라레타 페타치 : 애인
마르첼로 페타치 : 애인의 오라비(스페인 영사로 분장)
*페드로 : 빨지산 부대 대장
*발레리오 대령 : 무솔리니 처형 지휘 대장

무솔리니의 도피 행적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실질적 수도였던 살로에서 시작된다. 전쟁이 막바지였던 1945년 4월 18일 무솔리니는 살로를 버리고 밀라노 도청을 본부로 삼는다. 4월 25일 해방군과 맞닥뜨리자 무솔리니 일행은 밀라노 탈출, 가족, 애인도 코모에 집결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날 가족과 만나지 않는다. 이후 코모 인근 카르다노에서 무솔리니는 애인과 합류하고 도피중, 히틀러가 보낸 호위대가 오스트리아로 대피를 돕기 위해 나타나고 메나조에서 이들과 합류, 스위스 국경 키아벤나로 향하지만 실패하고 무소에서 빨치산과 대면한다. 호위하고 있던 독일군들은 이탈리아인들을 빨치산에게 넘기고 퇴각하지만, 돈고에서 독일군에 대한 전면 수색이 이루어지고 독일군으로 변장한 무솔리니가 여기서 발견된다. 이 때 조약에 의해 무솔리니는 연합군에게 인도될 예정이나, 해방위원회는 처형하기로 결정한다. 처형 이유는 이렇다. 

"해방위원회의 대다수는 이탈리아에 당장 하나의 상징, 파시즘의 20년 세월이 끝났음을 알리는 구체적인 상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두체 무솔리니의 죽은 몸뚱이가 바로 그 상징이다.(..) 만약 무솔리니가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지 않으면 그의 이미지가 오래 남아 실체는 없으면서도 다루기 곤란한 존재가 되리라 직감한다. 바르바로사(붉은수염)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전설을 생각해보라.(..)동굴의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가 때가 되면 깨어나 독일을 위대한 제국으로 만들 거라는 웅대한 전설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는가. 무솔리니가 그런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이탈리아 국민을 과거로 회귀하도록 환상을 불러일으키면 안되는 것이다(162)"

4월 29일에 모든 시체가 밀라노 로레토 광장에 부려진다. 이 광장은 거의 9개월 전에 근처에서 총살당한 빨치산들의 주검이 버려졌던 곳이다. - 빨치산들을 총살한 파시스트 민병대원들은 그 주검들을 온종일 햇볕이 뺑쨍한 곳에 놓아두고 유가족들이 시신을 거두어 가지 못하게 했다(169)

체포되어 공개 처형된 무솔리니가 대역이었다는 근거는 콜론나가 보기에도 독자가 보기에도 허술하기 짝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는 점, 당대 사람들이 무솔리니의 얼굴을 잘 몰랐다는 점, 1주일만에 수척했던 무솔리니가 퉁퉁하게 살이 올라있었다는 점 등을 기반으로 한 추측성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몇가지 모순까지 존재하기에 브라가도초는 만일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디에 있었겠는가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거대한 역사의 음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가짜와 진짜가 교묘하게 섞어서 짜맞추면 누군가에게 무언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내일 창간되지 않을 창간 준비호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음모론에 빠진 브라가도초가 진실의 실 조각들을 모아서 짜낸 스토리 어딘가에는 누군가를 두렵게 하는 무서운 진실이 숨어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들어서 알게 된 모든 것이 가짜이거나 왜곡이었다는 거야. 우리는 25년동안 계속 그들의 속임수 속에서 살았어. 내가 그랬잖아. 남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절대로 믿지 말라고...



그 모든 뉴스는 오래전부터 유포되고 있었어. 다만 집단의 기억에서 뉴스들이 지워졌던 거야. 모자이크의 조각들을 한데 모으려면 기록보관소나 자료실에 가면 돼...마치 새로운 폭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이전 뉴스를 지워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모든 것을 끌어내 다시 죽 늘어놓기만 하면 돼. 브라가도초가 바로 그 일을 했고, BBC도 그 일을 한 거야. 재료를 혼합해서 저마다 칵테일을 만들었어. 그래서 우리 앞에 두 잔의 완벽한 칵테일이 있어.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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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존 그린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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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홈지라고 부르는 주인공 소녀가 가진 강박증을 이토록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투영된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작가의 말에서, 존 그린은 두 사람의 정신과 의사를 언급하며 그들 덕분에 자신의 삶의 질은 엄청나게 나아졌다고 말했다. 지나친 청결에 사로잡힌 강박증도 그 종류가 여럿 있을텐데, TV (엉터리) 교양 리포트에서 떠드는 '화장실보다 세균이 천배 많이 발견된다는 OOO' 시리즈는 OOO의 대상을 주기적으로 바꾸지만, <내 속에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를 읽고 나면,   오히려 그런 세균과 박테리아 등등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 더 느긋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미생물들은 내 몸의 일부이고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걸, 그리고 나쁜놈과 좋은놈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도 대충은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강박증 아이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세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대략 50퍼센트가 세균으로 이뤄졌는데, 이는 나를 이루는 세포의 절반은 전혀 내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라는 특정한 생물 군계에는 지상의 인간보다 천 배 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으며, 종종 내 안과 표면에서 살고 번식하고 죽는 그들의 존재가 느껴지는 듯했다. 



 더 많이 안다고 해서, 강박증을 일으키는 원인을 객관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세포 속에 살고 있는 그 미생물들이 자신을 차지하고 마음대로 조정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나쁜 미생물에 대한 공포에 매몰되어 있다. 단짝 친구인 데이지의 힘겨운 경제적 사정과 가정사에 거의 아는 게 없다시피할 정도로 자기 자신과 자기자신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만 생각한다. 그럼에도 데이지와 홈지는 둘도 없는 단짝이고, 둘은 10만불의 현상금이 달린 백만장자 데이비스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시작한다. 

화이트 강 건너 저택엔 강둑과 저택이 있고 그곳에 데이비스가 산다. 강건너 저택이 돌담과 강둑과 철조망으로 방비된 덕에 홍수 때마다 강이 홈지네 쪽으로 범람한다.  부가 흘러 넘치는 곳에 재난은 빠져나가지.  데이비스가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홈지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데이비스를 슬픔 캠프에서 만났었고, 캠프가 끝난 후에도 그들은 몇 번 만났다는 걸 기억하는 데이지가 데이비스를 이용하여 그의 아버지의 행방을 찾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이들의 사건은 데이비스와 홈지를 연결시켜주는데, 서서히 데이비스를 알아가면서 사랑을 느낀 홈지는 자신의 강박증 때문에 더이상 나가지 못함을 알고 절망한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때로 이게 무슨 과학 대중서에 나올만한 대사들을 읋어 대는 아이들을 보며 이거 미국 고등학생들은 이렇게나 똑똑하단 말야? 는 감탄이 나오다가도, 그렇게 잘 아는 아이가, 손세정제를 먹어 간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는 막무가내의 행동까지 할 때에는 그를 그렇게 만드는 힘이 정체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강박증은 병인 거 맞고, 완치되기 힘들지만, 여러 심리 치료로 조금 삶의 질이 나아질 수는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주로 TV에서 하나의 재미있는 캐릭터로 자주 만난다. 예전에 어떤 친척분이 약간 그런 증세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직까지 화자되고 있는 재미있는 일화 중 하나는 접시에 새우깡이 조각조각난 조각이 많이 있더란다. 이게 뭐냐 했더니 새우깡을 집어먹을 때, 손에 닿은 부분을 안먹고 떼어놓은 거란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외식을 하고 숟가락을 같이 쓰고 그럴까 하며 깔깔거렸는데, 그 분이 캄필로박터균과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레와 엡스타인 비 바이러스 같은 병원균의 이름을 일일히 알았을 리는 없지만, '세균' = '병원균' 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하는 행동과 그것에 대한 주변의 조소 때문에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을 지는 짐작할 길이 없다. 책에는 그 강박적 마음이 어떤 식으로 그런 자해적인 행동을 불러오는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이들의 대사도 통통 튀고. 읽을만 하다. 


옛날에 어떤 과학자가 있었어. 과학자는 구름처럼 모인 관중 앞에서 지구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지. 지구가 수십억 년 전에 우주 먼지로 이뤄진 구름 속에서 생겨났고, 한동안 아주 뜨거웠다가 또 한동안 서늘해져서 바다가 생겼다고. 바다에서 단세포 동물들이 출현하고, 또 수십억 년이 지나 생물이 늘어나고 복잡해지다가 25만 년 전쯤부터 인간이 진화하고, 우리는 보다 진화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우주선과 그 모든 것을 만들게 됐다고. 그렇게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명체의 역사에 대해 연설하고 끝으로 관객에게 질문이 있냐고 물었어. 그러자 뒤에 앉은 할머니가 손을 들고 말했지. 
‘잘 들었습니다, 과학자 선생님. 하지만 사실 지구는 거대한 거북이 등에 세워진 평평한 땅이랍니다.’
과학자는 할머니를 골려 주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물었어.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거대한 거북이 밑에는 뭐가 있습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답했지. 
‘더 거대한 거북이가 있죠.’
이제 과학자는 화가 나서 물었어. 
‘그럼 그 거북이 밑에는 뭐가 있나요?’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지. 
‘선생님, 이해를 못하시네요. 그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는 거예요.’

나는 깔깔 웃었다. 
“그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구나.”
“거북이들만 존나 있는 거야, 홈지. 넌 맨 밑에 있는 거북이를 찾으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
“왜냐하면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으니까.” 

나는 영적 깨달음에 가까운 무언가를 얻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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