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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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의 뒷 이야기는 아마도 이 책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어찌 저찌 하다보면 고등 교육을 받고도 가정이라는 굴레에 갇혀 존재감없이 지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여성들이 많은데, 여성들이 사회생활이 단절되는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기혼 여성에게는 양육이라는 대업이 또아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고 이를 완수한 후에 뒤돌아보면 날마다 새로와지는 사회에 뒤떨진 듯한 좌절감이 큰 이유 중 하나다. 


63세의 브릿마리의 평생 직장이라는 것은 결혼 전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것이 전부이다. 40여년간을 남편의 아이들을 돌보고, 커트러리를 정리하고, 과탄산소다를 이용해서 집안을 구석구석 정리하고, 리스트를 만들어 장을 보고, 반짝 반짝 윤이나게 식기와 집안 물건들을 닦고, 남편의 옷을 다리고, 6시 정각에 저녁을 차리고, 그렇게 집안을 관리하는 일이 그녀의 일이고, 그녀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남편이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렇게 살림만 하며 살아가던 브릿마리가 집을 나와 직업 소개 센터를 찾아가는데, 그가 일해야 하는 이유가 서늘하다. 늘 반짝반짝 닦고 정리하고 매일 같은 시각 해가 뜨듯 모든 것이 정해진 자리에 정해진 시간에 있어야 하는 그녀지만, 혼자가 되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온다면, 주위에서 냄새가 날 때까지 혼자 썩어가게 된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언젠가 죽음이 찾아왔을 때 혼자 죽어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매일 같은 시간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게 되면 어느날 자신이 사고로 죽더라도 그녀가 일하던 일터는 어제와 다른 오늘이 될 것이고, 그녀의 죽음을 알아채게 될 것이다. 1주일 이상씩 주위에 냄새를 풍기며 홀로 썩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그녀가 직장을 찾는 이유다. 


요즘 아이들은 경제가 불황이라는 소리를 태어나면서부터 듣는 것 같다. 90년대 정도에 세계 경제가 활황일 때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이처럼 꽁꽁 얼어붙은 경제 상태에서 미래를 찾아야 하는 청춘들을 볼 때마다 미안해지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한 때 좋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불황 앞에서는 누구나 움추려든다. 좋은 사회 제도와 안전망을 갖추어 잘사는 나라라고 부러워하는 북유럽이라고 해도, 불황을 피해갈 수는 없는 모양이다. 


직장을 찾으러 센터에 갔지만, 그 연세에 직장을 잡는 건 어렵겠다는 걸 직원은 돌려 돌려 말하지만, 40여년간 집구석에서 청소와 십자말 풀이에 온 인생을 바쳐온 꽉 막힌 브릿마리에게 무슨 말이든 통할 리가 없다. 눈치도 없고 자기 멋대로인 구석이 있어야 일이 풀리는 경우가 있다. 거절의 완곡한 표현으로 다음에 연락드리겠다고 하는 말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끈덕지게 쫓아다니며 밥까지 해주며 얻은 직장이 보르그라는 쇠퇴해가는 마을의 언제 문닫을지 모르는 레크레이션 센터 관리인이다. 


마을의 집들마다 매물 표지판이 내걸려져 있고 시와 구청에서 운영하던 거의 모든 시설들이 철거되고, 주민들의 편의시설이라고는 브릿마리가 관리하게 될 레크레이션 센터와 상점 하나가 전부인데, 이 상점은 구멍가게와 우체국과 커피숍과 피자집과 자동차 수리점까지 겸하고 있으며, 주인은 휠체어를 탄다. 까칠하기 짝이 없고 꽉 막혔지만, 하루 하루 보르그의 사람들과 레크레이션 센터 주차장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 남아있는 보르그 사람들과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며 브릿마리는 서서히 새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줍고 친절한 마을 경찰관인 스벤과 썸을 타는 중 갑자기 나타난 남편은 브릿마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조금씩 알아가는 사람과 이미 모든 것을 알아 더이상 알 필요가 없이 친숙한 사람 사이에서 그녀가 켄트에게 갖는 익숙함과 편안함 그리고 스벤에 대한 미안함과 애잔함이 마음아팠다. 구청에서 아파트 부지로 내놓아 빼앗긴 축구장 대신 레크레이션 센터 앞의 주차장에서 축구를 하는 동네 아이들과 온갖 일들을 겪게 되고, 결국 선택 앞에서 흔들리게 되는 브릿마리. 60세에 다시 만난 보르그 사람들과의 작은 인연은 브릿마리에게 어떤 선택을 가져다줄까. 


참으로 푸근하고 따뜻한 소설이었다. 저자 프레드릭 베크만은 아직 30대로 아직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노년을 사랑스럽게 그리고 있다. 작가의 세 개의 소설 중에서도 특히 이 작품은 문체가 간결하고, 읽는 내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감정을 과잉되게 표현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또한 크게 드러내지 않는 문체였지만, 몇 번이나 울컥하곤 했다. 브릿마리를 포함해서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소외된 계층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며, 맹인이거나, 부모가 없거나, 휠체어에 의지함에도 불구하고 전투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그 해학과 유머가 참으로 긴 여운으로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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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로머라이제
염색체 끝에 붙어 있는 긴 텔로미어는 생명의 열쇠를 쥐고 있다. 체세포 분열시마다 텔로미어가 짧아져서 한계에 이르면 분열을 멈춘다. 텔로미어를 짧아지게 하는 것은 효소 텔로머라이제의 분비가 줄어들어서이다. 텔로머라이제의 분비가 왕성하면 텔로미어가 긴 상태로 유지되지만 텔로미어가 짧아지면 노화가 일어나고 사망에 이른다. 그렇다면 텔로머라이제를 투입하면 영원한 삶을 보장받지 않을까. 하지만 텔로머라이제가 나이가 들으면 활동을 줄이는 것은 암발생을 줄이기 위해서다. 암세포는 스스로 텔로머라이제를 분비하여 세포가 죽지 않고 점점 커져간다. 텔로머라이제 생산 유전자 스위치를 켜면 텔로미어가 길게 유지되어 젊음을 유지하는 대신 암의 위험이 있고 끄면 노화가 진행된다.

시트루인
유전자는 독성물질과 세포 복제 과정에서 손상을 받는다. 시트루인은 분열중 생긴 실수로 잘못된 유전자를 교정해주는 효소다. 시트루인은 잠을 잘 때 왕성해진다. 인간이 쓸데 없어 보이는 잠을 자는 데 인생의 1/3응 쓰도록 적응헤온 이유다. 세포 분열이 왕성한 어린 아기들이 잠을 많이 자는 이유는 그만큼 유전자가 손상될 가능성이 많아 스트루인의 수요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고릿적 광고 카피도 시트루인으로 설명된다. 스트루인은 배고플 때도 생성된다. 저녁을 적게 먹고 배고픈 상태애서 오래오래 자면 노화가 늦어진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당장 실천.

체온
감기에 걸려 열이 오르면 더워야 할텐데 오히려 반대로 한기가 들고 춥게 느껴진다.땀구멍을 열어 열을 배출해서 삭혀야 되는 판국에 오히려 근육은 수축되고 더욱 열을 올리려는 몸의 이러한 기능은 체온과 면역계의 상관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체온을 0.1도에서 0.3도 정도만 끌어올려도 모든 병의 예방과 치료가 가능하리만큼 체온은 면역 기능에 중요하다. 병균이 침입하여 몸에 비상 사태에 있다는 것은 몸이 자체적으로 체온을 올려 면역계를 강화시키려는 현상이라도 한다. 체온의 기준점은 신체가 적당하다고 정한 기준 온도인데 추위를 잘타는 사람은 실제로 체온이 낮기 때문일 경우도 있지만 신체의 기준점이 높은 경우도 있다. 반대로 온도조절장치 의 시준점이 낮은 사람의 경우 정상 체온보다도 낮은 상태에서도 높다고 판단하여 땀을 흘리고 달아오르는 증상을 가질 수 있다. 전쟁과 긴장 같은 스트레스 상황이 오몀 기준점이 낮아진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따뜻한 물을 자주 조금씩 마시는 것이 체온늘 올리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고.

혹독한 추위에 , 몸속의 소변을 배출하고 혈액의 농도를 높여 체액이 얼어 세포가 파괴되는 것을 막도록 적응한 숲개구리의 사례를 보면 왜 추운 겨웅 노ㅔ졸중 환자가 늘어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인간 역시 추위에 견디기 위한 방법으로 소변의 배출을 늘리고 혈액응고 물질과 고농도의 당을 고농도로 분비해 혈액의 농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진화해왔다. 충분한 낭방과 먹거리로 과거 혹독한 겨울과 는 다른 환경에 처해 있음에도 과거의 유전자를 가진 우리는 이제 혹한의 추위에 대항했던 원시적 생존 전략 유전자로 인해 오히려 건강을 해치고 있다 그러므로 춥고 배고팠던 조상들처럼 덜 먹어야 한다. 특히나 겨울에는 더 덜 먹어야 한다.

비피더스
장내 세균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면서 요구르트나 유산균 보조 식품이 유행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베네수엘라의 한 원주민은 돼지에게서나 발견되는 트레포네마라는 미생물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섬유질을 분해한다. 이건 내 생각인데 이들은 아마도 소나 염소처럼 풀만 먹어도 충분한 당응 섭취할 수 있으므로 먹을 걱정이 필요없겠다 문명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원시 세균이 거의 없고 장내 미생물은 비피더스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항생제를 먹으면 T 면역세포의 이동을 막는 물질(IL33)을 활성화시켜 면역세포가 침입자의 공격하는 걸 방해한다 . 피루미쿠데스라는 세균은 식욕을 떨어뜨리는 ‘렙틴의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반대로 식욕을 촉진하는 크렘린의 분비를 촉진한다(141).‘ 비피더스가 좋다고 무턱대고 열심히 먹으면 장에 공급되는 한정된 자원으로 한두개의 미생물만 너무 많아짐으로써 전체 미생물총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저자의 전공은 진화의학이다. 이 책은 알기 쉽게 풀어쓴 건강 상식 정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상식에 대한 근거가 진화론, 다시 말해 인간의 몸이 생존을 위해 택한 유전적 전략들을 근거로 한다. 깊이 있게 들어가면 얼마든지 복잡한 세부 원리로 설명가능하겠지만, 골치아픈 디테일을 모두 덜어내고 핵심적 원리만 단순화시켜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논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신뢰할만한 건상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다윈적 진화론은 생명과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어제 읽은 <행복의 기원>에서도 행복이라는 철학적 개념 역시 진화적 산물로 접근을 하고, 인간의 수명과 짝짓기 방법과 시기 등도 생존방식과 적응이라는 틀 내에서 설명되면 흥미로운데, 적대적 환경에 대항하는 인간의 몸의 가장 기본적인 반응인 선강의 문제야말로 진화적 설명이 더 들어맞지 않을 없다.

어떤 사람에게 약이 되는 식품도 다른 사람에겐 독
이걸 먹어라 저걸 먹어라 하는 수도 없이 많은 건강 정보의 홍수 속에서 모든 음식은 독이될 수도 있고 득이 될 수도 있다. 건강에 그렇게나 좋다는 브로콜리의 예만 해도 그렇다. 선천적으로 갑상선 기눙에 문제가 있던 종족에게, 브로콜리의 쓴맛을 인지하는 유전자가 있었던 인구는 브로콜리의 섭취를 제한하는 식이로 이어져 브로콜리를 못먹는 인구 집단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아이들이 콩밥을 싫어하고 야채를 싫어하는 것 역시 비숫한 맥락으로 이해가능하다. 아직 충분히 소화 기관과 해독 기관이 발달하지 않았고, 다양한 장내 미생물총의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은 아이들이 충분한 해독 능력과 장내 미생물의 분에 의해서만 사라지는 독성을 품은 채소들을 싫어하는 것은 몸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키는 몸이란 유전자와 유전자의 발현에서 기인하고, 그 유전자들은 현생 인류로 진화하면서 멸종하지 않고 생존에 성공한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적‘ 유전자들의 집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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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에, 과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이 점이 좋았다. 누가 미래를 아는가. 상상력만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기술에 갇혀 있을 때, 즉 기술의 제약 내에서는 진정한 미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무엇인가, 현재의 기술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먼저 상상했기에 그 상상의 실현에 대한 소망이 기술을 만든다. SF 작가들 중에는 대단한 과학자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고 들었다. 한국에서 SF 작품 공모전을 할 때 유명한 과학자가 쓴 작품들도 있는데, 또한 그런 글들은 심사에서 자주 탈락된다는 말도 들었다. 기술적으로 얼마나, 어떻게, 먼 혹은 가까운 미래에 가능한 일들인지에 대해 쏟아넣는 설명과 정성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고 그 새로운 세계에서 구축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본다면, 물론 현재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기술은 기계가 생각하는 문제보다 기계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문제에 더 애로사항이 있는 듯하다. 1~2년 전 미국의 나사의 재난구조 센터에서 국제적인 로봇 대회가 열렸는데, 한국의 카이스트에서 만든 휴보가 1등을 했다. 로봇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대략 스스로 차에 올라타고 앉아서 운전을 해서 재난 사이트로 이동을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서 도구를 픽업한 다음 그것으로 가스 밸브를 잠그고, 파괴된 건물의 잔해가 쌓여있는 울퉁불퉁한 바닥을 걸어가고 하는 동작 등을 포함한다. 처음에 그 경기 미션을 접했을 때 로봇 회사들의 반응은 'It's impossible!!!' 이었다.  4차 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 알파고니 하며 곧 로봇이 마치 인간을 정복할 듯 요란한 시대지만 막상 이 세계 최고의 로봇이 치르는 경기 장면을 들여다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인간이라면 단 1초도 망설임없이 행해질 차에서 내리는 동작을 하기 위해, 세계 최고의 휴머노이드들은 느려터진 동작으로 앉았다 섰다를 수차례 반복한다. 영화에서 늘상 접했던 날쌔고 빠른 동작을 수년 내에 구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휴머노이드에서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가 기대에 못미치는 까닭은 이렇게 설명된다.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수백만년에 걸친 진화가 신경망과 함께 정교하게 만들어낸 것이므로 소프트웨어처럼 쉽게 구현가능하지 않다. 즉, 갓 태어난 아기에게 엄마가 적당한 사랑과 함께 먹을 거만 주면 스스로 알아서 서고 기고 걷고 달리고 정교한 몸움직임이 가능하지만, 소프트웨어적인 계산과 언어, 등은 외부에서 꾸준한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전자는 유전자가 하는 것이고 후자는 주입과 연습 등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까 로봇에게 생각을 주입시키는 일은 컴퓨터가 탄생한지 몇 세대만에 많은 것을 구현했지만, 로봇이 두 발로 서서 단지 중심을 잡고 걷는 일만으로도 그렇게 힘든 거였다. 그 재난로봇경진대회에 출품한 로봇들중 다수는 울퉁불퉁한 길을 걷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지도 못했다. 





다시 구병모의 소설로 돌아와 보면, 이 소설이 두고두고 좋은 것은, 과학은 과학에게 맡겨두고 오로지 인간과 로봇 사이의 교감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시대적 배경은 현재이고, 현재에 이렇게 세탁소 일을 돕고 자연어를 처리할만한 지능 있는 로봇이 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말이 안되지만, 상관없다. 죽은 아들이 근무하던 연구소에서 만든 로봇을 받아들고, 함께 살아가는 부부와, 이 로봇과 함께 지내는 이웃들과의 관계 그 속에서 싹트는 기계에 대한 무심함과, 배운대로만 행하고 감정이 없는 기계가 주변 인물들에게 느끼는 감정을 소설 속에서 처리하는 방법이 마음을 터치한다. 


구병모는 대체로 뜸을 들이지 않는다. 시작부터가 서늘하다. 몇년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세탁소 집 외아들이 외국에서 죽은 아들 이야기가 마치 옆집 개가 죽은 것처럼 덤덤하게 묘사되고 그 아들이 발신인으로 보낸 시체를 배송받은 명정은 곧 그것이 시체가 아니라 로봇이라는 것은 알 정도의 지식은 있다. 그 로봇은 아들이 미국에서 다니던 회사에서 개발한 소년 로봇인데 판매용이 아닌 불완전한 샘플이다. 이웃집 세주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초기 세팅을 마친 로봇에게 은결이라 이름짓고, 세탁소의 자잘한 일들을 돕고 가사노동을 도우며 명정과 함께 살아간다. 세탁소의 단골인 서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중학생 시호와 준교 역시 들락거리며 기계인간 은결에 관심을 보이는데.


이 이야기는 시호와 준교의 사랑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로봇 은결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이 시대 열심히 선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힘겨운 삶을 따스하게 비추는 작은 드라마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물론 명정 역시 은결에게 정신이란 것은 없으며 교감할 수도 없고, 무엇을 느끼거나 감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입력된 대로 행동하는 은결에게 시호가 위험에 처해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혼란 스러운 상황에 기억을 뒤져도 해답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데, 그렇게 은결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대면하는 시간은 마치 조금씩 인간이라는 한없이 불안전하고 예측불가능한 존재에 대해 알아가고 성장해 가는 것 같다.  9년이 지나는 동안,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고, 그렇게 그들이 성장하는 동안 아이들은 자주 함께 하는 은결이 조금씩 지식을 축적하고 도우며 적응해가는 모습에서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교감이 전해진다. 아이들이 성장을 하는동안 어른들은 늙는다. 늙은 주인이 생을 떠날 준비를 할 때, 은결은 어떻게 되기를 원할까



이제와 하나마나한 생각이지만 처음부터 이름을 붙여선 안되는 거였다. 그 이름은 언제 까지고 펼칠 일이 없는 종이 속에 접어 두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름을 붙여준 것을 떠나보내는 방법에 아직도 익숙지 않다. p191


준교는 모호한 것들을 모호하게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그의 세계는 명료한 산술과 그 결과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럼에도 은결에 한해서는, 지나치게 오래도록 알아온 부작용이겠지만, 한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전방 시각 카메라 너머 출렁이는 감정의 파고를 측정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다.  p206



존재의 진실성 여부가 그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수긍과 인정에 달려 있는 것들. 잊어버린 채 방기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노크해 오거나 부지불식간에 덜미를 잡아채는 것들. 실체를 확인하고 분석하기 위해 과감히 렌즈를 들이대면 사라지는 것들. 그래서 때로 지나치게 의미가 부여되곤 하는 것들. // 그러므로 준재하기를 그만둘 게 아니라면, 차라리 이해하기를 멈춰야 옳은 것들. 은결은 그 가운데 하나의 모습으로 그의 곁에 머물러왔다.  p208


주인으로서 관찰한 바 기계적 설명이 어려우며 인간의 반응에 가깝다고 판단한 몇 가지 사례가 이어진다. 밤거리로의 목적 없는 불규칙한 산책과 방황, 선물을 받고 난 뒤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중략)... 어린 소녀에서 처녀애로 자라난 이웃집 여성에 대한 연심 p221


무너진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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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생활 속 수학 지식 100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수학 지식 100 시리즈
존 D. 배로 지음, 전대호 옮김 / 동아엠앤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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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이전으로 돌아가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언어만이 존재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어떤 형태의 언어가 될까. 인간은 과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언어가 소통의 수고와 오해에서 오는 고통을 말끔히 해결하고 명료하게 의사 전달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언어가 있다면 인간의 사고 자체가 변형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언어는 기호이고, 수학적 기호도 일종의 언어이다. 그런데 수학의 언어는 오해의 여지가 남겨놓지 않는다.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둘 중 하나다. 만일 말로 설명 불가능한 세상의 이치를 명료한 공식으로 수학적으로 밝히고 그걸 수학적인으로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왜 인간이 진실을 알기 위해, 혹은 진실을 알기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할까. 


하지만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감정을 기호로 표시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컴퓨터 인공지능이 펑펑 울고, 까르륵 웃는 날이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인간은 세상의 모든 진리를 터득했기에 삶이 시시해져서 벽면하고 있을까. 어쨌든 수학적 언어는 명료하지만, 기호가 내포하고 있는 뜻을, 복잡함을, 평범한 사람들의 머리로는 따라갈 수 없기에 궁극적인 언어가 될 수는 없다.


예술과 수학은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예술은 감정을 다루고 수학은 이성을 다루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을 생각해보면 예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수학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음악을 표현하는 기호들은 다분히 수학적이다. 명료하고 거짓이 없다. 적혀진 대로 테크닉을 연마하면 기본은 된다. 


대중에게 수학 대중서는 수학 언어를 일상 언어로 번역한 걸 뜻하는 경우가 많다. 수학적인데, 수학 공식은 경기나게 싫고, 은유나 비유를 통해 그 속에 있는 통찰을 읽고 싶은거다. 이것이 윤리적이고 저것이 도덕적이고 또 이런 것은 불공평하고 저런것은 자유를 빼앗고 그런 시대에 따라 갈대처럼 변하는 정신적 요소들 말고 영원히 우주 끝까지 가도 변하지 않을 어떤 진리가 명료함의 언어로 전하는 것을 일상 언어로 읽고 싶다는 욕망.. 그것은 살아있는 동안엔 결코 충족되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이런 책이 나오면 자꾸 미련을 가지게 된다. 


100가지 주제를 다루는데, 350여 페이지니까, 한 가지 주제당 그리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지는 않는다. 깊이가 충족되지 않을 것 같겠지만, 너무 깊어 혹은 너무 충실한 설명이 가볍게 수학을 일상 언어로 읽으려 했던 불찰을 깨닫게 해준다. 세상에 그런 건 없거든!!! 얼마나 더 깨져야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텐가. 그래도 주제들 자체는 재밌다. 


예를 들어보자. 미루기가 바람직한 경우는 언제일까? 하고 콕 집어서 문제를 내면 뭐 대략  A = D+(A X 2^-D/18)이라는 공식을 더럭 내민다. 물론 설명을 잘 읽어보면 이해가 안될 것도 없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계산 대한 답은 일상 언어로도 나와있으니까. 일을 지연시킴으로써 효과를 보는 대형 프로젝트들의 경우, 시작을 미룬다면 일의 양을 필요한 시간으로 나누는 것으로 정의되는 생산성이 훨씬 높아진다. 무슨말이냐. 때로 일을 미뤄도 된다. 라는 뜻이지만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끝나는 일이 현재 26개월보다 적게 걸리는 일이라면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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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4-2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는 기호이고, 수학적 기호도 일종의 언어이다. 그런데 수학의 언어는 오해의 여지가 남겨놓지 않는다.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둘 중 하나다.

→ CREBBP 님의 윗글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좋은 생각 거리를 던져줍니다. 그중에 우선 위 인용문에서 거론한 언어(적 기호)와 수학(적 기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CREBBP 님은 먼저 (소통의 수고와 오해에서 오는 고통을 말끔히 해결해주는) 명료한 의사 전달이 가능한 단 하나의 언어를 상상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후보의 하나로 수학적 기호를 언급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과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으로 언어 혹은 말에 관련된 물음이 수학(적 기호)에 관련된 물음과 같은 차원의 범주인지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언어적 기호와 수학적 기호가 과연 동일한 범주 혹은 동일한 차원의 비교 수준에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다는 겁니다.

예컨대 위 인용문 중 《언어는 기호이고, 수학적 기호도 일종의 언어이다.》라는 문장에서처럼 언어적 기호와 수학적 기호를 동일 범주 차원에서 비교 논의하는 것이 《인간은 과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물음의 맥락과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 CREBBP 님은 “언어는 기호”라고 하셨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 언어를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형태 등등의 지각 가능한 체계로 나타낸 글자 · 문자 등을 기호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수학적 기호는 그런 글자 · 문자를 가지고 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학적 기호는 문자 기호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수학적 기호는 문자 기호의 하위 범주에 속한다는 얘깁니다. 즉 수학적 기호와 문자 기호(CREBBP 님의 문장에서는 ‘언어’로만 잘못 표현된)는 서로 대등한 비교 관계가 아니란 것이죠.

위와 같은 이해에 기반해 판단한다면, 《언어는 기호이고, 수학적 기호도 일종의 언어이다.》라는 CREBBP 님의 문장은 매우 불분명한 것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자는 기호이고, 수학적 기호도 일종의 문자다.》라고 대략 바꿔 이해하려고 해도 요령부득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일종의 동어반복이라고 할 수 있죠. 추리/추론이 결론을 향해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형국이란 것입니다. 일종의 사고의 착종에 빠져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죠.

해서 위 인용문에서 CREBBP 님께서 《그런데 수학의 언어는 오해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둘 중 하나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수학적 기호는 대략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아라비아 숫자 기호, 라틴어 기호, 그리스어 기호, 히브리어 기호, 영어 기호, 앞의 것 어느 것도 아닌 인공적인 국제 표준 기호 등등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섞인 형태로 쓰입니다. 해서 수학의 언어에 오해의 여지가 없다는 선입견은 말 그대로 선입견일 뿐이라고 봅니다.

CREBBP 2017-04-24 15:00   좋아요 0 | URL
긴 답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조금 바빠서, 긴답글 못드림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적질 잘하는 친구는 좋은 친구일까 나쁜 친구일까.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나의 결점들이나 실수들을 지적해 줌으로써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래서 더 나은 인간이 된다면 사실상 지적질 잘 하는 친구는 좋은 친구라 해야 할 텐데 실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저자가 어느날 어떤 친구는 만나고 돌아서면 집에오는 길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친구가 있다고 생가했는데 다른 친구가 자신에게 이럴 땐 충고하지 말고 그냥 들어주면 안돼? 라고 짜증내는 모습을 보고 그 불편함의 실체를 깨닫고 자신 역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모습으로 비쳤음을 깨닫는 부분이 나온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그런걸 깨달은 때문인지 요즘은 친구들 만나면 서로 칭찬 일색이다. 다 늙어 쭈글쭈글한 피부를 한 할머니들이 계모임같은 데서 어머 너는 어쩜 피부가 20대 같니 하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이유가 다 서로 편하자고 하는 거다. 너 늙었다 살쪄서 돼지같다. 배가 왜 그리 나왔니 이런 말들이 편한 사람들은 아직 다른 즐거움들이 얼마든지 많고 자신감이 차 있시에 그런 말이 새발의 피만큼도 상처나 불편함이 안되기 때문인데 나이가 들면 나이 자체가 자신감을 위축시키므로 나 스스로 상처받기 싫고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싶다면 상전이 아니라 하전에게라도 서로서로 아부해야 한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찌해야 할까.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쪽 뺨을 내밀라고 하는 종교적 가르침 대신, 개인이 다른 개인 때문에 불행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 통하는 가치관이다. 나를 좋아해줄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좋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포기하고 나도 똑같이 미워하라는 것이 저자의 충고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내 경우 한술 더 떠 똑같이 미워하고 미워한다는 것을 알게 행동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가 나를 미워해서 내가 입은 상처와 스트레스는 그에게 되갚아져야 풀릴 것이니까. 사실 여러 심리학 책에서도 나르시스적인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 그 사람과 관계를 피하라고 충고한다. 그런 사람은 나의 노력으로 바뀔 수 있지 않으며, 피하는 것만이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참아라, 베풀어라 이런 도덕적 윤리는 어느 집단의 희생(그것이 여성이든 약자든 하위 신분이든)을 기반하에나 다른 집단 혹은 사람의 편안함과 성공이 보장되었던 시대에나 통한다. 지배자의 논리다.

책의 내용에서 살짝 멀어졌는데, 이 책 자체가 보노보노를 읽으면서 생각한 내용들, 감상, 깨달음, 통찰, 사유들을 글로 적은 것이다 보니 보노보노를 안읽은 나로서는 보노보노의 철학을 함께 탐구해가기 보다는 저자가 느낀것을 수동적으로 읽을 수 밖에 없는 점이 아쉬웠다. 그러니까 보노보노를 매우 좋아하는 독자가 읽으면 훨씬 더 재맜게 여러 캐릭터가 주는 느낌들을 더 강허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보노보노는 80년데대부터 90년대까지 네 컷만화로 시작해서 티브이 애니와 영화로까지 이어진 시리즈로, 보노보노는 해달이고 그의 너구리 친구 너부리와많은 동물 가족들이 나와서 유아용 만화 같지만 그 속의 대화는 뜯어볼수록 철학적인 모양이다. 나무위키에 보니 최근 Jtbc뉴스룸과 동시간대에 방영했는데 시청률이 3퍼센트에 이르렀다고 하니 엄청난 인구가 보노보노를 알고 있는데 불행히도 나는 그 중 하나가 아니었다. 보노보노의 명대사들은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고 뜯어볼수록 묘한 철학적 영감을 준다. 저자가 이 보노보노를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새유하는 내용은 평아한 듯 보이면서도 콕 찝어 말해주니 급공감이 되는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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