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 어떤 애도와 싸움의 기록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획.채록 / 나무연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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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절반은 여성이다.  나머지 세상의 절반은 남성이다. 차이를 인정하기 전에 해결되어야 할 과제, 평등을 말하기 이전에 이미 확립되어야 했을 것들의 부재속에서 쌓아올려진 여성해방이라는 허상은 밤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칼에 맞아도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두 성간의 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확고한 성벽 속에서 남성이 안전하게 몸을 펴고 활보하는 동안, 성벽 밖의 여성은 익명의 남성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또 다른 남성을 필요로 한다. 데이트를 끝내고 여친을 바래다주는 문화가 서구에서도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나는 이시대의 페미니스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밤에 화장실을 혼자가는 일이 불안한 이 사회에서 , 저 포스트잇들을 붙이기 위해 얼굴을 마스크로 가려야 하는 세상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어쩐지 사치처럼 느껴진다. 

천사 개의 포스트잇은 보존을 위해 잘 옮겨졌고,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북은 공짜다(메갈이니 어쩌니 해서 쓸데없는 논쟁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공짜인 이북을 소개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이 사건을 바라보며 느꼈던 이 땅의 모든 여성들 개개인의 목소리다. 


시스템 속에서 이득을 취하며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등을 돌리고 스스로 속인 것 역시 분명한 잘못입니다. 저는 잠재적 가해자입니다. 바꾸기 위해 이제부터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겠습니다. 슬프고 화가 납니다. 부디 고인의 명복을

923 여성은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보호받지 않아도 누군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정신분열증 때문이라고 합리화하지 마세요. 제 동생은 정신분열증 환자이자 페미니스트입니다.

피의자는 정신분열증을 앓았다고 합니다. 언론들은 여성 혐오가 아닌 개인의 범죄라고 보도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성에게 무시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요? Misogyny가 만연한 우리 사회가 아닌가요?

892 여성 혐오 범죄=열등 범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여성에게 화풀이하지 마세요.

만나주지 않는다고 폭행당하고, 헤어지자 했다고 염산 테러를 당하고, 여성이란 이유로 살해를 당하는 나라. 이런 이유는 어느 나라에서도 정당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딸을 ‘단속’하지 말고 아들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여성 혐오, 장애인 혐오, 성소수자 혐오, 이주민 혐오. 온갖 혐오를 낳는 사회구조에 맞서 새날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고 싶지 않다는 게 왜 남혐인가요.

나는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보상품이 아닙니다. 마구 대하고 죽여도 되는 존재도 아닙니다. 나는 살고 싶습니다.

화장실을 같이 가달라는 게 아닙니다. 혼자 가도 안전하고 싶다고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사회는 불평등과 차별이라는 뿌리를 뽑아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추모 공간 보존할 예산으로 공공 화장실이나 설치하려는 발상이야말로 여성들과 소수자들을 사회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하는

남자에게 보호받고 싶지 않습니다. 남자 없이도 안전하고 싶을 뿐이에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잠재적 가해자라서 듣기 싫은가요. 나는 ‘잠재적 피해자’라서 무섭습니다.


오래 전 대학에 막 들어갔을 때, 기숙사의 한 친구에게 짝사랑하게 된 동향 출신의 선배가 생겼다. 동향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볼 기회가 있었고, 모임이 있을 때마다 늘 선배 얘기 뿐이었다. 스무살 청춘을 흔들어 놓았던 그 선배의 나이 역시 스무살 청춘. 선량하고 푸른 청춘이었다. 그 선배가 친구가 좋아하는 걸 눈치채고 하숙하던 집으로 불렀던 날, 그 친구는 울면서 돌아왔다. 매일매일 꿈꾸던 그 멋있던 선배와의 첫 데이트는 선배의 강간 미수로 끝났다. 강하게 저지하는 친구의 청바지를 거의 반을 완력으로 벗겨냈다. 저항을 하는 데 어떻게 바지 단추를 푸르고 지퍼를 벗기고 그 빡빡한 청바지를 내릴 수가 있지? 나는 순박한 그녀를 의심했을까. 이해하지 못했다. 내 앎의 한계로는 무언의 동의가 있지 않은 이상 옷을 벗기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이 아직까지 떠나질 않는다. 힘이 너무너무 센거야. 한 손으로는 내 손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바지를 벗기고, 아무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힘이 너무너무 세서 꼼짝할 수가 없었어. 그렇다. 그들은 힘이 세다는 것이 나에게 평생 각인된 첫 이성의 차이에 대한 배움이었다.  힘이 너무 세다는 것. 막판에 어떤 순간이 왔을 때, 힘으로는 절대로 남자를 당할 수 없다는 것. 아무리 멋있는 남자라 하더라도 그의 욕망이 시키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힘으로 강간할 수도 있다는 교훈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뢰적 인간관계 형성을 취약하게 한다. 힘으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세상 어디에서곤 만연되어 있다. 그리고 그 힘의 논리 앞에서 꼼짝 달싹할 수 없는 위치에 서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어른은 아이들보다 힘이 너무너무 세다. 남성은 여성보다 힘이 너무너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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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5 2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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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6 18: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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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2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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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스퀘어>를 재미있게 읽어서, 큰 기대를 가지고 읽었는데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 달랐다기 보다는, 문장적으로나 전체 스토리 구조적으로나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개별 문장의 불가해적인 부분은 아마도 번역투의 거친 문장 때문에 문맥을 알아차리가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 같은데, 원문 자체가 애초에 쉽게 번역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을테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내용적으로 뭐가 뭔지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가장 먼저 의문이 드는 것은 주인공인 가정교사의 정신이 온전한가 하는 것이다.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고, 액자 바깥의 이야기 도입에서는 더글라스라는 사내가 난로 앞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엄청 무서운 얘기가 있는데 귀신들과 아이들 둘이 연관되어 있으니 무서운 이야기에 나사를 두 번 조여주는 효과가 있을 거라는 얘기를 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해달라고 해달라고 하니까, 아 그 얘기는 집 서랍에 글로 되어 있는데, 원하면 그걸 하인에게 가져오게 하겠다고 하고, 다음 날 뻥치고 있네 하던 사람들 일부는 가고 남아있는 액자 바깥 화자에게 그 서랍속에 글을 읽어주는걸로 시작된다. 쓸데없이 프레임 속과 프레임 바깥의 인물은 아무 관련도 없는데 왜 이런 구조를 사용했을까 의문이 들어서 다 읽고 나중에 뒤적뒤적 살펴보니 새로운 사실을 상상할 수 있었는데, 이 파트가 무섭다. 그렇다면 이건 스포가 되니까, 일단 뒤로 뺀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아이들의 보호자인 삼촌에게 반한 그녀는 플로라에게도 매료되어 아직 만나보지도 않은 아이의 오빠 마일스가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확신하는데, 따라서 아이를 만나기도 전에 열어보게 된 퇴학통지서는 부당한 것이라는 확신을 그로즈 부인에게서 듣고 싶어한다. 아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자기 식대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마일스가 집에 온 이후에도 그녀에게는 마일스가 순수하고 신선하고 다정한 아이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보호자인 삼촌은 가정교사에게 아이들 문제로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고 알아서 처리하는 조건으로 월급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 퇴학 건은 가정교사가 가장 먼저 처리해야 일순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이들과의 달콤한 관계에 빠져, 그 일을 뒤로 미루는데 아이 역시, 퇴학 건에 대해 새 가정교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낸다. 자신이 맡게 된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퇴학당했었다면 그것도 처음 다루게 되었으니만큼 그로즈 부인에게 아이의 어떤 행동에게서 나쁜 행동을 보았는지 캐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로즈 부인이 본 아이의 나쁜 행동이라는 것도 결국은 엉뚱하게 아이의 순수한 장난기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이후 더욱 이상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그것은 더글라스가 미리 예고했던 대로, 집안 구석구석에서 귀신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귀신의 정체는 집에서 일했던 하인 퀸트와 그 하인의 애인이었던 전 가정교사 제셀이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 순진하지만 어딘지 불한하고 엉뚱한 가정교사는 그 귀신들이 아무때나 불쑥 불쑥 나타나서는 아이들을 조정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단지 그녀의 생각 속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하지만, 귀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사건들을 포함한다. 어린 플로라가 갑자기 없어지자 가정교사는 제셀 귀신의 짓이라 확신하여 연못 건너편 제셀 무덤가에 아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하인 퀸트의 생김새를 알지 못했음에도 그의 모습을 그로즈 부인에게 묘사하는 것, 가정교사가 확신하듯 마일스를 조정하던 귀신이 사라지자 마일스가 가정교사의 품안에서 죽는 일 등이 그렇다.

 

그로즈 부인의 설명에 의하면 퀸트와 제셀은 살아 생전 서로 남녀 관계를 맺어왔는데, 가정교사는 이 관계 자체를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신분이 낮은 퀸트와 제셀이 어울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결하게 생각하는 것 같고, 또한 아이들이 한명은 제셀 한명은 퀸트에게 맡겨져 나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죽고 나서 그 아이들을 조정하여 일을 꾸미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가 이전 가정교사와 하인, 그리고 아이들과의 관계를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하인이라는 신분, 그리고 그로즈 부인이 언급한 바람둥이 기질 같은 것으다. 설사 귀신이 되었다 한들 죽어서 어떤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왜 아이들 곁을 배회하면서 악의 기운을 퍼뜨린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이 점에 대해서는 가정교사가 목사의 딸이라는 점, 그래서 악령의 존재를 믿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할 수 있겠으니, 만일 정신착란증이라고 한다면 아이들이 자신에게 존경을 품고 착하고 귀엽게 군다는 가정교사의 말과는 달리, 궁극적으로는 가정교사를 보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심리가 그녀의 집착적인 행동을 차차 눈치채면서 거부감이 생겼다고 판단할 수도 있는 반면, 만일 그 귀신들의 존재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에게서 악령을 떼어놓으려는 것을 방해하는 가정교사를 퀸트와 제셀이 아이들을 조정하여 밀어내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스포라고 얘기했던 부분인 액자 바깥으로 돌아가 보자. 그것은 어쩌면 이야기 속의 남자 아이 마일스가 글을 읽어주는 더글라스와 동일인물일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다. 일단 마일스와 가정교사의 나이를 따져보니 이야기는 그녀가 스무살이었을 때 이야기이고 그 때 마일스가 채 10살이 안되었다고 하니 둘의 나이 차이가 10살 난다는 것인데, 액자 바깥에서 더글러스가 이야기의 화자와 자신이 10살 차이나는 연상이라고 밝힌다. 또한 액자 바깥의 화자는 그 글을 쓴 가정교사가 자신의 누이의 가정교사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그녀는 가정교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가 방학때 찾아왔을 때 그녀와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을 하며 더없이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점도 동일인물임을 설명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일스는 죽었기 때문에 더글라스가 만일 이야기속의 주인공 마일스라면 더글라스는 귀신이 되는 게 된다. 더글라스가 처음에 엄청나게 무서운 이야기라고 했는데 사실 읽을 때는 가정교사가 뭔가 좀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이상한 것 말고는 귀신들이 뭐 피를 뚝뚝 흘리며 너잡아먹지 하며 무섭게 묘사되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진짜 무서우려면 이야기되지 않은 곳에서 무서움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만일 더글라스가 만일 귀신이라면 이게 진짜 무서운 이유가 된다. 가장 중요한 단서로 액자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이 액자는 가정교사가 누구냐를 설명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더글라스의 존재가 필요없어진다. 더글라스의 역할은 단지 자신이 좋아했던 10세 많은 여인이 자신에게 준 글을 읽어주기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 등장한 난로가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또다른 액자 밖의 화자들이 그렇게 쓸데없이 한 겹 둘러싸고 있을 이유가 없어보인다.

 

여기까지가 내 생각이고,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발표되면서 더욱 그녀의 (삼촌에 대한) 억압된 욕망과 불안한 심리를 재료로 다각적인 방향으로 해석과 비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수도 없이 많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작품 자체의 모호하고도 불확실한 성격 때문인 것인데, 이러한 방식의 책들이 요즘에야 널리고 널렸지만, 당시에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매우 혁명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식스센스 급의 반전이 가능한 것도 이러한 개척자의 시도가 있어서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공감돼서 퍼온 것이 아니라, 이게 뭔 뜻인가 이렇게 밖에는 번역이 안되는가 의아해서, 영문본을 찾아보려고 표시해둔 곳인데, 영문본PDF는 받아놓고 찾아 보다 말았다. (번역이야 알아서 잘 했겠지 싶은데, 내 머리가 잘 안돌아가는 거 같다)


나의 태도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과시하듯 돌아다녔다. 194/241

 

그러나 그렇게 돌아다님으로써, 그 아이가 전날 플로라를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아 나를 속이고 우롱함으로써 우리 관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더욱 공공연히 알리게 되었다. 194/241 (몬소리야 망이 안되자나)

 

이후 다가올 고뇌를 예고하는 불꽃으로 우리의 흐릿한 눈이 이미 타오르고 있는 광경이 지금도 보이는 듯하므로 205/241

 

늘 너무 놀란 상태로 지낸다는 것을 이유로 우리 두 사람은 전보다 더 친밀해졌다. 35/241

 

몇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생생한 모습을 다시 재현할 수 있는 당혹스러운 환영이 나타났다. 41/241 (즉몇년 뒤에 썼다)

 

내가 본 것을 받아들이는 사이, 마치 주변 모든 광경은 죽음의 빛을 띠고 있는 듯했다. 4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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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9 2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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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9 2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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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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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잘생겼냐 못생겼냐 하는 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관점이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준이 오락가락하기에 누가 잘생겼다 누가 못생겼다 라고 말하는 건 개인의 한 편협한 견해라는 데 뜻을 모아야겠지만, 개인이 자기 자신을 향해 못생겼다는 할 때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말이어서, 맞아요 맞아 하고 동의해 주어야 할지 흠 아니야 그정도는 아니야 하고 반대 의견을 내야 할 지 살짝 고민된다. 우리에게 그 모습도 친근한 서민 교수는 스스로 못생겼음을 즐겁게 희화화한다. 한 번 태어나는 인생 평생 가지고 살 얼굴이 남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게 되면 그 얼굴로 살아가는 내내 인간 관계, 특히 이성 관계의 약점이 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요즘은 못생기면 취업하기도 힘들어 취업 성형을 한다고도 하지만,  못생긴 정도에 비례해서 경쟁력이 생기는 분야가 있다. 바로 웃기는 게 그렇다. 못생긴 사람은 어딘가 친근하고 웃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건 어디까지나 근거 없는 내 생각이지만, 개그맨도 못생길수록 잘나간다. 천성이 웃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못생긴 건 소품이다. 사실 저자가 그렇게까지 못생겼다는 생각은 (내가 눈이 낮아요) 해볼 새도 없이 본인 입으로 못생겼다는 말을 하는 걸 너무 많이 들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저자는 천성적으로 웃기는 걸 좋아한다. 글쓰기 책이라 글에 대한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데,  역시 웃겨야 한다는 것이 제 일순위인 듯하다. 


스마트폰이 대세이지만, 우리는 많은 말로 하는 통화보다는 더 많이 텍스트를 만들어내고 텍스트를 읽으면서 산다. 같은 텍스트라도 잘 쓰면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웃음을 줄 수 있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의 글로 시작하는 이 책은, 본인의 (실패한) 글쓰기 책쓰기 경험을 토대로 수없이 많은 나쁜 예들을 나열하고 분석하면서 실질적인 글쓰기 사례를 제시한다. 거의 본인 얘기인데, 대부분의 자기계발서 계열의 책들이 자기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데 반해, 서민 교수가 이 책에서 말하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물론 이 책도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무수히 많은 실패를 딛고 결국에는 글을 잘 쓴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자찬의 순으로 흐르긴 하지만, 이미 TV며, 칼럼이며 성공한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그러므로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우리가 모르고 아 원래 잘쓰는 분이었구나 라고 생각했을 그의 어두운 과거를 치부를 드러내듯 고백하고 조목조목 이러면 안된다라고 비판하고 있으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의 실패를 함께 경험하는 셈이다. 


그의 실패란 것은, 학부때, 웃기려고 무리수를 쓰느라 유치하기 짝이 없던 회지에 낸 원고들을 포함해서,  제대로된 창작 훈련 과정 없이 쓴 소설은 스웨터에 난 구멍이 스웨터보다 커보일만큼 헛점 투성이었고, 논문으로 교수 점수를 맞추지 못해 책쓰는 걸로 때우려는 나쁜 의도로 대충써서 출간한 낯뜨거운 책들, 그리고 깊이 없이 아주 얕고 얕은 내용으로 대충 써낸 책들을 포함하기에 훗날 그것이 너무 부끄러워 돈 주고 다 사서 없앤 것들도 있다. 자고로 책을 내려면 글쓰기 연습을 많이 해야 하고, 자신이 아주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 깊이있게 쓰되,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쉽게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쉽게 쓰는 한 가지 방법으로 자기도 잘 모르는 내용은 쓰지 말라는 것, 그리고 완전히 이해한 내용이라도 좋은 비유를 통해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라고 한다. 반면 <기생충 열전>과 <기생충 콘서트>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의 말이 없는 걸로 봐서, 이 때 쓴 글들은 피나게 글쓰기 수련을 마친 상태에서 제대로 쓴 글인 것 같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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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보는 미국사 - 아메리칸 시티, 혁신과 투쟁의 연대기
박진빈 지음 / 책세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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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들이 가진 역사는 길지 않지만 그래도 미국 내에서 굵직한 도시들은 각 도시마다 환경에 차이가 있고 개성을 가진다. 특정 도시는, 도시 계획 쪽에 치중한 역사가, 또 다른 도시는 무차별한 유색인종 차별의 역사가 다른 도시는 한 때의 산업 중심 도시로서의 영광을 뒤로한채 천천히 망해간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


이방인으로서 어떤 도시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먼저 주목한다. 도시의 풍경은 무엇보다도 구획되거나 자연스럽게 형성된 거리와 그 거리 사이의 건물들, 멀리 보이는 랜드마크가 지배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사람을 본다. 사람들의 모습 사람의 차림새, 그 사람들이 반대로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나서, 만일 자유여행이거나 방문이라면 도시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자잘한 도시의 디테일들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아마도 도시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이 중에서 마지막 일상을 지배하는 자잘하고 세부적인 풍경들일 것이다. 


세계 어느 도시나 우리에게 길거리에서 가장 먼저 (친근하게도) 눈에 띄는 것은 스타벅스 커피숍이나 바디숍, 맥도널드 같은 다국적 기업의 체인점일 것이다. 그것들이 친근한 것은 그 샵들이 우리에게 친절해서가 절대로 아니다. 골목 상권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다국적 기업들이 전통과 특색이 가미된 전통적 1인 샵들을 몰아낸 것이 단지 그 어느나라에게도 뒤질세라 친세계화의 궁극을 달려, 친기업적 친자본적 생리에 닳고 닳아 무감각해져버린 대한민국의 일, 단지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니라서, 그것이 세계적인 일이라서 안도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일 게다. 


책은 미국의 대표적 8개의 도시의 역사를 다루는데, 비교적 100~200년 사이에 일어난  핵심적이고 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미국이란 사회, 더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속에서 현재 인류가 걷고 있는 사회적 공간에 대해 비판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유럽이나 아시아처럼 나라와 정권이 바뀌었어도 도시 공간 자체가 오래된 역사를 가지는 것과는 달리, 미국은 침략 이후 인디안들을 몰아내고 그 땅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기에, 도시라는 사회 문화적 공간 속에 구석 구석 스며든 긴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그들이 나무를 베고, 숲을 태워 경작을 하고, 소떼들을 죽이고, 전염병을 옮기고 땅을 빼앗아 도시를 만들기 전에도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곳은 그렇게 태고적부터 존재하던 공간이었을 터인데, 패자는 역사마저 없었던 것처럼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혀지고 지워지고 사라지고 없다. 


독립전쟁 이전에도 꾸준히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의 유입이 있었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미국 각 대도시의 '참된 역사'는 미국이 자유와 해방의 정신 아래 독립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 자유와 해방의 정신 아래 백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편견과 차별과, 편파 속에서 자유를 박탈당하고 살아왔는지를 환시시켜준다. 미국의 화려함을 한눈에 확인시켜주는 대도시들. 그 공간들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흑역사로 요악된다. 흑인 및 유색 인종에 대한 폭력과 박해에 대한 역사이기도 하고 부동산 투기와 특혜 정경 유착을 통해 소수 특권층의 새로운 귀족 계급을 양산해 낸 역사이기도 하다. 


아메리칸 드림이 펼쳐지는 이민자들의 천국처럼 여겨지는 로스앤제레스를 먼저 보자. 사막의 한 가운데 건설된(1905~1913) 로스앤젤레스는 경제 급성장 시기에 인구가 늘자, 544킬로미터나 떨어진 시에라네바다 산맥 기슭에서 물을 끌어오기 시작했고, 그것은 산업화를 가속화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때 시장과 주변인물들은 도수관 건설과 관련된 지역에서 부동산 투기를 했고, 도수관 덕분에 현재가지도 이 도시의 물리적 경제적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산업을 끌어모았고, 구엘리트들이 없는 이 지역에서 그들은 그렇게 만든 검은 돈으로 유력가문을 형성하였다. 부패와 투기로 만들어낸 신흥 귀족들은 그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날이 가고 해가 가고 세대가 바뀔수록 더욱더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며 대대손손 천년만년이라도 살 것 같은 부를 누리고 세상을 주무르고 있다. 


겉으로 보이기에 평온해 보이는 로스앤젤레스의 문제는 자동차 중심의 도시라는 것이다. 부동산 이해집단과 개발자본주의의 끊임없는 공세에 도시는 대부분의 대도시가 수직으로 높이 솟은 마천루들을 갖는 데 반해 한도 끝도 없이 수평으로 확장했고, 교외 지역의 밀집 주거 단지 건설된다. 자가 자동차 위주의 계획도시이다보니 대중교통은 미비하다. 고속도로를 따라 형성된 쾌적한 교외 지역으로 자동차를 가진 백인 위주의 중산층은 탈출했고 도시에는 빈민만 남았다.


"이 길(기적의 마일)은 철저히 자동차 운전자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 심지어 거리의 간판과 건물 등은 시속 30마일로 달려가면서 볼 때 가장 잘 식별되었다."


뉴욕은 도시 공간의 역사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런던 시내에서 노동자 계급의 거주지에 중산층이 유입하면서 기존 거주자들인 노동자들이 밀려나는 현상을 보고 붙인 용어였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는 흔하고 흔한 현상인데, 낙후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유색인종, 예술가 집단, 이민자들)을 정책적으로 교묘히 내쫓고 재개발하거나 건물을 수리하여, 그 곳에 있던 이민족의 정서나 혹은 급진적 예술가적인 정체성의 일부들을 흡수하여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흔하디 흔한 재개발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더 속상한 것은 그들이 먼저 살고 있던 사람들을 밀어내고, 그 곳의 독특한 분위기를 부동산과 관광 산업에 이용한다는 것이다. 


도시 빈민과 노숙자들을 도시의 중심에서 내쫓는 현상은 1994년 줄리아니 시장의 "깨진 유리창 이론"으로 알려진 불관용정책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도시빈민과 노숙자들을 젠트리피케이션의 결과로 나타난 사회적 약자나 피해자로 보지 않고, 도시 공간의 약탈자로 보는 것이다. 버려져있다시피한 할렘이 시정부보증을 담보로 투자가 시작된 때도 1990~1998년 미국의 경제활황기였다. 낙후되고 허름한 거리들은 오래된 상태로 그대로 있다는 이유로 옛정취와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젠트리피케이션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할렘에 정체성을 부여했던 사람들은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떠나야 했다. 그곳에 있던 독특한 소규모 상점들은 전국,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브랜드 상점으로 교체되고, '쾌적한 문화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이득을 본 사람들은 물론 부동산 투기자들이다.  로어이스트사이드의 한 버려지다시피한 싸구려 임대 아파트는 어떤 부동산 투자자가 경매에서 2500달러에 낙찰되었는데, 약 10년뒤 개보수 후 총 86세대, 세대당 120만 달러 팔렸다.


반대로 낙후된 상태의 공간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공간의 흑백 분리라는 문제를 유발한다. 세인트루이스의 푸루잇 아이고를 전에 정지돈의 단편집에서 읽고 인터넷 찾아보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역시 같은 시나리오다. 백인들이 빠져나간 한 마을이 공동화되면서 범죄가 끊이지 않자, 임대주택을 지었는데, 애초 엉터리로 지은 것, 제대로 마무리가 되지 않아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도 망가지기 일쑤. 그곳에 사는 흑인들은 나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도 많았고, 자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관리가 너무 엉망이어서 점점 더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스콤은 게을러 빠진 흑인들 잘못이라고 사람들 탓을 했다는데, 우리나라 주요 보수 일간지들이 보수 정치인들과 함께 약자와 빈곤층을 향해 퍼붓는 독설과 어찌 그리 쌍둥이 같이 똑같은지. 정부는 입주자들을 계속 속였고, 입주자들이 계속 빠져나가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은 입주자들도 있었다는 것.


아틀란타와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다른 남부지방의 많은 도시들의 경우 도시에는 가난한 흑인들이 살고, 중산층 이상의 백인 부자들은 잘 정비된 고속도로를 끼고 외각으로 나가 사는데, 그렇게 된 시나리오는 이렇다. 도시에 산업이 발달하면 흑인들(혹은 유색인들)이 인구집단을 형성하고, 1950년대까지만 해도 백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동네에 흑인들이 이사오면 보이콧했다. 집을 부수고, 폭력을 행사하고, 그 부동산을 파는 부동산 사무실을 불지르는 등의 과격한 분리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유색인들이 한둘이라도 들어오면 부동산 가격은 폭락하고 백인들은 집을 팔고 외곽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 외곽의 부유한 주택지 개발을 위해 주정부는 혈세들을 펑펑 쏟아 고속도로를 정비하고 각종 편의 시설을 지어대는데, 그렇게 해서 새로운 주변도시가 형성되면, 이제는 그 자신들이 버리고 왔던 주도시를 위해 세금을 내고 싶지 않으니 도시를 분리해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많은 도시들 중 8개 도시들만 다루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환경에서 생긴 다른 도시들도 비슷한 역사를 가졌을 거다. 미국의 역사는 차별과 편견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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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통령의 모자
앙투안 로랭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대통령의 모자가 가는 곳에 함께 따라다니는 것은 결국 행운이다. 첫번째 남자에게 모자는 자신감이었고, 두번째 여자에게는 결단이었고, 세번째 남자에게는 용기였다. 그리고 네번째 남자에게 모자는 혁신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말을 고르느라 헛수고를 했지만, 사실은 그게 그거다.  미테랑 대통령이 식당에서 두고 간 모자가 우연히 누군가에게로 오면 그 모자를 가진 사람의 인생에는 행운이 뒤따랐다. 다니엘이 그 모자를 처음으로 경험(?)하고 기차에 두고 내렸을 때는 저런 이걸 어째 싶어, 내 일처럼 안타까왔으나,  그런 식으로 모자가 돌고 돌아 다른 사람에게도 다른 종류의 행운을 가져다 줄 거란 건 충분히 짐작할만 하다. 자주 물건을 잃어버리는 나지만, 내게 만일 이런 행운이 생긴다면, 잊어버리지 않을 텐데 말이다. 모자를 쓰게 되면, 나에겐 어떤 일이 생길까.


늘 동료에게 치이기만 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최신영화 케이블 채널 이용권도 없는 찌질남이 아내와 아들이 여행간 사이에 밥해먹기가 귀찮아 들른 곳이 값비싼 식당이었다. 젊었을 때는 돈이 없어서 못간 곳에는 나중에 돈이 있어도 그 젊은 시절 못갔던 시간들을 묘한 마음으로 뒤돌아보게 된다. 그 때 가지 못했던 곳은 지금 가봤자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아내도 없는데.. 그래도 다니엘은 저벅저벅 들어가서 물쓰듯 해산물 모둠 요리를 시키고 값비싼 와인을 시켰다. 그리고 미테랑 대통령 일행이 자신의 옆자리에 동석하는 걸 지켜본다. 이런 절묘한 우연에 다니엘은 가슴뛰는 경험을 했는데, 더욱 더 큰 행운은 대통령이 자신의 좌석 위에 두었던 모자를 챙겨가지 않은  그는 대통령의 모자를 쓰고, 모자 속의 무언가, 자신도 모르고 보이지도 않는 어떤 '나노입자'가 정신에 작용을 해서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풍부한 영감과 생각과 아이디어와 유창함과 자신감을 준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그는 중요한 발표에 핵심을 찌르고 잘 발표해서 자신을 눌러 찍던 동료를 물리고 승진을 거듭한다. 머리카락에서 힘이 생기는 삼손처럼, 그는 모자에서 자신감과 능력이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아뿔사 그것을 기차에 두고내린 것이다. 


결혼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이름은 파니. 몰래 하는 사랑이 괴로워진 것은 어느 날 남자가, 사랑한다고, 아내와 이혼할 거라고 말하면서부터다. 가볍던 만남에 던진 감언이설은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환상을 심고 이제 여자에게 남자는 더이상 가벼운 오락 거리가 아니다. 몇평짜리 작은 호텔방 이외의 공간에서는 서로를 만날 수 없는 처지에서 오로지 기댈 것은 남자의 결단이다.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해. 그 시간이 의미하는 것, 그리고 시간이 가져오게 될 결과를 왜 사람들의 눈을 속여, 밝은 대 함께 걸을 수도 없는 처지의 결혼한 남자에게서 예측하지 못했겠는가. 만남은 관성을 낳고, 그 관성 속에서 같은 속도로 반복되는 일상을 깨뜨릴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기차에서 주운 모자가 그 여자에게 씌어졌을 때, 소설가 지망가인 그 여자는 호텔방에서 바지벗고 기다리던 남자가 웬 모자냐, 누구 모자냐, 어떤 남자가 줬느냐고 하자, 즉석에서 소설을 만들어낸다. 섹스가 끝나면 타인의 사람이 되어 버리는 남자에게 질투할 수 없었던 여자는 모자의 존재로 인해 자신을 질투하는 남자에게 가상의 모자의 주인을 만들어낸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끝나는 거 쉽다. 그 길로 남자는 바지를 주워입고 냉정하게 호텔을 떠난다. 한 번도 붙잡지 않은 채로. 모자의 주인이 가상의 남자라는 말이 사실인지 한 번도 다시 묻지 않은 채로. 모자는 그녀에게, 결단을 주었다.


피에르는 8년째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우울증 상담을 받고 반폐인인 채로 살고 있는 조향사다. 절대 후각의 지존으로, 코로 들어오는 공기중에 포함된 단 하나의 분자까지 정확하게 감지하여 성분을 알아낸다. 공원 벤치에서 발견한 모자 덕에 그는 우울증에서 빠져나와 획기적인 새로운 향기를 만들어낸다. 보수적 프랑스 귀족들과만 사교하며 화석처럼 변하지 않을 낡은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알며 살아가던 베르나르의 모자가 어느 식당에서 바뀌었을 때 그는 기적적으로 자신이 그 화석을 부수고 나와 살아있는 생명이 되고자 했다. 처음으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분명히 하고, 무엇을 지지하는지를 확실히 한다. 


그자들은 화석이야 영원히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만을 바라며 오래된 아파트에서 예전과 똑같은 실내장식 안에 머물러 있는 화석들 185


그가 속한 세계는 더 이상 그를 자기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간혹, 인생이 당신을 어디론가 인도하면 당신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갈림길로 들어서게 된다. 운명의 gps가 정해 준 경로를 따라가지 않게 되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음을 알려주는 표지판도 없다. 이를테면 우리 존재의 버뮤다 삼각지대는 신화이면서 동시에 현실인 것이다. 유일하게 확실한 한가지는 이 난기류 지역에 일단 들어서게 되면 당신은 절대로 원래 가려던 항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지옥은 바로 타인이라고 좌파의 거두 사르트르가 말했는데, 그의 말이 옳았다. (...) 익숙한 바위에만 딱 달라 붙어 사는 홍합들처럼 자기들의 신념에만 매달리는 편협한 정신의 빈대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신봉해 왔던 원칙들이 그가 가하는 비판에 의해 하나씩 차례로 무너져 내리면서 그는 날개가 솟아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2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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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2016-11-0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감, 결단, 용기 라고 이야기해 주신 부분.. 그리고 결국 모두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신 부분에 공감합니다. <모자>라는 물성을 지닌 하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준 게 참 아이러니하죠. 인간은 스스로는 그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약한 존재인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쉽게 읽히는 짧은 소설이었는데 뭔가 씁쓸하게 끝났던 기억이 납니다.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CREBBP 2016-11-09 14:34   좋아요 0 | URL
짧은 단편 여러개를 모아놓은 것 같기도 했지요. 각기 다른 사람들의 스토리이니까요. 모자 하나로 자신의 신념과 자신감과 결단과 용기를 물론 바꿀 수는 없겠지만, 편협한 자기 생각에만 갇혀서 무언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지지부지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에 대한 비유로 보아도 될 거 같아요. 답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