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의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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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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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면은

어스레한 등불에 밤이 오면은

외로운 아픔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는 눈물에 저는 웁니다.


제 한몸도 예전에 눈물 모르고

조그마한 세상을 보냈습니다.

그 때는 지난날의 옛 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님이 가신 뒤에는

아주 저를 버리고 가신 뒤에는

전날에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 때에 외와 두었던

옛 이야기 뿐만은 남았습니다.

나날이 짙어가는 옛 이야기는

부질없이 제 몸을 울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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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김영랑님 -


아침부터 시구절이 입에서 머문다..

따뜻한 돌담 길이 그리워온다.

아침부터 여름의 열기는 가득차오는데

나의 마음은 따스한 봄길에 내려오는

햇살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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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배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아득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휘살짓는다.

앞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리을 눈물로야 보낼 거야.

나 두 야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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