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 개정판, 하버드 초청 한류 강연 & 건국 60주년 기념 60일 연속 강연 CD 수록
박진영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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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떠나지마' 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박진영씨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정말 춤을 잘 추었다. 독특한 자신만의 매력이 강하게 발산되었던 모습.

강력한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 노력하고

국내에서 안주하지 않고 세계로 눈을 돌려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박진영씨의 깨어있는 멋진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자신과 결혼한 사람이 늘 여자친구이길~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친구가 되기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내곁에 묶어 두지 말고 더욱 높이 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고여있는 물이 썩듯이 사람 역시 정체되어 있을때면 자신의 정체성을 읽고 다른 생물체가

되어 버린다. 전통사회에서 여자란 존재는 희생의 두글자 였던 것같다.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지 말고 자신을 귀하게 대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는 삶에서 어떤것이 최우선인지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멋지다.

사람이 유명해지면 본질을 지키기가 어렵다. 환경에 따라서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춤 솜씨를 태어나면서 타고난 재주라고 말한다. 그래서 춤을 잘 춘다는 말이 듣기 싫었다고. 자신이 하지 못하는 부분을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그의 음악은 자유롭고 나올때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것은 자신만의 성장을 위한 표출이기도 했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일 것이다.

가수로써 프로듀서가 아닌 한 사람의 박진영씨로써 진솔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이번에는 어떤 팔색조로 변실하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책의 내용이 에세이를 보다가 카툰을 보고 있는 느낌이라서 가볍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가벼우면서도 그의 진지한 이야기들 속에서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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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마더 데레사 지음, 이창희 옮김 / 마음터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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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책 제목에서 마더 테레사님의 신념과 사랑이 느껴진다.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다.

때론 힘든일이 있거나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을때면 기도를 하곤 한다.

나의 이기심이 가득찬 기도~ 지금까지 하느님을 부를때는 내가 아쉬울때 뿐이였던것 같다.

그 외에도 고마움의 기도를 드린적이 있다. 기도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고, 눈을 감고

'고맙습니다' 라고 말했을 뿐이였다. 

 
고통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직은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진 못하겠다.

'고통은 이겨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오는 시련이다'  라는 말이 있지만.

착한이는 단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하느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곁으로 부른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사는동안 힘들었으니 편히 쉬라고 그러는 것이 아닐지.

죽음은 두렵지만, 생각의 전환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내 마음에 화가 가득차 있으면 화만 보일 것이고 기쁨이 가득차있으면 이 세상이 얼마나 행복할지.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의 감정이 얼굴로 표출되는것을 보면 마음을 이쁘게 가져야 겠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는것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맞는 말인것 같다. 그렇지만, 쉽지 않은일이다.

이런저런 일들도 투덜거리는 난, 내가 억울한 것만 생각하니까.

그런 감정들을 오래 갖고 있으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그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이런 어리석음이 나를 얼마나 병들게 하는지 알면서도 말이다.

 

한평생을 힘든이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주신 마더 테레사님의 사랑은 위대하다.

그 분처럼 살 순 없겠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다른 사람을 베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책을 통해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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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아고라 - 조선을 뜨겁게 달군 격론의 순간들!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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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선을 뜨겁게 달군 5가지 논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태조에서 태종까지 한성 천도 논쟁, 세종의 공법 실시 논쟁, 현종때의 1차 예송 논쟁,

2차 예송 논쟁, 마지막으로 정조때의 문체반정 논쟁으로 결말을 맺는다.

 

군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볼때 수직관계 였겠지만, 왕이 모든일을 자신의 독단으로 처리하는 것은 아니였다. 나중에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뜻대로 밀고 나가는 일도 많았지만, 신하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었다.

어쨋든 다수결이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거면서 신하들의 의견은 왜 물어보는거지?? 그런 생각도 들곤 하였다.  좋은 의견을 받아들이고 신하들의 뜻을 존중하기 위함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명분이 필요해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나혼자 결정한 일 아니다 라는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기 위함에도 이유가 어느정도는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재미있었던것은 서로의 의견대립도 있었지만, 이 글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재미있었다. 군신과의 대화가 그때 상황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게 해주었다. 거기에 자세한 설명들이 진지한 격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왕이 삐진다라는 표현이 참 재미있었는데, 역시 신하된 도리로써 왕을 화나게 하면 좋지 않은 일이므로, 달래준다거나 듣기좋은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행동들 역시 지금의 우리 사회조직의 모습을 보는것 같다.

 

세종의 공법 실시 논쟁을 통해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세의 문제는 과장 큰 문제이고 국민들이 잘 살기 위한 기반이다. 지금도 조세의 문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수가 없다. 누구를 위한 개혁인지 말이다. 국사책에서 조세문제가 가장 어려웠다. 뭐 이리저리 주체없이 끌려다니는 개혁안은 폐단의 폐단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세종의 공법 실시문제는 조선 최대의 마라톤 토론이 되었다. 답답한 부분들도 많았지만, 어쩔수 없는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도 법 하나 개혁할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들에게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 딴지걸고 통과를 시켜주지 않으니 말이다. 그 당시에도 딴지 거는 사람이 한 둘 이였겠는가?

 

예송논쟁의 본질은 단순히 상복의 문제가 아니라, 효종의 변칙 승계에 있으며, 그 아래에는 조선의 현재 왕이 정통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시간과 상황가 위세에 밀려 대충 마무리 지어진 1차 예송 논쟁의 문제점들이 곪아 다시 터진 것이 2차 예송의 본질이다.

결국 자기 마음대로 원칙을 바꾸려던 왕의 이기심과 하늘이 두쪽 나도 안 된다는 신하들의 융통성 없음이 충돌한 결과가 바로 2차 예송 논쟁이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예의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였지만, 본질을 벗어나 서로의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세력이나 권력이 무섭긴 한 것 같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으나 현실과 이상은 동일시 될 수 없다. 자신들의 이상을 찾기 위해선 그들이 옳다 생각되는 것을 따라야 하고 그럴려면 많은 부딪침이 있을 수 밖에 없을것이다. 서로의 옳은 뜻을 펼치기 위한 격돌이다.  그러다가 서로의 치졸한 부분들을 드러내고 본질은 잊고 만다.

 

문체반정이란 '잘못된 글을 올바른 것으로 되돌린다' 라는 말이다. 정조는 죽는날까지 삶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을 것 같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도 그렇지만, 그가 살아있기를 바란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쫓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많지 않은 나이에 갑작스레 죽었다. 참 의문스러운 점들이 많다.

정조는 자신에게도 다른사람에게도 엄격했다. 그리고 여러방면에 총명했던 정조가 그의 개혁을 성공하였다면 조선이 어떻게 변모했을까~

 문체 반정의 결말은 저자의 말대로 정조의 취향이 아닌것을 어찌하겠는가~~

 

안타까운점은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는 점이다. 지금도 과거의 조선과 지금의 우리나라는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진바가 없다는 것이다.

링컨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국민의 일부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속일 수는 있다. 또한 국민의 전부를 일시적으로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국민 전부를 끝까지 속이는 것은 불가능 하다' 라는 링컨의 말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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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연출디자인의 원류 프레데릭 J.키슬러
야마구치 가쓰히로 지음, 김명환 옮김 / 미술문화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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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미술의 아웃사이더 키슬러를 ’건축가’라는 말로 단정지을수 있을까?

그는 극장설계, 무대장치, 실내디자인, 디스플레이, 회화, 조각, 제품디자인, 가구디자인등 순수미술에 걸쳐 폭넓게 전개되었다. 전문화와 분업화를 외치며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로써는 한가지만 해내기에도 벅찬것이다. 그렇지만, 키슬러는 이 모든것을 소화해내었다.

예전의 예술가라 불리우던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 뛰어난 역량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많았다. ’건축가’의 의미가 사람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액자틀과 같다. 사람의 능력은 무한대 일수도 제한적일 수도 있다.

설계를 할때 공간의 의미는 단지 네모박스는 아니다.

무엇을 설계할지에 따라 그 공간은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키슬러가 근대기능주의를 부정한 이유는 기계생산 시스템 및 자본주의 구조를 지나치게 신봉한 나머지 인간이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략하는 것을 걱정하였다. 그는 기계기술문명의 모순을 직시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현실’의 구축을 목표로 했다.

즉 사회적 인본주의적 도덕관에 바탕을 둔 사상적 제안이었다.

 






<앤드리스 극장 모형과 단면도 평면도>
연극이 아닌 극장공간에 대한 변혁은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전의 극장은 군주제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상류층의 좌석을 무대 전방에 배치하고 그밖의 좌석을 차지한 관객들은 연극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장내의 어떠한 장소에서도 완벽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앤드리스 극장>을 통해서 연속되는 곡면의 공간 속에서 역학조건을 충족시키면서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성공하였다. 구형의 건축물 내부의 공간 및 그 안에서 자유롭게 전개되는 드라마가 바로 그가 구상한 이상적 형태의 연극이였던 것이다.  

 

나는 살아 숨쉬는 건축을 꿈꾸고 있다. ’공간도시’ . 그리고 기능적인 건축을!  건물은 ’생태기능’에 자유자재로 접목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키슬러의 공간전시의 새로운 생각, 그는 화랑을 디자인하면서 그림을 전시만 하는 공간이 아닌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의 입장에 주목하고 다양한 장치를 고안한다. 그림이 벽에 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지지물을 만들어 그림을 고정하거나 관람객을 위해 책장과 비슷한 그림장과 그림을 놓을 수 있도록 이동 가능하게 설계된 일종의 ’픽쳐 스탠드’를 고안한다. 얼마나 멋진 계획안인지.

 

 위의 사진처럼 앉아서 편안하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에 가면 좋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음에도 지루함을 느낀다. 액자의 틀에 갇혀서 벽에 고정되어 있는 그림이 일반인 눈에 멋지게만 보인다면 그 사람은 천재적인 감각을 타고났다 생각된다. 전시 공간이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는다.

 

 



<프리-포름>의 컨셉 드로잉과 <푸리-포름>18가지 기능에 관한 스케치

 

키슬러는 건축이든, 디자인이든, 조각이든 제작자의 사고방식을 수용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사용자, 수용자, 보는 사람들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프리포름>은 미술관이 안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인 관객의 피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이며, 동시에 인간의 신체적 조건에 적합한 형태를 띠고 있다.

<프리포름>의 디자인이야말로 미술관을 방문하는 관객의 입장을 반영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앤드리스 하우스 1층, 2층 평면도>

 





<앤드리스 하우스 실내 디자인 제 1안의 드로잉과 제 1안의 모형>

 

키슬러의 작품에 등장하는 각체구조는 달걀이나 조개껍질 등에서 볼 수 있는 곡면의 연속적인 구조와 같은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초기작품인 <엔드리스 극장>의 계획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연속적인 구조체의 원리에 입각한 나선형 구조의 원리를 <앤드리스 하우스>에 적용한다.

<앤드리스 하우스>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도 말했듯이 태어나기 전이였던 어머니의 뱃속이 우리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이라 말한다. 앤드리스 하우스는 연속되어 있으면서도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주택은 단절의 공간이 아닌 대화의 장으로써 각자 개인의 쉼터이기도 하다.

 

 앤드리스 하우스를 통해서 우리와 가까운 곳에 ’인공적 우주’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살기 쉽게 하기 위한 장치’ 따위는 필요하지않았다. 대신에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각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작용하고 있는 우주의 힘이 우리를 끊임없이 성장시켜 물질적으로, 감성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한하게 발전시켜 줄 것이다.

 

 키슬러는 1890년에 태어나 1965년 12월에 생을 마감한다.  그가 해온일들은 ’건축가를 위한 건축’이 아니라, ’거주하는 사람을 위한 건축’을 하였다. 기존의 건축가들은 거주자를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의 건축물들은 마천루를 보고 있는듯 하다. 거대하고 무서울정도로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편리함과 고도의 전문화된 솜씨로 금방 지어지는 건축물을 볼때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의 환경에 동화되지 못하는 초건축물이 안타깝기도 하고 우리는 무엇때문에 높이 쌓기 경쟁을 하는지 모르겠다. 편리함에 젖어 네?? 아닌지. 그걸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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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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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나무의 가지였던 나는 무심하게 박씨의 손에 꺽이고 말았다. 몸이 무거워진 암소가 기적소리에 놀라 뛰쳐나가 버리고 박씨는 화가나서 나를 꺽어 들고는 암소를 쫓아갔다.

 

우리는 무심코 꺽어버리곤 하던 나뭇가지에 무슨 생각이 있어 그런 행동을 했을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필요할때 요긴하게 쓰다가 휙 던져버리곤 했다.

아무 마음의 꺼리낌도 없이 하찮게 여기던것들이 어디 한두가지였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정채봉님의 동화가 생각이 난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동화.

왜 제목이 똥친 막대기 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처음엔 더럽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암소를 때릴 회초리로 사용될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암소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열심히 일을 해주었다.

 

나는 비극을 맞이할 준비만 갖추고 있는 꼴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운명의 길에 내맡긴 채 어떤 기적이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기적만이 나를 회생시킬 수 있다는 믿음도 가치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는 자신을 운명에 맡기었지만,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박씨를 따라서 재희의 집에 가고 싶었던 소망대로 그의 집에 도착하였다. 막대기에 감정을 불어넣은 섬세한 표정들이 똥친 막대기에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는 재희를 아프게 할 줄 알았다면 오고 싶지 않았을테지만. 새들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하는대로 이리저리 움직일 수 밖에.

똥이 무러지게 하기위해서 박씨를는나를 더러운 오물사이로 휘저었다. 박씨의 손에 이끌려서 나는 똥친 막대기가 되었다. 신세한탄을 하면서 그 순간에도 난 재희가 어떻게 해주지 않을까 하고 바랬다.

재희는 나를 데리고 논두렁으로 갔다. 거기에서 난 낚시바늘이 되었다 논두렁에 버려졌다.

모내기철이라서 촉촉한 흙이 나를 반겨주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한순간도 삶의 끈을 놓지않았던 우리의 똥친 막대기..

 

분수에 넘치는 욕심은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부대끼고 시달려 지레 죽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리가 싹둑 잘려나가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함께 했을땐 소중함을 알지 못했던 어미나무의 희생적인 보살핌을 떠올리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사람이 성장하듯이 막대기 역시 백양나무가지에서 여러차례 변화를 겪으면서 자신이 뿌리를 내려야 할곳을 찾았다.

 

나는 비로소 홍수에 떠내려 오면서도 살아야 한다는 내 꿈을 접은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침착하게 내 운명의 속살 안으로 가만히 손을 내민 행운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사방 어디를 살펴보아도 내가 뿌리를 내리고 다시 새잎을 피우려는 작업을 훼방놓을 천적은 없었습니다. 그 대신

나는 필경 외로울 테지요. 그러나 외로움을 사르며 자라나는 나무는 튼튼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사랑하는 어미나무가 그렇게 살아왔기 떄문입니다.

 

똥친 막대기의 성장과정을 통해서 기나긴 여정에서 올 고난을 충분히 버티어 나가리라 생각된다.

사람의 삶 또한 흘러가는대로 그렇지만, 자신의 최종 목적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외롭지만 견고하게 잘 자랄수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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