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노래 푸른도서관 30
배봉기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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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이 석상은 누워 있어야 했다


사라지지 않는 노래, 배봉기, 푸른책들, 2009.


  오래도록 이스터 섬 모아이 석상은 미스터리였다. 다양한 연구와 가설이 모아이 석상을 신비화 하는데 기여했다. 2019년 새해가 되어 또 하나 추가되었다. 미국 뉴욕주립대 빙엄턴대 연구팀은 플로스원(PLOS ONE) 최신호에 모아이 석상은 마실 수 있는 물의 위치를 표시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스터 섬에 수백개의 모아이 석상이 존재하는데 대체로 석상은 민물(fresh water)이 가까운 위치에서 발견되었고 물이 없는 지역에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연구팀도 전적으로 식수위치가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111601007&wlog_tag3=daum]


  모아이 석상은 거대한 높이와 무게로 왜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떻게 이동시켰는지에 관한 궁금증은 지속되었고 지금까지 조상숭배, 종교의식, 부족간 세력형성을 이유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이스터 섬의 황폐화, 몰락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모아이 석상 운반을 이유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어 내면서 바다로 나갈 카누를 만들 나무도 없을 만큼 섬의 자원이 급격히 고갈되었고 살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 섬은 식인 풍습이 있었고 석시 시대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다.

  이스터 섬은 태평양 남동부 칠레령으로 칠레로부터 3,500km나 떨어진 섬이다. 바다로 나가지 못한 채 침입하는 이민족에 대처해야 했던 이스터 섬 사람들. 아니 그들 자신의 명칭으로 라파 누이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인지는 모아이 석상보다도 궁금해진다. 전해지기를 처음 정착한 이들은 단이족(短耳族)이었다. 히바 섬에 살던 이들은 장이족(長耳族)과의 전쟁에서 패해 섬으로 왔지만 또다시 장이족의 침략을 받고 패함으로써 장이족의 석상 만드는데 동원되었다 한다. 장이족의 식인 풍습으로 아이들을 잡아먹었고 이것을 참지 못한 단이족이 전쟁을 일으켜 장이족을 몰아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모아이 석상이 장이족처럼 커다란 얼굴, 길다란 귀를 가지고 있음이 설명된다.

  이런 전설과 남아 있는 자료를 토대로 한 사실들에 상상력을 더하여 만든 이야기, 그것이 이 책 『사라지지 않는 노래』이다. 어찌 보면 이야기의 골계는 익숙하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순수한 원주민의 땅에 이방인이 침략하여 약탈하는 이야기. 이 세상 어느 터전이든 식민지를 건설하는 침입자들의 행태는 같고 그들에 대항하는 원주민들의 이야기도 같으니까.

  작가는 원주민을 ‘제비갈매기족’으로 이방인을 ‘회색늑대족’이라 명명했다. 실제 이스터 섬에는 조인상(Bird man) 조각이 많은데 라파 누이는 마케마케라 불리는 새의 머리를 하고 있는 창조의 신을 섬겼다 한다. 축제 때면 제비갈매기가 알을 낳기 위해 찾아오는 모투 누이 섬에서 제일 먼저 알을 찾아오는 이에게 조인이라 하여 1년을 왕과 같은 권위를 주었다고 하는 만큼 제비갈매기족이 이스터섬, 라파 누이를 상징하는 부족임을 알 수 있다.

  당연 전설처럼 이 두 부족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갔고 반목한다. 제비갈매기족이 나눔과 배려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회색늑대족은 투쟁과 탈취였다. 영원히 지배하고자 하는 회색늑대족은 자신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거대 석상을 만들고 제비갈매기족을 노예로 부린다. 두 부족 간의 갈등이 첨예하고 경계가 뚜렷하단 해도 사랑이란 스며든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렇게 삶은 이어진다. 그래도 혼란스러운 이들은 이들 혼혈족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존재했던 보다 평화롭던 시대에 대한 갈망은 강해지고 그들은 노래하기 시작한다. 섬의 아름다운 역사를. 노래가 가지는 강한 힘이 모두의 마음속을 적시어 가며 마침내 모든 부족이 갈등과 반목, 증오와 분노보다 더 아름다운 삶의 방법이 있음을 깨달으며 그 삶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노예도 전쟁도 없는 삶, 차별이 없는 삶으로, 그것을 없애기 위해 같은 귀고리를 달고 석상을 세우지 않고 석상을 편히 눕히며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평화와 행복.


그리하여 섬은 하나의 부족으로 바다처럼 평화로우니

해와 달 아래에서 영원하여라!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면 좋으련만. 이것이 청소년 소설이기에 어쩌면 희망을 보여주며 행복한 결말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스터 섬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인 것을, 사실과 다른 결말이래도 상관없고 무한한 상상력으로 나아간다 한들 어떠랴.

  섬에는 일곱 번의 침입이 있었다. 이스터 섬에 사는 두 부족과 그들의 혼혈족들이 사랑과 평화를 알아가는 때에 침입한 일곱 번째의 이방인. 그들은 어느 부족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노예였으니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노예선에 태웠다. 평화를 원했던 마지막 족장 ‘큰 목소리’도 피하지 못하고 오클랜드 농장으로 팔려간다. 이곳에서 ‘큰 목소리’가 끊임없이 부르는 노래, 이스터 섬의 역사가 가득한 이 노래는 농장주의 아들 헨리에게로 전해진다. 헨리가 자라서 언어학자가 되었으니 이는 곧 침략자의 언어로 인해 기록된다.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전해지는 노래, 이스터 섬의 역사.  

  처음 모아이 석상에 대해 들었을 때 막연하게 두려움을 느꼈다. 식인의 섬, 외계인이 만든 석상 등등의 이야기가 깊게 자리잡아 있었던 것인지 오래도록 무인도인 줄만 알았다. 그 이미지가 남아 있어서인지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한참 뒤였다. 새삼 이 섬에 관한 이야기를 되새기다 보니 두려움보다는 슬픔이 더 크게 자리한다. 거기에 소설이 얹은 결말은 씁쓸함과 분노를 더한다. 생각해보니 하와이 섬의 비극도 이스터섬 일곱번째 침략과도 닿아 있다. 인간 탐욕이 스스로의 자정 작용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은 탐욕의 크기가 다른 인간들에 의해 짓밟히고 마는 절망의 역사. 인간이라 부르기 역한 족속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탐욕의 인간이 기어이 승리하고 마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은 영원한 사실적인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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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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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의 근자감은 샤덴프로이데 정신?!


제0호,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18.


  잠에서 깨어나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지 않는 걸 알게 되면 당연 당황할 수밖에 없지만 꽤 기민하게 반응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때는 무언가를 꿈꾸기도 했을 테지만 이제는 변변찮은 글을 쓰며 살아가는 콜론나. 간밤 폴터가이스터 현상이 일어났을 가능성까지 가늠하는 이 남자가 4개월 전, 모든 일의 시작점을 회상하고서야 모든 행동이 이해된다. 차라리 유령출몰, 폴터가이스터 현상이 낫다. 두려움 가운데 재미라고 있으니까.

  1992년의 이탈리아에 대해 알고 있다면 소설을 이해하는데 더 좋겠다. 모른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다. 소설은 현재에도 익숙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에 언제든 소환해 낼 사건, 이야기가 넘친다. 최근 더 극심한, 그 본질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언론의 이야기라고 하면 될까. 발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발행되지 않을 기사를 대비하여 예비로 만들고 있는 기사. 그러므로 제0호. 제목이 가진 뜻이 이렇게 풀린다. 창간호 이전의 제호.


「그래요, 책을 한 권 낼 겁니다. 한 저널리스트의 회상록입니다. 우리 신문은 창간하기로 해놓고 끝내 창간되지 않을 신문이지만, 그 신문을 내기 위해 1년 동안 준비하면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 책이죠.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그 신문의 제호는 <도마니>, 즉 내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부의 슬로건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내일 얘기하기로 해요. 아무튼 내가 내려는 책의 제목은 <내일을 알려면 어제를 보라>가 될 것입니다. 멋있지 않아요?」


  끝내 창간하지 않을 신문을 기획하는 의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닌 건가. 그러다보면 언론이 되고픈 이유는 또 뭔가라는 물음이 함께 한다.

  어디서부터가 시작되어야 하나. 발단은 마니 풀리테가 되나? 마니 플리테(Mani Pulite)는 깨끗한 손이라는 뜻으로 1992년 2월 17일 당 간부 집에서 거금을 압수수색한 계기로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 부정부패 척결 작업을 말한다. 대대적인 부정부패의 척결이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본이 정권을 쥐는 데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는 불필요하다는 점이다. 이 당시에 막대한 재력가가 승리했고 언론을 장악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소설은 신문을 창간하려는 막대한 재력가 콤멘다토르 비메르카테의 뜻에 따라 실무를 담당하는 편집부의 신문사 제작과정을 다룬다.


제0-1호, 제0-2호하는 식으로 12호에 걸쳐 창간 예비 판을 낼 예정입니다. 그 발행 부수는 소수로 제한하되, 기사 내용은 콤멘다토레가 직접 검토합니다. 그런 다음 콤멘다토레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몇몇 인사들에게 그 기사들을 읽어 보라고 권할 겁니다. 그럼으로써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금융계와 정계의 이른바 성역에 있는 거물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죠. 그러면 그 거물들은 신문 창간 계획을 중단하라고 콤멘다토레에게 요청하겠지요. 그 요청에 응하여 콤멘다토레는 『도마니』라는 신문을 포기하고, 그 대가로 거물들의 성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될 겁니다.


  이를 테면 신문 『도마니』는 볼모다. 재력가 콤멘다토레의 세력 강화를 위한 협박용이다. 그렇다면 제0호는 발행되지 않을 『도마니』를 예견한 협박용이다. 이런 제안을 받아들인 시메이 주필로부터 콜론나는 고문으로서 <제0호>를 위해 일한다. 기사가 협박용이 되려면 그 색깔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황색으로 도배될 수밖에 없는. 그러므로 회의에서 논의되는 것은 어떻게 특종을 ‘만들어 내는가’에 중점을 둔 자극적이고 허접한 기사 작성법에 할애된다.


<샤덴프로이데>, 즉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죠. 모름지기 신문은 그런 감정을 존중하고 북돋워야 해요. 그러나 현재 우리는 그런 비참한 사건에 관심을 가질 의무가 없어요. 불의에 분개하는 것은 좌파 신문에 맡깁시다. 그게 그들의 전문이니까요.


  요즘은 그런 것만도 아니네요, 라고 말해 주고 싶다. ‘불의에 분개하는 것’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지나치게 우쪽에 붙어 있는 자들에게는 모두가 좌쪽에 있어 보이는 것일 뿐이며,  ‘좌파’가 불의에 분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불의와 사명감(?)에 따라 좌파 언론이 취하는 기막힌 역할 또한 황색 저널리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정의는 기계적 중립이 아닐뿐더러 불의에 참고 무력했던 자들의 뒤늦은 코스프레는 어제와 오늘의 논조가 다르기에 지속적으로 진정성을 의심하게끔 한다.

  어쨌든 소설 속 브라가도초 기자가 실종됐고 마침내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그가 취재하고 있던 기사는 기자 자신의 ‘가설’이다. 무솔리니가 로마 교황청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것이며 이에 따라 무솔리니의 흔적을 추적한다. 브라가도초가 만나야 할 이들은 교황, 많은 정치가, 마피아, 테러리스트, 프리메이슨, CIA 등등, 무수하다. 그러나 브리가도초는 매춘업계를 취재하다 포주에게 공격받아 살해되었다는 기사가 등장했으니 콜론나로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에도 놀라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그 자신이 언론계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느니만큼 말이다. 콜론나는 도피했고 결심한다.

  “1인칭으로 말하는 것을 포기했고, 이제 남들이 말하도록 그냥 버려두고자 한다.”

  어차피 황색 저널리즘을 준비했던 기자로서 그런 종류의 것들을 그만두는 것은 아쉬울 데가 없다. 그러나 조금은 반성하는 자라면, 진실한 보도를 갈구하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이 말이 주는 허탈함은 알려나.

  새해가 되었고 올해도 가짜뉴스는 넘쳐날 것이다. 개인방송이 넘쳐나고 있지만 자신이 퍼뜨리는 말의 무게에 대한 자각이 없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럴 의도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음에도 이것을 언론이 그대로 받아쓰기 하고 있으니 ‘언론인’이라는 명명이 어디에다 정착되어야 할 지 모를 일이다.

  <도마니 신문>이자 <제0호>와 같은 기사·뉴스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때때로 가장 보기 싫은 기사·뉴스는 <단독>이 붙은 것일 때도 있다. 어쨌든 오늘은 신년기자회견이 있었고 수많은 기자들을 보는데 웃음이 났다. 올 한해 그들이 작성한 기사의 면면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까. 눈감고 귀막고 쓰는 기사에 대한 자괴감을 느낀 적은 없을까. 언론사를 손에 쥐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콤멘다토레 같은 인물의 현실 등장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제법의 재벌이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는 나라이긴 하지만 표면적으로라도 정의와 올바름을 추구하지 않은 채 노골적인 황색 저널리즘을 당당히 주장하는 언론사의 존재 이유를 소설을 통해 보면서 왜 이탈리아가 아직도 마니 풀리테가 진행 중인지 알겠다. 우리에게 마니 풀리테와 같은 이름은 적폐청산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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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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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리처드 파커가 있다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얀 마텔,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작가정신, 2017.


  많은 소설들이 미스터리, 반전을 활용한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모험 소설을 띠며 낯선 곳에서 느껴지는 매혹과 환상이 가득하다. 추리 장르가 아님에도 내게 놀라움을 안겨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충격을 준, 반전으로 손꼽히는 소설이다. 아마도 영화가 나왔을 때부터 벵골 호랑이와 아이와 함께 하는 환상적인 모험을 그린 이야기로 각인되어 있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일러스트가 더해진 파이이야기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준다. 야수파의 그림을 보는 듯한 원시적 색채는 두려움과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모든 생물은 광기가 있어서, 때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런 미치광이 기질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적응의 원천이기도 하니까. 그런 기질이 없으면 어떤 종도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모험이라 했지만 사실 치열한 생존기다. 열여섯 소년 파이, 피신 몰리토 파텔 가족이 일년 동안의 동물원 정리를 끝내고 인도를 떠나 캐나다로 가던 중 태평양 한가운데서 배가 가라앉는다. 살아남은 다섯이 구명보트에는 올랐지만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하이에나를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잡아먹으며 파이와 리처드 파커만이 남는다. 파이의 가족은 모두 살아남지 못한다. 인간과 벵골 호랑이만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리처드 파커와 파이가 교감하는 동화같은 사이는 아니었으니 리처드 파커는 말 그대로 맹수, 벵골 호랑이일 뿐이다.

  

리처드 파커를 길들여야 했다. 그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그의 문제나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나의 문제였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또 비유적으로도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터였다. 그가 사고로 죽을지도 모르고 자연사 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동물의 끈질김은 사람의 연약함보다 오래 버티게 마련이니까. 내가 호랑이를 길들인다면, 필요할 경우 그를 속여서 먼저 죽게 할 수 있을 터였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파이의 노력은 227일간 지속되었다. 공포와 허기와 갈증이 가득했고 지나는 배를 보며 희망을 가지는 만큼 절망 또한 몇배가 되는 나날이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권태 또한 가득하다. 파이이야기의 모험이 여느 이야기와 다른 것은 리처드 파커와 파이가 이루는 이 평행한 거리다. 혹은 적대적인 듯 적당히 가까운 거리. 어쩌면 파이에게 리처드 파커는 미꾸라지 어항 속에 넣은 메기와 같은 존재였다.   


절망은 빛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어둠이었다. 그것은 이루 표현 못 할 지옥이었다. 그것이 늘 지나가게 해주시니 신께 감사하다. 다시 매달라고 아우성치는 매듭이나 그물 주변에 물고기 떼가 나타났다. 내 가족 생각을 했다. 그들이 이런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도. 어둠이 휘휘 젓다가 결국 물러갔고, 그때마다 신은 내 마음에 환한 빛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계속 사랑하면 됐고.


  “나는 계속 사랑하면 됐고.”

  이 말이 슬프고도 처연하게 여겨지는 글은 없을 것이다. 마침내 육지에 이르렀을 때 리처드 파커는 떠났다. 아무런 인사도 없이. 파이의 울음에 공명이 큰 건 파이가 한 227일의 날들이 가진 의미를 알기에…. 생존의 의지를 붙잡고 있던 날들에 품었던 그 모든 것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리처드 파커의 이별 장면은 떠올리자마자 아릿해진다.

  리처드 파커와 파이가 바다 위에서 함께 대치하던 나날의 이야기만큼이나 소설은 파이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에 할애한다. 아니, 그것은 신과 종교에 관한 질문이었다. 힌두교도와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모두 믿는. 그러나 어른들은, 종교인들은 파이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어느 한 신만을 섬길 것을. 이 또한 종교가 가지는 궁극적 의미에 대해, 신의 존재에 대해 묻게 한다. 조난에서 구조된 파이가 들려주는 생존기에 반신반의하는 진상조사단처럼.

  내 마음에 리처드 파커가 있었다, 라고 정년을 일년 앞두고 퇴직을 권고받은 어느 분이 말했다. 술을 먹을 수밖에 없는 마음에 그날은 술을 많이 들이킨 탓도 있겠지만 그 분은 정말로 꺼이꺼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또한 상사가 리처드 파커이기도 했다고 했었나. 그때는 파이이야기를 읽지 않았던 이유로 호랑이가 나오는 아이들용 모험 이야기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때때로 그날 장면이 떠오르며 내 마음에도 리처드 파커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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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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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단계


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작가정신, 2017.


  각각의 이야기이자 잘 맞물린 세 편의 이야기로 직조된 이 소설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혼을 빼놓는다. 시간을 달리한 이야기마다마다에 담금질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슬픔이, 그것을 극복하려는 이들의 여정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나아간다.

  살아남은 자의 애도의 방식은 다르지만 그들의 최후의 목적은 같다. 분노하는 토마스, 아내의 삶을 기억하려 이야기를 짓는 에우제비우, 침팬지와 교감을 나누는 피터가 살아간 시대, 1904년에도 1938년에도 1981년에도 같은 풍경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그곳, 포르투갈에서 그들은 어떤 운명을 맞닥뜨리게 될지 인생에 가득한 물음들을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숙부가 모르는 것은 그가 뒤로 걷는 것이,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지고 뒤로 걷는 것이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반발하면서 걷는다. 인생에서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긴 마당에, 반발 말고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퀴블러 로스는 죽음 또는 애도의 과정을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로 이야기했다. 「1부 집을 잃다」를 담당하는 토마스는 일주일 사이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겪는다. 절망과 분노의 감정이 옹골차게 자리한 토마스의 신에 대한 분노가 이해된다. 고미술 학예사로서 17세기 고문서에서 발견한 십자고상의 소재지를 찾아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가는 토마스의 여정은 분노가 한점도 소멸되지 않는 여정이다. 신을 향한 복수로 발을 디딘 토마스가 작동법도 익히지 않은 신문물 자동차를 끌고서 1904년의 포르투갈을 누비는 모습은 혼란가득한 코믹을 연출하지만 한편으로는 재앙이다. 마치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맞는지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짓지 못할 만큼 놀랍게도 토마스는 자동차로 금발머리 한 아이를 치고 마는 것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 여기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치부하며 토마스는 그곳을 떠나버린다. 신이 사랑하는 아이를 거둬감에 절망하고 복수를 맹세한 토마스의 행동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게 된다. 그러니 환상이었던가 생각할 밖에.


애통은 질병이에요. 벌집을 쑤신 것마냥 슬픔의 마맛자국이 생겼고, 우린 열에 시달리고 타격에 무너졌어요. 그 병은 구더기처럼 우리를 초조하게 하고, 이처럼 달려들었죠―우린 미칠 정도로 몸을 긁어댔어요. 그 과정에서 귀뚜라미처럼 활력을 잃고 늙은 개처럼 기운이 빠졌어요.


  「2부 집으로」의 병리사 에우제비우 역시 아내의 죽음을 겪는다. 그에게 한해가 저물고 새해가 되는 시간 남편의 시신을 끌고 찾아온 여인은 “그이를 열어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주세요”라며 부검을 의뢰한다. 무엇이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가 아니라 살아온 그의 삶을 알려 달라는 이 말이 주는 울림이 숙연하다. 그의 아내와 같은 이름인 그녀, 마리아를 통해 에우제비우 역시 아내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질병처럼 부여잡고 있는 애통에 대한 의미 전환을 이룬다.


죽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해 미스터리는 늘 마지막에 해결되며 의혹이 말끔히 해소돼요. 우리 삶에서 죽음도 그래야만 해요. 아무리 어려워도 죽음을 해결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맥락을 살펴야 해요.


  2부에서는 철학적인 논쟁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마리아의 남편 라파엘의 시신 속에 품고 있는 침팬지와 새끼 곰의 모습, 그 안으로 들어가 두 침팬지를 끌어안으며 “여기가 집”이라 외치는 마리아의 모습이 각인된다. 아들이 죽던 날, 뛰다시피 뒤로 걷던 애절과 비통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있던 이방인처럼 뒤로 걸으며 살아온 라파엘의 뒤로 걷기는 분노였을까, 애도였을까. 마리아와 에우제비우가 이루는 애도의 방식은 타협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까,  죽음과 삶이 동일한 선상으로 이어지는.


삶을 돌아보는 것은 달콤 쌉싸름한 일이다. 그는 향수에 젖는다. 어떤 사진은 벅찬 기억들을 불러온다. 어느 날 저녁, 아기 벤을 안은 젊은 클래라의 사진을 보다가 피터는 울음이 터진다. 벤은 자그맣고 빨간, 주름투성이의 갓난아이다. 앙증맞은 손이 엄마의 새끼 손가락을 꽉 잡고 있다. 오도는 동요하지 않고 근심스럽게 피터를 바라본다. 침팬지가 사진첩을 내려놓고 그를 껴안는다.


  「3부 집」은 캐나다에서 시작한다. 40년을 함께 한 아내의 죽음 이후 슬픔에 빠진 피터는 모든 일들을 접고 가족도 친구도 두고 고향 포르투갈로 향한다. 그 여정의 동반자는 침팬지 오도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가는 동안 오도는 피터를 피터는 오도를 닮아가며 그들은 인간과 동물을 떠난 교감과 사랑을 이룬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찾는다. 오도와 함께 하며 ‘현재의 순간을 사는 게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피터의 삶이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소설을 읽는 내내 알고 싶었다. 그곳에 닿으면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곳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상실의 슬픔을 안고 있는 이들의 치유의 여정이 그곳에 닿았을 때 그들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러나 일찍이 예상도 됨직하다. 많은 이야기들이 어떤 특정한 장소, 인물, 물건 등의 신비한 것을 찾기 위한 길을 떠날 때마다 그들이 깨닫는 것은 그것은 마음속에 있었다, 나의 집에 있었다로 결론지어진다는 것을. 무엇을 찾으러 가는 여정이, 그 길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 그것 자체가 바로 찾고자 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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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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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합니다. 취향해 주시죠.

쾌락독서-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문학동네, 2018.


이 책에 등장하는 책들은 ‘추천도서’나 ‘필독도서’가 아니다. 누구 마음대로 ‘필독’이니? 난 ‘필’자만 들어도 상상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완장 찬 사감 선생이 고리타분한 책을 코앞에 억지로 들이미는 느낌이 든다(물론 그 필독도서가 내가 쓴 책인 경우에는 팅커벨이 반투명 날개를 흔들어대며 보물 상자에서 책을 꺼내주는 느낌이지만). 여기 등장하는 책들은 ‘그저 어떻게든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이다. 선정 기준은 ‘지금도 뭔가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지 여부’.


  작가는 이렇게 말하지만 어쩌면 작가가 읽은 책들만 리스트업 되고 있을 것이다. 애초 이 책 자체가 출판사의 요청에 의해 ‘기획된’ 것임을 밝히고 있듯이 말이다. 누구에게나 영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강력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책은 있다. 그들의 기억 속 책들에 관해 이야기를 풀기를 아무도 요청하지 않기에 글을 쓰는 일도 출판하는 일도 없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기억을 간절히 소환해 줄 것을 바란다. 그 자체가 결국 ‘추천’이란 이름을 달게 될 것이고 ‘필독’ 목록에도 올라가게 될 것이다.


나는 솔직히 취향으로 차별화하는 우아한 ‘인생 책’ 리스트를 볼 때마다 궁금해진다. 저 책들도 물론 좋았으니 언급했겠지만, 정말 저 책들이 평생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들이었을까?


  그러니 취향의 문제라면서 ‘우아한’ 책에 대해 굳이 하는 의문 속에서 책에 대한 차별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밖에 없다. 저자에게는 ‘우아한’ 책들에서 잊지 못할 인생의 기억을 안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말이다. 어떤 기억이든. 그냥 저자의 기억을 소환하는 책들을 ‘우아한’ 책들과 비교하는 것, 이것 역시도 ‘우아한’ 책과 그 책을 읽은 이들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는 듯하다. 대표적인 것이 거짓과 허세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론 독서 취향을 가져볼 수 없도록 책과 멀어지게끔 자라도록 한 것이 누구냐, 그런 한탄을 하고 싶다. 그런 이유로 우아한 책을 읽었다 한다면 의문을 갖고 검증하려 하거나 마치 나쁜 일을 한 것쯤으로 여기는 태도가 형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작가는 ‘지식인들의 글에는 독자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삼엄한 차단 장치’가 있고 ‘생동감이 없고’ ‘비슷한 관 속에 누워 있는 귀족의 시신들처럼 우아하게 죽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문유석 작가가 읽은 책을 이야기하는 이 글들은 ‘삼엄한 차단 장치’를 치우고 생동감 있게 쓰려 한 듯하다. 수다를 떨듯 가볍고 경쾌하게 딱딱한 책보다는 ‘야한 것’을 기준으로 책을 선택하고 재밌고 즐거운 책들만을 골라 읽었던 지난날의 독서취향을 얘기한다.

  지난날 작가는 놀이보다 책장에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읽는데 몰두했었다고 말한다. 무협만화, 순정만화, 심지어 요리대백과 까지도.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도 만화책이나 무협지를 친구들과 돌려보며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고 말이다. 이쯤되면 작가에게 동류의식을 느끼며 제법의 사람들이 하이파이브를 날리려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는 ‘이문열을 거쳐야 하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이야기하며 1등을 달고 사는 학생임을 말한다. 반 전체에 국어를 가르치기까지 하는. 이쯤되면 완벽한 뒤통수요 배신자라 아니 할 수 없다.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고 그저 ‘우아하게’ 남아 있는 많은 ‘우아한’ 책들이 있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만 어떤 기억을 소환하든 독서가 주는 즐거움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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