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주 - 우연이라 하기엔 운명에 가까운 이야기, 2018년 뉴베리 대상 수상작
에린 엔트라다 켈리 지음, 이원경 옮김 / 밝은미래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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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한 살의 우주

안녕, 우주-우연이라 하기엔 운명에 가까운 이야기, 에린 엔트라다 켈리, 2018.


  책을 읽으면서 우주로 날아가 버렸다. 나의 열한살은 어떠했더라, 과거에 잠기어 있다보니 아이들의 이야기를 자꾸 놓쳤다. 다시 책장으로 눈을 돌려 커다란 활자의 책장을 술렁 넘겼지만 내 머릿속은 책속 아이들의 세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그 시절과 지금 이 시절의 어디를 헤매며 무한 글자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라도 사람들의 삶은 다르지 않고 반복되어 간다. 아이들의 세상에서도 어른들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왕따가 있고 고독이 있다.  


할 일이 무궁무궁해.

친구가 많을 필요는 없어.

친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

나만 있으면 돼. 그렇지?

혼자 노는 게 제일 좋아.

그래야 성가신 일도 적지.


  열한살을 보내고 중학교로 진학하게 될 두 아이는 깊은 고뇌를 짊어지고 있다. 소심한 아이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고 있는 아이. 마냥 수줍고 부끄러움 많고 소심한 아이 버질은 발렌시아에게 호감을 느끼며 친구가 되고파 한다. 하지만 여지껏 한번도 말을 걸어보지 못했다. 그의 이야기 상대는 할머니와 기니피그 걸리버이다. 발렌시아는 친구들이 느리다는 이유로, 발렌시아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일들이 싫다는 이유로 같이 놀지 않기로 한 이후 친구를 잃어버렸다. 홀로 자연과 대화하며 외로움을 달랜다. 그 말이 참 씁쓸하게 울린다. 모두를 괴롭히는데 탁월한 역할을 하는 쳇 블런스에게 이 두 아이도 예외가 아니다. 놀림과 괴롭힘을 받는다. 그 자신 허풍쟁이에다 겁쟁이면서.

  동화속에서 가장 아이답기도 하고 전혀 아이답지 않은 존재가 카오리와 동생 겐이다. 카오리는 어린이들을 상대로 점성술을 알려주는 어른은 절대 사절을 고수하는 열한살 점성술사다. 버질이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하는 순간, 카오리는 절대 우연이 아니라 운명처럼 이어진 버질과 발렌시아의 점괘를 예언한다. 그렇게 우연인듯 운명처럼 버질은 쳇 때문에 우물 속으로 갇혀버리고 우물 속에서 버질이 나오기까지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 책을 연애소설화 시키면 주인공을 못살게 구는 쳇이란 악역으로 인해 운명처럼 만나게 된 버질과 발렌시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동화를 그런 익숙한 드라마로 봐버리면 신비감이 덜해지고 만다. 어떻든 이 동화가 가지는 매력이란 운명이라는 환상성, 그것이니까. 소심한 버질이 우물 속에 갇혀 아무에게도 도움을 얻지 못할 상황에서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상상하며 그 존재와 대화하며 자신을 다독이는 일, 발렌시아의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성자 르네에게 이야기하며 홀로 외로움과 상처를 다독이는 일을 보면, 섬세하고 여린 아이들이 누군가의 한마디 말로 인해 얼마나 헤매고 있을까 안타까워진다.


“우리 동업해야겠어.” “뭐라고?” 

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카오리가 다시 말한다. 

“우린 동업을 해야 해. 나는 영적인 세계를 알고 넌 자연의 세계를 알아. 더없이 좋은 관계잖아. 그래서 운명이 우리를 친구로 묶어준 거야.” 친구.


  하지만 그날의 사건들은 이렇게 아이들의 일상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한걸음 내딛어간다. 점성술사 카오리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의 힘으로, 전 우주가 만들어내는 신비한 마력으로. 물론 어떤 큰 사건을 겪었다고 사람이 쉬이 변하지는 않는다. 우물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어준 말을 나눠보고픈 아이 발렌시아와 만났음에도 말한마디 하지 못하는 버질의 소심함은 여전했으니까. 고마워라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헤어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끝끝내 쳇 블런스는 그 악당의 면모를 유지하니까.

 조용하게 웃음짓게 되는 이야기에 필리핀의 할머니가 들려주는 전통 설화가 얽이면서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장마다 각각의 아이들로 화자가 달라지는 이야기 방식은 동화속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무엇보다 허술한듯 모든 우주의 신비를 믿는 카오리라는 점성술사의 존재가 신비로운 세상을 믿고파하는 아이의 마음 같아서 응원해주고프다.

 

새로이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지. 시간의 마술이란다. 오늘 믿은 것을 내일은 믿지 못할 수도 있어. 보고 있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거든.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다른 세상이 보이는 거야.


  새벽 세 시 삼십분. 이 시간 아이들이 잠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주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별자리도 흘러가는 조용한 그 새벽. “안녕”이라는 인사말. 누군가의 내딛음이 시작된다. 동화속에서처럼 아이들이 거칠고 힘든 세상에서도 신비함을 믿어가며 긍정의 힘을 믿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성술사를 만나러 가고픈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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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나에서 함께하는 우리로 - 다양한 분야 학자들의 인문학적 소통과 상상
유범상 외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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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생각할까

고독한 나에서 함께하는 우리로-다양한 분야 학자들의 인문학적 소통과 상상 


  ‘함께하는 우리’ ‘공동체’ ‘연대’는 복잡한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때, 상식이 통하지 않고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 대한 대응으로, 구원으로서 이야기되곤 한다. 함께하는 것, 연대는 부조리를 타개하며 실존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한 힘이 된다. 우울한 한국사회에서 ‘함께하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가 위한 조건들과 방법들을 이 책에선 모색하고 있다. 개인차원에서 고민하고 질문해 봐야 할 주제, 공동체에 관한 성찰, 미래사회를 위한 주제로 나누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견해를 피력한다.

  공동체삶을 중요하고 필요한 가치로 이야기하지만 때로는 어떤 연대의 형태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게 되기도 한다. 지난 촛불집회와 같은 연대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연대방식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립유치원의 비리근절 토론회에서 보여준 사립유치원연합회의 연대와 같이 특정집단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연대를 위해 올바름에서 비켜선 행동을 보일 때면 함께한다는 가치가 폄하되고 위험해 보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책은 공동체의 삶, 미래사회를 위한 사회의 연대를 생각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는 성찰부터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당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 생각이 무엇인가도 중요한 부분이다. 자칫하다간 악의 평범성의 대명사 아이히만처럼 되어갈 지 모른다는 무서운 경고, 때론 이익 앞에 무너지고 마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의료민영화 정책은 국민의 건강증진보다는 시장과 영리를 지향하는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추구에 우선적인 목적을 두고 설계되었으며, 그 정책내용에는 소자본 의료공급자(개원의사), 사회·경제적 소외 지역이나 집단에 대한 이해를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이익’에 관한 집착이 공동체 생활을 저해하는 요인이라면 국민의 건강을 두고 벌이는 의료 관련 정책에 대한 의사집단의 이익추구를 위한 연대만큼 빼놓을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수술실 CCTV 설치에 대해서는 절대 찬성하지 않으며 파업결의를 하며 의사 폭행 문제에만 목소리를 높이는 의사협회의 집단행동. 물론 의사를 폭행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고 강력히 처벌해야 할 일이지만 의료사고, 수술 과정에서의 비상식적 행동, 대리 수술 등의 일들이 부지기수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선 그 어떤 반성도 하지 않는.


민주라는 보편적 가치가 생활화하고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사회참여에 나서는 것뿐이다.


  ‘민주라는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 중요하다 ‘함께 하는’ 것의 중요성에 ‘무엇을’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따지고 보면 조폭들은 항상 그들끼리 조직화된 연대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고독한 시시포스들이 무한질주하는 전쟁터”라고 책에서는 말한다. 소위 헬조선이라 불리는 그 모든 상황들은 가혹한 형벌에 처한 시시포스와 다를 리 없는 삶이라고 말이다. 카뮈가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형벌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자살과 종교를 제시했지만 자살은 자신을 살해하는 것이고 종교는 현실도피라는 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저항’이다. 이 저항은 부조리에 대한 자각에서 이루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자각해야 할 부조리는 많다.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 과거사, 끊이지 않고 발생하지만 처벌 수준은 턱없이 낮은 성폭력 문제, 복지사회에 대한 불편한 반응, 갑질 문화, 혐오의 확산과 차별 등 백세 사회가 되는 미래사회에서 수명은 길지만 정서적으로는 편안치 못한 환경에 놓이게 되는 일이 확대된다.


하지만 고독한 개인의 자각과 저항은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지 모른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각한 개인은 무기력함으로 인하여 더 깊은 좌절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따라서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신을 더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부조리를 자각하는 것, 중요하지만 혼자라면 오히려 더 고독하고 비참해질 수 있다는 말이 수긍이 된다. 지난 몇 년간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하여 함께 하는 행동을 위해 연대했을 때 사회의 변화 하나는 이루어내었다. 여전히 이뤄가야 할 변화가 많다는 점에서, 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고독한 시시포스가 되지 않기 위하여 나를 성찰하고 ‘민주라는 보편적 가치’의 정의를 정립하면서 연대해야 한다. 이 책은 함께의 가치와 더불어 ‘무엇을’에 대한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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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의 전망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노라 칼린.콜린 윌슨 지음, 이승민.이진화 옮김 / 책갈피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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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가 떴다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의 전망, 책갈피, 2016.


[다섯 무지개/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8100514351457949]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뒷면 무지개가 뜨곤 했다. 콩레이는 무지개를 보여주진 않았지만 허리케인 플로렌스가 지나가고 난 뒤 미국 뉴저지주에 뜬 다섯 개의 무지개 사진을 보았다. NASA는 ‘과잉 무지개(supernumerary rainbows)’라며 드문 현상이라 했다. 직접 보았다면 얼마나 경이롭게 느껴졌을까.

 최근엔 무지개를 본 기억이 없고 대신 무지개 하면 동성애가 생각난다. 이래서 상징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 모양이다. 내게도 레인보우 깃발이 동성애문화상징으로 보다 강하게 각인된 것은 지난 대선전 문재인 후보 국회연설 당시 성소수자 단체의 기습시위 때문이니까 말이다. 레인보우 깃발 제작 당시엔 분홍색이 포함된 여덟색에 ‘섹슈얼리티, 삶, 치유, 태양, 자연, 예술, 조화, 영혼’을 의미하였고 1979년 게이 퍼레이드에 활용할 때부터 남색을 뺀 여섯색이 되었다 한다. 

      최근 지역 곳곳에서 퀴어축제 개최로 보수·기독교 단체와의 충돌이 연잇는다. 기독교인 친구의 동성애 견해에 놀라 이 책을 집어들었지만, 기대했던 바를 충족시켜주진 못했다. 이 책은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풀어내고 있다. 동성애라는 개념은 19세기 후반에 생겨났고 산업자본주의와 관계가 있고 이전에도 동성애자들은 존재했지만 자본주의에 이르러서야 동성애자 처별과 차별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나 로마에서나 지배계급 부의 주된 원천이 노예제가 성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특히 로마에서는 노예를 부리는 것이 사치스런 소비의 한 형태였다는 게 중요했다. 로마제국 말기에 노예제가 농노제 생산양식으로 완전히 대체된 후에야 비로소 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등장했다.


동성 관계 문제는 가족의 역사와 관련지어 바라봐야 한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동성애자 억압 문제도 풀 수 없다. 모든 계급사회에서 가족은 성적 순종을 강요하는 핵심 제도였다. 그러나 가족의 형태나 가족이 생산과 맺는 관계는 생산양식이 변할 때마나 매우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19세기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등장은 기존 관념을 완전히 바꿨다. 가정과 일터가 분리됐고, 이 ‘분리된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의 임무가 철저하게 나뉘었고, 개인과 사생활이 새롭게 강조됐다. 그 결과 성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사회의 성에 대한 태도는 생산양식과 관계있다는 관점은 기독교의 에이즈의 원인이 동성애라는 주장과 대립된다. 친구는 교회에 강연 온 의사의 “동성애의 결과는 에이즈다”라는 말을 진리라 믿고 있다. 그리하여 그 결과를 생각할 때 동성애에 찬성할 수 없는 일이라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걸 몰랐단 말이야?”

  이 책의 저자들은 ‘동성애자가 에이즈를 퍼뜨린다’는 것은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대다수 에이즈 환자가 에이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성애자의 수도 증가하고 있으며 안전하지 않은 성생활의 문제이다. 그러나 에이즈는 동성애들에 의한 것이라는 거짓말을 언론이 확산하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HIV에 감염된 압도 다수는 가난 때문에 처참한 조건에 놓인 이성애자들이다. 캐냐에서는 인구 18명 중 한 명꼴인 4만 명이 에이즈에 감염됐다. 짐바브웨에서는 성생활이 가능한 5명 가운데 1명이 에이즈에 걸렸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는 젊은 여성의 4분의 1이 HIV 보균자다. 이들 중 절대다수가 남녀 사이의 성행위로 감염됐다. 나머지 사람들은 종합병원이나 전문 병원에서 다른 환자에게 사용된 주사 바늘을 통해 HIV에 걸렸다.


  거의 모든 차별의 근원으로 지적되는 기독교에 의하면 동성애든 여성이든 영원히 차별받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생산양식이 차별의 요인이기에 그것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가 보다 싼 값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가족관계와 역할의 억압을 주요 수단으로 삼고 차별을 강행하며 여성과 성에 대한 차별을 부각시켜 왔기에 이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동성애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므로 동성애 억압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사회변혁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에서 벗어나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여기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다.

  고대 사회로부터 동성애가 있었지만 특별한 차별과 처벌이 없던 시대에서 현재에 이르러 혐오와 차별, 처벌이 자행되고 있는 시대에 동성애자들의 차별과 억압에 맞선 투쟁도 지속되었다. 이 책은 동성애 차별 철폐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각각의 투쟁에서의 쟁점과 한계와 대안을 제시한다.

  기독교인 친구들의 동성애에 견해는 뚜렷한 혐오에서 시작하며 그들의 확고한 종교적 신념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의한 의견의 대립은 쉬이 끝나지 않는다. 나와 친구도 이럴진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의 대치가 오랫동안 이어진 것이 이해가 됨직도 하다. 어떤 무엇에 대한 강력한 반박과 주장은 확고한 이론 정립, 명백한 사실에 기반한 증거, 그리고 어떤 형태가 됐든 강력한 믿음이기에 이 책을 보았지만 속시원하진 않았다. 아마도 이 주장은, 분석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이 유명한 원인 분석을 놓고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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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리안 데이즈 - 바다가 사랑한 서퍼 이야기
윌리엄 피네건 지음, 박현주 옮김, 김대원 용어감수 / 알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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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또는 허풍

바바리안 데이즈-바다가 사랑한 서퍼 이야기, 윌리엄 피네건, 2018.


  태풍 소식과 함께 비바람이 몰아친다. 산 이름이라는 태풍 콩레이가 바다에 거대한 파도를 남긴다. 제주도에 몰아치는 파도 사진을 보다가 이 위험상황에 안전을 대비해야 함에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갑자기 가슴 떨림을 느낀다. 이런 기분은 어쩌면 파도를 타는 서퍼의 이야기, 『바바라인 데이즈』때문이 아닌가 싶다. 파도를, 물을 무서워하는 내 마음에 파도에 대한 환상과 도전의식을 함께 심어준.

[태풍 콩레이가 몰고 온 파도/ https://news.v.daum.net/v/20181005111056827]


  이런 마음으로 바다에 나간다거나 황홀경에 잠겨있다면 나도 자르징 노파에게서 저주를 들을지도 모른다.


“당신들 서퍼는 부모님에 대한 존경도 없고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한 존중심도 없어. 저런 바다에 나가서 목숨을 걸어? 뭐를 위해서? 이 마을에 대한 존경심도 없는 거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 세대에 걸쳐 바다에 목숨을 걸어온 어부들을 존중하지 않는 거야. 여기 사람들은 이 바다에서 자기 목숨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어. 당신들은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없다고!”


  누군가에게는 생활의 터전인 곳, 그렇기에 위험에 맞서는 곳에서 목숨을 건 유희를 벌이는 서퍼들이 낭만적이지도 아름답지도 대단하게도 보이지 않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파도를 타는 일이 살아가는 힘이고 존재를 상기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이 책의 저자와 그와 함께 한 서핑 동료들이 그렇다.

  2016 퓰리처상 수상작인데다가 ‘버락 오바마가 선택한 책’이란 수식을 받는 이 책은 저널리스트인 작가의 서핑과 함께 한 삶의 이야기다. 수영장에서도 허우적이는 내게 파도를 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세계에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파도를 타는 것 자체보다 수려한 이국의 해변풍경, 남태평양,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 아프리카, 페루 등 작가가 간 모든 장소에 때한 끌림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거침없이 파도를 탈 때의 그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한동안은 이 파도타기를 앓을 듯하다.


커다란 파도 속으로 나아가는 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공포와 황홀이 사물의 가장자리 주위를 돌면서 밀려갔다가 밀려오며 각기 꿈꾸는 사람을 덮치겠다고 위협했다. 지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 움직이는 물과 잠재된 폭력, 지나치게 진짜 같은 폭발, 그리고 하늘이 들어선 거대한 경기장으로 스며들었다. 장면은 펼쳐질 때도 신화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늘 광포한 양가성을 느꼈다. 나는 다른 곳 어디에도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른 곳 어디든 있고 싶었다.


  일찌감치 이 세계에 빠진 작가는 세계에서 유명한 서핑 장소로 꼽히는 10곳을 선정한 시기에 벌써 아홉 곳에서 파도를 탔을 만큼 서핑에 중독되었다. 그에게 서핑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어린 시절 하와이에서 하울리로서 이방인으로 낙인찍힌 순간부터 그는 서핑의 세계를 즐기며 자유에 대한 탐닉을 모험의 강렬함에 빠졌다. 서핑의 세계에만 빠져 오로지 세계를 돌아다니고 파도만 탔을 듯하지만 사랑도 우정도 일도 한다. 정치사회에 무관심하지 않고 학위를 땄고 저널리스트가 되어 있다.

  저자가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서핑을 하면서 깨달아가는 삶과 죽음과 인생에 관한 생각 덕분이다. 저자의 인생의 스승은 서핑을 통해서 얻어지는 생생한 감각과 관조로 가능하다. 파도에 쓰러져 부상을 입기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일도 수두룩하지만 강렬한 태양 아래 푸른 파도의 소리는 심장을 벌떡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는 모양이다. 서핑은 저자에게 마리화나와 약물보다 더 중독되어 그를 이끄는 것이었다. 종군 기자로 활동을 할 때에도 결혼하여 아이가 태어났어도 딸과 함께 파도를 타는 그가 노년에 이르러 점점 거친 파도를 타는 것에 힘들어 하게 되더라도 그에게 파도를 타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심장이었다. 자기탐색의 과정이었다.


남태평양을 전전하는 동안, 내 안에 뭔가 다른 것이 일어났다. 브라이언의 관점으로 보면 수염보다도 더 곤란한 것이었다. 나는 자기 변혁에 관심이 생겼다. 나는 우리가 옮겨 가며 함께 살아온 섬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괌에 가기 전부터 그렇게 해왔다. 폰페이에서 사람들이 사카우 잔을 둘러싸고 느긋하게 살아가며, 산호돌이 가득한 소세계에 깊이 빠져들었을 때부터였다. 나는 여기에 배우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저 멀리 떨어진 장소와 사람들에 관한 몇몇 가지를 배우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배우고 싶었다. 바뀌고 싶었고, 존재적으로 덜 고립된 느낌을 받고 싶었으며, 뼛속까지, 사람들 말대로 이 세계에서 편안해지고 싶었다.


  서핑을 하는 동안 나이가 들어간다는 점도 있지만 서핑을 하기 위해 찾은 곳곳에서 매번 느끼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탐색 또한 저자를 성장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많은 나라를 돌면서 파도에 몸을 맡기는 그의 서핑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실제 파도를 타고 있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래서 저자의 희열과 공포와 두려움을 내가 느끼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파도가 환영처럼 느껴지게 된다. 서핑을 하는 그들에게 전해오는 두 개의 상반된 말이 있다.

 

“큰 파도는 높이가 아니라 공포의 정도로 재는 것이다.”

“큰 파도는 높이로 재는 것이 아니라 허풍의 정도로 재는 것이다.”


  이 역설의 말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파도타기를 나는 해보지는 못할 것이다. 강렬한 끌림을 느끼지만 실행력이 떨어지느니만큼 인생의 버킷리스트에 올려두어 단지 동경으로만 간직하고 말지 모른다. 대신 인생의 파도에서는 이 두 가지 역설을 재볼 수는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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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8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백수린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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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빌라에 갇혀

2018 제8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8.


  몇몇 작가는 다른 작품집에서 본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몇몇 처음 보는 작가가 있다. 문지문학상 작품집에서 본 소설은 다른 문학상 작품집에서 본 소설들의 흐름과 두드러지게 다른 파노라마를 그린다. 대체적으로 한두 편 정도인데 문지문학상은 절반 이상이다. 작가들의 인터뷰가 실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돋운다.

  열한편의 단편이 이 계절의 소설로서 계절로 나뉘어 있는데 계절의 느낌을 담았나, 계절과의 연관성이 무언가 생각했더니 단지 매 계절마다 출판사에서 작품을 뽑는 이름이었다. 아무튼 계절이랑은 상관없었다. 사촌동생이 작품집 제목을 보더니 ‘여름의 빌라, 제목이 좋다’라고 했다. 평범한 제목이자, 일상의 말인데 어떤 면에서 좋다라고 느끼는지 궁금했다. 묻질 못해서 답을 못 들었지만, 그냥 막연하게 여름의 빌라라는 제목을 반복해 본다. 이 작품집에서 유난히 걸리던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한부분이 걸리자 좀체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해버린 감정이 여름의 빌라에 있었다.

  문지문학상은 수상작은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 서간체로 써내려간 소설은 주아가 스무살에 만난 독일인 노부부를 삼십대에 다시 만나 남편과 함께 캄보디아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던 시간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노부부와 주아의 오랜 우정이 한순간 깨어져버리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은 주아 자신의 눈일까. 남편 지호의 눈일까.


레오니를 제외한 우리 넷이 나란히 앉아 발마사지를 받던 밤. 나는 나의 피부색이 당신의 피부색보다 어둡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리고 나의 피부색은 내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던 젊은 안마사의 피부색보다는 밝았지요. 나는 그 사실에 대해서 그날밤 골똘히 생각합니다. 앳된 마사지사는 무릎을 꿇고 우리의 발을 박하와 레몬으로 정성껏 문질렀습니다. 한국에서였다면, 마사지를 해주는 사람이 한국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불편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나는 그 후로 승합차를 타고 가며 보는 풍경들, 허름한 집들이나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툭툭 같은 것들을 보는 일이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에서 주아가 갑자기 인식하는 ‘인종’에 대한 의식과 그에 대한 지호의 적대적인 감정은 상당히 불편하다. 한스가 캄보디아 사람들의 낙천적인 삶과 천성을 경이롭다고 할 때 지호는 캄보디아의 가난을 이야기하며, 독일인의 자격을 따지며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 지호는 평소 윤리와 실존을 떠들던 베레나가 보기엔 ‘반듯한 도덕관념’을 지닌 사람이다. 하지만 내겐 ‘삐딱한 도덕관념’으로 느껴지는 이 모든 행동과 말들은 단지 지호뿐만 아니라 주아에게서도 느껴진다. 지극히 관념적인 도식을 한국의 젊은 부부는 가지고 있다.

  캄보디아 마사지사로 인해 인식된 피부색의 차이로 거리감과 불편함을 느끼는 주아는 한국이었다면, 한국인이었다면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캄보디아 마사지사가 그들에게 마사지를 하는 일은 자본의 일이지 인종의 일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 캄보디아, 그곳에 사는 캄보디아인 모두는 가난하고 불행한 인종으로 분류하는 지호와 주아에겐 캄보디아 보다는 한국이 한국보다는 독일이 더 우위에 있는 나라이며 국민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독일인이라는 것, 전범 국가의 국민이기에 한스 부부를 현재의 가해자로 인식해버린다.


폭력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폭력 이외의 수단을 갖지 못한 자들뿐이라고.


  폭력에 대한 지호의 말이 얼마나 허황되게 들리는가. 그렇게 지호와 주아라는 개인이 한스 부부에게 개인적으로 가하는 잔인한 폭력의 말은 폭력에 대한 관념적 인식에 골몰하는 지호의 의식에 환멸을 느끼게 한다. 한국에서 마사지를 받았다면 지호는 계급의식으로 인해 반듯한 도덕관념에 의해 힘들어 할까.


당신은 우리가 함께 타프롬 사원을 걸었던 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2016년 12월 이후 당신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폭력 앞에 소멸되는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고요. 하지만, 주아. 당신은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한스부부가 캄보디아인의 삶을 여유와 낙천으로 보며 동경화한 건 테러 피해자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감정의 발로였다. 이 지극히 관념적인 도식 속에서 언뜻 비장하고 비판적이며 자신의 생각의 틀에 맞추어 사고하는 지호에게서 룸펜의 모습이 떠오른다.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그 끈끈한 지호의 지배적 사고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 그런 시각으로 지호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무심히도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반듯한 도덕관념’의 소유자는 알까. 자기 세뇌에 빠진 채 머리로만 인식하다 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잘못보고 판단할 수 있는지 느끼게 된다.

  노부부가 캄보디아 마을에서 느낀 그 감정이 어떻게 연유한 것인지를 알게 될 때 국가와 인종에 대한 일반적인 도식으로 에워싸면서 개인, 타인의 삶에 대해 얼마나 몰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타인을 바라보는지를 생각하며 끝끝내 불편하게 자리한 지호가 주아가 걸려서 나가지 않는다. 내게 있는 그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여름의 빌라에 갇혀 최근 소설에서 보지 못한 다른 스타일의 소설들에는 덜 눈이 갔다. 한참을 지호에게 소모적인 감정을 발산하고 났으니 선을 지우고 다른 아이를 받아들인 레오니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빌라에 갇힌 이 마음을 풀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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