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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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죽음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축 저, 은행나무, 2019-01-25.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 김광균, 추일서중 中


  폴란드를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환기되는 이미지다. 폴란드는 늘 그렇게 쓸쓸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폴란드의 역사가,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의 수많은 이들의 죽음이 떠올라서일 것이다. 그렇게 폴란드는 새겨져 있다.

  이 소설 역시도 그런 느낌들을 새긴다. 1910년대~1989년의 폴란드의 역사, 1‧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로부터 분할 점령지였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냉전 체제와 사회주의 시대를 살아간 개개인의 세월이, 삶이 그려져 있다. 이 시기의 폴란드는 정치적으로 휘몰아치고 휘몰아치는 때였으니 맘먹고 걸어서 1시간도 되지 않는 마을을 초토화시키기엔 충분했다. 그곳이 어디에 있든지.

  소설 속 태고는 제주와도 닮아 있다. 4월 3일, 관련 다큐들을 보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미하우와 게노베가, 미시아와 이지도르, 크워스카와 루타의 삶이, 태고에서의 시간들이 제주의 시간과 닮아 있다. 태고가 제주였고 제주가 태고였던 듯이 한 나라의 역사가, 그 역사 속 권력이 국민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놓는지를 소설은 보여준다. 쓸쓸하지만 아픔에 더 가까운 기억을 남긴다.

  소설은 독특한 서사로 이끈다. 현실과 환상, 신화와 역사가 섞여 있어 익숙한 마을 태고. 그곳은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천사들이 동서남북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곳이지만 삶이 어떻게 피폐화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잔혹함과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살아 있는 마을이다. 어쩌면 태고의 사방을 지키고 있는 천사들은 태고로부터 다른 곳을 지키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철저하게 태고를 막거나. 고립. 5‧18의 광주가 4‧3의 제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한 마을의 철저한 고립. 외부와의 소통을 허하지 않는 완벽한 감금. 정말로 대천사들은 사방에서 모든 악들이 태고에서 날뛰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던가. 악을 그곳으로 몰아넣고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었던가. 그게, 신의 뜻이었던가.

  “파멸 그리고 혼돈, 파멸 그리고 혼돈.”


 《태고의 시간들》에서 이야기는 조각조각으로 읊조리며 전체의 서사를 만든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보리수와 버섯균, 신과 천사, 집과 게임에게도 서사의 장을 할애한다. 그 조각조각의 이야기들이 맞물려 그들 시선에서 세상을 보게 하고 세상 속 그들을 보게 한다. 이야기는 촘촘하고 작게 그려지는 듯하지만 크고 깊다. 유대인 학살과 크워스카와 루카를 향한 성폭행과 집단 강간, 그 어떤 경악스러운 이야기도 마치 전설이나 신화인듯 그림을 설명하듯 담담하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어조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마을에서 기대하는 환상과 낭만에 의해 잔혹성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남자보다 여자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남편보다 아내가 더 빨리 죽는” 이야기가 담겼다. “여자는 인류가 은밀히 고여 있는 그릇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강할수록 더 많은 아이를 낳았고, 그로 인해 조금씩 약해진” 여자의 이야기가 담겼다.


“혹시 그런 생각해보신 적 없으세요? 왜 우리는 바보같이 이런 전쟁통에 애를 낳을까 하는…….”

“분명 신께서……,”

“신, 신이라……. 그분은 잘난 회계사죠. ‘인출금’과 ‘융자금’을 관리하시니까요. 둘은 서로 균형을 맞춰야 하거든요. 그래서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면,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죠…….”


  태고의 경계에는 위험이 있다. ‘여행에 대한 불안’과 ‘소유하고 싶고 소유되고 싶은 욕망’과 ‘자만에 빠져 우쭐되는 것’과 ‘지나치게 영리한 척하다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다. 욕망은 태고를 흐르는 백강과 흑강의 합쳐짐처럼 유유히 섞이어 흘러간다. 어쩌면 당연히 인간은 욕망을 지닌 존재라는 인식하에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정당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태어나고 죽음이 너무나도 당연한 듯하기에 탄생이 어떤 형태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죽음이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로 일어나든지 상관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다는 사실인 것인지도 모른다. 대천사들은 그 죽음을 지키는 자들인 것처럼도 여겨진다. 모두 죽어야 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건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전쟁과 체제 변화의 시대에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위해는 비슷하다. 때때로 이름들과 국명을 지워버리면 어디서 벌어진 것인지도 모를 살인과 강간과 집단광기의 이야기가 있다. 그렇기에 인류의 원형은 가감없이 잔혹하고 야만적이다. 하지만 온갖 지식을 습득하고 문명을 가졌다는 시대의 이야기 역시도 원형을 품고 품어 더할나위없이 야만적이고 극단적이기는 마찬가지다.

 《태고의 시간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전하는 방식에서 다르다. 올가 토카르축이 전하는 이 원형적인 이야기 방식은 매혹적이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인간이 창조한 신이랄지, 신이 창조한 인간이랄지… 뭐, 그런저런 생각들까지도.

  

신에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신은 자신이 세상 속에 가두어 놓고, 시간의 굴레에 얽매어놓은 인간들처럼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따금 인간의 영혼은 만물을 꿰뚫어 보는 신의 시야에서 감쪽같이 벗어나서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그럴 때면 신의 갈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자신 말고도 절대 불면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질서로 인해 변화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모형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을 신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조차 아우르는 그 질서 안에서 시간에 의해 흩어져버리는 순간적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시간의 너머에서 일제히,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기 시작한다.


  소설에 담겨진 ‘신’의 이야기가 중요한가. 태고는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이 행한 역사이고 인간이 당한 역사의 이야기다. 내가, 당신이, 우리가 겪는 끝나지 않는 어리석음과 욕망의 소용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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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의 항해 창비세계문학 66
진 리스 지음, 최선령 옮김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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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꿀 수 없는 어둠

어둠 속의 항해, 진 리스, 창비, 2019.


  작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전적이며 최고작으로 뽑은 소설이라는 점에서 호기심이 배가된다. 제목에서 짐작되는 막막함과 1890년생인 작가의 생애가 더해져서 잿빛이미지를 가득 안긴다. 이 작품은 1934년 출간되었지만 자전적 소설이라고 볼 때 배경은 1910년  즈음이 된다. 1910년이라는 시간에 서 있는 한 여자의 생애가 휘몰아친다.

  진 리스는 열여섯에 홀로 영국으로 건너간 도미니카 태생이다. 당시 도미니카는 영국령이었고 진 리스의 아버지는 웨일스, 어머니는 스코틀랜드계 크리올 태생이었다. 진 리스의 이국적 외모와 억양은 진 리스가 영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녀를 괴롭히는 요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경제적 지원이 끊기고 배우가 되고자 왕립연극학교에 다니지만 역시 언어와 왕따를 겪으며 그만두고 코러스걸, 마네킹, 누드모델 등의 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만난 부유한 연상의 남자, 사랑했지만 그에게서 버림받고 불법 낙태수술을 받은 경험이 진 리스의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일이자 이 소설의 중심 이야기가 된다.

  애나 모건이 되어 펼치는 이야기에는 머물 곳을 찾아 몇 번을 옮겨 가는 주거지처럼 반복되어 펼쳐지는 애나 모건의 기억이 있다. 어떤 상황을 겪을 때마다 몽환과 독백으로 때로는  정신분열된 것처럼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그녀는 현재에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 생활은 불안정하기 그지없고 그때마다 여지없이 소환되는 것으로 보건대 과거의 그녀는 행복했던 것일까.


바깥은 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늘고 슬픈 쓸쓸한 목소리들. 그리고 마치 살아 있는 무엇이라도 되는 듯 사람을 짓누르는 그 열기. 나는 흑인이 되고 싶었다. 난 항상 흑인이 되고 싶었다. 프랜신이 거기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나는 그녀의 손이 부채질을 하느라 까딱까딱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녀의 손수건 밑으로 떨어지는 구슬같은 땀방울을 보았다. 검다는 것은 따스하고 유쾌하며 희다는 것은 차갑고 슬프다.

 

  분명 그녀는 현재 행복하지 않다. 서인도제도에서 자란 그녀에게 영국은 너무 춥고 어두운 잿빛의 세계였다. 반면에 서인도 제도는 따스하고 밝은 자줏빛의 세계다. 그 풍경에 대한 느낌은 단지 공간적 배경, 지리적 위치에 따른 차이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그 세계에서 느끼는 모든 것의 총체다. 사물과 인간 관계에서 느끼는 모든 것이다. 돈 한푼 없는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 한명으로서의 그녀는 거기에 더해 이방인으로서의 차별을 겪는다. “저주받은 소수들의 인생”이 열여덟 그녀에게 붙어진 삶의 이름이다.

  그녀는 “흑인이 되고파”하는 생각을 한다. 이미 영국으로 건너오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다. 영국에서 흑인이 되고프다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게 들리지만 서인도제도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흑인이 되고프다는 생각이 프랜신에 대한 애정 갈구인가 생각했다. 엄마 없는 상실감과 모정을 프랜신에게 얻으려 했던 소녀의 마음이 있었던 것인가 하고. 프랜신과 닮고자 하는 마음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글쎄, 모를 일이다. 애나 모건에게 가득한 서인도제도에 대한 열망은 현재 영국에서 겪는 삶에 대한 반작용일지도.

  노예인 흑인 프랜신은 백인이기에 애나 모건을 좋아하지 않는다. 애나 모건은 자신 역시도 백인인 게 싫다는 것을 프랜신에게 설명해내지 못했다. 백인이지만 영국에서 애나 모건은 이방인일 뿐이다. 그것도 몹시도 가난한 젊은 여자. 서인도에서의 애나가 되고파 했던 프랜신이 영국에서의 자신이 겪는 삶과 다르지 않다. 아니다. 애나는 ‘프랜신’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흑인’이 되고프다고 했으니 프랜신의 삶을 꿈꾸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겠다. 서인도에서 애나 모건의 삶으로 보건대 결코 될 수 없는 프랜신이다. 영국에서 그녀가 오를 수 없는 위치를 꿈꾸는 것과 같다.


“안돼요, 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살면 안돼요.” 도스 부인이 말했다.

사람들은 ‘젊은’이라는 말을 하며 마치 젊다는 게 무슨 범죄라도 되는 양 굴지만, 정작 늙어가는 것은 항상 그리도 무서워한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늙어서 이 모든 망할 일이 다 끝났으면 좋겠어. 그럼 도무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침울한 기분에 빠져 있진 않을 텐데.’


  젊은 아가씨가 사는 삶. 그것은 남성에게 원조받는 삶이다. 애나에게는 분명 사랑이 있었으나 경제적 지원과 맞물린 나이 많은 남자와의 관계는 타인들에게는 ‘원조관계’로 보일 뿐이고 남성 역시도 그렇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여기에 애나는 상처받을 뿐이다. 애나는 이 관계에 힘겨워하고 또한 좀더 당당해질 수 있으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못한다.

  “그 추잡한 외국인들 같은 걸 말하는 건 아니니까. 외국인들 싫지 않아?”

  한 사람으로서 ‘외국인’은 싫어하지만 젊은 여성으로서는, 뭔가를 이용해 먹을 때는 외국인어도 상관없는 이들의 세계에서 애나 모건은 한없이 무기력하다. 그런 자신을 슬퍼하고 좌절하며 그녀가 다다르는 곳은……. 애나 모건의 삶을 무조건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애나 모건의 상황이라면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는 지금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1910년대 애나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애나가 전전하며 살아가던 영국의 어둡고 춥고 습하고 낡은 집을 떠올려 본다.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현실. 나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죽음의 문턱에서 다소의 희망이라도 잡아보려는 애나 모건의 독백들이 정신없이 흘러간다.

  이 소설을 페미니즘 문학의 대표 도서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읽다 보면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애나가, 애나의 삶이? 이런 의구심을 가지고 책을 읽다 보니 때로는 책에 대한 소개문구가 책을 편하게 읽어 나가게 하는 방해자로 등극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덮고 생각해보니 페미니즘이란 말에 너무 호도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언뜻 페미니즘은 어떤 행동력을 요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애나는 여권주의를 위한 활동적인 삶을 피력하고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여성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그것이 페미니즘인 것도 아니다. 애나 모건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여성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문학으로 동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대 식민지 출신 여성의 삶이 곧 시대의 여성의 삶의 역사로서 기록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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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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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는 눈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민음사, 2002.


  겨울에 눈이 오지 않으면 3월에 내리는 봄을 기대하게 된다. 어쩐지 봄에 내리는 눈을 보면 한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음을 잊게 된다. 봄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겨울과는 너무도 달라서 환상과 몽환이 약간 섞여든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이런 느낌일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1968년 노벨상 수장작인 이 책의 첫 문장은 많은 이들에게 감탄할 첫문장으로 꼽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감각적 문장으로 쓰여 있다. 이야기, 줄거리는 모호한 잔상이 남는 소설이다.

  가와바타는 일본인으로 첫 번째, 아시아에서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다. 첫 번째는 인도의 타고르라서 어쩐지 인도는 서양에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는 까닭에 아시아에서의 첫 번째 수상작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서양인의 동양, 더 나아가서는 일본에 대한 호기심이 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설국>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흑백이다. 어떤 칼라보다도 흑백이 강렬하다는 생각을 하게끔 되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눈쌓인 풍경은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눈이 내리는 묘사는 기억나지 않는다. 일본의 목조 가옥 위로 쌓인 눈, 서린 냉기속에 피어나는 온천의 하이얀 김, 작가가 반복하여 말하는 깨끗하다, 깨끗하다, 순수하다…. 일순간 맑고 청아한 느낌이었다가 한없이 퇴폐적인 느낌에 휩싸이게도 된다. 일본문학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퇴폐미로 선입견처럼 쌓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950년 이전의 소설로 그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 해도 정감가지 않는 주인공 시마무라이기에 그의 시선의 끝에서 어떤 과오, 퇴폐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가도 싶다. 시대적 배경 고려는 무슨, 한량으로 시종일관 감탄만 해대는 시마무라와 남성의 보호자이거나 일만 하는 요코와 고마코의 모습을 그저 그 시대는 그러하였노라, 그렇게만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하기에 시종일관 풍경에 압도되는 듯이 탄식하는 시마무라의 그 표현들이 깨끗하다, 순수하다, 아름답다 외치는 그 모든 시마무라의 말들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의 말처럼 헛수고로.

  여자들 역시도 풍경이 된 느낌이었다. 고마코와 요코에 대한 시선이 풍경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창밖을 바라보며 설국의 풍경을 감상하는 시마무라의 눈이 은근슬쩍 고요코와 요코에 대한 시선으로 바뀔 때 언뜻 관음증적 강박이 느껴진다.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 예사스럽지 않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건만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거대한 자연에 짓눌린 공허한 인간의 노력 같아서 애달프다. 고마코와 시마무라가 은하수를 보는 풍경이 눈에 띄었는데 풍경화된 요코의 모습, 그렇게 쳐다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아닌 물화된 것으로 대체되는 듯이 보였다. 영화상영이 있어 많은 사람이 모여인 고치창고에서 불이 나 부상자를 구해내고 아이들을 2층에서 마구 던져내린다는 얘기를 들은 고마코와 시마무라가 고치창고를 향해 달려가다 멈춰 서서 하늘을 보며 은하수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허위의 마비’에 걸린 듯한 시마무라의 묘사가 절정에 이르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올려다보고 있으니 은하수는 다시 이 대지를 끌어안으려 내려오는 듯했다.

거대한 오로라처럼 은하수는 시마무라의 몸을 적시며 흘러 마치 땅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풍경과 두 여인에 대한 순수와 아름다움에 대한 반복되는 예찬만큼이나 ‘헛수고’란 말도 반복된다.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남자에게 고마코와 요코의 모든 행동들이 무위로 보일 순 있겠다. 서양무용에 관해 글을 쓰는 시마무라는 직접 서양인의 춤을 본 적이 없다.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직업없는 그의 심리적 위안으로 존재하는 글. 그의 글은 오로지 인쇄물에 의지한 상상이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 대한 동경심을 품는 것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시마무라의 세계는 도쿄에 있고 그는 거의 일년에 한번쯤 기타마현으로 그러니까 설국의 세계를 찾아온다. 그곳엔 게이샤 고마코와 요코가 있다. 도쿄와 설국의 세계, 시마무라에게 심리적 위안으로 붙잡아 두고 있는 세계와 허위의 세계는 어디일까.


   “소용없죠.”

   “헛수고야.”


  그토록 아름답게 풍경을 바라고보 순수와 깨끗함과 아름다움을 강박적으로 찬양하는 시마무라의 말은 잠시 내 맘을 흔들기 충분했으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어디쯤에서 나는 위의 두 말을 반복하게 된다. 이제껏 시마무라가, 작가가 묘사한 설국의 세계는 모두 ‘허위의 마비로 가득찬 위험’ 가득한 곳이었으며 순수를 외치는 말끝에 오염되어 버렸다. 깨끗함, 눈처럼 흰, 순수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반복·강박적으로 듣다 보니 반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그 세계가 눈처럼 깨끗한 곳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정말로 그 풍경을 바라보던 시마무라의 눈(目) 속에 하얀 눈(雪)이 보였던가, 시마무라가 아름답고 순수한 풍경만을 보고자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랄까, 이렇게 되고 보니 역시나 나는 시마무라에게서 퇴폐적인 인간상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설국>은 1937년 출간하여 12년 동안 여러 번의 수정작업을 거쳐 1948년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강력히 생각나는데 무진기행이 1964년 발표되었으니 <설국>이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때때로 어떤 소설을 읽을 때 그 시대적 배경, 당대의 사회현실을 생각하며 읽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 보기에 이 말의 함의는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것이 당연했으니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니 불편하지 않을 수 있을지언정 굳이 그런 시대이니 불편히 여기는 것을 문제시하는 말은 때때로 너무 이상하게 들린다. 수천 번을 양보한다 해도 그 시기는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반인륜의 모범을 보여주던 때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유일하게 참고 넘어가야 하는 것, ‘이해해줘야’ 하는 것이 오로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시각뿐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그런 일본이었으니 섬세하고 예민한 작가가 현실이 아닌 풍경 속에 압도되어 살고 싶었을까, 현실의 피폐함과 인간의 야만성에 대한 반대급부로 풍경으로 매몰되어 간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모른다. 그의 연보에는 태어나자마자 몇 년 동안 그의 어머니, 아버지, 조부모의 잇따른 사망이 적혀 있다. 74세의 그는 급성맹장으로 수술·퇴원한 한달 후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했다고 한다. 허무와 무용, 쓸쓸함의 정서가 작가 자신의 인생에서 연유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즈음 이 소설은 이미지와 감각만이 남아 한없이 덧없음으로 뒤덮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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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보이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박현주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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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가 하는, 듣는 말


뉴 보이, 트레이시 슈발리에, 박현주 (옮긴이), 현대문학, 2018-02-10.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트레이스 슈발리에의 작품은 인상적이었다. 그런 작가에 대한 기억으로 펼쳐든 책은 이번엔 셰익스피어의 변용이었다. 트레이시라면 충분히 이런 재해석을 좋아하리라 생각했지만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기획이 아니라 출판사의 기획 시리즈의 일환이었다.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셰익스피어 희곡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라나. 이름하여「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앞으로도 주욱 많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현대적인 이야기를 입고서 출간될 거라는 것은 기대감을 주면서도 정반대로 기대감을 반감시키기도 했다. ‘기획출판’ 시리즈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으로 인한 반감인건가. 아무튼. 트레이스 슈발리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오셀로>를 선택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74년 워싱턴 교외의 초등학교다. 단 하루, 열한살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셀로의 재현은 ‘역사가 스포’라는 말처럼 비극적인 인간의 질투를 그리고 있기에 중반을 넘어서면 끝을 보고 싶지 않아진다.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예민한 감정의 결들은 성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감정이란 이다지도 쉬이 흔들리는 것인가, 인간 감정의 그 적나라한 과정을 그리고 있느니만큼 약하고 악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고 서글퍼진다.

  전학 온지 반나절 만에 유일한 흑인 소년 오세이 코코테는 학교 최고 인기학생인 ‘디’와 캐스퍼의 존경을 받는다. 또한 백인 아이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디’와는 애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까지 한다. 운동장 한켠에서 힘으로 군림하는 ‘이언’은 이런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며 오셀로를 흔들었던 이아고처럼 ‘오’를 흔든다. ‘디’와 ‘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이언’이 동원하는 방법은 이간질이다. 다른 사람까지 교묘히 이용하며 ‘오’의 마음에 디에 대한 의혹과 불신을 씌우는 ‘이언’의 행동은 어떤 파국으로 나타날까.

  오는 디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불신하면서도 이언의 말은 무조건 믿는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애정관계의 오와 디는 이언의 개입 후 달라진 양상을 보인다. 오는 디에게 함부로 대하고 디는 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그 모든 상황을 잘 설계한 이언의 힘이라 하기엔 당연하게 흘러가는 반응은 뭔가 꺼림칙하다.


하지만 디는 화가 나지 않았다. 느껴지는 감정은 죄책감뿐이었다. 자기가 사과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사과해야 할 사람인 것처럼. 오는 디에게 소리 지리고 밀어 버릴 만큼 화를 낼 권리가 있었다. 그 애는 흑인이고, 하루 온종일 모두 그 애를 그런 식으로, 다른 전학생들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대했다. 디는 자기 역시 그 애를 흑인이라는 이유로 흥미롭게 여겼다는 걸 알았고, 그건 반드시 좋은 이유라고 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를 피부색 때문에 좋아하다니.


  ‘디’가 독백하는 것처럼 작가는 이 바탕에 ‘인종차별’을 두었다. ‘오’는 ‘흑인’이기에 그렇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차별을 받는데 익숙한 ‘오’가 ‘디’의 애정을 흩트리는 인언의 말에 ‘디’의 행동을, ‘이언’의 말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 대신에 자신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자신이 ‘흑인’이기에 ‘디’가 막무가내로 애정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고 ‘디’의 행동은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행동일 뿐이라고 단정짓는다. 자격지심에 가득차 ‘디’에게 함부로 대할 ‘권리’를 취득한 ‘오’의 행동이 몹시 답답하게 여겨지는 지점에서 다음 문장으로 간신히 진정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무지에 기인한 노골적 인종차별주의는 다루기가 쉬웠다. 신경에 더 거슬리는 건 좀 더 미묘한 빈정거림이었다. 학교에서는 친절하지만 생일 파티에 반 전체를 초대해도 오만은 초대하지 않는 애들. 오가 방으로 들어가면 뚝 끊기는 대화, 오가 그 자리에 있으면 생기는 짧은 침묵. 가끔 내뱉어 놓고 나중에 부록으로 덧붙이는 말. “아, 널 의미한 건 아니었어, 오세이. 너는 다르잖아.” 혹은 이런 발언들. “쟤는 흑인이지만 영리해.” 혹은 그게 왜 마음을 상하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인종차별로 내재된 이 패배의식을, 더구나 열한살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척 할 수 없기에 안타까움을 가진다. 아이만이 아니라 어른들 역시 ‘오’에 대한 시선은 노골적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일찌감치 ‘오’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 걱정하고,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은 유일한 흑인 아이 ‘오’가 아니라 백인 아이들이 적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나 외교관의 아들인 ‘오’는 상류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백인 사회에서 ‘소수’의 존재일 뿐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 저 애는 너무 쉽게 살겠죠. 저렇게 자라서 좋은 직업을 그냥 낚아챌 겁니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 덕분에. 그보다 더 자격 있는 사람들이 가졌어야 할 좋은 직업을요.”


  이런 상황의 ‘오’가 애정을 주고받은 ‘디’를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 일반화된 백인으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길들여진, 여전히 진행중인 차별받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삶의 방식일 수밖에 없을 지도 몰랐다. 그러니, ‘오’라는 개인이 아니라 ‘흑인’이라는 대표성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오’의 파멸은 예정되는 수순일지도.

 

“가지 마.” 오는 목소리를 높여서 반복했다. 그런 다음 이전에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자기가 쓸 거라고는, 쓰는 법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했다. “창녀!”

 

  굳이 ‘오’가 ‘창녀’라는 말을 내뱉었기에 ‘검둥이새끼’라는 말을 들은 것은 아니다. 이미 ‘오’가 흑인이라 불편한 이들은 그 말을 수없이 외치고 또 외치고 있었을 뿐이다. ‘오’의 충격은 ‘검둥이새끼’라는 말이었을까, ‘이언’의 간교함에 빠져 ‘디’를 오해한 일이었을까, 순간 헷갈린다. 하지만 ‘검은 것은 아름답다’라고 외치는 만큼 전자일 것이다. 흑인으로서의 자의식, 그가 순간 잃어버린 자존감에 대한 탄식과 의지의 표현으로서.

  이 소설이 인간의 파국을 가져오는 질투라는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며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실제로 며칠 전 미국 뉴욕의 초등학교에서 흑인 학생에게 노예역할을 맡게 하고 노예경매제를 재연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 ‘오’로 인해 여전히 진행중인 깊은 인종차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 한창 들끓는 사건 때문인지 ‘창녀’라는 말을 보다가 의아함을 느꼈다. 성인들의 카톡창과 법정에서 봄직한 이 단어가 얼마나 적나라하게 인터넷을 휩쓸고 있는지를 새삼 실감하며…. 소설 속에서 내가 대적해야 할 상대, 여학생을 조롱하고 모욕을 주는 단어는 ‘창녀’다. 그러나 내가 대적해야 할 상대가 남학생일지라도 그 싸움에서 남학생을 모욕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는 ‘창녀’ 또는 그와 같은 말이다. 직접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말이 아니다. 나의 여자를 비난하는 말이 곧 상대를 비난하는 말로 등가된다. 이른바 ‘이언’의 꼬붕 ‘로드’가 ‘이언’의 조언을 받아 ‘캐스퍼’와 싸움을 벌일 때 ‘캐스퍼’를 향한 비난은 ‘블랑카’를 성적으로 욕하는 말이다. 질투의 감정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단어의 정점은 ‘창녀’인 걸까, 혐오와 차별의 세상에서 ‘창녀’와 ‘검둥이새끼’가 나타내는 단어의 상징을 반복하여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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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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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견뎌야 하는 사막


문맹-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한겨레출판, 2018.


  이 짧은 책을 사두고서 한해가 지났다.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거라고,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지만 읽고 싶어 ‘산’ 책은 왜 이다지도 책장 속에 오래도록 묵혀두게 되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그나마 책꽂이에 꽂아 둔 지 짧은 시간에 읽힘을 당한 책이다. 두루두루 보니 아직 묵혀둔 책이 많다. 사두고서 10년이 훨씬 지나서야 읽힘을 당한 책이 1년짜리 문맹을 꼴아보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일 읽기만 하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줄을 모르는, 가장 나태한 소일거리를 하는, 게으른 자”인 줄 알았는데, 이 정의는 내게 허용되지 않게 되는 건가. 질병에 빠져 있었다 싶었지만 치유의 시기가 지나고 다시 질병에 들까 말까 했는데 새삼, 질병이랄 것도 없었다 생각하게 든다. 아무튼.

  작가의 어린 날의 기억과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과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이야기가 흐른다는 점에서 굳이 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가 생각난다.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일과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프랑스어를 배우는 일은 엄청난 간극이 있지만 한편으론 끊임없이 타자로, 이방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심정은 큰 간극이 없다.

  읽기와 쓰기에 관한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에는 생존을 위해 말을 삼키고 달려야 했던 역사가 있다. 작가의 생애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언어로 표현해도 부족할 만큼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언어는 담백하다. 그날을 탈탈 털어 빨랫줄에 수백번은 걸어놓은 것처럼 건조하다. 그것이 사막을 견디어낸 작가의 언어였을까. 이 반복된 건조함이 작가의 생애에 대한 관음증적인 호기심을 지우게 한다.


아무도 러시아어를 알지 못한다. 독일어나 프랑스어, 영어 등의 외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들은 몇 달 동안 러시아어 속성 수업을 배웠지만, 그들은 그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것을 가르칠 마음이 전혀 없다. 그리고 어쨌든 학생들도 그것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국민적인 지식의 사보타주를, 당연히 미리 계산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저항을 목격하게 된다.


  헝가리 태생인 작가는 1956년 소련이 쳐들어왔을 때 여러 나라를 도망친 끝에 스위스에 정착했다. 작가는 모국어를 죽이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어를 적의 언어라 부른다. 그나마 러시아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얼마나 다행인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위로뿐. 마침 3.1절, 상황의 차이가 있었다 할지라도 헝가리인의 러시아어에 대한 ‘저항의 방식’이 부럽게 느껴진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려고, 일본어를 쓰고 말하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저항으로 스러져간, 수동적인 저항조차도 해보지 못한 그들을 생각하면…. 

  

공장에서는 모두들 우리를 친절히 대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웃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언어로든 글을 읽고 썼으리라는 작가의 글에 대한 갈망은 단지 작가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재적 의미를 얘기하는 것 같아서 숙연하게 느껴진다.

  나도 점점 문맹이 되어 간다. 시시각각 변하는 인터넷 상의 문자어를 이해하지도 적응하지도 못해 당황한다. 세상의 흐름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가 늘어만 간다. 그럼에도 알고 싶지 않은 말들이 넘쳐 나고 간극은 더욱 커져간다. 이것은 내가 견디어야만 하는 사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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