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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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 말할 수 있을까


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문학동네, 2018.


  이 책에 관한 탄사에는 형식에 주목했다는 말이 많다. 문학이란 그 시작 이래로 이런 형식적 틀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새롭다, 놀랍다기보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목소리로 이루어진 소설. 그 위에 덧붙여진 실제 사료-신문과 칼럼과 일기, 증언 등-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아름답고 의미있게 펼쳐져 흥미를 준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링컨에 관한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남북전쟁에 관한 것을 시작으로 일찌감치 어린 시절부터 정직했다는 위인전용 이야기, 가장 많은 암살에 관한 이야기 등등. 남의 나라 대통령 이야기를 굳이 열렬히 찾아 볼 만큼은 아니었기에 링컨이 매우 사랑하는 아들이 열한살에 사망했고 무덤을 찾아가 아들 시신을 꺼내어 안고서는 울었다는 이야기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매우 인상적임인 링컨의 일화이다. 작가는 이 지점을 잘 끌어내어 소설로 확장시킨다. 바르도에 머물고 있는 존재, 대통령의 아들 윌리 링컨과 경계에 머문 이들을 통해 삶과 죽음에 관한 영원한 인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승과 저승 사이, 그 경계가 가진 처연하고 혼란한 분위기는 열한 살 소년 윌리를 통해 더욱 부각된다. 작가가 묘사하는 바르도는 익숙하게 인지된 이미지다. 다양한 사연으로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한 이들은 그 이유들로 이승의 끈을 쉬이 놓지 못한다.


나는 ‘병자’도 아니고, ‘부엌바닥에 누워’ 있지도 않고, ‘병자-상자를 통해 치료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소생을 기다리고’ 있지도 않소.


  저승이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기에 생에 대한 미련은 바르도에 머물고 헤맨다. 현재의 상태를 치료받으면 나을 존재로 인식하는 바르도의 영혼들. 하지만 아이들이란, 어린 영혼이란 바르도를 쉬이 지나쳐 가기 마련이다. 윌리는 다르다. 그의 아버지가 그곳에 찾아와 자신을 안아주었으므로, 곧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으므로 윌리는 바르도에 머물러야 한다. 링컨의 아들에 대한 이 사랑의 행위는 바르도의 모든 영혼들을 감탄하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윌리와 감흥을 받은 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행위가 된다.


그의 마음은 새삼스럽게 슬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세상이 슬픔으로 가득하다는 사실, 모두가 어떤 슬픔의 짐을 지고 노동한다는 사실, 모두가 고난을 겪는다는, 이 세상에서 어떤 길을 택하는 모두가 고난을 겪고 있다는(아무도 만족하지 않고, 모두가 부당한 대접을 받고, 무시당하고, 간과당하고, 오해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려 노력해야 하고, 따라서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 그의 현재의 슬픈 상태가 그에게만 있는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고, 전혀 아니고, 오히려 모든 시대에, 모든 시간에, 다른 사람들 다수가 느껴왔고, 앞으로도 느끼게 될 것이며, 따라서 오래 끌거나 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런 상태에서 그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며, 세상에서 그가 차지한 위치로 인해 그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큰 해가 될 수도 있는데, 계속 낮게 가라앉아 있는 것은 도움이 안되므로 할 수만 있다면 피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곳에는 윌리 링컨만이 아니라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도 있었다. 윌리 링컨이 사망한 1862년 2월 20일은 1961년 4월 시작되어 4년을 이어간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아이의 죽음으로 오열하는 링컨의 모습에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아이를 보았을 테고 어떤 이들은 그들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전쟁의 책임자로서의 대통령 링컨 자신이 느꼈을 비애도 아이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산 자든 죽은 자든 어쨌든 그 모습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삶에서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 심판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 수 있나?”


 각자의 핵심에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 종말, 그 종말로 가는 길에 우리가 격어야 하는 많은 상실들. 


나는 죽었소.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소.

그리고 갔소.


  상실에 관한 가장 절정의 인식은 죽음이다. 타인의 죽음에서 그럴진대 자신의 죽음에서 느낄 이 감정은 얼마나 강렬할까.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는 심정으로 영혼으로 떠돌 미래의 나를 생각해보게 한다. 마침내 스스로 내 상태를 인정하게 되는 순간의 고통, 체념, 슬픔이 때론 미련스럽게 느껴진다. 아직, 죽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상상만 하는 순간에도 강한 집착에 머무는 것에 대한 환멸까지도 겸해지면서 왜 삶에 대한 성실함과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것엔 소홀한가, 그런 생각들이…. 그 경계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삶일 수 있을까. 바르도, 그곳 수많은 영혼들이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깨닫는 자신의 상태는 계속 머릿속을 휘집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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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 스스로 ‘정상, 평균, 보통’이라 여기는 대한민국 부모에게 던지는 불편한 메시지
오찬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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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해!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오찬호, 휴머니스트, 2018.


  한국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삶은 아주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한번만 돌려 생각하면 이만큼 쉬울 수도 있을까, 그런 극과 극의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어쩌면 양육의 다른 가치관이 개입할 여지가 없이 방식이나 태도가 획일적이기 때문일 거다. 좌우를 쳐다보며 결국엔 모든 것이 특정한 대학에 진학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으니까. 양육이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동일시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아이의 생각은 없는 채로 일관되고 획일적인 목표로 전진하면서 지켜야할 다른 많은 것들은 외면하려니 어렵고 힘든 건 아닐까.

  저자는 한국의 육아 문제, 한국 부모들의 육아 행태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출발선은 ‘출산과 육아’ 즉, 부모 됨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 이전, 연애와 결혼을 시작점으로 한다. 이는 한국의 육아에 관한 한 결혼 이전의 ‘무언가’에 의한 연장선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결혼한 이에게도 결혼하지 않은 이에게도 공감적 요소가 있을 것이다.

  우선 저자는 부모가 되는 선택을 한 이들에게 자식키우기는 일종의 과시적, 증명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비혼이 증가하는 사회에서 결혼을 왜 선택했는가에 대한, 아니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문제는 비혼에서 기혼자가 되는 그 ‘선택’이 가진 어쩔 수 없음에서 시작한다.


그만큼 비혼자들은 연애-결혼-출산에 대해 가장 현실적으로 고민한 사람이다. 이들이 드러낸 공포, 그러니까 ‘그 부모'와 다른 레일로 들어선 결정적인 계기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존재를 미약하게 만드는 경제적 사정이고 둘째, 면역이 없기에 버티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인간관계의 문제, 마지막은 지금껏 배운 것이 너무나도 무용함을 인정해야 하는 빌어먹을 성 불평등의 세상이다. 이를 감수할 각오가 있어야 기혼자가 된다.


  현실은 특히 여성에게 독박 육아와 강요된 모성에 놓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 현실에서 충분히 탈피할 수 있기란 어렵다. 은연 중 수긍하면서 과거로부터 답습된 잘못된 관행에 길들여지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은연 자기계발의 형태를 띠면서 흘러간다고 저자는 말한다.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했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결혼 이후 변했다. 기혼자들은 평등이라는 이론을 화석화시키고 전통적 질서, 즉 ‘기울어진 운동장’에 적응하면서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고 있었다.


  저자가 관찰한 것일 테니 ‘과도한 육아 현장의 사례’는 흥미를 돋운다. 종종 기사로 접하기도 했고 익히 들어왔고 소문으로 접하기도 했던 그 사례들을 보고 있으면 역시나 답답하다. 한국에서는 ‘맘’은 유일하게 모든 것이 통용되고 이해되는 (부정적인 의미의) 만능프리패이며 이유를 막론하고 욕을 들어먹는 벌레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코 자정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다. 부정적인 현상은 난무하는데 그대로 굳어져서 흘러가버린다. 그리고 그 자체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다.


자녀를 ‘내가’ 보호해야 한다는 범위를 넘어선 ‘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는 정말로 많다. 많은 이들이 자녀보호와 자녀소유를 혼동한다. 마치 소유권이 있으니 어떻게 보호하든 간섭하지 말라는 식이다.


  저자도 상황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지만 서두에서 말했듯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도대체 답없는 이 현상에 대해서 그저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는 방법만이 있을 뿐하다. 그러나, 누가 깨닫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냥 끊임없는 도돌이표, 뫼비우스의 띠 같기만 하다.


자녀소유는 ‘내 것’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올바른 사회적 가치에 자녀가 노출될 수 있도록 부모가 더 노력하겠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래야 내 아이 더 바르게 키우겠다는 다짐이 가능하고 내 아이 멋대로 키우겠다는 자기소유의 강박이 사라질 수 있다.


  그 노력이란 스카이캐슬과 같이 극단적인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면 형성이 되는 건가?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한데 그동안 엄마 혼자만이 아이를 키워왔기에 문제가 되었나? 육아의 책임이 엄마에게, 모성에게 짐지워진 현실에서 이 책 역시도 이 과도한 자녀소유로서의 육아방식은 엄마가 주도하는 것으로 말한다. 동조자이자 방관자는 아빠다.

  가만 생각해보면 서양에서도 ‘모성’이 강요되었다고 얘기하고 육아는 엄마에게 독박된 현실을 부르짖으며 이러한 ‘가부장제’의 가족구조의 해체를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나타나는 현실은 다르다. 물론 나라마다 형성된 사회문화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토록 심한 차이는 어떤 이유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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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의 빨간 수첩
소피아 룬드베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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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비처럼 훨훨


도리스의 빨간 수첩, 소피아 룬드베리, 문예출판사, 2018.


  도리스 알름이 세상을 떠났다. 혼자서는 먹지도, 걷지도 못하며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아흔 여섯의 할머니. 그럼에도 아흔 여섯이라면 죽음이 덜 억울할 거라 생각하기도 할 듯한 그런 나이. 눈물 흘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위로라고 건네고, 당장 죽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고 무심히 말하는 것을 듣게 되는 나이.

  간호사의 실수로 소변주머니가 터져 도리스 할머니의 온 몸에 소변이 묻는다. 하지만 간호사는 씻기지 않고 소변을 닦아 내기만 한다. 일정에 의하면 도리스 할머니가 ‘씻는’ 날이 아니기 때문에. 티슈 몇 장을 더 뽑아 닦기만 할 뿐이다. 제니가 지적한 끝에 간호사는 실수를 인정하고 할머니를 씻기지만 보호자 없는 노인은 얼마나 무심하게 다뤄질까, 생각하게 한다. “혼자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리고 아무도 혼자 죽어서는 안 돼.” 제니의 이 말이 마음을 적신다.

  아흔여섯의 도리스 할머니가 마냥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삶이 어떠했었는지를. 그러나 도리스는 자신의 삶 속에서 많은 이름들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고 그들의 삶이었다. 그녀에게 유일한 가족으로 남은 조카 제니에게 남긴 빨간 수첩을 남긴다. 모든 이름 뒤에 사망이라 적힌 수첩. “살아온 삶 전체를 바라보고 싶어” 쓴 글에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담겼다. 

  

일생 동안 너무도 많은 이름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 제니,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니? 오고 가는 그 모든 이름에 대해 말이야. 어떤 이름은 우리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또 어떤 이름은 사랑하는 이가 되거나 혹은 적이 되고. 나는 이따금 내 수첩을 들춰본단다. 수첩은 내 삶의 지도 같은 것이 되었어. 그래서 나는 네게 그것에 대해 조금 얘기하고 싶어. 너, 날 기억해줄 유일한 사람일 네가 내 삶도 함께 기억해줄 수 있도록. 일종의 유언과 같은 거지. 네게 내 기억들을 줄게. 그 기억들은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다.


  “어떤 이름은 우리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그 어떤 이름에 김복동 할머니가 있다. 28일 두 명의 위안부 할머니께서 소천하셨다. 참으로 죄송하게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름을 모두 알지 못한다. 다만 김복동 할머니의 이름만은 또렷하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을 접한 후에 모든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느껴졌는데 현재는 스물 세분이 생존해 계신단다. 마지막까지 고통스러워 하셨다기에 마음이 무겁다. 위안부로 끌려간 때는 1940년, 14살이었고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세계 곳곳으로 끌려 다닌 끝에 돌아왔을 때는 22세였다.

  도리스 할머니 또한 1939년 발발한 2차 세계대전 속에서 고향 스웨덴을 떠나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생존을 오간다. 기억 속에는 그리운 이도 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름과 끔찍하고 슬픈 일이 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벌어지는 일이 성폭력일진대 전쟁통이라면 더더욱 맹렬하게 일어났을 그 일. 그렇게 하루도 살아보지 못하고 세상에 태어난 아이를 낳은 도리스는 그런 모든 기억들을 수첩에 기록한다.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삶이었기에. 도리스의 삶에 도움을 준 이들이 없지는 않다. 그런 그들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모습들로 가득하다. 가족을 잃은 아픔, 가족과 화해하지 못하는 삶, 방황하고 우울하고, 숨어 살거나 성소수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리스는 만났다.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하는 헤어진 사랑하는 이의 이름 또한 수첩 속에 자리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 중엔 실존 인물이 있다. 실제로 작가를 돌봐 준 도리스 할머니가 수첩을 남겼고 그 수첩에 ‘사망’이라 적힌 줄이 그어진 이름들이 있었단다. 소설 속 제니는 도리스의 빨간 수첩을 보며 할머니의 삶과 조우했던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 약물중독자 엄마에게서 버림 받은 상처가득한 자신의 삶과 현재의 무기력한 삶까지도. 그러나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의 사랑을 느끼며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켜주고픈 제니의 마음은 살아 움직이고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를 찾아간다. 사랑과 용기를 북돋워 준 도리스 할머니의 힘이다.

  김복동 할머니 역시 우리에게 할머니의 수첩을 남기셨다. 끝까지 싸워달라고. 여전히 일본은 사과하지 않고 위안부 합의를 자랑스러운 치적으로 여기는 이들이 권력의 핵심부에서 당당히 ‘일본편’이라 외치고 있는 현실에서 아프게 가신 할머니의 유언. 고통스런 자신의 삶의 기억을 펼쳐놓으며 일본의 만행과 위안부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인권활동가로 활동해 오신 김복동 할머니의 사랑과 용기에 감사하며 힘을 얻은 이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새삼 어느 나라이든 100세 즈음의 노인의 삶엔 전쟁의 기억이 가득하구나 싶다. 그들 삶이 곧 근현대사의 기록이다. 급격한 세상의 변화에서 힘겹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모두,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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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 소설가가 되는 길, 소설가로 사는 길
박상우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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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키가 컸을 거야


소설가-소설가가 되는 길, 소설가로 사는 길, 박상우, 해냄, 2018.


 하루에도 수백권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모든 책들을 다 따라잡아 읽을 이유는 없음에도 어떤 날은 감격에, 어떤 날은 버거움에 벅차오르기도 한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시대, 시간 중고 거래가 활성화되는 시대, 작가 수입은 0으로 수렴해 갈 텐데도 끝없이 책들은 쏟아지고 작가 또한 탄생하고 이내 사라진다. 에세이에 대한 대중 반응은 높아가며 누구나, 저자가 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는 점은 굳이 좋지 않게 볼 이유는 없겠지만 이런 시장을 보고 있을 때마다 시인, 소설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직업으로서의 시인, 소설가들을.  


책이 많이 팔리지 않더라도 10년, 20년, 30년 묵묵히 소설가로 정진하는 사람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책을 많이 팔아 돈을 벌진 못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선 보이지 않는 재물을 쌓아가는 사람들이다. 인간과 인생의 뿌리를 들여다보며 그 스스로 뿌리가 되어가는 소설가들.


  ……그래도 경제적으로 힘들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되진 않을까. 아무리 ‘좋은 소설’을 쓰리라는 마음으로 정진한다 해도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힘겨움을 디디고서 정신의 재물이 차곡차곡 쌓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현실적인 꿈을 꾸고 실행해 가는지도 모르겠다. 

 

“나 3년 동안 노래연습 하루도 거른 적 없고, 뮤지컬 오디션도 빠짐없이 다 봤어.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건 없지만 내안에서 뭔가가 이만큼 키가 컸을 거야. 꼭 통장잔고가 늘고 취직을 해야만 발전하는 건 아니다.”  ―드라마 <메리대구 공방전> 中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귀를 뚫고 지나가는 드라마 대사, “내 안에서 뭔가가 이만큼 키가 컸을 거야.” 이 말은 머리를 때리고 심장에 묵직함을 주었다. 당장의 성과에 연연하는 것에 반성했지만 드라마가 나온 만큼의 세월이 지나서 내 안에서 ‘커진 키’보다 쌓이지 못한 통장 잔고에 집착하게 된다. 어쩌면 소설가가 못되는 이유, 또는 무언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서 커져갈 무엇을 키우는 일보다 늘어가는 숫자에 대한 욕구가 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쉬이 ‘자기 부정과 비관’에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자기 부정과 비관은 인생의 어느 분야에서도 생산적인 길을 가지 못하게 만든다.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인생이 아니라 퇴보와 정체와 나락의 삶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끊임없는 질문이자 끊이지 않는 탄식이다. 나이 한 살 더 먹는다고 해서 판단과 결단이 명쾌해지지는 않는다. 자아는 혼란에 빠지기 일쑤다. 어떻게 하면 살에서 ‘무아’에 이를 수 있을까.


어떻게 살건 문제의 관건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예술가적 삶에 최대의 적이 되는 건 말하나 마나 ‘나’라는 망상체이다. 그것과 싸워 이기지 않는 한 원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를 버리고, 부수고, 비워야 한다는 점에서 예술도 도를 닦는 행위와 하등 다를 게 없다. 2,500년 전 석가모니가 설파한 ‘무아(無我)’를 소설 창작의 정신적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섬뜩한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책은 ‘소설가’가 되는 길에 관한 글이다. 소설을 써야 소설가가 된다는 점에서 소설쓰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소설가의 자세나 소설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이 많다. 소설가로 산다는 일은 어떤 이들에겐 멋있어 보이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베스트셀러 작가는 몇몇에게 해당되는 천운이 필요한 일로 대체로 고난과 고독의 길임을 알려준다. ‘소설가’라는 제목에 맞게 소설가로서 경험을 알려주지만 굳이 소설가가 아니라 세상에 어떤 ‘꿈’을 가진 이들에게 들려주는 인생 선배의 경험담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 인생의 진로에서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 담겨 있다. 또한 소설독법에 대한 안내도 되어 있는데 소설 읽기가 어려운 이들이 참고하면 독서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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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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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파도가 왔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문학동네, 200.


  내가 느끼는 쓸쓸함과 고독, 더해진 안타까움이 자크 레니에를 향한 것인지 로맹 가리를 향한 것인지 모르겠다 싶을 즈음 책을 읽기도 전에 쓸쓸함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결론은 쉽게 지어졌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제목이 한껏 그러한 감정을 고조시켰고 ‘사람을 숨 쉬게 해주기보다는 짓눌러버리는 고독’에 가득찬 자크는 로맹 가리와 일체가 되어 버렸는데.

  열여섯 개의 이야기는 냉소와 허무를 자극했고 자크가 그러했듯 마지막까지 품었던 희미한 희망이 온전한 절망에 부딪치도록 내버려두었다. 판도라 상자 속 마지막까지 남은 희망이 저주로 귀결되어 버리는 버전인 양. 떠오르는 해에 이제 폭풍우가 끝났다 싶어 안도하는 순간 덮치는 가장 치명적인 파도라 일컫는 ‘아홉 번째 파도’, 그 또한 같다. 희망을 품지 않았다면 절망의 크기는 달라졌을 터이니.

 

하지만 그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사람을 쓰러뜨리고 뒤엎고 바닥으로 내던졌다가, 두 팔을 뻗고 두 손을 들어올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가, 지푸라기가 눈에 띄는 순간 매달릴 시간만 남겨놓고 놓아버리는, 먼 바다에서 다가오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독의 아홉번째 파도에.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유혹일 것이다.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세계의 끝, 새들이 페루의 외딴 바닷가 해변으로 찾아와 죽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전쟁, 혁명의 실패를 경험한 자크는 영혼의 위안이 되는 장소로 ‘시적이고 몽환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적막하고 고독한 그곳에서 그가 받은 위안은 깊지 않아 보인다.  새들처럼 그곳에 뛰어든 그녀는 “왜 이곳 모래언덕까지 와서 죽으려는 것인지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새”다. 이때 죽음의 이유는 곧 살아야 할 이유와 같은 말로 여겨진다. 그녀는 고독에 빠진 그를 구원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할 존재다. 그렇기에 그녀가 떠나고 희망이 사라진, 의미를 잃어버린 터전에 더 이상 남아 있을 것은 없다.

  분명 깔끔한 문체임에도 로맹 가리의 글은 마음을 질척이게 한다. 단편만큼 엽편이 가득한 이 소설집에서 연이어 인간의 양면성을 확인하고 나면 ‘인간의 성정(性情)에 민감’해진다. 끝내는 「벽-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 속 금발머리 여인이 느꼈던 것처럼 ‘삶에 대한 총체적인 혐오감’이 밀려들어온다. 어쨌든, 버티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류트」속 백작 부인이 지켜내는 외교관 남편의 명예와 권위처럼 하찮아지는 기분이다.

  백작은 사교적이지도 않은 기질에도 불구하고 외교관으로서의 직업적인 수행을 잘 이뤄낸다. 이 모든 것은 ‘모범적이고 관례적인 모든 것을 지켜내는’ 생의 동반자 아내 덕분이다. 외교관 생활을 완료하기 전에 백작은 강렬한 예술에 대한 욕구로 골동품점에서 류트를 구매하고 젊은 류트 연주가에게 레슨을 받는다. 레슨을 거듭 받는다한들 서투른 백작의 연주 솜씨는 백작의 완벽한 예술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장롱 속 류트를 꺼내와 연주하는 백작 부인.

자신의 예술혼을 묵혀둔 채 사랑하는 남편을 위한 헌신적인 아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여인의 이야기인듯 싶었던 「류트」는 묘한 의혹으로 거듭 읽게 된다.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미묘함이 과한 상상이 아닐까 싶어 백작의 행동 하나하나, 아내의 말 한마디한마디, 골동품 상점 주인의 미소를 눈여겨보게 되는 맛. 로마, 지중해, 예술가, 16세기의 류트…. 로마 시대 카이사르에게 따라다녔던 그 의혹을 부추기는 이 단어들.


마치 그가 어떤 은밀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위한 그녀의 기도는 열렬하고 간절했다. 결혼생활 삼십오 년에 아이들도 다 자랐고, 자신이 말없는 애정―내밀한 부부생활에서도 표출하지 못하는 은밀하고 고통스러운―으로 감싸고 있는 그를 아무것도 위협하지 못하게 만들며 모범적인 삶의 절정에 오른 지금까지도 그녀는, 이스탄불 페라 호텔 내에 있는 프랑스 식 소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레이스 손수건을 쥔 채, 운명이 인간의 마음속에 탄생과 동시에 장치해두곤 하는 시한폭탄이 그의 내부에서 갑자기 터지지 않게 해달라고 몇 시간이고 기도하곤 했다. 하지만 완전히 노출된 햇빛 찬란한 긴 하루처럼 평생을 천직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느릿하고 차분하게 꽃피우듯 살았을 뿐인 사람을 어떤 내적 위험이 위협할 수 있단 말인가? ― 「류트」


  오래도록 감춰뒀다가 이제 폭발한 백작의 예술성은 거듭된 류트 레슨을 통해 완벽해질 법 하지만 백작 부인의 계획 아래 잘, 감춰진다. 백작 속에 있는 예술가 기질은 류트를 연주하는 것에서는 발현되지 않을 것이니까. 서투른 남편의 류트 연주를 완벽하게 포장해주는 아내의 성실함에 경의를 표한다. 그런 아내들의 꾸준하고 경직된 성실함이 세상의 진실을 가리는데 더없는 기여를 했음이다. 남편의 지위와 명예를 곧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며 지내온 아내의 불안과 초조로 일관된 기도의 이유는 가늠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지켜가는 것이 행복인가에 대한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남편의 ‘예술성’이 폭발되지 않기를 희망하는 마음을 오직 신께만 드러냈을 백작 부인의 그 마음처럼 작가는 직접적인 단어나 묘사없이 이 코드를 그려낸다. 작가가 그려내는 대로 따라가며 그저 나는 절망하거나 냉소하거나 한번씩 웃기만 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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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20-04-10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저도 감명깊게 읽은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쓴 작가 로맹 가리에 얽힌 이야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제가 이 작가의 전기를 읽고 직접 만든 영상도 있으니,
재미삼아 한번 구경해 보세요~
https://youtu.be/vKy0n0XDJMM

모시빛 2020-04-13 12:50   좋아요 1 | URL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의 생은 참 인상적이죠.
그 생애를 풀어내는 방식 또한 그렇고요.
마침 로맹 가리의 생애가 생각나는 날이네요.
oren의 영상으로 마음을 채우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