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선구자들은 시속 36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초고속 열차만 개발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엄청난 규모의 건설계획을 통해 확장되고 있는 규모의 경제는 중국을 고가도로와 철로 건설의 기술 선도자로 만들고 있었다.

장대한 규모를 자랑했던 2008년 하계올림픽의 뒤를 이어 중국의 경기부양책의 규모와 그 진행 속도는 공산국가 특유의 뛰어난 기동성을 다시 한번 입증해주었다. 여러 서방 국가들의 지지부진한 모습과 비교하면 중국의 그런 모습에 부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버락 오바마는 후보 시절에도,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중국의 놀랄 만한 사회기반시설 건설 속도와 규모를 자주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모습들도 겉모습 아래 감춰져 있는 긴장감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사실 중국의 경기부양책은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여러 전문가들의 말처럼 서구사회의 위기를 통해 힘을 얻은 중국의 경제는 정확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분명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엄청난 규모의 정책들을 추진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문제는 이를 위한 예산이 어떻게 조달되었나 하는 것이다. 예산 조달은 모든 "경기부양책"의 핵심이다. 만일 세금을 올려 필요한 재원을 조달했다면 일반 국민들의 구매력은 전혀 올라가지 않는다. 채권 발행을 했다면 민간 부문의 저축을 흡수했다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일반 국민들이 다른 투자를 멀리할 우려가 있다. 만일 경기부양의 목적이 침체된 경제를 빠르게 다시 살려내는 것이라면 신용창조야말로 경기부양 지출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중국 당국의 경기부양책이 특별히 효과가 있었던 건 엄청난 규모의 정부 지출과 대규모 통화완화 정책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2008년의 위기를 통해 깨달은 또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중국이 수출의존형 국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서구 국가들과 서로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거란 사실이다. 중국은 많은 부분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지만 결코 고립되어 있지는 않다. 2000년대 이후 미국의 목표는 중국을 "책임감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 질문은 바뀌었다. 일련의 위기 상황에서 중국이 알고 싶었던 것은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2000년대 초반 이후 한국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려 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통화와 자본의 흐름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한국 금융업의 상당 부분을 해외 투자자들이 소유했으며 한국의 은행들은 도매금융 자금조달 방식이라는 새롭지만 불안정한 방식으로 전 세계 달러시장에서 단기로 자금을 빌려와 한국 내에서 고금리로 장기간 투자를 했다.

2008년 가을 한국이 보여준 위기 탈출 동원력은 정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철강업체 포스코나 현대자동차, 그리고 삼성전자 같은 주요 수출제조업체들은 수천만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부어 원화에 대한 압력을 늦추려고 했다. 한국 정부의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자발적으로 은행 채권을 매입해 자금조달 문제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현대건설 회장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이명박은 수입할 수밖에 없는 석유 사용을 줄이고 개인들의 달러 저축을 원화 방어에 활용하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나섰다. 환전소 앞에 길게 늘어선 국민들의 호응은 애국심의 발로인 동시에 현재 처한 상황의 급박성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한편 한국은행은 외환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원화의 붕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이런 어려움들을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했던 도움은 역시 밖으로부터 왔다. 10월 30일 한국은행은 미연준과 300억 달러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었다고 발표한다. 이를 통해 한국은행은 필요한 만큼의 달러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다극화된 세계 경제의 복잡한 현실을 반영하도록 특별히 고안된 새로운 조직의 완전한 일원이 되었다.

브라운 수상으로서는 당혹스러운 결과였지만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 재무부 장관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목소리로 반대의견을 냈다. 독일과 프랑스는 대규모 경기부양책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소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뿐더러 좀 더 중요한 국제적 현안들을 뒤로 미루기 위해 이용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미국의 시장에서의 행위들이 이제 세계 경제로 시선이 옮아감에 따라 비난의 화살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다." 미국은 다른 국가들의 무역수지 흑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지 위기에 빠진 자국 은행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싶었던 것이다.

금융위기로 국제금융에 대한 달러화의 영향력이 약해지기는커녕 실제로는 더 강해졌던 것이다. 통화시장에서 안전자산으로서의 미국 재무부 채권에 대한 수요 덕분에 달러화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연준은 통화스와프 협정을 통해 모든 글로벌 은행시스템의 유동성 공급을 뒷받침했다.

2008년과 2010년 사이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사용된 지출 내역은 총 1조 8700억 달러 혹은 구매력지수 환산으로 2조 4000억 달러에 달한다. 그것도 재량 지출과 긴급 조세 감면 조치만 계산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5조 달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러한 지출이 어떻게 분배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계산하든 금융위기에 대해 가장 극적으로 대응한 곳은 역시 아시아와 신흥시장국가들이었다. 러시아와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브라질, 아르헨티나는 이제는 정말로 실질적인 재정정책 대응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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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연준의 책임자인 팀 가이트너가 정리해서 전달한 요구사항들에 따르면 9대 은행 모두는 정부 자본에 의한 지분 참여를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야 했다. 또한 정부의 지분은 우선주가 될 것이었다. 정부가 요구하는 배당률은 처음에는 낮지만 5년 후에는 높아지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은행이 빨리 정부 지분을 상환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정부의 자본 투입을 승인하는 대가로 은행들의 모든 당좌거래에 대해 FDIC가 보증을 서며 또 2009년 여름까지 발행하는 모든 신규 채권에 대해서는 2009년 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채권의 125퍼센트까지 보증해주기로 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정부의 지분 참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FDIC의 어떤 보증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건 대형 일반 시중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예상을 깨고 리먼브라더스가 아닌 메릴린치의 구원 투수로 나섰다는 사실이다.

메릴린치는 리먼브라더스보다 덩치가 더 컸으며 부동산 대출상품과도 너무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또한 리먼브라더스와 마찬가지로 투자은행으로서 Repo 시장이 없이는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메릴린치로서는 리먼브라더스가 무너지면 그다음 차례가 될 것이 거의 확실했다.28 그렇지만 리먼브라더스와는 달리 메릴린치의 경영진은 민첩하게 대응했고 뱅크오브아메리카와 직접적인 대화에 나섬으로써 회사를 구해낼 수 있었다.

공화당 하원의원의 3분의 1은 더 이상의 구제금융 지원을 적극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력을 얻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고 3분의 1은 지지기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쪽은 금융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지는 길이며 다른 한쪽은 납세자들의 파산과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런데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 24시간 안에 대답하라는 것이었다." 텍사스주 출신으로 보수 성향의 공화당연구위원회(Republican Study Committee)를 이끌고 있던 젭 헨설링(Jeb Hensarling)이 기자들에게 분개해서 내뱉은 말이다.

그런데 독일은 왜 그렇게 비협조적이었을까? 결국 독일도 공동기금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취약은행을 비슷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독일의 납세자들이 독일이든 외국이든 자기들과 상관없는 문제에 세금을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이 그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메르켈 총리에게서 독자적 문제 해결과 공동 해결의 차이는 단지 유럽과 미국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유럽연합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프레임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독일 정부는 은행들을 구하겠다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는 그런 일은 지지할 생각이 없었다.

은행 관계자들과 재무부 관료들이 고민한 문제는 정부의 지원금을 받는 자본재구성 계획을 즉시 강제로 시행할 것인가, 또 만일 그렇게 할 경우 시장이 받는 충격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자본재구성을 천천히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더 유리할까? 위기에 빠져 있는 은행들은 아마도 끝까지 이를 거부할 것이 분명했다. 어떤 은행도 국가의 간섭을 받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붕괴가 목전까지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은행들은 여전히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인지 저울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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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개입을 불러들인 건 금융시스템 자체의 오작동과 개별 기업들의 실패가 경제 전반에 걸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아낼 수 없었던 불가항력적 상황이었다

전투를 위해 동원된 금융 화력이 너무나 엄청나서 이에 대한 해명은 그 자체로 정치 논쟁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기준을 적용하건 상관없이 그 규모가 전례 없이 거대하고 엄청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 전투에 투입된 자금은 7조 달러를 넘어섰다고 한다.

국가와 정부가 개입한 주요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1) 은행에 대출 형태로 자금 지원 (2) 자본재구성(recapitalization) (3) 자산매입 (4) 은행예금, 채무 혹은 심지어 은행의 대차대조표 전체에 대한 정부의 보증. 위기가 발생한 모든 곳에 대해 각국 정부는 이 네 가지 방식을 몇 가지로 결합해 적용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관계된 기관은 중앙은행과 재무부, 그리고 금융 규제 감독청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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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소년 2022-10-23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나요

2022-10-23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커피소년 2022-10-23 22:23   좋아요 0 | URL
겨호님과의 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2022-10-24 0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경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우선 인구부터 4500만 명이 넘었고 경제 규모나 흑해(Black Sea)에서의 전략적 위치, 또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온 역사적 중요성과 가치를 생각하면 우크라이나의 서방측 동맹군 참여는 러시아로서는 뼈아픈 한 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 당시는 공교롭게도 푸틴 대통령이 이런 서방을 향한 쏠림 현상의 차단 의지를 공식적으로 피력한 시점이었다.

2008년이 흘러가는 동안 러시아는 자신이 보유한 1000억 달러 규모의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채권을 시장에 풀어놓는다. 로이터통신의 보도처럼 이런 결단이 내려진 것은 주로 국내 정치사정 때문이었다.54 "위험한 투자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 일부 러시아 언론과 국민의 적대감이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2008년 여름이 되자 비단 러시아 민족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미국의 모기지 증권을 위험한 투자로 보는 시각이 많아졌다. 모기지 대출 위기의 중심에는 정부보증기관(GSE)이 있었고 이 GSE의 눈앞에는 엄청난 실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의 애국시민들은 지금까지 러시아의 국익 문제를 노골적으로 경멸해온 미국을 지원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는 사이 투자금은 안전한 투자처를 찾아 계속해서 대차대조표상에서 빠져나갔고 업계의 다른 분야나 상품들에서도 자금이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에서 일반 은행과 투자은행, 헤지펀드, MMF 등이 대형 사업체들에 공동으로 대출해주는, 즉 이른바 신디케이트론(syndicated loans)의 규모는 2007년 2/4분기에는 7020억 달러였지만 2008년 4/4분기에는 1500억 달러로 엄청나게 주저앉고 말았다.

유럽에서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훗날 있었던 유로존 파산 사태가 아닌 2008년의 위기가 바로 투자와 소비의 심각한 위축과 실업 사태를 만들어냈다. 2007년 하반기부터 독일과 프랑스, 영국, 스위스, 그리고 베네룩스 3국의 크고 작은 은행은 자신이 입은 손실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깨닫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대출 부문이 주저앉았다. 금융 분야가 맨 먼저 타격을 받은 건 그들이 매일 일어나는 방대한 규모의 신용 거래에 가장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융업과 관련이 없는 일반 기업과 가계로 위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주택시장의 위기와 함께 2008년의 미국 경제도 크게 침체되었는데 거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소비 침체였다. 소비 수요가 줄어드니 당연히 생산과 공급이 줄고 실업 문제가 발생했다.46 캘리포니아주 중앙부의 센트럴밸리(Central Valley)의 경우 주택 가격이 반 토막 났을뿐더러 소비도 30퍼센트 줄어들었다.47 급하지 않은 지출은 모두 다 뒤로 미뤘다.

2008년의 금융시장 붕괴를 이토록 심각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정도를 넘어서는 세계 경제의 예외적인 글로벌 동기화였다. 세계무역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104개 국가가 한 곳도 빠지지 않고 2008년 하반기에서 2009년 전반기 사이 모두 똑같이 수입과 수출 감소 현상을 겪었다고 한다. 모든 국가와 모든 종류의 교역 상품이 하나도 예외 없이 경기침체를 겪은 것이다.

제조업 분야가 받은 충격은 수출하는 자동차나 혹은 휴대전화기의 수량 과 관련된 교역량의 감소였으며, 원자재 관련 분야가 받은 충격은 바로 가격 하락이었다.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크게 고통받은 사람들은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없는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뉴욕의 경우 2009년이 계층 사람들의 실업률은 50퍼센트를 웃돌았다.70 전 세계를 기준으로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는지는 엄청나게 많은 중국 내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추정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쨌든 합리적으로 추론할 경우 대략 전 세계적으로 2700만 명에서 4000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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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의 모든 관심은 전 세계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노동력을 창출하고 공동의 재정 규율과 기준을 확립하는 데 쏠려 있었지만 글로벌 금융에 의해 야기된 불안정한 위협의 분위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럽중앙은행의 기본 취지는 다양한 보호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며 그 안에서 논의되는 내용들은 최소한의 투명성 요구만 충족시켜주면 공개적인 감시나 조사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이 중앙은행이 단순히 재정정책의 수단처럼 움직이는 것을 막기 위해 새롭게 발행하는 정부 채권을 거래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물가 안정과 고용 극대화라는 두 위임 책무(dual mandate)
를 부여받은 연준과는 다르게 유럽중앙은행은 오직 물가 안정만을 목표로 삼았다.

사실 유로존 위기의 배경에는 엄청나게 늘어난 채무가 있었지만 그 채무는 민간 부문의 채무였지 공공 부문의 채무는 아니었다. 유로존은 북대서양을 중심으로 한 경제에서 유럽 은행들이 대단히 적극적으로 기여한 시장 주도의 신용창조 과정과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 것이다.

나중에야 나온 이야기지만 유럽중앙은행은 아일랜드와 스페인의 지나친 경제호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유로존 전체에서 금리를 하나로 고정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더 어려워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상 유럽중앙은행은 금리를 낮게 설정함으로써 주변 국가들의 경제 호황을 억제하기보다는 독일 경제 부양의 필요성을 더 우선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유럽의 야망은 완전 고용을 최우선시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의 완성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거기에 "사회적 배제와 차별"에 대항해 싸우는 만큼이나 "사회정의"와 "세대간 연대"를 추구하며 동시에 "경쟁력 높은" 사회가 될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NATO와 유럽연합이 동쪽으로 그 세력을 확대하고 눈앞의 위기를 우선 진정시키며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고 지정학적 지도를 영구히 다시 그리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바로 이런 사정들이 있었다. 유럽연합과 NATO의 세력이 두 배 이상 확장되었던 건 서로 협력한 결과가 아니었으며 미국과 독일, 프랑스 정부의 개입 못지않게 동유럽이 자초한 부분도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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