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기야 <협상의 법칙>이라는 책을 주문했다.

유시민은 그 유명한 항소 이유서에 이런 말을 썼다고 한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서로 믿고 양보하는 사회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푸근했던 열 아홉살의 소녀가 O 년이 지난 지금 급기야 <협상의 법칙>이란 책을 주문하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녀가 포악한 아가씨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계산적인 깍쟁이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오늘 친구, 선배 여섯명과 술을 먹는데,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현재 사는 집이 3월 2일에 계약기간이 끝나는데, 오늘 급하게 집을 찾는 사람이 있어 당장 내일 이사를 들어와야겠다는 것이다. 방이 두 칸이니까, 불편하지만 새로 이사들어오는 사람과 같이 집을 쓰고, 방을 빨리 구해서 나가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이 되어 전화를 잠시 끊고 같이 술 마시던 친구들에게 물어봤다. 다들 흥분해서 난리를 쳤다. 말도 안된다, 왜 네가 그런 양보를 해야 하냐, 물어볼 것도 없이 너는 'No' 를 했어야 한다.

다시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그렇게 하기 힘들다.. 난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집을 알아볼 여유를 갖고 싶고, 낯선 사람들과 집을 같이 쓰고 싶지 않다고 얘길 했다. 그러자 (공포의) 집주인이 다시 나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그간에 정도 있고... OO씨도 알다시피 오랫동안 집을 내놨지만 안빠지지 않았느냐... 한 일 주일만 불편하더라도 양해를 해주라. 이번달 방값은 오늘치까지만 받겠다..."

난 계속 이건 아닌데 싶었지만, 아줌마의 논리정연한 말빨과 협박, 회유에 못 이겨 '알았어요'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옆에서 듣던 친구가 혈압이 올랐다. '병신' 같이 제대로 말도 못한다고 나를 다그쳤다. -.- 싸움 하나라면 자신 있는 그 친구.. 아줌마한테 바로 전화했다. 그랬더니 이미 아줌마는 들어올 세입자와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놓은 상태였다.

"저, 아무개 친언닌데요. 아줌마..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어쩌구, 저쩌구..."

결국 승리는 내 친구의 것이 되었다. 집주인이 내가 나갈 때까지 들어올 세입자의 거처를 마련해 주기로 한 것이다. 난 친구의 커다란 담과, 논리정연함, 말의 속도와 감탄사, 높낮이로 조절하는 능한 심리전술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싸우질 못해 당하기만 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뭐, 이건 때문에 협상의 법칙을 주문한 건 아니다. 내가 맡은 회사일 때문에 그러한 스킬이 요구되던 참에, 오늘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을 기회가 생겼던 거다.

그렇게...

한때 경제경영 / 자기계발서는 모두 '쓰레기'라고 여겼던 온순하고 정의로운 인간이 지금은 경제경영 / 자기계발서를 주로 읽는 고도의 현실감각의 소유자(-.-)가 되었다. 밥을 먹고 산다는 건, 이렇게 버겁고도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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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리릿 2004-02-15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주인 아주머니께서 상당히 인정에 약하신가보군여. 원래 인정에 약하다보면 이성과 합리는 조금 양보되는 면이 있죠.
여튼... 클 날뻔 했수다. 어찌 모르는 사람과 1주일간이라도 동거.. ㅠ.ㅠ 주인집 아주머니의 발상의 전환이 정말 대단해요~!
저야.. 만약.. 우리 주인집 아주머니가 "딱한 사정이 있는 참한 아가씨인데.. 1주일만.. 같이 쓰시라"고 하면.. "이러시면 안되는데.."하면서 방을 닦지요... 라고 할줄 알았죠? 저도 no입니다.
여튼.. <협상의 법칙> 다시 한번 숙독을 하시고 알라딘이 협상에서 100전 90승 정도는 하게 잘 부탁드립니다. ^^

sunnyside 2004-02-15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들어올 세입자들의 짐이 제 큰 방에 들어왔답니다. -.- 아줌마는 밉지만 (그 아줌마 정~말 깍쟁예요), 들어올 사람들이 딱하니까.. (우짜다 울 아줌마한테 걸려가지구는...)

2004-02-16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대/공/감... ㅡ_ㅡv
 

[일간스포츠 김가희 기자.이영준 기자] 이승연 '위안부' 누드 프로젝트가 강행된다. 더욱이 2차 프로젝트는 이승연이 일본 기생인 '게이샤'로 등장하는 컨셉트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있는 ㈜로토토와 ㈜네띠앙 엔터테인먼트 측은 "대중들이 이번 프로젝트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다. 19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진행될 2차 촬영도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다"고 밝혔다.

=> '대중'을 '예술'도 모르는 무식쟁이 취급하시겠다? 자기들이 하는 짓은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예술 행위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것인가?

네띠앙 엔터테인먼트 박지우 경영기획부 이사는 파문이 일어난 다음날인 13일 "3월 동영상 및 화보집 발간 역시 계획대로 추진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박 이사는 "기자회견 후 여론이 악화됐지만 이승연 씨도 애초의 기획의도가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라며, 마지막까지 제작 과정을 지켜본다면 오해가 풀릴 것이기 때문에 계속 진행시키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회사 측이 밝힌 2차 촬영 내용은 종전 후 은장도로 자결을 시도한 이승연이 살아 남아 일본 기생인 '게이샤'로 살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어 더욱 논란이 일 전망이다. 네팔에서 진행될 3차 촬영은 '화해'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전했다.

=> 더더욱 어이 없는 2차, 3차 촬영... '은장도.. 자결'이라니 이 인간들이 정말 하늘이 무서운줄 모르는구나. 종군위안부 문제를 처녀의 정조라는 비뚤어진 시각에서 보지 않는 한, 이따위 발상이 나올 수가 없다. 

'화해'? 어떠한 제대로 된 사죄도 보상도 없었는데, 누가 무슨 권리로 화해를 한단 말인가? 

로토토와 이승연 측은 "만약 수익성만 생각했다면 굳이 위안부 문제를 건드렸겠는가. 누드로 돈만 벌려고 했다면 예쁜 모습을 찍지 다큐멘터리로 찍을 이유가 없다. 대중들의 심정은 잘 알지만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승연 역시 누드집이 아닌 의미 있는 화보집이라고 여기는 자신의 뜻이 왜곡 전달돼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하도 누드를 많이 찍어들 대니까, '예쁜 모습'만으로는 더 이상 돈이 안된다고 판단했겠지... 기왕 찍는거 확 이슈몰이를 해서 고'수익성'을 보장받으려고 이런 짓을 벌였겠지... '대중들의 심정을 알'어? 이렇게 한탄스럽고, 절망적인 심정을 니들이 진정 알어?

종군 위안부 관련 시민 단체와 대중들의 반발에 대해 '당혹스럽다'고 표현하면서 이른 시일 내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갈 것임을 밝혔다. 네띠앙 측은 "기자회견 후 (이)승연 씨가 하루라도 빨리 할머니들을 찾아뵙자고 제안했다. 일정 조정을 가능한 한 빨리 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 이제서야 찾아가시겠다... 그렇지 않아도, 할머니들이 얘길 하시더라... 한번 찾아온 적도 없는 것들이 저렇게 입에 발린 소리를 해대니 더 화가 난다고..

네띠앙 측은 여론의 질타에 대해 "영화 실미도 가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예술 작품이듯, 이번 프로젝트 역시 아픈 역사를 다룬 예술품이다. 화보집을 예술 작품이라고 보지 않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동영상 역시 돈만 벌려고 했으면 6??카메라만 가져 가면 되지만 CF 감독이 왜 촬영했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할머니들이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한들 일본인들이 까딱이나 하겠느냐. 이승연 씨가 의미있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슈를 만들기 위해 했다면 우리 스스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실미도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상업영화고, 니들이 만든다는 화보집은 역사적 사건을 악용하고, 찢어갈긴 폭력 그 자체다. 

할머니들이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한들 일본인들이 까딱도 안할 수 있지만, 이승연의 화보집을 본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비웃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정신대 관련 시민 단체와의 법적 충돌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동영상과 화보집 강행하는 것은 제도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노출 장면이 있을 경우 '19세 이상 관람가' 표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관련 단체에서 프로젝트 강행시 법적 조치를 취하기로 해 충돌이 예상된다. 이들은 로토토와 이승연 측에서 누드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분명 위안부 문제를 이용한 상업적 행위라고 판단하고 있다.

=> '법적조치' 취하기 전에 '물리적 조치'로 손 봐주고 싶다. 

정대협 등 종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강행시 상영금지 및 출간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민.형사상 조치를 취할 태세다. 이에 대해 박 이사는 "우린 이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일본으로부터 항의를 받을 줄 알았다. 국내에서 이렇게까지 논란이 일 줄 몰랐다. 마지막 촬영까지 지켜봐 달라"고만 말했다.

=> 끝까지 할말을 잃지 않은 대단한 '박이사' 양반... 그쯤 하시고, 모든 프로젝트를 철회하시오. 마지막 촬영까지 지켜볼 인내심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오..

19일 이승연 일행이 1주일 일정으로 일본으로 출국할 때까지 분노한 여론이 이들이 원하는 대로 바뀌어 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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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side 2004-02-1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다 지나고 보니 13일의 금요일이라던데, 그래서 이렇게 흉흉한 일이 벌어진 걸까요? 에흐...

waho 2004-02-1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에 팔아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미친거지...곱게 미쳐야지...다 늙어서 똥독보다 무섭다는 그 돈독에 올라서...더럽다는 말 밖에

마태우스 2004-02-14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잘 쓰셔서 제가 추천했어요! 님을 국회로!

찌리릿 2004-02-15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연과 기획사가 왜 이랬을까요?
이들이 역사 의식이 부족, 아니 대중들이 갖고 있는 역사의식 자체를 너무 가볍게 봤거나 역사의식이 아예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자회견이나 입장 밝힐 때 하는 말 보면... 이렇게 크게 논란이 증폭될지 모르고, 얕게 준비한 멘트임이 금방 드러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죠.
누드가 워낙 많다보니, 튀기는 튀어야겠고, '약간의 부정적인 이슈'가 사회적인 논란이 되면 확실히 튀겠구나.. 하는 얕은 수를 쓴 것이겠죠.
아픈 역사적 사실의 하나인 위안부와 어떻게 미화를 하더라도 성적 만족을 위한 누드를 결합하고자했는지, 연예인 누드를 몇번 본 저로서도 이해가 안가네요.
이승연&기획사의 역사의식과 그들의 대응태도는 논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치밀&교묘'하지 못하고 '그냥 무식'해서 그런 그들을 보면... 우리 연예 기획사의 수준이 한심스럽기도 합니다.

sunnyside 2004-02-1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자요. 무식해서일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고것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하도 어이가 없고 당당해서... 용감한건지 무식한건지 잘 구분이 안갔었죠.
 

아침부터 날 분노케 하는 기사 땜에 기분이 드럽다.

위안부 누드라고?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상업적 목적 없었다" "그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잃어버린 가치를 생각하는 기회..." "애국자는 아니지만 그곳에서 내내 눈물이 나..."

뚫린 입이라고 아무말이나 지껄여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나부다. 이런 것들은 굴비 엮듯 한 줄로 엮어놓고 재봉틀로 입을 박아버려야 한다. 

더 두려운건 이노무 영상 프로젝트니 뭐니 하는게 성공을 해서 이 천인공노할 XX 들이 돈을 왕창 벌어들이는 거다. 만약, 만약 그런 날이 오면 (안 그래도 썩 맘에 들지 않는) 이 나라 구석에서 산다는게 너무 절망적일 것 같다. 오늘 아침처럼...

우리 회사 남자 직원들부터 계몽을 시켜야겠다. (설마 이 '위안부 누드'를 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건 아니라고, 정말 아니라고... 아직도 살아계신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을 두 번 죽이는 (농담 아님 -.-) 그런 죄악은 짓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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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a 2004-02-13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기사는 보지 못했지만, 정말 별 나쁜 놈들이 다 있군요.....

Smila 2004-02-13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기사를 보았답니다. 전 무슨 이류 에로영화 제작자들이 한 짓인가 했더니, 이승연이랑 제법 큰 기획사에서 이런 황당한 짓을 벌였군요. 정말 제정신들인지....

sunnyside 2004-02-13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히 모바일 컨텐츠 서비스를 하기로 한 LGT, KTF, SKT 에서 서비스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네요. 여론이 만만치 않으니까 뒤늦게 발을 뺀 것일 테지만.. 암튼 이번 건 모의한 애들한테는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waho 2004-02-13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바일 서비스 중단은 그나마 반가운 결정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썪어도 건드려선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인터뷰 때 당당함을 보고 경악했읍니다. 독도 문제 또한 가볍게 상술로 이용하려 하는 듯 해서 씁슬하네요

조선인 2004-02-24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네티즌들의 작은 힘이 모여 최악의 결말은 피할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해요. 아예 없었으면 제일 좋았을 사건이지만 ㅠ.ㅠ
 

그야말로 내가 '환장'하며 보는 자연 다큐멘터리, 그 중에서도 특히 생태 다큐멘터리를 이번 설에도 TV에서 볼 수 있었다. KBS 1 에서 오전 11시경에 방영한 '신년특집, 지구환경대기행 삼부작'이 그것이다.

첫날 부침개를 만드느라 러시아 캄차카 편을 놓치고, 둘째날 순다 편과 셋째날 아오테아로아 편을 보았는데.. (설겆이를 제쳐두고!) 역시나 보는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의 순다 열도와 뉴질랜드(뉴질랜드를 '길고 흰 구름의 나라'라는 의미의 마오리어인 '아오테아로아'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희귀 생물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두 나라는 비슷했지만, 살펴보면 큰 차이가 있었다.

순다 열도는 적도 생물의 마지막 낙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전세계 생물종 17%가 서식하는 풍부한 생물 다양성을 자랑한다. 바닷속엔 온갖 기묘한 물고기와 조개, 산호초들이, 뭍에는 원숭이, 오랑우탄, 악어, 코모도 등 수많은 생물종들이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한편 뉴질랜드는 과거 대륙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부터 약 800년 전까지 포유류가 없었다. 대륙에서 그 거리가 상당하였던 관계로 과거의 뉴질랜드엔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조류들만이 서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조류들은 자신들이 당도한 섬에 천적이 없었기에 날아서 도망갈 필요가 없었고, 먹이는 풀이나 벌레면 그만이었으므로 먹이감을 구해 멀이 갈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뉴질랜드의 새들은 점점 몸집이 커졌으며 다리는 굵고 튼튼해졌다. 또한 날개는 퇴화되어 비행이라는 본래의 목적에는 맞지 않게 되어버렸다. 심지어 키가 3m, 몸무게 200kg에 이르는 거대한 새(역시 날 수 없는)가 불과 몇 백년 전까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오테아로아'는 날 수 없는 새들의 천국이 된 것이다.

결국 두 곳의 환경은 생물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극과 극이었던 셈이다. 순다 열도 생물들의 다양함과 기기묘묘함은 치열한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산호초와 똑같은 생김으로 자신의 몸을 변형시킨 물고기, 주위 환경에 따라 몸색깔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오징어, 높다란 나무 위에서 재주 넘는 긴코 원숭이들은 포식자가 득실한 환경 속에서 종을 유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여왔고,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반면 뉴질랜드의 날지 않는 새들은 천하태평 걱정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풀이 돋아 있고, 사랑하는 달링과 귀여운 자식들은 둥지에서 아비를 기다린다. 그래서 삼년에 한 번, 단 하나의 알을 낳는 새들도 종족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인간과 함께 들어온 담비, 족제비 같은 포유류 때문에 이러한 새들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당연히도 난 순다 열도의 화려함보다도 뉴질랜드의 순박한 새들에게 더 정이 갔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외양을 바꾸고 재주를 키워온 순다의 동물들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마치 중국 서커스단의 소녀가 도저히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을 것 같은 자세로 묘기를 부릴 때 신기하기보다는 '얼마나 고되게 훈련을 했으면.. 얼마나 혼나면서 배웠으면 저런 묘기를 부릴 수 있는 걸까?..'생각하며 안쓰러웠던 기억과 비슷하다.

뭐, 우리 사는 것도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으리라. 살아 남아라, 이겨라, 자신만의 전문성을 키워라,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루에도 수없이 우리를 생존경쟁에 몰아넣는 외침들에 우리는 점점 제 몸 색깔을 바꾸는 물고기처럼 그렇게 본래의 자기 모습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휴... 그래서 난 자연 다큐멘터리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면서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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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은 오만하고 영악한 것이어서 날아갈 듯한 희열 속에서도 그 순간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려 슬퍼하고, 가장 아득한 불안 속에서도 그것을 훗날 그리워하리라고 예감한다.

-- 김혜리, 씨네21 2004.1.6

적어도 지금 나에겐 위안이 되는 글이었다. 날아갈 듯한 희열보다 아득한 불안이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일까? 훗날 그리워할 오늘을 살고 있다면, 그렇게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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