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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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다 보면 읽고 있는 책이 나랑 맞는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내 경우는 첫 만남에서 아무런 삘도 받지 못했을 때 칼같이 손절하는 편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예외인 경우가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거다. 소개팅에 나온 저 시시껄렁한 상대한테서 알 수 없는 태평함과 여유로움이 막 느껴진단 말이지. 어쩐지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좀 아쉬워. 그래서 모른척하고 기회를 줘봤더니 과연 내 직감에 딱 적중했지 뭐겠어. 이런 식으로 리스트업 해둔 작가 중 하나가 프랑수아즈 사강이다. 앞전에 읽은 <한 달 후, 일 년 후>가 라이트한 일본 문학에 가까워서 적잖이 실망했더랬다. 헌데 요상하게 문장 곳곳에 뼈가 있어가지고 이건 또 뭐냐 싶어서 한 권 더 읽어봤더니 결과는 대만족쓰. 이번 건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에스프레소였어.


<한 달 후, 일 년 후>의 재탕이라 해도 될 만큼 설정이 똑같았다. 사교모임을 즐기는 남녀들의 뺏고 뺏기는 사랑 이야기.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면 별 다섯 개는 거뜬히 주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재탕이어서 별 하나 뺐다. 이번에도 비슷한 류의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중 나이차가 있는 연상의 애인을 둔 남녀가 사교모임에서 눈이 맞는다. 그러나 이들은 유명인의 공식 애인인지라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하여 숨 막히는 비밀 연애를 병행하다 결국 커플이 되어 사교계를 떠난다. 그리고 얼마 못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삐걱대기 시작한다. 부자 애인에게 빨대 꽂았던 생활 방식에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탓이었다.


<한 달 후, 일 년 후>와 똑같다면서 왜 높은 점수를 줬냐면, 이 책에는 풀이 과정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앞전에 읽었던 건 온통 문제하고 답밖에 없었으니까. 프레임이 자꾸만 끊어지던 그 책에 비하면 이 책은 얼마나 친절하고 상냥한지. 한 가지 더. 이번에는 딱 주인공 두 사람끼리만 스파크가 일어난다. 곁가지가 좀 있긴 한데 거의 둘만의 내용이라서 전개도 깔끔하고 주제도 명확했다. 비교는 이쯤 해두고, 작품을 논하기 전에 문란한 캐릭터를 즐겨 쓰는 저자의 정신세계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다. 술-담배-약물 중독은 기본이요, 스포츠카 사고에 요트 사고, 카지노 죽순이에 도박으로 재산 탕진 등등, 급이 다른 저자의 비행 앞에 전 국민이 떠들썩했더랬다. 사강은 제 기분을 표출함에 있어 몸 사리질 않았으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에 굉장히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허황된 환상보다 날것의 고독을 쫓았다는 걸로도 유명하다. 여하튼 그 불안한 사상과 자유가 도덕적 관념을 깨뜨리는 문학 작품으로 이어지면서, 쉬쉬해오던 사회적 금기사항들을 대중화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이렇듯 사강이 꺼림직한 문장을 쓰고도 살아남은 건, 독자들의 은밀한 욕망을 어루만져 준 문화충격 반항아였기 때문이지 싶다. 단짠단짠의 아이콘이랄까.


사강의 캐릭터들은 꼭 하루살이 같다. 내일은 생각지 않고 오늘만을 살아간다. 주인공 두 남녀는 자신들의 썸씽이 사교계에서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를 알았으면서도 그저 본능에만 충실한다. 갈수록 양심은 희석되고, 서로를 탐하고 소유하는 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두 사람. 그래 그렇지, 남이 끓인 라면은 무조건 맛있는 법이거든. 정작 주변인들은 이들의 불장난을 눈치채고도 그저 방관한다. 자신들의 평판이 바닥난 것을 정녕 모르는 건지, 아님 모른 체 하는 건지. 아무튼 본격적인 서민생활과 함께 멘탈이 털린 이들의 코믹 쇼가 펼쳐진다. 돈에는 욕심 없는 남주와, 돈에만 관심 있는 여주는 몇 번의 시행착오로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님을 겨우 알게 된다. 여주의 속물근성을 보고도 반했던 남주는 이제 와서 일 안 하고 돈만 밝히는 그녀에게 실망한다. 그리고 고생길 훤한대도 가난한 남주를 택했던 여주는 뻔뻔하게 전 애인을 찾아가 도움을 받는다. 그걸 또 받아주는 전 애인도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던 사강 언니, 대체 어떤 삶을 사셨던 검까...


그렇게 여주는 전 애인에게로 돌아간다. 이별 후에야 비로소 자신한테 확신을 갖게 되는데, 그녀는 단조로운 일상 말고 속물대로 살 때라야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있었다. 손가락질 받을지언정 지금 이 모습이야말로 자신의 본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거짓된 삶을 연기하다 튕겨져 나가는 것보단 나을 테지. 저자도 이런 생각으로 자기 파괴적인 마인드를 고집했으리라. 사강을 보고 있으면 1급수에서 살 수 없는 물고기처럼 느껴진다. 근데 또 탁한 물에 사는 물고기가 더 맛있긴 하거든. 그 맛을 잘 아니까 독자들이 계속 사강을 읽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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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29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옷 이거 재미있겠는데요? 오오.. 여기요, 150원.

물감 2023-05-29 10:39   좋아요 0 | URL
으잉? 다락방님 사강 책 다 읽으신 줄ㅋㅋㅋ 이책 강추합니다. 재밌어요😎

다락방 2023-05-29 11:02   좋아요 1 | URL
아뇨 저는 한두권 읽고 저 쪽에 밀어둔 작가입니다 ㅋㅋㅋㅋㅋ

물감 2023-05-29 11:15   좋아요 1 | URL
저는 아니 에르노보다 사강에게 한 표 던집니다 ㅋㅋㅋ
(이래놓고 또 실망하면 안되는 데....)

얄라알라 2023-05-29 17:57   좋아요 1 | URL
사강은 알라딘 책덕후분들 사이에서 꾸준히 다시 듣게 되는 존함입니다만
아직 저는 이름 들어본 작가의 영역으로만 남기고 있어 죄송하네요

에스프레소 강도라니!^^ 물감님의 평을, 혹 이 책 올해 안에 읽게 된다면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물감 2023-05-29 18:03   좋아요 1 | URL
왜 저는 사강 보다 에르노를 더 많이 본 것 같죠? 상 타서 그런건가ㅋㅋㅋ 여튼 적당히 자극적이고 좋습니당. 읽어보세요🙂

새파랑 2023-05-29 16: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천원 이었나요? 😑 그래도 별 넷이라니 다행입니다~!!
전 아니에르노 보다 사강입니다~!!

물감 2023-05-29 16:53   좋아요 1 | URL
ㅋㅋㅋ 삼세번의 기회를 주는 작가가 있고 곧바로 손절하는 작가가 있고 그렇습니다.
다행히 사강은 재밌는 작가였어요! 여기도 후에 전작을 읽어볼까 해요 ㅋㅋ
새파랑 님도 아니 여사 보다 사강 언니파!!!!!

얄라알라 2023-05-29 17:57   좋아요 2 | URL
글쵸! 사강하면 새파랑님 자동 떠오릅니다요!

물감 2023-05-29 18:00   좋아요 2 | URL
오 새파랑 님이 그정도였나요? 저한테도 연상되는 작가가 있었으면 좋겠네요ㅎㅎㅎ

새파랑 2023-05-29 18:10   좋아요 1 | URL
앗 ㅋ제가 사강 책을 많이 읽기는 하긴 했는데 그정도는 아닌거 같습니다 ㅡㅡ

coolcat329 2023-05-29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에게 사강이 이런 작가였군요. 모든 리뷰가 재미나지만 이번 글 참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읽었네요.
사강 책은 브람스...만 읽어봤는데 저는 사랑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 책은 기회되면 읽어보고 싶네요~

물감 2023-05-29 16:41   좋아요 2 | URL
전 절대 나쁜 여자 취향이 아닌데 이상하게 끌리는 거 있죠?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ㅋㅋㅋ 저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인생에 굴곡이 좀 있고 그래야 보는 맛이 있으니깐요. 이 책 강추합니다ㅋㅋ

잠자냥 2023-05-29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강은 읽다보면 질려서(도돌이표 같은 ㅋㅋ) 이제 그만 읽자, 하고 녹생광선에서 나온 책 중 유일하게 안 읽은 게 이 작품인데(심지어 도서관에서 2번이나 빌렸다가 2번 다 그냥 반납) 이 작품까지는 언젠가 읽어야겠군요….

물감 2023-05-29 23:40   좋아요 1 | URL
앗 도돌이표라! 그렇담 연달아 읽는 건 피해야겠네요ㅋㅋㅋ여튼 즐건 독서였습니다😀😀😀

잠자냥 2023-06-08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달의 당선작까지 되었어!

물감 2023-06-08 12:39   좋아요 1 | URL
따란! °_°v
 
한 달 후, 일 년 후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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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사강 책이나 파볼까 싶어 아무거나 골랐는데 어머나 세상에 완전 꽝이었다지 뭐니. 소문이 자자했던 사강 언니 신드롬을 구경할 기회가 전혀 없었어. 아니 핑크핑크한 책들은 왜 꼭 모 아니면 도인가 몰라? 일단 읽었으니 기록은 남기겠는데 사실 제대로 이해하지도 않은 상태야. 내용이 어렵다기보다 글쎄, 프랑스 정서와 맞지 않는 탓이 크겠네. 솔직히 내용도 좀 거시기해. 여러 남녀의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지저분한 러브 스토리인데, 그걸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세기의 사랑처럼 그려놨더라니까? 그게 뭐 젊은 날의 청춘 드라마라면 그러려니 해야지. 근데 이 책은 중년의 유부남녀들과 가족과 한참 어린 청년까지도 섞어대는 N각 관계였다니까? 그러면서 지들끼리 막 경쟁하는 것도 아니야. 네 사랑도 네 감정도 존중해~이러고나 있다야 증말. 과거에 사귀다 헤어진 남녀가 이젠 각자의 짝이 있음에도 다시 옛 연인에게 매달린다는 구질구질함, 그걸 알면서도 허송세월 기다리는 헌신짝들의 미련함, 감정도 없으면서 자꾸 여지를 남겨 썸 놀이에 재미들린 팜므 파탈의 뻔뻔함... 대충 감이 오지? 제목도 딱히 의미는 없어. 한 달 뒤면, 일 년이 지나면 죽을 만큼 힘든 지금의 당신도 이런 나를 사랑치 않게 될 거란 일종의 통보였어. 원래 사랑이란 게 구차해질 때도 있고 그런 거래. 헌데 인간의 탈을 벗어던지면서까지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짐승 취급받아도 상관없다 이거야? 한국에서는 몽둥이가 답인데 프랑스는 어떤지 잘 모르겠네. 사강 언니는 좀 더 지켜보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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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24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아직 이 리뷰 읽기 전이고요, 서재브리핑에 한 달 후, 일 년 후 와 물감님 나란히 뜨는 순간, 물감님 별 세개 밑일거다!! 이러고 뛰어왔는데 두개가 똭!!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5-24 12:4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다락방 님은 이제 저를 너무 잘 아시는군요.........

다락방 2023-05-24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리뷰 다 읽었고요, 저 앞으로 물감님이 사강 안좋아한다에 백오십원 겁니다!! ㅋㅋㅋㅋㅋ

물감 2023-05-24 13:17   좋아요 0 | URL
아 진짜 다른 책들도 이런 갬성인가요? 안되는데 ㅋㅋㅋㅋㅋ
저도 유교가이지만 나름 열린 마인드를 지향하는 편인데 아직은 갈 길이 먼가봐요 ㅋㅋㅋㅋㅋ 한두권 더 읽어보고 판단할게요!

잠자냥 2023-05-24 13:26   좋아요 1 | URL
근데 물감 님 사강 안 좋아한다에 저는 삼백원 걸겠습니다.

물감 2023-05-24 13:33   좋아요 1 | URL
아악 그렇게들 겁주지 마세요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5-24 19:20   좋아요 0 | URL
후후후 두분 다 입금할 준비 하십쇼ㅋㅋㅋㅋ

다락방 2023-05-24 20:03   좋아요 1 | URL
?????????????????

잠자냥 2023-05-24 20:06   좋아요 1 | URL
에이 물감 이 사람 450원에 영혼을 파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5-24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속시원하네 ㅋㅋㅋㅋㅋㅋㅋ근데 물감 님 작가의 대표적 망작을 뽑는 솜씨가 있는 거 같기도 합니다. 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5-24 13:32   좋아요 0 | URL
나는 프랑스와도 맞지 않는갑다,라고 쓸 뻔ㅋㅋㅋㅋㅋㅋㅋ이제사 느낀건데 이건 저의 독서력하고는 완전 별개의 문제였어요ㅠㅠ

새파랑 2023-05-25 0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물감님과 사강은 안맞을거라는데 천원 걸겠습니다~!!
프랑스(?)가 좀 그런거 같아요 ㅋ 전 독특해서 좋아하지만요 ㅋㅋ

물감 2023-05-25 10:21   좋아요 1 | URL
ㅋㅋㅋ새파랑 님도 입금할 준비하셔요😎 다음거 읽는 중인데 재밌거등요ㅋㅋ

자목련 2023-05-26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데 물감 님 책장에 프랑스 문학 많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물감 2023-05-26 13:28   좋아요 0 | URL
말씀해주셔서 슬쩍 살펴보니 없진 않네요 ㅎㅎㅎ 북유럽 말고는 그렇게 국가를 따지는 편이 아니긴 해서요 ^^ 또 에밀 졸라의 광팬이기도 하고요!
 
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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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유정의 팬이다. 근데 나의 팬심은 작가가 아닌 작품으로만 향한다. 그래서인가 신간이 나와도 막 설레거나 하지 않는다. 다른 작가들의 책도 마찬가지이고. 여튼 미루고 미루던 <완전한 행복>을 드디어 읽었는데, 개인적으로 정유정의 전작 중에서 가장 베스트라고 생각되었다. 2019년에 있었던 고유정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라는데, 그 사건이 전혀 연상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몰입감과 흡인력을 보여준다. 이 좋은 걸 대체 왜 미뤄왔나 했더니 읽고픈 마음이 1도 안 드는 저 구닥다리 표지 때문이었다. 진짜 은행나무 책들은 하나같이 멋대가리 없는 디자인뿐이다. 출판사는 드럽게 못 만드는 디자이너들을 싹 다 교체해야 된다. 책이 예쁘단 이유만으로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게 무슨.


집안 사정으로 떨어져 살게 된 두 자매가 있었다. 시골에서 2년간 조부모에게 길러진 동생은 어찌나 칼을 갈았던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데에 집착했고, 언니한테는 증오로써 광기를 표출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동생에게 쩔쩔매며 세월이 흐른 뒤, 동생과 만났던 남자들이 전부 변을 당하는 기묘한 역사가 반복된다. 그러다 동생의 전 남편이 실종되었고, 현 남편은 실종자와 아내가 같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하는 아내가 두려워 뒷조사해 봤더니 섬뜩한 미스터리가 대거 쏟아졌다. 아내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자신은 왜 그녀에게 꼼짝도 못 하는 것일까. 거미줄에 걸린 상태에서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그저 공포에 잡아먹힐 수밖에.


늘 그렇듯 이번 작품도 요약이 쉽지가 않다. 그리고 여전히 독자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늘 불만이었는데 이젠 뭐랄까, 이 분의 작품은 그냥 냅다 읽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이코패스지만 기존의 캐릭터들과 달리 나르시시즘에 기초한 광기라는 점이다. 내가 아는 나르시시스트란 완벽한 자신을 황홀해하는 신종 변태 정도였는데, 모든 사이코패스는 나르시시스트라는 작가의 말에 보는 눈이 좀 바뀌었다. 동생 신유나는 미적 요소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행복한 감정을 사수하는 일에만 집착한다. 그녀가 말하는 행복이란 불안요소를 전부 제거하여 완전무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불행과 싸워나가는 삶이 아니라 아예 불행 자체가 없는 완전한 삶이어야만 하는 거였다. 그래서 행복의 공식은 뺄셈일 수밖에 없다고.


동생의 광기는 어릴 때 부모와 헤어지고부터 생긴 듯 하나, 느낌상 그전부터 있었던 기질로 생각된다. 어린아이한테 잘 없는 거친 언행과 사고방식이 갑자기 생겨난 느낌은 아니었기에. 동생은 시골집을 방문한 언니를 죽일 기세로 위협했다. 자신이 가져야 할 전부를 언니가 훔쳐 갔다면서. 사정상 저렇게 발악하는 것도 이해한다만 집으로 돌아온 동생의 발악이 계속된다는 게 문제였다. 부모는 미안해서라도 동생한테 다 맞춰주었고, 억울하게 죄인 취급받은 언니도 찍소리 못하고 살아야 했다. 동생에게 밀려 케어 받지 못한 언니는 훗날 독립하여 가족과의 연을 끊다시피 한다. 이런 걸 보면 괴물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내 안의 증오와 복수심이 어디로 어떻게 뻗어나갈지 누가 알랴.


신유나는 소유물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다. 그래서 이혼했음에도 전 남편을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 믿고 있으며,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 또한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다. 한번 도장이 찍힌 사람들은 그녀의 행복을 완성시키기 위한 재료이자 밑거름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끔 유도하는 말들로 상대를 쥐락펴락하는 그녀는 화술의 달인이었다. 그런 그녀와 관계를 정리하려는, 즉 자신을 버렸다고 믿게 한 이들에게는 사고를 가장한 죽음으로 되갚아주었다. 또한 저항하는 소유물에게, 행복을 위한 내 노력들을 왜 알아주지 않느냐고 따져댔다. 이 완벽한 뺄셈 공식을 납득하지 못한 사람은 그저 처분 대상이었다. 도자기를 깨부수는 도예가처럼 말이다. 행복하기 위한 자기 파괴적 행동이라니.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려나.


흡사 좀비물을 보는 기분도 들었다. 판은 갈수록 커지는 데 뭘 어떻게 마무리할 건지 감도 안 오고. 발작 버튼이 눌린 동생은 주변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기세였다. 심지어 딸아이의 폭행도 현 남편이 겨우 막았으니까. 그렇게 잠잠해지나 싶더니 남편과 언니까지 불구로 만들고 감금한다. 이대로면 곧 죽을 텐데 하필 아무도 찾지 않는 옛 시골집이어서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이 상황을 뒤집는 방법은 신유나의 가스라이팅을 깨뜨리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정신 지배에서 벗어남으로 겨우 죽음을 비껴간 피해자들. 정말 숨 참아가면서 읽었다. 역시 스릴러소설은 더울 때 읽어야 한다.


동생은 가족과 떨어졌던 그 시기에 성장이 멈춘 듯했다. 상대를 죄인으로 만들어 굴복시키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한 동생. 누구라도 설설 기게 만드는 그 방식은 자신의 인생론이 정답이라고 믿게 해줬을 터. 헌데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기관차를 그저 내버려 둔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더라. 어째서 부모는 의료시설에 기대볼 생각조차 안 했을까. 아무리 교활하고 영악하대도 그렇지, 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 발악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는 게 말이 되냐고. 무조건 오냐오냐하는 것도 하나의 아동 학대란 사실을 모르는 부모가 정말 많다. 아무튼 동생이 사이코패스가 된 데에는 절반 이상이 부모 책임이었다. <종의 기원>의 사이코패스는 날 때부터 포식자의 DNA를 지녔다지만 이 작품에서는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케이스인데, 그것이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아주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저자가 끊임없이 파고드는 인간의 악에 나 역시 관심이 많다. 그래서 앞으로도 악을 연구한 작품들을 쭉쭉 뽑아내주시길 바란다. 아 그리고 은행나무 디자이너는 진짜 반성 좀 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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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23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물감님 별다섯이니 읽어보고 싶네요~!!
표지가 좀 그렇긴 한거 같습니다 ㅋ 내용이 중요하긴 하지만 포장도 중요한거 같아요 ^^

물감 2023-05-23 15:25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표지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편인데 여기 출판사는 좀 심하더라고요. 그래도 정유정은 대형 작가인데 이렇게나 무성의한 표지라니. 보니까 이 책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책이 다 그렇더라고요. 당연히 내용물이 더 중요하지만 화가 나네요 ㅋㅋㅋㅋㅋ
정유정 작품은 늘 호불호가 있습니다만 전 대만족하며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자극적인 독서라 좋았어요ㅋㅋㅋ
 
로스할데 헤르만 헤세 선집 8
헤르만 헤세 지음, 윤순식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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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도 꽤 오랜만인데 역시나 재미있다. 아직까지는 독일 작가 중에선 헤세가 가장 좋다. 자기 고뇌에만 집중하는 타 작가들에 비해 이 분은 이야기에 먼저 집중하기 때문이다. 다루는 주제도 자아나 정체성에 대한 거라서 막 어렵지도 않고, 남녀노소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 호불호도 거의 없다. 이렇게 작가로서의 헤세는 참으로 훌륭하고 위대한데, 인간으로서의 헤세는 과연 어떠할까. <로스할데>를 읽고나서 헤세가 마냥 옥구슬 감성러는 아니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사이가 틀어져 버린 화가 부부. 남편은 로스할데 저택 별채에서, 아내는 안채에서 각자 별거하고 있다. 아들이 둘인데, 큰 애는 오래전부터 엄마 편에 가있다. 작은 애가 유일한 가족의 연결고리인 상황. 이에 화가의 절친은 자기와 인도에 가서 살자고 제안한다. 고민 끝에 인도행을 결심한 순간, 그동안의 고통과 외로움이 전부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작은 애가 뇌막염으로 숨지고 화가의 생명도 반 토막이 난다.


늘 그렇듯 이 작품도 자전 소설이다. <로스할데>는 헤세의 가장 안 알려진 작품 중 하나란다. 기존 방식처럼 상반된 두 인물의 이야기도 아니고, 해설을 읽어야만 겨우 이해할 주제였기 때문이지 싶다. 여튼 지루한 초반만 잘 이겨내면 꽤 재미있는 이 작품은 ‘예술가한테 가족이 꼭 필요한가‘ 하는 고찰을 던지고 있다. 본업에 진심인 화가는 가족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다. 아내와는 한참 전에 멀어졌고 큰 애도 아빠를 싫어한다. 종종 찾아와주는 작은 애랑도 놀아주질 못한다. 말로는 작은 애가 삶의 전부라지만 딱히 애한테서 기쁨을 얻는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가정생활을 하고 있으니 친구가 보기에 얼마나 답답했겠나. 이 로스할데에 메여있다가는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해, 작은 애를 아내에게 맡기고 떠나려는 주인공. 어떻게 보면 참 무책임한 냉혈한이지만 사실 예술가의 기질이란 게 지밖에 모르는 거라서 막 비난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아빠를 싫어하는 큰 애는 피아노를 전공 중이다. 작중에는 그런 묘사가 없지만, 아들은 아빠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중이었지 싶다. 막연하게 예술에 뛰어든 자신과 달리 아빠는 저 나이에도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실력과 명성까지 갖춘 아빠는 선망의 대상이자 목표였을 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본인 예술 하기에 바쁜 아빠는 아들의 일에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철부지 동생만 이뻐하고 있으니 많이 서운했을 터. 한 번은 아빠의 예술 철학에 대해 들으며 내심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자신을 예술가라 생각하고 꺼낸 얘기였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같은 예술가로써 지도와 조언을 해줬었다면, 같은 예술가로써 대우하고 인정해 줬었다면 부자 사이가 틀어지진 않았을 텐데. 남자들이란.


작은 애가 점점 아파하다가 끝내 숨을 거두는 것은, 점점 시들해지다 끝나버린 헤세의 결혼생활을 표상하고 있다. 아홉 살 연상의 신경질적인 아내를 못 이기고 인도로 도피했다는 헤세. 근데 한편으로는 헤세의 부족한 현실감각 때문에 아내가 화딱지 났던 걸 수도 있겠다. 헤세가 워낙 이상주의자라서 말이지. 여하튼 집안에서 자그마한 희망의 끈이 돼주었던 작은 애처럼, 헤세도 어떤 가느다란 끈을 붙들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 희망마저 끊어지자 슬픔과는 별개로 놀랍도록 차분해지고 평안해지는 화가였다. 가족한테 받았던 방황과 소외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작은 애를 간병하며 아내와도 사이가 좋아져서 혹시나 했는데, 화가는 예정대로 로스할데를 떠나기로 한다. 슬퍼하는 아내가 그를 강경하게 막지 못한 것은, 실패한 결혼생활의 원인이 본인에게 있음을 남편이 인지해서였다. 나는 이 장면 때문에 헤세의 아내가 공격수였던 걸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하지만 유리 멘탈 헤세도 언제까지나 수비수는 아니었다. 반격할 틈을 찾자마자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걸 보면 말이다.


확실히 이 작품은 헤세의 스타일 같지가 않다. 일단 고뇌의 결과가 현실도피로 끝난 것도 그렇고, 묵직한 주제에 비해 이야기는 다소 싱거웠고. 게다가 그 주제들도 좀 모호하게 다루고 있다. 또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가, 예술가와 기혼자가 아니면 썩 공감되지 않을 장면들로 가득했기에. 아무튼 헤세 작품은 늘 대만족이다. 올해는 헤세의 전작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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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19 1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최근에 <수레바퀴 아래서>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헤세를 다 읽어볼까 하던 참인데 마침 물감 님이 헤세를 똭!! 이 책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물감 2023-05-19 12:23   좋아요 2 | URL
<수레바퀴 아래서> 넘나 재밌죠! 그 책 리뷰에 영혼을 갈아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헤세 짱짱맨! 이 책도 재밌어요, 읽어보세요 ㅋㅋㅋㅋ 그다음은 어떤 거 읽으실 건가요? 다락방 님 따라가야지 ㅋㅋㅋㅋ

새파랑 2023-05-19 1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름 헤세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처음 봅니다 ㅎㅎ 헤세의 아내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예민한 헤세랑 사는게 쉽지는 않았을거 같아요 ㅋㅋ

역시 독일은 헤세~!! 전작을 응원합니다~!!

물감 2023-05-19 14:20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도 모를 정도면 진짜 안 알려진 작품이 맞나봐요ㅋㅋ 저도 예민한 사람 만나서 고생 꽤나 해본 지라 할말은 많지만... 다음엔 나르치스 골드문트 읽을 예정입니다ㅋㅋ

잠자냥 2023-05-19 1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잉 <로스할데>는 재미 없을 거 같아서 안 읽었는데 재밌어 보이네요.......
근데 저도 예술가도 기혼자도 아니라서...ㅋㅋㅋ 으흠... 그래도 일단 장바구니에 주섬주섬..

물감 2023-05-19 16:00   좋아요 2 | URL
이래서 마케팅이 중요한 거군요ㅋㅋㅋ근데 꼭 예술가, 기혼자가 아녀도 대강 알아먹을 내용이라 안 어려워요ㅋㅋㅋ자냥 님의 리뷰 기다리겠습니다😀

그레이스 2023-05-19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채와 별채^^;; 한 집에서 별거가 가능한 구조네요 ㅎㅎ
저도 <로스할데> 이제야 알게 되네요.
중요하게 다루지 않아서 그냥 지나친듯요^^

물감 2023-05-19 16:41   좋아요 2 | URL
보니까 별채를 더 지은 거더라고요ㅋㅋ이 책 읽을만 합니다요. 이렇게 된 김에 영업이나 해야겠어요ㅋㅋㅋ

coolcat329 2023-05-19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세 책 중에 이런 책도 있었군요.
헤세가 좋은 남편은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저도 헤세 책 조만간 읽어야 겠습니다.

물감 2023-05-19 22:36   좋아요 1 | URL
알라딘 고인물들이 다 모르는 작품이라니. 참 놀랍네요. 여하간 헤세가 좋은 남편감은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본인도 그걸 알았을 법한데 어째서 결혼을 했는지가 의문이에요. 여튼 쿨캣 님도 헤세 문학 읽기에 동참하시는 걸로!

모나리자 2023-05-20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헤세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아직입니다.헤세의 작품은 늘 감동과 생각거리를 안겨주지요.
헤세의 전작 읽기 응원합니다. 물감님.^^

물감 2023-05-21 04:36   좋아요 1 | URL
갈 길이 멀지만 부지런히 달려보겠습니다. 일단 대여한 책들 먼저 해치우고나서ㅎㅎㅎ

책읽는나무 2023-05-20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헤세 좋아하는데 이 책 제목은 처음이네요?^^
헤세 넘 좋아해서 작년엔 헤세가 그린 풍경 수채화 달력까지 사서 걸어놓고 헤세~헤세~ 했었는데, 책은 몇 권 안 읽었네요ㅋㅋㅋ

물감 2023-05-21 04:38   좋아요 1 | URL
헤세는 워낙 친숙해서 그런지 안 읽고도 읽은듯, 안 읽었어도 죄책감 같은 거 없는 작가 같아요ㅋㅋ 조만간 책나무님의 리뷰가 올라오길 기다립니다🙂

꼬마요정 2023-05-21 0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헤세 좋아하는데 개인적인 삶이 그닥 훌륭하지 못해서 자꾸 책 읽는 데 방해가 되더라구요. 예를 들면 <크눌프>에서 가정을 두고 방황하는 작가가 생각난다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소설이 많아서 참 그렇습니다. <로스할데>는 처음 들어봅니다. 물감 님 덕에 또 주섬주섬 장바구니로 책을… 기대별적립금은 늘 쓰일 데가 있네요 ㅎㅎㅎ

물감 2023-05-21 04:46   좋아요 2 | URL
영업 성공했군요ㅎㅎㅎ 유명작만큼 재밌진 않지만 이름값은 합니다. 그래도 헤세가 본인을 파악할 깜냥은 된 인간이구나 싶어요. 안그러고서야 이런 작품을 쓸 수가... 신기하게도 누구나 공감하고 고민해볼 만한 고찰이어서 막 저격하지도 못하겠고 암튼 그렇습니다ㅋㅋ 같이 읽어요😀
 
사랑을 배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6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진짜 오랜만에 읽는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로 유명한 작간데 정작 추리쪽은 하나도 안 읽고 요 시리즈만 읽었더랬다. 필명인 ‘메리 웨스트매콧‘으로 출간한 여섯 권의 작품은 여성의 심리를 중심으로 한 서사이다. 다 좋았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 평타 이상이었다. 지금과 맞지 않는 시대상에 불편해할 독자도 많겠으나 감안하고 본다면 썩 괜찮은 즐길 거리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장르소설의 기법을 써서 문장이 간결하고 전개도 매우 빠르다. 게다가 인물의 고뇌와 독자의 생각이 머물지 못하게 연속해서 단타를 날린다. 이렇게 작품성과 대중성을 다 갖춘 작가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들다. 과연 롱런하는 작가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번 작품도 꽤나 평범한 내용이다. 오빠만 이뻐하는 집에서 자란 여동생 로라. 오빠가 소아마비로 죽고 이제 사랑을 독차지하나 했더니 금세 여동생이 생겨버린다. 이후 불난 집에서 동생을 구하고부터 로라의 시기는 사랑의 감정으로 탈바꿈한다. 부모님마저 사고로 죽자, 로라는 오직 동생의 뒷바라지에 생을 바친다. 세월이 지나 갓 성인이 된 동생에게 청혼한 남정네가 등장하는데, 로라의 눈엔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의 불장난이었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이들의 결혼생활은 얼마 안 가 밑바닥을 찍는다. 로라는 동생에 대한 사랑이 어떤 집착과 소유욕으로 느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자기를 아주 많이 사랑하지는 말아달라던 동생의 말이 생각나서.


어려서부터 눈치 만렙이었던 로라. 사랑받을 존재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사랑을 주는 쪽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무한정 퍼부었던 사랑은, 동생의 의사와 자유를 억누른 결과로 나타났다. 로라의 ‘주는 사랑‘이 뭐가 잘못된 거냐면, 상처받는 게 싫어 사랑받기를 거부하던 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방적인 희생과 헌신은, 인간으로서 다양한 감정을 누릴 동생의 권리를 박탈하였다. 뿐만 아니라 로라는 자신을 전혀 챙기지 않아, 사랑받을 권리를 박탈하며 살고 있었다. 아아아. 여성호르몬 과다인 나님은 로라가 어떤 심정인지 아주 잘 알겠더라.


이 사랑의 공급이 중단되고 나서야 두 자매는 서로에게 미안함을 깨닫는다. 지금 상태가 베스트란 걸 알기 때문에 서서히 왕래는 끊어지고 각자의 길을 간다. 동생은 남편의 노답 플레이에 넉다운 되고도 헤어지지 않고 삶을 감당한다. 남편에게 무슨 기대가 있길래 그토록 미련을 못 버리는 걸까. 여기에는 언니의 ‘주는 사랑‘을 동생도 실천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로라는 부족하고 철없는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해 주었다. 받는 사랑에 익숙했던 자신은 이제 사랑을 줌으로써 언니의 사랑을 배워간다.


사랑과 사람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이 많은 작품이다. 그때마다 애거사는 똑같은 답변을 내린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이랬더라면 나았을 텐데,라는 생각은 소용이 없고 끝도 없다. 로라도 동생의 결혼을 막지 못한 데에 후회를 하지만, 모든 결과는 개인의 몫이며 누구도 간섭해선 안 될 책임임을 깨닫는다. 더불어 본인이 사실로부터 도망치는 생애를 살아왔다는 것도. 마침내 로라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 이 작품의 원제는 <짐>이다. 사랑이 짐으로 느껴진다면 그 사랑이 일방통행 중이기 때문일 터. 꽃이 예쁘다 해서 계속 물을 주면 어떻게 될까. 이렇듯 표현해야 할 때와 절제해야 할 때를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쓰다 보니 글이 센티해졌는데 사실 지금 기분이 몹시 안 좋다. 어제 더워서 밤잠을 설쳤고, 오늘 낮 기온도 30도를 넘겨가지고 쪄죽는 줄 알았거든. 뭔 5월부터 월하 준비를 해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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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19 2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어 내려 왔는데, 기분이 안 좋다고 하시고 쪄죽는 줄 알았다고 하셔서 웃음 납니다. 하하~~
저 또한 그저께 외출했다가 너무 더워서 당황스럽고 불편했어요. 무슨 5월 날씨가 그럴 수 있는지...
에어컨 없는 곳은 들어갈 수가 없겠더라고요. 아직 집엔 선풍기도 안 꺼냈는데...

사랑 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도 없을 듯. 대중 가요 가사만 해도 거의 사랑 타령이잖아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사랑이 있을 뿐이라는, 어디서 읽은 대목이 생각납니다. 요점은 사랑은 어떻게 해야 된다, 하는 게 없다는 것. 경우에 따라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의 연애가 있다는 것 같았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에도 감정의 절제가 필요한 것 같아요.

물감 2023-05-20 04:40   좋아요 1 | URL
날씨 정말 너무하다 싶은데 또 어떤 나라는 40도를 넘었다고 하니 참 할 말이 없어지네요ㅎㅎ
사랑 얘기는 다 뻔한데 왜이리 재미날까요. 수많은 사랑을 보고 듣고 하면서도 학습되지 않는다는 게 참 신기합니다. 이정도면 나름 가이드가 잘 되어있는 편인데 말이에요.
요즘 시대는 절제는커녕 아에 시작조차 하지 않는 분위기네요. 갈수록 소극적으로 변해가는 사회라서 이대로라면 사랑타령도 곧 없어지겠다 싶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