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서재활동이 뜸한 사이에 요런 이벤트가 진행중이었군요?


간만에 글도 올릴 겸, 뒤늦게 참여해봅니다.


뭐, 이미 잊혀져 가는 판에 이런 거 올려봤자지만요...





고리타분하게도 소설만 읽는 지라 다른 분들처럼 유니크한 도서는 소개할 게 없네요.


그리고 위 목록에는 없지만 제 인생책은 성경입니다.


단지 해당 이벤트에 성경을 넣을 수 없어, 제 심금을 울렸던 문학 중에서 골라봤습니다.

















1. 돈키호테 1,2권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4347578


듣자 하니 당시 스페인은 정치, 문화, 종교 등등 문제가 많았던갑다. 세르반테스는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회를 풍자하고자 '돈키호테'를 써서 디스며 팩트며 온갖 뼈 있는 개드립을 사정없이 갈겨댄다. 그렇게 하고도 욕먹지 않을, 또는 욕을 먹어도 끄떡없을 캐릭터가 필요해 만든 것이 미쳐버린 돈키호테와 덜떨어진 산초였다. 이런 친구들이 비판 좀 했다고 정색해버린다면 스스로 바보 인증하는 꼴이 될 테니까. 작가가 짱구를 참 잘 굴렸다.




















2. 스토너 - 존 윌리엄스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3150048


학교 다니고 결혼하고 직장 다니는 내용이 다인, 누구나 살면서 겪는 일들을 덤덤하게 그려나간 작품이다. 별사건도 없이 잔잔하기만 해서 소설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나 주인공의 일생이 나와 너무도 닮아있어 계속 지켜보게 된다. (중략) 힘들면 힘든 대로, 불행하면 불행한 대로 어떤 시련과 불이익도 전부 감수하고 수용하는 보살 같은 태도의 스토너. 이렇게 융통성 없고 손해 보는 성격이지만 그에게는 후회나 뒤끝이 없었다. 그것은 타고난 성정이나 어떤 신념 때문이 아니고 겁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생존 철칙이었을 뿐.






















3.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5109410


스스로가 위대한 집사임을 내내 강조했던 것은 어떤 자부심과 긍지 때문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걸었던 자기최면인 셈이다. 차마 고개도 들 수 없을 만큼 비참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점수 미달은 그렇다 쳐도 집사로써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있어선 안되었다. 하여 프로정신으로 끝까지 자신의 확고한 소신을 밀어붙인 스티븐스는 진정 위대한 집사이다. 이렇듯 사람이 무너지지 않는 비결은 앞서 얘기했듯 평생 지켜왔던 본인의 반듯함에 달려있다. 나를 향한 타인의 비난과 질타를 나까지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나만큼은 끝까지 자신을 믿고 응원해 주어야 한다.






















4. 호밀밭의 파수꾼 -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3320460


세상은 충분히 지겨웠고 사람들은 다 한심해 보였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다 제 나이보다 일찍 성숙해서 그랬던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제멋대로인 주인공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전부 공감이 돼. 일탈해본 적이 없어도 얘가 사사건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 (중략) 찌질해보이기 싫어서 했던 행동들이 더 찌질하다는 걸 어릴 때는 잘 몰라. 소년도 그래. 상대와 의견이 안 맞으면 우겨서 설득하려 들고 그래도 안되면 미련 없이 떠나버려. 그게 상처로부터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야. 내가 똑같이 했던, 바보 같은 짓이었으니까 그 마음 아주 잘 알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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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는 인생책이란, 말 그대로 '인생을 노래하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그나저나 저는 제가 쓴 글이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걸까요. 허허허.


이제는 예전만큼 새콤달콤한 퀄리티의 글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 좀 씁쓸합니다.


저는 나이 들어서도 참신한 또라이다운 저세상 텐션을 유지하고 싶거든요.


그렇습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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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4-30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성경! 근데 거봐요. 물감님과 제가 같이 읽은 책 있죠. 스토너! 저도 스토너는 정말 괜찮게 읽었습니다. 단지 저에겐 인생책은 아니었다는 정도. ㅋㅋ
돈키호테는 저에겐 죽기 전에 읽어야하는 책입죠. 언제나 읽으려나...ㅠ

물감 2024-04-30 21:26   좋아요 1 | URL
스토너가 취향은 갈릴지언정 팬층은 확고한 작품입죠ㅋㅋ
스텔라님, 돈키호테는 필독서입니다. 저는 무인도에 딱 한 권만 가져간다면 돈키호테 고를겁니다😀

라파엘 2024-04-30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의 인생책이 성경이라니, 정말 반갑네요~!! 그리고 마지막 사진, 새콤달콤하고 참신합니다!! 😆

물감 2024-04-30 21:28   좋아요 1 | URL
라파엘님의 댓글이 몇년만이더라...ㅋㅋㅋ
여튼 저도 반갑습니다만, 라파엘님의 인생책은 당연한? 것이라 신기하진 않군요ㅋㅋㅋ

그레이스 2024-04-30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 아래 그림 인상적이네요^^
성경을 책에 포함시킨다면, 저도 같습니다.
제겐 살아있는 말씀이죠
그래서 누가 물어보면 인생책으로 성경을 말하지는 않아요 ^^
돈키호테도 좋았고, 스토너도 좀 답답하지만 나름 좋았어요. 남아있는 나날도 좋았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도 좋았지만 거기서 뚜렷한 메시지를 얻지는 못했던것 같아요.
다시 읽어본다면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이번에 돈키호테 다시 읽는데 완전 다른 의미들을 찾았거든요.~~^^

물감 2024-04-30 23:18   좋아요 1 | URL
동지 발견^^ 말씀하신대로 어디 가서 성경을 인생책이라 말하긴 좀 머시기해요 ㅋㅋ
개인적으로는 저중에서 호밀밭이 가장 공감 가는 책이에요. 리뷰 또한 제가 쓴 것 중에서 베스트 5에 들고요ㅋㅋ
돈키호테 재독중이시군요! 파이팅입니다! 발견하신 다른 의미를 꼭 들려주셔요 ^^

잠자냥 2024-04-30 23: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성경이에요? 정말 뜻밖입니다…. <남아 있는 나날> 선물용으로 구입하다가 땡투!

물감 2024-05-01 21:26   좋아요 0 | URL
크크큭. 이런 반응을 기다렸습니다. 땡투도 감사용!
위 4권의 리뷰를 보시면 저의 글 성향이 성경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당. 근데 지금 보니까 전부 다 이달의 당선작 리뷰군요. 오호라?

은오 2024-05-01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생책이란 “인생을 노래하는 작품”!!! 참신한 물감님의 해석. ㅋㅋㅋㅋㅋ
물감님이 선정하신 작품 중에서 전 <스토너>만 읽었네요. 전에 제 리뷰에서 물감님이 말씀해주셨듯이 스토너는 제가 좀 더 나이 들어서 읽으면 다르게 다가올 거 같아요.
<남아 있는 나날>은 제 약혼자분이 어린이날(ㅋㅋㅋㅋㅋㅋㅋㅋ)기념으로 보내주셔서 이번주에 받을 거 같은데, 물감님 인생책이라니 더더욱 기대됩니다!! 🥹🥹

물감 2024-05-01 21:33   좋아요 1 | URL
은오님 오랜만이에요. 저보다 더 뜸하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ㅋㅋㅋ
사실 누군가의 인생책이라고 해서 다 좋을수도 없고 꼭 챙겨볼 필요는 없죠. 스토너도 그냥 잊어버려요~~ 그리고 남아있는나날... 이것도 은오님 아마 별 셋 주지 않을까 싶은ㅋㅋㅋㅋ만약 별 다섯이면 은오님 다시볼듯 하네요 ㅋㅋㅋ 점점 더워지는데 늘어지지 말고 같이 열독합시다요.

페크pek0501 2024-05-04 1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돈키호테는 동화책으로만 읽었고, 저도 스토너, 참 좋았어요. 호밀밭의 파수꾼은 너무나 사랑하는 책이라 아껴가며 읽고 있어요. 반 이상 읽었으려나... 저는 그 장면이 인상 깊어요. F학점인가 맞은 과목의 선생님 댁에 찾아가 그 앞에 앉아 대화하는 장면. 학생과 선생 사이의 대화. 잘 읽어 보면 엄청 코믹해요. 잘 보고 갑니다. 이런 이벤트 재밌습니다.^^

물감 2024-05-05 00:42   좋아요 0 | URL
진짜 이런 이벤트 너무 좋지요? 이달의 페이퍼도 대거 쏟아져나올듯 하고요 ^^ 제게는 인생책이 몇권 없어서 선정하기 수월했는데 다른 분들은 꽤나 힘들었겠어요 하하핳. 말씀하신 호밀밭에 그 장면은 코믹하다고 생각해보질 못했는데, 나중에 재독하게 되면 한번 느껴보도록 하겠습니다! 날 더워져가는데 건강 조심하시고요^^
 
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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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타닉>에서 디카프리오가 이런 말을 한다. ˝인생은 축복이니 낭비하면 안 되죠.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죠. 매일매일을 소중하게, 순간을 소중히.˝​


갈수록 시간이 빠르게 흘러감을 느끼는 요즘, 매시간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려고 노력 중이다. 그 많던 근심과 고민들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열망과 체념의 줄다리기도 멈추었고, 감정과 이성의 혼란들도 다 숨을 거두었다. 진리에 도달한 지금은 더 이상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삶에 큰 변화나 자극이 없어서 더욱 고맙고 축복된 인생이지 싶다. 혹자는 인생에 목표나 목적이 꼭 필요하다는데, 반대로 그런 게 없어서 감사할 수가 있는 인생살이도 존재한다. 바로 나처럼.


떠들썩한 국내 사정에 비해 내 마음은 이다지도 평온한 걸까. 가진 게 없어도 풍요롭고, 배움이 없어도 지혜롭고, 탐구와 번뇌의 해방감을 누린다는 기쁨으로 충만한 나날들.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말의 참 의미를 이제야 깨닫는다. 늘 그래왔지만 더욱더 내 사람들에게 잠잠한 사랑으로 다가서려 한다. 내 모든 질문의 해답은 여기에 들어있다. 그리고 어쩌면 <창백한 말>의 저자인 사빈코프 역시, 어느 정도는 나와 일치한 마음이 아닐까 싶었다.


이것은 모스크바 총독을 암살하려는 테러리스트의 수기로써, 실제 혁명가로 활동한 저자의 생을 바탕으로 쓰였다. 실패한 암살 시도와 죽어가는 동료들. 각자의 이상을 위해 바친 목숨, 그것은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뜻이 없는 조지는, 막연한 제 삶이 마치 실체 없는 인형극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인간은 앙망하고 갈구해야 할 대상이 필요할까. 차라리 죽음으로 존재의 의미를 증명하는 편이 낫지는 않을까. 죽음보다 삶을 바치는 게 더 어렵다더니 과연, 말도 생각도 욕망도 삶도 다 지겨워졌다. 이제 나는 아무래도 좋다.


동료 B는 조지의 죽은 심장을 위해 그리스도를 전한다. 비록 자신은 살인자가 되었으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버린 그리스도를 따라갈 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살인을 막기 위해 대신 살인하는 게 세상을 밝히는 일이라고 한다. 그 말은 어쩐지 사랑을 전파한 그리스도에 대해 신성모독으로 들렸다. 그러나 사랑과 무관한 조지의 영혼은 법이 적용되지 않는 죽음 쪽으로 기울었다. 사랑을 가르쳤으나 배신 당했고, 진리를 전했으나 고통 받았던 그리스도의 생애는 온통 의문투성이였으니까.


그럼에도 조지는 신앙이나 사랑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고, 가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 슬퍼할 줄도 알았다. 그녀와 함께라면 죽음도 무의미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랬기에 동료의 말마따나 사랑이 제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창 마음이 오락가락하던 중, B가 총독 암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기쁨은커녕 기분만 멜랑꼴리해진 주인공. 목적을 이룬 건지 잃은 건지 알 수가 없는 가운데, 슬며시 차오른 격분으로 애인의 남편을 총살해버린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주인공에게 사랑이 전부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자신은 사랑을 모른다는 그의 반복된 고백 속에서 그가 얼마나 사랑을 추구하는지를 느낄 수 있다. 겨우 인생의 해답을 발견했으나 B의 말처럼 사랑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어, 남은 건 사랑의 이름으로 죽는 것뿐이었다.


알고 보니 B가 저자의 상징 인물이란다. 그렇다는 건 서로 상반되는 두 자아를 통해 더욱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셈이 된다. 다만 여기에는 성경 말씀을 베이스로 하고 있어서 무신론자나 합리주의자는 이해하기 어렵겠고, 특히나 T들에게는 퍽 지루할 작품이겠다. 여하간 인생들은 정한 시기가 되면 후회로 점철된 생애를 되돌아본다.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축복인가.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가 남는다면 결국 거기서 거기란 뜻일 테니,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도록 하자. 그리고 매일매일을 소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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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26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순간을 소중히 여기려고 노력 중이신 물감님의 글이 너무 잘 전달되어 옵니다.

물감 2024-04-26 19:1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이 짧은 글에서 온기가 느껴지네요.
그보다 참 오랜만에 인사 드리네요. 좋은 하루 되셨기를🙂

페크pek0501 2024-05-04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망과 체념의 줄다리기가 멈추셨군요. 그게 좋을 수도 있긴 해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줄다리기가 진행 중입니다. 다 버리려 했더니 살맛이 안 나서요. 나이들수록 뭔가 붙잡고 살지 않으면 그냥 시간이 가고 그냥 늙을 것만 같아서요. 시간을 아끼며 소중하게 쓰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인생의 허망함, 부질없음이 느껴질 때가 있죠. 물감 님이나 나나 안달복달은 하지 말자고요. 안 하는 걸로...^^

물감 2024-05-05 00:39   좋아요 0 | URL
하하하 저도 J 성향인지라 막 포기했다거나 될대로 되라식은 절대 아니고요, 조율을 하고 합의점을 보고 판단을 하는 쪽입니다 ㅎㅎ 단지 저의 것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고, 막 실현가능한 일들도 아니고, 암튼 설명하기 어렵네요 ^^; 여튼 말씀하신대로 안달복달은 안 할거에요. 지금의 제가 좋거등요 ㅎㅎㅎ
 
은원, 은, 원
한차현.김철웅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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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서 내 리뷰를 읽고 맘에 들어 하셔서 신간을 보내드리겠다... 뭐 이런 내용으로 출판사분께서 메일을 주셨는데, <늙은이들의 가든 파티>를 신랄하게 혹평했어가지고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더랬다. 뭐 그래도 내가 당당할 수 있는 건, 나님은 애정을 꽉꽉 담아서 까대므로 어떤 작가님이든 내 진심이 전해질 거란 확신 같은 게 있다. 따라서 이번 작품도 당근보다 채찍질에 중점을 둘 생각이다. 당근이야 뭐 다른 독자들이 번호표 뽑고 대기 중 일 테니깐.


이제는 작가 소개에 MBTI까지 실리는 세상이 되었군. 놀랍게도 나랑 똑같은 INFJ-A 셨더라. 허허, 어쩐지. 개인적으로 한차현 작가의 똥꼬발랄한 병맛코드를 좋아라 하는데, 어째 나오는 작품마다 분위기가 어둡고 심각하고 막 그렇다. 이번 작품은 영화사 분과의 합작이라 그런지 시나리오 기법으로 장면 전환이 매끄럽고 전개 속도도 빠른 편이다. 각 챕터의 분량도 길지 않아서 마치 <살인자의 기억법> 같은 템포와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덧셈보다는 뺄셈으로 승부하는 식이랄까. 이래저래 좋았지만 혹 영화로 만든다면 좀 더 각색이 필요하겠다. 이유는 뒤에 가서 말하기로 하고.


이번에도 ‘차연‘이 주인공이다. 이제는 무슨 차연의 멀티버스 세계관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늘 그래왔듯이 이번 차연도 별 볼일 없는 아웃사이더로 등장한다.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뒤로 연락 두절에 종적을 감춘 여자친구 은원. 몇 주 후, 가족을 통해 병원에서 재회한 그녀는 베르 어쩌구 증후군... 뭔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단다. 멘붕인 차연에게 진실을 알려준다며 은원의 고모네가 두 사람을 어느 연구소로 데려간다. 그곳에 실험 캡슐 안에는 은원의 복제인간들이 잠들어있었고, 네가 알던 은원1은 얼마 전에 죽었다는 것이다. 허?


결국 이 구린내 나는 연구소가 복제인간을 찍어내서 세상에 혼돈을 가져올 것이고, 이것을 막으려는 차연 일행이 겪을 시련에 대한 내용이다. 다소 순탄하게 진행된 감은 있다만, 그럭저럭 괜찮은 상차림이었다. 이만하면 재료도 신선하고, 메인 요리도 있고, 반찬도 많은 편이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뺄셈‘이 문제였다. 모양새는 딱 음모론인데 정작 이렇다 할 액션 거리가 없었다. 주인공 차연은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게 일절 없고,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하고 끌려만 다니는 무력함을 보여준다. 또한 거듭되는 진실과 일어나는 상황에 정신줄을 자꾸 놓게 된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은원2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인물의 감정선에 중점 둔 것도 아니고, 스토리에 치중한 것도 아닌 참 어중간한 작품이 돼버렸는데 이같은 평이 사실 처음도 아니다. 이래서 이 분의 작품은 명랑 발랄한 것만 좋아한다는 말입죠. 예.


규모에 비해 허술하기만 했던 연구소와 세력들은 말할 것도 없고, 두 남녀의 감정선이나 좀 말해보자. 그러니까 이들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호소하여 독자가 페이소스를 느껴야 할 텐데, 증말 미안하게도 호소력이 제로였다는 말씀이야. 솔직히 템포가 너무 빨라 슬픔을 애도할 새가 없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은원1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자마자 연구소 타파 계획에 휘말리질 않나, 동행하는 사람이 죽은 연인과 똑같이 생기질 않나. 얼마든지 인물에 빠져들게 할만한 건덕지가 많았는데, 우째 작가는 애도할 틈조차 주지 않으니 원. 작가의 말을 읽고서야 알 게 된 것이, 은원의 아픔과 심정에 무게를 두고자 하셨다는데 허허허... 뭐가 문제냐면요, 독자를 울려야 하는 건 은원2인데, 정작 은원1의 과거 회상만 잔뜩 나오더란 말입니다. 거기다가 은원1은 말없이 퇴장해버렸고요. 이쯤 되면 포인트를 한참 잘못 잡은 게 아닐지요?


아마 제목의 의미는 ‘은원 is One‘일 것이다. 몸은 여럿이지만 하나의 기억을 계승해야 했으니. 여튼 여러모로 아쉬움 많은 작품이었다. 전작 리뷰에서 차라리 빅 스케일의 음모론이면 좋았겠다고 했었는데, 정작 빅 스케일을 써 보니 용두사미가 돼버렸다. 어째선지 내 잘못인 것만 같다. 작가님이 내 리뷰를 읽는다는 가정하에 적어봅니다. 집필하다가 한 번씩 저 좀 부르세요. 제가 또 훈수를 겁나게 잘 둔답니다? 그럼 이만.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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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4-16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 님 같이 모니터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있다면 소설 쓰는 분에게 도움이 되겠는 걸요.
에세이와 다르게 소설은 독자들의 취향을 알 필요가 있죠. 자기 만족으로만 소설을 쓴다면 모르지만.
이제 물감 님이 승승장구하셔서 출판사에서 지원 받아 작성하는 차원이 되셨군요. 오호!!

물감 2024-04-16 22:23   좋아요 1 | URL
출판사 분들의 메일은 종종 받곤 하는데요, 대부분 비문학이거나 안내키는 소설이어서 잘 안하는 편이에요. 어쩌면 하도 비평만 하다보니 연락이 줄어든건가 싶네요 ㅎㅎ
솔직히 제가 뭐라고 감놔라 배놔라 하겠냐마는, 그냥 못 본체 지나치기 힘든 작가/작품들이 이렇게 있어요. 몇몇 작가분들이 연락주셨듯이, 이 작가님도 연락주길 기대해봅니다 ^^
 
나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0
에밀 졸라 지음, 김치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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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도서 리뷰라지만 시작부터 바로 작품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무슨 수학 문제집 풀듯이 정답만 써놓은 글에는 흥미가 없달까. 다른 건 몰라도 문학 리뷰만큼은 최소한의 스토리텔링이 들어가줘야 글이 매끄러워진다. 이 스토리텔링이란 게 사실 별거 없고, 그냥 내 생각과 사유의 꼬리를 물어만 주면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 대한 Tmi와 뻔한 코멘트와 상황 설명만을 나열하기 때문에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온통 매력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나님은 공장에서 단체로 찍어낸 듯한, 개성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결과물에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 이런 말 백날 해봐야 듣는 이도 없고 내 얘기 하는구나 싶은 이는 더더욱 없는 현실이지만, 건강한 글쓰기와 서평 문화를 소망하며 또 한 번 끄적여봤다.


에밀 졸라의 작품 중 가장 재미없어 보였던 <나나>. 역시나 예상 적중해서 고생 좀 했다. 나나는 <목로주점>의 주인공인 제르베즈의 딸인데, 본 작품에서는 대중에게 사랑받는 극단 배우로 등장한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발연기의 달인이지만 그녀의 웅장한 피지컬과 과다한 페로몬이 그 어떤 논란도 잠재워버린다. 아무튼 수입도 짭짤하고 남자들도 잘 들러붙어 먹고 살 걱정 없는 그녀는, 단기간에 성공한 이들이 그렇듯 오만하고 경거망동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돈다발을 바치며 사랑을 갈구하는 남정네들. 그 정도로 나나의 아름다움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 간단한 줄거리에 비해 쓰잘데없는 장면 묘사로 지면을 꽉꽉 채운 참 괘씸한 작품이었다. 원래부터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작가이고 늘 해 오던 대로 썼겠지만, <나나>가 유독 지루하다 느꼈던 것은 흐름과는 무관한, 정말 안 해도 그만인 묘사들로 도배를 해놨기 때문이었다. <제르미날>이나 <목로주점>에서는 자잘한 묘사들도 테마의 분위기 조성에 일조하여 감탄했었던 반면, <나나>는 빈약한 내용을 최대한 있어 보이게 하려고 아주 그냥 발악한 걸로 보인다. 어떻게든 분량을 늘리고 싶어서 개똥, 새똥에 진드기 똥까지 긁어모으셨더만? 가장 불만이었던 극단 배경의 묘사부터 짚어보자. 나나의 직업도 그렇고, 초반에 대거 등장하는 인물들도 대부분 그쪽 업계니까 과한 디테일에도 뭐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배경 묘사에 실컷 공들여놨더니 얼마 못 가서 나나가 극단을 때려치운 데에 있다. 사실 그전에도 나나의 활동이나 관련된 장면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차후의 내용이 앞의 장황했던 설명들과 크게 이어지지도 않는다. 후반부에 다시 배우로 복귀하지만 또다시 그만둬버리므로, 결국 극단과 배우의 설정이 썩 중요치도 않은 별개의 장치였던 셈이다. 에라이.


두 번째로 억지 분량을 짜낸 것이 사교계의 묘사다. 프랑스 문학에서는 상류층의 사교모임 장면이 흔하게 나오는데, 그것이 귀족들의 문화라 따분하고 올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같은 상황이라도 영국 문학은 한층 더 심플하고 위트 있게 풀어나가는 편이다. 그러니 비교를 안 할 수가 있나. 솔직히 큰 스캔들이 없는 이상 사교계가 거기서 거기인데, 여기서 재미와 분량을 뽑아낸들 뭐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심지어 나나는 귀족 집안 출신도 아니고, 명성은 있었지만 명예를 가진 것은 아니었기에 아무리 남자들의 등골을 빼먹고 다녔어도 평판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여인네들의 시샘과 질투를 받긴 했어도 남자들과의 썸씽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작가조차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듯하다. 근데 어째 리뷰가 점점 산으로 가는 기분일쎄?


연극으로 거액을 거머쥔 나나는 집을 사고 하인들을 거느리는 주인마님이 되어 신분 상승의 맛을 누린다. 일도 안 하고, 돈은 펑펑 쓰고, 알아서들 기어 대니 황후의 삶이 부럽지가 않은 그녀. 일상에 싫증 날 때면 남자들을 낚아다 돈을 타낸 뒤 영혼을 쥐락펴락하다가 걷어차버린다. 마치 악마에게 먹힌 것처럼 갈수록 심해지는 팜므파탈 플레이가 서서히 파멸을 노래하고 있었다. 보다시피 나나는 남자들을 타락시키는 걸 본능적으로 좋아했고, 남자의 수치심을 건드리면서 자극받기를 즐겨 했다. 도무지 해석 불가한 그녀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들이, 알 수 없는 증오의 화살들이 나중 가서야 겨우 납득이 되었는데, 불행을 몰고 다니는 루공-마카르 집안의 핏줄이, 사회를 향한 무의식적인 원한과 보복심으로 표출된 거였다. 잘 보면 나나에게 꼬이는 남자들은 백작, 사업가, 은행가 등등 죄다 상류층이었고, 이들의 부와 명예를 날려먹음으로써 저도 모르게 복수한다는 식이었다. 보통은 이 악물고 성공한 뒤 위에서 군림하는 정도로 그칠 텐데, 나나는 파산에다 풍비박산으로 사회에 매장하여 회생 불가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면서도 탕진과 섹스의 재미만은 꼭 챙겼으니, 이건 뭐 본인만의 무기를 흉기처럼 다뤘다고 해야겠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그러니까 이 작품의 메인 테마는 ‘성(性)‘이다. 에로티시즘을 강조하기보다 그 욕망에 깃든 기질을 다루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나는 자신의 육체가 지닌 매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적극 활용하여 원하는 바를 모두 이뤄낸다. 혹여 그 과정 또는 결과에서 현타라도 왔다면, 그녀의 ‘인간다움‘은 지켜냈을지언정 작품성은 떨어졌을 거다. 처음부터 나나는 ‘성‘으로 꽃피우고 진다는 결말이었을 테니까. 것보다 나나라는 인물의 개인사가 너무 없어서 투박한 캐릭터가 된 점이 아쉽다. <목로주점>에서 죽은 엄마를 떠나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나이를 먹어왔고, 어떻게 배우로 발탁되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많은데 전혀 언급이 없더라. 여하간 이번 작품은 졸라에게 실망한 점이 수두룩 빽빽하다. 그나마 재미없단 걸 알고 봐서 다행이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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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4-10 15: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나 진짜 재미없었어요 ㅜㅜ

물감 2024-04-10 16:30   좋아요 0 | URL
동의합니다. 제가 알던 에밀 졸라가 맞는지 의심스러웠어요...

꼬마요정 2024-04-10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나 읽다가 말았어요ㅠㅠ 책은 두꺼운데 진도가 안 나가니 그냥 던져놨어요ㅠㅠ 근데 물감 님 리뷰는 재밌네요^^

물감 2024-04-10 18:25   좋아요 1 | URL
리뷰가 다행히도 먹혔군요 ㅎㅎ 의리로 완독하긴 했지만 저도 확 던지고 싶었어요!!

stella.K 2024-04-10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품>이란 소설과 <목로주점>인가를 오래 전 읽다 너무 기분이 졸라 안 좋아서
그후론 졸라는 좀...
그런데 말씀하신 사항은 졸라만 그런 건 아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옛날 작가들은 페이지 수에 따라 돈을 더 받을 수 있다나 뭐라나 그래서
도스토예스키도 그렇고 여타의 작가들이 그렇게 악마적으로 길게 글을 썼다더군요.
졸라도 그렇지 않을까요?

물감 2024-04-10 22:56   좋아요 1 | URL
이 책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전 졸라를 좋아합니다. 그러고보면 스텔라 님과 저의 작가 취향은 겹치질 않네요, 천명관 작가 빼면요ㅋㅋㅋ
말씀하신 원고료를 저도 감안하는 편인데요, 리뷰에 적었듯이 이 책은 정말 내용과 상관없는 문장이 많았어요. 다른 작품에서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stella.K 2024-04-11 11:36   좋아요 1 | URL
ㅎㅎ 기다려 보십시오. 분명 겹치는 작가가 천명관 말고 더 있을 거예요. ㅋㅋ

아참, 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 제르미날을 영화로 본 적이 있네요. 원작은 아니지만 졸라가 이런 작품도 썼구나 좀 경탄했지요. 근데 물감님은 작품이란 소설은 읽어보셨을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졸라가 글은 잘 쓰는 것 같기는한데 너무 무겁고 칙칙하다 뭐 그렇다는 거죠. ㅋ

물감 2024-04-11 12:18   좋아요 1 | URL
목로주점, 제르미날, 인간짐승, 나나 총 4권 읽었어요. 작품은 나중에...ㅋㅋ 제르미날 영화가 있었군요. 참고하겠습니다.
확실히 졸라의 글은 묵직하고 자비 없긴 해요ㅋㅋㅋ그래서 텀을 길게 두고 읽어야만 합니다😅😅😅

은오 2024-04-11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목로주점도 읽다 덮은 기억이.... 전에도 물감님께 배경묘사 상상 안된다고 말씀렸다시피 전 배경묘사 세세하게 하는 자연주의 작가들 소설 너무 힘들더라고요. ㅠㅠ 실컷 설명해놓고 금방 극단 때려치운거 너무 열받는다!!!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4-04-13 18:42   좋아요 1 | URL
저도 세세한 묘사는 질려요ㅋㅋㅋ옛날 사람이라 그런가보다 하는거지, 현대 작가였으면 바로 손절했습니다😩 각자 본인한테 맞는 거 읽어야죠ㅋㅋㅋ
 
죄와 벌 지만지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시리즈 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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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독서를 게을리했다. 핑계를 대자면 올해 들어서는 독서보다 운동을 더 많이 하고 있어서 그렇다. 나날이 바뀌어가는 몸의 변화를 보는 재미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것이 독서의 재미를 훌쩍 뛰어넘고 있어서 어차피 자주 못 읽을 거면 벽돌책이나 읽자 싶어 고른 게 <죄와 벌>이다. 심사숙고한 끝에 ‘지만지‘에서 나온 번역본으로 골랐는데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어지간해선 번역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편인데, 김정아 역자의 글은 내내 감탄하면서 읽었다. 뭐 그건 그거고, 사실 지금 리뷰쓰기가 너무나도 막막한 상태다. 맨날 야금야금 읽어대서 그런지 메인 스토리만 기억나고, 그밖에 서사들은 부분적으로 떠올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도스토옙스키의 리뷰만큼은 신경 좀 많이 써주자 했었는데 안되겠다. 빠른 포기.


워낙 유명해서 요약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적어보자면, 법대생 R군이 전당포 노파와 동생을 살해하고 도망친 뒤에 평범한 시민인 척한다는 내용이다. 나는 주인공이 쭉 양심의 고통을 받다가 큰 시련을 겪고 개과천선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주인공을 교만한 다크 히어로와 마음만은 따뜻한 츤데레 빌런의 중간지점에 놓아두었다. 그리하여 정신이 왔다 갔다 해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가 탄생된다. 그는 잘못된 사상과 헛된 정의감에 심취하여 본인의 행적을 정당화하기에 바쁘다. 물론 이런저런 고뇌에 빠지긴 했지만 내가 기대했던 선과 악의 대립하고는 모양새가 많이 달라 아쉬웠다. 듣자 하니 성경 속 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온 터라 어쩔 수 없었겠구나 싶다. 빠른 납득.


노파의 살인 사건이 초반부에 나와버려, 이 많은 분량을 대체 무엇으로 채웠을까가 가장 궁금했다. 근데 어랍쇼, 사건의 후폭풍 장면은 금방 사라지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버리는 게 아닌가? 난 뭔가 살인자의 위태로운 양심고백과 선에 대한 집착 같은 내면의 고군분투를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근데 읽어보면 알겠지만 R군이 구제불능 사이코패스 같은 인물도 아니며, 오히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를 생각하는 썩 멀쩡한 청년으로 나온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태연함과 고상함이 흡사 물과 기름처럼 느껴졌달까. 딱히 두 자아의 공존까지는 아닌데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이 더 큰 것도 아니었으니, 고것 참 저자의 의도가 아리송송했다. 그러다 제2의 주인공인 소냐가 등장하면서 R군이 누군가의 도약을 위한 촉매제 역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려 1866년 작품이던데 어떻게 이런 구도를 짤 생각을 다 했을까. 그저 놀라운.


가족들을 먹여살리려 매춘부가 된 소녀. 자신의 등골을 뽑아먹는 가족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소냐는, 이 거칠은 러시아 땅에서 홀로 남은 신실한 기독교인이라 하겠다. 술독에 빠진 소냐의 부친이 사고로 죽자, R군은 없는 돈 다 털어서 장례비를 마련해 주고, 이를 계기로 소냐와 가까워지게 된다. 소냐의 남다른 심성을 구원의 빛줄기로 받아들인 R군은 마침내 커밍아웃을 시도한다. 이로써 매춘부가 된 기독교인과 살인한 법대생의 동맹 비스무리한 감정이 생겨나고, 비록 말은 안 했지만 서로가 자신의 유일한 출구임을 인지한다. 그러는 한편, 자신의 허물을 모조리 받아주는 소냐를 보며 ‘이건 또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 소냐를 밀어내고 전처럼 고독한 은둔자로 돌아가 세상을 왕따시키는 주인공. 대체 그녀에게서 뭘 얻겠다는 거냐면서 계속 멘붕과 현타를 반복하는 그의 원맨쇼가 쭉 같은 패턴이라 솔직히 질려버렸다. 이게 다 원고량이 많을수록 돈을 더 벌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이해는 한다만, 분량 조절 실패의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R군은 자신이 짊어진 죄의 형벌에서 어떻게든 해방되고 싶어 안절부절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였고, 자수할 마음을 먹다가도 무너지기 일쑤였다. 이렇듯 그에게도 선한 양심은 남아있었지만 생존본능과 방어기제가 모든 걸 누르고 앞질렀다. 그렇게 자신의 범죄가 인류의 진보를 위한 첫걸음이자 밑거름으로 여겼다. 또한 그는 국가의 혁명을 위해 적들을 죽여나간 나폴레옹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런 사상에 입각하여 자기가 ‘이(벌레)‘를 제거했다고 생각한다. 죽은 노파가 무슨 사회의 악이라도 된다는 것마냥. 그러나 죄 없고 선한 노파의 동생의 죽음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동생과 친했던 소냐한테라도 사죄해서 해방감을 느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소냐의 심성이 성직자 뺨칠 정도로 거룩하고 정결해서, 이거 잘못 건드렸다간 무신론자인데도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만 같았으니 그냥 발뺌할 수밖에 없는, 참으로 모양 빠지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쯤 되면 결말은 다 정해져있는데 계속해서 겉도는 상황들이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몇 번 더 재독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려나.


두 주인공이 저지른 죄에 대해 말해보자. 해설에서 R군의 죄는 법률·법규를 위반한 ‘Criminal‘이고, 소냐의 죄는 도덕·윤리를 배반한 ‘Sinner‘로 분류했다. 명백히 전자가 더 악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죄와 벌>은 후자 쪽에 무게를 두고 있어, 자칫 논란거리가 되기 쉬운 작품이다. 물론 끝에 가서는 R군이 자수하고 시베리아로 가서 수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죗값을 치르는, 나름의 권선징악이 실현되기는 한다. 죄에 빠진 R군이 소냐로 인해 교화되고 거듭나는 이 과정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얻고 구원에 나아감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R군의 죄와 고통을 함께 감당하고 짊어진 소냐는, 인류를 구원하러 나타난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서사가 탄생된 배경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실제로 수년간 유배생활을 하였고, 그 기간 동안 읽었던 신약 성경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성격은 <죄와 벌> 전과 후로 나뉜다고 했다. 이전까지도 인간의 심리를 파고들며 삶을 움직이고 결정짓게 하는 요인에 대해 다뤄왔지만, <죄와 벌> 이후부터는 그의 세계관이 현실을 벗어나 영의 세계로 뻗어감을 알 수 있다. 표현 그대로 신들린 듯한 글쓰기가 시작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죄와 벌>에는 두 사람 말고도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글이 길어질까 봐 다른 내용들은 리뷰하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 R군보다 여동생의 혼사 이야기 쪽이 더 흥미로웠다. 아무튼 손가락 가는 대로 끄적거리긴 했는데 영 실망스러운 글이 돼버렸다. 훗날 재독하게 되면 제대로 칼을 간 리뷰를 써봐야겠다. 근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장담은 못 하겠다. 자 그럼 다시 쇠질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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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4-02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맘 알 것 같습니다. 같은 경우는 아니겠사오나 전 오랫동안 다리 관절이 안 좋아서 이러고 살아야하나 좀 우울했는데 요며칠 전부터 스트레칭 효과를 보는지 정말 오랜만에 내 다리로 걷는 기분입니다. 저한테도 이런 때가 오다닛! 그러니 물감님은 어떠시겠습니까? ㅎㅎ
홍대화 거로 오래 전에 읽었는데 채수동 것도 좋다고 해서 사 놓고 읽지는 않고 있습니다. 저란 인간은 참...ㅠ
이 번역본은 그냥 눈에만 담이둬야 할 것같습니다.

물감 2024-04-02 16:57   좋아요 1 | URL
저도 교통사고 때문에 몸이 진짜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요, 이 악물고 살을 빼고 근육을 키워놓으니 정말 살맛 납니다! 체력도 급 늘었어요ㅎㅎㅎ 그래서 독서랑 멀어지고 있지만요...

번역본이 많을수록 오히려 고르기가 어렵더라고요. 게다가 싸지도 않으니 더 신중하게 되더라는ㅎㅎ 언젠가는 읽지 않을까요? 계속 눈팅은 해두셔요😎😎😎

페크pek0501 2024-04-16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죄와 벌을 두꺼운 전집으로 30대 초반에 읽었는데 큰 충격을 받았었죠. 전당포 노인 같은 사람을 죽이면 모든 빚이 청산되니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 주는 일이 되는 것이 그럴 듯해 충격, 결국 주인공이 구원을 받는 대상이 매춘부라는 사실에 충격. 신선했어요. 그때만 해도 제가 젊고 순수했는지라 감흥을 느꼈죠. 저에겐 이 책이 재독할 책 리스트에 있어요. 그 두꺼운 분량을 무엇으로 채웠는지 다시 살펴보고 싶어서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물감 2024-04-16 22:33   좋아요 1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완독에 서평까지 오래걸린만큼 보람도 있네요 ㅎㅎ
저는 성경이 모티브인 작품들을 참 좋아하는데요, 그래서 이 작품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요. 물론 서사 자체만으로도 인상적이긴 하구요. 이 책을 포함해 많은 고전들이 젊어서 읽기엔 절반도 흡수하지 못할 듯해요. 그래서 꼭 재독했으면 싶지만 읽어야 할 책들이 넘쳐나므로, 저는 나이들고 읽어서 차라리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자주해요 ㅋㅋㅋ 페크님 재독한다면 요 지만지 버전으로 하세요. 번역이 정말 훌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