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슬픔의 거울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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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부아르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을 읽었다. 사실 말이 3부작이지, 이어지는 내용도 아니라서 다 챙겨 본들 대단한 재미는 기대하기 어렵겠다. 공쿠르 상을 받은 <오르부아르>는 확실히 좋았다. 명확한 스토리라인과 탄탄한 전개와 입체적인 캐릭터 등등. 그런데 차기작인 <화재의 색>은 분위기가 확 어두워진 데다 이렇다 할 스토리도 없어서 굉장히 당황했었다.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우리 슬픔의 거울>도 영 실망스러웠는데, 서사는 많으나 알맹이는 부실하고, 간간이 있는 블랙 유머가 되려 흐름에 방해만 되는 꼴이었다. 3부작이라길래 <오르부아르>의 진지한 듯 병맛스러운 코드로 쭉 밀고 나갈 줄 알았더니, 이거야 원 저자의 명성을 느낄래야 느낄 수가 없네 그래.


크게 세 명의 시점이 교차하는데 요약하려니 짜증 나서 그냥 생략하련다. 궁금한 분들은 다른 리뷰도 많으니까 그거 읽으시길. 각각의 이야기가 전혀 매력도 없고, 연관성도 없이 따로 놀고, 뭔가를 시사하려는 게 보이긴 하는데 계속 간만 보는 기분이라,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나 되뇌면서 꾸역꾸역 읽었다. 그래도 한때 좋아했던 작가로서 의리로 버텼지만 르메트르도 이제 떠나보낼 때가 된 듯하다. 보아하니 옛날 같은 스릴러소설은 손을 떼셨고 이런 작품들만 쓰실 듯한데 글쎄요, 갈수록 약빨이 떨어지는 게 느껴진단 말입죠. 아직 프랑스서는 먹어주는지 몰라도 코리아 갬성과는 점점 멀어지고만 있습죠. 내 혹시 몰라서 별점 높은 리뷰들을 싹 훑어봤걸랑? 어쩜 신뢰 가는 글이 단 하나도 없더라고. 별점의 정당성을 위해 억지로 늘어놓은 칭찬들, 싫다 증말. 날도 더운데 이런 영양가 없는 글에 에너지 쏟을 이유도 없지만, 적어도 르메트르에게 인사 정도는 해야겠기에. au rev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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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6-28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번째 문단의 글에서 빵 터짐. 하하~~
<스토너>를 읽으셨나요? 엄청 멋진 소설입니다. 이번에 읽고 반해 버렸어요. 물감 님께 추천합니다.
스토너의 리뷰를 쓰신다면 쓸 게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물감 2023-06-28 16:25   좋아요 0 | URL
스토너는 명작이죠! 이달의 리뷰 당선도 되었답니다 ^^
갑자기 왜 그 책을 언급하셨는진 모르겠네요ㅎㅎ 혹시 몰라 링크 남깁니다.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3150048

페크pek0501 2023-06-28 16:37   좋아요 1 | URL
까르르~~ 물감 님의 리뷰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어쩐지 아까 댓글을 쓰면서 물감 님이 읽으신 것 같단 생각이 살짝 스쳤어요. 예감 적중!ㅋㅋ
스토너, 얘기를 꺼낸 건 제가 어제까지 읽어 완독한 책이라서요. 재독하고 싶을 만큼
멋진 소설이었어요. 마지막에 슬프기까지 하더군요. 스토너의 아내는 끝까지 악당이라 놀랐어요. 연민도 없는 것 같아요. 겉으로만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욱 스토너가 안 됐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참을성이 많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리뷰들을 보면 평범한 사람의 펑범한 인생이라는 글이 많았던 것 같은데 저는 다르게 봅니다.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인생, 으로 읽혔어요. 글감 님의 리뷰를 다시 보러 갑니다. 주소 남겨 줘서 고맙습니다...슝~~^^

2023-06-28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28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3-06-30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가 도서관에 신청해놓고 안 읽고 있는 책인데 ... 아 별로군요. ㅠ
저도 병맛스럽지만 서스펜스와 유머가 살아있는 <오르부아르>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두 번째 <화재의 색>은 좀 실망했거든요.
아쉽네요.😪

물감 2023-06-30 17:38   좋아요 0 | URL
원래 기획한 대로 쓴건지 스타일이 변한건지 통 모르겠어요 ㅋㅋㅋㅋ
글맛도 없고 재미도 없고 메시지도 뭐 딱히...
이거 말고 다른 3부작이 또 나올건가봐요. 전혀 기대가 안됩니다 ^^
어차피 읽을 건 많으니까요 하하핳
 
완벽한 삶을 훔친 여자 스토리콜렉터 75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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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더워지니까 시원한 스릴러 한 권 때려줘야지. 오랜만에 로보텀 행님의 책을 집어 든다. <조 올로클린 시리즈>로 국내에 이름 좀 날리신 양반인데, 줄곧 폭발적인 재미를 보여주더니 어느샌가 시들시들해져 이빨 빠진 맹수가 돼버린 분이다. 현재까지 나온 시리즈 8편까지는 다 읽었고 실망감에 그만 하차했는데, 그놈의 정이 뭔지 스탠드얼론은 별개니까 의리로 읽어주자 싶어졌다. 근데 사실 <라이프 오어 데스>도 실망스럽긴 했다. 하여간 시리즈물 쓰는 작가들은 대체로 스탠드얼론을 못 쓴다는 팩트가 있는데, 어쩐 일로 이번에는 그 선입견이 빗나갔더랬다. 어쩌면 감각이 녹슬었다는 피드백을 반영했는지도 모르겠고.


출산일이 비슷한 두 임산부가 있다. 출신, 교육, 가정 등 모든 게 완벽한 A를 동경하고 숭배했던 B. 언제나 멀리 숨어서 A의 행동거지와 취향을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그녀의 삶을 카피하고 싶어 한다. 마트에서 일하던 B는 장을 보러 온 A에게 접근하여 친분을 쌓고, A의 출산 관련 정보를 듣는다. 그리고 A가 출산하던 날, 해당 병원에 간호사로 위장하여 신생아를 빼낸 B는 태연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품에 안긴 아기를 내 새끼라고 부르면서.


건축가 유현준이 그런 말을 하더라. 자기는 성서에 나온 스토리를 가지고 재해석한 작품을 매우 좋아한다고. 듣고 보니 나도 좀 그런 편이다. 성서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은 대개 선악의 대비를 모호하게 다루곤 한다. 그러면 꼭 딜레마가 생기는데, 거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어떤 고찰과 저자가 던지는 화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과 윤리를 뒤집어놓고 보는, 일종의 밸런스 게임 같은 발상의 전환을 나는 좋아하는 것 같다. 저자만이 알겠지만 <완벽한 삶을 훔친 여자>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두 어머니와 솔로몬의 재판‘을 재구성한 느낌인데, 각색을 잘했는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본 적 없는 신선함을 보여주었다. 가독성도 좋고 전개도 빠르긴 한데 명백히 분량 초과였다. 스킵 해도 될 장면이 많은 데다 일일이 설명하고 의미 부여하느라 숨이 턱턱 막혔다. 이건 로보텀의 직업병이자 고질병이다. 주로 정신/심리학을 다뤘다 보니 자연스레 투 머치 토커가 돼버린 것. 이 양반 혹시 책값 비싸게 받아먹을라고 이러는 건가?!


B의 과거는 역시나 한 복잡했다. 이부형제인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은 후로 B는 가족 취급을 받지 못했다. 이후 중학생이 된 B는 교회 신부와의 성관계로 임신하게 된다. 낳은 아이는 어딘가로 보내졌고, 교회에서 파문당한 B는 집에서도 버린 자식이 되었다.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외톨이가 된 B는 그때부터 아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갓난아기를 훔쳐다 엄마 노릇을 해보지만 훔쳐 온 아기들은 전부 죽었다. 하여 결혼 후 직접 아기를 낳고 싶었으나 겨우 생긴 아기는 유산되고 만다. B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고, 그렇게 남편과 이혼하여 혼자 지내왔던 것이다. 주도면밀하게 범죄를 저질렀다지만 한참 전부터 정신도 육체도 고장 나있던 그녀. 모두가 B의 흉악함을 논할 때, 심리학자 사이러스만이 그녀도 피해자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솔로몬께서 등장한 후로는 <조 올로클린 시리즈>의 패턴과 비슷한 수사라 딱히 볼 거리는 없었다. 그나마 사이러스가 후반부에 나와줘서 다행이었지, 일찍 등장했으면 금방 김빠졌을 것 같다. 아니, 솔직히 스탠드얼론에서까지 심리학자를 갖다 써야겠어? 징허다 징해.



B가 그렇게나 침 흘렸던 A의 가정도 그리 정상은 아니었다. 남편은 여기저기 끼 부리고 다녔고, A는 남편의 절친과 불장난에 놀아났다. 그리하여 남편 절친의 애를 가져버린 A. 본인의 잘못은 숨기면서 남편의 바람만 물고 늘어지는 뻔뻔함이란. 그 와중에 남편을 용서하고 가정을 수호하는 고결한 엄마의 행색을 갖추려고 기를 쓴다. 물론 남편과 자식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찐이지만, 또 남편의 외도는 절대 봐줄 이유가 없지만, 그녀도 찔리는 게 있었기에 계속해서 합리화하기 바쁜 꼴이다. 아기 납치 사건이 전국에 알려진 지금, 애 아빠가 다른 남자라는 게 드러난다면 B를 향한 비난들이 곧 자신에게로 쏟아지겠지. 이런 멘붕에 빠져있던 그녀라서, 아기를 찾으려는 목적이 본인에 대한 평판 때문으로 변해버렸다. 상대적으로 B보다 A의 사정이 딱해 보이기 쉬운데, 결코 너그럽게 봐줄 문제가 아니다. B의 범죄가 자꾸 들통나려 했듯이 A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어째서 비밀을 감추기에만 급급할까. 정말로 무덤까지 가져갈 수 있다고 보는 걸까. 이건 아니다 싶지만 얽혀있는 게 너무 많아 달리 뾰족한 수도 없어 보인다. 내가 다 괴롭다.


작중에 등장한 사이러스로 또 하나의 시리즈가 나올 거란다. 뭔 놈의 심리학자 시리즈를 두 개나 만들지? 신선도가 확 떨어지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싶지만 이미 나왔더라고. 자 이제 로보텀하고는 진짜 안녕이다. 재미난 작품은 계속 나올 테지만 매번 같은 수사 패턴에 또 실망하고 싶지가 않아요. Long Good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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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도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댄 윌리엄스 그림, 명혜권 옮김 / 스푼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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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그림책이라 후딱 읽고 쓴다. 본래 이런 취향은 아니나 할레드 호세이니를 좋아해서 읽은 거다. <그리고 산이 울렸다> 이후로 몇 년째 활동 소식이 없어 아쉽네 그래. 여튼 동화책인 줄 알았던 <바다의 기도>는 아이에게 쓴 아버지의 편지였다. 아름다웠던 자신의 고향을 아이가 기억해 주길, 피난 중에도 아이만을 생각하는 아비를 이해해 주길 바랐다. 그리고 살 곳을 찾아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아무 사고가 없기를 바다에게 기도했다.


짧은 내용에서 오는 허전함을 그림으로 채워 넣어 가슴 먹먹한 감성작이 되었다. 저자는 아프가니스탄의 비애를 절제된 감성으로 시사하는 기교가 일품이다. 이 얇은 책에서도 호세이니의 애도하는 마음이 느껴져 좋았지만, 타국의 어린이들이 저자의 깊은 감성을 알기나 할까. 잠깐 그림 얘기를 하자면, 고향이 습격을 받고 사람들이 어딘가로 계속 피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바다라는 막다른 길 앞에 모두가 멈춰 선다. 붙잡을 지푸라기조차 없는 상황을 아버지는 덤덤하게 지켜보며 속삭인다. 아이가 겁먹지 않을 수 있게.


이 편지가 살아남아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면, 그들이 끝내 바다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아이는 아버지의 편지를 읽어보지도, 부모의 심정을 간직하지도 못한 채 생을 다했으리라. 이와 같이 <바다의 기도>는 난민을 태운 배가 전복했다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과거 난민이었던 호세이니 마음 또한 복잡했을 터. 각국의 피해민들을 알리기 위해 저자는 펜을 들고 세상과 맞서 싸운다. 호세이니의 인류애를 계속해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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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2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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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소설의 원조 격인 <나사의 회전>을 읽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길래 궁금했었는데, 요즘 열대야에 딱이겠다 싶어서 골랐드만 따분해갖고 혼났다. 재밌다는 평도 많으므로 이 글은 적당히 무시해도 되겠다. 내용은 생각보다 별거 없다. 두 어린이의 가정교사를 맡은 주인공의 눈에만 유령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령의 인상착의를 보모한테 말했더니, 과거에 죽은 이 저택의 관계자라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두려운데 아이들이 유령과 소통하는 기분도 들고, 자신에게는 꼭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고 있다. 이렇듯 단순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지만, TMI에 가까운 주인공의 방대한 내레이션이 오히려 역효과로 느껴졌다. 서양권 작가들의 장황한 묘사와 지나친 미사여구를 남발하는 습관을 모르는 건 아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몰입의 선을 넘지 않았을 때라야 이야기다워지고 전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생각이 너무나도 많은 탓에 한 장면을 길게 붙잡는 패턴이 반복된다. 그나마 단순한 내용이라 망정이지, 복잡했다면 엄청 늘어졌을 게 눈에 훤하다. 이 작품의 최대 단점이다.


디테일에 대해 할 말이 무궁무진한 작품이긴 했다. 작중 유령은 둘이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이들은 사실 주인공이나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뭔가를 하지는 않는다. 그저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는 게 다일뿐. 아무런 활약도 없어 맥거핀에 가깝다고나 할까. 아이들 얘기로 넘어가자. 이제 갓 입학한 학교에서 쫓겨난 소년은 집으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소년은 절대 학교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게다가 슬픈 기색 하나 없이 주인공의 교육을 잘만 받고 지낸다. 아직 학교는 못 갔지만 여동생도 마찬가지다. 두 아이는 지난 일들에 대해, 즉 자신들이 겪었던 것들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질 않는다.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전혀 맞지 않는 조숙함과 차분함이,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끔 하면서도 경계하게 만들었다. 딱히 뭐가 없는데도 설정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이게 다가 아니다. 아이들이 자꾸 어딘가를 홀린 듯이 보게 하여 화자의 불안함을 연출한다. 또한 멀쩡한 척하는 아이들의 보호와, 유령을 알아내려는 주인공의 괜한 심리에 젖게 한다. 이처럼 빠져들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 요소는 충분히 활용한 셈이다. 사실 칭찬보다는 태클을 걸어야 할 게 산더미인데, 문제는 저자가 의도적으로 곳곳에 함정을 파 놨다는 거. 아무 생각 없이 읽어나가서 잘 몰랐지만 이렇게 독자와 밀당하는 작품을 꽤나 좋아한다. 역시 소설은 분석하는 맛이제.


일단 주인공이 어째서 아이들과 유령에 관한 얘기를 금기시하는지가 의문이다. 살아생전 유령들이 아이들과 어떤 사이였는지, 이 집에 어떤 가정사가 있었는지 작중에서 전혀 언급된 게 없다. 두 아이를 오래 지켜본 바, 감정 기복이 심하지도 않고 대화 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그러니 자리를 만들어 차분하게 대화를 좀 했으면 싶은데, 주인공 혼자만 짊어지려는 태도로 내내 회피하며 빙빙 돌고 있다. 결국 말만 하고 지켜보기만 했을 뿐, 어떤 행동이랄 것도 없으면서 이상한 사명감에 빠져가지고 그냥. 아니, 사명감보다도 아이들한테 휘어잡혔다는 쪽이 더 맞겠다. 점점 묘한 낌새를 느끼고도 계속 눈 가리고 아웅하며 과잉보호하는 주인공. 교사가 아이큐만 케어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뭘 자꾸 주제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건지. 지금 말한 것들은 저자의 의도적인 설정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유령한테 쫄지 않는 걸 보면 딱히 새가슴도 아니던데, 유독 아이들 앞에만 서면 깨갱하는 성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태클은 이쯤 하고.


<나사의 회전>은 일부러 설명을 빼놓아 모호한 해석을 낳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소년의 퇴학 사유, 부재중인 집주인, 유령들의 과거, 유령과 아이들의 교감, 보모의 과잉 불안, 그 외 필요한 여러 가지가 누락되어 있다. 그런고로 다양한 해석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많은 해석 중 나는 주인공이 공포로 인해 살짝 맛이 간 거라는 쪽이 그럴싸했다. 다른 이들이 거짓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유령이 보이는 건 주인공뿐이다. 그녀 눈에는 아이들이 유령과 교감하는 듯 보였다지만, 두 아이는 유령과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고 아는 척하는 장면조차 없었다. 이게 주인공 시점에서 보면 모두가 의심스럽게 보이나, 제 삼자의 시점으로 보면 주인공의 과대망상 히스테릭처럼 비춰진다. 근데 또 유령의 생김새까지 맞췄으니 헛것을 봤다고도 할 순 없다. 이처럼 어느 관점에서 해석을 하더라도 꼭 찝찝한 데가 있는 묘한 작품이다. 해석이 더 재밌는 작품이라니, 에라이.


아무래도 읽으면서 카프카가 계속 생각났다. 카프카 역시 이야기 속에 구멍을 파두기로 유명하다. 다만 카프카는 작품이 해석 받기를 거부해서였고, 제임스는 그 반대라는 점이 다르다. 닭이냐 알이냐 식의 끝없는 해석을 낳았으니 형태는 달라도 뿌리는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공통점이라면 이야기를 맛깔나게 쓸 줄 모른다는 건데, 주제나 화두가 괜찮대도 베이스가 밋밋하면 의도한 게 눈에 안 들어온단 말씀. 허나 고전이 투머치한 맛으로 보는 거라면 참아야지 뭐 어쩌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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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20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헨리 제임스의 소설 몇 권을
수배해 두긴 했는데...

읽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나사의 회전>은 왠지 시공사
버전으록 구하고 싶은데 잘 안
보이네요.

해석을 환영하는 헨리 제임스
의 소설, 만나 보고 싶습니다.

물감 2023-06-20 10:08   좋아요 1 | URL
저도 사실 다른 번역본을 원했는데 포기하고 도서관에 보이는 거 집었습니다. 그냥 무난했어요 ㅋㅋ

출간 시대를 고려하면 꽤나 참신하더라고요. 그리고 해석을 거부하질 않아서인지 다각도로 접근하는 재미가 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뭔가 글 자체가 낡았다는 기분은 지워지지 않네요😓

coolcat329 2023-06-20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그렇군요. 이 책은 너무 기대하면 재미없을 거 같아요. 시공사로 저도 읽어봐야 겠습니다.

물감 2023-06-20 10:15   좋아요 2 | URL
영화나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는데 원작의 신비함을 표현할 수 없어 망했다나봐요. 확실히 초자연적 신비함은 느껴졌어요. 비록 점수는 짜게 주었지만 필독 고전문학은 틀림없어보입니다^^

잠자냥 2023-06-20 11: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 껍데기 벗기고 책등 살펴보시면 재미난 거 발견할 수 있는데... 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6-20 11:28   좋아요 0 | URL
제가 빌린 건 이름 잘 써져있네요ㅋㅋ

잠자냥 2023-06-20 22:44   좋아요 0 | URL
2쇄를 찍었다니 놀라워요. ㅋㅋㅋㅋ 아님 2판인가…

물감 2023-06-20 22:57   좋아요 0 | URL
‘세계문학판 1쇄‘라고 적힌 걸로 봐선... 잠자냥 님의 뽑기가 실패였는지도...ㅋㅋㅋ

새파랑 2023-06-21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사의 회전> 이라는 제목부터가 그냥 어려워 보입니다 ㅋ
내용도 그렇군요. 헨리 제임스 왠지 어려워보여서 시도도 못하고 있습니다 ㅜㅜ

물감 2023-06-21 12:12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이 평소 읽는 책들에 비하면 이 책은 매우 쉬울 걸요 ㅋㅋㅋ
적어도 이 책은 난해하거나 복잡하다는 인상은 없었어요.
제임스도 작품이 많던데, 새파랑 님도 도전해보셔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3-06-21 15:34   좋아요 1 | URL
읽다 보면 나사 빠짐

새파랑 2023-06-21 15:56   좋아요 1 | URL
앗 ㅋ 저 요새 나사 빠져있는데 보면 안되겠군요 ㅋ
 
9시에서 9시 사이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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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괜찮은 이야기꾼을 발견했다. 레오 페루츠라고, 1882년 프라하 출신의 작가다. 지금껏 나는 체코랑 안 맞는구나 싶었는데 이 작품은 내가 알던 체코인의 냄새가 전혀 안 났지 뭔가. 근데 또 보니까 오스트리아 문학으로 분류가 되어있다. 그런즉 뼛속까지 체코 감성은 아니란 말이렸다. OK. 합격. <9시에서 9시 사이>는 읽는 게 느린 나조차 하루 만에 다 읽었을 만큼 훌륭한 가독성을 보여준다. 중편 같은 장편이라 할 말이 많지 않으므로 짧게 리뷰하겠다.


대학생 뎀바는 다른 남자와 장기 여행을 가려는 애인 때문에 반쯤 미쳐있다. 떼를 써봐도 끄떡없는 그녀에게 막무가내로 조건을 건다. 내가 정한 시간까지 여행경비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예정대로 떠나도 된다는. 이제 돈 받으러 돌아다니는 뎀바의 수난시대가 펼쳐진다. 발품 팔아서 돈을 모으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다만 끝에 가서 꼭 상황이 꼬여버렸다. 매번 계획이 틀어져도 불평 한마디를 못하는 뎀바. 그게 다 양손을 결박한 수갑 때문이었다.


뎀바는 수갑 찬 손을 감추고자 실내에서도 외투를 입고 다닌다. 것도 그건데 절대 손을 쓰지 않았으니 남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돈도 구해야 하고, 남들한테 들켜서도 안되는 긴박한 상황이라 잔뜩 쫄아있는 주인공. 매사에 예민하게 굴어대니 오히려 원치 않는 관심사병이 되고 말았다. 이게 다 그놈의 수갑 때문인데, 음... 스포일 수도 있겠지만 수갑을 빼놓고는 도저히 리뷰할 수가 없어 양해 바람. 뎀바는 지금 본인의 처지보다 애인이 떠난다는 게 훨씬 심각한 문제다. 하여 내내 맛이 간 태도로 만인의 비호감이 되었지만, 이유가 분명했기에 아무리 찌질하게 굴어도 마냥 밉게는 안 보인다. 그래도 진상은 진상임.


뎀바가 그렇게 쏘다녔는데 그 많은 일들이 고작 12시간 동안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가장 난센스다. 여튼 애인을 붙잡고 싶었던 뎀바는, 어느새 목적을 잊어버리고 오직 돈 만을 쫓는 기계가 되어갔다. 또한 누구에게든지 큰소리 뻥뻥 허세 부리다가도 수갑이 들통나겠다 싶으면 곧바로 태세 전환에 들어간다. 이렇게 저자는 인간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면모를 여러 번 꼬집는다. 전개가 워낙 빨라서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명백히 주객전도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수갑 때문에 불안하고, 약속 시간 때문에 초조했던 뎀바는 끝내 일을 크게 만들어 어처구니없게 범죄자가 된다. 오, 하늘이시여.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그리고 진짜 벙찌게 만드는 엔딩이 기다리고 있다. 정말 현대 소설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세련된 작품이었다. 이렇게 감각 있는 분이 통속 작가라며 낮은 대우를 받았다는 게 참 씁쓸하다. 조만간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겠어. 그나저나 짧게 쓸랬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길어졌네. 여기서 급 마무리.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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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17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책이네요.

통속소설이라도 제 마음에 와 닿는
다면 좋은 작가/책이 아닐까요.

중고서점에 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사오고 싶네요.

물감 2023-06-17 10:19   좋아요 1 | URL
보니까 호불호 갈리긴 하네요. 나만 좋음 됐죠 뭐ㅎㅎㅎ 매냐 님의 책 사냥을 응원합니다😀

얄라알라 2023-06-17 1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넥플릭스로 나오면 딱 좋을 것 같은 내용?^^

12시간 동안 일어난 일! 요런 컨셉이 재밌더라고요

물감 2023-06-17 14:21   좋아요 0 | URL
진짜 영상화 하면 딱이겠다 싶어요ㅎㅎ 단순한 내용에 수갑 한방울 넣었을 뿐인데 엄청난 입체감이! 😀

은하수 2023-06-17 1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그럼 도서관 기웃거려 볼까요?~~~
리뷰만 봐도 웃음이 나는데요
전 우리와 다른 감성이어서 오히려 동유럽 작가들 끌리더라구요^^

물감 2023-06-17 14:27   좋아요 1 | URL
통속 소설도 좋아하신다면 이 책 나쁘지 않습니다^^ 헌데 찌질한 감성은 아시아나 동유럽이나 비슷비슷하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