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15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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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소녀가 들어간다고 혹시 소녀시대와 관련이 있는 책이라고 착각해 집어드는 독자는 없어야겠다. <소녀의 무덤>은 스릴러 마스터, 반전의 제왕 제프리 디버의 출세작으로 1995년에 출간되었다. 이미 국내에 그의 대표적인 히트작 '링컨 라임 시리즈'가 6권이나 나와 있어 적어도 확실한 재미는 보장하는 작가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으렷다.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축복받은 독자들 사이에서 링컨 라임 시리즈 외에 가장 재미있는 디버의 작품이 <소녀의 무덤>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라 디버 애호가들의 기대 또한 높았던 책인데 이렇게 우리말로 만나게 되니 반가움을 숨길 수 없다. 개인적으로도 제프리 디버 책 몇 권에 관여를 한 바가 있고, 그걸 떠나 열성팬이기도 해 기쁨 두 배라고나 할까.  

정체가 모호한 스릴러 기획자 모중석 씨가 직접 선정한다고 밝히는 모중석 스릴러 클럽의 15번째 책으로, 모중석 스릴러 클럽은 책 맨 뒤에 모중석 씨와 편집자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대체로 작가 소개나 이 책을 선정한 이유, 현지에서 받는 평가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소녀의 무덤>에 관해서는 '훗날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준 링컨 라임 시리즈의 톤을 확실히 세팅해놓았다'고 평했더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좋은 한 줄 평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 컬렉터> <코핀 댄서> <곤충 소년> 등 크게 히트한 링컨 라임 시리즈에서 작가가 트레이드 마크로 삼는 속임수, 반전, 서스펜스가 어디서 출발했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기에.

줄거리를 느슨하게 이끄는 법이 없는 디버답게 시작부터 강렬하다. 여덟 명의 소녀들을 인솔하는(한 명만 더 있으면 소녀시대잖아, 하악,,) 두 명의 여교사가 등장한다. 그녀들은 버스를 타고 멀리 떨어진 지방 축제에 참가하는 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독특한 건 그녀들이 모두 말을 못하는 농아라는 것. 비록 수화를 통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만화책 영웅에 열광하는 딱 그 또래 나어린 소녀들이다. 신나게 버스를 달리다 일행은 우연히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버스에서 내린다. 이런 데서 오지랖 넓게 남들을 도와주다 온갖 고초를 겪는 건 스릴러나 호러의 공식인 법. 주인공들이 스티븐 킹이나 딘 쿤츠의 책을 몇 권만 읽었더라도 그냥 지나쳤을 텐데...

알고 보니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오늘 새벽에 감옥에서 탈옥한 세 명의 죄수들이었다. 루 핸디를 필두로 한 피도 눈물도 없는 탈옥수들은 도망치다가 교통사고가 나자 차에서 내려 맞은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처치한 것이다. 사고 소식을 듣고 경찰들이 몰려오자 핸디는 어쩔 수 없이 도와주러 내린 열 명의 농아학교 일행들을 인질로 잡고 버려진 도살장 안으로 잠입해 농성 태세에 돌입한다. 한편 인질 협상의 대가 FBI요원 아더 포터는 오늘이 아내의 기일임에도 불구하고 호출을 받고 즉시 도착해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딱 35페이지 동안 일어난 일이다. 역시 디버는 페이지를 낭비하는 법이 없다!

한마디로 인질극 스릴러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인질 협상가 아더 포터와 루 핸디 사이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심리전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독자를 빨아들이는가 하면, 잔인하고 도통 죄책감이 없는 루 핸디와 어떻게든 아이들을 지켜내고 싶어하는 농아교사 멜라니 사이의 피 말리는 두뇌 게임이 교차해 읽는 동안 도저히 딴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 인질범, 협상가, 인질이라는 인질극의 세 핵심 요소들이 전부 비중있게 다뤄지며, 이런 거대한 사건의 와중에 어떻게든 끼어들어 특종을 만들겠다는 기자들, 아이들을 무사히 구원해 자신의 이미지를 드높이려는 정치꾼들까지 등장해 상황을 악화시키는 등 그야말로 현대 인질 사건의 모든 양상이 집약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언급한 대로 링컨 라임 시리즈의 모태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설정들도 자주 눈에 띈다. 전미 최고의 법의학자인 링컨 라임과 놀라운 인질 협상 성공률을 보유하고 있는 아더 포터의 전문가적인 면모가 겹치고, 링컨 라임이 각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들과 팀을 짜 활기찬 수사를 벌이는 것처럼 아더 포터 역시 심리 분석가, 컴퓨터 전문가 등 늘 함께 일하는 믿음직한 동지들과 멋진 팀웍을 보여준다. 링컨 라임 시리즈에서 디버는 매 작품마다 다양한 소재들을 깊이 있게 조사해 작품에 풀어놓는 걸 즐기는데, <본 컬렉터>가 뉴욕의 역사, <코핀 댄서>가 비행기와 항공, <사라진 마술사>는 마술의 역사와 수법이었다면 <소녀의 무덤>은 수화나 농아 세계에서의 정치적 운동 등을 묘사해내 또 하나의 볼 거리를 주는 셈이다.

하지만 약은 약사에게, 반전은 디버에게, 물어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반전을 잘 다룬다는 세평답게 <소녀의 무덤>에서 가장 칭찬해주고 싶은 부분도 역시 반전이다. 디버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사건과 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어떤 사소한 사실들도 무시하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나중에 다 기가 막힌 반전의 재료로 사용되니까. 그의 작품을 제법 봐서 그 스타일에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도 결국 또 속고야 마니 디버는 타고난 사기꾼인 것인가...

그밖에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든다. 왜 머리핀 하나를 팔아도 성의껏 온 마음을 다해야 겨우 판매가 성사되는 법인데, 하물며 인질을 무사히 내놓고 항복하라고 설득하기는 얼마나 어려울까. 아더 포터는 인질범 루 핸디와 마치 연애를 하듯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데 그에게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 인질범은 죽거나 체포되거나 둘 중 하나다. 짧게나마 인질범에게 모든 마음을 다준 아더 포터가 느끼는 상실감은 비슷한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미묘한 지점까지 잘 잡아낸 것은 감탄스러운 부분이 아닐까.

그러나 아더 포터가 주책없이 인질 중 한 명에게 지나치게 마음을 뺏겨 전문가의 면모에 먹칠을 한다거나, 주인공 중 한 명이 갑자기 스티븐 시걸로 변신하는 결말이 되면 황당한 느낌마저 들어 완벽한 디버의 최고작이라고 하긴 힘들 것 같다. 현재까지 본 디버의 작품 중에서는 <코핀 댄서>와 <곤충 소년>이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소녀의 무덤>이 그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가교라고 한다면 그래도 역시 높은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다. 애인과 싸웠거나, 지방 출장을 갔다거나 해서 무료한 하루를 때워야 할 사람이 있다면 <소녀의 무덤>이 확실한 답이 될 것이다.




p.s/ 모중석 씨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래서 일단 국적을 추측해봤다. 모 씨라는 성이 국내에서는 대단히 희귀성이니 혹시 중국인? 모택동(毛澤東)도 있으니...혹시 텐진에 사는 모중석(毛中石) 씨. 아니면 미국인일지도 모르겠다. 전 뉴욕 메츠 선수 중에 모 본이라는 타자가 있었다. 풀네임은 모리스 사무엘 본(Maurice Samuel Vaughn). 어쩌면 모중석 씨의 풀네임도 모리스 중석(Maurice Joong Suk)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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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섬 미도리의 책장 2
곤도 후미에 지음, 권영주 옮김 / 시작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동그란 얼굴의 여인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표지가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다. 무슨 서러운 사연이 있어서 이렇게 울고 있을까나, 궁금해서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다들 책을 엄청 쳐다보길래 창피해져서 조용히 집어넣고 집에 와 단 2시간 만에 다 읽고 말았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얼어붙은 섬>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고립된 섬에 갇힌 8명의 남녀가 하나씩 살해당한다는 내용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아야쓰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외딴섬 퍼즐>과 비슷하게 섬을 배경으로 한 본격 추리소설이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언뜻 떠오르는 작품이 몇 개 없어 3권만 소개했지만 사실 섬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은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격 추리소설의 무대로 작가들이 섬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섬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간다기보다는 보통 여름 휴가나 겨울 여행에 큰맘 먹고 한번씩 가는 곳이다. 도심에서의 안온하지만 심심한 일상과는 다른 뭔가 뒤틀린 비일상의 파격을 줄 수 있어서가 아닐까. 물론 더 큰 이유는 배만 끊기면 곧바로 섬 전체가 완벽하게 밀폐된 밀실이 되기 때문이겠지. 이 책에서도 역시 엽기적인 방법으로 한 명씩 죽어나가는 주인공들이, 머무르고 있는 무인도를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모터보트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숨이 턱턱 막히는 고립감과 공포감을 선명하게 전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작가 곤도 후미에는 1993년, 제4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인 이 작품으로 성공리에 등단했는데, 데뷔 연도로 봐서 아야쓰지 유키토나 아리스가와 아리스 등의 대표적인 신본격 작가군 중 약간 후배 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본격 작가들, 특히 아야쓰지 유키토 같은 작가가 트릭에만 매몰되어 있고, 지나치게 게임 감각이며, 문장이 서투르다는 혹평을 듣기도 한다면, 곤도 후미에는 언급한 여러 문제점들을 전부 피해가고 있어 나무랄 데가 거의 없다. 특히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정념과 열정에 불륜의 장미를 받아드는 화자이자 여주인공인 아야메의 섬세한 심리 묘사는 돋보인다. 8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독한 술에 한껏 취해 있으며,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가장 강력한 동기 또한 애달픈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격 추리소설에서 이 정도로 연애소설의 풍미를 자아내는 작가는 곤도 후미에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데뷔작답게 일군의 등장인물이 섬에 고립되는 과정이 슬쩍 억지스럽다거나 주인공들의 나이가 이십대라 주고받는 말은 통통 튀는데 머릿속의 사고는 지나치게 관능적이고 탐미적이라 부조화가 느껴진다거나 하는 점은 읽는 동안 좀 걸리는 부분이었지만 독서의 재미를 크게 해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본격 추리소설에서 제일 중요한 트릭과 사건의 해결이 만족스러우니까. 애거서 크리스티의 아주 유명한 두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모티브를 따와 결정적인 트릭까지 거의 그대로 재현하다시피 하는 첫번째 결말에서는 솔직히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모든 얽키고설킨 이야기들을 완벽하게 매듭짓는 진짜 결말이 기다리고 있어, 무척이나 성공적인 고전의 창조적인 재해석이라 불러주고 싶다. 추리소설을 별로 접해보지 않은 독자도, 애거서 크리스티 류의 고전 추리소설을 꿰고 있는 사람도 한방 먹일 수 있는 근사한 결말이다.

 

<얼어붙은 섬>은 1930년대 사교계에서 유행했던 드레스를 고이 간직하고 있던 할머니가 손녀에게 선물로 그 드레스를 주자, 손녀가 현대적인 디자인을 가미해 만인에게 선보임으로써 박수갈채를 받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아한 고전미에 현대의 세련된 감각이 접목된, 추리소설 팬이라면 누구나 흐뭇하게 읽고 뒤로 넘어갈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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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8-08-19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마지막 문단이 정말 멋진 리뷰네요 ^^
리뷰 많이많이 올려주세요~
추리 소설을 자주 읽지는 못해도 대리만족하고 있습니다 ^^;;;

jedai2000 2008-08-20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빠서 리뷰를 잘 못 쓰고 있는데 정말 기운나는 말씀이네요 ^^
너무 감사드립니다. 길기만 하고 별로 멋지지는 않은 것 같은데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막 힘이 나네요 ^^
 
줄어드는 남자 밀리언셀러 클럽 76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줄어드는 남자>라는 제목을 보고 흠칫 놀랄 중년 남자들이 떠오른다. 다행히 그런 중년의 고개 숙인 남자가 등장하는 섹슈얼한 내용은 아니고, 문자 그대로 하루에 0.36센티미터씩 매일 줄어들어 점점 작아지는 스콧 캐리가 주인공이다. 사춘기 시절 흔히 눈에 보이지 않게 작아지면 여자 목욕탕도 가고 짝사랑하는 아이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야지 하는 공상을 하곤 했는데, 이 책을 보고 나면 날마다 작아지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작품의 첫 시작부터 스콧은 정신없이 달리고 있다. 뒤에서 쫓아오는 집채만한 거미를 피해.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괴물 같은 거미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무작정 도망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콧은 왜 천형이라 할 수 있는 작아지는 병을 얻게 된 것일까? 그는 형과 함께 보트를 타고 바다에 머물다가 정체 모를 안개에 몸이 닿는데, 나중에 그 안개는 방사능에 오염된 것으로 밝혀진다. 이 작품이 처음 씌어진 해(1956년)가 처음으로 원자폭탄이 사용된 1945년과 비교적 가까운 시기라는 걸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비록 원자폭탄의 가해국이라지만 원폭의 가공할 위력과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재앙은 미국인들에게도 끔찍한 공포가 되었으리라는 걸 유추해볼 수 있는 설정이다.

 

<나는 전설이다> 이후 오랜만에 읽어본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이지만 아주 만족스러웠다. 여러 모로 <나는 전설이다>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책인데, 6일 후에 0센티미터까지 떨어져 망각 속으로 사라져야만 하는 주인공 스콧이 느끼는 절절한 고독과 슬픔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흡혈귀, 좀비인 세상에서 혼자 살아남아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투쟁하는 <나는 전설이다>의 네빌의 처지와 어쩜 그리 흡사한지. 외로움에 사무친 스콧이 바비인형과 한 침대에 누워 그녀(?)를 끌어안고 자는 처절하도록 안쓰러운 장면이 나오는 소설이 또 있을까. 또한 <나는 전설이다>에서 1950년대 대중소설 작가로 혁명적이라고 생각했던, 단 한 명 유일한 인간으로서의 어찌할 수 없는 네빌의 성욕을 솔직히 고백하는 장면이 이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스콧은 아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몸 크기를 갖게 되었을 때도 육체와 정신은 팔팔 뛰는 삼십대 장년의 그것이라 아내를 원하지만 몸 만큼이나 작아진 자존심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내내 번민만 한다. 스콧 부부의 아이를 돌봐주기 위해 고용한 십대 베이비시터 여자아이를 몰래 훔쳐보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스콧의 모습은 희극적이면서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 가혹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모든 훌륭한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당대의 공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아마도 작가 리처드 매드슨은 사회와 시대의 흐름이 변함에 따라 강인함과 권위를 숭상하던 기존의 남성상이 붕괴하고 있는 현상을 예민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더 이상 가족에게 어떠한 작은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남성 스콧의 작아지는 몸과 마음은 비슷한 상황에 빠져 점차 위축되어만 가는 당시 미국 남성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얻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던 건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가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낸 스콧의 강인한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타인들의 무분별한 호기심에 흥밋거리로 치부되는 걸 그토록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떠난 뒤 남겨진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수기를 써 돈을 버는가 하면, 운명에 희롱당했지만 패배자로만 남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공격하는 거미와 정면승부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절대 물러서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스콧의 모습은 진짜 남자가,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어떤 의지와 결기가 필요한지를 독자에게 일깨워줄 것이다. 예상 밖의 결말에서 스콧이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토록 통쾌하고 희망에 가득차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스콧이 보여준 용기에 감복한 작가의 흐뭇한 보너스가 아닐까.

 

표제작 '줄어드는 남자' 말고도 이 책에는 총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나는 전설이다>와 비슷한 구성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이 훨씬 완성도가 있다고 평가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데뷔작이었던 '결투'나 누구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이 괴물보다 훨씬 끔찍하게 느껴지는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등 매드슨의 대표 단편들이라고 할 만하다. <줄어드는 남자>나 <나는 전설이다>가 1950년대 작품들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리처드 매드슨의 역량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독특한 설정과 탄탄한 완성도, 깊은 감동을 자랑하는 <줄어드는 남자>는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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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시효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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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3의 시효]는 수많은 뛰어난 작가들이 우글대는 일본 미스터리계의 지형도 안에서도 그만의 경찰소설로 한 자리를 단단히 차지하고 있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연작 단편집이다. 일반적인 범죄 발생-경찰 수사의 줄거리에 경찰 조직 안에서의 치열한 암투와 갈등 그리고 화해와 단결이라는 부차적인 재미를 더하는데 명수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경찰소설은 실패할 확률이 극히 적은 주식투자와도 같다. 그는 장편과 단편을 골고루 내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장편보다는 단편들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이 작가의 미스터리 트릭은 비교적 단순한 게 많아 장편 하나를 온전히 끌고가기는 힘에 부치는 편인데다 감동적인 마무리에 다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장편은 독일 기계처럼 정교하게 돌아가는 조직 안에 충격적인 상황이 연속되면서 그에 따른 조직원들의 극적인 반응을 계속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스타일이라 읽는 동안 끊임없는 몰입감과 박력은 줄지언정 우리나라 독자들이 유독 좋아하는 기발한 트릭과 반전은 별로 제공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요코야마 히데오의 단편은 다르다. 장편에 쓰기에는 조금 약하지만 단편에는 멋지게 녹아들 수 있는 준수한 트릭이 등장하며 아무래도 길이가 짧아서인지 감동에 대한 강박도 장편만큼 느끼할 정도로 심하지는 않은 것 같다. 기자 출신답게 늘어지지 않는 간결한 문장과 빠른 호흡, 타고났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박진감 넘치는 글솜씨로 책을 독자들의 손에서 절대로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단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들이 모여 있는 책이 바로 오늘 소개하려는 [제3의 시효]가 아닐까 싶다. 앞으로 창창한 날이 남아 있는 작가니만큼 이보다 더 뛰어난 걸 쓰지 못한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요코야마 히데오의 최고작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F현 경찰청 강력계의 세 반을 무대로 펼쳐지는 여섯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각 반 반장들의 각기 다른 매력과 개성적인 수사법이 기막힌 즐거움을 보장한다. 절대 웃지 않는 1반 반장 '파란 귀신' 구치키는 경찰청 내 최고 엘리트 집단의 수장답게 어디까지나 정공법으로 용의자를 압박하고 진실을 밝혀낸다면, 2반 반장 '냉혈한' 구스미는 공안 출신답게 위법에 가까운 편법과 도박성 강한 함정수사 등으로 절차야 어떻든 범인만 잡자 주의다. 3반의 '검독수리' 무라세는 천재 수사관이라는 세평처럼 범죄에 관한 직감이 비상해 현장만 보고도 대충 범인의 윤곽을 그려낸다. 진정한 경찰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범죄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이 세 반장이 각자 활약하다 때로 부딪치고 가끔 협력하며 난해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게 단편들의 기둥 줄거리. 물론 '조직'과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며 부대끼는 '사람'을 그리는데 독보적인 히데오의 작품이니만큼 능력이 뛰어난 세 반장을 제대로 휘어잡지 못해 약간의 굴욕감을 느끼는 다하타 과장이라든지, 어린 시절 범죄의 꼭두각시로 이용되었던 젊은 형사 야시로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오는데 역시나 명불허전이라 할 정도로 잘 빚어진 인물들이다.

 

보통 이런 단편집을 보면 탁 튀는 놈이 한두 개 있고 나머지는 고만고만한데 비해 [제3의 시효]는 수준이 비교적 고르다. 놀랍게도 아주 높은 수준에서 고르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단편 <흑백의 반전>이 약간 억지스러운 설명이 있어 살짝 떨어질 뿐, 증명하기도 힘들고 효과도 별로 없을 것 같은 알리바이를 줄기차게 내세우는 용의자의 비밀을 파헤치는 <침묵의 알리바이>, 출입구가 봉쇄된 맨션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조직 폭력배를 수사하는 <밀실의 탈출구>, 십여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청산가리 연쇄독살 사건을 그린 <페르소나의 미소> 같은 작품들이 모두 재미있고 완성도가 뛰어나다. 하지만 이 단편집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표제작인 <제3의 시효>에 비춰져야 마땅한 것 같다. 2반 반장 피도 눈물도 없는 구스미의 악마 같은 카리스마에 전율을 금치 못할 작품으로 그는 15년이라는 살인 공소시효가 지나 공식적으로 소멸되어 버린 강간살인 사건에 도전한다. 도피 중인 용의자는 시효 기간 안에 대만에 일주일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외국에 나가 있는 기간은 시효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용의자의 진짜 시효는 15년 하고 7일. 그러나 2반 형사들의 노력에도 제2의 시효가 끝나도록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낙담하는데 구스미는 지시를 멈추지 않는다. '제3의 시효'가 있으니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경악할 정도로 기발하달 수 있는 제3의 시효 때문에 결국 용의자는 잡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또 다른 반전 그리고 또 한번의 뒤집기. 구스미는 사중, 오중의 함정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근래 읽어본 단편 아니 국내에 나온 모든 2000년대 일본 미스터리 단편들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 라고 말할 수 있다. 몇 번의 뒤집어지는 반전의 연속과 더불어 작가 특유의 감동과 인간미가 배합되어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물론이요 요코야마 특유의 문체 맛도 일품이다. 단문, 아니 아예 한 단어, 혹은 두 단어로 한 문장을 만들어 긴박감과 속도감을 배가시키는 솜씨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작가다. 지금 책이 곁에 없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느낌.
-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 3의 시효가 남아 있다."
수사 속행? 형사들이 모인 방에 폭탄이 떨어졌다. 모두 경악. -

 

경찰소설의 장인이 모든 역량을 다해 써낸 [제3의 시효]는 사실 [강력1반]이라는 만화책으로 출간된 적이 있고, 여섯 개의 단편 중 네 개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강력1반]을 예전에 읽은 바 있어 썩 기대가 크진 못했는데 과연 원전에 범접하는 리메이크는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들게 만들었다. 얼핏 F현 경찰청의 새 시리즈가 연재되어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일본서 책으로 묶여 나오면 우리나라에서도 반드시 또 만나고 싶다.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단편집으로 특히 표제작 <제3의 시효>는 3년에 한 번 꼴로 다시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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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8-07-10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죠^^

jedai2000 2008-07-10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요코야마 히데오, 최고죠 ^^b
 
청색의 수수께끼 밀리언셀러 클럽 82
아베 요이치 외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청색의 수수께끼]는 일본 추리소설계의 등용문으로 알려진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하고 등단한 작가들의 중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란포 상은 추리소설 거장 에도가와 란포가 사재로 후원해 1955년에 시작했고, 3회째인 1957년부터는 장편 추리소설 공모를 통해 그중 우수 작품을 시상해 오늘에 이르렀다. 물경 50년이 넘는 동안 많은 추리작가들이 이 상으로 데뷔했는데, 현재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리무라 세이이치, 히가시노 게이고, 기리노 나쓰오 등의 작가들도 이 란포 상이 없었다면 추리작가로서 먼 길을 돌아와야만 했을 것이다. [청색의 수수께끼] 말고도 [적색]이 동시에 나왔고, [흑색]과 [백색]도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1989년 제35회 수상자인 나가사카 슈헤이부터 2003년 제49회의 시라누이 쿄스케, 아카이 미히로까지 그 기간 안에 상을 탄 거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이 선을 보여 현대 일본 추리소설의 흐름을 엿보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총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된 [청색의 수수께끼]의 포문은 1990년 수상자인 아베 요이치의 <푸른 침묵>이 연다. 고향에서의 희망 없고 지루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도쿄에 왔건만 햄버거 가게 비정규직으로 근근히 먹고 살며 하루하루 나이만 들어가는 여주인공 나오코에게, 친구지만 자신과 달리 원대한 푸른 꿈을 안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치에는 우상이나 다름없다. 그런 사치에가 애인과 더불어 동반자살한 시체로 발견되고 더구나 몸을 파는 일을 했다는 걸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 나오코. 사치에는 그런 애가 아닌데...친구의 불명예를 벗겨내기 위해 나오코는 조사를 결심하게 되고 조사 뒤에는 전 일본을 떠들석하게 만들 비밀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평범한(?) 동반자살 뒤에 커다란 음모가 숨어 있다는 설정은 [점과 선] 이후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자주 쓰이는 소재라, <푸른 침묵>이 일본 사회파나 하드보일드의 전통 아래 씌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살인사건과 독자적인 조사, 의문의 조력자, 의외의 결말까지 사회파의 클리쉐들이 너무도 도식적이고 기계적으로 나열되는 느낌이 강한 데다 일본 유력인사의 비밀스런 엽색 행각, 북한 공작원의 위협, 불법 카지노 등 100페이지 남짓한 분량 안에 너무 많은 사회 고발을 하려 해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기분이다. 원고료를 미리 땡기고 미루고 미루다 마감일 직전에 겨우 써낸 듯한 작품이라고 하면 지나친 실례일까.

 

<다나에>는 반가운 후지와라 이오리의 작품이다. 1995년작 [테러리스트의 파라솔]로 란포 상과 나오키 상을 더블 수상한 초유의 쾌거를 이룬 그는 전공투 세대의 아픈 기억과 회한을 허무하고 하드보일드한 필치로 담아낸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이후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왔다. 제목은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렘브란트의 명화 <다나에>에서 따왔으며, 유명 화가의 그림에 화학 약품을 투척해 그림을 훼손시킨 사건과 그 사건 뒤에 감춰진 가슴 아픈 비밀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역작이 망가진 유명 화가가 왜 내 그림을 노린 걸까 하는 의문을 품고 조사에 나서는 게 기둥 줄거리인데, 진상을 알아내는 과정이 독자들이 추리소설에서 응당 기대하는 것처럼 기발하거나 인상적이지 못해 살짝 밍숭맹숭하다. 다만 성공을 위해 몹시도 큰 것을 버리고 달려온 유명 화가가 자신이 놓친 것이, 버린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나를 깨닫는 절절한 회한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작품이다. 후지와라 이오리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된 정서는 지난 날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데, 비슷한 경험이 있는 남자라면 눈물이 줄줄 흐를 듯.

 

<터닝 포인트>는 1992년 [파는 여자, 벗는 여자]로 소설 현대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1996년 [왼손에 고하지 말지어다]로 란포 상을 탄 와타나베 요코의 작품. 개인적으로 [파는 여자, 벗는 여자]는 꼭 읽어보고 싶다^^ 유명 백화점에서 자잘한 절도범들을 잡아내는 '보안사'라는 흥미로운 직업을 소재로 삼은 게 독특하다. 날리던 여성 보안사에서 지금은 후배 보안사들을 교육하는 교관이 된 '나'는 늘 치열하고 긴장감이 감도는 현장에서의 즐거움을 잊지 못해 지금 일에 불만이 많다. 나와 쌍벽을 이루던 동료 보안사가 부진하자 그녀를 도와 오래간만에 현장에 복귀하게 된 나는 수상한 중국인 여성 3인조를 본능적인 감각으로 뒤쫓는다. 이 작품의 재미있는 점은 작품 전체에 패러디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 실제로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보안사라는 직업을 가진 나는 전형적인 경찰소설의 주인공을 통째로 흉내낸 인물 같다. 일선에서 물러나 늘 현장을 그리워하다 우연히 현장에 다시 뛰어들어 혁혁한 전과를 세우는. 그래봐야 좀도둑을 현장에서 잡고 훈계한 후 내보내는(법적인 권한도 일체 없는) 나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하는 일에 비해 어찌나 비장한지 보면서 계속 미소를 짓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여자들의 얼굴을 보는 즉시 직감했다. 교활한 눈빛. 따발총처럼 끊임없이 지껄이면서 다물지 않는 입. 세 명 다 웃음을 띠고 있지만 그 눈은 명백히 사람의 선의나 배려라는 것을 철저하게 튕겨내고 세상의 질서를 굳게 거부하는 악당의 눈이었다."

겨우 브래지어 도둑에게 세상의 질서를 굳게 거부하는 악당의 눈이라니 거창하기도 하다(나는 처음에 그녀들이 브래지어 도둑이라고만 믿고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재기 있는 패러디적 정서와 무기력, 무감동한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를 발견하는 나와 동료 보안사의 이야기가 유쾌하고 로맨스도 흐뭇하지만 추리소설로서 빼어난 작품은 아닌 것 같다. 결정적으로 나는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고 해결은 결국 다른 사람이 하는데 무슨 대단한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로 머리 쓸 여지도 없다.

 

<사이버 라디오>는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으로 그럴 듯한 금융 미스터리를 선보인 전직 은행원 출신 이케이도 준의 작품이다.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이 상당히 만족스러워 기대를 많이 했는데 명필도 붓을 가리는지 중편은 장기가 아닌 것 같다. 가끔씩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리는 주인공은 그 초능력(?)을 좋은 데 쓸 것이지 사기에 이용해 먹고 산다. 특수 능력으로 부정한 기업의 비밀에 접근하게 된 주인공은 한 탕 크게 하기 위해 차곡차곡 준비를 하고 결국 거사일이 밝아온다. 영화 <오션스 11>이나 <토머스 크라운 어페어>, 제프리 아처의 소설 [한 푼도 더도 덜도 말고] 같이 기발한 작전으로 돈을 털어내는 작품들을 콘 게임(con game) 혹은 케이퍼(caper)라 부르는 것 같은데 <사이버 라디오>도 비슷하다. 특히 금융에 조예가 깊은 이케이도 준의 돈세탁 강의 같은 건 실전용이라 흥미롭긴 하지만 현실에 강하게 밀착해 있는 금융 사기라는 소재와 텔레파시라는 초능력이 그렇게 조화롭게 융합된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주인공의 마지막 작전이 별로 통쾌하거나 짜릿하지 않다.

 

무난하고 결점도 별로 없지만 이거다 하고 썩 내세울 만한 작품들도 없어 아쉽던 차에 마지막 작품 <온천 잠입>은 그런 갈증을 어느 정도 사라지게 만든 가작이라 할 만해 만족스러웠다. [매치 메이크]로 2003년 란포 상 수상자가 된 시라누이 교스케의 포복절도할 소동극인데,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면 좀 잔인하지만 실실 웃음이 터져나올 만한 블랙코미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미모가 탁월하지만 인맥이 없어 조연으로 머물던 여배우가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는다. 프로듀서에게 몸까지 바쳐가며 온천가에서 찍는 사극의 조연을 따낸 것이다. 하지만 여배우의 전 스폰서가 온천까지 쫓아와 같이 죽자고 칼을 들이대니 옷을 홀랑 벗었지만 도망칠 수밖에 없다. 두 남녀의 한밤의 스트립 쇼가 계속되는 가운데 우발적으로 남자가 죽게 되고 여배우는 고뇌에 빠진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놓칠 순 없지. 하지만 이 시체를 어떡한다...시체가 어떻게 되는지는 여러분이 직접 확인하시길. 죽어서 움직일 수도 없는 시체가 매일 밤 장소를 바꿔가며 발견되는 신기하고도 우스운 이야기에 흠뻑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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