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으로 향하다 - 리암 니슨 주연 영화 [툼스톤]의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9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매트 스커더가 돌아왔다!'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전부 16권이나 되는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 시리즈가 출간된 미국에서 이런 광고가 새로 나왔다면 분명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게 될 터이다. 하지만 그동안 단 2권만이 어렵사리 소개된 우리나라에서는 이 외침이 조금은 공허하게 들리는 게 못내 섭섭하다. 이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시리즈를 모두 즐길 수 없다니, 지금껏 세상에 선 보였던 어떤 탐정보다 매력적인 매트 스커더의 인생역정을 처음부터 따라갈 수 없다니 이것이이야말로 진짜 비극이지 싶다.

 

뭐 미국만큼은 덜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입에 거품을 물고 높이 평가했던 바로 그 '매트 스커더가 돌아왔다!' 하지만 전에 출간됐던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은 1982년작으로 1992년에 발표된 본작 <무덤으로 향하다>와 무려 10년의 간극이 있는 건 안타깝다. 두 작품 사이에 출간된 총 네 편에서 매트가 어떤 사건을 만나고 무슨 변화를 겪는지는 그저 독자들이 추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오래전에 고려원에서 미국에서 <무덤으로 향하다>의 1년 전에 출간됐던 <백정들의 미사>가 나온 적은 있다. <백정들의 미사>는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상 수상작이다).

 

<800만 가지 죽는 방법>에서 단 두 문장으로 이뤄진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스피치를 선 보인 바 있는 매트는 알콜 중독으로 아내와 아이를 잃고 허름한 뉴욕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무면허 사립탐정이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술을 끊지 못해 번민하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는 술을 완전히 끊고(물론 사건이 벽에 부딪칠 때마다 다시 술병을 잡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만), 엘레인이라는 여인과 사귀고 있다. 죄악으로 가득찬 사회에 완전히 절망했던 염세주의자 매트가 점차 세상과 화해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매트가 부녀자를 납치한 뒤 잔인하게 강간살해하는 유괴범과 대결하는 <무덤으로 향하다>의 또 하나의 기둥 줄거리는 창녀일을 하고 있는 엘레인과의 로맨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창녀일을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만 한번 결혼에 실패한 매트는 어쩐지 그녀를 완전히 책임지기가 부담스럽다. 서로에게 번잡한 구속을 하지 않는 지금의 관계가 편하기도 하고. 그러나 점차 엘레인의 손님들이 신경 쓰이고 그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매트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녀를 잡아! 속으로 10번도 더 외친 듯. 독자들의 생각보다 두 배쯤 아름다운 로맨스의 결과는 직접 확인하시길.

 

1966년에 데뷔해 수십 편의 장편 추리소설을 남긴 이 장르의 대가 중의 대가 로렌스 블록. 그의 롱런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늘 변화를 시도하는 그의 창의성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 1982년의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을 보면 살해된 어느 흑인 창녀의 사건을 수사하는 매트의 이야기와 로스 맥도널드, 로버트 파커 류의 하드보일드 소설과 특별한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덤으로 향하다>에 와서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 <레드 드래건> 같은 작품들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사이코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키고, <백정들의 미사>에서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포르노를 찍는 악당들과 대결하기도 하는 등 다루고 있는 범죄의 양상이 매번 달라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추리소설 작가로서 한번 확립된 시리즈의 안정된 공식을 마다하고 매번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며 항상 사회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의 눈을 거두지 않는 로렌스 블록이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그랜드 마스터 반열에 오른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멈추지 않는 창의성을 증명하는 또 한 가지 예는 다소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매트 스커더 시리즈와 재기발랄한 유머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바니 로덴바 시리즈를 동시에 쓰고 있다는 사실. 낮에는 끝간 데 없이 어두운 탐정 매트의 이야기를 쓰고, 밤에는 방방 뛰는 도둑 바니의 이야기를 쓰는 셈이니 이야기꾼의 재능을 타고난 건지...

 

그밖에 꼭 말해두고 싶은 건 로렌스 블록의 대사 쓰는 실력이다. 흔히 미국식 대화의 전범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에드 맥베인에 비해 전혀 꿀리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 넘실대는 미국식 유머와 간결하면서도 통렬한 메시지를 간직한 대사들은 특히 한없이 늘어지기 일쑤인 지루한 대사를 양산하는 얼치기 작가들이 꼭 배워야 할 기술이 아닐까. '작가들의 작가'라는 세평을 듣는 거장답게 한 수 제대로 배운 느낌이다. 공들여 구상한 플롯을 A-B-C...순서대로 진행시키는 데만 여념이 없는 작가 지망생들에 비하면 매트는 여유가 있다. 사건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미술관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매트. 그러다 단서를 얻으면 그 순간부터 사건은 실타래가 풀리듯 순식간에 진행된다. 느긋한 여유와 빠른 페이스를 교차시켜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완급 조절에 감탄을 넘어 감동하고 말았다.

 

담배는 어떤 걸 피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모든 게 궁금해지는 매트 스커더는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느리지만 조금씩 착실하게 성장하는 매력적인 탐정으로 필립 말로나 루 아처의 계보를 잇는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소설 속 인물이다. 이 개성 넘치는 매트 스커더 시리즈를 창조한 로렌스 블록 역시 루스 렌들이나 PD 제임스 급의 현존하는 세계 최고 거장으로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영광일 정도의 작가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이 근사한 두 남자의 조합을 놓쳐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방에 '매트 스커더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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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9-04-3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말이요 ㅜ.ㅜ
언제 쌓아놓고 차례대로 볼 수 있을까요...

jedai2000 2009-05-01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시리즈 하나만 선택해서 국내에 다 낼 수 있다면 매트 스커더를 고르고 싶네요...쓰고 보니 잭 리처 시리즈도 탐나네요 -_-;;;

앨런 2009-05-25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렇게 감질나게 하지 말구, 시리즈로 촥촥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요.

jedai2000 2009-05-28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런님...저도 소원입니다만 과연 쉽게 이뤄질지 모르겠네요 ㅠ.ㅠ
 
고모라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7
로베르토 사비아노 지음, 박중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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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로 지난 3월 22일에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마피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다. 참가 인원이 무려 15만 명. 좁은 도시에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썩는 곳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폭력 조직이 유사 이래 늘 있어 왔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웬 오버? 하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로베르토 사비아노의 충격적인 르포소설 <고모라>를 보게 된다면 그런 안이한 감상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깊이 깨닫고 말 것이다. 실제 나폴리 토박이인 사비아노는 나폴리의 마피아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 부를 축적하고, 살인과 테러로 어떻게 나폴리를 공포의 생지옥으로 물들이고 있는가를 지근거리에서 관찰했고,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충실하게 기록하였다. 그의 강렬한 분노와 예리한 분석, 뛰어난 문학성이 어우러진 <고모라>는 개인적으로 최근 몇 년 사이 나온 책 중 가장 읽어볼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탈리아의 범죄 조직 하면 흔히 마피아를 떠올린다. 사실 마피아는 코사 노스트라로 불리는 유서 깊은 시칠리아 본토의 범죄 조직만을 가리키며, 1900년대 초에 미국으로 이주한 시칠리안 갱들의 활약(?)을 통해 이탈리아 범죄 조직의 대명사가 되었다. 최초의 아메리칸 마피아 신디케이트를 만든 전설적인 뉴욕의 찰스 '럭키' 루치아노, 시카고의 알 카포네 같은 보스들의 이름은 한번쯤은 다들 들어보았을 듯. 이렇듯 미국의 이탈리아계 범죄 조직을 통칭해 보통 마피아라 부르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시칠리아의 코사 노스트라(마피아) 말고도 다양한 범죄 조직이 있다. 칼라브리아 지방의 은드랑게타, 풀리아 지방의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 그리고 나폴리의 카모라가 이탈리아의 4대 범죄 세력이다. 아직도 코사 노스트라는 가입식 때 성모 마리아 그림에 피를 묻힌 다음 불태우는 전통 의식을 행하지만 전통과 형식, 위계를 그닥 중시하지 않는 카모라는 낡은 의식 따윈 생략이다. 철저히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합법과 비합법을 오가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카모라에 의해 희생된 사람만 900명에 달하는 일종의 '범죄주식회사'라고 보면 된다.

 

책 못지않게 영화도 좋아하는 나를 늘 개봉과 동시에 극장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영화가 있으니 그건 갱이 나오는 영화들이다. 내 인생의 영화로 꼽는 영화 중 하나도 프란시스 코폴라가 미국으로 이주한 마피아 일족의 삶을 바로크적인 장중함으로 그려낸 <대부>며, 아메리칸 갱들의 흥망성쇠를 리얼하게 담은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 늙은 갱이 결국 과거로부터 찾아온 망령을 떨쳐내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하는 꿈이 이뤄지기 직전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칼리토> 같은 영화들은 비디오 테이프가 늘어날 정도로 보았다. <벅시>, <카지노>, <스카페이스>, <도니 브래스코>, 심지어 홍콩의 변종 갱 영화들인 <영웅본색>, <열혈남아>, <천장지구>, <고흑자> <무간도>,  갱이 토착화된 발음인 우리나라의 깡패를 그린 <게임의 법칙>, <비열한 거리>, <우아한 세계>까지 갱이 없으면 누굴 소재로 삼아 영화를 만들까 싶을 정도로 많은 영화들이 폭력 조직을 그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를 비롯한 많은 남자들이 갱 영화를 좋아하는 건 일종의 비밀스런 판타지가 충족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영화들에서 갱 우두머리들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법이 없다. 아무리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어도 언제나 가장 좋은 자리가 예약되어 있다. 비록 불법이라지만 돈은 썩어넘칠 정도로 흘러 들어오고, 미모의 애인도 여러 명, 마음에 안 드는 놈은 버튼만 누르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이런 게 바로 남성 판타지의 정수가 아닐까. 우리는 설레이는 꿈으로 가득차 사회 생활을 시작하지만 한 살씩 나이를 먹고 배우는 거라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현실에 다름 아니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비굴하게 명령에 따라야 할 때, 괴로워도 슬퍼도 참아야만 할 때 내게도 힘과 권력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아니 날 수가 없다. 그러나 조심하라. 마피아를 비롯한 폭력 조직이 검은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니까.

 

사비아노에 따르면 마피아는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힘이나 권력에 굴복하고 어떤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것을 얻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때 그 마음에 기생해 서서히 세력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돈과 힘으로 어떻게든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고, 경쟁자는 골통을 날려버려서라도 제거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에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라는 아름다운 나폴리에 카모라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카모라의 물리적인 폭력보다 나도 카모라의 힘에 호소해 정점에 서고 싶다는 나폴리 사람들의 비뚤어진 사고방식 자체가 카모라라는 병근을 제거하는 치료를 그토록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인구의 44퍼센트가 카모라와 관련된 나폴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돈과 권력에 미쳐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않는 전 세계의 어디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비아노의 근원적인 문제 제기로 역시나 금권주의로 인한 부정부패가 횡행하는 한국 사회에서도 고민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카모라의 주 수입원은 너무도 다양하다. 재봉사들을 거의 감금하다시피 몰아놓고 명품 의류를 싼 가격에 공급해 폭리를 취하는가 하면, 마약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그 자체다. 유통업과 건설, 쓰레기와 폐기물 처리 사업까지 관여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카모라의 연간 수입은 수십 억 유로로 원화로는 수 조 단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사비아노는 스크래치라는 아주 재미난 표현을 통해 해답을 준다. 마약 등의 불법으로 벌어들인 돈을 합법적인 곳에 투자하다 자금난 등이 생기면 치기직칙, 레코드 판으로 스크래치를 하듯 잠시 사업을 멈추고 다시 불법 행위로 돈을 끌어들인 다음 치기직칙, 다시 스크래치를 걸고는 합법적인 사업에 재투자. 이 합법과 불법의 스크래치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막대한 돈이 쌓이는 것이다. 누구도 막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카모라의 암약에 강렬한 적개심을 보이는 사비아노의 한 마디, 한 문장을 읽으며 마치 애미넴 같은 래퍼가 떠올랐다. 끝없는 분노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그의 용기 있는 외침은 마치 성서의 죄악으로 가득찬 타락의 도시 '고모라'의 유일한 선지자 '롯'의 재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다. 어느 시대나 의인은 어려움이 많은 법인지 과연 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는 카모라 보스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경찰로부터 엄중 경호를 받고 있다는데, 험난한 길을 스스로 선택한 그가 진심으로 무사했으면 좋겠다.

 

나는 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 새로운 건설업자들, 은행과 요트의 소유주들, 가십의 왕자들, 창녀들의 왕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숨긴다. 어쩌면 그들은 아직은 영혼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적어도 자신의 수입이 어디서 나오는지 밝히기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 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헌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회사의 부가 무엇인지를 안다. 모든 기둥마다 다른 사람들의 피가 얼마나 많이 묻어 있는지 나는 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 나는 결코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__'시멘트' 장에서 

 

카모라는 어느 보스의 카리스마나 지도력으로 돌아가는 조직이 아니다. 이미 시스템이 너무도 공고히 갖춰져 있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이 없어도 곧바로 대체자 한 명이 들어오고 그동안처럼 별다른 이상없이 잘 돌아간다. 카모리스타(카모라 조직원)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결국 폭력과 범죄를 통해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경찰에 잡힐 수밖에 없다. 산더미 같은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감옥에서 수십 년을 보내야 하며,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지만 결국 자기도 언제든 나의 자리를 노리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을 우려가 있으므로 지하 벙커에 숨어 살아야 한다. 돈과 힘이 제아무리 많아도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게 바로 카모리스타의 인생일 뿐이다. 한국판 카모라를 꿈꾸는 우리나라의 일부 철없는 범죄 조직 지망생들은 사비아노의 이 통찰을 명심하기 바란다.

 

 



<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 1979년생 젊은 작가로 누구나 겁내는 카모라에 문학으로 맞서는 대단한 사나이다.>

 

 

 <사비아노의 원작을 토대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고모라'.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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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9-04-13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모라에 대해 나온 거 봤는데 정말 대부는 심각한 포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jedai2000 2009-04-13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피아에게 로맨틱한 요소는 있을 래야 있을 수가 없죠. 영화가 꼭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은 반드시 담고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패러독스 2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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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다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저는 그녀의 이름을 한번씩 쓸 때마다 웬지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저 같은 골수 추리소설 애호가들에게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이름은 거의 예수와도 같은 경건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지요. 오래 되서 누가 한 말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크리스티의 소설을 X선으로 비추면 추리소설의 뼈대가 나올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1퍼센트의 주저도 없이 이 말에 완전히 동의하고 있어요. 적어도 크리스티는 클래식한 퍼즐 미스터리 분야의 창조주요, 그 장르의 완성자라 불려도 손색이 없지요.

 

그러면 크리스티가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준 추리소설의 뼈대란 무엇일까요. 누구나 한 권쯤은 읽어봤다시피(그녀의 판매 부수는 억 부를 가뿐히 뛰어넘죠), 어느 살인사건을 맞아 명탐정이 기회와 동기를 가지고 있던 몇 명의 용의자들 중에서 치밀한 조사와 논리적 추리를 통해 범인을 찾아내는 지적 유희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80권이 넘는 그녀의 소설 대부분이 이런 구조라 빤하다고 하실 분도 계시겠네요. 어찌 보면 천편일률적인 동어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그녀는 4편의 인상적인 작품을 통해 그 함정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한정된 용의자 안에서 범인을 찾는 그녀의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10명의 용의자 모두가 범인인 <오리엔트 특급살인>의 결말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는 중간에 피살된 판사가 범인이지요. 흔히 추리소설을 읽을 때 시체가 된 인물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독자들의 부주의를 간파한 멋진 트릭입니다. <커튼>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을 본능적으로 의심하고 보는 노련한 크리스티의 독자들마저도 빼놓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사람, 즉 에르큘 포와로 탐정이 범인입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크리스티의 동반자로 무수한 사건들을 해결한 정의의 상징 포와로를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퇴역시키다니, 이쯤 되면 어떻게든 독자를 속이고야 말겠다는 크리스티의 집념에 일종의 장엄함까지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최초의 근대적인 추리소설인 <모르그 거리의 살인>에서부터 등장해 결코 추리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왓슨'역의 화자(포와로 못지 않게 독자들이 의심을 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독자는 나와 같은 눈높이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술하는 화자를 무의식중에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가 범인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 있습니다. 포와로의 활약을 옆에서 지켜보며 충실히 기록하는 셰퍼드 의사가 범인이라는 게 밝혀질 때 당시 독자들이 느껴던 충격과 분노(?)는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페어와 언페어 논쟁이 뜨거울 정도니 말해 무엇할까요.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는 추리소설 기법상의 혁명을 불러온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패기가 놀라운 추리소설, 혹은 크리스티와 추리소설에 대한 분석서, 독서 행위 자체에 대한 일종의 에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학의 문학 교수이자 정신 분석가인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첫 장에서 크리스티의 수많은 작품들을 살펴보며(그녀의 작품 수십 편의 스포일러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옵니다), 그녀의 핵심 트릭을 몇 가지로 정의합니다. '위장'은 말 그대로 범인의 특징을 철저히 위장함으로써 범인의 정체를 숨기는 것으로, 예를 들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범인은 자신을 시체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전환'은 독자의 주의를 교묘히 다른 곳으로 이끌어서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의미한 징표들을 나열해 수사에 혼선을 주는 범인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네요. 피해자 이름의 알파벳 순서대로 세 건의 살인이 벌어지는 <ABC 살인사건>의 범인은 실은 그중 한 명만이 진짜 목표였지만, 기묘한 연쇄살인이라는 그럴 듯한 외형을 만들어 독자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버렸습니다. '전시'는 너무도 뚜렷한 단서를 독자의 눈앞에 대놓고 제시해 오히려 이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독창적인 트릭입니다. 포의 유명한 <도둑맞은 편지>를 생각해보시길.

 

한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 크리스티는 이 방법들 외에 '생략에 의한 거짓말'이라는 새로운 트릭을 선보입니다. 작품의 화자인 셰퍼드 의사가 범인이기 때문에, 그는 기록자임에도 자신의 행적을 모조리 다 적을 수 없는 딜레마에 부딪치게 되죠. 자신의 행동이나 심리를 전부 적으면 자신의 범행 장면도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애거서 크리스티식 퍼즐 추리소설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크로이드 씨는 본디 고집이 몹시 셀 뿐 아니라, 억지를 쓰면 쓸수록 더욱 굳어지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 파커가 편지를 가지고 들어온 것은 8시 40분, 내가 편지를 마저 읽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한 채 애크로이드 씨의 서재를 나온 것은 정확히 8시 50분이었다. __<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중에서

실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범행은 셰퍼드 의사가 서재에 있다가 별 소득없이 나왔다고 주장한 8시 40분과 8시 50분 사이에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셰퍼드 의사는 위에서 말한 이유에 걸맞게 자신의 구체적인 범행 장면을 생략하고 넘어갑니다. 피에르 바야르의 의문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한 번 생략을 통한 거짓말(즉 셰퍼드 의사의 기술을 이제 누구도 100퍼센트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을 시도한 셰퍼드가 다른 부분에서 또 비슷한 생략과 거짓말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피에르 바야르는 이 본질적인 의문점을 토대로 셰퍼드의 기술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 다른 해석이 가능한 부분 등을 샅샅이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포와로조차 완전히 간과한 진범을 찾아내는데 성공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읽은 지가 이미 십여년이 지나 피에르 바야르의 이 책을 보다 재미있게 읽기 위해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그렇게 두 권을 순서대로 보니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의 세세한 설명 하나하나가 너무도 쉽고 재기발랄하게 다가오더군요. 아, 모처럼 정말 짜릿한 추리소설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당대의 석학이라는 평가에 부끄럽지 않은 피에르 바야르의 정신 분석과 문학 비평이라는 두 분야를 오가는 화려한 논리에 흠뻑 빠져서 내내 킬킬 거리고 말았다구요. 비길 데 없는 명탐정 포와로가 순식간에 고집불통 망상 늙은이로 떨어지는 꼴이라니, 하하. 그러나 다만 해석망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3장은 문외한이 보기엔 지나치게 어려워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장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미칠 듯이 재미있습니다. 특히 저처럼 크리스티를 숭배하는 분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경전으로 모시는 분들은 이 책을 보며 어쩌면 우상이 망가지는 데서 오는 불경스러운 쾌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네요. 뭐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 수준높게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망가뜨린다면(?) 하늘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도 그닥 큰 불평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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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4-10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오랜만에 이렇게 강력한 지름신을 ;;;;
크리스티 이름 들을 때마다 화장실에서 손 씻고 싶다는 첫문장 읽고 '이건 바로 내 얘기야!!!!' 하면서 구경하러 갔다가 마침 중고가 있길래 바로 주문 버튼 눌러서 결재 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_-;;; 땡스투라도 드려야 하는건데 ㅠㅠ 추천이라도 누르고 갑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드려요. 너무 기대돼요 >_<

비연 2009-04-10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보관함에 쑈옹~ 넣었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해요~

jedai2000 2009-04-13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티님...앗^^ 키티님도 크리스티 신자셨군요~ 넘 반갑습니다. 피에르 바야르의 다른 책에 대해서도 소개하신 글을 보았습니다. 이 친구가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도 깠(?)다니, 너무 보고 싶네요 ㅠ.ㅠ 챕터3이 제 수준에 지나치게 어려웠는데, 다른 장들은 다 너무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보실지 너무 궁금하네요. 좋은 말씀 넘 감사드립니다 ^^

비연님...좋게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드리죠^^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다시 한 번 복기하시고 연달아 읽으심 쵝오의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듯 하옵니다 ^.~

젠장 2009-05-22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다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는 문장은 못 봤네요. 안돼 ㅠ.ㅠ

jedai2000 2009-05-2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젠장님...죄송합니다 ㅠ.ㅠ 제가 더 눈에 확 띄는 곳에 써뒀어야 하는데...추리소설을 읽을 때 스포일러 뿌리는 사람만큼 증오스런 게 없죠. 본의는 아니지만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절규성 살인사건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절규성 살인사건>의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지형도 안에서 '관 시리즈'의 아야쓰지 유키토와 좋은 맞수가 되는 것 같다. 각각 도시샤 대학과 교토 대학의 미스터리 창작 동호회에서 습작을 하며 실력을 갈고 닦다, 80년대 중후반이라는 비슷한 시기에 아리스는 아유카와 데쓰야, 유키토는 시마다 소지라는 거장급 멘토의 추천을 받고 데뷔했으니 얼추 그 점도 비슷하다. 게다가 확실한 팬 베이스를 만들어준 시리즈를 둘다 보유하고 있는데, 유키토는 위에서 말했듯 그 유명한 '관 시리즈', 아리스는 현재까지 4권이 나온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그 밖의 대부분의 작품이 포함된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미스터리 스타일은 어디까지나 다른데, 유키토가 기발한 서술 트릭과 깜짝 놀랄 만한 반전, 하나하나 기괴한 개성을 가진 저택 등 추리소설다운 분위기를 강조한다면, 아리스는 철저한 논리와 페어플레이 정신, 주인공들의 행동과 심리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인간미 등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유키토는 독자의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반전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보통 추리소설에서는 금기시되곤 하는 초현실적인 설정도 등장시키는 등 다소 무리한 수도 주저없이 쓴다. 사회파의 거두 마쓰모토 세이초가 리얼리티가 부족한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결점으로 지적했던 '요란뻑적지근한 저택에서 벌어지는 추리놀음'을 아예 시리즈 테마로 잡았으니 역시나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느낌도 없다.


반면에 아리스는 유키토처럼 여러 번 뒤집히고 끝에 가서 한 번 더 뒤집는 그런 결말보다는, 살인사건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앞에 제시하고 탐정과 조수가 단서를 하나둘씩 수집해 냉철한 논리로 핵심에 파고 드는 고전적인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 같다. 배경도 유키토처럼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저택이 아니라, 산 속 휴양림, 외딴섬 등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가 서양 미스터리 작가 중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엘러리 퀸이라고 하는데, 과연 일본판 엘러리 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비슷한 느낌이다. 왜 반전의 깜짝쇼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작품 앞부분에 공들여 쌓아둔 설정이 뒤의 반전과 충돌하면서 작품의 내적 구조가 스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악수가 나오기도 하지 않나. 그런 면에서 아리스의 작품은 건실한 돌탑을 보는 것마냥 단단한 느낌을 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화려한 기술을 가진 유키토는 도미, 아리스는 가자미인가-_-;


꼭 누가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고유한 스타일일 뿐 누가 잘하고 못하고는 아니니까. 나는 유키토의 신작을 보면서 이번에는 또 어떤 독특한 저택이 나올까, 무슨 반전으로 뒷통수를 때릴 것인가 기대하며 그가 공들여 안배한 설정들을 즐거이 소비한다. 아리스의 작품을 보면서는 꼼꼼하게 타임 테이블을 그리며, 얘는 이 시간에 여기에 있었으니까 절대 범행이 불가능하지, 하면서 나름의 논리와 소거법으로 범인을 맞춰보려 노력하는 맛에 빠져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한다. 과연 추리소설의 재미란 이렇게나 다양한 법이군.


어쩌면 유키토의 장기에 도전하고 싶었던 걸까. <절규성 살인사건>은 '관 시리즈'처럼 6개의 기묘한 외형을 가진 건물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일종의 연작 단편집이다(표제작인 '절규성'은 실체가 있는 건물은 아니다). <월광 게임> <외딴섬 퍼즐>에 나온 에가미 선배와 풋풋한 대학생 아리스가 주인공이 아니라, 국내에는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에서 첫 선을 보인 바 있는 임상범죄심리학자 히무라와 추리소설 작가 아리스가 탐정과 조수 역으로 사건을 푼다. 그러니까 '작가 아리스 시리즈'란 말씀. 표제작을 제외하고는 50페이지 남짓한 분량이라 아주 난해하지도, 여러 번 꼬여 있지도 않은 깔끔한 추리 퀴즈를 푸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작품들의 수준 편차도 별로 없이 적당한 재미가 다 있어 한마디로 만족스럽게 읽었다. 경천동지할 트릭이나 경악스런 반전은 없지만, 해답을 알고 나면 무릎을 한번 탁 치게 되는 절묘한 맛이랄까(위에서 '관 시리즈'와 비교했지만, 건물의 구조나 특징을 이용한 단편은 몇 개 없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모든 내공이 응축된 그런 대작 추리소설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크게 머리 쓰고 싶지 않고 기분 좋게 책장을 열었다가 개운한 맛으로 덮고 싶은 그런 심정의 독자라면 충분히 좋아할 단편집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비행청소년 남녀가 폐쇄된 호텔 설화루에서 노숙하다 그중 남자아이가 추락사하는 '설화루 살인사건'이 인상적이었다. 아직 서로를 감당할 수 없는 미숙한 두 아이가 때로 싸우고 소리치고 서로를 원망하다, 그래도 부둥켜 안고 추위를 이겨내는 따뜻하고도 쓸쓸한 이미지가 뇌리에서 오래오래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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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 상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벌써 작년인가, 인기 여성 그룹 소녀시대의 노래 잘하는 보컬 태연 양의 아버님과 잠깐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워낙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상 깊었던 말씀은 그분의 아버님(태연 양의 할아버님)이 1950년대에 안경점을 여셨고, 아버님은 1980년대부터, 그 아드님(태연 양의 오빠)도 가업인 안경점을 이어받기 위해 안경 관련 학과를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삼대가 같은 일을 한다라. 요즘같이 휙휙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수십 년 세월 동안 한 가족이 대를 이어 같은 일을 한다는 건 당연히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자식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는다는 데는 그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준 직업인으로서의 올곧은 자세,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의 삶 전체를 긍정하고 인정한다는 커다란 의미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경관의 피> 역시 경찰이라는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경관 삼대의 이야기를 유장하게 그리는 장편소설이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도처에 부랑아들이 들끓고 범죄가 빈발하는 생지옥이 된 일본(물론 자업자득이다만). 치안을 위해 그저 그런 교육만 몇 달 받으면 경찰이 될 수 있었던 시대다. 막 임신한 아내를 둔 안조 세이지는 생계를 위해 경찰에 투신해 하급 순사가 된다. 처음부터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다같이 못 사는 처지에 남을 등 처먹는 사기꾼도 잡고, 어려운 사람 돕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물론 제일 좋은 건 단칸방이나마 마련할 수 있어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오손도손 지내는 거지만. 서서히 공을 세워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덴노지 주재소에 부임한 세이지는 몇 년 전 관내에서 벌어진 미모의 남창 살해사건을 끈질기게 조사하지만, 몇 가지 단서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는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다.

 

듬직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늘 동경했던 세이지의 장남, 다미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관이 된다. 다미오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숨어 있다. 바로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혀내는 것. 하지만 다미오가 경찰학교에 입학한 시기는 '전공투'라 불리는 좌파 학생운동이 극심했던 1960년대 초. 다미오는 훗카이도 대학교에 위장 입학해, 흔히들 프락치라 부르는 스파이가 된다. 아버지처럼 평범한 경관이 되어 서민을 돕고 싶었지만, 노도 같은 시대의 흐름이 그의 작은 소망을 외면한 것이다. 정체가 탄로나는 순간, 생명이 위험한 스파이 생활을 몇 년 겪고 정신이 완전히 피폐해져버린 다미오는 이제 폭력남편에 불과하다. 더 이상 스파이짓을 하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간신히 일반 제복경관이 된 다미오는 지역의 평범한 소시민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예전의 꿈을 이루며 서서히 바른 정신을 회복한다. 그러나 아버지 세이지와 관련된 과거 때문일까. 다미오 역시 죽음을 맞게 되고, 이제 바톤은 손자 가즈야에게 넘어왔다. 50년을 넘게 끌어온 일족의 비극의 역사를 해결해야 할 숙명을 가진 가즈야의 활약을 지켜보시길.

 

두꺼운 책으로 2권 분량이지만 숨 쉴 틈 없이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로하는 일없이 담담하게 서술하지만 묘하게 박력 있고, 흡입력이 뛰어나 이게 거장의 솜씨구나, 했다. 작가 사사키 조는 1979년에 데뷔해 모험소설, 첩보소설, 하드보일드 등 다채로운 작풍을 보여왔는데, 특히 태평양 전쟁 당시 스파이전을 소재로 한 1990년작 <에트로프발 긴급전>이 유명하다. 개인적으로는 꽤 마음에 든 작가로 이 작품도 국내에 소개된다니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최근에는 경찰소설에 매진한다는데, <경관의 피>가 '200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베스트 1위에 올라 노장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2008년 일본 미스터리의 정점에 오른 <경관의 피>는 또한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격동의 일본 현대사를 경관 삼부자의 이야기 속에 담아내 시대소설 혹은 사회소설의 맛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1940년대 세이지의 사건이 강매, 야바위, 들치기 같은 소박한(?) 것이었다면, 1960년대 다미오의 그것은 좌익 세력에 의한 폭탄 테러 등이고, 1990년대 가즈야는 마약이나 권총 밀거래, 동료 경관의 독직 사건 등을 수사하는 것이 시대상을 절묘하게 반영한 듯해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나 미스터리보다는 감동과 인간, 긍지 높은 삶에 방점을 찍은 작품이라고는 해도 미스터리 구조가 기대했던 것보다 조금 더 허약했다는 약점, 또 공공봉사를 위해서라면 다소의 부정은 허용할 수도 있다는 작가의 '경찰관'에서 도덕적 모호함을 강요받는다는 찝찝함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슨 책이든 어떤 작가든 보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평가는 달라질 수 있는 법이고, 적어도 나는 읽는 동안 즐거웠다. 무엇보다 경관이라는 직업 속에서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가 되는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할 정도의 감동을 받았다. 가족과 직업윤리, 명예와 긍지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경찰의 이미지란 흔히 정권의 시녀로 약한 시민들 때려잡고, 뒷돈이나 받는 불한당 정도에 그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시민의 안녕을 위해 생명을 걸고 분투하는 경찰도 분명히 있다. 앞으로 나쁜 경찰은 나쁘다고 계속 욕하더라도, 좋은 경찰, 훌륭한 경관에게는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시민은 경찰을 돕고, 경찰은 시민을 지키는 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경관의 피>같이 경찰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잘쓴 소설이 나와 그런 사회 풍조 조성에 이바지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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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3-06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석님 블로그에 멋진 리뷰를 보고 싶으면 제다이님 블로그로 가보래서 와봤읍니다.정말 리뷰 멋지시네요.종종 놀러 오겠읍니다^^

jedai2000 2009-03-1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카스피님^^ 멋진 리뷰라니 완전 감격이어요 T.T 한동안 서재에 안 와봐서 이렇게 기분 좋은 칭찬 글을 못 봤네요. 좋게 말씀해주시는 카스피님 같은 분들 때문에 리뷰쓰는 보람을 느껴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