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도 반이 지났는데 8월 걸 쓰고 앉아 있네요 -_-;;

 



<46번째 밀실 - 아리스가와 아리스>

신본격 추리소설의 1세대 작가로 꼽히는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월광 게임> <외딴섬 퍼즐> 등의 작품에서 탐정으로 활약하는 대학생 에가미 지로 시리즈와 본서 <46번째 밀실> <달리의 고치> 등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범죄심리학자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를 동시에 쓰고 있다. 두 시리즈에서 탐정의 보조 역할이자, 작품의 화자를 맡은 인물들이 바로 작가와 같은 이름의 아리스가와 아리스. 에가미 지로 시리즈는 주인공들이 대학생이다 보니 어딘가 풋풋하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돋보인다면, 주인공들이 성인이고 직업상 범죄와 관련될 가능성이 높은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는 더 전문적이고 냉철한 탐정소설의 흔적이 묻어난다. <46번째 밀실>에서 히무라와 아리스는 45가지 밀실 트릭을 선보여 '일본의 존 딕슨 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노 추리소설가의 집을 방문한다. 궁극의 추리소설을 구상해냈다는 그 추리소설가는 그날 밤 밀실에서 얼굴이 불에 탄 채 발견된다. 궁극의 46번째 밀실 트릭에 그 자신이 당한 것일까? 비교적 소품이지만, 다른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품처럼 역시나 깔끔한 맛이 있다. 다만 핵심 트릭이 중동을 배경으로 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모 작품과 굉장히 유사해 보이고, 커다란 반전이나 추리소설 독자들이 헉하고 놀랄 의외의 결말이 없어 조금 심심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아리스가와 아리스 추리소설은 모든 단서를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시하고, 그 주어진 단서만을 철두철미하게 논리적으로 분석해 진상에 접근하는 페어플레이 게임이라 여러 번 뒤집어지고 엎어지는 다른 신본격 추리소설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길. 무엇보다 이 작가 작품의 최대 매력은 등장인물들이 상당히 호감가게 그려진다는데 있는데, 시크하지만 은근히 속정이 깊은 히무라 히데오와 잘난 친구에 경탄하다가도 가끔 한번씩 툴툴대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콤비가 보여주는 귀여운 우정에 기분 좋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2 - 에도가와 란포>

우리나라에서 출간된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기 한량 없었던 에도가와 란포의 전단편집이 마침내 완간되었다. 1, 2권은 '본격추리', 3권은 '기괴환상'이라는 주제로 분류되었는데, 일본 추리소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단편집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에도가와 란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세계에 경도된 일본인 하라이 타로가 포를 연상시키는 필명을 사용한 것인데, 그는 한마디로 일본 추리소설의 천황 격인 존재. 1923년에 암호 미스터리인 '2전 동화'로 데뷔한 그는 1965년에 타계하기까지 수십 종의 추리소설을 남겼고, 일본탐정작가클럽을 창설해 에도가와 란포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등의 시상식을 주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일본 추리소설의 발전에는 란포의 그림자가 짙겨 드리워져 있는 셈인데, 그는 관음증이나 사드-매저키즘 등의 이상 심리를 소재로 한 일종의 '변격' 추리소설로 일가를 이뤘다. 작가 본인은 본격추리소설을 더 선호했지만, 독자들이 변태, 괴물들이 등장하는 기괴한 추리소설만을 원하는 데서 나오는 괴리감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개인적으로도 란포의 참맛은 3권 '기괴환상' 편에서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 본격추리도 요즘 보기엔 어쩔 수 없이 트릭이 좀 단순한 감은 있지만 꽤 볼 만한 편이다. 무엇보다 맨 뒤 작가 코멘트 읽는 맛이 쏠쏠한데, "한번 인기를 끌었던 1인2역 트릭을 또 사용해 부끄럽다.", "딕슨 카의 트릭을 차용했다." 등등 굉장히 솔직한 편이라 거장 란포의 창작 비결을 듣는 재미가 컸다. 2권에서는 '호반정 사건', '나는 누구인가', '음울한 짐승' 정도를 추천하고 싶다.
 




<산 자의 땅 - 니키 프렌치>

기억상실이라는 소재는 잘만 사용하면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게 없는 듯하다. 어릴 적에 아동용 축약본으로 읽었던 윌리엄 아이리시의 <공포의 검은 커튼>도 기억이 사라진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는 내용이었는데,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부적인 내용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날 정도니까. <산 자의 땅> 역시 기억상실과 납치가 중요 소재로 등장한다. 20대 여성인 주인공이 눈을 떠보니, 외딴 창고에 온몸이 묶여 있는데 이 일을 저지른 복면 남자가 하루에 한번씩 찾아와 물과 약간의 먹을 걸 주며 그녀를 사육한다. 복면 남자가 자신을 죽이기 직전에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한 주인공은 병원에 입원하고 경찰의 조사를 받지만 사건 당시의 충격으로 기억상실에 빠져 핵심적인 사항을 거의 떠올려내지 못한다. 더구나 주인공은 가정폭력의 희생자로 우울증 약물 치료를 받은 전적이 있어, 경찰과 의료진의 결론은 아무래도 이 여자가 쇼를 하는 것 같다, 로 내려진다. 혹시 주인공이 기억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복면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노리는데, 주변의 어떤 사람도 주인공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다! 시작부터 강렬한 스릴과 서스펜스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납치된 순간부터 탈출 과정을 그린 초반 80페이지는 순전히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술되는데, 궁지에 몰린 주인공의 안타까운 모습에서 도저히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바쁜 일을 하던 도중이었지만 한번 잡고 그대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다 읽고 내린 결론은 중반부까지의 놀라운 재미에 비해 결말이 조금 아쉽다는 것. 주인공이 자신을 위협하는 복면 남자에 맞서 오히려 그의 정체를 먼저 찾아내 역습을 가한다는 대강의 플롯은 좋은데, 범인을 발견하는 과정이 좀 쉽고 단선적이라 맥이 좀 빠지는 걸 느꼈다. 작가들이 흔히 소재 자체가 너무 매혹적이라면 결말까지 탄탄하게 구상해놓지 않고 집필에 들어가는 경향이 있는 듯한데, 역시 그런 함정에 빠진 게 아닐까?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 이시모치 아사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와 '본격 미스터리 대상'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히트작 <용의자 X의 헌신>과 마지막까지 1위를 다투던 작품이라는 홍보 문구를 내세우고 있다. 사실이라면 꽤 흥미로운데, 두 작품이 은근히 유사한 데가 많기 때문이다. 둘다 범인의 범행 과정이 처음부터 제시되는 도서추리소설이라는 점과 사건을 저지르고 은폐하는 자와 그 범행에 감춰진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두 천재의 지략 대결이 핵심이다. 추리소설을 범인을 알고 보면 무슨 재미? 하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잘쓴 도서추리소설의 재미는 본격추리소설 못지않다. 범인과 범행 수법이 처음부터 제시되니, 핵심인 탐정이 '어떻게' 범인의 철벽 같은 트릭을 깨부수는지를 차근차근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슨 수를 써서든 탐정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사건의 행방을 미궁으로 유지하려는 범인의 처절한 노력과, 범인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씩 단서를 모아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탐정의 활약, 그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마치 탁구 경기를 보듯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는 게 도서추리소설을 즐기는 가장 큰 포인트. 이시모치 아사미는 촉망받는 신예 추리소설가로 과연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도 산뜻한 맛과 더불어 상당한 몰입감이 있었다. 다만 범인의 지력이 탐정보다 한 수가 아닌 두세 수 이상 떨어져, 이 점에서는 <용의자 X의 헌신>만 못한 것 같다. 대체 범인이 왜 그렇게 뻔한 실수를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나중에 곤란할 텐데, 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정말로 뒤에 가서 다 범인의 발목을 잡더라. 무엇보다 최고의 패착은 동기가 너무 허황되다는 점. 해설을 쓴 미쓰하라 유리도 그 점을 지적했지만, 나도 거기서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핵심과 아예 무관해서 따로 노는 동기(시마다 소지의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등)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이 책의 핵심 미스터리인 왜 범인은 살인 현장의 문을 그토록 오래 닿아두려 했는가, 와 직결되는 부분이라 더 보아넘기기가 곤란했다. 그래도 모처럼 기대해볼 만한 작가가 나왔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다른 작품들도 계속 출간됐으면 좋겠다.
 




      
<페이드 어웨이 - 할런 코벤>

전직 NBA 선수 출신이자, 현재는 스포츠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는 마이런 볼리타의 세 번째 이야기. 시리즈 제1편 <위험한 계약>에 이어, 2권은 건너뛰고 3권 <페이드 어웨이>가 먼저 나왔다. 이번 편에서 마이런은 NBA팀 뉴저지 드래건스(실제로 뉴저지의 팀은 넷츠Nets다)의 간판 스타 그렉이 실종된 사건을 맡게 된다. 마이런과 그렉은 대학 시절 라이벌이었지만, 마이런이 그렉의 여자친구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적이 있어 언제나 마음이 무거웠기에 사건을 맡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시 선수로 복귀해 팀원들 사이에서 나도는 소문들을 바탕으로 서서히 그렉에게 접근해가는 마이런. 사건의 배후에 감춰진 진짜 실종 이유는 무엇일까? 재미있는 소설도 좋아하지만, TV의 스포츠 중계도 놓칠 수 없다는 사람이 마땅히 봐야 할 책이 할런 코벤의 마이런 볼리타 시리즈다. 이번 작품에서 마이런은 NBA 선수로 활약하는 한편 탐정으로서의 업무도 게을리하지 않는데,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화려하게만 보이는 NBA 스타들의 일상적인 모습이나 라커룸의 풍경, 들뜬 경기장 분위기 등등이 낱낱이 스케치되어 있어 NBA 팬으로서 너무 재미있었다(실제 선수들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을 모티브로 한 선수들은 여럿 발견된다). 더구나 할런 코벤은 제프리 디버 못지않은 반전의 제왕이니 기대해봐도 좋을 것이다. 그가 쓰는 다른 스탠드얼론 스릴러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유쾌한 재담꾼 마이런 볼리타의 농담 한 마디 한 마디는 배꼽을 간질이고, 독자들의 짐작을 철저히 배반하는 결말도 한 방 제대로 뒤통수를 때린다. 누구나 반드시 읽어야 할 대작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이번 달에 본 작품들이 어딘가 한 군데씩 아쉬운 데가 있어 개중 가장 나은 이 작품을 이 달의 미스터리로 결정했다. 

 



2009년 8월의 미스터리: <페이드 어웨이 - 할런 코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매지 2009-09-23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겹치는 게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밖에 없는데,
정말 범인이 탐정보다 두세 수 떨어지는 게 아쉽더라구요.
뭐 그래도 나름 몰입감도 있고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아요 ㅎㅎ
조만간 <귀를 막고 밤을 달린다>도 읽어보려구요~


카스피 2009-09-23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워낙 많은 추리소설들이 나와서 다 보질 못하겠네요.저는 46번째 밀실을 읽었는데 그닥 재미가 덜하더군요.

무해한모리군 2009-09-24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란포 2를 읽어야 하는데.. 아 요즘 하도 쏟아져서 저도 밀려있네요 --;;

쥬베이 2009-09-2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이시모치 아사미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읽었는데,
정말 최악이었어요. 감히 리뷰조차 쓸 수 없는 지경. 썼단 출판사에서 찾아올까봐요ㅋㅋ
그런데 저 작품은 괜찮나 보네요^^
제다이님 이시모치 아사미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jedai2000 2009-09-26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는 이런저런 결점이 있지만, 그래도 극단적인 범행 상황을 사이에 둔 두 적수의 대결이라는 주제를 한눈 팔지 않고 집중력 있게 몰고 가니, 나름대로 힘이 나오더라구요. 저도 사실 상당히 재미있게 봤습니다. <귀를 막고 밤을 달린다>는 밑의 쥬베이님이 악평을 하셨네요 -_-;;

카스피님...그러게 말입니다. 도저히 소화하려야 할 수가 없네요. 다 사는 건 고사하고 반도 못 읽을 판이어요. <46번째 밀실>은 깔끔하지만 소품 정도라 좀 아쉽죠^^

FTA반대휘모리님...요즘 안 밀린 사람이 어디 있나요ㅠ.ㅠ 그래도 책이 어디 도망가는 건 아니니까 찬찬히 보세용~

쥬베이님...정말 최악이라니 일단 장바구니에서 뺐습니다. 초기작인 <아일랜드의 장미> <달의 문> 등은 평이 좋은데,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는 그렇게 별루였군요. 사실 내용 소개만 보고도 그닥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은 안 왔는데 과연...전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만 봐서는 아쉬움이 좀 있지만 그래도 기대해볼 만한 신인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편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쥬베이님 말씀대로라면 좀 실망이네요. 작품마다 편차가 이리 커서야...
 
몽키스 레인코트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전행선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읽는 사립탐정 소설이다. 베트남 전 참전용사 출신의 엘비스 콜은 파트너 조 파이크와 함께 LA에서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엄마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고 반해 이름을 엘비스로 개명시켰다는 재미난 일화를 가지고 있는 그는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잘 때까지 농담을 일삼는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지만, 베트남 전 때 만난 조 파이크는 과묵하고 악당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병기다. 이렇게 성격은 달라도 두 사람은 큰 공통점이 있으니 둘다 정의감이 무척 강하다는 것, 그리고 약한 자의 슬픔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엘비스는 바람나서 집을 나간 남편을 찾아달라는 엘런의 의뢰를 받아들이는데, 할리우드 에이전트였던 엘런 남편의 실종을 조사하면 할수록 이 사건이 생각했던 것만큼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베트남 전 참전용사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읽는 동안 멜 깁슨 주연의 영화 <리쎌 웨폰>이 떠올랐다. 마침 <리쎌 웨폰>과 이 책이 발표된 시기도 1987년으로 동일하다. 물론 누가 누구를 표절했다는 건 아니고, 몇 가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얘기다. 두 작품 다 LA 배경에, 주인공은 베트남 전 참전용사들이고, 그에 따라 강렬한 액션 씬이 연속되며, 서로 이질적인 성향의 두 파트너가 점차 가까워지는 걸 묘사하는 일종의 버디 액션 장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게 느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의 사립탐정 소설에서는 유독 무지막지한 파트너가 자주 등장하는 듯하다. 로버트 파커가 창조한 스펜서와 호크, 할란 코벤의 마이런 볼리타와 윈,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와 부바 등이 언뜻 떠오르는데, 전부 후자의 인물들이 무시무시한 액션 히어로들이다. 이렇게 모든 게 다른 두 명의 파트너를 작가들이 자주 한 팀으로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각각 개성과 가치관은 달라도 정의 수호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단결해, 사악한 적들을 물리치고 더욱 끈끈한 우정을 만들어가는 파트너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걸 독자들이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책없이 두꺼운 요즘 스릴러들에 비해 370페이지로 깔끔한 분량이다. 엘비스는 끊임없이 배꼽 빠지는 농담을 날리지만, 분량도 그렇고 사건의 구조가 비교적 단선적이라 머리 쓸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작가 로버트 크레이스는 사건의 핵심에 이르러서 마침내 나타나는 지하 세계의 거물 대 엘비스 콜-조 파이크의 정면대결에 소설의 모든 힘을 집중시킨 느낌이다. 베트남의 정글에서 했던 것처럼 얼굴에 온통 붉은 칠을 하고,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채 적 아지트를 기습하는 결말의 박력은 정말이지 원초적인 쾌감이 넘친다. 특히 이 장면에서는 울창한 나무숲으로 뒤덮여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베트남의 정글과 네온으로 번쩍이는 할리우드의 거리는 그 모양부터가 전혀 다르지만, 돈과 마약, 환락으로 미쳐 돌아가는 LA도 베트남의 정글과 비교해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느껴진다.

 

액션이 한층 강화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를 읽는 느낌, 혹은 기가 막힌 농담들이 추가된 로버트 파커의 스펜서 시리즈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수표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던 전업주부 엘런이 가정에 닥친 비극 앞에 점점 강해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 마지막에 엘런이 결혼생활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님이 확인되는 장면 또한 무척 상쾌하다. 작가는 엘비스 콜 시리즈를 현재까지 총9편 썼고, 파트너 조 파이크가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는 스핀오프 시리즈도 쓰고 있다는데 개인적으로 터프가이 조 파이크 시리즈도 꼭 읽어보고 싶다. 내 생각에는 미 육군 출신의 고독한 늑대 잭 리처가 등장하는 리 차일드의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날 것 같다(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도  담배나 마약보다 강한 중독성을 자랑한다). 재치 있고 여자도 잘 낚는 재간둥이 엘비스 콜과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조 파이크를 만나보게 되어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헤이, 탐정들. 한국에 온 걸 환영해. 앞으로 자주 보자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범인 없는 살인의 밤 - 히가시노 게이고>

 

1990년에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교적 초기 단편집. 게이고는 긴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매만지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 보통 단편보다는 장편에서 더 실력 발휘를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탐정 갈릴레오>나 <예지몽> 등의 연작 단편집을 제외하고는 그간 국내에 일반 단편집이 소개된 적이 없기도 했다. 이 타고난 스토리텔러가 단편은 어찌 쓸까 궁금하던 차에 읽어봤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물론 아무래도 20년 가까운 시차가 있으니 어느 정도 낡은 느낌도 들고, 이거다 하고 서슴없이 내세울 만한 걸작 단편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심심할 때 읽으면 딱 좋은 전형적인 히가시노 게이고 표 미스터리로 큰 부족함은 없는 듯. 수록작 중 '작은 고의에 관한 이야기'는 초기 게이고의 작풍을 대변하는 물리트릭+학원물의 공식을 사용해서 반가웠지만 2프로의 아쉬움이 남고, 표제작인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작가가 잘 구사하지 않았던(그래서 이건 못하겠지 했던) 서술트릭을 표방한 작품이라 트릭에 대한 게이고의 천착에는 한계가 없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러나 내 기준에는 사회파에 가까운 '춤추는 아이'의 안타까운 결말이 가장 기억에 남고, 제일 훌륭한 작품으로 보인다. 각 단편들의 분량이 그리 많지 않으면서도 어느 선 이상의 재미는 항상 보장하므로 초보 미스터리 독자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책표지에 '출간 2주만에 3만부 돌파'라는 스티커를 붙였던데, 솔직히 믿을 수도 없는데다 벗겨버리면 그만인 띠지도 아닌 스티커를 표지에 붙여 표지 디자인을 망치는 행위가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다. 

 

 



 

 

 

 

 

 

<뒤마 클럽 -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스페인의 '움베르토 에코'라고 불리우는(본인만 그렇게 주장하는지도 모르겠다) 레베르테의 팩션 스릴러. 어떤 고서든 찾아주는 책 사냥꾼 코르소가 악마를 불러낼 수 있다는 <아홉 개의 문>이라는 고서의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한편 코르소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의 육필 원고의 진위를 밝혀내라는 의뢰도 받고 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삼총사>의 악역인 로쉬포르 백작을 연상시키는 인물이 나타나 살인을 일삼는다. 우리가 흔히 알지 못하는 고서 수집, 복원, 감정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차용하고 있기에 비교적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간략히 줄거리를 설명한 대로 크게 <아홉 개의 문>과 악마 루시퍼, 그리고 <삼총사>와 뒤마에 관한 이야기의 두 흐름으로 진행되는데, 두번째 이야기인 <삼총사>와 뒤마에 관한 결말은 독서가들(특히 추리소설 독서가들)이 저지르는 본능적인 실수와 오류를 파고들어 아주 기발했고 크게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다만 전 세계에 세 권만이 남아 있다는 <아홉 개의 문>에 관한 이야기는, 책에 있는 악마가 직접 그렸다는 삽화(타로카드를 닮은 9장의 그림들이 실제로 그려져 있다)들의 차이점을 조목조목 비교, 분석하는 등 초반에는 무척 흥미로웠으나 결말에 이르러 대충 끝맺었다는 불쾌감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떤 여운이나 독자에게 결론을 맡기는 식의 문학적 테크닉이 아니라, 단순히 작가가 어떻게 끝을 내야 할지 몰라서 허둥지둥 끝낸 느낌이었다는 말씀. 책을 다 읽어도 시원하게 해결되는 맛이 없다. 개인적으로 반은 재미있고, 반은 허접한 이런 류의 책이 참 추천하기 난감하다. 조니 뎁이 코르소로 나오고,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한 <나인스 게이트>라는 영화로도 있으니 참고하시길...

 

 



 

 

 

 

 

 

<백기도연대 雨 - 교고쿠 나츠히코>

 

2006년에 <광골의 꿈>이 나온 이래 3년간 소식이 없는 '교고쿠도 시리즈'를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스핀오프격인 <백기도연대 雨>를 먼저 읽기로 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헌책방 주인이자 음양사, 더구나 아웃사이더를 방불케 하는 속사포 수다쟁이 교고쿠도와 그의 친구인 염세주의 소설가 세키구치, 타인의 기억이 보이는 미중년 탐정 에노키즈 등의 교고쿠도 패밀리가 협력해 좌충우돌 온갖 괴사건을 해결하는 게 원래 시리즈라면, <백기도연대> 시리즈는 비교적 조역에 가까웠던 에노키즈가 전면에 나서는 연작 단편집이다. 교고쿠도 시리즈에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법한 기묘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총출동하는데(그래서 이 시리즈를 캐릭터성을 중시하는 라이트노벨의 원조격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서도 에노키즈는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엽기 탐정이다. 본인을 신으로 생각하는 방약무인함과 절대 추리를 하지 않는 기기묘묘한 탐정질(살해 장면이 머릿속으로 보이는데 왜 추리를 하겠는가),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우왕좌왕하다 끝에 가서는 결국 사건이 해결되니 다행이긴 하지만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화자의 선택에 있었다.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나'라는 1인칭 화자는 우연히 에노키즈에게 사건을 맡긴 다음부터 교고쿠도 패밀리를 접하게 되는데, 세상에 이런 잡놈들이 어디 다 숨어 있다 이제 나타났나 싶을 정도라 가치관에 혼란을 겪게 된다. 이제 충분히 시달렸다 싶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에노키즈와 교고쿠도 친구들을 찾는 '나'. 이는 아마 이 시리즈를 접한 독자의 마음이 아닐까.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런 괴물들에게 질렸다 싶으면서도 어느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독자들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절묘하게 공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창조한 이 인물들에게서 당신들은 결코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작가의 강한 자신감과 이 시리즈를 그토록 사랑해준 독자들까지 작품에 참여시키고야 마는 팬서비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설없는 땅 - 후나도 요이치>

 

매년 그해 출간되는 일본 미스터리를 대상으로 순위를 매기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는 발표될 때마다 일본 미스터리 애호가들이 가장 궁금해하고 기대하는 랭킹이다. 1989년에 시작된 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의 최초 1위작은 바로 지금 소개하는 후나도 요이치의 <전설 없는 땅>. 욕망으로 꿈틀대는 남미를 배경으로 일군의 거친 사나이들이 거액의 돈과 천연자원을 놓고 격돌하는 일종의 모험소설로서, 작가인 후나도 요이치는 국제모험소설이라 불리는 이 장르의 장인이다. 어떻게 보면 펄프작가 이원호의 <황금의 땅>을 연상시키는 테스토스테론 과다분비 액션활극이라 할 수도 있지만, 30년 넘게 남미와 동남아를 누비며 직접 취재를 하고 당대 제3세계의 현실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책 속에 담아내는 후나도 요이치의 작품은 한 편의 인문서로서도 손색이 없으니 말초적인 재미에만 치중하는 여타의 활극과는 분명히 그 궤를 달리한다. 무척 좋아하는 개빈 라이얼의 <미드나이트 플러스 원>을 연상시키는 고독하고 허무한 남자들과 피를 뿜는 총격전. 한마디로 남성들이 즐길 요소가 가득하다. 참고로 후나도 요이치의 작품은 휴양지로 유명한 필리핀 세부의 참혹한 현실을 다룬 <무지개 골짜기의 5월>이 번역되어 있으며, 그 외에 이 작품이 유일하게 소개되었다. 개인적으로 후나도 요이치 또 하나의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작인 1992년작 <모래의 크로니클>과 일본모험소설협회 대상<거친 방주> 정도는 더 보고 싶은데, 과연 나와줄런지...

 

 

 

2009년 7월의 미스터리: <전설없는 땅 - 후나도 요이치>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pple 2009-08-14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마클럽은 몇년전에 봣는데, 나인스게이츠를 먼저 보고 봣었는데도 영화보다 소설이 별로 였던 느낌이었어요.ㅠ ㅠ 사실 너무 지루해서 죽을뻔....;; 지금은 얘기조차 기억 안나네요.ㅠ ㅠ
그나저나 제다이님 오랜만입니다.^^

paviana 2009-08-1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제다이님 오래간만이세요.
백기도연대는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ㅎㅎ

jedai2000 2009-08-15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님...저는 영화는 못 보고, 소설만 읽었는데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다 막판의 허무한 결말을 보고 급분노를-_-;; 영화를 나중에 봐야겠습니다 ^^ 정말루 너무 오랜만이네요. 너무 반갑습니다~~

파비아나님...파비아나님도 진짜 완전 반가워요^^;; 잘 지내시죠? <백기도연대 풍>은 아직 안 봤는데 어서 읽어야겠어요. 무더운 여름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어요. 건강 관리 잘 하세요^^


쥬베이 2009-09-13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누나도 완전히 히가시노 게이고에 빠졌어요
저는 별론데, 좋아하더라고요ㅋㅋ
<범인 없는 살인의 밤>, 띠지인지 알았는데 아니어서 황당했었는데
제다이님도 그러셨네요^^

jedai2000 2009-09-14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은 난이도도 비교적 쉽고, 스토리가 흡입력이 아주 강해서 미스터리 초보 독자들에게 아주 잘 맞죠. 저도 그래서 추리소설 처음 접하는 분들께는 늘 게이고를 추천합니다 ㅎㅎ 이런 홍보 스티커는 최악이예요. 애써서 표지 디자인 잘 해놓고 상품 광고로 가려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_-;;
 

 

<행방불명자 - 오리하라 이치>

서술트릭으로 유명한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다. 작년에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도착 시리즈'의 1편 <도착의 론도>가 나와 반응이 좋았는데 나오라는 2편 <도착의 사각>은 안 나오고, 다른 출판사에서 의외의 작품이 출간된 셈이다. 참고로 <행방불명자>는 <유괴자> <실종자> 등 <OO자> 시리즈의 최신작이란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리 차일드의 작품 제목을 <추격자> <탈주자>로 역시 <OO자>로 내고 있는데, <노숙자>를 누가 먼저 쓸지 귀추가 주목된다. 언제나처럼 장기인 서술트릭을 전면에 내세운 이 작품은 지방의 명문가 4인 가족이 어느날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사건을 조사하는 르포라이터의 이야기와 우연히 여성들을 습격하는 괴한의 정체를 알게 된 추리소설 작가 지망생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서술트릭이란 독자들이 오로지 작가의 서술을 통해서만 정보를 제한적으로 습득할 수밖에 없다는 문학 텍스트의 구조적인 한계를 이용하여 함정을 파놓은 걸 뜻한다. 오리하라 이치는 '나'라는 1인칭 주인공을 사용해 서술자의 성별을 숨긴다든지(독자는 '나'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다. 소설은 영상처럼 '보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현재-과거-미래를 마구 뒤섞어 사건의 선후를 오독시키는 등 다채로운 서술트릭의 테크닉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속이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읽는 동안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며, 결말도 명쾌한 맛이 부족한 것 같다. 같은 서술트릭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나 <살육에 이르는 병>을 보면 결정적인 트릭은 단 한 가지고, 그게 공개되는 순간 뒤통수에 한 방 제대로 팍 맞는 느낌이 시원스럽다. 하지만 <행방불명자>는 결말을 확인하는 순간조차 웬지 막무가내로 억지를 쓰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든다. 여러 사건이 얽히고 섞인 게 너무 혼란스러워, 사건의 복잡한 전말 역시 작가가 그렇다면야 그렇겠지, 하고 더 생각하기도 싫어지는 것이다. 독자를 속이기 위해 이렇게까지 구질구질하게 굴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입맛이 쓰다. 아무리 먹고 사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지만 즐겁자고 보는 추리소설에서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추리소설가의 쥐어짬을 보는 기분은 안타까울 뿐이다. 

 

<예지몽 - 히가시노 게이고>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흥행 '보증수표화' 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연작 단편집. 이 작품의 주인공이 바로 그 유명한 <용의자 X의 헌신>의 물리학 조교수 유가와와 형사 구사나기 콤비다. 이들의 활약은 첫번째 단편집 <탐정 갈릴레오>에서 시작되며, <예지몽>은 그 두번째다. 나오키상을 타고 영화화되는 등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용의자 X의 헌신>이 제3편으로, 이 시리즈는 현재 <갈릴레오의 고뇌>와 <성녀의 구제>까지 총5편으로 한일 양국에서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예지몽>은 이공계 추리소설 작가로 유명한 게이고가 야심차게 준비한(요즘 보기 드문) 물리트릭 지향의 작품이다. 수록된 다섯 개의 단편들 모두 최신 과학에 기반을 둔 기발한 트릭들이 사용되며, 폴터가이스트 현상, 도깨비불, 예지몽 등 온갖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숨겨진 비밀을 거침없이 파헤치는 유가와 교수의 활약이 짜릿하다. 다만 이 시리즈의 약점은 독자가 추리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 단적인 예로 표제 단편 '예지몽'에서 선보인 교살 트릭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발한 것이지만, 첨단 신소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독자가 맞출 방법이 없다. 대부분의 단편들이 이런 식이라 명탐정 갈릴레오(유가와의 별명)의 명쾌한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리다 박수를 치는 것 말고는 독자가 할 게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시원스런 전개와 신기한 트릭으로 인해 읽는 맛은 아주 뛰어나다. 1시간 30분 정도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독자에겐 최고의 선택일 듯.   

 

 

 

 

 

 

 

  

<은폐수사 - 곤노 빈>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유독 경찰소설의 인기가 많다. 일본에서는 국가고시를 통과한 엘리트들(캐리어)과 진급에 한계가 있는 평경관(논캐리어) 간의 첨예한 대립이 있으므로, 두 계층 사이에 드라마틱한 사건이 발생할 여지가 높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왜 경찰소설이 안 될까를 생각해보면, 역시 건국 이후 줄기차게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하며 많은 국민들에게 폭력적이고 말이 안 통하는 모습만을 보여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우리나라의 경찰 이미지는 최근까지 많이 개선되었다지만,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으니 친근한 시민의 지팡이로 국민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은폐수사>는 요코야마 히데오, 사사키 조 등과 함께 일본 경찰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인 곤노 빈의 류자키 시리즈 제1작으로 올해의 발견이라 할 만큼의 수준작이다. 보통 일본의 경찰소설은 현장을 잘 모르면서도 젊은 치기와 엘리트주의에 빠져 수사를 망치는 캐리어에 맞서는 일선 형사들의 활약을 많이 그리는 편인데, 이 작품은 조금 다르다. 주인공 류자키는 도쿄대를 졸업한 경찰 관료로 뼛속까지 캐리어의 사고방식을 가진, 어떻게 보면 보기만 해도 올라오는 재수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전국을 뒤흔든 연쇄 살인사건과 그 배후에 숨겨진 경찰 조직들 간의 파워 게임에서 그가 보여주는 원칙과 소신은 '왕비호' 류자키를 어느새 국민 훈남으로 변화시키고 만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란, 상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 사회가 잘못된 것이라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수 있는 남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도 굽힘이 없는 그의 원칙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또 감동하게 되었다. 이런 인물이 소설 속에만 있지 말고, 우리 주변의 경찰에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류자키의 다음 활약을 어서 빨리 보고프다. 추리소설이라기엔 이렇다 할 미스터리가 없지만, 꽉 막힌 경찰 조직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신경전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에도, 인정에도, 심지어 가족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진짜 사나이 류자키의 매력이 환상적인 독서를 보장한다. 

 

 

 

 

 

 

 

<방해자 - 오쿠다 히데오>

이 달의 미스터리다. <은폐수사>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하지만 대진운이 좋지 못했다. <방해자>를 이번 달에 잡았다는 게 <은폐수사>의 유일한 패인이라고 할까. <공중그네>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폭소탄 유머소설가로 자리매김한 오쿠다 히데오가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걸작이다. 두 아이의 엄마로 대형 마트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살림에 보태는 평범한 주부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다니는 회사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 당시 유일하게 회사에 남아 있던 남편이 용의자로 지목되며, 소박한 행복에 서서히 균열이 오기 시작한다. 내 남편이 범인이라면? 아이들은 손가락질 받고, 남편은 회사에서 해고되어 집 대출금조차 갚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고민은 언제든지 한순간에 아찔하게 추락해버릴 수 있는 현대인의 마음속 공포를 놀랍도록 날카롭게 자극한다. 한편 방화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는 교통사고로 임신 중인 아내를 잃고 불면증과 신경 쇠약에 시달리는데, 야쿠자와 결탁한 선배 형사를 감시하는 모두가 기피하는 더러운 일을 하다가 우연히 동네 불량소년을 폭행해 목이 잘릴 판이다. 커다란 금전적 피해나 인명 사고도 없는 자그마한 방화 사건에 얽힌 주인공들의 내일은 이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하며, 누구나 한숨을 쉴 수 밖에 없는 우울한 운명의 소용돌이로 독자를 안내한다. 전3권으로 출간되어 금전적인 부담이 있지만, 일단 한 번 잡으면 절대로 놓지 못하는 페이지터너다. 내 경우 이틀 만에 봤다. 회사에서도 몰래 읽었을 정도. 평범한 사람들에게 닥친 비극을 통해 현대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같은 해에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과 느낌이 비슷하고, 어느 주부의 어쩔 수 없는 일탈 행동을 그려 강렬한 독서 체험을 선사하는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도 생각나는 줄거리다. 하지만 공히 인정받은 이 두 작품과 비교해 절대로 부족하지 않은 소설로, 이 정도 재능을 가진 작가가 왜 계속 추리소설을 쓰지 않고 유머소설을 쓸까 하는 생각에 잠시 우울해졌다. 책 띠지에 이츠키 히로유키라는 동료 소설가가 '이 작가에게는 어딘가 독자를 끌어당기는 천부적인 재능이 느껴진다'라고 한 코멘트를 담았는데, 제대로 본 듯하다. 정말이지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박진감 넘치는 책으로, 2권 마지막 장에서 돋은 오싹한 소름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았다. 다만 작가 오쿠다 히데오는 우익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작품에서도 노동 운동가들에 대해 그들의 위선을 맵게 풍자하는 장면이 있어 그 점에서 신경이 쓰일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는 건 미리 말해둔다.







2009년 6월의 미스터리: <방해자 - 오쿠다 히데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09-07-18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신 순으로 하신거죠? 이달의 미스터리라길래.. 이달 출간된 건줄 알았네요. ^^

오쿠다 히데오의 <방해자>는 양장본에 권당 200페이지대 책에 책 사이즈도 작은데 3권으로 나오는 무리수를 둔 이유가 궁금합니다. 추리소설 중에서 이렇게 적은 분량이 분권으로 나온건 정말 처음인듯해요.

은폐수사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 경찰소설 좋아해서, 보관함에 담아두었는데, 괜찮다니, 요즘 읽을 책도 없는데 ( ...응?) 읽어봐야겠네요.

이매지 2009-07-18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해자>는 정말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더군요. 하이드님 말씀처럼 3권에 양장본 출간이라는 무리수를 왜 둔 건지는 참 -_-;; 오쿠다 히데오의 네임벨류를 믿고 이래도 산다고 생각하고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탐정 갈릴레오>는 드라마로 먼저 봐서 그런지 내용이 심심하던데, <예지몽>은 어떨까 궁금하네요. <은폐수사>는 보관함에 담습니다 ㅎㅎ

비연 2009-07-18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지몽>은 드라마와 내용이 거의 비슷해서 좀 김이 빠졌었넨ㄷ.
<방해자>는 오쿠다 히데오가 쓴 의외의 작품이라는 평이 많더군요^^
<은폐수사>는 괜챦을라나...경찰소설이 재미나죠 사실~

Koni 2009-07-18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쿠다 히데오의 미스터리라니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전 <은폐수사> 쪽도 끌리네요.^-^

jedai2000 2009-07-19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네, 이번 달에 제가 본 책들입니다 ^^;; 실은 매달 출간된 책들을 대상으로 해서 그 달, 그 달 가장 추천하는 책들을 알려드리고 싶은데, 경제적 여건상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다 소화할 수가 없네요ㅠ.ㅠ <방해자>는 일본에서 2권으로 나온 책인데, 우리나라에서 굳이 3권으로 낸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은폐수사> 후회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이매지님...저도 소비자 입장에서 썩 유쾌하지는 않은데, 어떻게 내도 책이 잘 나간다면 무리수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아요. 2권으로 내도 권당 15,000원을 책정하면 어차피 그게 그거기도 하구요-_-;; 제가 보기에 <예지몽>은 <탐정 갈릴레오>보단 각 단편들 수준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비연님...전 드라마를 못 봤는데, 드라마는 <탐정 갈릴레오>와 <예지몽>이 합본된 내용인가 보네요^^; <은폐수사>는 일본에서 반응이 굉장히 좋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읽어보신 분들은 다 만족하신 것 같더라구요. 시작 출판사에서는 2편 <과단>까지 계약했답니다. 근데 속편은 내년에 나온대요 ㅠ.ㅠ

냐오님...오쿠다 히데오는 오히려 대박을 쳤던 <공중그네> 같은 유머소설을 제외한 작품들이 괜찮은 것 같네요. 국내에 나온 것 중에서는 <방해자>와 <남쪽으로 튀어>를 제일 잼있게 봤습니다. <방해자>를 너무 괜찮게 읽어서 <최악>도 샀어요^^

쥬베이 2009-09-13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해자>가 저 정도로 명작이라니...
저는 사실 무시하고 있었거든요. 장바구니 직행~
<최악> 볼만해요ㅋㅋ

jedai2000 2009-09-14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방해자>는 현재까지는 올해 본 책 중에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새로운 오쿠다 히데오를 느끼실 수 있을 듯. <최악>은 아직도 안 읽었네요 -_-;;
 

- 앞으로 매월 읽은 미스터리를 짤막하게 정리해 그 달의 베스트를 정하려 합니다. 나이 먹다 보니 하는 것도 없이 바빠 길게 독후감을 쓸 시간이 없어 편법을 쓰게 되네요...

 

 




<제물의 야회 - 가노 료이치>

 

미스터리 동호회 등에서 평이 대단히 좋았던 가노 료이치의 하드보일드 스릴러. <양들의 침묵>을 비롯해 영미권에서 대단히 인기 있는 사이코 스릴러를 연상시키는 연쇄 살인범이 등장한다. 그는 여성 하프 연주자의 아름다운 손을 탐내 그녀를 죽이고 손을 잘라 가져간다. 그와 맞서는 두 남자는 어두운 과거를 가진 프로 살인청부업자와 아이를 잃고 아내와 별거중인 고독한 형사. 비록 살인으로 먹고 살지만, 어딘지 모를 기품과 철저한 장인정신을 가진 청부업자의 캐릭터는 오사와 아리마사의 <독원숭이>에 등장하는 중국인 킬러 '독원숭이'를 떠오르게 만들며, 고독한 형사 역시 일본 경찰소설에서 자주 본 듯한 인물이다. 십수 년 전인 중학교 때 엽기 살인을 저지른 과거가 있는 자가 핵심 용의자라는 설정을 통해 소년범죄 및 소년범 관리의 허와 실을 지적하기도 하며, 야쿠자 세력 간의 암투를 긴장감 넘치게 그리는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굉장히 두꺼운 작품이지만 질리지 않고 재미있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 서양식의 이상심리가 주제인 스릴러, 각종 소설과 영화, 만화 등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킬러들의 총격전과 격투, 전형적인 일본 경찰소설의 클리쉐가 혼합되어 있어 독창성 면에서는 약간 감점을 주고 싶다.

 

 


<고식2 - 사쿠라바 가즈키>

 

<내 남자>로 나오키상을 탄 바 있는 사쿠라바 가즈키는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라이트노벨 작가로 출발해 서서히 영역을 넓히고 문단에서도 인정받은 특이한 이력의 작가다. 라이트노벨 시절의 대표작인 '고식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 <고식2 - 그 죄는 이름도 없이>는 라이트노벨을 그리 읽지 않는 내게도 미스터리색이 비교적 강해 만족스러웠다. 1차대전이 막 끝난 유럽을 배경으로, 독일과 스위스 국경 어딘가에 있다는 가공의 왕국 소뷔르에 유학간 일본인 소년 카즈야와 '늑대'라는 소문이 있는 천재 소녀 빅토리카가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빅토리카의 과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그녀의 어머니가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과거의 살인사건에 도전한다. 당시 살해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 하나 정확한 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간단한 사실만으로 명추리를 펼치는 빅토리카의 활약이 대단하며 일종의 밀실 미스터리로도 볼 수 있을 듯. '고식 시리즈'는 라이트노벨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 소소한 유머와 소년소녀가 겪는 아슬아슬한 모험담, 사건풀이의 재미, 서서히 싹트는 알콩달콩한 로맨스까지 즐길 만한 요소가 많다.

 

 





 

<악몽의 엘리베이터 - 기노시타 한타>

 

아마도 연극 극본가이자 연출가인 작가가 연극용으로 썼으리라 보여지는 유머 서스펜스. 사건이 대부분 엘리베이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데, 이 간단한 설명만 듣고는 그 안에서 일이 있어봐야 얼마나,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일이 다 벌어지므로 쉴 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다 어느새 마지막 장을 보게 된다(물론 페이지 수가 적은 탓도 있다). 평범한 바텐더가 회식 때 술에 뻗은 여직원을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정신을 잃는다. 눈을 떠보니 고장난 엘리베이터 안이고, 뭘 해도 어색한 수염남, 메뚜기를 닮은 오타쿠, 음침한 분위기의 여자와 함께다. 바텐더는 아내가 출산 예정이라 엘리베이터를 탈출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천하태평이니 속이 탈 수밖에...1장은 바텐더, 2장은 메뚜기 오타쿠, 3장은 수염남 각각 세 사람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점차적으로 대체 이날  엘리베이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의 퍼즐이 맞춰지는 구조라 연극으로 보자면 3막극이 아닐까 싶다. 바텐더의 절박함과 대비되는 다른 사람들의 느긋하고 엉뚱한 반응이 웃음과 더불어 애가 타는 서스펜스를 발생시키는 포인트. 반전도 비교적 괜찮아 재미있게 읽었지만, 단지 계속 꼬여가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등장인물들을 몇 명 죽이기까지 한 건 조금 지나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유령은 밤에 나타난다 - 하야미네 카오루>

 

아동 추리소설가 하야미네 카오루의 자칭 명탐정 '유메미즈 키요시로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 전작에 이어 유메미즈는 옆집 사는 세쌍둥이 아이, 마이, 미이와 함께 새로운 사건에 도전한다. 이번 사건은 학교 시계탑의 종이 울리면 누군가가 죽는다는 '학교 전설'과 관련되어 있으며, 한밤중 갑자기 하늘에서 학교 운동장으로 책상, 의자, 마네킹이 날아오는 등 그야말로 기묘한 일들 천지다. 유메미즈가 단번에 밝혀낸 사건의 진상은 일종의 거대한 장치 트릭이라 볼 수 있을 텐데,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솔직히 현실감은 제로다. 그러나 아동용 미스터리를 보며 리얼리티를 따질 독자들은 많지 않을 테니, 큰 약점은 아닐 터. 작가 하야미네 카오루는 본격 미스터리에서의 리얼리티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유메미즈 키요시로 시리즈'를 쓰고 있어, 일본에서는 벌써 13권이 나왔고 25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아동용 추리소설까지 활발히 창작되고 있는 일본이 문득 부러워진다.

 

 





 

<구부러진 경첩 - 존 딕슨 카>

 

밀실 추리소설의 마스터, 고전 추리소설의 세 대가 중 한 명인 존 딕슨 카의 대표작이다(나머지 두 대가는 당연히 애거서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이리라). 미스터리 애호가들이 가장 출간을 손꼽아 기다렸던 작품으로, 이번 <구부러진 경첩> 출간을 기화로 크리스티나 퀸에 비해 유독 국내 출간 편수가 적은 카의 작품들이 속속 나와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작품의 배경은 언제나처럼 영국의 시골 마을. 마을에서 존경받는 존 판리 경에게 불청객이 찾아온다. 불청객은 타이타닉 호 침몰사건 때 머리에 충격을 받아 원래 존 판리였던 자신과 떠돌이 서커스 단원의 신분이 바뀌었고, 지금 존 판리 경 행세를 하고 있는 남자는 사기꾼 패트릭 고어에 불과할 뿐이라 주장한다. 마침 어린 시절 존 판리 경이 재미삼아 찍어두었던 지문이 남아 있음이 알려지고 그 지문 감식이 이뤄지는 순간에 현재의 존 판리 경이 정원에서 목이 잘려 죽는다. 목격자들은 여럿이 있으나, 존 판리 경이 허공에서 팔을 휘두르는 모습만 보았을 뿐 그곳에 제2의 인물은 없었다. 일종의 '열린 밀실'이라 할 정원의 보이지 않는 살인자의 정체는? 카가 창조한 명탐정 기디온 펠이 펼쳐내는 사건의 해답은 두 가지인데 놀랍게도 둘다 말이 되고 논리적이다. <왕자와 거지>를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플롯과 카의 전매특허인 독창적인 트릭이 결합된 고전 본격 미스터리의 명편으로 처음 선정하는 '이 달의 미스터리'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때로 대체 무슨 말인지를 이해할 수 없는 어색한 번역과 줄 맞추기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조악한 편집은 크게 유감스럽다. 기왕에 대가 존 딕슨 카의 명작을 출간하는데,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뛰어난 만듦새까지 뒷받침되면 더욱 반응이 좋을 거라 생각한다.

 

 

 

 

2009년 5월의 미스터리: <구부러진 경첩 - 존 딕슨 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06-22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9-07-01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글님...늦게 답변을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정도로 힘든 삶을 살고 있어서요. 전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취지에는 깊이 공감을 합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시국 선언까지의 행동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네요. 일단은 잠시 관망하는 중이랍니다. 저는 비록 합세하지 못했지만, 뜻이 맞는 애국자 분들이 두루 모이셔서 꼭 뜻하는 바를 이루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