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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라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7
로베르토 사비아노 지음, 박중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바로 지난 3월 22일에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마피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다. 참가 인원이 무려 15만 명. 좁은 도시에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썩는 곳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폭력 조직이 유사 이래 늘 있어 왔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웬 오버? 하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로베르토 사비아노의 충격적인 르포소설 <고모라>를 보게 된다면 그런 안이한 감상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깊이 깨닫고 말 것이다. 실제 나폴리 토박이인 사비아노는 나폴리의 마피아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 부를 축적하고, 살인과 테러로 어떻게 나폴리를 공포의 생지옥으로 물들이고 있는가를 지근거리에서 관찰했고,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충실하게 기록하였다. 그의 강렬한 분노와 예리한 분석, 뛰어난 문학성이 어우러진 <고모라>는 개인적으로 최근 몇 년 사이 나온 책 중 가장 읽어볼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탈리아의 범죄 조직 하면 흔히 마피아를 떠올린다. 사실 마피아는 코사 노스트라로 불리는 유서 깊은 시칠리아 본토의 범죄 조직만을 가리키며, 1900년대 초에 미국으로 이주한 시칠리안 갱들의 활약(?)을 통해 이탈리아 범죄 조직의 대명사가 되었다. 최초의 아메리칸 마피아 신디케이트를 만든 전설적인 뉴욕의 찰스 '럭키' 루치아노, 시카고의 알 카포네 같은 보스들의 이름은 한번쯤은 다들 들어보았을 듯. 이렇듯 미국의 이탈리아계 범죄 조직을 통칭해 보통 마피아라 부르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시칠리아의 코사 노스트라(마피아) 말고도 다양한 범죄 조직이 있다. 칼라브리아 지방의 은드랑게타, 풀리아 지방의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 그리고 나폴리의 카모라가 이탈리아의 4대 범죄 세력이다. 아직도 코사 노스트라는 가입식 때 성모 마리아 그림에 피를 묻힌 다음 불태우는 전통 의식을 행하지만 전통과 형식, 위계를 그닥 중시하지 않는 카모라는 낡은 의식 따윈 생략이다. 철저히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합법과 비합법을 오가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카모라에 의해 희생된 사람만 900명에 달하는 일종의 '범죄주식회사'라고 보면 된다.
책 못지않게 영화도 좋아하는 나를 늘 개봉과 동시에 극장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영화가 있으니 그건 갱이 나오는 영화들이다. 내 인생의 영화로 꼽는 영화 중 하나도 프란시스 코폴라가 미국으로 이주한 마피아 일족의 삶을 바로크적인 장중함으로 그려낸 <대부>며, 아메리칸 갱들의 흥망성쇠를 리얼하게 담은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 늙은 갱이 결국 과거로부터 찾아온 망령을 떨쳐내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하는 꿈이 이뤄지기 직전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칼리토> 같은 영화들은 비디오 테이프가 늘어날 정도로 보았다. <벅시>, <카지노>, <스카페이스>, <도니 브래스코>, 심지어 홍콩의 변종 갱 영화들인 <영웅본색>, <열혈남아>, <천장지구>, <고흑자> <무간도>, 갱이 토착화된 발음인 우리나라의 깡패를 그린 <게임의 법칙>, <비열한 거리>, <우아한 세계>까지 갱이 없으면 누굴 소재로 삼아 영화를 만들까 싶을 정도로 많은 영화들이 폭력 조직을 그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를 비롯한 많은 남자들이 갱 영화를 좋아하는 건 일종의 비밀스런 판타지가 충족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영화들에서 갱 우두머리들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법이 없다. 아무리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어도 언제나 가장 좋은 자리가 예약되어 있다. 비록 불법이라지만 돈은 썩어넘칠 정도로 흘러 들어오고, 미모의 애인도 여러 명, 마음에 안 드는 놈은 버튼만 누르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이런 게 바로 남성 판타지의 정수가 아닐까. 우리는 설레이는 꿈으로 가득차 사회 생활을 시작하지만 한 살씩 나이를 먹고 배우는 거라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현실에 다름 아니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비굴하게 명령에 따라야 할 때, 괴로워도 슬퍼도 참아야만 할 때 내게도 힘과 권력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아니 날 수가 없다. 그러나 조심하라. 마피아를 비롯한 폭력 조직이 검은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니까.
사비아노에 따르면 마피아는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힘이나 권력에 굴복하고 어떤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것을 얻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때 그 마음에 기생해 서서히 세력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돈과 힘으로 어떻게든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고, 경쟁자는 골통을 날려버려서라도 제거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에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라는 아름다운 나폴리에 카모라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카모라의 물리적인 폭력보다 나도 카모라의 힘에 호소해 정점에 서고 싶다는 나폴리 사람들의 비뚤어진 사고방식 자체가 카모라라는 병근을 제거하는 치료를 그토록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인구의 44퍼센트가 카모라와 관련된 나폴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돈과 권력에 미쳐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않는 전 세계의 어디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비아노의 근원적인 문제 제기로 역시나 금권주의로 인한 부정부패가 횡행하는 한국 사회에서도 고민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카모라의 주 수입원은 너무도 다양하다. 재봉사들을 거의 감금하다시피 몰아놓고 명품 의류를 싼 가격에 공급해 폭리를 취하는가 하면, 마약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그 자체다. 유통업과 건설, 쓰레기와 폐기물 처리 사업까지 관여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카모라의 연간 수입은 수십 억 유로로 원화로는 수 조 단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사비아노는 스크래치라는 아주 재미난 표현을 통해 해답을 준다. 마약 등의 불법으로 벌어들인 돈을 합법적인 곳에 투자하다 자금난 등이 생기면 치기직칙, 레코드 판으로 스크래치를 하듯 잠시 사업을 멈추고 다시 불법 행위로 돈을 끌어들인 다음 치기직칙, 다시 스크래치를 걸고는 합법적인 사업에 재투자. 이 합법과 불법의 스크래치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막대한 돈이 쌓이는 것이다. 누구도 막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카모라의 암약에 강렬한 적개심을 보이는 사비아노의 한 마디, 한 문장을 읽으며 마치 애미넴 같은 래퍼가 떠올랐다. 끝없는 분노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그의 용기 있는 외침은 마치 성서의 죄악으로 가득찬 타락의 도시 '고모라'의 유일한 선지자 '롯'의 재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다. 어느 시대나 의인은 어려움이 많은 법인지 과연 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는 카모라 보스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경찰로부터 엄중 경호를 받고 있다는데, 험난한 길을 스스로 선택한 그가 진심으로 무사했으면 좋겠다.
나는 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 새로운 건설업자들, 은행과 요트의 소유주들, 가십의 왕자들, 창녀들의 왕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숨긴다. 어쩌면 그들은 아직은 영혼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적어도 자신의 수입이 어디서 나오는지 밝히기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 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헌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회사의 부가 무엇인지를 안다. 모든 기둥마다 다른 사람들의 피가 얼마나 많이 묻어 있는지 나는 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 나는 결코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__'시멘트' 장에서
카모라는 어느 보스의 카리스마나 지도력으로 돌아가는 조직이 아니다. 이미 시스템이 너무도 공고히 갖춰져 있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이 없어도 곧바로 대체자 한 명이 들어오고 그동안처럼 별다른 이상없이 잘 돌아간다. 카모리스타(카모라 조직원)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결국 폭력과 범죄를 통해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경찰에 잡힐 수밖에 없다. 산더미 같은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감옥에서 수십 년을 보내야 하며,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지만 결국 자기도 언제든 나의 자리를 노리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을 우려가 있으므로 지하 벙커에 숨어 살아야 한다. 돈과 힘이 제아무리 많아도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게 바로 카모리스타의 인생일 뿐이다. 한국판 카모라를 꿈꾸는 우리나라의 일부 철없는 범죄 조직 지망생들은 사비아노의 이 통찰을 명심하기 바란다.
<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 1979년생 젊은 작가로 누구나 겁내는 카모라에 문학으로 맞서는 대단한 사나이다.>
<사비아노의 원작을 토대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고모라'.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