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 글ㆍ사진 : 호시노 미치오
- 옮긴이 : 이규원
- 펴낸곳 : 청어람미디어(2005.7.23.)
- 책값 : 12800원


 이 책 하나 29 ― 사랑하는 자연 품에 안긴 사진여행꾼
 : 호시노 미치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1) 그림 그리는 동네 젊은이와


 “오랫동안 있으면 좋겠는데.”
 도서관을 찾아온 동네 젊은 친구가 한 마디 합니다. 지금도 좋지만, 앞으로 스무 해 뒤에도 이 자리에서 꼿꼿하게 도서관을 지키고 있으면 더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자기는 아직 젊어서 많이 모르지만, 좋은 뜻을 품고 일하는 사람들이 잠깐으로 그치지 말고 오래도록 목숨을 이어나가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그 지방의 풍경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거기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스크린을 바라보는 것과 같아서, 풍경은 결코 나와 참된 언어를 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런 여행은, 하면 할수록 세계가 그저 좁아지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그를 좋아하게 되면 풍경은 비로소 폭과 깊이를 띠게 된다 ..  (261쪽)


 앞으로 스무 해면 2027년. 스무 해 뒤 저는 쉰이 넘는 나이. 쉰 살이라. 제 나이 쉰 살에 무슨 일을 어디에서 어떻게 하고 있을까를 한 번도 내다본 적은 없습니다. 아니, 내다볼 겨를이 없이 언제나 이 자리에서 이 한동안을 잘 보내자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괜찮게 보낸 하루였어’ 하는 마음으로 보낼 수 있으면, 이렇게 보낸 하루하루가 모여서 한 달이 되고 한 해가 될 테고, 그 한 해 두 해가 모여서 열 해가 되겠지요.


.. 물보라를 뿜어 올리며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고래가 자연이라면, 그 고래에 작살을 던지는 에스키모 사람들의 생활도 역사 자연인 것이다 …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라면, 생물의 다양성이야말로 무엇보다 소중할 것이다 ..  (244∼246쪽)


 어쩌면, 나도 저 젊은 친구 나이였을 때 나보다 앞서서 사회운동을 하고 문화운동을 하던 손윗사람들을 보면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지금 일을 이어가시면 좋겠어요” 하고 말하거나 “스무 해 뒤에도 웃으면서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고 말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좋은 일이니까, 훌륭한 일이니까, 이런 일을 하는 보람을 듬뿍 느끼면서 힘을 잃지 말고 우리 같은 어린 싹들한테 앞날을 헤아리는 믿음을 선사해 주고 앞선 사람들이 다부지게 걸어가면서 제 꿈을 펼 수 있음을 널리 보여주기를 바라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다치지 말라고, 지치지 말라고, 어깨 떨구지 말라고, 떠나지 말라고, 앞으로 내가 당신들 나이가 될 때 나 같은 사람들이 외로이 헤매지 않게 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 노인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때때로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 지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를 생각하는 거라면, 112년을 살아온 사람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었다 ..  (212쪽)


 동네 젊은이는 벽그림 그리기를 하며 살아갑니다. 주말에는 부모님이 꾸리는 밥집에서 오토바이로 밥 나르기를 한답니다. 오늘도 “작업하다가 와서 옷이 좀 그래요.” 하고 씨익 웃습니다. 젊은 친구가 입은 옷은 군인옷. 해병대 다니며 입던 야상. 야상에는 벗겨지지 않을 만큼 페인트가 묻어 있습니다.

 도서관에 들어와서 “미술책도 있나요?” 하고 묻기에, 속으로, ‘허허, 원 참, 자기가 서 있는 왼쪽에 있는데, 안 보이나?’ 하고 생각하며 웃습니다. “음, 어떤 미술책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에 아이들 그림책부터 해서 죽 있어요.” 하고 손으로 가리킵니다. 그리고, “요새는 아무나 붓질 할 줄 알면 아이들 그림책을 그린다고 하는데, 진짜 제대로 그리는 아이들 그림책을 보면, 밑바탕부터 아주 잘 되어 있는 분들이 그리기 때문에, 줄 하나에도 깊이가 느껴져요.” 하고 덧붙이면서, 키츠 그림책과 벵상 그림책과 스캐리 그림책을 하나씩 들추면서 보여줍니다. 스캐리 그림책은 일본에서 펴낸 열 권짜리 전집도 있기 때문에, “이분은 처음에는 이렇게 부드러우면서 빛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만화 그림처럼 되어 가고, 나중에는 모두그림으로 하나로 모아서 재미난 이야기를 엮어내는 책을 만들었어요.” 하고 말하며 작품을 여럿 보여줍니다.

 1940년대에 나온, 의사가 그린 남녀 성기 해부학 그림책도 보여주고, 독일 조각가가 사람몸을 찰흙으로 빚는데 뼈와 힘살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빚어서 붙인 뒤 마무리를 짓는 모습을 사진으로 하나하나 담아서 보여주는 책도 보여줍니다. “선생님은 과정을 중시하나 봐요?” “글쎄, 예술은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요. 보통은 마무리한 작품만을 두고 이야기하지만요.”


.. 밥은 왜 41년 간이나 이 땅을 떠나지 않았을까. 가문비나무 이야기가 그 물음에 힌트를 주는 것 같다. 밥에게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자연조차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며, 지금 살고 있는 이곳, 그리고 마침내는 죽어갈 이곳 쉬솔릭이 흥미로운 것이다 ..  (26쪽)


 “혹시, 김환기라고 하는 분 책도 있나요?” “김환기, 김환기, 음, 어디엔가 있는데. 이건 이쾌대 님 책이고, 이쾌대 님은 일제강점기 때 그림을 그린 분이에요. 우리들한테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어디에 있는데 잘 안 보이네요. 저도 꽂아만 놓고 머리에만 기대기 때문에 잘 못 찾기도 해요.” “따로 입력해서 정리하지는 않으시나 봐요?” “네, 일부러 안 하고 있어요. 그렇게 정리해 두면 저부터도 찾기 좋겠지만, 사실 책을 본다고 할 때에는 그렇게 목록이 주어지면, 다들 ‘보는 책’만 또 보게 되잖아요. 하지만 목록을 따로 마련해 놓지 않으면 자기가 바라는 책을 찾으면서 다른 여러 가지 책도 함께 보게 되어요. 책을 본다고 할 때에는 그렇게 어느 하나만이 아니라 둘레 책들까지 해서 두루 보도록 하는 일이 좋다고 생각해요.”


 (2) 아침신문을 보고


 일터인 도서관이 있는 인천 배다리 둘레에 ‘너비 50미터 길이 2.41킬로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놓으려는 인천시 종합건설본부는, 머지않아 ‘지금 멈춰진 공사를 다시 밀어붙이겠다’는 이야기를 신문사 기자한테 말한 듯합니다. 우리들 동네사람(주민)한테는 그런 이야기를 입도 벙긋하지 않았는데.

 그저께 아침, 인천에서 나오는 신문을 보니, “수 차례 민원인들과 타협을 시도했지만 진척이 없어 (공사 재개) 통보를 검토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신문기자한테 들려준 인천시 종합건설본부 쪽에서는 언제 한 번 제대로 된 ‘주민설명회’를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동네 샛길도 아닌, 산업자재 그득 싣고 수출입 화물을 수십 톤씩 싣고 다니는 큰 짐차가 들락거릴 산업도로를 동네 한복판에 놓는다면, 이 동네 문화며 삶터는 그예 무너져내릴 테지만, 이런 엄청난 밀어붙이기 막공사를 거두어들이려는 움직임은 아직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동네사람들 ‘민원 때문에 공사진행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이야기를 신문사 기자들한테 흘리고 있습니다.


.. 들판에서 곰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체험일까. 저기 한 마리 곰이 있을 뿐인데도 광대한 풍경은 묘한 긴장감을 띠게 된다. 며칠 뒤 툰드라 저쪽에서 검은 이리가 나타났다. 백야의 신비한 분위기 속에서 이리는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먼 거리인데도 이리는 문득 나를 알아차리고 섬광처럼 달려서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  (56쪽)


 문득 궁금해집니다. 지금은 산업도로 밀어붙이기를 동네사람들 힘으로 가까스로 ‘공사 잠정 중단’까지 이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공사 잠정 중단’을 하고 나서 ‘아무런 타협안’도 우리들한테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길을 내 버리면 사람들 삶은 와장창 깨지는데, 여기에서 무슨 타협안이 있을 수 있을까요. 또, 어떤 타협안을 우리들한테 이야기했다고 신문사 기자는 종합건설본부 공무원들 말을 거리낌없이 실을 수 있었을까요. 어차피 공사터를 닦아 놓았으니 ‘길은 그냥 내되 산업도로 구실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여기에 길이 놓이면, 동네에서 초중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통학로가 끊어져서 위험해질 뿐 아니라, 소음과 먼지에 무던히도 시달려야 하는데, 어차피 길을 내도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 문제이지, 공사를 밀어붙이는 공무원들은 이 동네에 안 살기 때문에 상관이 없는 일일까요.


.. 지난 1백 년 동안 알래스카 북극권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새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하나는 선교사, 상인, 광산업자, 생물학자, 교육자 따위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자신이 전에 살던 지방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이 땅에 고스란히 가지고 들어왔다. 또 한 부류는 이 땅에 벌써부터 존재하던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이어받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알래스카에서는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겉으로 쉬 드러나는 데 반해,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거의 알려지는 일이 없다 ..  (35쪽)


 아침에 한 번, 낮에 한 번 우체국 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인천 종합건설본부 사람들한테 이 길은 왜 있어야 할까요. 동네사람들은 그런 길 없어도 된다고, 아니 그런 길이 나면 동네가 옴팡 무너지고 망가진다고 하는데, 인천시장을 비롯해서 지역 국회의원과 시의원과 구의원들은 왜 이런 동네사람들 목소리는 안 들으려고 할까요. 이들 행정을 맡고 정치를 맡은 이들은 어떤 목소리를 들었기에 여기에, 동네 한복판에 산업도로를 놓아서 ‘지역균형발전’과 ‘경제발전’을 이룩하겠다는 소리를 읊을 수 있을까요. 또 이런 소리는 어찌하여 지역신문 기사로 꾸준히 실릴 수 있을까요.


.. 아직 습기로 눅눅한 강가 둔덕 위에 벌렁 눕는다. 이른봄의 향기로운 흙냄새. 연보랏빛 야생 크로커스가 봉오리를 부풀리고 있다. 부드러운 햇살 속에서 멍하니 구름을 바라보고 있자니, 심장 뛰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린다. “어이― 시간아, 어릴 적의 너를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다.” 이렇게 외쳐 보고 싶지 않은가 ..  (103쪽)


 산업도로 예정터는 우체국에서 십오 미터쯤 옆. 이곳에 4층짜리 건물이 있었는데, 얼마 앞서 그 4층짜리 건물 4/5를 허물었습니다. 참말 길을 뚫으려고 저 건물도 허는가 하고 가슴이 쿵쾅쿵쾅. 그러고 두 주 뒤인 오늘 아침, 큰 기중기차 한 대가 와서 철근놓기를 합니다. ‘어, 뭐 하나?’ 하고 가만히 바라보니까, 길을 낸다는 것 때문에 그 건물 4/5는 잘려나갔지만, 비스듬하게 건물 붙이기를 해서 잘린 곳 가운데 1.5/5쯤을 새로 올리려고 하는 듯합니다.


.. 이 마을의 교회는 십자가만 없다면 다른 민가와 구분이 가지 않는 통나무 오두막이다. 다른 마을에서 온 신부님은 한참 젊은 사람이었다. 까만 가운 밑으로 하얀 운동화와 청바지가 비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  (149쪽)


 사람 사는 곳에 길이 안 날 수 없고, 사람이 사니까 길을 놓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에서 새로 놓는 길은 얼마나 사람이 다니도록 마음을 쓰면서 놓는 길일까요. 지금 우리 나라에서 자꾸만 놓으려고 하는 길은 얼마나 사람한테 도움이 되고 즐거울 만한 길일까요.

 사람들 주머니를 털어서 모은 돈으로 사람들이 장비를 움직여서 길을 닦고 사람들이 모는 자동차가 오가는 길이지만, 정작 사람 냄새는 하나 없는 길, 사람 느낌은 깃들 수 없는 길은 아닌지요.


 (3) 그림쟁이


 벽그림 그리는 젊은 친구는 도서관 책 구경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림쟁이 김환기 님이 자기한테 작은할아버지라고 하기에 김환기 님이 쓴 《그림에 부치는 시》라는 책 하나를 빌려줍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우리 친척이라고 해서 인터넷으로 알아보았는데, 사진을 보니까 할아버지하고 진짜 똑같이 생겼더라고요. 이 책에 있는 표지 그림하고도 진짜 똑같네요.”


.. 자연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아 자손을 남긴다고 한다. 이리의 습격을 받는 카리부 무리는 미처 도망치지 못하는 약한 놈을 희생시켜서 무리 전체의 강인함을 유지한다고 한다. 지극히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지만, 자연은 정말 그렇게 교과서대로 움직일까? 의외로 우연성이 지배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자연은 약한 자까지도 포용해버리는 넉넉한 품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  (204쪽)


 젊은 친구한테 김환기 님 도록 하나를 찾아서 보여주었습니다. 젊은 친구는, “아, 그런데,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말합니다. “저도 그 도록을 갖춰 놓기는 했지만, 저도 그 그림 봐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요. 무슨 모더니즘이라고 하던가, 그런 그림인데.”


.. 비록 어린아이들이지만, 한 생명을 끝장내고 손으로 직접 살점을 만지면서 뭔가를 느꼈을 것이다. 우리를 비롯한 모든 생명이 다른 생명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그 고기를 입안에 넣음으로써 그 카리부의 생명을 자기가 잇게 된다는 것 ..  (42∼43쪽)


 “김환기 이분이 글도 쓰셨어요?” “네, 글도 쓰셨지요. 그리고 글을 잘 쓰셨지요. 책을 보면 사이사이 그림도 끼워넣었어요. 참 좋아요.” “이 책 빌려 주셔도 돼요?” “음, 친구가 나중에 돌려주기만 하면 되지요.” “와, 고맙습니다.”


.. 알래스카의 새로운 토지 분할로, 그들의 집은 어느새 국립공원 경계선 안에 들어가 있다. 알래스카가 아직 미개척지였던 시절, 자유를 찾아 이 땅에 들어와 들판에 정착한 많은 사람들에게 어느 날 불쑥 불법침입 통고장이 날아든다 ..  (62쪽)


 “가만히 보면, 우리 도서관에는 그림책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다른 갈래 책도 그렇지만. 그냥 제가 좋아해서 하나하나 사서 읽은 책들이고, 그러다 보니까 좀 좁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이런 책들은 다른 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책이 많기도 하니까, 재미있게 봐 주세요.”

 젊은 친구는 제가 추천해 주는 책들을 걸상에 앉아서 차분하게 하나하나 넘깁니다. 어쩌면 처음 보는 새로운 그림들이라서 마음을 쏟아서 보는지 모르고,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는 이 그림들이 우리 젊은 친구한테 새로운 눈을 틔워 주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작은할아버지한테 흐르던 피가 자기한테도 흐르고 있음을 느끼며,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그림밭으로 나아가려는 피끓음을 하는지 몰라요.


.. 카리부를 다 옮겼을 때 나는 케니스에게 물었다. “케니스, 혼자 있을 때는 어떻게 카리부를 훈제실까지 옮겨요?” 케니스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쉬차, 조금씩 끌고 가면 돼. 끌다 보면 어느새 둑 위에 와 있어.” ..  (196쪽)


 “오늘 구경 잘하고 갑니다. 책도 잘 읽을게요.” 젊은 친구는 부모님 집에서 따로 나와서 혼자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오토바이를 타고다닌다고 하는데, “오토바이 타면 서울에도 가고 부천에도 가고 좋아요. 일하다가도 페인트 떨어지면 바로 타고 가서 사 올 수 있고요.”

 제가 젊은 친구 나이였을 때는 두 다리로 달리면서 다녔습니다. 저 젊은 친구가 지금 제 나이를 넘어서며 자기 손아랫사람을 만날 때에는, 저 친구한테 손아랫사람 되는 이는 어떻게 세상을 부대끼며 만날까요.


 (4) 《바람 같은 이야기》라는 책


 한 해 남짓 읽어 온 《바람 같은 이야기》를 덮습니다. 이제 제 책상맡에서 떠나보낼 때가 되었습니다. 책이름 그대로 이 책을 쓰고 사진을 찍은 ‘호시노 미치오’ 님은 바람처럼 와서 바람처럼 사라진 삶을 보냈다고 느낍니다. 더운 곳에서는 시원한 바람으로, 추운 곳에서는 따스한 바람으로.


.. 편리한 문명생활과 등을 돌리고, 불편한 한 팔로 카리부를 한 걸음 한 걸음 둑 위로 끌고 올라가는 케니스.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언젠가 케니스가 나이 더 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죽어 가겠지.” ..  (198쪽)


 사진이 좋아 사진을 찍고, 어느 날 보게 된 알래스카 사람들 삶터 사진에 흠뻑 빠져서 바지런히 일해서 돈을 모으면 그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서 알래스카로 떠났다는 호시오 미치오 님. 흘러흘러 떠도는 것만이 바람이 아니며, 고여고여 한 자리에만 맴도는 것만이 바람이 아님을 온몸으로 말하면서, 글 몇 자락과 사진 몇 장으로 우리들하고 언제 어디서나 이야기를 나누고자 스스로 바람이 되어 버린 이 사람. 다음에 또 봐요. (4340.12.14.쇠.ㅎㄲㅅㄱ)


 《노던라이츠》(청어람미디어,2007)
 《여행하는 나무》(갈라파고스,2006)
 《숲으로》(진선출판사,2005)
 《곰아》(진선출판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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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상 이야기 - 어느 프랑스인이 본 처가의 나라 꼬레
에릭 비데 지음, 니코비 그림, 최미경 옮김 / 눈빛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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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이 책을 읽으며 '단점이 많이 느껴진다'고 했지만,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 책을 쓴 에릭 비데라는 사람이 얼마나 '우스갯소리'로 지금 우리 한국 사회와 문화에서 문제가 되는 대목을 '웃음으로 넘기며 비판해 주며 껴안고 있는'지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이는 '몰라서 대충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느낌과 생각을 이 책 하나를 읽으면서도 제대로 잡아채지 못한다면, 우리들 눈길이나 눈높이는... 우리 세상과 사회를 제대로 못 읽고 겉핥기로 그쳐 버리지 않을까요? 진작에 읽었던 책이지만, 이제서야 느낌글을 하나 띄웁니다.


- 책이름 : 한국의 일상 이야기
- 글 : 에릭 비데
- 그림 : 니코비
- 옮긴이 : 최미경 옮김
- 펴낸곳 : 눈빛(2003.11.15.)
- 책값 : 8500원



 이 책 하나 13 ― 돈만 많이 벌게 해 주면 좋아?
 : 에릭 비데, 《한국의 일상 이야기》



 (1)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침을 먹습니다. 무김치와 배추김치와 마늘절임과 조개젓, 이렇게 네 가지 반찬을 차려 놓고 먹습니다. 밥은 누런쌀에 누런콩으로 지었습니다. 콩은 하루 동안 불리고 누런쌀도 서너 시간은 불린 뒤 짓습니다. 밥그릇이 넘치지 않을 만큼 밥을 담습니다. 밥을 풀 때면 더 담고픈 마음이 굴뚝같은데, 흰쌀밥이라면 두 그릇쯤 먹어야 속이 든든하다고 느끼나, 누런쌀밥일 때에는 한 그릇으로도, 때로는 반 그릇으로도 든든합니다. 한 숟가락 떠서 적어도 서른 번에서 쉰 번은 씹어야 목구멍으로 솔솔 넘어갑니다.


.. 피맛골의 입구 안내판에 써 있는 것처럼, 서울의 역사 유적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지역인데, 이 지역을 철거한다는 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 서울시의 도시개발정책 입안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목표인 모양이다 … 공동의 자산인 환경이, 개인의 자산인 부동산과 영업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당하는 것이다 ..  (168쪽)


 오늘은 일산 나들이를 가는 날. 설거지를 마친 뒤 가방을 챙기고 길을 나섭니다. 배다리 철길다리 밑을 지나 건널목을 두 번 건넙니다. 한 시 조금 넘은 때인데 학교옷 차려입은 고등학교 아이들이 많이 보입니다.

 참외전거리를 지납니다. 과일가게 늘어선 이곳에서 물고기 몇 가지를 파는 할머님은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덥건 춥건 따뜻하건 시원하건, 할머님은 늘 그 자리에서 꼭 그만한 차림새로 손님을 기다립니다.

 과일가게 끝에 자리한 양과자집에 들릅니다. 일산 같은 새도시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옛날 양과자를 두 근 삽니다. 양과자집 아저씨는 낡은 저울로 무게를 답니다. 집에서 당신이 손수 붙인 흰 봉투에 과자를 담습니다. 푸짐한 봉투 둘을 옆지기 가방에 넣습니다.


.. 사실 서울이 가지고 있는 자연과 시골스런 모습이 바로 서울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서울의 매력은 즉각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매력은 깊이, 내부에 숨겨져 있고, 그래서 이태원, 강남, 인사동 등 누구나 찾는 거리만을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진정한 모습을 위해서는 찾아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내의 높은 사무실이 있는 건물들, 사람이 넘치는 백화점 등, 도쿄ㆍ뉴욕ㆍ파리에 비해서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서울의 매력은 도보로, 산보를 하면서 코를 들고 바람을 쐬며, 김기찬의 사진에 등장하는 것처럼 뒷골목을 다닐 때 발견하게 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산에 등산을 가기는 하지만 도시에서는 거의 걷지 않는다. 그런데 걸어다녀야만 두 건물들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시장을 발견할 수 있고,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야채밭, 복잡한 골목 구석에 있는 맛있는 허름한 식당, 막다른 골목에 끼어 있는 구멍가게를 보게 되는 것이다 ..  (109∼111쪽)


 은행에 들러 돈을 찾습니다. 통장이 다 되어 새것으로 바꿉니다. 이참에 전기값(살림집 3660원, 도서관 7960원)을 낼까 하고 창구 직원한테 내밉니다. “아, 공과금은 안 받습니다. 공과금 수납은 저기 문 옆에 있는 기계에서 하시면 되고요, 쓰는 방법은 옆에 있는 직원이 알려줄 것입니다.” 고작 두어 달 앞서까지만 해도 공과금을 받던 은행인데.

 기계로 낼까 하고 잠깐 생각하다가 그만두기로 합니다. 아직 우리 동네 우체국에서는 공과금을 받아 주고 있으니 그리로 가야겠어요.


.. 한국의 진정한 커피숍은 사실 정교하게, 그럴듯하게 실내장식을 한 그런 카페가 아니었다 … 즉 미국에서 들어온 이들 커피숍의 유일한 목표는 뉴욕이나 방콕, 도쿄, 서울이 모두 같은 양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 대학로 같은 데서는 실내장식을 잘해 놓았다는 구실로 프랑스식으로 말하자면 양말 짠 물과 같은 미국식 커피를 황당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  (60쪽, 79쪽)


 은행에서 나선 뒤 지하상가로 들어갑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몇 없다고 느꼈으나 지하상가는 바글바글입니다. 사람숲을 헤치며 전철역 쪽으로 갑니다. 지하상가를 거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지하상가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인천이라는 곳에서는, 동인천역과 제물포역과 주안역 둘레에 건널목이 없거든요. 부평역은 몇 군데 있지만 한참을 돌게 되어 있고, 정작 역 앞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래, 어디에든 지하상가만 꼬불꼬불 어지러이 빼곡빼곡 만들어 놓고, 이곳 사람들 장사를 해야 한다면서 건널목 놓기를 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걷기 힘든 어르신들, 몸이 아프거나 고단한 사람들, 짐을 잔뜩 짊어진 사람들, 유모차를 끄는 어버이들,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 바퀴걸상을 타고다니는 사람들, ……은 어쩌지요. 지하상가 장사꾼들 ‘장사권리(상권)’가, 보통사람들 ‘사람권리(인권)’보다 앞서야 하나요.


.. ‘절도 있는 음주’라고 술병에는 적혀 있지만, 한국인들의 지침서에는 술이든, 목욕탕 물이든, 설거지용 물이든, 난방이나 냉방용 에너지 또는 식사 준비건 항상 절도를 잊고 넘치게 하라고 되어 있다. 매일 남한에서 버리는 음식물만으로도 북한의 주민을 먹여살릴 수 있다고 작가 황석영은 어떤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  (37쪽)


 동인천역에 들어옵니다. 전철이 한참 들어오지 않아, 모두들 한참을 기다립니다. 서울로 떠나는 전철이지만, 낮에는 아주 드문드문 다닙니다. 서울 지하철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전철 시간을 ‘서울 가는 보통 편’과 ‘용산 가는 급행’을 사이사이 맞추어 놓으면 사람들 기다리는 시간과 수고를 훨씬 덜 텐데.

 십 몇 분을 기다린 끝에 소요산 가는 전철 하나 들어와서 탑니다. 제물포역에서 여대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잔뜩 탑니다. 우리 옆자리에 둘이 앉고 둘이 서서 신나게 수다를 떱니다. 연예인 ㅇ씨 두다리 걸치기 문제, 자기네 커플링이 얼마짜리네 하는 문제, 내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으면 어찌하겠느냐 하는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얼마나 옆사람들 수다떨기에 굽히지 않으면서 책읽기에 마음을 쏟을 수 있느냐고 하느님이 시험하는지 모를 일.

 이 여대생들이 서울까지 가는가 싶어서 속으로 한숨을 후유 하고 쉬는데, 부처님이 도와주셨는지 부평역에서 모두 다 내립니다.

 하지만 부평역에서 우루루 타서 우리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큼직한 엉덩이와 허벅지로 자꾸 옆으로 밀어붙이는 아주머니들. 다리 쫙 벌리는 늙수그레 아저씨도 싫지만 엉덩이를 자꾸 밀어붙이는 늙수그레 아주머니도 싫습니다. 두 번째 시험인가요?


.. 나는 “사소한 요소들이 어설플 때 시장은 특히 아름답다”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너무 완벽한 시장은 시장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백화점ㆍ쇼핑센터, 또는 미국인들이 말하는 쇼핑몰이 된다 ..  (50쪽)


 그예 책읽기를 접고 눈을 감습니다. 그냥 자자. 마음을 달래자.

 전철 장사꾼 서너 사람이 지나가고 목소리 높은 사람들 조잘거림이 여러 차례 물결칩니다. 이제 전철은 종로3가. 드디어 내릴 곳. 잠깐 사진관에 들러야 합니다.

 겉옷을 입고 큰가방을 뒤에 멜 즈음, 나이든 아저씨 한 분이 제가 앉던 자리에 앉으려고 잽싸게 다가옵니다. 제가 앉던 자리에 아직 사진기가 얹혀져 있는데. 그 사진기 깔고 앉으시려고요? 아직 짐을 추스르지 못했지만 얼른 사진기를 듭니다. 한두 푼짜리도 아니지만, 한두 푼짜리가 아니라 해도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하면 사진기 망가지기 쉽습니다.

 한 번 더 큰숨을 몰아쉽니다. 내릴 문 앞에 섭니다. 전철이 서고 문이 열립니다. 우리 옆에 선 아주머니 한 분이 먼저 내립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들이 내릴 즈음, 타려고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파란옷을 입은 늙수그레 아주머니 한 분이 깡총 뛰듯 전철에 올라타며 제 오른팔께를 밀칩니다. ‘뭐여?’ 하고 잠깐 사이에 속으로 빠르게 생각하다가 오른팔에 살짝 힘을 줍니다. 아주머니는 “어머나?” 하면서 튕겨집니다. 내릴 사람이 다 내릴 때까지 기다리며 뒤에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아주머니 한 분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먼저 타구선!” 하고 다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말합니다.


.. 손때 묻은 사물에 대한 애착, 일상용품에 대한 이런 애정의 관계는 한국의 현대 사회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한국의 사회에서는 신상품이 광고되고 판매원 등을 통해서 판매가 촉진되며, 사용하던 물건은 버려지거나 바로 교체가 된다 … 광란의 소비는 넘치는 폐기물 처리의 문제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더 철학적인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 사회는 신상품, 새 것, 최신 제품의 사회이다 보니, 대부분의 가정에 십 년 이상 된 물건이 있는 경우가 드물다. 신제품에 대한 열광은 특히 컴퓨터ㆍ휴대폰 등 신기술 상품에 대해서 심하지만, 자동차의 경우에도 그러해서 아직도 거의 새차이고, 번쩍거리는 데도 바꾸는가 하면, 주택의 경우도 이삼십 년 이상을 넘는 경우가 없다 ..  (39쪽)


 옆지기가 작은볼일을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음, 종로3가 전철역에서 작은볼일이라……. 넓디넓은 종로3가 전철역이지만 뒷간 하나 찾기란 몹시 까다롭습니다. 지금까지 알아내기로는 두 군데에 있습니다. 모두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가서 맨 끄트머리 구석에 있습니다. 우리가 내린 곳에서 가까운 쪽에 있는 데로 가 봅니다. 생각했던 대로, 뒷간으로 드나들 만한 문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네. 밑으로 들어가서 갔다 와야겠네요.”


.. 개고기 소비에 대해서 분개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소를 먹지 않고 숭배하는 인도인들이 타 대륙의 쇠고기 소비를 금지해 달라는 압력을 넣으면 타 대륙에서 쇠고기 소비 금지를 수락할 것인가. 또 이슬람교도들이 돼기고기 먹는 것을 금지시키려 한다면 얼마나 가소롭다고 여길 것인가. 인간과 희귀동물에 대한 금식사항을 제외하고는 채식주의자처럼 모든 고기를 삼가지 않는 한, 각 문화 내에서 수용가능한 동물 간의 계급을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  (84∼85쪽)


 13번 나들목으로 해서 밖으로 나옵니다. 바깥에서 맨 먼저 우리를 반기는 모습은 기호 ○번 아무개 후보 걸개천. 기호 ○번 아무개 후보 걸개천은 다른 후보 걸개천과 견주어 엄청나게 많이 나붙었습니다. 문득, 저 아무개 후보가 내건 약속이 무엇이었는가 헤아려 봅니다. 으흠, 으흠, 으흠 …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른 후보 약속하고 그다지 다를 것 없어 보였는데. 그래도 한 가지 뚜렷하게 떠오르는 아무개 후보 약속은 ‘새 집을 50만 채 짓겠다’인데, 새 집이란 다름아닌 아파트 한 가지.


.. 오늘날의 한국은 빨리 돈벌기, 비양심적이라도 쉽게 노력없이 버는 돈에 대한 열망이 강한 것 같다 … 실업자는 사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배척하는 대상이며,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수입원을 상실한 이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  (40쪽)


 2001년부터 단골로 다니고 있는 ㅅ사진관에 닿습니다. 맡겨 놓은 사진을 찾고 티맥스400 필름 열 통을 삽니다. 벌써 여러 달 앞서부터 흑백필름 사기는 하늘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제가 즐겨쓰는 일포드델타400 필름을 주문해 놓은 지도 석 달은 된 듯한데 아직 한 통도 못 받고 있습니다. 오늘 어렵게 장만한 티맥스400 필름도 얼마 앞서 조금 들어온 녀석들이라고 합니다. 필름 한 통 값이 거의 6000원. 예전과 견주어 무척 많이 올랐는데, 앞으로는 이 값보다 더 많은 돈을 치르더라도 물건이나 제대로 구경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너무도 반가운 이 필름에 입을 맞추고 껴안으며 가방에 챙겨 넣습니다.


.. 분당에서 나는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도시는 영혼이 없으며, 도대체 사람을 맞이할 줄도 모르는 그런 곳인 것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울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는 주거지역 중의 하나이다 … 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나는 계속해서 머리속에 질문을 던져 보곤 했었다. 어떻게 똑같이 생긴, 정감 없는, 환경을 무시하는 아파트를 계속해서 짓고 있는 것일까? 이런 종류의 아파트 건설계획은 이미 오래 전에 프랑스에서는 중단이 된 상태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여기저기 조금만 여행을 다녀 보면, 아무리 조그마한 도시라도 어디나 높게 치솟은 아파트들이 있으며, 이런 아파트들은 계속해서 땅위로 솟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  (91∼92쪽)


 3호선 전철을 탑니다. 종로3가에서 3호선 줄기 자리는 매우 좁습니다. 이 좁은 자리에 보호문을 놓는 공사를 합니다. 좁은 종로3가 전철역에는 앉을 자리, 걸상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은 쉼없이 전철역 바닥을 걸레질로 닦습니다. 가방이라도 내려놓을까 했지만 축축하게 젖은 바닥에 내려놓지는 못합니다. 구파발 가는 차는 보내고 대화 가는 차를 탑니다. 터덜터덜 달리는 전철이 구파발을 지나고 드디어 밖으로 나와 햇볕 보이는 창밖 모습이 펼쳐집니다. 오늘은 얼마만큼 새로 ‘올랐나’ 하고 북한산 둘레를 헤아립니다. 그동안 짓고 있던 아파트들은 거의 공사가 끝난 듯합니다. 그런데 그 아파트들 앞으로 펼쳐져 있던 논이 죄다 갈아엎혔습니다. 그 자리에도 아파트를 또 올려세우려나? 이러다가 구파발 전철역 둘레부터 대화역 있는 데까지 죄 아파트만 득시글득시글해지는 건 아닐는지?


.. 한국에 대한 관광안내 책자를 펴 보면, 어떤 책이든지 항상 서울에 있는 동대문과 남대문시장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한다 … 이제 몇 년 지나지 않아 남대문은 미국이나 유럽, 또는 길건너 명동에서 보는 것과 같은 엄청난 규모의 쇼핑센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전통적인 시장은 정감 있고, 근접한 하나의 장소로, 차갑고 특성 없는, 영혼이 없는 현대식 건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시장이 현대의 삶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  (53∼54쪽)


 옆지기 부모님이 사는 일산에 닿습니다. 고맙게 차려 주시는 저녁 밥상을 받습니다. 옆지기 아버님이 말씀합니다. “이명박을 찍어야 나라가 살지.” 옆지기 어머님이나 동생도 비슷한 생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생각해 보면, 옆지기네 식구들뿐이 아니라 요즈음 만나는 둘레사람들이라면 너나없이 이렇게들 이야기합니다. “경제를 살리려면 이명박밖에 없다”고, “우리 같은 서민이 살려면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노무현 찍어 놓으니까 보라고, 이렇게 경제불황에다가 다들 먹고살기 어려워서 난리를 치잖아” 하고.

 ‘우리 아버지는 이번 대통령 뽑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려나?’ 하는 생각이 슬며시 꿈틀꿈틀 합니다. 참말로 당신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서, 먹고살 수 있게 해 줄 만한 대통령감을 찾고 있을까요. 먹고살 만한 높낮이는 어느 만큼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먹고살 수 있으면 될까요.

 돈이 안 중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볼 것이란 오로지 돈 하나뿐일는지요. 옆지기 아버님은 우리 옆지기한테, “진짜로 (대학교) 간판 없이 살 거야? 중졸로 끝낼 거야? 간판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합니다. 옆지기 대신 제가 한 마디 거듭니다. “우리는 간판이 없는 길을 가고 있는걸요. 그리고 간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면서 벽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벽을 허무는 일을 하고 있는걸요.”


.. 외국인들에게 서울의 대로를 건넌다는 것은 두려운 경험이다. 운전자용 불이 빨간색으로 바뀌기를 한참을 기다린 후에 겨우 보행자용 녹색불이 들어오는 데다, 겨우 반쯤 건너면 벌써 보행자용 신호가 깜빡이면서 신호가 곧 바뀔 것이라는 표시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한없이 긴 지하도나 육교가 없는 곳의 이야기이다 ..  (41쪽)


 잠자리에 들기 앞서 잠깐 창밖을 바라봅니다. 아파트 8층인 이 집에서 제법 멀리 내다볼 수 있습니다. 밤에도 불빛이 반짝반짝합니다. 자동차 불빛도 번쩍번쩍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남녘땅 온누리는 밤이 되어도 수많은 불빛으로 환할 테지요.

 옆지기 부모님 사는 이곳 둘레에는 옷가게가 잔뜩 있는데, 모두들 제법 장사가 되는 듯합니다. 우리야 옷 살 일이 없고, 평일 낮이나 아침에만 이 앞을 지나다녀서 사람 구경을 거의 못했습니다만, 어제 들어오는 길에도 새로 문을 연 옷가게들을 보았습니다. 듣는 이야기로는, 주말이 되면 차 댈 곳이 없이 바글바글하다던데.


 (2) ‘한국사람 삶’을 프랑스사람 눈길로


.. 한국 사회는 금융관련 범죄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대하다. 2000년 7월에 3만5천 명이 대통령의 사면의 혜택을 받았는데, 3만 명이 경제사범이었다. 반면에 소위 사상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몇 년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부유한 가정ㆍ명문대와 명문고 출신의 사기꾼들이 노조위원장이나 사회변혁을 부르짖는 사람들보다 대우를 받는다 ..  (153∼154쪽)


 《한국의 일상 이야기》가 우리 말로 나온 지 네 해가 지났고 머잖아 다섯 해가 됩니다. 글쓴이 에릭 비데 님은 네다섯 해 사이에 한국땅에서 어떤 모습을 새로 보았고 어떤 모습이 달라졌다고 느끼고 있을까요. 또는, 자기가 한국사람 삶을 바라본 이야기책을 펴내던 때하고 지금하고 그다지 달라진 구석이 없다고 느낄는지, 또는 자기 눈으로 보았을 때 안타까운 쪽으로 고꾸라지거나 벼랑으로 치닫고 있다고 느낄는지.

 우리들은 제대로 느끼지 못하거나 대충 지나치는 우리들 하루하루요 우리들 한삶인 《한국의 일상 이야기》는, 나라밖 사람이 바라보고 나서 글로 끄적였기에 책으로 묶여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라안 사람이 바라보고 나서 글로 끄적였다면 책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요? 아니, 나라안에 있는 우리 스스로 우리들 하루하루가 어떠하고 우리 한삶이 어떠한 줄을 찬찬히 헤아리거나 살피고 있기나 한지요?

 우리 사회를, 우리 문화를, 우리 교육을, 우리 얼을, 우리 넋을, 우리 정치를, 우리 경제를, 우리 과학을, 우리 예술을, 우리 아이들을 우리 스스로 얼마나 곱다시 껴안으며 보듬고 있을까요. 아니, 껴안기나 할까요. 보듬기나 할까요. 그저 돈만 많이 벌 수 있게 해 주면 그만이라고들 여기지 않나요. 그 돈이라는 것도 지금 곧바로 앵겨 주면 될 뿐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나요. 앞으로 어떻게 되든. 앞으로 이 나라 아이들이 어떻게 살건 말건. (4340.12.1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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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밥상 - 유기농 대표농부 10집의 밥상을 찾아서
안혜령 지음, 김성철 사진 / 소나무 / 2007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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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농부의 밥상
- 글 : 안혜령
- 사진 : 김성철, 이혜영
- 펴낸곳 : 소나무(2007.2.5.)
- 책값 : 11000원


 

 이 책 하나 30 ― ‘아파트 밥상’을 떠나 ‘농사꾼 밥상’으로
 : 안혜령 씀, 《농부의 밥상》



 〈1〉 나누는 밥


 새벽 일찍 잠에서 깹니다.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드니 새벽 일찍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일손을 붙잡는다든지 술 마시거나 논다고 법석을 떤다든지 하면, 마땅히 새벽에 일어나지 못합니다.

 옥상마당으로 나와서 새벽별을 올려다봅니다. 새벽달도 봅니다. 새벽하늘은 아직 어둡습니다. 이 어둠을 뚫고 전철이 지나갑니다. 아, 이 새벽에 훨씬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군요. 전철을 모는 기사가, 전철을 타는 사람들이.


.. 이 푸성귀들은 모두 이 집 텃밭에서 자라는 것들이다. 맘먹고 재배하는 왕고들빼기를 빼면, 나머지는 한 번 씨뿌려 둔 채 굳이 돌보지 않아도 절로 잘 자란다 … 이렇듯 갖가지 푸성귀를 철따라 두루두루 먹으려면 무엇보다 “심기를 골고루” 해야 한다. 식물도 사람처럼 일대기가 있어 맛있는 때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  〈15∼16쪽〉


 잠깐 새벽바람을 쐰 뒤 방으로 들어옵니다. 부엌으로 가서 전기밥솥을 열고 밥 한 숟가락을 뜹니다. 우걱우걱. 며칠 된 밥은 말라비틀어지고 있습니다. 밥을 할 때면 한두 끼니 먹을 만큼만 해야 하는데. 콩과 누런쌀 불리기에 시간이 걸린다는 핑계로 자꾸 여러 끼니 먹을 만큼 하다 보니, 며칠 묵히면 이렇게 되고 맙니다.


.. 더 갖기를 원하지도 않거니와, 있는 것 허투루 버리는 일도 없다. 이들이 오기 전 이곳에 살던 동광원 수녀들이 쓰던 걸레를 장금실 씨는 4년을 더 썼고, 찌글찌글한 양은 밥상 하나 물려받은 것을 20년째 탈없이 쓰고 있다 ..  〈20∼21쪽〉


 그제 낮, 이웃한 막걸리집에서 김장을 하신다기에 쭐래쭐래 찾아가서 일손을 조금 거듭니다. 저는 옆에서 사진을 찍고, 옆지기는 팔을 걷어붙이며 배추속 넣기를 합니다. 막걸리집 아주머니와 아저씨뿐 아니라 당신들 자식과 며느리까지 찾아와 해거름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허리 아프도록 일을 합니다.

 막걸리집(낮에는 밥집으로만 하는 곳) 손님들 먹일 김치이면서, 당신들도 함께 먹을 김치이기 때문에 허투루 담지 않습니다. 젓갈도 넉넉히, 양념도 넉넉히.


.. 부인이 아쉬워할 때마다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도구며 연장 뚝딱 만들어내는 그 재미가 공예품 만들어내는 것 못지않으니, 실제로 밖에서는 작품 대접 받는 옛 물건들이 이 집에서는 구석구석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살림살이다 ..  〈41∼44쪽〉


 저녁 나절, 자전거 모임으로 알게 된 아주머니가 놀러옵니다. 선물이라면서 큰 반찬통을 하나 내밉니다. 반찬통에는 잡채가 가득 담겼습니다. 어젯밤 한 시부터 부지런히 무치셨다고. 아이고, 선물이라 해도 이렇게나 많이. 맛을 보니 우리 입에 찰싹 달라붙도록 싱겁습니다. 잔치집에서 으레 먹는 잡채처럼 달거나 짜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잡채 한 젓가락에 김치 한 점에 밥 한 숟가락이면 속이 든든하겠어요.

 지지난주, 동네에 자리하고 있는 ‘지역 공동체 예술’ 운동을 하는 분들이 갓김치를 한 접시 선물해 주셨습니다. 당신들로서는 처음으로 손수 심은 푸성귀를 손수 거두어서 손수 해 본 김치였다는데, 손수 거두고 무치고 해서 그런지 아주 맛있다고 합니다. 저는 벌건 김치는 손을 못 대지만, 옆지기는 맛있다고 이야기합니다.


.. 또 하나, 죽전산 이 골짜기가 이삼 년 안으로 사라지는 것도 근심스러운 일이다. 이미 마을 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효문공업단지’라는 것이 드디어 이 골짜기까지 확장해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삼 년 안에 이 댁은 근 삼십 년 만에 다시 이삿짐을 싸야 할 형편이다. 집이야 새로 구하면 될 터이나, 이십 년 동안 정성을 들인 논밭이 사라질 것이 마음이 아프다. 땅을 새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거니와, 가뜩이나 몸이 아프고 보면, 그야말로 “그놈의 농사” 이참에 그만두어야지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서운함을 이기지 못해 “농사 조만치라도 짓는 데 가야 짚공예도 하지” 생각도 한다 ..  〈58쪽〉


 하루 내 김치 담그느라 애쓴 옆지기도 달래고, 또 도서관으로 놀러온 자전거 모임 사람들하고 길게 이야기도 나누려고 신포시장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닭집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한참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이는데, 닭집 아저씨가 가재를 덤 안주로 건넵니다. 닭집 아저씨는 ‘우리가 시키지 않은’ 안주를, 그것도 ‘차림판에 없는’ 안주를 슬그머니 한 접시 내밀어 주시곤 합니다. 요리 솜씨 좋은 아저씨는 늘 웃으면서 칼질을 합니다. 오징어데침을 부탁하면 당신 가게 옆에 있는 물고기집에 가서 싱싱한 놈으로 사 와서 그 자리에서 손질해서 데쳐 줍니다. 저잣거리에 자리한 술집이니 이렇게 할 수 있겠지요.





 〈2〉 밥과 아파트


 그제, 도서관에 놀러온 한 분이 귤을 한 상자 자전거 짐받이에 묶어서 가지고 오셨습니다. 짧지 않은 거리를 가볍지 않은 귤상자를 매달고 오시다니.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으로 귤을 까서 먹습니다. 냠냠짭짭 하다가 문득, 우리가 철따라 먹는 귤이며 능금이며 배며 딸기며 땅감이며 수박이며 참외며 복숭아며 살구며를, 우리 나라에서 얼마나 거두고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요즈음은 철을 따르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열매들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나는 열매만으로도 우리 나라 사람들 배를 채울 만큼 될까요?

 인터넷 찾아보기를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 식량자급률은 25%쯤이라는군요. 쌀을 빼면 5%가 안 된다고 합니다. 해마다 떨어졌으니, 앞으로는 더 떨어지면 떨어졌지, 올라가지 않으리라 봅니다. 농사꾼이 되려는 사람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시골사람도 도시로만 나오고, 도시사람이 시골로 찾아가 농사꾼이 되려고도 하지 않는 한편, 도시에서 텃밭농사라도 짓는 사람은 너무 드무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들은 감자며 양파며 파며 무며 배추며 호박이며 오이며 고추며 부추며 버섯이며 시금치며 얼갈이며 철없이 사서 먹고 있습니다. 집에서 밥을 하지 않고 바깥밥을 사먹는다고 해도, 밥집에서도 어디에선가 푸성귀와 곡식을 사 와서 할 테지요. 회사를 다니는 분들이 도시락을 싸 오지 않아서, 집에서 먹는 ‘쌀 부피(쌀 소비량)’가 많지 않다고는 하지만, 밖에서 사먹는 ‘쌀 부피’는 적지 않아요. 어쩌면, 밖에서 사먹는 ‘쌀 부피’가 더 많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나라 농사꾼들이 거두어들이고 있는 쌀만으로도 우리 나라 도시사람들 밥그릇을 댈 수 있을까요. 그나마 ‘쌀 한 가지’만 놓고 보았을 때.


.. 몸이 안 좋거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할 때 만든 음식이 맛이 없다는 것은 음식 해 본 사람은 누구라도 경험한 바가 있을 것이니, 그이는 나아가 식구들 몸과 마음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고 음식을 할 때면 늘 밝은 마음을 가진다 ..  〈77쪽〉


 인터넷으로 ‘식량자급률’ 숫자를 살펴보다가, 이 나라 신문 매체 가운데 한 곳도 빠짐없이 “낮은 식량자급률 걱정”과 “식량안보 대책”을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도 봅니다. 그런데, 낮은 식량자급률과 식량안보를 걱정하는 모든 신문 매체가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를 외치지는 않습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뿐 아니라 ‘쌀시장 개방’ 문제에서도 그러했습니다.

 다른 나라와 맺는 협정뿐 아니라, 나라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막개발을 놓고도 생각할 일입니다. 지금 온 나라는 ‘아파트 새로 짓기’가 엄청나게 물결치고 있습니다. ‘고속도로 새로 깔기’ 또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09년에는 인천에서 도시엑스포를 하고, 2012년에는 여수에서 또다른 엑스포를 한다지요. 2014년에는 인천에서 아시아경기대회를 한답니다. 행정수도를 충청도로 옮긴다면서, 충청도 논밭을 시멘트로 갈아엎고 새로운 공공기관 건물과 공무원들 깃들 아파트를 올려세울 계획이 나와 있습니다. 인천에서는 도시엑스포니 아시아경기대회니 하면서, ‘지은 지 몇 해 안 되는 아파트와 몇 가지 공공시설’ 있는 자리를 빼고 모두 쓸어없앤 뒤 새로운 아파트로 올려세우는 정책을 안상수 시장이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엑스포니 운동경기 세계대회니 하는 것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 나라 시골과 산골까지도 아파트가 밀려들고 있습니다. 아파트는 논밭을 가리지 않습니다. 시멘트집은 강둑과 바닷가를 가리지 않습니다.


.. 산 끼고 바다 끼어 물산이 풍부한 지역인데, 안주인 최정화 씨는 “먹는 데 그렇게 신경 안 쓴다”고 말한다. “여기서 나는 걸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간혹 손님들이 사 오는 고기를 맛보기도 하고, 바닷가에서 생선 좀 사다 먹는 일도 있지만, “밭에서 나는 것도 다 못 먹는데, 고기까지 먹는다는 것은 없는 사람한테 부끄러운 일”이라 “배추, 고추, 된장, 고추장만 있으면 오케이”라고 한다 ..  〈84∼85쪽〉


 한쪽에서는 ‘식량주권이 사라진다’고 입으로 외치고 손으로 글을 쓰는 우리들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식량주권을 지킬 논밭을 아파트로 바꾸려’고 몸으로 움직이고 머리로 돈벌이 셈을 하는 우리들입니다.


.. 옷을 서로 나눠 입고, 그 옷이 다 낡고 해지도록 외출복에서 평상복 또는 아동복, 작업복, 기름 닦는 걸레로 재활용되니, 소비가 미덕인 시대 정신에는 역행하는 것일지 모르나, 이름뿐인 생태주의보다 삶의 내용이 훨씬 알차다 ..  〈116쪽〉


 《즐거운 불편》(달팽이,2004)이라는 책을 쓴 일본 신문기자 ‘후쿠오카 켄세이’ 님은, 소비사회에서 아무 생각 없이 ‘많은 돈을 벌어서 많은 돈을 쓰고 많은 기계문명을 누리고 살아가는 일’이 무엇보다도 자기 몸과 마음에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는가 돌아보고자 ‘불편하게 살기’로 마음먹고 하나씩 몸으로 옮겼습니다. 이분이 맨 처음 몸으로 옮긴 일은 ‘자전거 타기’이고, 맨 마지막 몸으로 옮긴 일은 ‘농사짓기’입니다. 우리로 치면, 서울에 살고 서울에 있는 큰 신문사를 다니는 사람인데,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기만이 아니라 농사짓기까지 해냅니다. 마지막 ‘즐거운 불편’을 이루어내면서 우리들한테 한 마디 합니다. ‘하나도 어렵지 않다’고, ‘하나씩 이루어 갈수록 즐거웠다’고, ‘무턱대고 목표에 이르려고 할 때면 나나 식구들이나 힘들었지만, 식구들과 함께 목표에 이르려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 그야말로 이런 즐거운 불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마지막까지 이루어 가는 동안 ‘불편’이 떨어져 나가서 ‘즐거운 삶’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3〉 학교와 아파트


 국민학교 적 동무가 숭의야구장 건너편에서 체육사를 합니다. 다음해에 다섯 살이 되는 딸내미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 딸내미를 유치원에 보내고 싶은데, 동네에 마땅히 보낼 만한 곳이 없답니다. 녀석과 제가 나온 국민학교, 또 녀석네 어머님이 1회 졸업을 한 국민학교에 부설유치원이 있어서 그곳을 알아보니, ‘학교 선생님네 아이들만 받아요’ 한답니다. 답동성당을 끼고 있는 이름난 유치원은 집하고 가깝기는 하지만, 워낙 이름난 곳이라 먼 데에서 찾아와 줄서서 기다리는 곳이니 엄두가 안 납니다. 어렵사리 알아본 곳은 주안에 자리한 곳으로, 버스로 데려다준다고 하지만, 집에서 유치원까지 40분 거리. 내 동무 이야기라고만 느끼지 않습니다.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모든 젊은 부부네 일이라고 느낍니다.


.. 공동체 회원이라고 해서 늘 마음이 하나일 수는 없다. 특히 돈이 되니까 유기농하겠다고 하는 이들을 대할 때면 마음이 편치 않다. 예컨대 강순희 씨는 “아직 미비한 것이 많다”지만 제 집에 없거나 모자라는 식품은 물론이고 일상용품까지 몽땅 한살림에서 구입해 쓴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 짐작되는데, 그이가 이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은, “내 곡식은 비싸게 팔아먹겠다 하면서 남의 것은 비싸다고 안 먹는” 것이 결코 더불어 사는 자세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독거리면서 같이 가야” 된다는 마음이 너글너글하다 ..  〈151쪽〉


 인천 중구와 동구는 오래된 동네입니다. 개발업자들 말을 빌면 ‘구 도심’입니다. 동네사람들 말을 빌면 ‘오래된 삶터’입니다. 학교장과 공무원들이 보기에는 ‘땅 팔고 아파트 많은 곳으로 옮겨 가면 학교 장사가 잘될’ 듯하여, 초중고등학교 가리지 않고 하나둘 ‘아파트 새로 많이 올려세운 곳’으로 옮기는 곳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 동네에 오래도록 깃들고 있던 작은 집을 허물고 30층짜리, 50층짜리 아파트를 올려세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들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자꾸만 다른 구로 옮겨 버리면서 이 동네에 아파트를 50층짜리로 새로 올려세운다고 할 때, 이 아파트에 와서 살 사람은 ‘아이가 없어야’겠어요. 아이가 있으면 유치원조차 보낼 수 없으니까요.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자꾸만 옮겨가니까요. 학교는 또 나중 문제라서, 그때가 되면 서울 강남 어디메에서 일어났듯이, ‘상고를 헐고 인문고로 바꾼다’는 소리, ‘서민들 작은 집을 쓸어내고 학교로 바꾼다’는 소리를 내놓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 김치를 담든 된장을 담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성”이다 … 담배며 고기보다 더 나쁜 것이 가공식품이라고 생각한다. 정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농약과 방부제, 온갖 화학조미료가 듬뿍 든 가공식품은 다른 무엇보다도 “피를 탁하게 하기” 때문이다 ..  〈174쪽〉


 제 삶터인 인천만 동네 쉼터라 할 수 있는 공원이 없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일산 같은 곳에는 호수공원이 있고 분당 같은 곳은 강줄기를 따라서 공원이 마련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데 말고, 바로 집 앞에 마련된 쉼터, 차소리와 차방귀 없이 느긋하게 쉴 수 있는 한편, 아이들이 마음놓고 뛰놀 수 있는 빈터는 얼마나 될까요. 아파트 놀이터는 사라지고, 아파트 주차장만 엄청나게 커진 오늘날,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또 어른들은 무슨 재미를 누릴까요. 집안에 들여놓은 ‘최신식 전자기기’들로? 인터넷으로? 풀 HD TV로? 널따란 아파트 집구석에 꾸며놓는 놀이기구나 책꽂이로?

 새로 짓는 아파트들 목숨이 기껏해야 스무 해나 서른 해입니다. 이 새로 지은 아파트들은 하나같이 ‘아토피 피부병’에 걸리기 좋은 집들입니다. ‘새집병’이 생길밖에 없는 아파트들인데, 이런 새 아파트들 값이 장난이 아니옵니다. 이런 집들에서 겨우 숨붙여 살 만하게 될 때면, ‘자, 이제 재개발합시다! 재개발하면 돈 돼요!’ 하고 외치고들 있습니다. 건축업자들이야 ‘돈 돼요! 돈!’ 하고 외친다지만, 이런 아파트에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돈이 된대요! 돈이!’ 하면서 얼싸안고 있습니다.


.. “숨통이 트인 삶”을 살게 되면서, 그는 돈은 벌지 못했지만 그 대신 자연 안에서 누리는 자유로운 삶이라는 더 큰 선물을 얻었으니 ..  〈203쪽〉

 





 〈4〉 《농부의 밥상》이라는 책


 《농부의 밥상》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농사꾼들이 즐겨먹는, 아니 날마다 먹는 밥상을 죽 돌아본 이야기를 다룬 책을 읽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농사꾼들은, 남다른 뜻이 있어서 남다른 일을 하는 분들인데, 이분들이 아닌 여느 농사꾼들 밥상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덧붙여, 농사꾼이 아니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농사꾼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는 분들 밥상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지요.


.. 어렸을 때 입맛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푸짐이ㆍ꽃님이ㆍ아루ㆍ보리, 이름도 어여쁜 네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는 제 기억대로 만든 음식들을 상에 올린다 ..  〈224쪽〉


 우리가 차리는 밥상에 놓인 밥그릇과 반찬그릇은 바로 우리들이 먹으려고 차려 놓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먹이려고 차려 놓습니다. 우리 어버이들을 먹이려고 차려 놓습니다. 때때로 이웃사람들한테 나누어 주기도 하니, 나와 내 식구와 내 둘레사람들 모두 먹을 수 있는 밥과 반찬입니다.


.. 보약이 어디 산나물뿐이겠는가. 진수성찬이라는 것과는 무관하나, 밭에서 길러 제철에 먹는 싱싱한 채소들도 여태껏 병원 신세 져 본 적 없이 건강한 이 집 식구들의 보약일 게다 ..  〈89쪽〉


 우리들이 날마다 하는 일은 얼마나 우리 삶을 가꾸고 있을까요. 우리 아닌 사람들,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 집 식구들, 우리 동무들, 우리 이웃들한테도 도움이 되고 보람도 되며 즐거움도 나눌 만한 일이 되고 있을까요.

 우리들이 날마다 즐기는 놀이는 얼마나 우리 삶에 웃음과 눈물을 선사하고 있을까요. 우리 아닌 사람들,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 집 식구들, 우리 동무들, 우리 이웃들한테도 웃음과 눈물이 나며 재미있어서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즐길 만한 놀이가 되고 있을까요. (4340.12.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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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혹한 비평 - 이현식 문학평론집
이현식 지음 / 작가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곤혹한 비평
- 글쓴이 : 이현식
- 펴낸곳 : 작가들(2007.6.25.)
- 책값 : 13000원



 이 책 하나 28 ― ‘어려움’을 뚫고 나온 문학평론 하나
 : 이현식 문학평론, 《곤혹한 비평》

 

 〈1〉 한일축구, 여수박람회, 겨울올림픽


 한국과 일본이 축구 경기를 벌인다고 할 때면, 열 가지 일을 제쳐놓고 축구 경기를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반칙을 해도 좋으니 이겨야 한다’. 이때 저도 한 마디 대꾸합니다. “한국이 져도 좋으니, 반칙을 안 하는 나라가 이기면 좋겠습니다.”

 지저분하게 경기를 한다든지, 성의 없이 땀 안 흘리는 경기를 한다든지, 일찌감치 두 손을 들고 온힘을 다하지 않을 때면, 운동경기 중계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솜씨와 재주가 몹시 뛰어나다고 해도, 맞은편 선수를 깎아내리거나 얕보거나 놀린다면, 이런 선수들은 조금도 달갑지 않습니다.

 지더라도 웃어야 하고, 지더라도 땀흘려야 하며, 지더라도 다시 애써서 다음 번에 이기도록 마음을 기울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늘 이겨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경기를 치르는 줄거리가 중요하지, 지고 이기고 하는 열매는 다음 차례입니다.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 대로 즐거운 일이 운동경기요, 경기를 준비하는 동안 흘린 땀방울을 소중히 여기는 운동경기라고 느낍니다.


.. 4ㆍ19세대의 세대로서의 정체성은 온통 한글, 다시 말해 문화사적 의미에 가려 정치적 의미는 달아나 버린다. 1980년의 항쟁과 탄압 역시 김현에게 오면 ‘폭력’이라는 불투명한 단어로 바뀌어 버린다. 그가 1980년대에 했던 작업들, 예컨대 지라르에 대한 연구나 기타 그의 비평적 행위들에서 그가 폭력의 의미를 파고들었다는 점이 갖는 의의는 물론 높이 살 일이지만, 폭력이란 말은 또 얼마나 추상적인가? 그 언어로는 1980년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건 ‘폭력’이라는 보통 명사로 지칭되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일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현은 이 대목에 오게 되면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그 특유의 열린 반성적 사유로 파악하기보다는, 자기만의 성으로 완강하게 움츠러들어 왜곡시켜버린다 ..  〈29쪽〉


 “관람객 795만 명이 찾아 10조 원의 생산유발과 5조원의 부가가치, 15만 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예상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적인 파급효과도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나 2002년 한·일 월드컵보다 파급효과가 큰 것이다.(오마이뉴스 2007.11.27.)”는 기사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습니다. 올해 4월, 충주에서 인천으로 살림을 옮기며 들어야 했던 소식인 ‘아시아경기대회 인천 유치’에 못지않은 씁쓸함 때문입니다.

 10조 원을 벌어서 5조 원이 남는다고 하면, 이 5조 원으로 무슨 일을 하나요. 15만 사람한테 일자리가 주어진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이들이 얻는 일자리는 무엇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일자리이며, 이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이 돈을 벌어서 어디에서 어떻게 쓸 테며, 이 돈은 우리 자신한테, 우리 삶터에 어떻게 보탬이 되나요.

 795만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셈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만한 숫자가 한국땅을 밟든 더 많은 숫자가 한국땅을 밟든, 이들이 묵을 잠자리는 어떻게 풀지요? 새 호텔을 잔뜩 지으면 될까요? 새 아파트를 허벌나게 올려쌓으면 될까요? 이들이 타고다닐 교통편은 어떡하지요? 이들이 먹을 밥은 또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하나요. 식량자급율이 30%도 안 되는 이 나라에서 이들한테 팔아치울 먹을거리는 죄다 나라밖에서 사들여서 시세차익 남기기로 돈벌이를 해야 하는지요?


.. 김현은 이 글에서, 적어도 저항적 폭력에 대해서는 그 특유의 맥락적 사유, 반성적 이성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억압당해 온 사람들의 저항으로부터 비롯된 폭력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비판하되, 그는 그것의 맥락을 열린 자세로 접근하지 못한다. 그는 드러난 폭력에만 집착한다. 그 이유는 그것 역시 억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억압으로 전화될 수도 있다는 점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전에 그것이 폭력으로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저항에 대한 왜곡이 될 수 있다. 대항 이념과 저항이 왜 개인의 자유로운 공간을 획득하려 하기보다 폭력으로 나아갔는지, 그리고 또 그것이 왜 또 다른 억압이 될 수도 있는지를 ‘사회ㆍ역사’적 맥락에서 사유하는 쪽으로 진전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억압과 폭력의 본질이 더 정확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이 훨씬 더 ‘김현’다운 모습이다 ..  〈31쪽〉


 평창 겨울올림픽 끌어들이기가 여러 차례 실패했을 때 ‘만세!’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후유!’ 하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우리들한테 ‘좋은 가르침’이 베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기울일 곳은 어디인지, 우리가 몸을 움직일 일은 무엇인지, 우리가 가진 돈이며 시간이며 땀방울을 쏟을 데는 어디인지를 넌지시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한 달에 천만 원을 벌어서 900만 원을 신나게 쓴다고 할 때와, 한 사람이 한 달에 백만 원을 벌어서 알뜰살뜰 40만 원을 쓰고 나머지 60만 원은 내 이웃이나 내 삶터 가꾸기에 쓴다고 할 때와, 한 사람이 한 달에 이십만 원을 벌어서 이웃돕기는 하나도 못하지만 제 앞가림하는 데에 허리띠 졸라매며 쓴다고 할 때, 어느 때가 우리한테 기쁨과 눈물과 웃음과 아름다움을 베푸는 일이 될는지요.

 저는 한 끼니에 밥 백 그릇을 먹지 않아도 좋습니다. 한 끼니 밥 한 그릇이면 넉넉하지만, 하루 두 끼니여도 좋고, 하루 한 끼니여도 괜찮습니다. 한 끼니 밥값으로 만 원짜리나 십만 원짜리가 아니라 해도 좋습니다. 한 끼니 밥값으로 300원이나 500원만 들어도 좋습니다. 한 잔 술값이 십만 원이나 백만 원짜리가 아닌 천 원짜리나 이천 원짜리라 해도 좋고, 동무들한테 얻어마셔도 좋습니다.


 〈2〉 우리가 살 집


 지난 토요일, 참여연대 박원순 님이 우리 일터인 도서관 나들이를 하셨습니다. 인천에 다른 볼일이 있어서 오신 김에, 〈스페이스 빔〉이라는 전시관을 찾아오셨다가, 헌책방 〈아벨서점〉 아주머니가 손수 마련한 ‘시 다락방’ 구경을 하러 가는 길에 저와 만나서 들어오셨습니다. 죽 둘러보시며 도서관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느냐고 물으시다가, “책도 파나요?” 하고도 물으시기에, “여기는 도서관인걸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 이 무렵 최일수나 정태용의 민족 인식은 커다란 반향을 얻지 못했다. 논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은 주류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태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지만, 당대의 문학계나 지성계, 넓게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들의 주장 역시 냉전 이데올로기의 한 변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40쪽〉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에 자리한 〈스페이스 빔〉 전시관에서  금, 토, 일, 사흘에 걸쳐서 연극 공연이 있었습니다. 동네 한복판에 산업도로를 뚫어서 ‘남북축 고속화도로’로 만들고, 길 둘레 살림집을 싹 쓸어내어 아파트며 쇼핑상가로 재개발하려는 안상수 인천시장 정책이 어떻게 얼마나 말썽거리인지, 우리 삶을 갉아먹는지를 살며시 들려주는 연극마당이었습니다. 이 연극마당 구경이며 일손 거들기를 마치고 신포시장에 있는 닭집으로 가서 술을 한잔 걸치며 고단함을 풉니다. 밤 열두 시 나절, 닭집 문 닫을 때가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닭집 아저씨가 같이 한잔하자고 하셔서, 우리 무리도 닭집 아저씨하고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불 다 꺼지고 조용한 신포시장을 나와 뒤쪽 상가거리를 걷습니다. 1990년대 첫머리, 이곳 신포시장 둘레를 서울 명동거리처럼 꾸미겠다는 시 정책이 있어서, 크고작은 새 건물을 무던히도 짓고 옷집이며 밥집이며 술집이며 잔뜩 들어섰으나, 거의 모든 가게가 파리를 날리다가 쫄딱 무너졌습니다. 이즈음, 인천 연수동과 청학동 들에 수십만 채에 이르는 아파트를 올려세우고, 이 둘레에 있던 학교도 터를 팔아 그리로 옮기는 바람에, 이 거리를 찾아올 사람이 확 줄었거든요(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 지역문학은 자기가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생활 현장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70∼80년대 리얼리즘 문학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면서도 지역문학은 생활을 구체적인 자기 삶의 문제로 인식하고, 일상의 차원과 연계시킨다는 점에서 80년대 문학이 갖고 있는 한계로부터 탈출한다. 아울러 방향 없는 일상성과도 거리를 둔다는 면에서 90년대 포스트모던 문학과 스스로를 구별한다 … 인천이 갖고 있는 정서와 부산의 정서는 다르다. 자연환경도 다를 뿐더러 지역의 역사도 다르다. 자연히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도 다를 수 있다. 그런 정서와 풍토들, 거기에는 그 지역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 삶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 건강성, 그것의 문제성이 주목하자는 것이다. 80년대의 열정은 지역 안에서 구체화된 현실과 만날 수 있고, 90년대 애매한 일상의 모습이 지역 안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  〈59쪽〉


 ‘건설 경기’를 북돋우면 일자리도 늘고 경제지표도 올라간다며, 온갖 건설계획이며 재개발계획이 쏟아집니다만, 이런 ‘조금 묵은 집 헐고 새 시멘트집 짓기’가 언제까지나 우리한테 돈벌이가 될까요. 재개발한다며 옛집 헐고 아파트 올리는 일은 참말로 우리한테 돈벌이가 될까요. 길어도 서른 해를 버티지 않게 짓는 아파트 문화는, 얼마나 우리 삶을 가꾸어 줄까요. 한 집에서 대여섯 해 살기도 힘들게 하면서 자꾸자꾸 이삿짐을 꾸리게 하는 우리 사회 우리 땅에서는, 참말로 누가 집임자요 땅임자일까요.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다섯 평짜리 작은 골목집보다, 빈 방이 남아도는 쉰 평짜리 아파트가 더 살기 낫거나 아름답다는 ‘생각(이미지)’은 누가 심고 있으며, 이런 생각에 왜 우리들이 끄달려야 하고, 우리 사회는 왜 이런 쪽으로 흘러야 하나요.


.. 나는 두 가지 현실이 지역 차원에서 보다 첨예하게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즉 중앙의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문단구조가 더욱 극명한 형태로 뿌리깊게 존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에서 지적한 가능성들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중앙문단 중심의 보수적 문인 조직은 오랜 기간 동안 조직 차원의 개혁 노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그 존재 의미는 거의 다해 버린 것이 아닌가 여겨질 만큼 문학의 창조적 역량을 잃어버렸다. 남은 것은 형해화되어 버린 제도이며 조직이고 형식화된 권력일 뿐이다 … 적어도 내가 보는 한에서는 문학에 대한 열의나 능력보다는 예산과 이권의 다툼장으로 변해버린 것이 지방의 보수적 문인 조직이다. 여기에 값싼 문인 지망생들이 대거 몰려들어 그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세력을 만들고 파벌이 형성되면서 지방문단 조직은 권력기관이 된다 ..  〈65쪽〉


 술집에서 나와 걷습니다. 시간은 벌써 두 시, 세 시……. 몸은 고되지만 잠은 오지 않고, 술은 들어갔으나 얼근하지 않고, 터덜터덜 골목골목 사잇길로 천천히 뚜벅뚜벅 걷습니다. 고개를 살짝 기웃하면 집안이 들여다보이는 집들,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집안 사람들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집들, 창문 안쪽 살림살이가 훤히 보이는 집들. 스무 해 앞서도, 마흔 해 앞서도, 한국전쟁 때 미군 함포사격을 맞는 바람에 새로 올린 집도 많지만 그때에도 살아남아서 고이 이어오고 있는 골목집들. ‘독립운동을 했건 일제부역을 했건’ 아랑곳하지 않고, ‘사상분자가 많이 사는 동네’라고 해서, 일부러 온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함포사격을 오래도록 한 뒤 ‘인천상륙작전’을 하느라 애꿎은 백성들, 서민들, 밑바닥 사람들, 보통사람들 목숨이 하늘하늘 사라져 가야만 했다던 그 동네 골목길을 걷습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깃들이는 집은 1957년에 지어졌습니다.


 〈3〉 날씨


 아침햇살을 받으며 일어나 보니, 방 온도는 6도. 너무 쌀쌀하면 안 되겠구나 싶어 살짝 보일러를 돌립니다. 보일러 돌리는 김에 머리를 감고 빨래 넉 점을 합니다. 천으로 된 시장가방은 마당 담벼락에 널어 놓고, 긴양말 두 점은 모기장 위에 얹고, 바지 한 벌은 큰방 문고리에 겁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학상 제도는 어떤 형태로건 자본과 결탁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에 그 권위를 온전하게 확보하기 힘들다 … 우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베스트셀러 시집이라고 해서 그것을 곧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학상 수상 작품이라는 레테르가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상품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 인지도 높은 굵직한 문학상들의 제정과 운영에 애초의 순수한 취지가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자본의 논리가 훨씬 더 크고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신경숙이 훌륭한 작가가 아니래서가 아니다. 조금 지명도 있고 팔릴 것 같은 작가를, 출판사마다 문학상을 수여한다는 이름으로 서로 앞다퉈가며 끌고가려는 현실이 눈에 빤히 보여 그런 것이다 ..  〈80∼82쪽〉


 마당에 나와 둘레를 둘러봅니다. 앞집 감나무는 두 알 남고 모두 털렸습니다. 감나무 임자는 몇 알 남겨 두기를 잊지 않습니다. 앞집 옥상마당에 고인 물이 살짝 얼어 있습니다. 그 옆집 옥상마당 빨랫줄에는 담요 한 장 널리고, 하늘빛은 파랗습니다. 구름 한 점 안 보입니다. 어제 그제 살짝 비가 듣더니 12월을 코앞에 둔 11월 막바지 하늘인데도 참 맑네요. 그리 쌀쌀하지 않으면서.


.. 추상적으로 규정된 개념어들이 너무 쉽게 사용되고 있어서 일단 문장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현대성’은 과연 무엇인지도 짐작하기 전에 거기에 욕망이 결탁되고, 또 그것을 비판한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개념적인 용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데다가 문장을 충분히 풀어쓰지 않아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은 아니다 … 나름대로 문학에 대해 공부도 하고 문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고 하는 내가 잘 이해하거나 납득되기 힘든 글이라면, 평범한 문학 애호가들이 대부분일 일반적인 독자들도 이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 〈98쪽〉


 겨울이 겨울 같지 않은 미친날씨가 끝나고 추위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겨울 찬비나 겨울눈도 아닌 봄비로 느껴지는 따순 비가 내렸습니다. 겨울비 내린 뒤면 더 추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따뜻해지면서 아침에는 안개도 피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날씨입니다. 덕분에 보일러는 덜 돌려도 좋아 기름 걱정은 덜할 수 있겠네요. 이만한 날씨에도 보일러를 팡팡 돌린다면 기름 걱정이 크겠지요. 자전거로 일터를 오가거나 두 다리로 걷지 않고, 자가용을 끌고 일터를 오간다면 기름 걱정이 크겠지요. 추우면 옷을 한 벌 더 입고, 일터에 가는 시간이 늦을 듯하면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되는데.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안 고프면 안 먹으면 되듯이, 꽃그릇 흙이 마르는가 싶으면 물을 주고 촉촉하면 안 주어야 하듯이, 우리 삶도 있는 그대로 있는 만큼 느끼고 받아들이고 즐기면 될 텐데.


.. 이문열의 소설은 누구에게나 소설의 재미를 한껏 북돋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매력을 갖고 있다. 이문열의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지식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 그렇지만 그의 소설은 현실을 환기시키지 않는다. 아니면 현실의 특정 부분만 확대하여 과장한다. 그의 소설들에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거나 아니면 단순하게 방향이 잡혀 있다.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 삶이 흘러가는 과정은 그리 문제시되지 않는다.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의 힘겨움, 삶이 진행되는 과정의 고통스러움이 세밀하게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되도록 짜여 있기 때문이다 ..  〈289∼299쪽〉


 시간은 어느덧 열한 시를 넘어섭니다.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옵니다. 이부자리 있는 데로 맑은 햇살이 비치니, 방 온도도 조금씩 올라가겠지요. 문득, 이 햇살을 그대로 보내기 아깝습니다. 이불 둘 걷어서 앞마당으로 나갑니다. 한손으로 뭉그러 잡고 한손으로 탁탁 텁니다. 잔먼지가 하늘에 폴폴 날립니다. 벽돌 둘을 대며 담벼락에 넙니다.

 이불을 넌 자리 옆으로 까마중 한 줄기 말라 있습니다. 봄에 줄기를 올려 여름내 까만 열매를 맺은 그 까마중. 우리 집에 놀러온 분들 가운데 도시내기는 손도 대지 않은 까마중이지만, 시골내기는 “엉? 까마중이 여기서 자라네?” 하면서 덥석 따서 먹었던 까마중. 다음해에도 고 자그맣고 까만 열매를 맺어 줄까요.


.. 작품의 배경이 조선 후기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쓰여지는 작품에서 이런 식의 언어가 과연 필요할지는 의문이다. 소설의 전후 맥락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문열 소설에는 이런 식의 구투 어린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가 지닌 한문 교양을 드러내는 데는 흠잡을 데 없겠지만, 그건 권력의 언어고 억압의 언어다 ..  〈300쪽〉


 〈4〉 문학평론 한 권


 문학평론 《곤혹한 비평》을 읽습니다. 글을 쓴 이현식 님은 문학평론 등단을 한 지 열 해 만에 묶었다는 평론책 머리말에서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책을 사는 행위가 더 이상 흔한 일이 아닌 것이 요즈음의 세태”인데, 이런 문학평론 하나 내어놓는 일이 얼마나 쓸모있겠느냐며 걱정을 합니다.


.. 한국의 시민들은 도덕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쉽게 공감한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도덕적인 방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우리 사회에 제기하였다 … 《난장이》를 지배하는 언어는 단문체의 도시적 언어이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말이다. 생활 속의 살아 있는 민중의 언어가 아닌, 일반화된 언어이다. 사투리도 거의 없고 비어나 속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정확하고 균형잡힌, 깔끔하게 다듬어진 언어가 《난장이》를 시종일관 지배하고 있다. 그런 언어를 통해 시민들은 《난장이》에 친숙하게 접근한다 … 독자들이 작품을 읽어가면서 이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난장이와 꼽추, 앉은뱅이라는 육체적 조건을 제외한다면 난장이들은 시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다만 경제적으로 조금 더 궁핍할 뿐이지,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니다 ..  〈315∼317쪽〉


 “야, 우리 책 보러 가자!” 하는 사람은 없고, “야! 우리 영화 보러 가자!”나, “야, 우리 놀러 가자!”나 “야! 우리 술 마시러 가자!” 하고 외치는 사람만 가득한 우리 흐름입니다. 동네 꼬마들은 고무줄놀이며 제기차기는 할 줄을 모르고, 동네 어른들은 당신 눈길을 트고 마음문을 열어 줄 일거리나 놀이감과는 자꾸만 멀어지는 우리 흐름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문학이 문학답게 펼쳐지며 읽히는 길에서 벗어나는구나 싶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자리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에, 문학이 문학답게 펼쳐지며 읽히는 자리에서 멀어지는구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곤혹한 비평》은 세상에 나왔습니다.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온갖 힘겨움을 제 몸뚱이로 껴안으면서. (4340.11.27.불.ㅎㄲㅅㄱ)


.. 문제는 서울과 지방이 아니라 권력과 억압의 체제이며, 그것을 해체하여 자유롭고 인간적인 새로운 질서를 재창출하는 것이다 ..  〈67쪽〉

 

[글쓴이 이현식 님은] 1966년 외가인 여주에서 태어나 친가인 인천에서 자랍니다.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대학원 국문과를 마치고, 1997년 〈문학과사회〉 평론 추천으로 등단합니다. (재)인천발전연구원 문화정책 연구위원을 거쳐 인천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인하대학교에 강의를 나갑니다. 《문화도시로 가는 길》, 《제도사로서의 한국 근대문학》, 《일제 파시즘 체제하의 한국 근대문학비평》 들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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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인간 - 해나라 어린이책 8
페르난도 알론소 글 그림, 권미선 옮김 / 해나라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종이 인간
- 그림ㆍ글 : 페르난도 알론소
- 옮긴이 : 권미선
- 펴낸곳 : 해나라(2002.7.30.)
- 책값 : 6000원

 

― 대통령 후보도, 언론도, 유권자도 ‘찌질이’
[그림책이 좋다 41] 페르난도 알론소, 《종이 인간》


 

 〈1〉 빨래


 그제부터 큰 통에 담가 두고만 있던 이불을, 아침에 가루비누를 풀어서 살짝 헹군 뒤, 두 시간 그대로 두었다가 빱니다. 오른팔꿈치가 몹시 저려서 물짜기는 고되었지만 옆지기 도움을 받으며 어느 만큼 짠 다음, 마당으로 들고 나와 탁탁탁 털어서 담벼락에 널어놓습니다.

 인천으로 살림집을 다시 옮기면서 살펴본 대목 가운데 하나는 씻는방이 얼마나 넓으냐였습니다. 그동안 혼자 살아온 살림집에서는 씻는방이 없거나 아주 좁았습니다. 마음놓고 이불빨래를 할 수 없었어요. 이불빨래는 손빨래 가운데 가장 힘들다지만, 힘든 만큼 가장 즐겁고 뿌듯합니다. 어쩌면 손이 덜 가는 빨래일 수 있고, 담벼락에 널어놓고 물방울이 줄줄줄 떨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흐뭇해지는 빨래입니다. 이제 저 빨래가 맑은 햇볕을 받아 뽀송뽀송 마르면 저녁에 잠자리에 들며 아주 포근하겠구나 싶어 한결 즐겁습니다.

 씻는방이 넓기를 바란 까닭은 이불빨래 때문만은 아닙니다. 뒷날 아이를 낳아 기른다고 할 때 이 씻는방에서 함께 씻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이불이며 다른 빨랫감이며 바닥에 죽 깔아 놓고 함께 씻으면서 빨래를 적실 수 있고, 하나하나 아이들과 함께 손빨래를 하면서 놀 수 있겠지요. 저는 한쪽에서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한쪽에서 씻는방 바닥을 빗솔로 북북 비비며 닦고. 이불빨래를 때로는 바닥에 쫙 펼쳐서 손으로 비빔질을 해서 함께 빨 수도 있고.


.. 종이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어요. 그렇지만 종이 인간이 들려주는 얘기는 모두 전쟁과 갑작스런 사고나 가난에 대한 이야기들뿐이었어요. 아이들은 종이 인간이 해 준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주아주 슬픈 얼굴이 되었어요. 몇몇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어요 ..  〈20∼24쪽〉


 제 어릴 적을 돌아보았을 때, 이불빨래 하는 날은 밖에 나가서 동무들과 놀 수 없어서 짜증스러웠지만, 이맛살 찌푸린 채 시키는 대로 밟고 비비고 하다 보면 어느새 이맛살이 스르르 풀리면서 싱글벙글 웃으며 온몸이 비누거품이 됩니다. 옷을 하나둘 벗어던지고 몸씻기까지 같이하고야 맙니다. 밖에 나가 놀자던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형하고 어머니와 낑낑거리며 물을 짰고, 툇마루 난간에 이불을 쫙 하고 널면! 또는 동네 빈 담벼락이나 울타리에 널면!


 〈2〉 옷


 아침에는 모처럼 보일러를 돌려서 몸을 씻었고, 밀린 바지 빨래 석 점을 해치웠습니다. 가을 날씨까지는 손빨래를 신나게 즐기는데, 쌀쌀해진 날씨에는 손이 얼어붙기 때문에 한 점 두 점 밀리기 일쑤가 되고, 더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빨래손을 확 붙잡으면 손이 얼어붙으면서도 어느새 두 점 석 점 해치우게 됩니다. 얼얼한 손을 가랑이 사이에 집어넣고 녹이는데, 그러면서도 웃습니다. 좋아서. 오늘은 올해 들어 두 번째로 따순 물을 썼습니다. 따순 물로 빨래하니 손도 따숩고 빨래도 금세 되고 좋네요.


.. 빨래방 간판이 보였어요. 종이 인간은 너무 좋아서 깡충 뛰었어요. 그리고는 굳게 마음을 먹고 빨래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어요. ‘여기서는 내 몸에 쓰여진 것들을 모두 지울 수 있을 거야. 그건 모두 다 아이들을 슬프게 하는 것들뿐이야’ ..  〈28∼31쪽〉


 혼잣살림을 하거나 시집장가를 가서 살림을 하거나, 제 또래동무며 손위나 손아래 동무며, 어르신들이며 모두들 빨래기계를 집에 들여놓고 삽니다. 손빨래로만 살아가는 분은 딱 한 사람 만났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호호 손을 녹이며 손빨래를 하신답니다. 그분 차림새를 보면, 멋을 아예 안 차리지는 않지만 자기 깜냥과 주제에 맞는 멋에 맞출 뿐, 구태여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더 나아갈 까닭도 없겠지요. 자기 옷차림이란 자기가 입어서 좋을 옷을 자기 몸이 좋아하는 대로 갖추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자기 옷은 자기가 빨아서 입어야 하는 만큼, 옷 아낌새도 남다릅니다. 돈 몇 푼으로 사서 입다가 유행이 지나면 재활용수거함에 휙 던지거나 ‘아름다운가게’ 같은 곳에 슥 기부하고 마는 옷이 아니거든요. 참말로 자기가 아끼며 입을 수 있는 옷, 좋아하며 즐길 수 있는 옷, 두고두고 오래오래 입을 수 있는 옷, 뒷날 자기 딸아들한테 물려주거나 좋은 동무한테 선사할 수도 있는 옷만 알뜰히 마련해서 적은 숫자로 갖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한테는 옷이 몇 가지나 있어야 할까요. 우리들한테는 책이 몇 권이나 있어야 할까요. 우리들한테는 은행계좌 남은돈이나 달삯으로 벌어들이는 돈크기가 얼마나 되어야 할까요. 우리들이 살아가는 집터는 몇 평이나 되어야 할까요.


 〈3〉 돈과 집


 우리 도서관이나 살림집에 놀러오시는 분들은 평수가 꽤 넓은 모습을 보며 놀랍니다. “돈 많이 벌었나 봐요?” “아니에요. 이 동네가 싸요. 다들 서울에서만 살려고 하고, 번화가 도심지 가까이 살려고 하고, 아파트숲에서만 살려고 하니, 자기 살림터를 넉넉하게 즐길 수 없잖아요. 흔한 말로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들 하는데, 시골에 살 때에도 욕심을 안 내면 빈집을 아주 적은 돈만 치르고도 얻어서 쓸 수 있어요. 크고 넓은 집이 아니라, 온갖 물질문명을 다 갖추어 쓸 수 있는 집이 아니라, 자기가 마음을 아늑하게 다스리면서 살고 싶은 집,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더 많은 자기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싶은 집, 남한테 잘 보이려는 집이 아니라 자기 몸에 알맞고 동네사람들하고도 오순도순 복닥이고 싶은 집에서 살 마음이라면 얼마든지 값도 싸면서 괜찮은 집을 마련할 수 있어요. 뭐, 서울에서 산다고 할 때에도, 집에서 전철이나 버스 타는 데까지 걸어서 십 분이나 이십 분쯤 나가야 하는 안쪽 깊숙한 데로 얻으면 싸고 괜찮아요. ‘걸어다닐’ 생각이나 ‘자전거 타고다닐’ 생각을 하면 말이에요.”


.. 그렇지만, 종이 인간이 말하려고 하자…… 그의 입에서는 한 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종이 인간은 자신의 몸이 온통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  〈41쪽〉


 돈으로 사는 집은 돈으로 잃습니다. 돈벌이 잘되는 나라는 돈벌이로 무너집니다. 사랑으로 나누고 믿음으로 함께하며 나눔으로 웃고 울 수 있을 때, 백 해를 꽉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우리 삶일지라도 그 백 해쯤 되는 세월을 ‘나, 이 땅에서 잘살다가 떠나네. 아무 아쉬움도 없이.’ 하고 말하며 눈감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들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한테 무엇을 물려받으면 좋을까요? 큰 집? 빠른 차? 넉넉한 돈? 높은 이름?

 우리들은 우리 딸아들한테 무엇을 물려주면 좋을까요? 영어 솜씨? 한문 재주? 일류대 졸업장? 예쁜 얼굴과 멋진 몸매?


 〈4〉 사진 찍기


 사진기 하나 어깨에 메고 동네 마실을 다닙니다. 예전에는 가방에 넣고 있다가 찍을 때만 꺼냈는데, 이제는 스스럼없이 어깨에 둘러멘 채 돌아다닙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찰칵찰칵 찍습니다. 다만, 언제나 대놓고 찍지는 않습니다만, 같이 어울리고 있는 자리에서는 스스럼없이 집어듭니다. “사진을 왜 찍으셔요?” “지금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아서요.” “아유, 나 같은 사람을 뭐 하러 찍어요?” “할머니 같은 분이니까 찍지요.” “이 쭈그렁 주름살은 나오게 하지 말아요.” “그 쭈그렁 주름살이기 때문에 곱잖아요.”

 

.. 너무 슬퍼서 다시 길을 떠났어요. 종이 인간은 도시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들판으로 나왔어요. 들판으로 나온 순간, 종이 인간은 너무 행복했어요. 종이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어요. 종이 인간은 자기 호주머니에 새 한 마리가 들어 있다고 상상하며 활짝 웃었어요. 그리고는 들판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색으로 온몸을 물들였어요 ..  〈42∼44쪽〉


 사진기는 늘 들고 다니지만, 단추를 누를 때까지는 시간을 퍽 두어야 합니다. 기다립니다. 제 마음이 맞은편 마음 한 자리까지 스며들도록 기다립니다. 사진기를 늘 들고 다니고 있음을 맞은편에서도 느끼게 한 다음, 이 사진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그때 바로 집어듭니다.

 사진에 담기는 분들은 모두 내 이웃이요, 그분들한테 저 또한 이웃입니다. 사진에 담기는 분들은 모두 내 식구이자 동무일 수 있습니다. 그분들한테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귀담아듣고, 저도 제 나름대로 제 삶을 가만히 이야기로 들려드립니다. 오고 갑니다. 가고 옵니다.


 〈5〉 《종이 인간》이라는 그림책


 그림책 《종이 인간》을 봅니다. 꼭 알맞는 길이로 글이 담겼고 그림이 실렸습니다. 어린아이들 누구나 따라 그릴 수 있을 만치 가볍게 그렸습니다. 가벼운 그림이면서도 오래도록 이 땅 아이들을 살펴보지 않았다면, 차근차근 이 땅 삶터와 세상을 헤아리지 않았다면 빚어낼 수 없었을 그림입니다. 가벼운 그림이 가장 그리기 어려운 그림이기도 할까요?

 ‘종이 사람’이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신문’이기도 하고 ‘글쟁이’이기도 합니다. ‘방송’이나 ‘인터넷’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이 ‘종이 사람’,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자면 ‘언론’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내고 있을까요. 이 ‘언론’에 담기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우리 삶을 헤아리고 있을까요. 우리 삶터와 세상은 얼마나 굽어살핀 뒤 담아내고 있을까요. 얼마나 이 땅 사람들 가까이 다가와서 이야기를 건네고 있을까요.

 ‘언론’에 마주하는 우리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나요. 어떤 이야기를 찾고 있나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가슴으로 받아안나요. 우리들은 ‘언론’에 무엇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우리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어떤 모습이 언론에 담길 만하다고 느끼나요.


.. 새롭고 아름다운 단어들로 머리속을 채워 나갔어요 ..  〈45쪽〉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누가누가 당선가능성이 높다느니 지지율이 얼마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넘칩니다. 지난 선거에도, 지지난 선거에도, 지지지난 선거에도, 지지지지난 선거에도 그랬습니다. 다음 선거도 마찬가지일까요? 다다음 선거도 판박이일까요? 다다다음 선거도 돌림돌림이 될까요? 다다다다음 선거도 한결같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고, 우리는 어떻게 지내야 잘산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돌아보고 내다보고 톺아보며 함께 얼싸안거나 부둥켜안거나 껴안을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대통령 후보는 없을까요. 아니, 대통령 후보가 이런 말을 꺼내지 못한다면, 대통령 후보들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도록 간지럽히거나 꼬집거나 들쑤실 수 있는 ‘언론’은 없을까요. 아니, 언론이 대통령 후보를 파헤치지 못하는 모습을 깨닫고는, 언론이 언론다울 수 있도록 다그치는 우리들, 백성들, 시민들, 서민들, 국민들, 민중들, 보통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4340.11.1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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