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조선의 처녀들 - 훈 할머니 편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50 ― ‘나라’는 내버리고, ‘우리’는 등돌린 여자
 :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


- 책이름 :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
- 글 :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펴낸곳 : 아름다운사람들(2004.2.24.)
- 책값 : 8000원


 (1) ‘미친’ 소와 ‘미친’ 날씨


 유월을 사흘 넘긴 아침, 찌푸린 하늘에서는 비가 오다가 구름이 걷히다가 해가 나다가 슬며시 더웠다가 바람이 불었다가 합니다. 벌써 유월인데 올해 여름은 어찌 되려나 궁금합니다. 올여름은 지난여름처럼 끔찍하려나. 올해에는 여름이란 싹 사라지고 곧바로 겨울로 이어지려나. 그치지 않는 더위만 이어졌다가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이었다가 갑자기 얼어붙은 채 두 달 가까이 이어졌던 지난 한 해 날씨인데.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사라지고 철과 절기도 사라진 오늘날, 하루하루 날씨를 헤아릴 때마다 두렵습니다.

 우리들 밥상에 올려질 밥과 반찬도 걱정이지만, 우리 삶에 골고루 영향을 끼치는 날씨도 걱정입니다. 여름인데 덥지 않아서 걱정이고, 여름인데 햇볕이 뜨겁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모기가 온 집안을 휘젓지는 못하고 바퀴벌레도 좀처럼 나다니지 않아서 한숨을 돌리지만, 이 같은 날씨가 우리 몸에, 또 아기 몸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겹겹이 걱정입니다.


.. 이남이는 경상남도 마산 진동에서 나고 자랐다. 집에서 걸어가면 바다 푸른 물결을 볼 수 있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방파제에 나란히 앉으면 고깃배가 드나들었다. 부두에서 배를 타고 앞바다 섬에도 가 보았다. 부두로 가기 전 지나치는 곳엔 제법 큰 염전이 있었다 ..  (16쪽)


 지난 토요일, 목포에서 일하는 형이 동생을 보러 인천 나들이를 왔습니다. 하루밤 함께 묵고, 이튿날 아침에 슬슬 골목길을 거닐었습니다. 형은 이 골목을 아주 오랜만에 걷기도 하고 많이 바뀌어서 못 알아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동인천역에서 내려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데 중앙시장에서 헤맸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헤맸습니다. 골목골목 늘어서 있던 집들이 죄 사라지고 길이 넓어졌거든요. 없던 찻길이 생기고 없던 넓은 길이 늘어났거든요. 극장은 한 군데 빼고 모조리 문을 닫았고, 극장을 둘러싸고 있던 온갖 집과 길도 싹 바뀌었습니다. 저잣거리도 바뀌었습니다. 다만, 섣불리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들에는 예전 자취가 남아 있어요.

 동인천역 뒤편, 송현동 골목길마다 활짝 피어 있는 꽃을 구경하며 거닐던 때입니다. 조그마한 노란 꽃이 꽃그릇에 줄줄이 피어 있습니다. 오이꽃일까, 생각하며 다가갑니다. 오이꽃이 아닙니다. 토마토꽃입니다. 이야, 이렇게 집에서 토마토를 꽃그릇에 심어서 기르기도 하는구나.

 이제 막 어른 새끼손톱 만하게 열매가 영글기도 하는 토마토. 아직도 꽃을 마알갛게 피우기도 하고, 하나둘 열매가 맺기도 하고. 그래, 5월 끝머리부터 6월 첫머리에 오이꽃도 피고 호박꽃도 피고 참외꽃도 피고 수박꽃도 피지.


.. 그 일본사람은 이남이에게 ‘하나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남이는 왜 ‘이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하나코’가 되어야 하는가. 일본사람은 자신을 ‘주인’이라 부르게 했다. 일본사람을 ‘주인’이라 불러야 하는 조선 여자들은 ‘노예’가 되었다. 도착하고서야 이제 분명해졌다. 조선 여자들은 일본군인의 성노예로 이 먼 곳까지 강제로 끌려온 것이다 ..  (32∼33쪽)


 응? 그러고 보니, 정작 오이며 참외며 수박이며 토마토며, 꽃필 무렵은 유월 앞뒤인데. 커다란 할인매장에는 철없이 늘 토마토가 있었고 오이가 있었잖아. 저잣거리에 참외가 모습을 드러낸 지도 거의 석 주가 되었고, 수박도 두어 주 앞서부터 많이 나왔는데.

 철에 따라 움직인다면, 철에 따라 피고진다면, 참외며 수박이며 이제 막 꽃을 피울 때인데. 토마토도 이제부터 꽃이 필 때인데. 제철을 따지자면, 바로 이맘때 딸기를 먹고 살구를 먹고 복숭아를 먹어야 하지 않어?

 그런데 우리는 포도를 언제 먹지? 딸기가 어느 날부터 저잣거리에서 싹 사라졌지? 밤은 언제 거두지? 능금과 배는 언제 열매가 익어서 언제 우리가 먹었지?


.. 그들에게 조선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이남이는 일본군인에게 성욕을 배설하는 도구였을 뿐이었다 … 프놈펜에 도착해서 처음 이틀은 쉬었다. 단지 군인들이 안 왔을 뿐이지 그것은 휴식이 아니었다. 일본병원에 갔다. 성병검사. 그 검사는 여자들을 위한 검사가 아니었다. 성병검사는 일본군인들을 위해서였다 … 그 높은 사람은 이남이의 부탁쯤 군복에 살짝 달라붙은 먼지 털어 버리듯 아무렇지 않게 털어 버렸다. 이남이는 아픈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  (34,38,44∼45쪽)


 모내기는 유월에 했다지만, 요새 유월에 모내기를 한다고 하면 건달농사도 아닌 바보짓을 한다고 할 테지. 보리를 심거나 거두는 때, 밀을 심거나 거두는 때, 수수를 심거나 거두는 때, 옥수수를 심거나 거두는 때가 도무지 어찌 되었나. 지금 우리들은 쌀도 먹고 보리도 먹고 율무도 먹고 겨자도 먹고 파도 먹고 감자도 먹고 고구마도 먹고 양파도 먹고 빨간무도 먹고 고사리도 먹고 시금치도 먹고 냉이도 먹고 고들빼기도 먹고 두릅도 먹고 하지만, 정작 어떤 나물이 어느 때에 어디에서 나고 자라는지, 정작 어떤 푸성귀를 어느 때 캐거나 따거나 뜯는지를 알고나 먹고 있으려나.

 아니, 우리들한테는 딸기가 언제 어떤 빛깔 꽃을 피우는지, 딸기가 덩굴풀인지 아닌지, 딸기가 한해살이인지 두해살이인지 여러해살이인지, 딸기가 언제 익어 언제 따서 먹는지는 몰라도 될는지 모를 일일는지도.

 가게마다 딸기값이 어떻게 다른가만 알아도 넉넉한지도. 어느 가게에서 사는 딸기가 크고 달고 좋더라, 하는 정보만 알면 그만인지도. 여름이 아닌 봄에 먹든, 여름이 아닌 가을이나 겨울에 먹든 알 바 없는지도.


.. 세상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는 누나 이남이. 남동생 이태숙은 그렇게 누나를 그리워하다 92년에 암으로 세상을 떴다. 56년 아버지, 72년 어머니, 79년 언니 덕이가 그립던 동생 소식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남동생마저 갔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이남이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65쪽)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 동무들이 공부를 지루해 하고 모두 축 처져서 힘들어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까, 담임선생님이 당신 옆지기가 아이 낳을 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한겨울이었는데, 입덧을 하면서 딸기를 먹고 싶어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추운 겨울날 어디에서 딸기를 얻겠습니까. 요즘이라면 아무 걱정이 없을 터이나, 1980년대 국민학교 교실에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입덧을 하면 여자도 걱정이지만, 남자도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느라 참 힘들겠구나. 그런데 나는 나중에 커서 옆지기가 한겨울 밤에 딸기를 먹고 싶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아이 밴 여자가 입덧을 한다 할지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어떤 열매도 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안에서 키우지 않는 먹을거리라 해도 돈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게다가 금세 사들일 수 있습니다.

 한겨울에도 배를 먹을 수 있거든요. 여름날 쌀 떨어질 걱정을 누가 합니까. 식량자급율이 20%를 가까스로 넘는 한국땅이지만, 밥이 없어서 못 먹는 일이란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밥을 굶을 뿐입니다. 돈이 없을 때에만 못 사고 못 먹고 못 즐길 뿐입니다.


.. 우리 나라에 캄보디아말을 전공한 사람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어서 훈 할머니의 속마음을 쉽게 헤아리기는 힘들었다. 말로 통할 수 없기 때문에 할머니는 눈빛, 표정, 몸짓을 잘 지켜봐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캄보디아사람이 되어야 했던 훈 할머니. 그래서 더욱더 캄보디아말만 열심히 했을 할머니를 떠올리면 ..  (115∼116쪽)


 ‘미친소’ 고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나 옆지기는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거의 사먹을 일이 없어서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 걱정은, 우리들이 늘 먹는 곡식과 푸성귀를 마음놓고 얻거나 먹을 수 없는 대목, 또 싱싱한 푸성귀 구경이 어렵다는 대목에 있습니다. 우리 형편은 닿을 수 없어서 손수 논밭을 일구지 못합니다. 농약과 비료 안 쓴 곡식값이 비싸다고 하나, 제가 느끼기로는, 지금 우리네 곡식값은 너무나도 낮은 헐값입니다. 유기농 곡식을 사먹는 일은 조금도 비싸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외려 싸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씨눈이 살아 있는 누런쌀을 먹고 싶으나, 우리처럼 쌀깎기를 거의 안 한 누런쌀을 좋아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이런 누런쌀 얻기가 쉽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눈밝히고 귀밝히면서 좋은 곡식을 얻어서 먹는다 한들, 나날이 날씨가 미치고 물과 바람이 어지러워지고 말면, 제아무리 유기농이라고 하는 곡식도 오롯이 살아 있는 밥이 되기 힘듭니다. 도시뿐 아니라 시골 구석구석 공장이 들어서잖습니까. 산골짜기 안쪽까지도 아스팔트가 놓이잖습니까. 손으로 짓고 똥오줌으로 거름내어 짓던 농사가 자취를 거의 감추어 버렸잖습니까. 날마다 똥오줌 안 누는 사람이 없건만, 그 어마어마한 똥오줌이 거름이 아닌 쓰레기가 되어 하수구로 흘러들며 물을 더럽히고 자원을 헤프게 버리는 한편, 쓸데없는 데에 시설투자와 건물짓기가 끊이지 않잖습니까.

 ‘미친소’ 고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나라 땅에서는 이 많은 도시사람들 밥상을 채울 수 있을 만큼 고기소를 기르기 어렵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어쩌다가 한 번 먹는다고 한다면 한국땅에서도 고기소를 기를 수 있을 테지요. 그러나 한 주에 한 번도 아닌, 거의 날마다 고기를 밥상에 올려 버릇하고, 술안주로 삼는 우리들 삶이라 한다면, ‘미친소’ 고기가 아닌 ‘한국땅 소’ 고기라 하더라도 항생제와 사료로 자라는 소고기일밖에 없어요. ‘미친소’ 고기가 왜 ‘미친소’ 고기가 되었겠습니까. 하루치 사료 값이라도 줄이려고 성장촉진제를 먹이고 갖가지 ‘질병 막는 항생제’를 먹입니다. 사료에는 처음부터 이러한 항생제와 호르몬제를 담아 놓고 내다 팝니다. 우리는 고기를 먹는다기보다 항생제를 먹는다고 해야 옳습니다.


.. 할머니는 누가 누군지 모르니 투표 안 하겠다고 하셨다. 다음날 잔니에게 전화가 왔다. 투표하고 왔다고. 신문사, 방송사 기자들이 집에 왔었노라고. 할머니는 집에 계시고 싶어했는데 어쩔 수 없이 갔다고. 한 회원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해서 방송사에 전화를 했다. “할머니가 정말 투표하고 싶으셨을까요?”라고 물었더니 “취재를 하는 것만도 관심을 갖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단다. 관심이란 어떤 것일까? 우린 정말 어떤 것을 보고 관심이라고 부르는 걸까? ..  (126쪽)


 한여름도 아닌 5월부터 참외를 먹으면서 속이 찜찜했습니다. 여름도 아닌 3월부터 딸기를 먹으면서 속이 께름했습니다. 나라밖에서 들어온 오렌지를 먹고 바나나를 먹으면서, 시큼달콤한 석류를 먹으면서, 더구나 한국땅에서 석류를 거두어들이지도 못하면서 한국땅에 넘쳐나는 ‘석류 마실거리’를 이웃사람한테 얻어마시면서 속이 껄쩍지근했습니다.

 참말로,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하느님의 눈물》에 나오는 토끼처럼, 바람을 먹고 이슬을 마시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 노릇인가요. 햇볕을 쬐고 물만 마시고 바람을 들이쉬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사람인가요. 사람으로 태어난 몸, 어쩌는 수 없이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으면서 살아갈밖에 없나요.

 철을 잊건 말건, 공기가 나빠지건 끔찍해지건, 흐르는 물을 마실 수 없고 수도물도 바로 마실 수 없으니 끓이거나 정수기를 집집마다 달아 놓고 마셔야 하건 말건, 이리하여 날마다 더더욱 찌푸려지고 미쳐가는 날씨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우리 삶은 돈벌이만 잘할 수 있으면 그만인 셈인지요. 몸이 무너지고 망가지더라도 몇 손가락으로 꼽히는 대학교에 동무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서 들어갈 수 있으면 즐거운 노릇인지요. 참사람 되는 매무새를 익히지 않더라도, 어릴 적부터 한자 지식과 영어 지식을 머리속에 많이 집어넣고 있으면, 늙어서 죽는 날까지 걱정 하나 없을는지요.


.. 고향에 와서는 캄보디아에 있는 자식들이 못내 눈에 밟혔고, 그래서 다시 돌아간 캄보디아에서는 다시 이 땅이 그리웠다 ..  (138쪽)


 촛불집회로 그나마 ‘미친소’ 고기 하나라도 막아 보려는 그 발버둥 같은 몸부림조차 주먹질과 몽둥이질과 물뿜질과 발길질과 방패질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야 하는 이 나라입니다. 이 땅을 어찌 ‘큰 한겨레인 민주 나라(大:크고 韓:한겨레이며 民:백성이 임자인 國:나라)’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이라는 책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이름은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이지만, 정작 이 책에서 다루는 “버려진 조선의 처녀”는 오직 한 사람, 캄보디아에서 살고 있던 ‘훈 할머니(이남이)’입니다.


.. 피해자들을 침묵에 가두고 싶어했던 건 어쩌면 일본 정부만이 아니다. 당연히 피해자들을 대신해 싸워야 할 정부, 그리고 이 사회에 사는 우리도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 건 아닌가 ..  (80쪽)


 누군가 훈 할머니가 캄보디아에 살고 있음을 ‘찾았다’고 했지만, 누군가 찾지 않았어도 할머니는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못 보고 있었을 뿐, 아니 보려고 안 했을 뿐입니다.

 가만히 보면 그래요. 훈 할머니를 비롯해서 세계 곳곳, 아니 아시아 곳곳에는 당신들 어린 날 받은 깊은 생채기를 가슴에 끌어안고 조용히 살다가 숨을 거둔 할머님들이 많습니다. 우리들은 이 숫자를 제대로 모릅니다만, 한둘이나 이삼백이나 삼사천이 아닙니다. 사오만도 아닙니다. 얼추 이십만이라는 숫자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나라안에서도, 또 나라밖에서도 당신들 아픔과 괴로움을 선뜻 털어내지 못합니다. 정작 눈물을 흘리며 아픔을 달래면서 새힘을 얻어야 할 피해자는 할머님들인데, 할머님 둘레에 있는 사람들이 할머님을 고이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일본 제국주의자와 군인이 먼저 이 나라 여자를 괴롭혔다고 하겠습니다만, 일본 제국주의와 군인이 물러간 자리에서 이 나라 사람들(그 가운데 남자들)은 무엇을 했던가요.


.. 할머니가 자신을 되찾은 날은 77년 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날이다. 훈 할머니는 가족을 찾았는데, 할머니가 찾아야 할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범죄를 인정했는가.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처벌을 받았는가. 당시 끌려간 아시아 20만 일본군 ‘위안부’를 향해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했는가. 일본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알렸는가. 진실을 알렸는가 ..  (89쪽)


 저는 꿈꾸기를 좋아합니다. 꿈을 꾸고 난 다음에는 제 깜냥껏 조금이나마 움직여 보고자 애써 봅니다. 요즈음 꾸는 꿈 하나는 이렇습니다. 제 몸은 인천 배다리라는 곳에 있고, 이곳에서 동네사람하고 힘에 벅차도록 인천시 개발업자 공무원하고 싸워야 할 일이 있어서 멀리까지 힘을 북돋우거나 거들지는 못합니다만, 광화문이나 청계천 둘레, 또 시청 둘레에서 촛불을 들고 한목소리를 내는 분들이, 수요일 하루쯤은 한두 시간이어도 좋고 삼십 분이어도 좋으니, 일본 대사관 앞에 함께 찾아가서 할머님(일본군 성노예로 몸과 마음이 다친 할머님)들과 함께 ‘수요집회’를 한 다음, 다시 촛불집회 터로 돌아가 보면 어떨까 하고 꿈을 꾸어 봅니다.


.. 한 이산가족의 애달픔으로 바라보지 말자. 잠시 흐르는 뜨거운 눈물로 우리 자신을 위로하지 말자. 이 눈물의 현장에 일본 제국주의를 불러다 놓자. 역사를 왜곡하며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는 일본을 불러다 놓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다 끝났다고 재를 뿌리는 정부를 갖다 놓자. ‘다 지나간 일, 좋게 좋게’라고 하는, 역사를 잊은 우리를 불러다 놓자 ..  (97쪽)


 촛불집회를 하려고 날마다 꾸준하게 광화문에 모이시는 분들이라면, 목요일에는 탑골공원 앞으로 잠깐 걸어가서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분들하고 목요집회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수요일에는 ‘왜 저 할머니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 해도 넘는 긴 세월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저렇게 싸우시나’ 하고 생각해 보고, 목요일에는 ‘왜 저 아주머니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렇게 국가보안법 문제를 외치나’ 하고 생각해 보는 셈입니다.


.. “내가 살아온 것, 어떻게 다 말로 해요. 말을 하려면 자꾸만 눈물이 나요.” ..  (143쪽)


 이명박 대통령과 이 나라 공무원과 수입업자들이 ‘미친소’이든 ‘미치지 않은 소’이든 자꾸자꾸 들여오는 까닭과 뿌리는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멀리 있지도 않아요. 바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 둘레에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못 느끼거나 안 돌아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조금만 둘러보면 됩니다. 살며시 마음을 기울여 보면 됩니다. 촛불이 횃불이 되고 횃불이 우둥불이 되도록 손에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면 됩니다. (4341.6.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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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가나아트갤러리 편집부 엮음 / 가나아트갤러리 / 1994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알라딘 목록에도 없고, 교보 목록에도 없기에, 아무 책에다가 걸어 놓을 수밖에 없다.

 사진이라도 보시라고, 겉그림을 긁어서 붙인다.)





 이응노를 모르는 한국, 이응노를 모르게 하는 한국
 [사라진 책 25] 이응노,박인경,도미야마 다에코,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



- 책이름 :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
- 이야기 나눈 이 : 이응노, 박인경, 도미야마 다에코
- 엮은이 : 도미야마 다에코
- 옮긴이 : 이원혜
- 펴낸곳 : 삼성미술문화재단(1994.4.30.)



 (1) 사라진 책 만나기란


 판이 끊어진 책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는지 생각해 봅니다. 헌책방에서? 헌책방에 간다고 해도, 판이 끊어진 책이 ‘팔렸던 부수’만큼만 있을 테고, 또 ‘그 책을 사 갔던 사람이 집에 모셔 놓지 않고 내놓아 주어야’ 만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서 바라던 책 하나가 헌책방에 들어왔다손 치더라도, 그 책이 들어온 그날 내가 그 헌책방에 찾아가서 만나지 않는다면 헛일입니다. 다른 책손이 먼저 알아보고 가져가면 물거품입니다.

 이응노(1904∼1989), 박인경(1926∼ ), 도미야마(1921∼ ), 이렇게 세 사람이 프랑스에서 두 달에 걸쳐서 만나서 나눈 이야기, 그러니까 당신들 살아온 이야기와 그림 이야기를 풀어낸 책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를 헌책방에서 뜻하지 않게 만났습니다. 천천히, 아주 더디게 곱새기면서 읽습니다. 보기 드문 책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으로, 그러나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책이구나 싶은 아쉬운 마음으로.

 반 해에 걸쳐서 야금야금 읽어냅니다. 책을 다 읽은 뒤, ‘이 책을 다시 만날 수 있나, 아니, 도서관에는 이 책을 갖추고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전국 도서관 찾아보기’를 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딱 한 권 뜹니다. 이곳에 가면 이 책을 빌려서 읽을 수 있군요. 아예 없지는 않네요. 그러면, 대전에 있는 이응노미술관에 가면 구경해 볼 수 있을까요? 아니, 구경을 넘어서 두고두고 읽을 수 있도록 한 권 살 수 있을까요?

 새책방에서 만날 수 있는 이응노 선생 책은 몇 가지 없습니다. 목록에는 여러 권 나오지만, 품절과 절판이라는 딱지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어린이책 한 가지만 있는 셈입니다. 그나마 어린이책으로 한 권이라도 있으니, 아이들이 ‘이응노라고 하는 그림쟁이 삶’을 살짝이나마 맛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권으로 이응노 님 삶을, 그림세계를, 발자취를 찬찬히 헤아리거나 돌아볼 수 있을는지요.

 작은 발자국을 남겼든 굵직한 발자국을 남겼든, 가까이하기에느 그지없이 어렵겠구나 싶은 한편으로, 그림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은 이응노라고 하는 그림쟁이 발자취를 어떻게 짚어 나갈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대학생들이 논문을 쓴다고 할 때에는 얼마나 많은 자료를 갈무리해서 쓸 수 있을는지요. 그나마 그림은 제대로 살펴보고 쓸 수 있을는지요.


 (2) 우리 곁에 있는 그림이란, 또 그림책이란


 ‘이응노’ 이름을 내건 미술관에서 내부직원이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는 ‘이응노 선생 그림 도둑질’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홀어미 박인경 님은 지아비 이응노 님 그림 삼백 점을 믿고 맡기려고 하다가 주춤했다는 소식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된다면, 이응노 님 그림세계를 좀더 두루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맛보기는 한결 어려워지기만 하는 셈인지.

 이렇든 저렇든, 이응노 님은 당신을 기리는 미술관이 만들어졌습니다. 복받은 몸입니다. 이 나라에는 제대로 기림을 못 받은 채 숨죽이는 그림쟁이가 많잖아요. 기림을 받더라도, 여느 사람들이 넉넉히 당신들 그림세계를 돌아볼 수 있도록 즐길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어 있지 않잖아요.

 서울 아닌 곳에서 느긋하게 그림을 즐길 만한 곳은 어디에 얼마쯤 있을까요. 도시에서는 중심지 말고 변두리에서도 그림을 즐길 수 있을까요. 시골마을에서는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살풋이 그림을 맛볼 수 있을까요. 학교에서는, 그러니까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얼마나 그림을 자기 삶 가까이에 놓고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학교마다 ‘미술 수업’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 미술 수업 때에는 어떤 그림을 살펴보면서 배우고 자기 스스로 그림그리기를 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는가요.

 오늘날 우리 세상은 엄청나게 많은 사진과 그림에 들러싸여 있습니다. 글만 담는 책은 아주 드뭅니다. 사진이 없으면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아이들 이야기책에도 그림을 잔뜩 곁들이지 않으면 팔기 어렵습니다.

 어린이 그림책은 수도 없이 쏟아집니다. 어린이 그림책에 그림을 담는 새로운 그림쟁이는 날마다 태어납니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가 있고, 셈틀 화면을 보며 그리는 이가 있습니다.

 그림쟁이를 이야기하는 책도 무척 많습니다. 비록, 거의 모든 ‘그림을 이야기하는 책’은 서양 그림쟁이 몇몇 사람을 다루는 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한국 그림을 이야기하는 책’조차 역사책에 오르내리는 몇몇 사람을 다루는 쪽으로 몰려 있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진과 그림에 둘러싸인 우리들은, 또 온갖 이야기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우리들은, 사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림을 어떻게 헤아리고 있습니까. 자기 마음에 와닿는 사진이란 무엇이며, 자기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이란 무엇이라고 받아들입니까.

 넘치는 사진과 그림이지만, 가슴을 울리는 사진과 그림은 안 넘치다 못해 모자라지는 않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자기 스스로 가슴을 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유행에 따라서 몸이 굳어지거나 흔들린 탓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삶을 담는 예술에서 멀어지고, 예술에 담는 삶이 사라지는 오늘날, 우리가 마음 느긋하게 즐기는 그림이나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고 자꾸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거나 우리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그림쟁이는 누구이고, 이분들 그림을 얼마나 손쉽게 마주할 수 있을까, 하고 거듭거듭 생각하게 됩니다.


 (3) ‘이응노를 알 수 없게 하는’ 한국땅에 남아 있는 말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를 읽는 동안 제 가슴에 와닿았던 대목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이 가운데 몇 대목을 옮겨 봅니다. 생각있는 어느 분이 있다면 앞으로 언제가 되더라도 이 책을 되살려 주시겠지, 하고 믿으면서. 이 책 하나 헌책방에서 캐내는 분은 캐내는 분대로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고, 끝내 못 찾아내는 분은 못 찾아내는 아쉬움을 씁쓸히 곱씹더라도 이 몇 마디 말이라도 만나보시길 바라면서.


[도미야마] 정말 놀라셨겠군요. 감쪽같이 속인 납치극이에요.
[이응노] 내 나라니까 철석같이 믿은 거지요. 난 뭣 땜에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조사하던 사람 중 하나가, “들어야 할 얘기가 있으니까 여기 오게 한 거다. 그러니 솔직히 다 털어놓으라.”고 하더군요. “도대체 뭘 듣고 싶은 겁니까?” 그랬더니 커다란 나무몽둥이를 보여주었는데, 고문할 때 쓰는 거였지요. “이것 봐요, 이 몽둥이로 한 번 맞았다가는 목숨 건지기도 힘들어요. 여긴 프랑스가 아닙니다. 노인네라고 봐주는 줄 알아요?”라고 소리치며 겁을 주더군요. 하지만 나는 정말 뭣 땜에 그러는지 몰랐었지요. 그러자 KCIA가 “당신, 평양 갔었지?” 그러는 겁니다. “간 적 없다”고 하자, “안 되겠군. 맞아야 털어놓을 거요?”라며 협박을 하더군요. 가지도 않았는데 뭘 털어놓느냐, 그렇다면 증인을 불러내라고 하니까, 동베를린엔 왜 갔느냐, 정치자금은 얼마나 받았느냐, 무엇에다 썼느냐, 누구누구에게 얼마나 건네줬느냐, 5만 달러냐, 10만 달러냐 등등, 이런 식의 취조가 저녁 7시부터 한 새벽 2시쯤까지 계속되었어요 ..  (19∼20쪽)

[이응노] 옥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림쟁이인 내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부터는 간장을 잉크 대신으로 화장지에 데생을 하기 시작했지요. 또 밥알을 매일 조금씩 아꼈다가 헌 신문지에 개어서 조각품도 만들기 시작했어요 ..  (22쪽)

[도미야마] 선생님의 인생에서 옥중 생활은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요?
[이응노] 나는 형무소에 수감될 때까지는 정치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이었어요. 일제 때는 한국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생각도 했지만, 해방 후엔 오로지 그림만이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형무소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비리를 저지르고 들어오는 부자의 수감 생활이란, 그야말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외떨어진 독방에서 마치 호텔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매일같이 불고기가 나오고 외제 고급 위스키를 마시고, 간수들도 그 덕을 보니까 그들은 간수들을 마치 종 다루듯 했지요 ..  (25쪽)

[이응노] 형무소야말로 사회를 배우게 해 준 학교였답니다. 한국사회는 사람들을 나쁜 길로 가게끔 만들어요. 아니, 한국이라기보다는 미국을 등에 진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금권정치의 부패겠지요. 일본인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일본엔 민주주의가 있잖습니까? ..  (28쪽)

[도미야마] 근대로 향한 첫걸음은 그런 가부장적인 가정과의 대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일본은 그런 면에서는 훨씬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이응노] 유교적인 가족제도는 아직도 남아 있지요.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결혼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었고, 그보다 내 자신의 인생에 관한 것을 차츰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일본말을 하고 서양식 양복도 입고 있어서 내가 보기에 시대를 앞서가는 신사처럼 보였어요. 그런 모습이 부러워서가 아니라, 나는 이대로 있어도 좋은 것인가라는 자문을 수없이 하게 되었지요 ..  (55쪽)

[이응노] 그때서야 내가 왜 그동안 낙선만 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 작품이 입선을 하기는 했지만, 그 7년 동안 내 그림은 완전히 죽어 있었던 겁니다. 나는 선생님의 그림을 모방만 하고 있었던 거지요. 대나무 가지 치는 것도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애쓰고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좋아, 입선감이다.” 하셨더라도 심사위원은 여러 사람이었으니까요 ..  (69쪽)

[도미야마] 저도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고, 결국 그림을 택했기에 자식 둘과 함께 전쟁 뒤의 참담하고 궁핍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자로서도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는 길은 있어서, 그럭저럭 살아오게 된 것이지요.
[박인경] 나는 지금 여류작가 박경리 씨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고 있습니다. 김지하 씨의 장모 되는 사람의 글인데, 정말 훌륭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서 우리 나라 여류화가들은, 나를 포함해서입니다만, 사상성이나 문제의식이 없는 것 같아요. 애를 쓰지 않아요 …… 동양화 수업이란 것이 그야말로 전통적인 모방기술에 불과했으니까요. 예술이란, 진정한 전통이란 이런 것이 아닌데, 감동도 창작도 타오르는 열정도 없는, 마치 타고 남은 재 같은 분위기였답니다 ..  (94쪽)

[도미야마] 저도 그렇답니다. 그 시대에 저는 아직 병아리 화가였고 미술학도였으니까 전쟁화를 그리지 않아도 되었지요. 그러나 만약 생활고에 시달리는 화가였다면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자문자답을 해 보게 됩니다. 부양가족을 둔 가난한 화가는 소년잡지에 〈황취(荒鷲) 전투도〉 같은 것을 마지못해 그리곤 했지요. 반면에 부유한 화가는 값비싼 프랑스제 물감을 쌓아 놓고 아틀리에에서 우아하게 정물화 같은 것을 그리고 있었어요. 전쟁화를 그렸느냐의 여부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전쟁에 대한 책임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서 그 후의 출발점으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쟁을 고무시키는 것에 협력한 화가들이 스스로 그것을 감추고 오히려 화폭에 민족적인 소재를 담는 것으로 대가의 자리에 앉아 있거든요 ..  (102쪽)

[이응노] 국전이란 대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을 위한 전람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 나는, 혼자 버티면서 국전을 비판했지요. 정치 세계든 미술 세계든 간에 모두 사기꾼 같은 자들이 멋대로 설치고 있었어요.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  (120∼121쪽)

[이응노] 1955년에 그린 〈취야〉는 자화상 같은 그림이었지요. 그 무렵 자포자기한 생활을 하는 동안 보았던 밤시장의 풍경과 생존경쟁을 해야만 하는 서민 생활의 체취가 정말로 따뜻하게 느껴졌답니다. 1954년에 그린 〈영차, 영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내는 소리가 있는데, 서까래 하나를 4명이서 들처메고 ‘영차, 영차’ 입을 맞추면서 옮겨가고 있었지요. 역시 나는 권력자보다는 약한 사람들,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쪽에 관심이 갔고, 그들 속에 나도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  (144쪽)

[이응노] 옛날 사람의 문자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따라서 흉내내기만 한다면 그건 단지 모방에 지나지 않아요. 만약 혁명가라면 새로운 해석을 통해 창조적인 자기 것을 만들어 표현하겠지요 …… 그렇지요, 고전의 기술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전으로부터 무엇을 끌어낼 것인가 하는 정신과 사상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동양화는 아직도 옛날사람들이 했던 것 그대로 틀만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아요 ..  (145, 146쪽)

[이응노] 그림이란, 벽에 거는 장식품으로만 그쳐서는 안 돼요. 사회의 모습, 순수한 인간에 대한 애정……, 이런 피끓는 발언이 없어서는 안 되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그림에 생명이 깃들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167쪽)

[이응노] 그게 바로 파리의 한국인과 베를린의 한국인의 차이점이지요. 파리에도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와 있지만, 그들은 모두 돈 많은 집 자식들이고, 또 귀국 후의 일을 생각해서인지 민주화운동 같은 것에는 일절 관여하지를 않아요 ..  (170쪽)

[이응노] 내 인생은 36년 간을 일제 지배하에서 보냈고,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분단국가와 독재정권 속에서 내 나라에도 돌아갈 수 없는 상태로 30년을 지내 왔어요. 우리들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 발표하면 박해를 받게 되니, 표현의 자유도 없는 겁니다 ..  (175쪽)



(4341.5.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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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봉숭아
박재철 글 그림 / 길벗어린이(천둥거인)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처럼 큰길에서 태어나는 아기도 있을까?’
 [그림책이 좋다 46] 박재철, 《행복한 봉숭아》



- 책이름 : 행복한 봉숭아
- 글ㆍ그림 : 박재철
- 펴낸곳 : 천둥거인(2004.8.12.)
- 책값 : 8000원



 (1) 골목과 시멘트와 풀


.. 깜깜한 밤이었어요. 별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큰길에서 조그만 싹이 돋았어요. 봉숭아 씨앗이 눈을 뜬 거예요. 봉숭아는 기쁨에 겨워 중얼거렸어요. “세상은 참 아름답구나. 얼른 자라서 예쁜 꽃을 피워야지.” 그런데 바로 옆에서 활짝 핀 꽃들이 퉁명스레 말했어요. “쯧쯧, 그런 더러운 데서 어떻게 꽃을 피운다는 거야?” 봉숭아는 기분이 나빴지만 못 들은 체했어요. ‘내일은 꼭 좋은 일이 생길 거야.’ ..  (4쪽)


 도시 골목길은 어디를 가든 길바닥이 시멘트로 뒤덮여 있습니다. 예전에는 모두 흙길이었을 텐데, 비 한 번 오면 질척거리고, 차가 다니기 나쁘다고 해서 시멘트로 모두 발라 놓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시멘트로 발라 놓은 길은 걸어다닐 때 신발에 흙이 묻지 않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기에 괜찮고 차가 다니기에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멘트 골목길에서 넘어지면 무릎이 팍팍 깨집니다. 흙길에서 넘어지면 살짝 까지기만 할 뿐 무릎이 깨질 일이 없지만, 시멘트길에서 넘어지면 크게 다쳐요. 아스팔트길에서 넘어질 때에도 크게 다칩니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이는 길은, 신나게 뛰놀거나 마음 가벼이 어울릴 만한 자리가 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멘트길에서는 풀이 고개를 내밀 수 없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틈 하나 찾아내어 고개를 내미는 풀이 드물게 있지만, 씨앗이 떨어질 틈도, 떨어진 씨앗이 마음껏 줄기를 올릴 틈도 없습니다. 그래도 그 좁고 딱딱한 틈바구니에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려 꽃까피 피워올리는 풀을 보면, 자연이란 대단하구나 하고 느끼는 한편으로, 우리 사람들이 참 몹쓸 짓을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골목길을 거닐면서 집집마다 마련한 크고작은 꽃그릇을 실컷 구경합니다. 어쩌면, 흙길이 사라진 골목길 한쪽에서 크고작은 꽃그릇을 키우는 분들은, 떠나버린 흙을 그리워하면서, 사라지거나 숨어 버린 흙을 애달파하면서 꽃그릇을 키우지 않는가 싶습니다. 시멘트만 가득한 도시에서 지내는 아쉬움을 달래고, 당신들 딸아들이 비록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서 도시에서만 살아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흙내음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꽃그릇 하나에 담지 않느냐 싶습니다.

 당신들이 좋아서 흙을 퍼 오고, 빈 광주리나 바구니 들을 주워 모아 꽃그릇으로 삼고, 예쁘다고 느끼니 날마다 따로 물을 주고 북을 돋우면서 돌봅니다. 그런데 이 사랑스러운 꽃그릇을 집안에만 모셔 놓지 않아요. 집안에 모셔 놓는 꽃그릇도 있으나, 시멘트와 벽돌로 높인 울타리에도, 옥상에도, 골목길 한쪽에도 가지런히 늘어놓거나 모아 놓습니다. 날마다 돌보는 이 꽃그릇을 당신들 스스로도 즐기지만, 이웃사람도 즐기고, 이웃 아닌 길손도 지나가면서 즐깁니다.

 문득, 예전 도시 골목길은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제가 골목길에서 부모님하고 살던 때는 1970년대일 텐데 그때 모습은 거의 떠오르지 않습니다. 너무 어려서. 하는 수 없이 책에 기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김기찬 님이 1970년대부터 담은 서울 골목길 사진을 《골목안 풍경》에서 뒤적여 봅니다. 김기찬 님은 거의 ‘사람 중심’으로 찍어서, 골목길 둘레가 넓게 드러나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이사이 깃들어 있는 ‘사람 없는 한갓진 골목길 한켠’을 담아낸 사진에는 꽃그릇이 소담하게 모여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사람들 북적이는 골목 한쪽에는 꽃그릇이 거의 안 보입니다. 사람들 발길이 조금 뜸하다고 할 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크고작은 꽃그릇이 보입니다.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골목과 조금 넓은 골목에는 꽃그릇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만 드나드는 호젓한 골목길에는 어김없이 꽃그릇이 보입니다. 손바닥 만한 집 안뜰에도 웬만한 집마다 꽃그릇이 있습니다. 푸성귀를 기르는 꽃그릇이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구경하는 꽃’만 심은 꽃그릇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꽃그릇 도둑이 있기 때문에 호젓한 안쪽 길에만 놓는다고 느낍니다. 차에서 내뿜는 배기가스 때문에라도 사람 발길 잦은 데에는 꽃그릇을 못 놓을 테고요. 2008년 5월 28일, 바로 지금 제가 사는 인천 동구 금창동 골목길에서 보는 꽃그릇과 1970∼80년대와 90년대 서울 골목길 한쪽에 놓인 꽃그릇은 가짓수나 크기나 생김새가 비슷비슷합니다.




 (2) 외로운 봉숭아 한 포기


.. 다음날이 되어도 단이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봉숭아는 이파리가 타들어 가는 듯 아팠어요. 그 다음날에도 단이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이파리들이 누렇게 시들어 떨어졌어요. 봉숭아는 몸이 축 늘어졌어요 ..  (20쪽)


 그림책 《행복한 봉숭아》를 펼칩니다. 《행복한 봉숭아》에 나오는 어린이 ‘단이’는 길에서 힘겹게 뿌리를 내리고 가까스로 잎을 틔운 봉숭아를 살며시 뽑아다가는 빈 우유곽에 옮겨심고 잠자리맡에 놓고는 사랑해 줍니다. 봉숭아쯤 되면, 꽃집에서 얼마든지 씨앗을 받아서 심을 수 있고, 또 다 자란 봉숭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단이는 사람들 북적거리는 길 한복판 틈바구니에서 어렵게 목숨줄 붙이고 있는 봉숭아를 알아봅니다.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면서 물을 주고 힘을 돋우고, 봉숭아도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유곽이 좁아집니다. 단이와 어머니는 큰 그릇으로 봉숭아를 옮겨 줍니다. 이제 방에 놓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고 느껴서 창가에 놓고는 해바라기를 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단이는 봉숭아를 내버려 두고 어딘가로 떠납니다. 방학을 맞이해서 어디 시골집에라도 놀러갔을까요. 나라밖으로 영어 유학을 떠났을까요. 여태 알뜰히 돌보며 가꾸던 봉숭아였는데, 봉숭아 동무를 잊고 이처럼 오래도록 집을 비울 수 있었을까요.

 꽃집에서 얻은 봉숭아가 아니더라도 워낙 길봉숭아였으니, 물을 주며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어도 햇볕을 먹고 빗물을 마시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기나긴 가뭄이 이어진다면, 제아무리 들풀이라 해도 말라 갈 테지만.

 하늘에서 비가 먼저 올 지, 고이 돌보던 단이가 먼저 돌아올 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가운데 봉숭아는 외롭습니다. 그렇지만 외롭고 힘든 가운데에도 꽃을 피우려고 애를 씁니다. 타고난 제 목숨에 따라서, 타고난 제 살아갈 길을 따라서 안간힘을 쓰고, 이 안간힘을 하늘에서 알아주었는지 목마른 봉숭아한테 한 줄기 빗줄기를 선사해 줍니다.

 가까스로 숨을 돌린 봉숭아는 새힘을 내며 싱싱한 꽃잎을 피워올리고, 수많은 벌나비 동무들이 찾아듭니다. 자기를 거두어 준 사람(단이)은 자기를 잊었지만, 혼자힘으로 꿋꿋하게 새 동무를 사귑니다. 아마, 단이가 길 한복판에서 봉숭아를 뽑아서 집으로 옮기지 않았더라도, 더 고단하고 더 힘겨웠을지라도, 봉숭아는 제 깜냥껏 꽃을 피워, 골목길이든 도심지이든 한 귀퉁이에서 사람들한테 꽃내음을 선사하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작은 벌나비한테 쉼터 노릇을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3) 어머니 마음을 품은 봉숭아


.. ‘단이가 내 꽃을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봉숭아는 날마다 마음 졸이며 기다렸어요. 그런데 큰일이 생겼어요. 단이가 엄마 아빠를 따라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  (16∼17쪽)


 그림책 《행복한 봉숭아》를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그림책을 지은 분은 앞머리에, “사랑하는 딸 선화와 어릴 적 봉숭아 물을 들여 주던 셋째 누나에게”라고 적었습니다. 딸과 누나한테 바치는 그림책입니다. 봉숭아잎으로 바알간 물을 곱게 들이던 어린 날 애틋한 이야기를 딸아이한테 보여주고 싶고, 또 자기한테 좋은 이야기를 남겨 준 누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보내고 싶었다고 느낍니다.

 봉숭아 꽃잎 같기도 하고, 손가락에 바알갛게 물든 봉숭아물 빛깔 같기도 한 그림결은 푸근합니다. 어린 봉숭아가 어른 봉숭아로 자라고 마지막으로 씨를 맺는 모습까지 죽 보노라면, 봉숭아 한 가지만 빛깔을 입혔습니다. 가녀린 봉숭아를 알아본 단이 모습마저도 흑백으로만 그립니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그림책을 열 번쯤 보면서도, 스무 번쯤 되넘기면서도 언뜻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서른 번쯤 다시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덮어야지 헤아리던 때, 비로소 느낌이 옵니다. 어린 단이는 어린 봉숭아를 알아본 첫 사람이었지만, 알아보기만 할 뿐 더욱 살뜰히 보듬어 주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단이 탓이라고만 할 수 없이, 단이네 부모님들 탓이 아니겠느냐 싶어요. 어린 단이가 꾸준하게 봉숭아 한 포기를 사랑하며 보듬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부모님 마음씀이 모자라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지금 우리네 부모 된 어른들은 아이들이 ‘길가 자그마한 목숨 하나에도 눈길을 두고 사랑을 쏟도록’ 착한 마음을 길러 주지 못합니다. ‘우리 이웃집 힘겨운 살림살이를 지나치지 않으며 눈길을 두며 어깨동무를 하도록’ 아름다운 마음씨를 북돋워 주지 못합니다.

 아이로서는, 아이다움이 아직 남아 있기에 봉숭아는 알아봅니다. 그러나 봉숭아를 어떻게 돌보면 좋을지, 아니면 봉숭아와 어떻게 동무로 사귀면 좋을지까지는 모를 수 있어요. 이때 곁에서 도움말을 건네며 함께 봉숭아하고 동무가 될 어른(어버이,이웃)이 있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봉숭아는 아기들이 날아가는 걸 끝까지 지켜보았어요. 눈이 사르르 감겼어요. ‘나처럼 큰길에서 태어나는 아기도 있을까?’ 귀여운 단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어요. 봉숭아는 빙그레 웃고는 깊이깊이 잠이 들었어요 ..  (34쪽)


 처음에는 가냘프기만 했던 봉숭아 한 포기는, 고달픔 한 줌과 사랑 한 줌과 외로움 한 줌과 선물 한 줌을 받으면서, 마음과 몸에 고운 열매(씨앗)를 맺고는 조용히 흙으로 돌아갑니다. (4341.5.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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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 포토 라이브러리 6
조나단 콕스 글.사진, 김문호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진찍기란
 [잠깐 읽기 4] 조나단 콕스, 《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


- 책이름 : 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
- 글ㆍ사진 : 조나단 콕스
- 옮긴이 : 김문호
- 펴낸곳 : 청어람미디어(2008.4.15.)
- 책값 : 17000원



 (1) 시간을 들여 배워야 하는 사진


.. 이제 문제는 디지털 카메라를 살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디지털 카메라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다 ..  (14쪽)


 몇 해 앞서, ‘헌책방’을 사진감으로 삼아서 찍는 사람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때 문득, ‘이제는 내가 굳이 헌책방을 사진으로 찍어서 남기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헌책방 사진찍기’는 잠깐 반짝하고는 수그러들었습니다. 헌책방에 와서 책은 안 보고 사진만 찍던 그 많던 사람들은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예나 이제나, 조용히 책을 즐기는 사람만 헌책방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헌책방 사진찍기’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하는 듯, 어디에서나 사진질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부터 늘 사진기를 어깨에 걸쳐메고 다니기는 합니다만, 길을 걸어가는 데에도 사진기를 들이대고 전철에 서서 책을 읽는 데에도 사진기 불꽃을 터뜨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보면서, ‘이 젊은이들이 자기 사진기에 담는 이 엄청난 사진을 어디에 어떻게 쓰려고 할까?’ 궁금했습니다. 제 차림새가 뭔가 도드라져 보여서 사진세례를 받는가 싶기도 했으나, 사진이란 ‘어딘가 눈에 뜨이는 모습을 담는 일’이 아닌데, 이 젊은이들은 기계는 대단히 좋은 녀석을 장만하면서도, 정작 이 기계를 왜 다루고 어떻게 다루고 언제 다루어야 하는가는 까막눈이구나 싶었습니다.


.. 나는 피사체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는가 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미지가 실물 크기의 몇 배로 나타나는지는 관심이 없다. 다만 피사체를 가장 좋은 빛에서 포착하려 하고, 적정한 노출과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얻고자 할 뿐이다 … 나는 얼마나 고배율의 이미지를 얻어내느냐 하는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 접사사진을 촬영하려면 먼저 당신이 사용하는 장비에 통달하고, 뛰어난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서 장비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  (18쪽)


 요즈음도 새로운 디지털사진기는 쏟아져 나옵니다. 새로운 디지털사진기를 장만하는 사람도 꾸준히 늘어납니다. 사진 모임도 제법 많고, 공원이나 옛 궁궐에 ‘출사’ 나가는 사람도 많으며, 골목길 모습을 찍는다며 출사를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는 분들이 출사를 다녀왔다고 이야기를 건네면, 그분 인터넷방이나 블로그를 찾아가보고 무슨 사진을 어떻게 찍었나 들여다보곤 합니다. 찍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참 부지런히 많이도 찍던데, 정작 올려놓는 사진은 몇 장 안 되기도 합니다.

 씁쓸하게 웃으면서 ‘이이는 뭘 했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사진 찍기 좋다는 곳’에 가서 무얼 했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출사는 핑계고, 그냥 술 마시는 모임을 한 셈인지? 출사랍시고 모여서 빈둥빈둥 수다만 떨지는 않았는지? 출사를 했으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더 나은 사진을 헤아려 보는 자리를 마련해야 할 텐데, 당구장에서 공치기 놀이나 하고 있지는 않으셨는지?


..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이라면, 카메라를 꺼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말한다. 만일 너희가 촬영하는 사진이 카메라를 망가뜨려도 좋을 만큼 대단한 사진이 아니라면, 카메라를 가방에 넣어 두라! ..  (43쪽)


 곰곰이 헤아리면, 사진 모임에 나가고 출사에도 나가는 분들이 늘 보아 온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은, ‘퍽 그럴싸해 보이는 모습’이기 일쑤입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이 담긴 사진이라기보다는 ‘남들이 보기에 멋지구나 싶은 모습’이곤 합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스스로 자기 삶을 알뜰히 담고, 사진에 찍힌 사람 삶이 사뿐히 담긴 사진이라기보다는 ‘분위기 있다고 하는 모습’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을까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읽었어도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는 못 읽었으니, 《태백산맥》은 읽었어도 《광주 전남 현대사》는 모르고 있으니, 《외딴 방》은 읽었어도 《마흔에 길을 나서다》는 건드려 보지도 않으니, 어찌할 길 없는 노릇일까요.

 신락균을 알든, 임응식을 모르든, 강운구를 읊든, 한정식을 따르든, 최민식 이름 석 자를 되뇌이든, 김기찬 이름 석 자를 새기든, 육명심 강의를 들었든, 이명동 말고 저 명동도 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든, 먼저 자기 나름대로 시간을 들이고 품을 들여서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곱씹고 되새겨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림 좋은 사진을 바라든 뜻이 있는 사진을 바라든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사진 찍는 일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가슴에 새기고 나서야 사진기를 들 일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내 손가락을 까딱거려서 눌러대는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뒤돌아보고 나서야 사진기를 들 일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2) 사진기를 들기 앞서 생각하기


.. 빛을 연구하려면 카메라를 내려놓고 피사체의 모습이 빛에 따라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관찰해 보라 ..  (62쪽)


 훌륭한 사진쟁이든 훌륭하지 않은 사진쟁이든,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내가 사진으로 담을 대상하고 가까워진 다음에 사진기를 들자. 그렇게 해도 늦지 않다’고. 백두산에 오른 기쁨과 벅참을 사진에 담고 싶다면서 여기저기 막 찍는다고 하여, 내 가슴으로 다가온 기쁨과 벅참이 사진에 담기지 않습니다. 모르지요. 헐레벌떡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헐레벌떡 사진이 가장 뜻있는지도.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대충대충 사진이 가장 재미있는지도. 그냥저냥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그냥저냥 사진이 가장 값진지도. 겉치레와 겉멋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겉치레 사진이나 겉멋 들린 사진이 가장 알맞는지도.


.. 카메라가 내 팔의 연장이라고 느껴질 때면 시간을 벗어난 것 같은 초월의 순간을 경험하면서 그 장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장면의 일부가 된다 … 사진가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볼 때 현실을 떠나 다른 장소로 가는 느낌을 주고 싶어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진가가 사진 속에 몰입하는 것이다 … 장비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기에 그들의 창조적인 측면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 렌즈의 선택을 제한하면 피사체들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된다 ..  (85∼86쪽)


 제 사진감인 ‘헌책방’과 ‘골목길’, 여기에 ‘자전거’까지 해서 사진에 담을 때마다 늘 혼자말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모습을 담을지가 머리에 떠오르거나 마음에서 샘솟기 앞서까지는 사진기를 손에 쥐지 말자고. 한쪽 어깨에 언제나 사진기가 걸려 있어야 하지만, 반드시 찍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면 섣불리 사진기를 손에 쥐지 말자고. 사진기 구멍으로 ‘찍을 대상’을 요모조모 살피지 말고, 두 눈으로 먼저, ‘찍을 대상’을 살피자고.

 그러고 나서, 내가 꼭 찍어야 하는지, 나 아니면 찍을 사람이 없는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흔히 찍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합니다.

 돈 떨어질 걱정이 없는 디지털사진을 찍는다고 해도, 저장장치에 쓰레기 사진을 모아 놓는 일은 반갑지 않습니다. 쓰레기 사진을 모아 놓으면 어차피 다 지워야 합니다. 게다가, 쓰레기 사진을 치우느라 소중한 시간이 빼앗깁니다. 엉뚱한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시간이 버려지고, 엉뚱한 사진을 지우느라 또 시간이 버려집니다. 또한, 엉뚱한 사진을 찍는다고 설레발을 치는 바람에, 정작 제가 즐겨야 할 헌책방이나 골목길이나 자전거하고 함께하는 시간마저 줄어들어요.


.. 사진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보는 방법’을 배우고, 환경적 조건에 따라 신속하게 적응하는 것이다 … 접사 이미지를 포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임을 나는 거듭 깨닫고 있다. 또, 피사체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도 잘 도망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거듭 놀란다. 사실 피사체가 자리를 뜨기 전에 내가 먼저 뜨는 경우가 더 많다 ..  (91,108쪽)


 사진을 찍어서 한 가지 모습을 종이나 파일로 남긴 뒤부터는, 두 눈으로 바라보고 온몸으로 부대끼던 삶터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모습이, 오늘 다르고 어제 다르고 내일 또 달라지겠구나 하고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 누구나 보는 모습이 아닌, 내 나름대로 뜻과 값을 두면서 바라보는 모습이 하나둘 늘어납니다. 사진 한 장에 이야기 한 자락이 생기고, 사진 두 장에 삶 한 자락이 새겨집니다. 사진 석 장에 눈물 한 방울 담기고, 사진 넉 장에 웃음 소담스레 묻어납니다.

 찍고 나서 두 번 거듭 보고, 찍었기 때문에 세 번 다시 보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찍은 뒤에 다시 찾아오고 또 찾아갈 곳을 사진에 담아야 하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찍은 그날부터 사랑하게 되거나 애틋하게 바라보는 무엇인가를 사진에 담아야 하는구나 하고 알아갑니다.


 (3) 《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이라는 책


 《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가까이 찍기’를 말하는 ‘접사’는 제 사진하고는 거리가 멀지 않나 생각하면서 읽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생각을 바꿉니다. 사진은 모두 똑같은 사진이구나. 다만, 모두 똑같은 사진을 다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찍을 뿐이구나. 다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찍는 사진이 아니라면 모두 똑같은 사진이라고 말할 수 없구나. 다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찍으니, 다른 사람들 사진을 구경하고 다른 사람들 사진책을 장만하면서 즐기는 맛이 있구나.


.. 하루가 끝나고 유리상자 안에 갇혀 죽어 있는 수집물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피사체를 관찰하는 일은 훨씬 만족스러운 일이다! ..  (7쪽)


 《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을 쓴 조나단 콕스 님은 말합니다. 디지털파일을 RAW파일로 남겨 놓으라고. “JPEG포맷이 아닌 RAW 포맷을 사용하면 디지털 메모리 용량을 더 늘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촬영할 수 있는 이미지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물론 촬영속도는 느리게 하고 촬영 이미지 수는 줄이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메모리 저장 공간을 아끼기 위해서 좋은 피사체들을 보고도 충분히 촬영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139쪽)”라고 말합니다.

 저는 어떤 파일로 사진을 남겨 두고 있었나 살펴봅니다. JPEG로 남기고 있었군요. 그랬나? RAW 파일로 형식을 바꿉니다. 그랬더니, 저장 장치에 담을 수 있는 사진 장수가 1/3로 줄어듭니다. 헉! RAW 파일은 원본파일이고, 이 원본파일을 쓸 수 있도록 줄이거나 만지려면 새 프로그램 하나를 배워야 합니다. 헉헉!! 시험 삼아 RAW 파일로 사진을 담은 뒤 새 프로그램을 만지작만지작하다가, 애써 찍은 사진 1/2을 날렸습니다. 헉헉헉!!!

 파일 형식을 바꾸고 나서 보니, 예전 JPEG 형식이었을 때보다 빛느낌이 한결 살아납니다. 그렇구나. 이러한 파일 형식을 쓰는 까닭이 있었구나. 그러나 예전에 찍은 사진은 그 사진들대로 좋습니다. 싸구려 렌즈를 끼고 찍은 사진이든, 비싸구려 렌즈를 끼고 찍은 사진이든, 제가 담아야 할 사진감을 제 깜냥껏 사랑하고 믿고 아끼는 가운데 담아낸 사진이었다고 한다면, 좀더 나은 파일 형식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제 마음에 기쁘게 느껴집니다. 이제부터는 한결 나은 파일 형식으로 쓰면 되고, 또, 여태껏 소홀히 여기거나 가볍게 지나쳤던 대목을 다시금 찬찬히 돌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집니다.

 한 자리에 머무는 사진을 바라지 않으니까요. 고여 있는 사진을 바라지 않으니까요. 용두질하며 즐기는 사진을 바라지 않으니까요.


.. 이미지를 보는 사람과 당신의 이미지를 연결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피사체의 눈높이에서 촬영하는 것이다. 거북이나 두꺼비가 세계를 어떻게 보는지 생각해 보라. 당신이 피사체의 시점에서 사진을 촬영하면, 사진을 보는 사람은 피사체만 보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가 주변 환경을 인식하는 방법까지도 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  (110쪽)


 사진책 오천 권을 보았다고 해서 더 나은 사진을 알아보는 눈길을 길렀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진책 만 권을 보았다고 해서 더 나은 사진을 찍는 손길을 길렀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몇 권 읽었느냐는 껍데기입니다. 예전에 읽은 권수가 아닌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읽는 책을 덮은 다음, 새로운 책을 읽으려고 마음을 기울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멋들어진 작품 하나 빚어내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멋들어진 작품은 일찌감치 이루어 놓은 하나로 그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를 처음으로 삼아 두 번째를 이루고 세 번째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밟고 일어서야 합니다. 열 며칠 동안 책상맡에 놓고 있던 《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을 마무르고 책꽂이 한켠에 얌전히 꽂아 놓습니다. 곧 책방 나들이를 해야겠습니다. (4341.5.2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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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전집 - 전20권
송건호 지음, 강만길 외 엮음 / 한길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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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현대인물사론》


 송건호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2001년에 세상을 떠났고, 2002년에 스무 권짜리 ‘송건호 전집’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전집이 나오면서, 당신이 써 온 낱권책은 모두 품절이나 절판이라는 길을 걸었고, 40만 원짜리 전집이 아니고서는 당신 글을 읽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08년 오늘날, 송건호라고 하는 분 책을 하나씩 따로 읽고 싶다면 헌책방을 가야 합니다. 헌책방에는 당신이 쓴 《민족지성의 탐구》며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며 《서재필과 이승만》이며 《김구》며 《의열단》이며 《한국현대사》며 《한나라 한겨레를 향하여》며 《분단과 민족》이며 《드골 평전》이며 《민중과 자유언론》이며 《소크라테스의 행복》이며 《민주언론, 민족언론》이며 《무지개라도 있어야 하는 세상》이며 《민족통일을 위하여》며 《동양의 고사》며, 또 아이들한테 읽히려고 쓴 위인전이며, 수많은 책을 어렵잖이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1984년에 펴낸 《한국현대인물사론》이라는 책은, 김구ㆍ여운형ㆍ김창숙ㆍ안재홍ㆍ이동녕ㆍ안창호ㆍ이승만ㆍ김교신ㆍ한용운ㆍ신채호ㆍ함석헌ㆍ이광수ㆍ최남선ㆍ이용구, 이렇게 열네 사람 이야기를 담습니다. 김교신 꼭지를 읽어 봅니다. “김교신은 45세의 젊은 나이로 그렇게도 그리던 민족의 광복을 몇 달 앞두고 세상을 떴다. 그의 평생은 파란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생전에 높은 요직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한낱 중학교의 평교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대주의가 도도히 흐르는 기독교계에서 그처럼 기독교의 민족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은 없고 그토록 독실하게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교회와 서양 선교사를 외면하고 오로지 하느님과 성경만을 의지한 기독교인은 없었다(276쪽).”는 대목에 눈이 멎습니다.

 교과서에 이름이 실려 익히 알 만하거나, 이래저래 무슨 행사 때마다 들먹여지거나, 우리 나라 곳곳에 크고작은 기념관이나 기념빗돌이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고, 어떤 마음과 넋으로 이 땅에서 살아갔는가를 얼마만큼 헤아리고 있습니까. 북한산국립공원이 왜 국립공원인지, 지리산국립공원은 국립공원으로서 얼마나 뜻이 있는지 헤아리면서 그곳을 찾아가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일터에 가서 하루 여덟 시간, 또는 더 길거나 짧은 시간을 바치면서 하는 일은 우리 은행계좌에 들어오는 돈을 넘어서 얼마나 우리 삶터를 북돋우거나 돌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는 밥과 물과 바람은 우리 몸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밥과 물과 바람이 지금 어떤 형편인지 알고 있습니까.

.. 일제 36년 간 조선에는 숱한 인물들이 나왔으나 지식 청년이나 일반 청년에 관계 없이 조선 청년대중에게 가장 폭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마 춘원 이광수를 따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광수는 세상이 다 아는 문인이었으나 지금과는 달리 일제 때의 춘원에 대한 기대는 단순한 문인으로서보다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서였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얼마 후 1946년 여름쯤 되지 않았을까. 어느 날 이광수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조그맣게 보도된 일이 있다. “초췌한 모습의 이광수, 아내와 합의 이혼 수속차 종로구청에 출현”, 대체로 이런 내용의 기사였는데 머지않아 친일파로 단죄될 이광수가 재산을 보호하고자 아내 허영숙과 합의 이혼하고 재산을 아내의 이름으로 명의 변경했다는 보도였다. 8ㆍ15 후의 춘원은 온데간데 존재도 없었다. 8ㆍ15 전까지만 해도 민족의 우상처럼 존경받던 춘원이 해방이 되자 ‘친일파 이광수’로 변해 욕설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세상이 변하니까 하룻밤 사이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달라지나 싶어 인생의 무상함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  (이광수 꼭지/348쪽)

 송건호 님이 거쳐간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와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여기에다가, 온몸 바쳐 태어나게 한 〈한겨레〉는 오늘날 얼마나 힘차고 야무진 붓끝으로 우리한테 밝고 고운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까. 〈조선〉 기자와 〈한겨레〉 기자는 얼마나 송건호 님 발자취를 톺아보면서 당신들 발걸음을 튼튼하게 이 땅에 내딛고 있습니까.

 책이 없어서 사람을 못 보지는 않을 테지요. 사람이 없다고 책을 안 보지는 않을 테지요. 마음이 없고 뜻이 없어서 몸을 안 움직이고 어깨동무를 안 할 뿐일 테지요. (4341.5.1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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