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내음을 맡아

 


  “아, 노란 꽃이 이렇게 크게 자랐네. 아, 냄새 좋다. 여기에도 있네. 아, 냄새 좋다. 여기에도 있구나. 아, 냄새 좋다. 그런데 아버지 노란 꽃이 무슨 꽃이에요?” “유채꽃.” “윳챗꽃? 윳챗꽃들아 냄새 좋구나. 여기에도 작은 윳챗꽃이 있네. 여기에도 작은 윳챗꽃 있네. 여기에도 있구나.” 유채꽃 아닌 윳챗꽃이라 말하면서 논도랑마다 자라는 크고작은 유채꽃을 찾아가서 앞에 달라붙어 꽃내음 맡는 큰아이. 너, 왜 갑자기 그러니,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아하, 그러네, 나비 흉내를 내는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래, 나비가 꽃마다 다 내려앉으면서 꽃가루랑 꽃꿀을 조금씩 나누어 먹지? 나비가 되고 싶은 네 마음이 논꽃마다 하나씩 찾아들어 냄새를 맡으며 좋은 기운 나누어 받고, 다시 네 좋은 기운 나누어 주는 웃음으로 태어나는구나.


  꽃내음을 맡아. 고운 꽃내음을 맡아. 꽃송이마다 조금씩 다른 꽃내음을 맡아. 작게 핀 꽃과 크게 핀 꽃마다 또 사뭇 다른 꽃내음을 맡아.


  사람들이 제아무리 유채꽃 사진 이쁘장하게 찍어도, 유채내음 맡으면서 사진을 찍지는 않더라. 사람들이 유채꽃 그림으로 그리더라도 유채잎 뜯어서 유채맛 한껏 느끼면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더라. 너는 책에 없는 이야기를 삶에서 읽어라. 너는 책에 안 담기는 이야기를 오늘 한껏 누려라. 너는 네 삶책을 쓰고, 너는 네 삶책을 읽어라. 4346.4.1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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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목소리

 


  여섯 살 큰아이가 스스로 그림책을 읽는다. 다만, 그림책에 한글로 적힌 글을 읽지는 않는다. 그림책에 나오는 그림을 바라보며 읽는다. 그림을 보면서 스스로 이야기를 생각해 낸다. 그림에 맞추어 쓰는 글, 또는 글에 맞추어 그린 그림, 이 두 가지를 살피지 않고, 오직 그림만 헤아리면서 그림책을 새로 읽는다.


  아이가 그림책 읽는 목소리 들으면 좋다. 마음이 따스해지고 하루 동안 쌓인 고단함이 스르르 녹는다. 이렇게 씩씩하게 자라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하는 숨결이로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낀다.


  아이 깜냥껏 줄거리를 새로 엮어서 읽는 이야기 들으면 재미있다. 아이 나름대로 이야기를 엮을 때에는 그림책에 적힌 글을 아랑곳하지 않으니 즐겁다. 아이들 그림책이라 하지만, 옳거나 바르거나 알맞다 싶은 한국말로 슬기롭게 글을 쓴 책이 아주 드물다. 아이들한테 그림책에 적힌 글을 읽어 줄라치면, 몽땅 새까맣게 지우고 새로 글을 적어 넣어야 할 판이다. 아이가 한글을 익힐 때가 되니 되도록 그림책 글을 그대로 읽어 주려 하면서도, 영 못미더워 자꾸자꾸 그림책 글을 죽죽 긋고 고쳐서 적어 넣는다.


  아버지가 아이 목소리를 좋아하듯, 아이도 아버지 목소리를 좋아할까. 아이가 아버지한테 그림책 읽어 달라 할 때에는, 한글을 익힌다는 생각이 아니라,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야기를 생각하고픈 마음이기 때문일까.


  잠자리에서 자장노래 부를 적에도, 어떤 노래를 꼭 불러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서로서로 목소리를 듣고 나누며 들려주는 즐거움이 크다고 느낀다. 목소리를 나누면서 살내음 나누고, 이야기를 조곤조곤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나누는 삶이겠다고 느낀다. 4346.4.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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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눈높이

 


  아이들 눈높이에 서면 모든 일이 아름답게 이루어집니다. 아이들 눈높이에서 책을 일구면 모든 책이 아름답게 태어납니다. 이 아이들이 오늘 읽고 앞으로 즐길 책이 되도록 눈높이를 맞추면 어떠한 책이든 훌륭하게 피어납니다.


  아이들 눈높이에 서면 밥을 맛있게 차립니다. 아이들 눈높이에 서면 들과 숲에 농약 함부로 뿌릴 수 없습니다. 아이들 눈높이에 서면 석유 먹는 자동차 만들지 못합니다. 아이들 눈높이에 서면 온 들판과 멧골에 송전탑 박아 전깃줄 길게 드리우지 않고, 집집마다 가장 좋은 전기 가장 즐겁게 빚어 쓰도록 꾀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들 눈높이로 살아가면, 돈 때문에 다툴 일 없습니다. 아이들 눈높이로 생각하면, 입시지옥 시험지옥 몽땅 걷어치우면서 어여쁜 어깨동무 빛낼 수 있습니다.


  아이들 눈높이로 사랑을 나누어요. 아이들 눈높이를 헤아리며 꿈을 꾸어요. 아이들 눈높이에서 나무 한 그루 심고, 풀포기 하나 아껴요. 아이들 눈높이에서 꽃을 바라보면서 아이 예쁘구나 꽃잎 쓰다듬어요. 삶을 누리는 길은 아이들 눈높이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책을 즐기는 길은 아이들 눈높이에서 책마을 책골목 책나라 가꾸는 길입니다. 4346.4.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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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택시 일꾼

 


  지난 3월 19일, 전라도 순천에서 남원을 거쳐 전주로 기차를 타고 간 뒤, 택시로 갈아타서 ‘홍지서림 책방골목’에 들러 실컷 책을 누린 다음, 다시 기차역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데, 내 차림새가 어딘가 남다르다며, 택시 일꾼이 말을 붙인다. 커다란 가방 등에 짊어지고 목에는 사진기 하나, 앞쪽에 또 가방 서넛 주렁주렁 매달고 어깨에도 사진기 하나 걸친데다가, 머리띠로 긴머리 질끈 동이고, 수염은 자라는 그대로 놓은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한국으로 나들이 온 외국사람으로 여기다가, 무언가 예술 하는 사람인 듯 생각한다. “전주에 관광 오셨나요?” 하는 물음에, “아니요. 저는 전주 홍지서림 책방골목에 헌책방 나들이 왔어요. 저는 전주에 헌책방이 있기 때문에 전주에 와요.” 하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택시 일꾼이 길게 한숨을 쉬면서, “책방 많이 문 닫았지요. 민중서관 문 닫을 때에는 가슴이 짠하더라고요.” 하고 이야기한다.


  전주시 국회의원은, 전주시장은, 전주시 시의원은, 전주시 기자들은, 전주시 대학교수는, 전주시 초·중·고등학교 교사는, 전주시 어버이들은, 전주시 어른들은, 전주시 푸름이와 아이들은, 전주시에서 오랜 나날 삶빛 밝히던 〈민중서관〉 문닫을 적에 어떤 마음이었을까. 문닫은 줄 알기는 알까. ‘홍지서림 책방골목’에서 그 많던 헌책방들 주르르 문을 닫고 이제 꼭 세 곳 남은 요즈음 어떤 마음일까. 알기는 알까. 건물 새로 짓거나 길바닥 아스팔트하고 거님돌 갈아치우는 데에는 돈을 아낌없이 쓰는 행정과 관청과 정치인데, 마을사람 삶과 꿈과 사랑 북돋우는 일에는 어떤 돈과 힘과 이름과 마음을 기울이는가. 4346.4.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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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박원순 님

 


  부산 보수동에서 헌책방 책살림 일구는 〈우리글방〉 사장님이 순천과 인천을 거쳐 서울에 있는 헌책방을 다녀 보려고 하신다고 하기에, 인천과 서울에 있는 헌책방으로 모시고 다닌다. 이러는 동안 나도 책방마실 새롭게 하면서, 한결 즐겁게 헌책방 사진을 찍는다. 서울 독립문 영천시장 한켠에 자리한 〈골목책방〉에 들렀을 때에, 큰길에 있는 조그마한 나무간판을 새삼스레 바라보다가 〈골목책방〉 아주머니한테 여쭌다. “박원순 님이 서울시장 되신 뒤에도 오셨나요?” “음, 한 번 오셨지. 독립문에서 삼일절 행사 할 때에는 못 오시고, 그 뒤에 언젠가 한 번 오셨지. 수행원 오륙십 명 이끌고 오셔서 ‘여전하시네요.’ 하고 말씀하시더라고.” “그 뒤로도 오셨나요?” “아니. 그때 한 번 오시고, 안 오셨어.”


  집으로 돌아와서 문득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살펴본다.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 님이 독립문 헌책방 〈골목책방〉 나들이를 깜짝스레 한 일이 몇몇 블로그에 나오고 신문글 하나 나온다. 몇 월 몇 일인지 또렷하게는 모르겠으나 신문글은 2011년 11월 3일에 나왔으니, 아마 2011년 11월 2일에 〈골목책방〉 나들이를 수행원한테 말을 않고 갑작스레 했으리라 본다. 그런데, 수행원 수십 사람에다가, 박원순 님 보려고 몰려든 숱한 사람물결을 헤치면서 책을 구경하지는 못했으리라. 그저 헌책방 일꾼들한테 안부인사 한 마디 여쭙고 겨우 지나갔으리라. 서울시장 되기 앞서까지는, 또 참여연대나 아름다운재단 일을 하기 앞서까지는, 여느 변호사로서 일하는 삶을 꾸릴 적에는, 이녁은 〈골목책방〉을 비롯해 여러 헌책방에 단골로 드나들었겠지. 그러나, 여러 가지 바쁜 일을 하고 이런저런 모임을 꾸리다가 정치와 행정을 맡는 자리에 들어선 만큼, 한 해에 한 차례 또는 한 달에 한 차례 한 시간이나마 짬을 내어 헌책방마실을 즐기기란 몹시 어려운 나날이 되었으리라 느낀다. 관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삶을 되새기면서 글을 쓰려 하지 않고서야 ‘헌책방 단골’로 돌아가기는 힘들겠다고 느낀다.


  나한테는 아무런 직책도 지위도 계급도 신분도 없다. 나는 어느 모임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어느 집단에도 깃들지 않는다. 다만, 시골마을에서 옆지기하고 두 아이하고 살아간다. 아직 퍽 어린 아이들 돌보느라 바깥마실 나오기 빠듯하지만, 틈틈이 바깥마실 다닐 수 있고, 내 곁에는 나를 지킬(?) 수행원이나 경호원 하나 없으니 아주 홀가분하면서 조용히 헌책방마실을 즐기고, 헌책방 일꾼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주고받다가는, 헌책방 아름다운 책시렁을 기쁘게 사진 몇 장으로 아로새긴다.


  서울시장 되어 서울시를 아름답게 돌보는 일도 무척 뜻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일에 보람을 느끼며 힘차게 한길 걸으면 멋스럽고 훌륭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누가 나한테 서울시장이건 고흥군수이건, 또 무슨무슨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이나 어느 모임 대표 같은 자리를 맡기려 한다면, 나는 두말 않고 손사래치거나 몰래 내빼리라 본다. 어쩌면 나는 서울시장이 된다 해도 서울시 예쁜 헌책방 찾아다니며 책을 즐길는지 모르는데, 그만큼 내 하루를 내가 바라지 않는 정치나 행정에 빼앗겨야 한다. 모임 대표가 되는 일도 이와 같다. 아무리 자그마한 모임이라 하더라도 그저 즐겁게 함께하면 기쁠 뿐, 더도 덜도 바랄 것 없다.


  하루에 책 한 권 읽을 겨를이 없다면, 하루에 몇 시간 아이들과 복닥이며 노래하고 조잘조잘 떠들거나 그림놀이를 할 틈이 없다면, 하루에 여러 시간 하늘바라기·꽃바라기·나무바라기·풀바라기 할 말미 내지 못한다면, 나로서는 이러한 삶은 내 삶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 헌책방 나들이 즐기는 웃음꽃을 그 어느 것에 내주랴. 누군가 돈 억수로 갖다 안긴들 무슨 감투를 선물한다 한들, 나는 골골샅샅 살가운 헌책방들 마실 다니는 재미를 아무한테도 내주고 싶지 않다. 4346.3.3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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