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한 자락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인 이야기일 때에 이웃과 동무한테 들려줍니다.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인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웃한테도 동무한테도 들려주지 못합니다. 몸과 마음으로 겪었기에 둘레에 나눕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무지개 고운 빛깔 두 눈으로 즐겁게 보았으니,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소나기를 만나고, 비바람을 맞으며, 환한 봄꽃 보았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엮어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책에서 읽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야기일 때에는, 아무한테도 알려주지 못해요. 책에서 읽지 않았어도, 스스로 느끼고 지어서 일구는 이야기일 때에는, 누구한테나 알려줄 수 있어요. 된장국 끓이고, 밥을 지으며, 시금치 데치는 삶을 스스로 누리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기쁘게 알려줍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저마다 즐겁게 살아가는 하루 이야기가 씨앗이 되어, 서로서로 즐겁게 피우는 이야기꽃이 됩니다. 스스로 사랑스레 살아가는 하루 이야기가 열매가 되어, 다 함께 사랑스레 나누는 이야기잔치 됩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수군수군댈 적에는 재미없습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궁시렁궁시렁댈 적에는 무섭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나눌 때에 아름답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거나 섣불리 욀 적에는 싸움이 생깁니다. 때로는 해코지도 되고 비아냥도 되겠지요.


  이야기는 사랑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고 이웃 삶을 사랑할 때에 이야기 한 자락 태어납니다. 이야기는 꿈입니다. 내 삶을 꿈꾸고 이웃 삶을 꿈꿀 때에 이야기 두 자락 자라납니다. 사랑을 빛내고 꿈을 밝히고 싶기에 이야기를 나누고, 이 이야기를 글로 옮겨 책으로 빚습니다. 4346.6.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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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매무새

 


  고흥서 부산으로 시외버스 네 시간, 부산에서 고흥으로 다시 시외버스 네 시간, 이틀에 걸쳐 이렇게 움직이니 몸이 무척 무겁다. 엉덩이는 아프고 등허리는 결린다. 꼼짝을 못하고 앉아야 하는 시외버스에서 기지개조차 마음껏 하지 못한다. 쪽잠을 자고 쪽책을 읽는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요 책을 말하는 사람이니, 이렇게 시외버스에서까지 책을 읽는다 할 만하다고 느낀다. 글을 안 쓰고 책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시외버스에서 책을 읽는 분이라면, 그야말로 책을 사랑하는 분일 테고, 아니면 마음다스리기를 훌륭히 하는 분이리라 생각한다.


  부산에서 고흥으로 돌아오는 버스길에서, 어느 젊은 가시버시가 버스 일꾼더러 “왜 텔레비전 안 켜 주세요?” 하고 묻는다. 버스 일꾼은 전라도말로 구수하게 “텔레비전? 지금 시간에 뭔 재미있는 게 한다고?” 하고 얘기하다가 “심심하다면 틀워 줘야지.” 하고 덧붙인다. 낮에 부산을 떠난 시외버스가 순천을 거쳐 저녁 즈음 벌교 지나고 고흥으로 접어들 무렵, 버스 일꾼은 “이제 야구 봐야제. 며칠 야구 못 봤더니 애가 타네.” 하고 말하면서 텔레비전 채널을 바꾼다. 처음에는 “어, 이기 아닌데.” 하고 또 “이기도 아닌데.” 한다. 아하, 야구가 나오더라도 광주를 안방으로 삼는 구단 경기가 나와야 한다는 뜻이로구나. 광주 안방 구단 어느 선수가 친 공이 죽죽 뻗다가 외야 울타리 코앞에서 잡히자, 버스 일꾼은 “아이고야!” 하고 외친다. “나가 브레이크를 끽 밟았으면 못 잡는 긴데.” 하고 덧붙인다. 버스 일꾼 바로 뒤에 앉은 아가씨와 아줌마가 깔깔 웃는다.


  네 시간 즈음 달리는 시외버스에서 어떤 사람들이 책을 손에 쥘 만할까. 두 시간 즈음 달리는 전철에서 어떤 사람들이 책을 손에 들 만할까. 한 시간 즈음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시내버스에서 어떤 사람들이 책을 손에 잡을 만할까. 자율학습과 보충수업과 학원과 과외가 잇달으며 대입시험공부로 들볶이는 푸름이들이 책을 손에 댈 만할까. 카드값과 할부금과 대출금에 목을 매다는 회사원들이 책을 손에 가까이 둘 만할까. 공무원들은, 공장 노동자들은, 국회의원이나 정치꾼은, 의사나 간호사는, 대통령이나 비서는, 장관이나 차관은, 회사 대표나 간부는, 교사나 교수는, 건물 청소부나 이주 노동자는, 저마다 책 한 권을 손에 쥘 만할까.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책을 마주하면서 삶을 읽거나 사랑을 헤아리거나 꿈을 떠올릴까.


  책을 읽는 매무새는 삶을 일구는 매무새라고 느낀다. 책을 가까이하려는 매무새는 삶을 사랑하려는 매무새라고 느낀다. 오늘날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한 매무새 되어 이웃을 사귀고 동무를 만나며 하루를 누릴까. 어떤 책이 이 나라 사람들 손으로 스며들까. 4346.6.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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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이야기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모르곤 한다. 왜냐하면, 어느 책 하나를 장만하거나 빌려서 ‘처음부터 끝까지 훑는다’고 해서 ‘책을 읽는다’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책이든 그 책 하나만 읽으려 해서는 제대로 못 읽는다. 어떤 책이든 그 책 하나를 ‘읽으려’고 한다면, ‘그 책 하나 쓴 사람’이 걸어온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래서 책날개에 적힌 글쓴이 발자취를 찬찬히 읽으면서 깊고 넓게 헤아리며 비로소 책읽기를 한다. 책에 깃든 줄거리를 훑을 적에도 ‘책에 적힌 글’만 훑는다고 ‘책을 읽는다’고 말할 수 없다. 책에 적힌 글이 태어나기까지 여러모로 스미고 깃든 ‘수많은 스승과 길동무 이야기’를 글줄에서 읽어내야 한다.


  리영희 님만 ‘글 한 줄 쓰려고 책 너덧 권 읽지’ 않는다.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은 ‘글 한 줄 쓰려고 책 여러 권 읽는’다. 다만,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책 여러 권 읽어 글 한 줄 아름답게 쓰고, 어떤 사람은 슬픈 책 여러 권 읽어 글 한 줄 슬프게 쓰며, 어떤 사람은 시커먼 꿍꿍이 같은 책 여러 권 읽어 글 한 줄 시커먼 꿍꿍이 담아서 쓴다.


  모든 사람 모든 글에는 ‘수많은 다른 책’이 살포시 감돈다. 글 한 줄에 숨은 다른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곧, 어느 책 하나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과 이야기와 삶과 사랑을 고루 살펴야 비로소 책 하나 읽을 수 있다. 숱한 이야기를 찬찬히 헤아리거나 살피려 하지 않는다면, 책 하나 읽었다 말할 수 없다.


  책읽기는 아주 쉬우면서 아주 안 쉽다. 책읽기가 아주 쉬운 까닭은, 나를 둘러싼 내 이웃 아름다운 삶을 만나는 즐거운 이야기잔치이기 때문이다. 책읽기가 아주 안 쉬운 까닭은, 사랑하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줄거리만 겉훑으려고 할 적에는 조금도 아무것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4346.5.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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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장과 작가와 편집자

 


  고등학교만 마친 학력으로 출판사 편집자나 기획자나 영업자로 일한 사람이 한국에 몇이나 있을까 궁금하다. 아니, 한국에 있는 출판사 가운데 고등학교만 마쳤거나 중학교만 마친 사람을 아무 거리낌없이 입사시험 치르도록 문을 연 곳이 몇 군데 있을까 궁금하다.


  나는 고등학교만 마친 학력으로 보리출판사에 영업자로 뽑혀서 일했다. 그 뒤, 토박이출판사에 국어사전 기획·편집자로 뽑혀서 일했다. 토박이출판사는 보리출판사 계열사로, 내가 한 일은 《보리 국어사전》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출판사에서 일한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보리출판사 빼고 ‘학력 제한 없이 입사원서 받은 출판사’는 없었다고 느낀다. 요즈음에는 있을까. 보리출판사는 요즈음도 졸업장(학력)을 안 따지면서 일꾼을 받을까.


  출판사 일을 모두 접은 뒤 작가라는 이름을 얻어 2004년부터 책을 썼다. 내 이름으로 나온 책에 내 졸업장(학력)은 한 줄도 안 적힌다. 나한테 졸업장(학력) 묻는 편집자는 아직 없다. 작가로 일하고부터는 참말 나한테 졸업장 따지는 이가 없는데, 기관이나 학교로 강의를 갈 적에 가끔 나한테 ‘최종학교 졸업 증명서류’를 바라기도 한다. 다들 ‘형식’이라고 말하면서 졸업장(학력)을 바라는데, 형식, 곧 겉치레뿐이라면 아예 없어도 되리라 느낀다. 초등학교만 마쳤건 초등학교도 안 다녔건, 사람으로 태어나 일하고 놀며 사랑하는 데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다. 시인이 되려면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나오면서 어떤 ‘어른 시인’한테서 추천을 받아야 하지 않다. 사진가로 일하자면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오면서 어떤 ‘어른 사진가’한테서 추천을 받아야 하지 않으며, 어떤 공모전에서 상을 받아야 하지 않다.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영글어 시를 쓰고 사진을 쓸 때에 비로소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다. 졸업장으로 작가 이름을 얻지 않는다.


  그런데, 작가들 글과 그림과 사진을 그러모아 책으로 엮는 출판사에서는 졸업장(학력)을 아주 꼼꼼히 따진다. ㅁ이라는 출판사 대표는 ㅅ대학교 졸업장(학력) 없으면 아예 안 뽑는다는 말을 대놓고 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ㅁ출판사뿐 아니라 다른 출판사에서도 졸업장(학력)을 더 눈여겨보리라 느낀다. 사람보다는 졸업장(학력)이요, 솜씨나 마음이나 사랑보다도 졸업장(학력)이라고 할까.


  더 생각해 본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졸업장(학력)이 있을까. 졸업장(학력) 없는 사람은 책을 읽으면 안 될까. 아니, ‘졸업장(학력) 없는 사람도 즐겁고 쉬우며 아름답게 읽을 책’을 ‘졸업장(학력) 있는 사람’이 즐거우며 아름답게 엮어서 이 땅에 내놓을까. 어쩌면, 이 나라 편집자는 모두 ‘졸업장(학력) 있는 사람’인 터라 ‘졸업장(학력) 없는 사람이 읽을 인문책’을 쉽고 예쁘게 엮을 만한 눈썰미나 눈높이나 눈길이 없다 할 만하지는 않을까.


  고졸 편집자와 중졸 기획자와 초졸 영업자가 씩씩하게 일할 수 있는 이 나라 책마을 되기를 빈다. 학교를 다닌 적 없는 작가가 즐겁게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이 나라 삶터 되기를 빈다. 4346.5.2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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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는 ‘부산 책’을

 


  대구에 갈 일이 있으면 대구에 있는 헌책방을 꼭 찾아간다. 책내음 맡고 싶기도 하지만, 대구에서는 ‘대구 책’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청주에 갈 일이 있으면 청주에 있는 헌책방을 꼭 찾아가고, 대전에 갈 일이 있으면 대전에 있는 헌책방을 꼭 찾아간다.


  새책방이나 도서관을 찾아가도 ‘대구 책’이나 ‘청주 책’이나 ‘대전 책’ 만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새책방에는 그 고장 책이 퍽 드물다. 인천에 있는 새책방이라서 ‘인천 책’ 알뜰히 갖추거나 보여주지 않는다. 제주에 있는 새책방이라서 ‘제주 책’을 살뜰히 건사하거나 알려주지 않는다. 그 고장 헌책방에 찾아가서야 비로소 그 고장 책을 만나고, 헌책방에서는 반갑고 놀라운 책을 알맞게 값을 치르며 ‘내 책’으로 장만할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지난날 전국에 인문사회과학책방 많이 있을 무렵에는, 전국 인문사회과학책방마다 ‘그 고장 책’이 꽤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고장에서 씩씩하게 한길 걷는 사람들 조그마한 이야기꾸러미 조그맣게 내놓아 조그맣게 팔았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인문사회과학책방 거의 모조리 사라지면서, ‘그 고장 책’은 놓일 자리가 없다. 다만,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나는 북카페에서 ‘그 고장 책’을 다뤄 줄 수 있다면 좋으리라. 차 한 잔 마시는 자리 곁에 ‘그 고장 책’을 놓는 책시렁 한 칸 마련한다면 좋으리라. 이런 북카페 있다면, 나는 아이들과 함께 그 북카페를 찾아가서 ‘그 고장 책’을 흠뻑 느끼고 싶다.

 

 춘천에 마실을 갈 적에 춘천 시인과 사진작가와 화가가 내놓은 시집·사진책·그림책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순천이나 광주에 갈 적에 순천이나 광주 작가들 자그마한 책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부산에서는 ‘부산 책’ 만나고 싶으며, 인천에서는 ‘인천 책’ 만나고 싶다. 고장에서 책방이나 찻집 꾸리는 분들이 이녁 고장에서 삶빛 길어올리는 몫 어여삐 할 수 있기를 바란다. 4346.5.2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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