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1646) 중층적 1 : 글의 중층적인 성격

 

.. 웃음을 머금게 하는 위의 인용은, 글의 중층적인 성격이 글쓴이의 의도를 종종 배반하고 마는 적확한 예라고 생각한다 ..  《장정일-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마티,2011) 211쪽

 

 “위의 인용(引用)은”은 “앞에 든 글은”이나 “앞에 따온 글은”으로 다듬습니다. 글을 쓰면서 다른 이 글을 따올 때에는 ‘내가 바로 앞에 따오며 든 글’입니다. ‘내가 쓴 글 위나 아래’에 놓이지 않아요. 가로쓰기를 하면서 글이 죽 내려가도록 하는 책 얼거리를 보면 “위에 인용한”이 맞다 할 테지만, 글흐름을 돌아볼 때에는 “앞에 따온”이라 적어야 올바릅니다.

 

“글쓴이의 의도(意圖)”는 “글쓴이 뜻”이나 “글쓴이 생각”으로 손보고, “종종(種種) 배반(背反)하고 마는”은 “때때로 저버리고 마는”이나 “곧잘 뒤집고 마는”으로 손봅니다. “적확(的確)한 예(例)”는 “좋은 보기”나 “알맞춤한 보기”로 손질합니다.

 

 중층적 : x
 중층(重層) : 여러 층
   - 중층으로 이루어진 건물 / 중층을 이루는 사회 구조

 

 글의 중층적인 성격이
→ 여러 뜻을 담은 글이
→ 여러 뜻으로 풀이되는 글이
→ 글이 여러모로
→ 글이 여러 가지로
 …

 

 글쟁이로 살아가는 분이 곧잘 쓰는 한자말 ‘중층적’입니다. “중층적 구조”라든지 “중층적 소유”라든지 “중충적 서술”이라든지 “중층적 역할”처럼 쓰는데,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이 낱말은 안 실립니다. ‘중층’ 한 가지만 실려요.

 

 한자말 ‘중층’은 “여러 층”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중층 + 적’처럼 새 한자말을 엮을 때에는 “여러 층을 나타내는”이나 “여러 겹을 보여주는”이나 “여러 가지가 드러나는”을 가리키는 자리에 쓰겠지요.

 

 그런데, 먼저 ‘중층’을 살펴보면 그닥 쓸 만하지 않습니다. 말뜻 그대로 “여러 층”이나 “여러 겹”이라 적으면 그만이에요. 구태여 한자말 ‘重層’을 들먹여야 내 뜻이나 넋을 나타낼 수 있지 않아요.

 

 중층으로 이루어진 건물 →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건물
 중층을 이루는 사회 구조 → 여러 겹을 이루는 사회 얼개

 

 보기글에서는 누군가 쓴 글이 “여러 가지 성격”을 보여주는데, 이 여러 가지 성격이 이 글을 쓴 사람 뜻하고 어긋나기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곧, “글에 담은 여러 뜻이 글쓴이 뜻과 어긋나는” 셈이에요. “여러 뜻을 담은 글이 글쓴이 생각과 동떨어지는” 셈이라 할 테고, “글이 여러모로 글쓴이 마음과 엇갈리는” 셈이라 하겠지요.

 

 글흐름을 가만히 헤아리며 알맞게 쓸 낱말을 살핍니다. 글뜻을 곰곰이 짚으며 올바로 쓸 낱말을 고릅니다.

 

 내 넋을 살릴 때에 내 말이 살아납니다. 내 얼을 보듬을 때에 내 글이 빛납니다. (4345.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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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2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2-02 11:4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ㅠ.ㅜ
집 옮기시느라 힘드셨겠어요.
짐은 다 갈무리하셨을까 궁금하네요.
차근차근 잘 하시리라 믿어요~~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28) 회오의 1 : 회오의 눈물

 

 

.. 어떤 이는 그를 한때의 격랑일 뿐이라 하며 / 또 어떤 이는 회오의 눈물 / 굴절과 비통의 소용돌이라고도 하겠지만 ..  《송경동-꿀잠》(삶이보이는창,2006) 126쪽

 

 ‘격랑(激浪)’은 “거센 물결”을 뜻합니다. 이 자리에서는 “소용돌이”로 손볼 수 있으나, 뒤에 소용돌이라는 낱말이 나오니, 앞말과 묶어 “한때 이는 거센 물결”이나 “한때 휘몰아치는 물결”이나 “한때 이는 물결”이나 “한때 부는 바람”처럼 손질할 수 있어요. “굴절(屈折)과 비통(悲痛)의 소용돌이”는 “꺾이고 슬픈 소용돌이”로 다듬어 봅니다.

 

 그런데, 이 보기글은 싯말입니다. 여느 글이 아닌 싯말이기에 이렇게 다듬자고 해도 좋을까 궁금합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싯말이든 소설말이든 똑같이 말이에요. 입으로 하는 말이든 손으로 쓰는 글이든 모두 한국말입니다. 한국말이라는 테두리에서, 어떻게 적거나 읊을 때에 한결 살가우면서 사랑스러울까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회오(悔悟) :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음.
   -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회오의 눈물을 흘렸다 /
     반성문은 절절한 회오로 가득 차 있었다

 

 회오의 눈물
→ 뉘우치는 눈물
→ 뉘우치며 흘리는 눈물
→ 고개 떨군 눈물
 …

 

 꼭 싯말이기 때문은 아니나, 이 싯말을 읽으며 다른 말마디는 그럭저럭 읽고 지나가다가, ‘회오’라는 대목에서 걸립니다. 다른 말마디를 그대로 둔다 하더라도 ‘회오’라는 말마디는 참말 아니지 않느냐고, 이러한 말마디를 반드시 써야 하느냐고, 하는 생각이 자꾸자꾸 납니다.

 

 국어사전에서 한국말 ‘뉘우치다’를 찾아보면, “스스로 제 잘못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가책을 느끼다”로 풀이합니다. 국어사전에서 한자말 ‘회오’를 찾아보면 말풀이가 겹말입니다. 아마, 한자말 ‘회오’만 국어사전에서 찾아본다면, 이 한자말 풀이가 겹말인 줄 알아채지 못하리라 봅니다. 한국말 ‘뉘우치다’를 함께 찾아볼 뿐 아니라, 한자말 ‘회오’가 딱히 남다르다 싶은 낱말이 아닌 줄 생각할 때에 비로소 이 얄궂은 말풀이와 말씀씀이를 깨닫습니다.

 

 회오의 눈물을 흘렸다
→ 뉘우치며 눈물을 흘렸다
→ 뉘우치는 눈물을 흘렸다
 …
 절절한 회오로 가득 차 있었다
→ 애타는 뉘우침으로 가득 찼다
→ 애끓는 뉘우침으로 가득 찼다
→ 눈물겨운 뉘우침으로 가득 찼다
 …

 

 보기글에서 밝히는 “뉘우치는 눈물”은 여러모로 돌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말뜻 그대로 뉘우치는 눈물입니다. 다음으로, 슬프다고 여기는 눈물입니다. 다음으로, 부끄러이 여기는 눈물이며, 안타까이 여기는 눈물이거나, 안쓰러이 여기는 눈물입니다. 스스로 꾸짖는 눈물이나, 스스로 나무라는 눈물일 수 있어요. 나를 채찍질하는 눈물이 되거나, 나를 다그치는 눈물이 되기도 할 테지요.

 

 잘못을 깨닫는다 할 때에는, 뉘우칠 수 있고 슬프게 여길 수 있으며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참 바보였구나 하고 여긴다거나, 나는 꽤 멍청했구나 하고 여길 수 있어요.

 

 어떤 빛, 어떤 느낌, 어떤 이야기, 어떤 결인가를 찬찬히 살펴봅니다. 어떤 말, 어떤 글일 때에 내 넋을 환하게 밝힐 만한가 곰곰이 따집니다. (4345.1.3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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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1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1-31 18:37   좋아요 0 | URL
버릇처럼 쓰는 말투를 손질하거나 고치기란
참 힘들어요.

생각을 깊이 기울여야
차근차근 하나씩 가다듬을 수 있어요.

에고..
 

 

묶음표 한자말 165 : 감우(甘雨)

 


.. 문자 그대로 감우(甘雨)로구나 싶었다. 들과 풀과 나무와 내와 배꽃, 복숭아꽃이 달디달게 목을 축이고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이는 듯했다 ..  《박완서-혼자 부르는 합창》(진문출판사,1977) 16쪽

 

 “문자(文字) 그대로”는 “말 그대로”로 다듬고, “자라는 게”는 “자라는 모습이”로 다듬어 줍니다.

 

 이 글월에서는 ‘배꽃’이라 적지, ‘이화(梨花)’라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학교 이름이라든지 적잖은 데에서는 ‘이화’라는 낱말을 곧잘 씁니다. 배나무에 핀 꽃은 배꽃이라 하면 될 텐데, 굳이 한자로 덮어씌우고야 말아요.

 

 이리하여,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말마디는 ‘단비’이지만, 이 글월에서는 ‘감우(甘雨)’라는 한자말이 튀어나옵니다. 한글로만 적는다면 자칫 헷갈릴까 싶어 묶음표를 치고 ‘甘雨’를 달아 놓습니다. 그런데, 보기글 뒷자리를 보면 “달디달게 목을 축이고”라는 대목이 있어요. 이러한 말마디는 ‘달다’라고 적으나, 빗물이 달디달다고 하는 자리에는 왜 ‘단비’라 적지 못할까 궁금합니다.

 

 감우(甘雨) : 때를 잘 맞추어 알맞게 내리는 비
   - 7년 대한에 감우를 만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

 

 감우(甘雨)로구나 싶었다
→ 단비로구나 싶었다
→ 반가운 비로구나 싶었다
→ 달콤한 비로구나 싶었다
→ 고마운 비로구나 싶었다
 …

 

 ‘감우’나 ‘甘雨’는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자말이요 중국말입니다. 한국사람이 쓸 말이 아닙니다. 한국사람이 주고받을 한국말은 ‘단비’입니다. 같거나 비슷한 뜻으로 “달디단 비”라 할 수 있고 “달콤한 비”라 할 수 있습니다. 글흐름을 살피면, “반가운 비”나 “고마운 비”나 “즐거운 비”나 “좋은 비”라 해도 잘 어울립니다.

 

 “알맞게 내리는 비”라든지 “제때에 내리는 비”라든지 “목마를 때 내리는 비”라든지 “가뭄을 씻는 비”처럼 적을 수 있어요. “목마름을 씻는 비”나 “타는 목을 씻는 비”나 “가문 땅을 적시는 비”라 해도 됩니다.

 

 알맞게 살릴 말마디를 헤아리면 좋겠습니다. 살가이 북돋울 글줄을 톺아보면 반갑겠습니다. 기쁘게 일굴 겨레말을 꿈꾸면 고맙겠습니다. (4345.1.3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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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26) 어제의 1 : 어제의 카레

 

.. “냉장고에서 약간 굳은 어제의 카레를 따뜻한 밥 위에 얹어, 녹여 가면서 먹는 거지.” ..  《아베 야로/조은정 옮김-심야식당 (1)》(미우,2008) 23쪽

 

 ‘약간(若干)’은 ‘조금’이나 ‘살짝’으로 다듬습니다. “먹는 거지”는 “먹지”나 “먹는 셈이지”나 “먹는단 말이지”로 손봅니다.

 

 어제의 카레를
→ 어제 만든 카레를
→ 어제 먹고 남은 카레를
→ 어제 미리 만든 카레를
→ 어제 해 놓은 카레를
 …

 

 만화영화 〈아따맘마〉를 한국말로 보다가 일본말로 보며 아래쪽에 뜨는 글을 읽으니, ‘한글로 옮긴 글’ 가운데 적잖이 ‘일본말’인 대목이 보입니다. 〈아따맘마〉뿐 아니라 다른 만화영화도 이와 비슷할 텐데, 사람들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한글로 옮긴 글’이나 ‘한국말로 옮긴 말’이 참말 한국말인지, 껍데기만 한국말인지, 일본말을 고스란히 옮긴 말인지를 살피지 못합니다. 살필 겨를이 없다 할 만하고, 살필 마음이 없는지 모르며, 살필 까닭을 못 찾는지 모릅니다.

 

 일본 만화책 《심야식당》을 한국말로 옮긴 책에서 읽는 글 또한, 이 글이 옹글게 쓴 한국말인가 아닌가를 헤아리는 사람은 몹시 드물거나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지 않으랴 싶어요. 아니, ‘심야’와 ‘식당’이라는 낱말을 이렇게 한글로 적바림하면 한국말이라 할 수 있는가를 돌아보는 사람은 있기나 할는지요.

 

 이제 ‘심야(深夜)’ 같은 한자말은 아주 익숙히 쓰는 한국말로 삼을 만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심야’는 남달리 쓸 만한 낱말은 아니에요. 그저 “깊은 밤”을 뜻할 뿐입니다. “깊은 밤”을 가리키는 한국말은 ‘한밤’이에요. 그러니까, 만화책 《심야식당》을 옳게 한국말로 옮기자면, 먼저 “심야식당” 아닌 “한밤식당”이어야 합니다.

 

 ‘식당(食堂)’ 같은 한자말 또한 널리 쓰는 한국말로 삼아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식당’이란 딱히 새롭거나 뜻깊은 낱말이 아니에요. 그저 “밥집”이나 “밥가게”를 가리킬 뿐입니다. 곧, 만화책 《심야식당》을 찬찬히 한국말로 헤아리자면, 바야흐로 “한밤 밥집”이나 “한밤 밥가게”인 셈이에요.

 

 어제 미리 만들어 냉장고에서 살짝 굳힌 카레
 어제 미리 해 놓고 냉장고에서 하루쯤 굳힌 카레
 어제 해서 냉장고에서 하루 굳힌 카레
 …

 

 오늘날 사람들은 ‘나이트’나 ‘미드나이트’ 같은 영어를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온갖 영어를 온갖 자리에 버젓이 씁니다.

 

 오늘날 사람들 말버릇은 먼 옛날부터 고이 이어졌다고 느낍니다. 먼 옛날부터 한국말 아닌 중국말을 이웃 한국사람이랑 생각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버젓이 쓰던 흐름이 고스란히 이어졌으니, 지난날에는 중국말을 한국말인 듯 거들먹거리며 썼다면, 오늘날에는 영어를 한국말인 양 거들먹거리며 씁니다. 지난날에는 중국말을 마치 한국말을 하듯 아무렇지 않게 썼다면, 오늘날에는 영어를 꼭 한국말이라도 되는 듯 아무렇지 않게 써요.

 

 어떻게 살아가야 아름다운 내 나날인가를 생각할 때에, 내 삶과 넋과 말이 아름다이 꽃피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며 사랑할 때에 기쁜 내 하루인가를 돌아보아야, 내 삶과 넋과 말에 사랑이 깃드는 꿈을 어떻게 건사할 수 있는가를 깨닫습니다.

 

 생각을 잃으니 말을 잃습니다. 사랑을 잊으니 말을 잊습니다. 생각을 찾으며 말을 찾습니다. 사랑을 빛낼 때에 말을 빛냅니다. (4345.1.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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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928) 있다 8 : 동그랗게 뜨고 있다

 

.. 그 아기는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 할머니는 그 아기를 품에 꼭 안고 원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하이타니 겐지로/김은하 옮김-우리 모두 가위바위보!》(예꿈,2008) 13쪽

 

 하나하나 차근차근 생각하면서 말하지 않으면 “뜨고 있었다”나 “나누고 있었다” 같은 말마디를 그냥 쓰고 맙니다. 더욱이, 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길 때에 깊이 헤아리거나 옳게 살피지 않으면, 이렇게 “-고 있다” 같은 말투를 그대로 두고 맙니다.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x)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o)

 

 눈은 뜹니다. 눈을 “뜨고 있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뜻이나 느낌을 조금 더 세거나 달리 나타내고 싶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나 “눈을 말똥말똥 동그랗게 떴다”처럼 적바림합니다. 앞이나 뒤에 꾸밈말을 알맞게 넣어야 해요.

 

 보기글 끝자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에서는 “이야기를 나누었다”로 맺으면 돼요. “-고 있었다”는 잘못 붙이는 군더더기예요.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처럼 적기도 하는데, 이렇게 적을 때에도 올바르지 않아요. “이야기를 나누었다”처럼 적거나 “이야기를 한창 나누었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제대로 쓸 말을 살피고, 알맞게 나눌 말을 생각해야 해요. 참다이 쓸 말을 곱게 사랑하고, 어여삐 주고받을 말을 살가이 보듬어야 해요. (4345.1.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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