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50) -의 치유 : 상실감의 치유

 

아이가 느낄지도 모르는 상실감의 치유를 위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웬디 이월드·알렉산드라 라이트풋/정경열 옮김-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포토넷,2012) 57쪽

 

  ‘상실감(喪失感)’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후의 느낌이나 감정 상태”를 뜻한다고 해요. 쉽게 말하자면 “잃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 보기글처럼 “아이가 느낄지도 모르는 상실감”처럼 적으면 ‘느끼다’라는 낱말이 겹으로 쓰인 꼴이 되고 말아요. 적어도 “아이의 상실감”처럼은 적어야 올바르고, “치유(治癒)를 위(爲)해”와 묶어서, “아이가 잃어버린 마음을 달래자면”이나 “아이가 무언가 잃은 허전함을 다독이려면”이나 “아이가 무언가 잃어 아픈(슬픈) 마음을 보듬자면”으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최소한(最小限)’은 ‘적어도’로 손보고, ‘부분적(部分的)으로라도’는 ‘조금이라도’로 손봅니다.

 

 상실감의 치유를 위해
→ 상실감을 씻자면
→ (잃은) 아픔을 달래자면
→ (잃어버린) 슬픔을 다독이려면

 

  한자말 ‘상실감’과 ‘치유’를 그대로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상실감을 치유하자면”이나 “상실감을 치유하려면”쯤으로는 적어야 알맞습니다. ‘(무엇)의 치유’처럼 적는 꼴은 일본 말투입니다. 한국 말투로는 이렇게 적지 않아요. 한국 말투로는 ‘(무엇)을 치유한다’처럼 적거나 ‘(무엇)을 씻는다/달랜다/다독인다/다스린다’처럼 적어요.


  깊이 헤아릴 수 있다면 ‘상실’이나 ‘치유’ 같은 한자말부터 안 쓸 만합니다. 이러한 한자말을 자꾸 쓰기 때문에 ‘-의’ 넣는 일본 말투가 한국 말투라도 되는 듯 끝없이 스며들어요. 스스로 낱말부터 알맞게 살피고 고를 때라야, 비로소 말투를 슬기롭고 어여삐 다스릴 수 있어요. 작은 말씨 하나를 헤아리면서 서로 기쁘게 나눌 말빛을 찾아요. 작은 낱말 하나 곱게 영글면서 다 함께 활짝 꽃피울 말삶을 북돋을 수 있어요.


  스스로 잃어버린 한국말을 찾을 수 있기를 빌어요. 한국사람 스스로 잃은 넋과 말과 삶을 아름다이 되찾아 환하게 빛낼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1.11.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아이가 무언가 잃어버려 아픈 마음을 달래자면 적어도 조금이나마 그렇게 해야 한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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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 짓는 애틋한 틀
 (312) 옮겨심기

 

4월은 싹이 나는 달일 뿐만 아니라 이식(移植)하는 달이기도 하다 … 그리고 조금만 있으면 바라는 대로 곧 옮겨 심는 시기가 된다
《카렐 차페크/홍유선 옮김-원예가의 열두 달》(맑은소리,2002) 71, 99쪽

 

  ‘번역(飜譯)’이란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김”을 뜻합니다. 곧, 한국말은 ‘옮기다’요 한자말이나 중국말이나 일본말로는 ‘飜譯’인 셈입니다. 한글로 ‘번역’이라 적는대서 한국말이 되지는 않아요. 그러나, ‘옮김꾼’ 같은 이름은 거의 안 쓰입니다. ‘번역가’라는 이름만 쓰입니다. 책을 살피면 간기에 ‘옮긴이’라고 적습니다만, 이 이름처럼 바깥말을 한국말로 옮기는 일을 하는 분들 스스로 이녁 일을 ‘옮긴이-옮김꾼’처럼 밝히는 분은 매우 드물거나 아예 없다시피 해요.


  국어사전에서 ‘이식(移植)’이라는 한자말을 찾아봅니다. 뜻풀이에 “= 옮겨심기. ‘옮겨심기’로 순화”처럼 나옵니다. 곧, ‘이식’이든 ‘移植’이든 한국사람한테는 알맞지 않다는 뜻입니다. 한국사람이 쓸 한국말은 ‘옮겨심기’ 한 가지라는 소리입니다.

 

 옮겨살다 ← 이사(移徙)
 옮겨가다 ← 이전(移轉)
 옮겨적다(옮기다) ← 번역

 

  옮겨서 살고, 옮겨서 가며, 옮겨서 씁니다. 옮겨서 적고, 옮겨서 다니며, 옮겨서 말합니다. 생각해 보니, ‘통역(通譯)’이란 “말이 통하지 아니하는 사람 사이에서 뜻이 통하도록 말을 옮겨 줌”을 뜻한다 하니, 이 한자말을 ‘옮겨말하다’처럼 새롭게 쓸 수 있어요. 한 낱말로 새롭게 쓰기 아직 낯설다면 ‘옮겨 말하다’처럼 써도 돼요. 스스로 익숙하게 쓰고, 스스로 밝게 쓰며, 스스로 즐겁게 쓰면, 차츰차츰 환하게 빛나는 낱말이 되리라 느껴요. (4345.1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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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8) -에서의 14 : 자유세계에서의 최고의 모델

 

‘자유세계’에서의 최고의 모델로 선전하는 미국식 모델은 미국을 뺀 다른 곳에서는 선언의 수준에 머물렀다
《이임하-적을 삐라로 묻어라》(철수와영희,2012) 421쪽

 

  “최고(最高)의 모델(model)로 선전(宣傳)하는”은 “가장 훌륭하다고 내세우는”이나 “가장 첫손으로 꼽는”으로 다듬고, 바로 뒤따르는 “미국식(-式) 모델(model)은”은 “미국은”이나 “미국 모습은”으로 다듬어 봅니다. ‘모델’이라는 낱말을 두 차례 쓰기보다는 한 번만 쓰면 더 낫고, 아예 덜면서 글흐름에 녹아들도록 하면 한결 낫습니다. “선언(宣傳)의 수준(水準)에 머물렀다”는 토씨 ‘-의’만 덜어 “선언 수준에 머물렀다”로 손볼 수 있는데, “선언과 같을 뿐이었다”라든지 “허울좋은 말뿐이었다”나 “허울만 그럴듯했다”로 손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선언’이란 알맹이 없이 말만 그럴듯하다는 뜻을 가리키니까, 말만 그럴듯하다고 하거나 허울만 좋아 보인다고 하면 넉넉하리라 생각해요.

 

 ‘자유세계’에서의 최고의 모델로 선전하는 미국식 모델
→ ‘자유세계’에서 첫손가락으로 꼽는 미국
→ ‘자유세계’에서 가장 좋다고 손꼽는 미국
→ ‘자유세계’에서 첫손으로 내세우는 미국
 …

 

  토씨 ‘-의’를 잇달아 넣으며 글을 쓰는 버릇이 자꾸 퍼집니다. 쓸 만하기에 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곰곰이 살피면 글쓴이 스스로 이녁 생각을 슬기롭게 담아 나타내는 말투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쓰는구나 싶어요. 초등학교에서도 대학교에서도 내 생각을 내 나름대로 슬기롭게 나타내도록 가르치기보다는 대학바라기 시험공부나 영어공부만 시켜요. 하루빨리 삶다운 삶을 찾고 배움다운 배움을 찾아서, 말다운 말과 글다운 글이 아름다이 꽃피울 수 있기를 빕니다. (4345.11.7.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자유세계’에서 가장 좋다고 손꼽는 미국은 미국을 뺀 다른 곳에서는 허울만 좋아 보일 뿐이었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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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61) 씨앗돈

 

  돈을 쓰고 돈을 벌기는 하지만, 돈을 그닥 생각하지 않으며 살다 보니, 돈과 얽힌 낱말이 낯설거나 새롭곤 합니다. ‘씨앗돈’이라는 낱말을 처음 들은 엊그제, 무슨 돈을 말하는가 하고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그렇지만, 말짜임이 쉽기에 “씨앗과 같은 돈”이라는 뜻이로구나 하고 짚었어요. 시골에서는 이듬해 흙을 일굴 적에 쓸 씨앗을 갈무리해요. 이를테면 ‘씨나락’이라든지 ‘씨감자’라든지 ‘씨콩’이라든지 ‘씨마늘’을 건사합니다. 이처럼, 나중에 쓰리라 생각하며 건사하는 돈이 된다면 ‘씨돈’이나 ‘씨앗돈’이 될 테지요.


  낱말책을 뒤적여 봅니다. 낱말책에는 ‘씨앗’을 한자말로 옮겨적는 ‘種子’를 넣어 지은 ‘종잣돈(種子-)’ 한 가지가 실립니다. 낱말책에는 ‘씨돈’도 없고 ‘씨앗돈’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씨벼’라는 낱말은 싣습니다. 다만, ‘씨벼 = 볍씨’라고 다룰 뿐, 이듬해에 다시 심으려고 갈무리하는 벼라는 말풀이는 안 달립니다.


  그러고 보니 ‘밑돈’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나는 어릴 적에 ‘씨앗돈(씨돈)’ 같은 낱말은 거의 못 들었지만, 둘레 어른들은 으레 ‘밑돈’을 이야기했어요. 장사를 하려 하거나 제금나서 살아가려 할 적에 ‘밑돈’이 있어야 한다고들 하셨어요. 그러나, 지식인이나 기자나 글쟁이는 이 낱말을 그리 사랑하지 않습니다. 신문이나 잡지나 책에는 ‘기금(基金)’ 같은 낱말만 도드라져요. 한국말을 옹글게 쓰는 분이 참 드뭅니다. (4345.1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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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57) 맑음돌이

 

일기예보는 맑을 거라고 했지만, 맑음돌이를 잔뜩 만들어서 처마 밑에 걸어 놓고, 주머니에도 가득 넣고 왔는데
《우에야마 토치/설은미 옮김-아빠는 요리사 (112)》(학산문화사,2011) 18쪽

 

  일본사람은 비가 그치기를 바라며 ‘테루테루보즈(てるてる-ぼうず,照る照る坊主)’를 창가에 건다고 합니다. 일본사람이 쓴 문학책이나 만화책을 보면 ‘테루테루보즈’ 얘기가 참 자주 나와요. 일본은 한국보다 비가 잦기 때문일까요. 아무래도 비가 잦으니 비가 잦은 만큼 궂은 일도 잦을 수 있어, 이런저런 이야기가 새삼스레 있을 테지요.


  한국에서는 무엇이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글쎄.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무언가 거는 일이 있는가 알쏭달쏭합니다. 하늘에 대고 절을 하는 일은 있어도, 무언가를 붙이거나 거는 일은 드물지 싶어요. 아니, 나도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모를 수 있어요. 먼먼 옛날 시골사람은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걸거나 붙이거나 하면서 비멎기를 바랐을는지 몰라요. 이제 도시 사회가 되고 보니, 어느 도시에서도 비멎기 바라는 무언가를 잊었다든지, 시골에서도 못물이 넉넉히 있기에 비멎기를 바라는 몸짓이 사라지거나 잊혔을 수 있어요.

 

 맑음돌이 ↔ 테루테루보즈

 

  한국말로 옮긴 어느 만화책을 읽다가 ‘맑음돌이’라는 이름을 봅니다. 내가 이제껏 본 일본책에서는 으레 일본말 ‘테루테루보즈’만 나왔는데, 이 일본말을 한국말로 옮겨적은 이름을 처음으로 봅니다.


  테루테루보즈는 ‘테루테루보즈’라 적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이렇게 옮겨적은 이름이 참 앙증맞고 잘 어울리며 쓸 만하다고 느낍니다. 일본사람이 즐기는 삶은 일본사람 나름대로 일본말로 붙여서 즐기면 되고, 한국사람은 이들 일본살이를 한국말로 예쁘고 슬기롭게 붙여서 가리켜도 될 만하구나 싶습니다. 때로는 한국사람도 ‘비멎기 놀이’를 해 볼 수 있겠지요. 한국사람이 ‘비멎기 놀이’를 할 적에는 ‘맑음돌이’나 ‘맑음순이’를 내걸 수 있어요. ‘맑음아이’라든지 ‘맑음고양이’를 만들어 걸어도 돼요. ‘맑음냐옹’이라든지 ‘맑음멍멍’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생각에 따라 말이 태어납니다. 생각에 따라 태어나는 말은 알뜰살뜰 아끼면 씩씩하게 자랍니다. ‘맑음-’을 붙여 어떤 새말을 지으면 재미나며 어여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거꾸로 ‘-맑음’을 달아 새롭게 새말을 지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마음맑음’이라든지 ‘사랑맑음’을 비롯해서 ‘하늘맑음’이나 ‘꿈맑음’을 쓸 수 있어요. ‘생각맑음’이나 ‘얼굴맑음’을 써도 잘 어울려요. (4345.1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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