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1) 야생의 2 : 야생의 땅

 

25명쯤 되는 우리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어느 강가에 있는 야생의 땅에 모였다
《아르네 네스와 네 사람/이한중 옮김-산처럼 생각하라》(소동,2012) 171쪽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어느 강가에 있는”은 “뉴사우스웨일스 주 어느 강가에 있는”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 보기글에서는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어느 강가의”처럼 적었을는지 모릅니다. 곧, 앞과 뒤 모두 토씨 ‘-의’를 적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뒤에는 토씨 ‘-의’를 안 넣었어요. 이 흐름을 잘 살피면, 보기글 앞쪽에도 토씨 ‘-의’ 없이 말끔하게 적을 수 있어요.


  차근차근 생각하면 ‘강가’나 ‘냇가’나 ‘물가’나 ‘바닷가’처럼 적을 수 있어요. 차근차근 생각하지 않으면 ‘강변(江邊)’이나 ‘천변(川邊)’이나 ‘해변(海邊)’처럼 적을 테고요.

 

 야생의 땅에 모였다
→ 들판에 모였다
→ 들녘에 모였다
→ 들에 모였다
 …

 

  글쓴이는 “야생지(-地)”나 “야생의 지(地)”라고 써서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기에 “야생의 땅”이라 적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야생의 소년”이나 “야생의 사상”처럼 으레 ‘-의’를 붙인 ‘야생 + 의’ 꼴을 쓰는구나 싶어요. ‘야생’이 “들에서 자라는”을 뜻하기에 ‘들’을 가리키는 앞가지 구실을 하는 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야생의 땅”을 한국말로 적자면 ‘들땅’이 되는데, 들을 가리켜 ‘들땅’이라 하거나, 산을 가리켜 ‘산땅’이라 하지는 않아요. 그냥 ‘들’이라 하고 ‘산’이라 해요. 곧, 이 보기글에서는 “들에 모였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느낌과 뜻을 살피면서 ‘들판’이라 적을 수 있고, ‘들녘’이라 적어도 됩니다. ‘숲’이나 ‘풀숲’이라 적을 수 있겠지요. 어떤 들인가를 생각해 보면, “너른 들”이나 “조용한 들”이나 “예쁜 들”이라 적어도 잘 어울려요.


  생각을 할 때에 비로소 말이 말답습니다. (4345.8.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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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사람쯤 되는 우리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 어느 냇가에 있는 들에 모였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869) 야생의 1 : 야생의 말

 

진정한 용사만이 야생의 말을 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용기가 없다면 모두 돌아가도 좋아
《류은-바람드리의 라무》(바람의아이들,2009) 107쪽

 

  ‘진정(眞正)한’은 ‘참된’으로 다듬습니다. “탈 수 있다는 건”은 “탈 수 있는 줄은”으로 손봅니다. “용기(勇氣)가 없다면”은 그대로 두어도 되고 “씩씩하지 않다면”으로 손질해 보아도 됩니다. “알고 있겠지”는 “알겠지”로 손질합니다.


  ‘야생(野生)’은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람”을 뜻한다고 해요. 국어사전에는 “야생 약초”나 “그는 야생의 짐승처럼 성질이 거칠었다” 같은 보기글이 실립니다. 그러니까, “야생 약초”는 “들약풀”이나 “들풀”이라는 소리이고, “야생의 짐승”은 “들짐승”이라는 소리예요.

 

 야생의 말을
→ 야생마를
→ 들말을
→ 들판에서 뛰노는 말을
→ 들에서 자라는 말을
 …

 

  여러 해 앞서 《야생초 편지》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무척 사랑받으며 앞으로도 널리 사랑받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름이 알맞지 않게 붙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퍽 드뭅니다. “야생에서 자라는 초”라 하여 ‘야생초’라 했을 텐데, 스스로 여느 사회 바깥에서 조용히 지내고자 하는 매무새라 한다면 ‘들풀’이라고 해야 올바르다고 느낍니다. “야생에서 자라는 초”가 아니라 “들에서 자라는 풀”일 테니까요.


  이와 비슷하게 ‘야생화’이니 ‘야생의 꽃’이니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또한 올바르지 않은 말마디입니다. 들에서 자라는 꽃은 ‘들꽃’입니다. 우리가 일본사람처럼 “野生の花”라고 이야기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야생’이나 ‘야생의’를 붙이는 말투는 나날이 늘기만 할 뿐, 줄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알맞고 올바르게 가다듬으려 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이 엉터리가 되든 뒤죽박죽이 되든 마음을 쏟으려 하지 않습니다.

 

 야생 약초 → 들에서 캔 약풀
 야생의 짐승 → 들짐승

 

  보기글에 나오는 “야생의 말” 같은 말마디는 더없이 얄궂고 안쓰럽습니다. 차라리 ‘야생마’라고 해 주기라도 하지, ‘馬’가 아닌 ‘말’을 써 준다면서 “야생의 말”이라고 하니 그지없이 안 어울립니다. 아니면 ‘야생말’이라 하든지요.


  곰곰이 살폈다면 ‘야생말’이라 하지 않고 ‘들말’이나 ‘들에서 사는 말’이라 했으리라 봅니다. 사람들이 도시처럼 얽매인 곳에서 살지 않고 들판이나 산골처럼 홀가분하게 노닐거나 일하는 곳에서 산다 할 때에는 ‘들사람’이라 하면 되고요.

 

 들꽃 / 들장미 / 들국화 / 들풀 / 들나물 / 들고양이 / 들개 / 들사람

 

  우리 말 앞가지 ‘들-’을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우리 삶을 우리 나름대로 생각하고 되새기면서 나타내며 나눌 말과 글을 예쁘게 헤아려 봅니다. 내 모습을 내 깜냥껏 내 이야기로 풀어낼 빛나는 길을 곱씹어 봅니다. 내가 누리고 아이들이 누릴 기쁜 삶자락을 어떤 손으로 어떻게 일구어 사랑스러운 삶터로 북돋우면 즐거울까 하고 찬찬히 짚어 봅니다.


  집오리가 있고 들오리가 있습니다. 집거위가 있고 들거위가 있습니다. 집고양이와 함께 들고양이가 있으며, 집짐승과 맞물려 들짐승이 있습니다. (4342.11.11.물./4345.8.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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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힘을 쓰는 사람만이 들말을 탈 수 있는 줄 알겠지? 참힘이 없다면 모두 돌아가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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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60) 존재 160 : 무언가에 속해 있는 존재

 

우리의 본성과 우리가 해 온 여행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에 속해 있는 존재임을 깊이 알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本性)과”는 “우리 마음과”나 “우리 참마음과”나 “우리 속마음과”나 “우리 밑마음과”로 다듬을 수 있고, “해 온 여행(旅行) 덕분(德分)에”는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나 “우리가 걸어온 길을 헤아리며”나 “우리가 디딘 발자국을 톺아보며”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속(屬)해 있는”은 “깃든”이나 “하나된”으로 손볼 수 있고, “알게 되어 있습니다”는 “알 수 있습니다”로 손볼 수 있어요.


  한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돌아보는 글월이기에 낱말과 말투를 한결 찬찬히 돌아봅니다.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넓게 헤아립니다. 더 찬찬히 살피고 더 상냥히 가다듬습니다.


  내 밑바탕이 되는 모습은 밑모습이라 할 만할까요. 내 밑바탕이 되는 넋이라면 밑넋이라 하면 될까요. 내 밑바탕이 되는 마음이라면 밑마음이라 하고, 내 밑바탕이 되는 생각이라면 밑생각이라 하면 되나요.


  국어사전에 담긴 낱말을 헤아리고, 국어사전에 안 담겼으나 내 가슴속에 깃들어 숨쉬는 낱말을 헤아립니다. 나는 어디로든 씩씩하게 걸어갑니다. 내가 걷는 이 씩씩한 길은 나들이가 되기도 하지만, 마실이 되기도 하며, 들놀이나 숲놀이가 되기도 합니다. 나는 길을 걸어가며 발자국을 남깁니다. 내 발자국은 발자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느 한 곳에 깃든 내 몸일 수 있어요. 어느 한 곳에 들어가는 내 몸일 수 있어요.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거나 깃들지 않으며 홀가분한 내 몸일 수 있어요.


  알고 싶은 이야기를 천천히 깨닫습니다. 알고픈 꿈을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말이 빛나면서 넋이 빛납니다. 넋이 빛나면서 말이 빛납니다.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스스로 가장 고운 생각을 일구며, 스스로 가장 예쁜 말주머니를 엮습니다.

 

 무언가에 속해 있는 존재임을
→ 무언가에 깃들어 살아가는 줄
→ 무언가 되어 살아가는 줄
 …

 

  우리는 저마다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일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어떠한 사람이 되어 마음을 빛낼까 생각합니다. 내가 이웃이나 동무한테 들려주는 말은 얼마나 곱게 빛나는 말일까 생각합니다. 내가 손을 놀려 쓰는 글에 담기는 이야기는 얼마나 아리땁고 환하며 맑을까 생각합니다. (4345.7.3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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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밑마음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 되어 살아가는 줄 깊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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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939) 마찬가지

 

마찬가지로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낄 거야 …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아픈 건 우리가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단다
《요시노 겐자부로/김욱 옮김-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양철북,2012) 217, 219쪽

 

  “자신(自身)이 불행(不幸)하다고”는 “스스로 즐겁지 않다고”나 “스스로 슬프다고”로 손볼 수 있고, “느낄 거야”는 “느끼겠지”나 “느낄 테지”로 손봅니다. “마음이 아픈 건”은 “마음이 아픈 까닭은”이나 “마음이 아프다면”으로 손질하고, “정상적(正常的)인 정신(精神) 상태(狀態)에서 벗어났다는 것을”은 “옳은 마음에서 벗어났다고”나 “올바른 마음하고 동떨어졌다고”로 손질해 봅니다. “알려주는 신호(信號)라고”는 “알려주는 뜻이라고”나 “알려주는 셈이라고”나 “알려준다고”로 다듬으면 한결 낫습니다.


  그나저나 이 보기글에서는 이런저런 한자말이나 말투를 다듬는다 해서 글이 매끄럽거나 예쁘지 않아요. 여느 눈길로는 좀처럼 알아채지 못하는 얄궂은 대목이 있습니다. 첫 글월은 첫머리를 ‘마찬가지로’로 엽니다. 다음 글월은 첫머리를 ‘이와 마찬가지로’로 엽니다. 똑같이 ‘마찬가지’라는 낱말을 쓰지만, 두 낱말을 쓴 모양새가 달라요.


  이와 비슷하게 쓸 만한 다른 낱말을 넣어 생각해 봅니다. 이를테면, ‘매한가지’나 ‘비슷’과 ‘같다(똑같다)’를 생각해 봅니다. 이들 낱말을 글 첫머리에 넣는다 할 때에도 “매한가지로 눈이 하나밖에 없는”이나 “비슷하게 눈이 하나밖에 없는”이나 “똑같이 눈이 하나밖에 없는”처럼 적어도 잘 어울릴까요.

 

 마찬가지로 (x)
 이와 마찬가지로 (o)

 

  ‘마찬가지’나 ‘매한가지’나 ‘비슷’이나 ‘같다(똑같다)’를 글 첫머리에 넣을 때에는 앞 글월에 나오는 어떤 이야기를 듭니다. 곧, ‘이와’를 넣어야 글이 이어집니다. “너는 참 예뻐. 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참 예뻐.”처럼, ‘이와’라는 말마디가 들어가서 앞에 어떠한 이야기가 나오는가를 밝혀야 올발라요.


  어쩌면, “마찬가지로 나도 참 예뻐”라고만 적으면서 ‘이와’는 살짝 덜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러하지만’이나 ‘그러하지만’이라 적어야 될 자리에 ‘하지만’이라 적어 버릇하거든요. 더군다나, 적잖은 글쟁이나 지식인은 ‘이리해서’나 ‘그리해서’라 적어야 될 자리에 ‘해서’라고만 적기 일쑤예요.


  말길이가 길어지거나 늘어지기에 이처럼 줄여서 쓸 수도 있다고 여길 만하지만, 곰곰이 살피면 말길이 때문에 줄여서 쓴다고 느끼기 힘들어요. 멋을 부리거나 치레를 하려고 자꾸 ‘새롭다 싶은 말투’로 써 버릇하는구나 싶어요. 한동안 ‘쉼표(,)’를 글 사이사이 수두룩하게 집어넣는 문학이 퍼진 적 있어요. 이야기가 새로워야 할 텐데,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얽매였달까요. 어느 모로 보면, 내 마음을 더 넓고 깊이 보여준다 할 말투라 할 수 있지만, 가만히 살피면 서로서로 생각을 주고받고 마음을 여는 길을 가로막는 말투라 할 만하기도 해요.

 

 비슷한 것을 지었다
 노래 비슷한 것을 지었다

 

  더 깊은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끼리라면 “비슷한 것을 지었다”라고만 적어도 무엇을 지었다는 뜻인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낯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노래 비슷한 것을 지었다”라고 적어야 제대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바쁘다 바빠’ 하고 외치는 삶터에서는 “마찬가지로 말하자면” 같은 말투가 자꾸 퍼질밖에 없으리라 느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하자면”처럼 제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꾸 사라지리라 느낍니다.


  뜻을 알고 느낌을 새긴다면 2000년대 또는 2010년대 새로운 말투로 여길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터에서는 새로운 말투라 하듯, 오늘날 바쁘고 힘든 도시 사회에서는 “이와 마찬가지로 말하자면”처럼 말하는 한국 말투는 이냥저냥 잊어도 될 만하고 여기면서 “마찬가지로 말하자면”처럼 말해 버릇해도 된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와같이”처럼 몽땅 붙여서 쓰는 사람도 제법 있어요.


  한국 말투는 벌써 무너진 지 오래라 하는 사람이 있고, 지구별을 헤아리는 마당에 영어를 배워야지 한국말을 익혀서 무엇에 쓰느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를 배우는 사람치고 영어 말투를 아무렇게나 쓰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콩글리쉬’를 쓰면 엉터리라 나무라는데, 정작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며 한국말을 알맞고 바르며 슬기롭고 어여삐 가다듬는 사람은 찾아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참말 한국 말투는 벌써 무너진 지 오래일까요? 참말 한국 말투는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어른들 스스로 무너뜨리면서 ‘예전에 무너졌다’고 둘러대는 셈 아닐까요? 참말 한국 말투를 살리거나 살찌우거나 빛낼 오늘날 어른들 스스로 제 할 몫을 안 하며 바보스레 살아가지는 않나요? (4345.7.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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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마찬가지로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슬프다고 느끼겠지 …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아프다면 우리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고 알려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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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935) 속 37 : 더위 속에서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이문구형과 함께 소독내인지 닭똥내인지가 진동하는 성동서 유치장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이시영-은빛 호각》(창비,2003) 49쪽

 

  ‘진동(振動)하는’은 ‘나는’이나 ‘코를 찌르는’으로 손볼 수 있고, “유치장 생활(生活)을 한”은 “유치장에서 지낸”이나 “유치장에서 살던”으로 손볼 수 있어요. 쉽고 보드라운 말씨로 잘 가다듬으면, 조금 더 환하며 빛나는 말마디를 엮을 수 있습니다.


  “더위 속에서”와 같은 말투도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처럼 글을 쓰거나 시를 쓰거나 노래를 하더라도 뜻은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나 글은 뜻만 나눌 수 있대서 끝이지 않아요. 뜻만 나눌 수 있기에 “냄새가 진동하는”처럼 글을 쓰는 일이 올바르지는 않아요. 뜻을 나누면서 생각을 키우고, 생각을 키우면서 삶을 북돋울 수 있게끔, 말을 가다듬고 마음을 돌아보는 길을 찾을 때에 즐거우면서 올바르고 예뻐요.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 찌는 듯한 더위에
→ 찌는 듯한 더위에 시달리며
→ 찌는 듯한 더위를 견디며
 …

 

  “더위 속에서”나 “추위 속에서”는 올바르지 않은 말투입니다. “더위에”나 “추위에”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사람은 더위 ‘속’으로 들어가거나 나오지 못해요. 추위 ‘속’으로 들어가거나 나오지도 못해요. 그저 더위를 누리고, 그예 추위를 누려요. 차츰 온도가 올라가며 더위가 되고, 차츰 온도가 내려가며 추위가 될 뿐이니, 어느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없어요.


  느낌을 살려 새롭게 적는다면 “더위에 시달리며”나 “추위에 몸부림치며”처럼 적을 수 있어요. “더위에 헐떡이며”나 “추위에 눈이 핑핑 돌며”처럼 적어도 돼요. 가만히 보면, 이처럼 느낌을 살려 새롭게 적으면 넉넉할 말투이지만, 느낌을 살리지 않는 바람에 엉뚱하게 ‘속’을 끼워넣는다 할 만해요. 생각을 살찌우지 못하니 얄궂게 ‘속’만 넣고 글투가 뒤엉키도록 하는구나 싶어요.

 

  문학을 하는 분들부터 한겨레 말투를 잘 추스르면 좋겠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도 우리 말투를 곱게 돌보면 좋겠어요. 아이를 낳아 말을 하나하나 물려주고 삶을 찬찬히 보여주는 어른들도 한국 말투를 알뜰히 갈고닦으면 좋겠어요.


  학교에 다닐 때에만 배우는 말과 글이지는 않아요. 외려 학교를 마치고 나서 더 깊고 넓게 배우는 말과 글이라 할 수 있어요. 동무를 사귀고 이웃과 어울리면서 한결 깊고 너른 누리를 돌아보는 말과 글을 아끼거나 사랑한다 할 수 있어요. (4345.7.2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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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 듯한 더위에 숨막히면서 이문구 형과 함께 소독내인지 닭똥내인지가 코를 찌르는 성동서 유치장에서 지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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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7-22 07:09   좋아요 0 | URL
'더위 속에서', '추위 속에서'란 말이 올바르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언뜻 떠오르지 않아서 여쭙니다.

숲노래 2012-07-22 07:18   좋아요 0 | URL
말 그대로예요. '더위에'와 '추위에'라고만 적어야 올발라요.
더위 '속'으로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어요.
추위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더위이든 추위이든 사람들은 이러한 날씨를 받아들이며 살아갈 뿐이니,
'속'이라는 말을 넣어서 쓸 수 없어요.

온도가 올라가고 내려갈 뿐이니,
어느 '속'에 들어가거나 나오지 않아요.

'비 속(빗속)'과 '눈 속'을 생각하면,
'더위 속'이나 '추위 속'은 잘못 쓰는 말투라고
잘 느낄 수 있을까요?

카스피 2012-07-23 22:02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자다보니 무척 덥습니다용ㅜ.ㅜ
 


 살가운 상말
 609 : 광대무변

 

집도 절도 없이 애비 에미도 없이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김해자-축제》(애지,2007) 116쪽

 

  네 글자 한자말 ‘광대무변(廣大無邊)’은 “넓고 커서 끝이 없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도 적잖이 쓰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도 꽤 쓰는 낱말입니다. 그런데, 한자말로 적자면 ‘광대무변’이겠지만, 한자말 아닌 한국말로 적자면 ‘끝없다’예요. 또는 ‘가없다’이고, 또는 ‘그지없다’입니다.


  보기글에서 쓴 ‘광대무변’ 뜻을 헤아리면 “끝없이 넓고 큰 벌판”을 가리키는 한국말 ‘허허벌판’을 넣을 만합니다. 허허벌판은 ‘벌판’을 가리키는 낱말이라 하지만, 쓰는 곳과 때에 따라서는 ‘벌판’뿐 아니라 ‘넓고 큰 무엇’을 일컬을 수 있어요. 이를테면, “허허벌판 같은 마음”이라든지 “허허벌판이 된 마음”처럼 쓸 수 있어요.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 허허벌판에서 태어나
→ 너른 들에서 태어나
→ 빈 들에서 태어나
 …

 

  생각을 넓히면 ‘허허벌판’을 바탕으로 ‘너른들’이나 ‘빈들’을 헤아릴 만합니다. ‘너른 들’이나 ‘빈 들’처럼 적어야 올바르다지만, 새 넋을 담는 새 낱말로 여길 수 있습니다. “가없는 터”나 “끝없는 곳”처럼 써도 돼요.


  마음을 살찌우면서 말을 하면 아름다우면서 넉넉합니다. 생각을 빛내면서 글을 쓰면 어여쁘면서 사랑스럽습니다.


  국어사전에 실린 “지구가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의 공간을 달리고 있다는” 같은 보기글이라면 “지구가 강바람이나 벼락처럼 빠르게 끝없이 넓은 곳을 달린다는”처럼 손볼 수 있고, “광대무변의 우주 공간” 같은 보기글이라면 “가없이 넓은 우주”처럼 손볼 수 있어요. 흐름에 맞추어 마음을 기울이고, 낱말 하나하나 예쁘게 넣습니다. 앞뒤를 살펴 생각을 꽃피우고, 낱말 하나 곱게 엮습니다.


  나는 넓디넓은 땅에서 살아갑니다. 내 마음은 가없이 넓은 바다와 같습니다. 나는 넓고넓은 마을에서 꿈을 키웁니다. 내 생각은 그지없이 널따란 하늘과 같습니다. 말은 숲이고, 숲은 사랑이며, 사랑은 삶입니다. (4345.7.2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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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절도 없이 애비 에미도 없이 허허벌판에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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