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고다 아야 지음, 차주연 옮김 / 달팽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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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숲책 읽기 146


《나무》

 고다 아야

 차주연 옮김

 달팽이

 2017.10.27.



똑똑 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사방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조릿대잎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14쪽)


나무가 목재로 쓰이기 이전의 살아 있는 모습에도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거늘 왜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인가. (47쪽)


나는 참지 못하고 나뭇조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폭한 듯 삼각형으로 갈라진 굽이는 강렬한 편백나무 향기를 내뿜었다. (68∼69쪽)


삼나무는 도대체 무엇을 양분으로 삼을까? 그것은 태양과 비, 즉 햇빛과 물뿐이다. (90쪽)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서 있을 때의 생명과 잘려서 목재가 된 이후의 생명 이렇게 두 번의 생명을 갖는다고 한다. (163쪽)


(나무는) 그저 젊은 목수를 압박하지만은 않는다. 압박하면서 그와 동시에 젊은 목수의 담력과 지혜를 키워 주고 있다. (170쪽)



  우리 집에 있을 적에는 언제나 우리 집 나무 기운을 받아들이고, 우리 기운을 나무한테 보냅니다. 우리 집을 떠나 여러 고장을 돌아다닐 적에는 여러 고장을 싱그러이 보듬는 나무가 퍼뜨리는 기운을 헤아리면서, 여러 고장에서 살뜰히 피어나는 나무한테 반갑다는 눈빛을 띄웁니다.


  나무 곁에 서서 줄기를 포근히 안으면 포근한 기운이 가슴을 거쳐 온몸으로 흐릅니다. 나무 앞에 서서 줄기에 손을 고요히 대면 고요한 기운이 손을 지나 온마음으로 물결칩니다. 저는 나무한테서 기쁜 웃음을 받고, 저는 나무한테 즐거운 노래를 띄웁니다.


  《나무》(고다 아야/차주연 옮김, 달팽이, 2017)를 읽으며 생각했어요. 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깊은 숨을 품고서 우리 곁에 있는가를 느끼고, 나무 한 그루 곁에서 얼마나 깊은 사랑을 지으면서 새롭게 나누는가를 돌아봅니다. 오롯이 나무한테 바치는 글이자, 옹글에 나무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담은 책 한 자락입니다.


  나무가 있기에 책걸상을 짜고, 집을 짓고, 종이하고 붓을 얻고, 땔감으로 겨울을 나고, 우리 터전을 푸르면서 맑게 돌보는 길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람은 나무한테 무엇을 돌려줄까요? 우리 사람은 숲에 무엇을 심을까요?


  나무가 살 터를 자꾸 밀어없애거나 짓밟는 사람은 아닌가요? 나무가 자랄 땅을 쉬잖고 밀어붙이거나 짓이기는 사람은 아닌지요? 조그마한 씨앗 한 톨이 우람한 나무가 됩니다. 작은 사람 하나가 아름다운 마을을 이루고 사랑스러운 고을로 피어납니다. 나무도 숲이 되고, 사람도 숲이 됩니다. 이야기도 숲이 되고, 노래도 숲이 됩니다. 모두 숲이면서 빛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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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옥 :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우리 여성의 앞걸음
박남옥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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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인문책시렁 80


《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마음산책

 2017.10.30.



강엿을 꺼내려고 손을 대어 보기도 전에 항아리 뚜껑만 떨어져 깨졌다. 그 소리에 뛰어나온 엄마는 속이 상해서 나를 깨양나무에 묶어버렸다. “작은아버지야아! 최 석사야아!” 나는 살려 달라고 울며 외치며 요동을 쳤다. 몸을 틀어대니 끈이 풀어져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갔다. (20쪽)


그대로 집에 가면 좋으련만 나는 이삼일에 한 번꼴로 삼덕동 파출소 앞 헌책방에 들러야 했다. 시간이 많은 날은 본정 안 골목의 헌책방인 태양당서점까지 진출한다. 시나리오, 영화잡지, 미술책 …… 돈이 모자라서 짜증이 날 뿐이지 책 사는 기쁨이란 정말 대단했다. (47쪽)


1955년 1월 6일에 나는 또 녹음실로 찾아갔다. 이번에는 대답 내용이 바뀌어 “연초부터 16mm에다 여자 작품을 녹음할 수는 없다”라고 한다. 녹음실 책임자 이름은 지금 잊었지만, 위의 말은 녹음 조수들이 나에게 한 말이다. (162쪽)


영화광이라면 누구가 기본이겠지만 나도 좋아하는 영화는 보통 두세 번 보고 다섯 번, 열 번 보게 되는 영화도 있다. 그중 1936년 독일 기록영화 〈민족의 제전〉은 스무 번쯤 본 것 같다. (219쪽)


김신재, 홍은원, 이제 두 사람 다 저세상으로 가고 나 홀로 남아서 생각한다. 인생이란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과 인생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하는. (267쪽)



  지난날 얼마나 많은 가시내가 사내하고 싸워서 울타리를 허물어야 했는가를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무렵 이 땅에서 살지 않았고, 가시내라는 몸을 입은 오늘이 아닌, 사내라는 몸을 입은 오늘이거든요. 그렇지만 제가 살지 않은 그 지난날에 숱한 가시내가 숱한 사내하고 부딪히면서 흘린 피땀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길을 고요히 눈을 감고 돌아볼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서 그때 그분들을 하나하나 마음에 그리면 뜻밖에도 그 아픔이며 슬픔이며 눈물이 마치 그림처럼 줄줄이 머리에 떠오르더군요.


  대단했구나, 엄청났구나, 놀라웠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러다 눈을 뜨면 어느새 마음에 확 떠올랐던 그림이 모조리 자취를 감춥니다. 다시 눈을 감고 고요히 있으면 어느덧 아까 그 그림이 다시 떠오르면서 주루룩 흐릅니다. 높다란 울타리를 허물던 손길을, 모진 가시울타리를 맨손으로 무너뜨리던 눈물자국을 하나하나 되새깁니다.


  《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박남옥, 마음산책, 2017)이라는 책은 박남옥이라는 분이 남긴 이야기를 갈무리한 책입니다. 책이름처럼 한국에서 첫 여성 영화감독으로 지낸 나날을 바탕으로, 1923년부터 2017년 사이에 어떤 삶을 지었는가 하는 애틋한 노래가 흐릅니다.


  지은이 박남옥 님은 싸울 때에는 더없이 당찬 싸울아비입니다. 사랑할 적에는 그지없이 고운 사랑님입니다. 일할 때에는 가없이 듬직한 일꾼입니다. 놀이할 적에는 이보다 신바람나는 한마당이 없다 싶도록 재미난 놀이벗입니다. 그야말로 온삶을 온힘을 다해 바친, 걸음걸이 하나하나가 그저 역사요 숨결이며 영화입니다. 이녁이 감독으로 찍은 영화는 딱 하나라지만, 이녁이 걸은 길이야말로 둘도 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영화로구나 싶어요. 부디 저 하늘나라에서 즐겁게 새로운 영화를 찍으시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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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만들어도 괜찮을까 - 생명과학의 딜레마를 고민하는 철학 강의
시마조노 스스무 지음, 조해선 옮김 / 갈마바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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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153


《생명을 만들어도 괜찮을까》

 시마조노 스스무

 조혜선 옮김

 갈마바람

 2018.12.5.



여전히 많은 아이가 약물을 복용하고 있으며 부모도 이를 받아들이는 상황이다. 약물을 사용하면 어떤 종류의 사회 적응력이 생긴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어른이 정한 특정 사회 규범에 따르도록 아이의 성격을 약으로 ‘고치는’ 것이다. (39쪽)


애초에 약에 의존해 활력을 불어넣고 사회성을 키우는 것이 과연 건전한 방법일까. 이는 더 바람직한 아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산만한 아이를 ‘질병’의 차원에서 파악해 약으로 행동을 통제하는 방식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문제다. (48쪽)


(영화 《멋진 신세계》에서) 노동계급인 아이가 책을 보거나 읽고 ‘재미있다’고 느끼면 전기 자극으로 격렬한 고통을 준다.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면 노동에 방해가 되므로 독서를 싫어하도록 조건을 설정하기 위해서다. (100쪽)


인간의 ‘시작’ 단계의 생명을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생명을 고쳐서 새로 만드는 기술이 발전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194쪽)



  새벽에 일어나서 뒤꼍에 서니 풀잎이며 나뭇잎마다 이슬이 가득합니다. 해가 하늘로 솟으면 이 이슬은 간곳없겠지요. 밤이 지나고 새벽이 이슥할 즈음 내려앉는 이 이슬방울이란, 여름에 풀하고 나무가 싱그러이 살아가도록 하늘이 내린 고운 손길이지 싶습니다. 숲이 늘 푸른 까닭은 이슬을 보면 쉽게 알 만해요.


  사람이 물을 안 준대서 숲이 마르지 않아요. 바람에 실린 아주 작은 물방울은 골골샅샅 날아다니다가 푸나무 잎에 내려앉기 마련이고, 바람결 그대로 푸나무를 짙푸르게 돌보는 셈입니다.


  《생명을 만들어도 괜찮을까》(시마조노 스스무/조혜선 옮김, 갈마바람, 2018)를 읽으며 숲하고 사람 사이를 생각합니다. 숲처럼 사람도 바람결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적에 사람답게 사는 숨결은 아닐까요? 사람은 숲다운 마음으로 하루를 지을 적에 아름답게 빛나는 목숨은 아닐까요?


  물 한 모금이 몸을 살리지 싶습니다. 이런 약 저런 약이 아니라, 바로 물 한 모금이, 또 바람 한 줄기가, 몸을 따스하면서 넉넉히 어루만지지 싶어요. 왜 그러잖습니까, 병원에서 더는 고치지 못하는 몸일 적에 물이며 바람이 맑은 시골이나 깊은 숲으로 깃들면, 뜻밖에도 아무런 병원치료나 약이 없이도 몸이 낫는다고 말이지요.


  우리는 지나치게 약을 써대면서 몸이 외려 더 망가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바람읽기를 잊고, 물읽기를 잃으면서 그만 의약산업과 병원산업은 키우는 돈벌이는 했되, 정작 우리 몸을 끝없이 망가뜨릴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처음 태어났을 적에는 아무도 안 아프지 않았을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숲바람을 맞아들이고 숲이슬을 받아들이면서 살림을 지을 적에는 배고픈 이가 없이 모두 넉넉하고 즐겁지 않았을까요? “생명을 만들어도 괜찮을까?” 하고 묻는 책은, 우리가 무엇을 잊거나 잃으면서 두 손에 무엇을 쥐었는가를 차분히 묻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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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를 만나는 법
방윤희 지음 / 자연과생태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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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152


《내가 새를 만나는 법》

 방윤희

 자연과생태

 2019.4.15.



도감은 오리를 구별해 보려고 구입한 것인데 펼쳐 보니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책이었어요! 새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습니다. (18쪽)


도감을 보다가 심심하면 이따금 사진을 보면서 따라 그렸습니다. 한 종 한 종 그리다 보면 새 특징도 더욱 잘 알 수 있고, 나름 재미도 있었습니다. (26쪽)


동고비는 가늘고 예쁜 소리를 내서 저를 부릅니다. 동고비 소리가 너무 가냘프고 이뻐서 저절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61쪽)


어쨌든 도시에서 비둘기는 골칫거리 새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 비둘기도 불친절한 도시보다는 풀밭이 더 편할지도 모릅니다. 풀꽃 사이에서는 비둘기가 유난히 예뻐 보였으니까요. (83쪽)


실제로 본 굴뚝새는 무늬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고 색이 굉장히 거무스름했습니다. 개천가 산책로 어두운 구석을 놀듯이 활발히 쭉 훑어 가다가 다른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요정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115쪽)



  우리 집 처마 밑에는 여러 새가 삽니다. 가을부터 봄까지 딱새하고 참새가 살고, 여름을 앞두고 제비가 찾아와서 살아요. 제비가 떠난 둥지에 박새나 참새가 들어와서 살기도 하는데, 어제 낮, 참새 한 마리가 불쑥 제비 둥지에 멋대로 들어갔다 나온 뒤에 처마 밑으로 제비알 하나가 떨어져서 깨졌습니다.


  참새하고 제비 사이에 목숨을 건 다툼이 있을 수 있구나 하고 처음으로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이 철벗으로 서로 사귀면 참 좋겠다고 여긴 마음이 좀 철없었나 싶기도 합니다.


  《내가 새를 만나는 법》(방윤희, 자연과생태, 2019)을 읽으며 새를 곁에 두는 삶을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은 분은 여느 아줌마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그저 아줌마였다지요. 어느 날 문득 서울 불광천이라는 냇물에 흐르는 오리를 지켜보다가 그만 사로잡혔고, 어느새 새를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 달라졌대요.


  학자나 전문가만 새를 좋아하거나 지켜보거나 사랑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어린이도 할머니도, 아저씨도 아줌마도, 푸름이도 젊은이도 모두 새를 곁에 두면서 아낄 만해요.


  사람한테 노래를 베풀면서 가르치는 새입니다. 사람이 짓는 밭자락에서 벌레잡이를 하다가 열매를 좀 얻어가는 새입니다. 사람더러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나는가를 보여주고 가르치는 새입니다. 새파란 하늘을 가르는 기쁨을 신나게 누리면서 사람한테도 멋지게 하늘을 날아 보라고 부추기는 새입니다.

  우리 다같이 새를 바라보고 품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새가 지어서 사는 집을 ‘보금자리’라 하는데, 사람이 사는 아늑하거나 포근하거나 사랑스러운 집을 ‘보금자리’라는 이름을 따서 가리키는 뜻이 있습니다. 참말로 그렇지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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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혼내는 책 - 우리말의 집을 튼튼하게 짓기 위하여
박일환 지음 / 유유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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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삶읽기 470


《국어사전 혼내는 책》

 박일환

 유유

 2019.3.24.



국어사전은 그냥 낱말만 긁어다 모아 놓은 창고가 되어서는 안 된다. 표제어의 수보다 더 중요한 건 모셔 온 낱말들에 바르고 정확하며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는 일이다. (11쪽)


차등은 차별로, 차별은 다시 구별로 설명하는데, 이게 정말 맞는 풀이일까? (36쪽)


결국 일본어 사전을 그냥 베낀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171쪽)


우리가 중국 승려의 기일까지 알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227쪽)


‘스웨덴순무’라는 말을 실어 놓은 것도 모자라 원어인 ‘루타바가’까지 실은 꼼꼼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380쪽)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국어사전을 늘 들고 다니면서 보았습니다. 다만 국어사전이 한국말을 익히는 길에 썩 이바지하지는 않았다고 느낍니다. 그래도 한 가지를 얻었다면, 우리 국어사전은 ‘한자말을 한국말로 풀이’하고 ‘한국말을 한자말로 풀이’하는 얼거리로구나 하고 느꼈고, 어떤 한자말을 어떤 한국말로 고쳐서 쓰면 좋을까 하는 대목을 배울 만했습니다.


  이제 이 국어사전을 뜯어고쳐서, 아니 낡은 국어사전은 버리고서, 한국말을 새롭고 슬기롭게 쓰는 길을 가는 이웃님한테 이바지하는 한국말사전을 차근차근 쓰는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나 낡은 사전을 버리더라도 곁에 두고서 살펴보는데요, 국어사전을 볼 적마다 어느 사전이든 참으로 허술하구나 싶습니다.


  《국어사전 혼내는 책》(박일환, 유유, 2019)은 표준국어대사전하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이 얼마나 말썽인가 하는 대목을 하나하나 짚습니다. 다만 전문말이나 학술말을 바탕으로 짚느라 좀 아쉽습니다. 흔한 낱말을 얼마나 엉성하게 다루는가는 얼마 안 짚어요.


  글쓴이는 보리국어사전은 두 대사전보다 훨씬 낫다고 이 책에서 밝힙니다만, 제가 보기로는 아리송합니다. 흔한 말 ‘휘다·굽다’를 보리국어사전이 어떻게 풀이하는가를 들춰 보면 쉽게 알지요.


* 《보리 국어사전》 뜻풀이

[휘다] 곧은 것이 힘을 받아 구부러지다

[구부러지다] 한쪽으로 굽거나 휘어지다

[굽다] 1. 한쪽으로 휘거나 꺾이다 2. 한쪽으로 휘어 있거나 꺾여 있다

[꺾다] 1. 어떤 것을 구부려서 부러지게 하다 2. 허리, 팔, 다리 들을 구부리거나 접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비롯한 여러 사전이 전문말이나 학술말을 엉성하게 다룰 뿐 아니라, 뜬금없는 중국말에 일본말에 스웨덴말에 러시아말에 프랑스말에 …… 마구 싣는 대목은 나무랄 만합니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흔한 삶말을 얼마나 엉터리로 다루는가도 같이 짚어야지 싶어요.


  《국어사전 혼내는 책》을 읽으며 몇 군데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때로는 잘못 알려진 얘기로 적은 대목도 있더군요. 이런 대목은 좀 바로잡아야겠습니다.


ㄱ.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우윳빛이 노란빛을 띤다고 했는데, 역시 수긍하기 어려운 풀이다. (22쪽)

ㄴ. 그 후 얼음엿 대신 ‘얼음과자’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스캔디라는 말도 ‘아이스케이크’로 바뀌었으니, 얼음엿은 진작 버렸어야 할 말이다. (47쪽)

ㄷ.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하자고 했다가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 사례라 하겠다. (79쪽)

ㄹ.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 아래서 살아온 관계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나 각종 용어가 중국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81쪽)

ㅁ. 모 단체에서 회장을 ‘으뜸빛’, 총무를 ‘두루빛’으로 부르자고 한 모양이다. 고유어를 되살려 쓰자는 취지이겠지만 너무 억지스러운 말로 보인다. (105쪽)

ㅂ. 순화어로 제시한 ‘꽃 그릇’이 과연 제대로 쓰일 수 있을까? 합성어인 ‘꽃그릇’이 표제어에 있는데, 풀이가 ‘꽃이 그려져 있는 예쁜 그릇’이라고 되어 있다. (305쪽)


  소젖(우유) 빛깔에 노르스름한 빛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소젖이든 염소젖이든, 또 사람젖이든 ‘그저 하얗’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사전풀이에서 섣불리 “노란빛을 딴다”고 붙이기보다는 “살짝 노르스름할 수도 있다”쯤으로 다뤄야 알맞겠다고 봅니다.


  ‘얼음과자’이든 ‘얼음엿’이든 알맞고 재미나게 잘 지은 말이라면, 굳이 사전에서 버릴 까닭이 없이, 이러한 말을 살리는 길을 더 생각하면 됩니다.


  비행기를 ‘날틀’로 바꾸자는 말은, 최현배 어른 같은 분이 밝히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에 ‘한글만 쓰기’를 싫다고 외친 쪽에서 ‘그러면 너희(한글만 쓰기)는 이화여대를 배꽃계집큰배움터로, 비행기를 날틀로 바꾸자는 주장이냐?’ 하고 따진 적이 있어요. 이때에 최현배 어른은 ‘우리는 그렇게 바꾸자고 외치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한자 함께 쓰기)가 들려주는 그 말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꽤 어울릴 듯하다’쯤으로 대꾸한 적이 있습니다. 한자를 함께 써야 한다고 외친 쪽에서 내놓은 말이 ‘배꽃계집큰배움터’하고 ‘날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이 얘기가 그 뒤로 거꾸로 알려지거나 퍼졌습니다.


  한국은 ‘한자문화권’이 아닙니다. ‘한자지배권’에 억눌린 나날이었다고 해야 옳습니다.


  ‘회장’을 ‘으뜸빛’으로 바꾸어 보자는 뜻이 왜 나쁠까요? 뭐가 억지일까요? 새롭게 이름을 짓는 마음을 북돋울 노릇입니다.


  ‘꽃그릇’이란 이름은 제법 쓰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화분’이라고만 써야 할 까닭이 없을 뿐더러, ‘화분’이란 말을 모르는 분도 있습니다. 인천에서 살며 골목마실을 여러 해 하는 동안, 골목에서 꽃을 키우는 분들이 “스티로폼도 꽃그릇이고 깨진 밥그릇도 꽃그릇이고 빈 간장통도 꽃그릇이고 다 꽃그릇이지.”처럼 곧잘 이야기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꽃그릇’은 살림자리에서 피어난 수수한 말이라고 여기면서 사전에 살뜰히 담아낼 노릇이라고 봅니다.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 아래서 살아온 관계로

→ 오렛동안 한자 굴레에 눌려 살아온 탓에

→ 오랫동안 한자에 짓눌려 살아온 나머지

→ 오렛동안 한자 사슬에 갇혀 살아왔기에

→ 오랫동안 한자에 억눌려 살아온 터라

→ 오랫동안 한자에 둘러싸여 살아와서


  끝으로, 글쓴이가 적은 글월 가운데 좀 안 맞다 싶은, 번역 말씨가 나타난 한 자락을 손질해 봅니다. “문화권 아래”란 말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下’를 ‘아래’로 섣불리 옮기지 않습니다. 이는 일본 번역 말씨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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