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애 민음의 시 142
신달자 지음 / 민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들이 깨문 복숭아
[시를 노래하는 시 29] 신달자, 《열애》

 


- 책이름 : 열애
- 글 : 신달자
- 펴낸곳 : 민음사 (2007.10.12.)
- 책값 : 7000원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복숭아를 깨물어 먹습니다. 맛나게 깨물어 먹습니다. 두 아이는 능금도 깨물어 먹습니다. 어금니까지 곱게 난 큰아이는 복숭아도 능금도 혼자서 척척 잘 깨물어 먹습니다. 어금니가 아직 돋지 않은 작은아이는 앞니로 깨물 수는 있으나 제대로 씹지 못합니다. 어버이가 오물오물 씹어서 숟가락에 받은 다음 건네야 먹을 수 있습니다.


  큰아이는 혼자서 밥을 먹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쥡니다. 큰아이는 제 밥그릇에 담긴 밥을 푸고, 제 국그릇에 담긴 국을 뜹니다. 작은아이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입으로 씹은 밥을 먹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숟가락에 국을 뜨거나 국그릇을 들고 입에 대 주어야 국을 마실 수 있습니다. 돌을 지나면서 물잔을 혼자 들고 마실 수는 있는데, 스스로 알맞게 맞추지는 못해 물을 왈칵 쏟곤 합니다.


  작은아이는 큰아이 하는 양을 바라보며 저도 혼자 숟가락을 들고는 밥을 푸고 싶습니다. 작은아이는 스스로 국을 뜨고 싶습니다. 숟가락을 들어 이리저리 휘젓습니다. 밥상은 이내 어지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지르면서 숟가락질을 익히고 젓가락질을 익히는걸요. 두 아이 나란히 온 방에 온갖 것을 늘어놓으면서 놀고, 이렇게 놀면서 크는걸요.


.. 나 알몸으로 누워 산을 받아들이면 / 산 하나 품어 나오리 ..  (저 산의 녹음)


  아이들이 복숭아를 잘 먹고, 옆지기와 나도 복숭아를 잘 먹으니, 우리 집 어느 한켠에 복숭아나무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복숭아를 먹으며 씨앗이 나올 적에 심어야지 생각하는데, 으레 잊고는 그냥 버립니다. 나물비빔을 좋아하면 텃밭에 온갖 푸성귀가 자라도록 해서 즐겁게 뜯어서 먹으면 됩니다. 옥수수를 좋아하면 밭 가장자리에 옥수수를 줄줄이 심으면 됩니다. 고구마를 좋아하면 조금 너른 땅뙈기를 마련해서 고구마줄기를 하나씩 묻으면 돼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꽃을 심습니다. 목련도 심고 장미도 심으며 동백도 심습니다. 양파를 잘 먹으면 양파를 심습니다. 마늘을 좋아하면 마늘을 심어요. 양파나 마늘이 돈이 될 만하니 심는다 하면 쓸쓸합니다. 돈을 벌어 어떤 즐겁고 좋은 일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할 때에는, 돈만 벌어서는 부질없으리라 느껴요. 즐겁게 돈을 벌고 즐겁게 돈을 쓰며 삶을 즐겁게 누릴 때에 아름다운 하루가 된다고 느껴요.


  두 아이 노는 모습을 아침부터 밤까지 지켜봅니다. 두 아이는 끝없이 놉니다. 쉬지 않고 놉니다. 등판이 땀으로 젖습니다. 이마에서 땀이 흐릅니다. 콧잔등에 땀이 맺힙니다. 그러나 두 아이 모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놀이에 빠지니 좋고, 놀이에 흠뻑 빠져 즐거우며, 놀이에 온통 사로잡히니 재미나는구나 싶어요.


.. 아무 미련 없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모습 편안하다 ..  (코스모스 영가靈歌)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싫어할 만한 일을 굳이 하지 않습니다.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좋아할 만한 일을 합니다. 달갑지 않은 일을 즐거이 하려는 아이는 없습니다. 못마땅하거나 안 내키니는 일을 애써 하려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이라면 모름지기 스스로 가장 즐거우며 재미나고 신나는 일을 합니다. 아이라면 마땅히 스스로 가장 좋아하며 사랑하고 멋진 일을 해요.


  그런데, 어른도 아이와 마찬가지예요. 스스로 가장 즐겁다 여길 일을 할 때에 즐겁습니다. 스스로 가장 재미나다 여길 일을 해야 재미나요. 스스로 가장 좋아한다고 여기는 일을 해야 좋겠지요.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운 마음이 될 일을 할 때에 사랑을 나눌 수 있어요.


  좋아하지 않는데 돈을 벌 수 있어 한다면 얼마나 고될까요. 사랑하지 않으나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한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찾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을 생각합니다. 마음을 북돋우는 일을 누립니다.


.. 그 똘똘하고 뿌듯한 하늘이 다섯 살이 되는 새해에도 나는 그저 /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세뱃돈 줄게 고추 좀 보자 / 강아지가 물고 갔음 어째 좀 보자 한 번만 보자 보채는 나에게 / 이놈 눈 딱 부라리고 날 쳐다보며 하는 말 / 할머니는 변태야! ..  (변태)


  아직 쉬를 옳게 가리지 못하는 작은아이는 곧잘 이불에 쉬를 눕니다. 이불은 쉬로 젖으니 틈틈이 햇볕에 말리고, 퍽 자주 빨래합니다. 이불 빨래를 손으로 하기도 하지만, 빨래기계를 장만한 뒤로는 빨래기계한테 맡깁니다.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제금난 지 열일곱 해인데, 빨래기계는 제금난 지 열일곱 해째에 비로소 장만했습니다. 올봄까지 이불도 기저귀도 모두 손수 빨래했어요.


  이불을 꾹꾹 발로 밟으며 빨 적에, 기저귀와 숱한 옷가지를 손으로 복복 비비며 빨 때에, 가만히 생각에 젖습니다. 이 옷을 입고 이 이불을 뒤집어쓰는 살붙이는 하루를 즐겁게 누렸을까. 정갈히 빨아서 예쁘게 갠 옷을 입을 살붙이는 새 하루를 새로운 넋으로 맞이할까.


  새로운 날은 참말 새롭습니다. 어제와 같은 하루는 없습니다. 오늘과 같은 하루도 없습니다. 어제는 어제대로 즐겁게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궂은 일이 잦았건 기쁜 일이 넘쳤건, 하루는 하루대로 반갑다고 여깁니다.


.. 아파트 일 층인 내 방 창에는 / 녹음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 사월부터 연둣빛 땡땡이 무늬가 어른거리더니 / 서너 달 지나며 창은 짙푸린 비단으로 출렁거렸다 ..  (바라본다는 것)


  이제 유월과 칠월에 이은 여름철 팔월이 저뭅니다. 꼭 달력 날짜 때문은 아니나, 팔월 막바지, 이른바 늦여름에 이르면 밤날씨가 살짝 서늘합니다. 팔월 삼십일 밤, 곧 팔월 삼십일일로 넘어서는 밤에는 집안 온도가 26도로 내려옵니다. 오월이 끝나고 유월로 접어들 적부터 본 적 없는 온도입니다. 구월 어귀에 비로소 후끈후끈 무더운 밤이 사라집니다. 바야흐로 가을일까요.


  들판에서 씩씩하게 자라는 벼는 누렇게 익습니다. 드센 비바람이 휘젓고 지나갔어도 씩씩하게 서며 누렇게 익습니다.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몰 때면 으레 곳곳에서 메뚜기를 봅니다. 아, 메뚜기로구나. 우리 식구 살아가는 이곳 시골마을은 지난해까지 풀약을 꽤 많이 쳤다는데, 올해부터는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며 이제껏 치던 풀약을 꽤 많이 줄였다고 해요. 그러나 풀약을 아예 안 치지는 않습니다. 치기는 치되 좀 적게 칠 뿐입니다.


  풀약을 아예 안 친다면 메뚜기를 더 많이 만나겠지요. 풀약이 없는 논이랑 밭이라면 사마귀와 여치와 풀무치와 방아깨비 모두 마음껏 노닐겠지요.


  개구리가 살아가니 뱀도 살아갑니다. 뱀이 살아가니 소쩍새도 살아갑니다. 들쥐가 살고 까마귀가 삽니다. 숱한 멧새와 들새가 살아갑니다. 멧비둘기와 참새는 아직 덜 여문 나락 알을 먹고 싶어 자꾸 들판으로 내려앉습니다. 모두들 제 밥을 찾습니다. 저마다 제 삶을 누립니다.


.. 강의실은 구 층에 있었다 / 지하 삼 층 차고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 한순간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일이 / 나에겐 예삿일이다 / 높은 곳을 죽 올라가는 그 재미로 / 계단을 잊은 지 오래다 ..  (버들잎 강의)


  내가 우리 아이들만 하던 나이였을 적을 곧잘 되새기곤 합니다. 내 어릴 적 내 어버이는 방학 때면 나와 형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내 아버지가 국민학교 교사였기에 아버지는 여름과 겨울에 긴 방학을 맞습니다. 방학철이면 으레 시골집에서 열흘이든 스무 날이든 묵습니다. 시골집에서는 시골 할머니가 차리는 밥을 먹습니다. 시골집에서는 시골 이웃을 만나 시골살이를 누립니다.


  이때 나는 메추리가 알을 낳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고, 메추리알이 왜 메추리알인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시골집 사촌형을 따라 메추리집을 털 적에 어미 메추리가 빽빽 울면서 우리 머리에 똥을 지르던 일이 새삼스럽습니다. 도시에서 먹는 메추리알은 플라스틱 꾸러미에 촘촘히 놓이는 알인데, 이 메추리알이란 메추리가 낳는 제 새끼라고 새삼스럽게 생각했어요. 다른 목숨을 내가 먹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닭우리에서 닭이 낳은 알을 꺼낼 적에도 달걀이란 목숨이지 그냥 먹을거리가 아니로구나 하고 느꼈어요. 갓 낳은 말랑말랑하며 따스한 목숨을 먹으면서 내가 오늘 하루 또 신나게 뛰놀 기운을 얻는다고 느꼈어요.


  바람소리를 떠올립니다. 시골마을은 온통 바람소리입니다. 풀벌레 노랫소리를 떠올립니다. 시골마을은 온통 풀벌레 노랫소리입니다. 그래, 이때 메뚜기가 보이면 곧장 잡아서 병에 모으거나 밟아서 죽이라 했어요. 메뚜기가 벼를 다 갉아먹는다 했으니까요. 애꿎은 메뚜기는 도시 아이 하나 잘못 만나 애꿎게 숨을 잃습니다. 방아깨비와 사마귀를 나란히 한손에 잡아 애꿎게 싸움을 붙입니다. 방아깨비가 파르르 떨고 사마귀가 먹이를 잡으려고 안달하는 기운이 손가락을 거쳐 마음속 깊은 데까지 쩌렁쩌렁 울립니다. 내가 무얼 보자고 이런 짓을 하나.


  방아깨비를 잡아 손가락 사이에 끼면, 그야말로 방아를 찧습니다. 한참 방아를 찧다가 똥을 지립니다. 똥을 지리면 그제서야 놓아 주는데, 똥까지 지린 방아깨비는 기운을 잃어 풀숲에서 거의 꼼짝하지 못합니다. 방아 찧는 모습을 구경한다며 넋을 잃은 어린 나는, 방아깨비가 똥을 지려 놓아 준 다음,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풀숲에서 천천히 숨을 잃는 모습을 보며 또 생각합니다. 내가 무얼 알자고 이런 짓을 하나.


.. 나는 문득 /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하얀 밥을 짓고 싶어 ..  (우리들의 집)


  길을 가다가 뒤집어진 벌레를 보면 그냥 지나치려 하다가도 우뚝 멈춥니다. 손가락 하나를 뻗어 벌레가 이 손가락을 붙잡고 일어서도록 합니다. 물에 빠진 무당벌레를 건져 풀숲으로 옮깁니다. 거미줄에 갓 걸린 나비나 잠자리를 보면 거미줄을 스윽 끊습니다. 거미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거미줄을 새로 치겠지요. 그래도 거미야 미안하구나. 너한테 걸맞는 다른 먹이를 기다리렴.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던 엊그제 우리 집 시멘트블록담 한쪽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시멘트블록이 고샅길에 흩어졌기에 한쪽으로 치우는데, 시멘트블록 안쪽 구멍에 개미집이 있더군요. 수만에 이르는 개미는 집을 잃었다며 아우성입니다. 네 녀석들이 이 속에서 또아리를 트느라 시멘트담이 허술해졌을까.


  빨래대를 받치려고 마당에 놓은 큰돌을 옮길 적에도 개미집을 봅니다. 그저 큰돌 밑일 뿐인데, 이곳을 저희 집으로 삼는 개미는 어떤 마음일까 하고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흙땅 돌밑에 집을 지어야지, 시멘트바닥 돌밑에 어설피 집을 꾸리면 어떡하니.


.. 자기 손으로 자기 몸을 쓸어내리는 것을 / 자위행위라고 말합니다만 / 나의 손은 나의 어머니입니다 / 내 손이 내 몸의 성감대를 찾아가는 것을 / 내 손이 내 몸의 흐느끼는 곳을 찾아가는 것을 / 야릇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  (손)


  옆을 돌아보면 모두 내 이웃입니다. 둘레를 살펴보면 모두 내 동무입니다. 이웃집도 이웃집이요, 풀과 나무와 꽃도 이웃입니다. 무화과나무 매화나무 감나무 모두 이웃입니다. 후박나무 동백나무 모과나무 모두 동무입니다.


  맑게 갠 파란 빛깔 하늘을 흐르는 티없이 하얀 구름도 내 이웃입니다.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살도 내 동무입니다. 우렁차게 우는 매미와 숱한 풀벌레도 내 이웃입니다. 조잘조잘 지저귀는 들새와 멧새 모두 내 이웃입니다.


  저마다 좋은 아침을 맞이합니다. 저마다 좋은 밥을 생각합니다. 저마다 좋은 하루를 빚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새 날을 마주합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새 이야기를 꾸립니다.


  오늘은 무얼 먹을까. 오늘은 어떤 밥을 차릴까. 오늘은 아이들이랑 무얼 하면서 놀까. 복숭아는 다 먹었는데 어떤 열매를 장만해 볼까. 산들산들 부는 아침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 나는 너에게 지금도 내가 아는 귀여운 / 여자의 이름을 달아 주고 싶은데 / 사랑을 축하하며 / 예쁜 꽃다발을 가슴에 안겨 주고 싶은데 / 세상의 정보를 가장 먼저 주우려고 / 컵라면을 손에 든 채 / 너는 밤새 컴퓨터 화면만 뜨겁게 마주하고 있다 ..  (딸의 하이힐을 수선하며)


  신달자 님 시집 《열애》(민음사,2007)를 읽습니다. 한자말로 된 책이름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열애’가 뭘까?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국어사전에는 두 가지 한자말이 나옵니다. 먼저, ‘悅愛’가 있고, 말뜻은 “기쁜 마음으로 사랑함”입니다. 다음으로, ‘熱愛’가 있으며, 말뜻은 “열렬히 사랑함”입니다. ‘열렬(熱烈)’은 또 뭔가 싶어 국어사전을 새삼스레 뒤적이니 “어떤 것에 대한 애정이나 태도가 매우 맹렬하다”라 합니다. 그러면 ‘맹렬(猛烈)’은 또 뭐람? 다시 국어사전을 뒤적여 “기세가 몹시 사납고 세차다”라는 말뜻을 얻습니다.


  아하, 그러니까 ‘열애’란 “기쁜 사랑”이나 “뜨거운 사랑” 둘 가운데 하나가 되겠군요.


  아무튼, 나는 둘 다 좋습니다. 사랑은 기뻐서 좋습니다. 사랑은 뜨거워서 좋습니다. 나는 둘 모두 좋습니다. 기쁘게 나눌 수 있는 사랑이 좋습니다. 뜨겁게 불을 피워 둘레를 따사로이 살찌울 수 있는 사랑이 좋습니다.


  나는 내가 받는 사랑으로 따스한 나날입니다. 나는 내가 주는 사랑으로 따스한 나날입니다. 사랑을 받으면서 따스하고, 사랑을 주면서 따스합니다. 따스한 사랑을 느끼기에 싯말이 태어납니다. 따스한 사랑을 나누기에 시노래를 짓습니다.


  사랑이 있어 시를 씁니다. 사랑을 느껴 책을 읽습니다. 사랑을 꿈꾸어 삶을 짓습니다. 사랑을 노래해 밥을 나눕니다. 사랑을 어깨동무하며 지구별이 따사롭습니다. (4345.8.3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즐거운 세탁 애지시선 12
박영희 지음 / 애지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쁜 밥을 먹는다
[시를 노래하는 시 28] 박영희, 《즐거운 세탁》(애지,2007)

 


- 책이름 : 즐거운 세탁
- 글 : 박영희
- 펴낸곳 : 애지 (2007.5.10.)
- 책값 : 8000원

 


  저녁에 두 아이 재우고 나서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느긋하게 책을 조금 읽다가 자리에 눕습니다. 아이들이 잠든 저녁은 더없이 조용합니다. 두 아이는 새근새근 자는데 머리카락과 팔뚝 언저리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에 틈틈이 부채질을 해서 땀을 식힙니다. 내 몸에도 부치고 아이들 몸에도 부칩니다. 날마다 몇 차례씩 아이들 씻기고 나도 씻습니다. 씻을 적마다 손빨래를 합니다. 기계빨래를 할 만하지만, 더운 여름날은 몸을 씻으며 흐르는 물에 옷가지를 적신 다음 비누를 문지르고, 복복 비벼서 헹굴 무렵 다시 몸에 물을 붓고 씻으며 빨래를 북북 밟아 헹구면 한결 시원합니다. 물은 적게 쓰면서 몸을 씻고 빨래까지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래저래 물을 자주 만지니 손에서 물기 마를 틈이 없습니다. 손이 조금 보송보송해질라면 작은아이가 쉬를 누어 기저귀를 갈거나 걸레로 방바닥을 훔칩니다. 오줌을 훔친 걸레는 그때그때 새로 빨래합니다.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며 아이들 씻기고 보면 하루 내내 물이랑 산다 할 만합니다. 손에 물기가 가시지 않으니, 종이로 빚은 책은 펼칠 엄두를 못 냅니다.


.. 된장에 찍어먹으면 딱 좋을 / 풋고추 대롱대롱 달려있고 // 긴 싸움 이겨낸 늠름한 얼굴로 / 석편아짐 좋아하는 가지 몇 실하게 매달려있고 // 찬바람 불면 할마씨들 입맛 돋울 / 대추알들 따글따글 열려있고 ..  (장마 지나간 옥상)


  사내와 가시내가 평등과 평화를 이루어야 아름답다 하는 오늘날이지만, 어느 집으로 마실을 가더라도, 찻상이든 밥상이든 으레 가시내가 차립니다. 사내가 찻상이나 밥상을 차리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서로 집일을 하면서 함께 찻상이나 밥상을 내오는 일 또한 몹시 드뭅니다.


  우리 집으로 마실을 오는 손님은 언제나 아이 아버지인 내가 차리는 밥상을 받습니다. 나는 바지런히 도마질을 하고 밥이랑 국을 끓이며 반찬을 올립니다. 온몸에 땀이 흠씬 돋으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새 없습니다.


  내가 밥상을 맛나게 잘 차리는지 그닥 맛없게 차리는지 잘 모릅니다. 즐겁다 싶은 밥상인지 그저 그렇다 할 밥상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밥을 차리면서 내 가장 좋은 기운이 서리도록 하고 싶다 생각합니다. 내 가장 고운 사랑으로 차려야 나도 식구들도 즐겁게 먹고 즐겁게 기운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먼먼 옛날 옛적 살림집 어머니들은 ‘언제나 밥상 차리기를 도맡’으면서도 밥 한 그릇 한 번 잘못 내오면 꾸중을 듣거나 쫓겨난다 했어요. 숱한 집일을 도맡으면서도 어쩌다 한두 차례 무언가 잘못을 하면 꾸지람을 듣거나 쫓겨난다 했어요. 참으로 수많은 어머니들이 아버지들한테 두들겨맞았어요.


  어느 날 문득 생각합니다. 옛날 옛적 어머니들은 ‘소박 맞는다’고 했으나, 나는 ‘이 집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참말이지,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 돌보며 밭일까지 다 하는데, 가시내를 그토록 못살게 굴거나 모질게 대접하던 가부장 봉건 사회란 얼마나 끔찍한가 하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 옮겨가는 자리마다 꽃 피어나신다 ..  (어머니)


  가부장 봉건 사회 그늘은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여느 살림집에도, 국회의사당에도, 여느 회사나 공공기관에도, 학교에도, 온통 가부장 봉건 사회 그늘이 드리운다고 느낍니다.


  왜 서로 어깨동무하는 길을 걷지 못할까요. 왜 서로 사랑하는 꿈을 꾸지 못하나요. 왜 서로 아끼며 보살피는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가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갈려야 할 까닭은 없어요. 모두 같은 사람인걸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쪽은 키가 작고 저쪽은 키가 클 테지요. 그런데, 내가 ‘눈을 뜨고’ 바라보면 키가 크거나 작지, 내가 ‘눈을 감고’ 마주하면 키란 덧없어요. 얼굴도 몸매도 덧없어요.


  어른도 어린이도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목숨이에요. 저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착한 꿈빛이에요.


.. 가만, 저 하모니카는 내 눈에도 익다 / 정 노인은 저 하모니카 덕에 세상구경 / 여러 번 했었다 / 합주단 만들어 여수로 대구로 서울로 대전으로 / 교회초청으로 청주까지 다녀왔었다 / 그러나 예약해 두었다는 호텔에서 잠은 자지 못했다 / 가는 곳마다 퇴짜를 놓았다 / 그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이었다 ..  (소록도, 그 섬의 죽음)


  내가 눈 아닌 마음으로 마주하고, 귀나 코나 입 아닌 마음으로 다시금 마주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나부터 내 생각과 삶이 달라지리라 느껴요. 참말 이런 울타리 저런 그늘을 뒤집어씌운 채 바라보지 말고, 꾸밈없이 마주하면서 가장 깊고 너른 마음과 마음으로 마주한다고 하면, 언제나 나부터 새롭게 거듭나는 예쁜 사람이 되리라 느껴요.


  내가 나이면서 내가 나인 줄 모르는 까닭은 참다운 나를 생각하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구나 싶어요. 내가 나인 줄 옳게 깨닫고 내가 나로구나 하고 슬기롭게 생각하며 살아갈 때에는, 참말 늘 환하게 웃고 밝게 말하며 싱그러이 움직이는 목숨이 되리라 느껴요.


  좋아하는 빛을 누리려고 지구별에 태어났어요. 사랑하는 길을 걸으려고 지구별에 왔어요. 즐겁게 어깨동무하면서 해맑게 빛나려고 지구별에서 살아가겠지요. 흐뭇하게 손을 맞잡으면서 아리땁게 노래하려고 지구별 사람이 되었겠지요.


.. 불도저 지나간 자리는 잡초만 무성하고 / 담배를 꺼내 문 아버지는 / 멍하니, 앞산만 건너다 보시고 / 어쩔끄나 어쩔끄나 이 노릇을 어쩔끄나 / 불도저 지나간 바퀴자국 없애느라 / 어머니는 뼈마다 앙상한 몸으로 / 자근자근 옛 집터를 고르고 계셨습니다 ..  (그 자리)


  아침 햇살 곱게 받는 마당 가장자리 풀포기를 바라봅니다. 이웃 아저씨는 이 풀포기 잎사귀를 보고는 처음에 수박풀이라고 말했는데, 하루하루 흐를수록 ‘어쩐지 수박풀 같지는 않은데’ 싶었습니다. 잎사귀 커지고 꽃이 피며 암꽃이 아물며 열매 맺는 모양새를 보아 하니, 오이도 아니요 아무래도 수세미 같구나 싶습니다.


  꽃잎이 노랗기로는 호박이랑 오이랑 수박이랑 수세미랑 한 갈래예요. 모두 꽃이 소담스레 큼지막합니다. 바람에 한들한들 춤을 춥니다.


  그나저나 우리 집 마당 한켠에서 수세미는 어떻게 자랐을까 궁금합니다. 수세미 씨앗을 꽤 곳곳에 뿌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 포기만 자랄 줄 몰랐어요. 아니, 마음으로는 예쁘게 심고는 잊었달까요. 내가 잊은 한 가지를 이 풀포기는 예쁘게 떠올리고는 날마다 고운 봉오리를 보여준달까요.


.. 한 두둑에서는 속이 들고 / 그 옆 두둑에서는 철이 든다 // 한 두둑은 한 겹 한 겹 속이 차고 / 옆 두둑은 쑥쑥 밑이 든다 ..  (무와 배추)


  노란 꽃봉오리 곁에는 하얀 꽃봉오리가 가득합니다. 부추꽃입니다. 늦봄부터 한여름까지 날마다 신나게 부추풀을 꺾어서 나물비빔을 먹었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고 한 끼니만큼 그때그때 꺾어서 먹었어요. 오늘은 이쪽에서 꺾고 이듬날은 저쪽에서 꺾고 하면서 먹었어요. 꺾인 부추풀은 이내 새 잎을 올렸고, 새 잎이 어느 만큼 길고 굵어지면 다시 꺾었어요.


  그런데 이 부추풀은 끝까지 씩씩하게 새 잎을 올려요. 그러고는 이렇게 꽃대까지 올린 다음 몽우리를 맺고, 몽우리를 터뜨려 하얀 꽃봉오리를 활짝 베풉니다.


.. 동이나 호, 명함을 모르고 찾아 갔다가는 / 이게 누구네 동네고 저게 누가 사는 집인지 헛갈려 알 수 없는 것이다 ..  (시집)


  좋은 밥을 먹습니다. 좋은 꽃을 봅니다. 좋은 바람을 쐽니다.


  바람이 조용한 한여름 아침나절, 좀 덥구나 하고 생각하니 쏴아 하고 바람이 불며 후박나무 잎사귀며 부추풀 꽃잎이며 건드립니다. 이웃집 밭뙈기 고구마잎을 건드리고 옆집 무논 볏포기를 건드립니다.


  바람은 어떤 빛깔이거나 무늬이거나 냄새인지 느낄 수 없다고 해요. 그런데, 바람은 들을 지날 때에는 들바람이 되어 들내음을 베풀어요. 바람은 멧골을 지나며 멧바람이 되어 멧내음을 베풀어요. 바람은 바다를 지나며 바닷바람이 되어 바닷내음을 베풀어요. 바람은 밭뙈기 사이를 불며 밭바람이 됩니다.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며 나무바람이 됩니다. 풀 사이를 흔들고 지나며 풀바람이 돼요.


  부추풀을 건드리는 바람은 부추바람입니다. 후박나무를 건드리는 바람은 후박바람입니다. 빨래줄을 건드리고 빨래를 건드리는 바람은 빨래바람입니다.


  바람결에 온갖 냄새가 담깁니다. 바람결에 온갖 무늬가 그려집니다. 바람은 하늘빛을 새삼스레 바꾸어 놓습니다. 구름은 하얗기도 하고 잿빛이기도 합니다. 같은 하양이더라도 다 다른 하양입니다. 바람은 구름 모양을 끝없이 바꾸어 놓습니다. 바람은 따숩다 못해 뜨거운 햇살을 받는 풀포기를 하나하나 건드리면서 이 더위에 더욱 씩씩하게 크라며 기운을 북돋웁니다.


.. 시간이 너무 짧다 / 그 많은 역들은 어디에 몸을 숨긴 걸까 // 술래가 보이지 않는다 / 이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역도 그리 많지 않다 / 저 여승무원은 안전할까? ..  (KTX를 탔다)


  박영희 님 시집 《즐거운 세탁》(애지,2007)을 읽습니다. 빨래는 즐겁습니다. 밥도 즐겁습니다. 아이도 즐겁고, 옆지기도 즐겁습니다. 그야말로 모두 즐겁습니다.


  하루 품삯 5만 원짜리 일도 즐겁고, 품삯 따로 받지 않는 집일도 즐겁습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를 바라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어쩜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겠느냐 싶으나, 두 아이와 살아가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사람은 몸뚱이에도 밥을 넣지만, 마음에도 밥을 넣어요. 사람은 몸으로도 밥을 먹으나 마음으로도 밥을 먹어요.


  몸으로만 밥을 먹고 마음으로는 밥을 안 먹는다면, 사람 스스로 곧은 사람으로 사랑스레 살아가지 못해요. 곧, 밥을 먹고 사랑을 먹습니다. 국을 먹고 믿음을 먹습니다. 반찬을 먹고 꿈을 먹습니다. 이윽고, 밥을 나누고 사랑을 나눕니다. 국 한 그릇 서로 나누고 믿음 한 자락 골고루 나눕니다. 반찬 한 점 다 함께 나누며, 꿈 한 꾸러미 다 같이 나눠요.


.. 새들은 대체 어디까지 쫓겨난 것일까? ..  (그 산에는 새가 울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에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랑을 빚습니다. 사랑을 생각하기에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살아가기에 사랑을 일굽니다.


  작은아이는 어머니젖을 물고 잠듭니다. 어머니젖은 몸을 살찌우는 밥이면서 마음을 보살피는 사랑입니다. 식구들은 서로서로 밥상 앞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마음을 살찌웁니다.


  들새는 들에서 들밥을 먹고, 멧새는 메에서 멧밥을 먹습니다. 사람이 있고, 들이 있으며, 새가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풀이 있으며, 벌레가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나무가 있으며, 숲과 바다와 하늘이 있습니다. 저마다 예쁜 밥을 먹으며 예쁜 목숨을 아낍니다. (4345.8.20.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김새 1 신생시선 30
김지하 지음 / 신생(전망)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나무와 사람
[시를 노래하는 시 27] 김지하, 《시김새 1》

 


- 책이름 : 시김새 1
- 글 : 김지하
- 펴낸곳 : 신생 (2012.2.15.)
- 책값 : 8000원

 


  이른아침에 온 고을에 낀 안개가 차츰 걷힙니다. 들판과 멧자락에 걸쳐 하얗게 서린 안개는 새 하루 열리며 비추는 햇살을 따라 천천히 사라집니다.


  안개가 걷히면서 매미 노랫소리가 깊어집니다. 매미는 마을에서 노래하지 않습니다. 매미는 이제 시골마을에서 노래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골마을이든 농약과 풀약을 잔뜩 치기 때문입니다. 매미가 땅속에서 여러 해 고이 살아내어 바깥으로 나와 나무에 기대어 먹이를 찾고 사랑을 찾기란 벅찹니다. 흙도 나무도 풀도 몽땅 ‘죽음을 부르는 물’에 찌듭니다.


  우리 시골집만큼은 이 마을에서 농약은커녕 모기약조차 뿌리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집 안쪽 마당과 밭뙈기에서 자라나는 나무에서는 매미들이 깨어나 나무에 오를 수 있고, 조그마한 밭뙈기 언저리에서 먹이를 찾거나 쉬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골집처럼 농약이 뿌려지지 않는 호젓한 멧자락에서도 매미들이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시골 군에서는 헬리콥터를 써서 항공방제를 하곤 하지만, 때때로 풀약 손길이 안 미치는 얕은 멧자락이 있습니다. 시골사람 사는 집하고 가까운 얕은 멧자락까지는 풀약을 치지 않아요. 시골 어르신 또한 나이가 들고 힘들기에 멧자락까지 풀약을 뿌려대지 않습니다.


.. 내가 누구인지 몰랐더라 / 내가 누구에게서 왔는지 아득히 몰랐었더라 / 이제야 알았는가 / 아아아 ..  (귀래-흥업-무실동)


  면소재지 가게에서 장만한 복숭아를 베어 먹습니다. 아이도 먹고 어른도 먹습니다. 앞으로 우리 집 밭뙈기 한켠에 복숭아나무 자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꿉니다. 어른들은 기다리기 힘들는지 몰라도, 아이들은 머잖아 복숭아나무 우람하게 자란 모습을 맞이하겠지요.


  복숭아나무는 씨앗으로 심을 수 있습니다. 복숭아나무는 어린나무를 장만해서 예쁘게 심을 수 있습니다. 내 보금자리 둘레에서 작은 나무들 예쁘게 자라나는 모습 흐뭇하게 지켜볼 수 있습니다. 나무한테서 열매를 얻어 먹어도 좋고, 따로 열매를 얻어 먹지 않더라도 꽃을 보고 잎을 보며 즐겁습니다. 햇살을 긋는 그늘을 얻어도 좋습니다. 바람결에 살랑이는 잎사귀가 바스락 사그락 노래하는 소리를 들어도 좋습니다.


  나무는 곁에서 자라기만 해도 좋습니다. 나무는 둘레에서 크기만 해도 좋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있어 작은 씨앗 해마다 내면서 천천히 어린나무가 자랍니다. 어린나무 천천히 자라며 이윽고 숲이 이루어집니다. 처음에는 풀섶과 같겠지요. 풀섶이 우거지면서 바야흐로 숲이 되겠지요.


.. 여성철학자 / 숙淑 / 내가 참으로 깊이 모시는 역사의 한 여성 // 기억하는가? / 요즈음 저 수많은 / 페미니스트들이여 / 기억이나 하고 있는가? / 그 무렵의 / 그녀가 / 오늘엔 그 누구인지를? ..  (임윤지당任允摯堂)


  나무 한 그루 있어 숲이 태어납니다.


  사람 하나 있어 사랑이 태어납니다.


  나무는 숲을 이루는 꿈을 꿉니다.


  사람은 사랑을 이루는 꿈을 꿉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도시라는 곳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아요. 도시라 해서 꼭 숨이 턱턱 막히는 데라고는 여기지 않아요. 그러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도시를 좋은 곳으로 가꿀 뜻이 없거나, 도시 곳곳에 나무 한 그루 자랄 틈을 내놓을 넋이 없다면 슬픕니다. 시골사람이 어쩌다 도시로 마실을 할 때에도 힘겹지만, 도시사람 스스로 언제나 도시에서 살아가며 도시에 맑은 사랑 감돌도록 힘쓰지 않는다면 도시사람 스스로 슬픈 노릇이에요. 사람은 사랑 어린 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이지, 사람은 영양분에 따른 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은 살림을 사랑스레 일굴 만한 돈을 벌며 어깨동무하는 사람이지, 사람은 은행계좌에 차곡차곡 모아 둘 돈을 쟁이려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 지금도 간다 / 내 마음은 지금도 느을 느을 가고 또 간다 ..  (꾀꼬리 봉우리)


  고속도로가 뚫려 도시와 도시 사이를 빠르게 잇습니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는 시골이 있기 마련이지만, 고속도로는 도시와 도시를 이으려 할 뿐, 사이에 있는 시골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고속도로는 참 무시무시합니다. 고속도로가 깔리는 길은 으레 들판입니다. 고속도로는 으레 멧자락에 구멍을 뚫거나 한쪽을 몽땅 깎아내어 곧게 닦습니다. 고속도로 깔린 옆에서는 벼도 밀도 보리도 수수도 감자도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에다가 매캐한 자동차 배기가스를 먹어야 합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와 도시를 고속도로로 빠르게 잇는데, 이렇게 이으면서 정작 ‘도시사람 먹는 밥’이 ‘고속도로에서 싱싱 달리는 자동차가 더럽힌 곡식과 열매’인 줄 깨닫지 못해요.


  사랑을 먹으며 자란 나무는 사랑을 못 먹으며 자란 나무하고 사뭇 다릅니다. 사랑을 먹으며 자란 사람은 사랑을 못 먹으며 자란 사람하고 사뭇 다릅니다.


  영양분만 잘 먹고 자란 나무는 사랑을 잘 먹고 자란 나무처럼 싱그럽거나 튼튼하지 못합니다. 영양분만 잘 먹고 자란 사람은 사랑을 잘 먹고 자란 사람처럼 상큼하거나 씩씩하지 못합니다.


  안개 걷히는 푸른 들판을 아이들과 함께 바라봅니다. 고운 햇살이 드리우면서 한여름 막바지 매미들 우렁차게 노래하는 소리를 작은 집에서 들으며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을 먹고 싶어요. 나는 사랑을 베풀고 싶어요. 나는 사랑을 얻고 싶어요. 나는 사랑을 주고 싶어요. 나한테 가장 빛나는 사랑을 나누고, 나한테 가장 고마운 사랑을 누려요.


.. 가장 큰 / 그늘은 그늘로부터 오는 것 / 제 아내와 / 아기들의 / 피로 ..  (영원산성領願山城)


  가끔 읍내로 마실을 갈 적에 읍내 한켠 팔백예순 살 넘은 느티나무한테 찾아갑니다. 읍내에서 누군가를 만날 적에 팔백예순 살 넘은 느티나무 그늘에서 쉬며 기다리곤 합니다. 아이들은 느티나무 둘레에서 쉬도 누고 놀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느티나무를 타고 오르기도 하고, 느티나무 잎사귀를 간질이기도 합니다.


  우람한 느티나무 둘레에는 어린 느티나무가 자랍니다. 어른 손가락 길이만 한 느티나무가 있고, 어른 팔뚝만 한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처음 뿌리내리고 나서 한 해를 보낸 갓난쟁이 느티나무는 고작 내 새끼손가락 길이만 한데, 이만 한 길이인 어린 느티나무라 하더라도 ‘나무가 맞아’요. 나무답습니다. 세 살이나 다섯 살 먹은 어린 느티나무는 이제 내 팔뚝만 하다 싶은데, 이 작고 가녀린 줄기 또한 ‘나무가 맞아’요.


  어린 느티나무 가느다란 줄기를 만지면 아주 단단합니다. 너무 마땅한 얘기이지만, 나무가 맞으니 나무줄기다운 어린 줄기입니다. 잎사귀를 보아도, 팔백예순 살 느티나무 잎사귀랑 다섯 살 느티나무 잎사귀랑 모양이 같아요.


.. 오너라 / 오너라 // 쓸쓸할 땐 어김없이 찾아오리라 // 못난이 영일아 / 칠칠이 / 울냄이 쪼다 영일아 // 그래 텅 빈 유리같은 이 애갱애갱 울보 애갱치야 ..  (내 안에 있는 커다란 유리琉璃)


  아이들이 오줌을 눕니다. 아이들이 똥을 눕니다. 아이들이 밥을 먹습니다. 아이들이 노래를 합니다. 아이들이 걷습니다. 아이들이 옷을 입습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합니다. 어른과 같습니다. 어른하고 서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고운 목숨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예쁜 사람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씩씩하게 한삶을 일구는 벗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즐겁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시원한 골짝물이나 냇물에 손발을 담그며 싱긋 웃습니다.


  이 땅에는 나무 한 그루가 천천히 숲을 이루기에 아름다운 꿈이 자랍니다. 이 누리에는 사람 하나 천천히 사랑을 이루기에 어여쁜 꿈이 피어납니다.


  꽃은 꽃답게 밝은 이야기 나누어 줍니다. 풀은 풀답게 푸른 이야기 나누어 줍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착한 이야기 나누어 줍니다. 나무는 나무답게 너른 이야기 나누어 줍니다.


.. 붉은 꽃그림으로 / 모란꽃 잎사귀로 / 하늘 오르던 그 시절 / 꽃 한 송이 / 영일英一 ..  (황혼에 돌아오다)


  “시가 시원치 않다는 평이 있다. 시원할 까닭이 없다. 그 사이 내 삶을 알기나 하는가(머리말)?” 하는 이야기를 읊으며 첫머리를 여는 시집 《시김새 1》(신생,2012)를 읽습니다. 시집 《시김새》는 1권과 2권이 나란히 나옵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조용히 살아간다는 김지하 님이 내놓은 시집입니다.


  곰곰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김지하 님 스스로 삶이 시원하지 않다고 여기니까 시가 시원하지 않을밖에 없습니다. 참말 그래요. 김지하 님 삶은 썩 시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김지하 님 삶은 시원하지 않을까요. 누군가 김지하 님을 해코지하기 때문일까요. 김지하 님이 당신 삶을 스스로 해코지하기 때문일까요.


  목마른 이는 냇물도 샘물도 수돗물도 시원하게 마십니다. 마른 목을 축이며 고맙습니다. 목이 마를 때에 마시던 물맛을 언제까지나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목이 마른 몸을 달래는 마음은 물맛을 헤아립니다. 목이 마를 때에 마시는 냇물과 샘물과 수돗물이 어찌 다른가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다만, 이 물이고 저 물이고 목숨을 살리는 목숨물입니다. 목이 마를 때에는 냇물이라서 더 대단하지 않고 수돗물이라서 덜 대단하지 않아요.


  배고픈 이는 쌀밥도 보리밥도 수수밥도 맛나게 먹습니다. 고픈 배를 채우며 고맙습니다. 배가 고플 때에 먹던 밥맛을 오래오래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픈 배를 채우는 마음은 밥맛을 헤아립니다. 배가 고플 때에 먹는 쌀밥과 보리밥과 수수밥이 어찌 다른가를 찬찬히 헤아립니다. 다만, 이 밥이고 저 밥이고 목숨을 살리는 목숨밥입니다. 배가 고플 때에는 쌀밥이라서 더 대단하지 않고 수수밥이라서 덜 대단하지 않아요.


.. 아아 / 이젠 / 상식이 된다 / 할머니 손짜장도 이젠 그저 당연한 것 / 허허허허허 ..  (누가 누구더러)


  시를 쓰는 사람과 시를 읽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얼마나 목이 마르기에 시를 쓸까요. 시를 읽는 사람은 얼마나 목이 마르기에 시를 읽을까요.


  타는 목마름을 채울 만한 시를 쓰는 사람들일까 생각합니다. 아픈 배고픔을 채울 만한 시를 읽는 사람들일까 생각합니다.


  시골마을 할아버지는 낫으로 풀을 베면서 시를 씁니다. 시골마을 할머니는 된장찌개를 끓이면서 시를 씁니다. 도시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컴퓨터를 켜고 앉아도 시를 씁니다. 전기밥솥에 밥을 안쳐도 시를 씁니다.


  언제나 ‘마음’으로 시를 쓰지 ‘몸’으로 시를 쓰지는 않습니다. 늘 ‘마음’이 움직여 시를 쓰지 ‘몸’이 이끌려 시를 쓰지는 않습니다.


  어느 중국집 할머니는 손으로 가락을 뽑아 짜장면 한 그릇 내놓습니다. 어느 중국집 아저씨는 기계로 가락을 뽑아 짜장면 한 그릇 내놓습니다. 모두 같은 짜장면입니다. 즐겁게 받고 즐겁게 먹습니다. 즐겁게 내놓고 즐겁게 살림을 꾸립니다.


  살아가기에 즐겁게 웃습니다. 살아가는 하루를 즐겁게 웃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마음이 살고 몸이 삽니다. 어른이 살고 아이가 삽니다. 사랑이 살고 믿음이 삽니다.


  왼쪽에 선 사람도 밥을 먹고, 오른쪽에 선 사람도 밥을 먹습니다. 햇살은 왼쪽에만 비추지 않습니다. 바람은 오른쪽에만 불지 않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왼쪽도 오른쪽도 없습니다. 내가 한 바퀴를 돌면 왼쪽도 오른쪽도 사라집니다. 그저 나와 네가 있을 뿐이요, 나와 너는 똑같은 사람이면서 똑같은 목숨입니다.


  책을 읽는 사람이 더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책을 안 읽거나 못 읽는 사람이 덜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따사로이 바라볼 때에 따사로운 사랑이 태어납니다. 슬기롭게 생각할 때에 슬기로운 생각이 태어납니다. 그저 그뿐이기에 굴레나 멍에를 질 까닭이 없습니다. 스스로 굴레를 생각하기에 굴레가 태어납니다. 스스로 멍에를 지니까 멍에를 집니다.


.. 내가 그때 지독한 공산당원이었다고 / 지금은 반동분자라고 / 악쓰는 애들 / 가득한 이때 예쎄닌 // 내가 / 예쎄닌을 외우며 한없이 / 눈물 흘리던 시인이었음을 생각한다 ..  (단계동 생태탕)


  나는 ‘예쎄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김지하 님은 예쎄닌을 읽으며 눈물 흘리던 시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그렇군요. 시인 김지하 님은 예쎄닌을 읽으며 눈물 흘리던 사람이었으니까, 이 삶길을 곱게 걸어갈 수 있으면 가장 예뻐요. 스스로 가장 예쁘게 살아갈 때에 가장 빛나요. 후박나무는 후박꽃을 피우고 후박열매를 맺어요. 후박나무가 동백꽃을 피우는 일은 없어요. 감나무는 감꽃을 피우고 감알을 맺어요. 감나무가 능금이나 포도를 맺는 일은 없어요.


  예쎄닌 시인은 예쎄닌 시를 씁니다. 감자꽃 시인은 감자꽃 시를 씁니다. 시골마을 할배는 시골마을 노래를 부릅니다. 서울 성북동 아줌마는 서울 성북동 춤을 춥니다. 삶은 사랑이고, 사랑은 삶입니다. 나무는 꿈이고, 꿈은 나무입니다. 사람은 빛이고, 빛은 사람입니다. 다섯 살 아이가 곁에서 자꾸자꾸 시김새를 합니다. 아이랑 같이 놀 때가 되었습니다. (4345.8.12.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와 눈길
[시를 말하는 시 2] 문태준, 《가재미》

 


- 책이름 : 가재미
- 글 : 문태준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2006.7.21.)
- 책값 : 8000원

 


  바라보는 곳을 시로 씁니다. 바라보면서 느끼기에 시로 씁니다. 바라보면서 느끼고, 좋구나 아쉽구나 기쁘구나 슬프구나 재미있구나 놀랍구나 안쓰럽구나 아프구나 웃기구나 멋스럽구나 하고 느끼면서 시를 씁니다.


  한여름 무르익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 시골 논길을 두 아이를 수레에 태워 자전거로 면소재지 우체국을 다녀옵니다. 가는 길에는 못 보았으나 오는 길에는 널따랗게 펼쳐진 논 가운데 한 곳은 벌써 이삭이 패고 알곡이 맺힙니다. 달리던 자전거를 멈추고는 한참 들여다봅니다. 작은아이는 잠들었으나 큰아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잠을 쫓습니다. 큰아이더러 여기 이 논에만 벌써 알곡이 맺혔다고 알려줍니다.


  면소재지로 가는 길은 살짝 내리막이라 수월히 달리는데, 외려 수월히 달린 탓인지 왼쪽도 오른쪽도 더 찬찬히 살피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살짝 오르막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데, 참말 힘들게 달리기에 천천히 지나가면서 왼쪽도 오른쪽도 조금 더 오래 더 찬찬히 살피는구나 싶습니다.


  땀이 줄줄 흐르지만, 때때로 노래를 부릅니다. 자전거수레에 타며 아버지하고 여름바람 쐬는 아이들이 느긋하게 쉬며 하늘빛을 느끼고 들빛을 느끼라며 온갖 노래를 부릅니다. 살짝 오르막인 길을 땀흘려 달리면서 노래를 부르다 보면 목이 컥컥 막힙니다. 숨이 가쁩니다. 이럴 때에는 빠르기를 더 늦춥니다. 더 천천히 달리며 숨을 고르고, 숨을 고르면서 노랫가락을 가다듬습니다.


.. 작은 독에 더 작은 수련을 심고 며칠을 보냈네 ..  (수련)


  스스로 바라보는 곳에 따라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이곳 내음과 무늬와 결을 천천히 받아들입니다. 저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저곳 흐름과 깊이와 너비를 하나씩 맞아들입니다. 올림픽 이야기를 바라보는 사람은 어느 결에 올림픽 이야기에 마음을 씁니다. 달동네 이야기를 바라보는 사람은 시나브로 강제철거 이야기에 마음을 씁니다.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며 논밭을 늘 바라보는 사람은 스스로 흙을 일구지 않더라고 흙일에 마음을 씁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늘 바라보는 사람은 저절로 교육에 마음을 쓰겠지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 사람은 지하철이나 버스가 언제 오는가에 마음을 쓰다가는 지하철 환경이나 버스가 막히거나 거칠게 달리는 모습에 마음을 씁니다. 어디를 가든 자가용을 모는 사람은 교통 정보에 마음을 써요.


  무엇을 바라보느냐는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하루를 온통 들여 밥을 하고 비질과 걸레질을 하며 아이들을 보살피다가는 빨래를 합니다. 밥을 해야 하니 저잣거리에 다녀와야 하고, 저잣거리에 다녀오면서 가게마다 물건을 어떤 값으로 파는가를 살핍니다. 집일이나 집살림을 하면서 집안과 집밖 흐름을 살핍니다. 아이들과 복닥이면서 아이들 눈빛이나 몸짓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누군가는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회사나 공공기관 얼거리에 젖어듭니다. 스스로 맡은 일을 훌륭히 해내면서 회사원답고 공무원답게 삶을 보냅니다. 스스로 선 자리에서 스스로 삶을 바라볼 뿐 아니라, 둘레에 있는 사람들도 스스로 선 자리에서 생각합니다.


.. 장대비 속을 / 멧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 彈丸처럼 빠르다 ..  (바깥)


  내 어릴 적을 돌이킵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첫무렵에는 학교에서 ‘1일 생활권’이라는 낱말을 가르쳤습니다. 나라안 곳곳에 고속도로가 새로 뚫리며 ‘1일 생활권’이 되니 참 살기 좋은 나라라고 했습니다. 새로 뚫리는 고속도로 이름을 외워야 했고, ‘백지도’라는 데에 고속도로를 그려야 했습니다. 고속도로가 더 많이 더 길게 생겨야 ‘나라 발전’이라고 들었습니다. 고속도로를 새로 짓는 대통령 ‘님’인지 ‘각하’인지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 가을에 강원도 양구에 있는 군대에 들어가서 스물여섯 달을 지내며 이무렵에도 한국은 아직 ‘1일 생활권’이 아닌 줄 몸으로 느낍니다. 강원도 양구 깊은 멧골짝에 있는 군부대로 주말마다 온갖 사람들이 면회를 오시는데, 적잖은 시골사람들은 1박2일이나 2박3일에 걸쳐 찾아오셨어요. 전라남도 완도나 진도나 강진에서 찾아오는 분들이 으레 여러 날에 걸쳐 오시더군요.


  그러고 보면, 나도 이런 일을 흔히 겪습니다. 충청북도 음성에서 살던 때에 충청남도 홍성으로 나들이를 가느라 여덟 시간이 걸렸어요. 전라남도 고흥에서 살며 충청북도 음성에 있는 내 어버이를 뵈러 가는 데에 아홉 시간이 걸려요.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이라 하는 시외버스나 기차를 여러 차례 갈아타면서 ‘가장 빠르다’는 길로 다녀도 ‘길그림으로는 그리 안 멀다’ 싶은 곳까지 참 오랜 시간을 들입니다. 전남 고흥에서 충북 음성까지 아홉 시간이니, 하루에 찾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해요. 열여덟 시간을 들이더라도 시외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움직일 수 없어요.


  오늘날에는 온갖 고속도로가 참 많은데, 초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고속도로 이름을 외우도록 시키며 시험문제로도 내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 앞에 선 교사는 ‘나라 발전’이 무엇이라고 가르칠는지 궁금합니다. 공산품을 다른 나라로 많이 내다 팔아야 나라 발전이 될는지, 공장을 많이 짓거나 댐을 세우거나 발전소나 대기업이 많이 생겨야 나라 발전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주식투자와 자기계발과 무엇무엇이 얼마나 시끌벅적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  (극빈)


  새벽 세 시에 작은아이가 기저귀에 쉬를 눕니다. 작은아이 기저귀를 갑니다. 이윽고 큰아이가 끙끙거립니다. 큰아이 등을 쓸면서 쉬 마렵니, 쉬 마려우면 일어나렴, 하고 말합니다. 큰아이는 끙끙거리던 소리를 멎고 조용합니다. 이십 분쯤 뒤, 큰아이가 부시시 일어나며 묻습니다. “지금 몇 시예요?” 아이는 벌써 일어나서 하루를 열며 놀 마음일까요? 설마. “아직 일어나서 놀 때는 아니에요. 쉬 마렵니? 쉬 하자.” 하고 얘기하며 오줌그릇에 앉혀 쉬를 누입니다. 쉬를 다 눈 아이하고 방으로 들어와서 누워 자도록 하고 등을 다시 천천히 씁니다.


  큰아이하고는 어느덧 다섯 해째, 작은아이하고는 이제 두 해째, 낮 똥오줌을 치우고 밤 똥오줌을 가리거나 치웁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언제나 아이들하고 찰싹 붙으며 살아갑니다. 이토록 찰싹 붙어 살아갈 줄 알았는지 몰랐는지 헤아릴 길은 없으나, 아이 둘이랑 옆지기하고 찰싹 붙어 살아가며 생각합니다. 이렇게 찰싹 붙어 살아가기에 ‘아이들 마음’을 한결 깊이 알거나 느낀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아이들과 함께 한 곳을 바라보는구나 하고는 느껴요. 내가 바라보는 곳을 아이들이 바라보고, 아이들이 바라보는 곳을 내가 바라봐요.


..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식은 재를 끌어내 그녀가 불의 감각을 잊도록 하는 것 // 저 먼 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  (가재미 3)


  어버이인 나와 옆지기가 읊는 말은 아이들이 배우는 말입니다. 둘레 어른들이 아무렇게나 읊는 말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이 익히는 말입니다. 나와 옆지기가 살아가는 모습은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매무새입니다. 둘레 어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아이들이 맞아들이는 몸짓입니다.


  아이들이 착하거나 슬기롭기를 바라면, 어버이로서 나부터 착하거나 슬기롭게 살아갈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맑은 눈빛이나 밝은 말빛을 길어올리길 바라면, 어버이로서 나부터 맑은 눈빛이 되거나 밝은 말빛을 다스릴 노릇입니다.


  내 눈길이 내 삶이 됩니다. 내 삶이 내 눈길이 됩니다. 내 말마디가 내 사랑이 됩니다. 내 사랑이 내 말마디가 됩니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내 삶입니다. 내 삶이 내가 부르는 노래로 태어납니다. 내가 쓰는 시는 내 삶입니다. 내 삶이 내가 쓰는 시로 거듭납니다.


.. 개망초가 하얗게 피었다 / 잠자리가 날 때이다 / 너풀너풀 잠자리가 멀리 왼편에서 바른편으로 혹은 / 거꾸로 / 강이 흐르듯 누워서 누워서 ..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


  더 좋거나 덜 좋은 시나 노래나 사진이나 만화란 없습니다. 나한테 더 반갑거나 즐거울 만한 시나 노래나 사진이나 만화란 없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결에 따라 받아들이는 시나 노래나 사진이나 만화가 있을 뿐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맞아들이는 시나 노래나 사진이나 만화가 있을 뿐이에요.


.. 작은 돌에 / 새가 / 지긋이 / 앉아 운다 ..  (작은 새)


  시를 쓰는 문태준 님이 내놓은 시집 《가재미》(문학과지성사,2006)를 읽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읽습니다. 아이들과 복닥이는 틈바구니에서 살짝 등허리를 쉬며 자리에 드러누울 적에 천천히 천천히 읽는데 하루만에 책을 덮습니다. 문태준 님은 “울퉁불퉁한 뼈 같은 시(시인의 말)”라고 말하는데, 문태준 님 스스로 바라보기에 당신 싯말은 울퉁불퉁한 뼈요 당신 삶 또한 울퉁불퉁한 뼈일 테지요.


  나한테는 시가 어떠할까 하고 곱씹어 봅니다. 나도 내 뼈를 들여다보며 살아가나 하고 고개를 갸웃해 봅니다. 나는 내 뼈를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뼈와 살점과 힘살과 물과 피와 세포와 털과 눈과 여러 가지가 골고루 얼크러져 이루어진 몸뚱이가 있고, 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마음(가슴)과 머리(생각)가 있습니다. 나는 내 뼈만 따로 바라보거나 생각한 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뼈가 울퉁불퉁한지 반반한지 곧은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 살결이나 손마디가 어떠한지도 모릅니다. 나는 내 머리카락이나 발톱이 어떠한지도 모릅니다. 다만, 내 뼈도 살결도 손마디도 머리카락도 발톱도 모두 내 몸을 이룹니다. 곧, 나한테 시가 무엇인가 하고 밝히라 한다면, 내 시는 내 모두입니다. 내 시라면 내 삶이고, 내 시라면 내 사랑이며, 내 시라면 내 마음입니다.


  내 삶이 시로 드러나고, 내 사랑이 시로 스며들며, 내 마음이 시로 빛납니다.


.. 그믐달은 우물물처럼 차오르고 / 잠든 아이는 꿈에서도 자라나네 ..  (겨울밤)


  시집 《가재미》를 읽으며 “나는 노란 소국을 窓에 올려놓고(小菊을 두고)”라든지 “겨울밤 卍海도 東里도 언 잎에 싸락눈 치는 소리 듣다(그리운 밥 냄새)”라든지 “삯바느질로 끼니를 이어가던 貧女의 집안에(오, 가시등불!)”라든지, 톡톡 튀어나오는 한자가 무척 낯섭니다. 그런데 “이런 욱욱한 돌로(돌의 배)”라든지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누가 울고 간다)”라든지 “뜨막하게 소꿈을 꾸는(꿈)”이라든지, 툭툭 튀어나오는 토박이말이라는 낱말도 퍽 낯섭니다.


  그러나 이 모두 싯말을 이룹니다. 이 모두 문태준 님이 바라보고 들으며 읊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싯말을 이룹니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 나한테 낯익고 낯설고를 떠나, 문태준 님은 이러한 말마디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문태준 님은 이러한 낱말로 삶을 바라보고 사랑을 바라보며 마음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시란 무엇일까요. 시를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시를 읽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요.


  새벽 세 시 사십 분,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하는 큰아이가 아버지를 찾아 옆방으로 또르르 와서는 품에 안깁니다. 나는 큰아이를 무릎에 누여 토닥토닥 재우면서 글 한 줄 씁니다. 큰아이더러 “왜에?” 하고 묻고, 큰아이는 “안아 주세요.” 하고 말하며, 나는 무릎을 내어주며 두 팔로 살포시 안습니다. 아직 많이 후끈거리는 한여름 새벽 세 시 사십팔 분, 아이가 내 무릎에 누우면 아이 등판은 퍽 뜨뜻할 테고 내 무릎이며 몸은 꽤 후끈거려 땀이 돋겠지요. 그래도 부채질을 하며 아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다시 잘 자렴 하고 마음속으로 말을 건네면 아이도 어버이도 좋은 새벽을 누리며 곧 틀 동을 맞이하리라 생각합니다. 새벽 세 시 오십팔 분, 이제 내 무릎은 찌릿찌릿 저립니다. 아이가 더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려야 할 텐데, 그무렵이 되면 내 무릎은 아주 저려 일어나지도 못할 듯합니다.


  새 하루를 새 마음으로 빚습니다. 새 마음으로 새 삶을 일굽니다. 새 삶으로 새 말을 영급니다. 새 말은 시 하나로 곱게 피어납니다. (4345.8.10.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기똥풀 우리시대 교사시선 1
김광철 / 고인돌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와 목소리
[시를 말하는 시 1] 김광철, 《애기똥풀》

 


- 책이름 : 애기똥풀
- 글 : 김광철
- 펴낸곳 : 고인돌 (2011.12.1.)
- 책값 : 1만 원

 


  시는 노래입니다. 시를 쓴 사람은 노래를 부르듯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사람은 노래를 듣듯 시를 듣습니다.


  노래는 시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시를 쓰듯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듣는 사람은 시를 듣듯 노래를 듣습니다.


  교사가 시를 쓸 때에는 교사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삶을 시로 들려줍니다. 교사가 아이들과 얼크러지며 빚는 삶을 차분하거나 우렁차게 노래할 때에 시가 태어납니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노래하는 삶일 때에 시가 태어나고, 교사와 학생이라는 옷을 벗고 ‘한 사람으로 만나는 삶’이 있을 때에 시와 같은 노래를 즐겁게 부릅니다.


  교사인 김광철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애기똥풀》(고인돌,2011)을 읽습니다. 참다이 이루는 교육을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하는 김광철 님은, 당신이 쓴 시에서 당신 목소리를 낱낱이 담습니다. 이 나라 교육이 나아가기를 바라는 곧은 길을 생각하며 시를 씁니다. 김광철 님 스스로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돌아보면서 시를 씁니다.


  교육은 더 좋은 교육이나 더 나쁜 교육이 없습니다. 사람은 더 좋은 사람이나 더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날씨는 더 좋은 날씨나 더 나쁜 날씨가 없습니다. 그저 교육이고, 그저 사람이며, 그저 날씨입니다. 받아들이는 가슴에 따라 이 교육을 스스로 좋게 여길 수 있고, 저 교육을 스스로 나쁘게 삼을 수 있습니다. 맞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이 사람은 반가이 어깨동무할 수 있고, 저 사람은 얄궂게 등돌릴 수 있어요. 마주하는 삶에 따라 이 날씨는 나한테 좋다 느낄 수 있고, 저 날씨는 나한테 궂다 여길 수 있어요.


.. 여름날 조밭을 온통 뒤덮던 넌 철천지 원수였다 / 뽑고 또 뽑아도 끝이 없는 너와의 씨름 / 바다로 골짜기로 / 다른 애들처럼 물놀이 가고 싶은 소년의 꿈도 / 여지없이 짓밟은 너였지 / 해도 해도 끝이 없던 농사일에 / 시골 소년의 여름날은 / 차코 없는 사슬로 묶인 교소도 ..  (바랭이)


  교사 김광철 아닌 어린이 김광철한테 ‘어린 날 조밭’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조밭을 둘러싼 바랭이풀에 허덕이느라 바랭이풀이 끔찍하게 싫다는 생각만 불러일으키는 곳이었을까요. 조밭에서 낫으로 조를 꺾으면서 흘리던 땀이나 올려다보던 하늘이나 내려다보던 흙은 어떻게 느꼈을까요. 한 사람이 흙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조밭에는 조와 바랭이풀만 자라지는 않았겠지요. 다른 들풀이 자랐을 테지요. 때로는 들풀에서 들꽃이 피었을 테고요. 밭뙈기는 조밭만 있지 않았겠지요. 무와 배추를 심은 밭이 있었을 테고, 감자와 고구마를 심은 밭이 있었겠지요.


  조밭은 지구별에서 어떤 흙땅이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시골마을 조밭은 온누리에서 어떤 삶터였을까 곱씹어 봅니다. 조밭을 일구던 손길은 어떠한 꿈을 꾸던 손길이었고, 이 조밭에서 거둔 곡식을 먹는 사람은 어떠한 마음밭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올해에도 팔당대교 아래에서 고니들을 만났다 / 저 고니들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장소에서 만났다 / 쟤들은 그 먼 길 / 만 리 먼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도 찾아온다 // 나는 그저께 차 몰고 찾아갔던 친구 집을 다시 찾았다 / 분명 저 골목 같은데, 그리 들었더니 그 길이 아니더라 / 또 다른 골목길을 더듬는다 / 그러기를 수차례, 결국은 친구를 전화로 불러내고야 말았다 ..  (철새)


  하나를 보려고 하면 언제나 하나를 봅니다. 하나를 보려고 하니까 하나를 보는데, 하나를 보느라 막상 하나를 둘러싼 여럿이나 다른 하나를 못 보곤 합니다. 하나를 바라보면서 하나를 마음껏 바라보고, 하나를 둘러싼 모두를 살가이 쓰다듬는다면, 내 삶을 이루는 모든 사랑을 아름다이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시를 쓰는 교사 한 사람한테는 ‘고니’ 한 마리나 열 마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본 고니가 올해에 보는 그 고니일까요. 지난해에 본 고니는 지지난해에 본 그 고니일까요.

  사람은 고니를 바라보며 ‘고니’라고만 말합니다. ‘고니 아무개’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참새를 바라볼 때에도, 직박구리나 제비를 바라볼 때에도, 메뚜기나 개구리를 바라볼 때에도 ‘참새 아무개’나 ‘개구리 아무개’라고 말하지 못해요.


  어쩌면, 사마귀가 사람을 바라볼 때에 ‘그저 다 같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마귀를 바라보는 사람이 ‘그저 다 같은 사마귀’라고 여기면, 사마귀도 사람을 그저 다 같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보리밭 보리를 바라보며 다 같은 보리가 아니라, 다 다른 목숨인 보리씨앗이 다 다른 목숨인 보리알을 맺는다고 느낀다면, 보리밭을 가득 메운 어여쁜 보리들은 사람을 바라보며 다 다른 사람들하고 어깨동무하는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매미 노랫소리를 듣고, 풀벌레 노랫소리를 들으며,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며 듣는 노랫소리는 늘 다릅니다. 무논 앞에 서서 개구리들 노랫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개구리마다 목소리가 달라요. 다 다른 목소리는 다 다른 바람결에 실려 내 귓결로 곱게 얼크러지며 스며들어요.


.. 참다못해 기어이 그 녀석의 숟가락을 뺏어 들고 / 밥 한 술 뜨고 그 위에 김치 한 조각 얹어 놓고는 / 기어이 고 녀석 입 속에 밀어 넣고야 만다 / 억지로 받아물기는 하지만 / 여전히 꼭 다문 입술 / 내리깔고 있는 눈길 / 얼르고 달래 보며 / 구슬려도 보고 협박도 해본다 / “얼른 먹으면 놀이터에서 10분 동안 놀다 오게 해 줄게.” / “이거 얼른 먹지 않으면 내일은 굶긴다.” / “한국 사람은 김치를 먹어야지. 너흰 미국 사람 아니잖아.” / 그래도 아랑곳없다 ..  (병아리들의 점심)


  나는 시를 즐겁게 읽고 싶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높이는 시가 아니라, 사랑을 나누려는 시를 읽고 싶습니다.


  목소리를 높인들 시가 되지 않습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른대서 노래가 되지 않습니다. 옥타브가 높아야 듣기 좋은 노래나 멋진 노래가 되지 않습니다. 악기를 많이 타야 놀라운 노래가 뛰어난 노래가 되지 않습니다. 노래는 노래다울 때에 노래입니다. 노래는 결을 살리고 무늬를 빛낼 때에 노래입니다. 곧, 시는 시다울 때에 시입니다. 시다운 결을 살리고 시다운 무늬를 빛낼 때에 시입니다. 이렇게 가야 하거나 저렇게 가야 한다고 목청을 외친다고 시가 되지 않습니다.


  왜 아이한테 밥을 억지로 먹여야 할까요. 왜 아이를 윽박질러야 할까요. 한국사람이 김치를 꼭 먹어야 할까요. 한국사람이 김치를 못 먹을 수 없을까요.


  한겨레가 김치를 먹은 지는 얼마 안 되었습니다. 한겨레는 이천 해나 오천 해 앞서에도 김치를 먹지는 않았습니다. 일만 해나 오만 해 앞서 한겨레는 무엇을 먹었을까요. 일만 해나 오만 해 앞서 먹던 무언가를 오늘날 먹어야 비로소 한겨레다울까요. 오백 해나 백 해 앞서 널리 먹던 무언가를 오늘날 먹어야 바야흐로 한겨레다울까요.


  이주노동자가 낳은 아이도 한국사람이고 한겨레입니다. 한국땅에서 태어나지 않고, 중국이나 러시아나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도 한국사람이고 한겨레입니다. 어느 사람은 김치 같은 먹을거리를 잘 먹지만, 어느 사람은 김치 같은 먹을거리가 몸에서 안 받습니다. 어느 사람은 소젖을 잘 마시지만, 어느 사람은 소젖이 몸에서 안 받습니다. 밀가루가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찬것이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달걀이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다 다른 사람은 다 다른 밥으로 다 다른 삶을 이룹니다.


  아이가 김치 한 조각을 먹고 나서 ‘놀이터에서 고작 10분 놀’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즐거울까요. 아이는 혼자 또는 여럿이서 놀이터에서 어떤 놀이를 10분 동안 할 만한가요. 오늘날 아이들은 공차기나 줄넘기를 빼고, 흙놀이나 고무줄놀이나 뜀뛰기놀이 들을 얼마나 즐거이 누리는가요. 학교는 아이들한테 어떠한 터전일까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삶을 얼마나 바라보거나 느끼면서 제 삶을 씩씩하거나 튼튼하거나 싱그럽거나 해맑게 북돋우는가요.


  아이들이 따르거나 다가오도록 하자면, 교사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 됩니다. 아이들이 믿거나 찾아오도록 하자면, 교사 스스로 사랑스럽게 살아가면 됩니다.


  목소리 높이는 교사는 아이들한테 알맞지 않습니다. 지식과 정보를 주워섬기는 교사는 아이들한테 걸맞지 않습니다. 이론과 비평을 잘 할 줄 아는 교사는 아이들한테 반갑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함께 놀고 함께 먹으며 함께 누릴 수 있는 어버이와 교사가 반갑습니다. 아이들은 함께 사랑하고 함께 꿈꾸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어버이와 교사가 즐겁습니다.


.. 아니다 / 그 길은 정의가 아니기 때문에 아니다 / 진정으로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 그들 욕심의 반은 내려놓아야 한다 / 그 엄혹한 자유당, 공화당 치하에서도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 / 그 개천 자체를 송두리째 메워버리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 물길은 터야 한다 / 누구나 노력하면 할 수 있느는 희망을 줘야 한다 ..  (곽교육감에게도 비추고 있을 팔월 열나흘 달)


  교사 김광철 님은 《애기똥풀》이라는 시집을 내놓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는지 궁금합니다. 교사 김광철 님은 ‘목소리 높이기’ 아닌 ‘삶을 사랑하기’로 시를 쓰는 길을 듣거나 배우거나 마주하거나 찾아나선 적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교사한테서 지식을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교사한테서 삶을 배웁니다. 일그러진 삶을 배우든 아름다운 삶을 배우든,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교사한테서 삶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집에서 제 어버이와 살아가며 삶을 배웁니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아이들은 삶을 배웁니다. 삶 아닌 다른 무엇을 배우지 않아요.


  곧, 삶을 나누는 학교요 집이고 마을입니다. 그러니까, 삶을 쓰는 시요 소설이며 수필입니다. 삶을 노래합니다. 삶을 춤춥니다. 삶을 그립니다. 삶을 찍습니다.


  어떤 삶을 사랑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어떤 삶을 사랑하면서 춤을 추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고 싶은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교사이자 시인으로 살아가려 한다면, 무엇보다 어떤 삶을 사랑하면서 시를 쓰고 아이들 앞에 서고 싶은가를 생각할 노릇입니다.


  시집 《애기똥풀》에서는 바로 이 대목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틀은 시집이지만, 정작 시집이 시집다울 몫인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김광철 님은 교사로 지내는 나날을 시로 썼다고 생각할 테지만, 그야말로 시는 ‘목소리’ 한 가지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글은 목소리예요. 모든 말은 목소리예요. 어떤 글이거나 말이거나 모두 목소리예요. 나는 늘 내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가요. 굳이 ‘나는 이런 목소리를 낸다구!’ 하고 힘주어 되풀이할 까닭이 없어요. 내 살아가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면 이 이야기에서 목소리를 살피고 느끼면서 삶과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려 하지 않고, 온통 목소리로만 꽉 눌러채워 시라는 옷을 입힌다 한다면, 겉보기로는 시라 할는지 모르나, 싯말은 하나도 태어나지 않고 말아요.


  《애기똥풀》은 시집이 되지 못해요. 꼴은 시집이라 하지만, 시집다운 목소리가 없어요. 모양새는 시집이라 할 터이나, 시집으로서 삶을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지 못해요. 겉모습은 시집이 되겠지만, 참교육이든 참교사이든 참배움이든 참꿈이든 참지식이든 참얘기이든,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 되는가 하는 갈래조차 들려주지 못해요.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리는 기쁜 사랑을 시로 적을 수 있기를 빌어요. 맑게 빛나는 냇물을 손으로 떠서 달콤하게 마시는 예쁜 꿈을 시로 노래할 수 있기를 빌어요. (4345.8.7.불.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2-08-07 18:26   좋아요 0 | URL
어려운 얘기이지만,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할 얘기이네요.

시를 그냥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시의 품격과 시를 읽는 사람의 품격을 생각해보게 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꾸벅(__)

숲노래 2012-08-07 19:33   좋아요 0 | URL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지만,
어렵지 않고 쉽다고 생각하면 쉽구나 싶어요.

'시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부터
스스로 잘 갈무리하고 나서
시를 쓸 때에
삶이 빛나는 노래가 되리라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