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불고 싶은 날
정유경 지음, 조미자 그림 / 창비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시·어린이시·어른시·문학을 사랑하는 길
 [책읽기 삶읽기 41] 정유경, 《까불고 싶은 날》



 넘겨짚기는 동시가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겪거나 부대끼거나 살아내지 않고 넘겨짚고서야 동시를 썼다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을 스스로 겪어야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겪어 보지 않고 책으로 읽거나 남한테서 얘기를 들어도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내 눈으로 안 보았고, 내 몸으로 부대끼지 않았으나, 책에 적힌 이야기로 머리에 지식으로 담았으니 안다고 말하는 일은 얼마나 올바를까요. 내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 마음을 ‘내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한테서 속속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로 듣지 않고 넘겨짚을 때에 나는 얼마나 내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 마음을 안다고 할 만할까요.


.. 선생님 질문에 답을 몰라 / 얼굴 빨개졌을 때 / 뒤에서 작은 소리로 / 답을 불러 주었지. // 쉬는 시간에 어떤 애가 / 날 놀리고 달아날 때는 / 그 애 발을 슬쩍 걸어 / 엉덩방아를 찧게 했고. // 왜 그랬을까? / 왜 그랬지? / 아, 궁금해. / 내일 한번 물어볼까? ..  (날 좋아하나 봐)


 어린이시는 어린이가 손수 쓰기도 하지만 어른이 써서 어린이한테 읽히기도 합니다. 어린이시는 어린이가 읽도록 쓰는 시입니다. 어린이가 읽도록 쓰는 시인 만큼 어린이가 알아듣기 어려운 낱말이나 어린이가 알아챌 수 없는 이야기를 담는다면 어린이시가 되지 않습니다.

 어른시를 쓰는 사람들은 ‘시를 읽는다며 이런 말도 못 알아듣느냐?’고 윽박지르듯이 쓰기도 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알아내거나 알아차리지 못할 이야기를 어른들 스스로 잘 모르는 어려운 말을 섞어 쓰기도 합니다.

 어린이시나 어른시나 모두 시이면서 문학입니다. 문학이란 말재주나 말놀이가 아니라 문학입니다. 말재주를 부리면 말재주요, 말놀이를 하면 말놀이입니다. 문학은 이 땅에서 고운 목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나날이 부대끼면서 이루는 이야기를 글이라는 그릇에 담은 넋입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기에 문학입니다. 살아가는 이야기는 꾸밈없이 적바림할 수 있으나, 살을 붙여 적을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이야기는 수수하게 쓸 수 있으며, 맑게 빛나는 무지개처럼 눈부시게 쓸 수 있어요.

 수사법이 돋보일 때에 훌륭한 문학이지 않습니다. 수사법을 한 가지도 모르니까 엉터리 문학이지 않습니다. 문학은 수사법이 아니며, 수사법을 잘 쓴다고 문학이 빛나지 않습니다.


.. 난생처음올 파마를 했다. / 내 머리가 뽀글뽀글 / 라면 머리가 됐다. / 엄마랑 누나가 날 보고 / 연예인 같다고 했다. / 히히. / 기분 좋았다. // 미용실 누나가 한 이틀은 / 머리를 감지 말랬는데 / 아차차! / 오늘 아침에 그만 / 감아 버렸다. // 으흑. / 풀린 내 머리 / 불은 라면이 됐다 ..  (라면)


 어떠한 문학이든 삶을 밑바탕으로 깝니다. 삶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공상과학문학이든 추리문학이든,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을 밑바탕으로 쓰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꿈으로 헤아리는 누리를 글로 쓴다 하더라도 ‘몸으로 살아가는 누리’를 밑바탕으로 삼아 ‘몸으로 살아가지 않는 누리’를 떠올리지, 지식이나 정보로 아무렇게나 짓거나 만들 수 없습니다.

 또한, 문학을 읽는 사람은 몸으로 이 땅에 발을 붙이면서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사람들이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읽는 문학입니다. 삶이 없거나 삶무늬가 없거나 삶결이 없다면, 이러한 작품을 가리켜 문학이라 이름붙일 수 없습니다.

 재미있게 읽을 만하도록 쓴다 해서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낱말을 입에서 또르르 굴릴 만하게 썼기 때문에 괜찮은 어린이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운율을 맞추거나 노래하듯이 쓴다 하기에 어린이시가 되지 않아요.


.. 아! 망했다. / 게임기랑 피자, 치킨 / 다 날아갔다. // 모르는 건 그냥 틀리고 싶은데 / 선생님은 자꾸만 생각을 해 보래. / 그래서 자꾸자꾸 생각을 하니까 / 머리에서 펄펄 김이 나는 것 같아. / 친구들 머리에서도 김이 나겠지? / 선생님 머리에서도 김이 날 거야. / (우리가 못 푸는 걸 보고 열 받아서.) ..  (시험)


 누구나 살아가는 곳에서 바라보고 부대끼며 이야기를 이룹니다. 이야기는 좋거나 나쁘거나 맞거나 틀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삶이냐에 따라 어떤 이야기인가만 있습니다. 살아가는 곳에서 마주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엮기에, 늘 내 테두리에서 삶·사람·사랑을 봅니다.

 훌륭한 삶이나 좋은 사람이나 예쁜 사랑이란 따로 없습니다. 내 삶과 내 사람과 내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 아이들과 어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다울까요?

 아이들이 읽을 동시나 동화를 쓰는 어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인가요? 아이들이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동시나 동화를 쓰는 어른인가요?


.. 방금 파마한 머리가 / 마음에 안 들어 / 엄마도 나도 / 시무룩. // 엄마 머리는 금방 풀릴 것 같고 / 내 머리는 너무 뽀글거려 / 거울 속 엄마 얼굴, 내 얼굴이 / 쀼루퉁. // 그랬는데 // 아주머니가 만 원을 깎아 주니 / 엄마 입이 쏙 들어갔다. / 엄마가 예쁜 머리띠를 사 주어서 / 내 입도 쏙 들어갔다 ..  (룩*퉁*쏙*쏙)


 머리로 쓸 수 없는 시입니다. 입으로 시를 쓴다고도 하는데, ‘입으로 쓰는 시’란 ‘마음으로 쓰는 시’요, 마음으로 쓰는 시란 ‘내가 날마다 일구는 삶으로 쓰는 시’입니다. 내가 선 곳이 흙땅이라면 흙땅 기운과 내음과 소리와 빛깔을 담으면서 쓰는 시입니다. 내가 선 데가 시멘트나 아스팔트라면 시멘트나 아스팔트 기운과 내음과 소리와 빛깔을 실으면서 쓰는 시예요.

 흙기운이 배었대서 더 나은 시가 되지 않습니다. 시멘트자국이 난대서 더 못난 시이지 않습니다. 흙기운을 배었으나 어설프거나 어처구니없는 시가 많습니다. 시멘트자국이 덕지덕지 묻었으나 아리땁거나 사랑스러운 시가 있습니다.

 동시책 《까불고 싶은 날》에 실린 작품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동시책은 글쓴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는가를 곱씹습니다.

 아이들한테 읽힐 동시를 쓴 초등학교 교사 정유경 님은 아이들이 동시를 읽으며 어떠한 넋 어떠한 꿈 어떠한 삶이기를 헤아리는가 돌아봅니다.


.. 이불 속에서는 / 아이 하나가 / 얼굴을 쏙 내밀고 / 나갈까 말까 / 나갈까 말까 // 가지 눈 틈으로는 / 어린 잎 하나가 / 둘레를 살피며 / 나갈까 말까 / 나갈까 말까 ..  (이른 봄날)


 〈이른 봄날〉이라는 작품 하나는 어른 삶과 어린이 삶이 살며시 들여다보입니다. 썩 좋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부자리에서 나갈까 말까 망설이지 않습니다. 어른들한테 길든 아이들이나 이렇습니다. 아이들은 추운 겨울이면 추운 대로 뛰쳐나가고, 더운 여름이면 더운 대로 박차고 나옵니다. 이부자리에서 꼼지락거리는 사람은 도시에서 회사일을 하는 어른들입니다. 시골에서 밭일 논일 하는 어른 또한 새벽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열어요.


.. 하늘에 / 해와 달과 별은 / 매일매일 / 내 머리 위에 나타나 // 내가 사는 곳이 / 우주라는 걸 / 살짝살짝 / 알려 주지요. // 내가 볼 때도 / 안 볼 때도 ..  (해와 달과 별)


 동시책 《까불고 싶은 날》 책날개를 보면, 글쓴이는 “춘천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고 적힙니다. 출판사에서 이처럼 적었는지 글쓴이 스스로 이렇게 적었는지 모르는 노릇인데, “선생님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초등학교 교사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선생님이에요.” 하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선생님’이라는 낱말은 배우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을 높이고자 ‘-님’을 붙이는 부름말이지, 스스로 ‘선생님’이라 말하거나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자리에서 ‘선생님’이라 할 수 없어요.

 동시이든 어린이시이든 어른시이든 문학이든 모두 말을 다룹니다. 말 한 마디를 갈고닦기도 하지만, 말 한 마디에 꿈과 넋과 사랑과 믿음을 싣기도 합니다. 말 한 마디에 따스한 손길과 너그러운 마음밭을 담습니다. 말마디마다 고운 이야기씨가 깃들고, 말마디에는 너른 이야기숲이 우거집니다.

 “내 머리가 뽀글뽀글 / 라면 머리가 됐다. / 엄마랑 누나가 날 보고 / 연예인 같다고 했다. / 히히. / 기분 좋았다.” 하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틀림없이 있을 테고, 이런 생각을 글로 담아 동시를 쓴다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 왜 그랬지? / 아, 궁금해. / 내일 한번 물어볼까?” 하고 헤아리면서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알아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떤 사랑을 어디에서 누구하고 나누려 하는가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어떤 삶을 보여주면서 사랑을 이어주려 하는가요. 이 나라 아이들은 앞으로 서로서로 어떻게 사랑을 나누면서 아름다이 살아가는 길을 일구면 좋다고 생각하는가요.

 말놀이 아닌 말사랑으로 어른인 내 삶을 먼저 차분히 되새기고, 말재주 아닌 말나눔으로 아이들이 살아가는 하루를 가만히 톺아보면서, 착한 마을과 흙빛 손길을 보듬는 글밭을 돌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잔소리를 늘어놓아도 동시가 될 수 없지만, 잔솜씨를 부려도 어린이시는 되지 않습니다. (4344.2.22.불.ㅎㄲㅅㄱ)


― 까불고 싶은 날 (정유경 씀,창비 펴냄,2010.8.20./8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ㄹ 받침 한 글자 사계절 저학년문고 42
김은영 지음, 김수현 그림 / 사계절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입으로 쓰고 마음으로 읽는 시
 [책읽기 삶읽기 38] 김은영, 《ㄹ받침 한 글자》



 (1) 동시 한 자락, 슬픈 얼굴


 나날이 ‘어른이 써서 어른하고 나누어 읽는 시’를 마주하기 힘들다 합니다만, 어른시를 쓰는 사람은 제법 있습니다. 예나 이제나 ‘어른이 써서 어린이하고 나누어 읽는 시’는 참으로 드물다 하는데, 참말 어린이시를 쓰는 사람은 몹시 적습니다.

 어린이가 즐기는 시는 어른이 쓰기도 하고, 어린이가 스스로 쓰기도 합니다. 어린이가 쓴 시를 문학으로 여겨 처음으로 갈무리하여 선보인 분은 이오덕 님입니다. 《일하는 아이들》이라는 책은 오로지 어린이시로 이루어집니다.

 이오덕 님은 아이들이 ‘글쓰기’를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살아가는 터전에서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거나 느낀 이야기를 고스란히 적도록 도왔습니다. 말을 치레해야 문학이 아니요, 말을 꾸며야 일기가 아니며, 말을 덧발라야 재미나지 않음을 아이들이 깨닫도록 살폈습니다.

 문학이란 이야기입니다. 문학이란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면서 꿈꾸는 이야기이든, 살아가면서 부대낀 이야기이든, 문학이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인 이야기입니다. 어린이한테는 어린이대로 어린이 눈높이에 따라 바라보거나 마주하며 살아가는 나날이 있습니다. 이러한 나날을 어린이로서 어린이답게 글로 담으면 곧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른이 써서 어린이하고 나누기에 어린이문학이요, 어린이 스스로 써서 어린이 스스로 즐기기에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린이가 읽을 시는 말놀이로 쓸 수 없습니다. 시는 말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화이든 소설이든 말놀이가 아닙니다. 말재주를 피운다 해서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말재주는 한낱 말재주입니다.


.. 설 쇠러 가네 / 친척들 만나러 가네 // 어서 가서 / 사촌들 보고 싶은데 // 길이 막혀 / 차들이 설설 기네 // 자동차에 / 날개가 달렸으면 좋겠네 ..  (설)


 동시책 《ㄹ받침 한 글자》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ㄹ받침으로 끝맺는 외글자 낱말을 글이름으로 삼아 짤막한 시를 잇달아 씁니다. 참 돋보이는 글이로구나 싶으나, 돋보인다뿐, 일부러 재미나게 쓰려고 하는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너무도 뻔한 틀에 더없이 얽매인 생각에서 헤어나지 않습니다.

 자칫, ‘수수한 여느 삶’을 ‘흔한 삶’으로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 명절날 자가용 타고 ‘시골(고향)’로 가는 일이 수수한 여느 삶이라 해도 틀리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이러한 삶도 얼마든지 시로 적바림할 만하지요. 시로 잘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ㄹ받침 한 글자》에서 다루는 〈설〉이라는 동시는 얼마나 문학답거나 시다울까 궁금합니다. 꽉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우리 집 자동차만 날개를 달면 무엇이 좋을까요. 왜 이 아이 어버이는 명절날 고속도로가 자가용으로 가득 막히는 줄 알면서 자가용을 끌고 나왔을까요. 시외버스나 기차를 탈 수 없었으려나요. 여느 때 여느 자리에서도 이처럼 자가용을 몰고 이리 다니고 저리 누비고 하겠지요. 요새 웬만한 집에는 다 있다는 자가용이라지만, 우리 집에는 자가용이 없고, 우리 집마냥 자가용 없는 가난한 살림은 어김없이 있습니다. 자가용으로 시골을 찾아가는 사람도 많을 터이나, 버스나 기차를 타고 찾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껏 버스나 기차를 타고 시골로 찾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는 도무지 찾아낼 길이 없습니다.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시골집으로 찾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는 문학으로 태어나지를 못합니다. 문학하는 이들은 이러한 삶을 겪지도 않고 치르지도 않으니 모를 테고, 이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문학을 하지 않으니 ‘수수한 여느 삶’이 문학으로 나오지 않겠지요.

 살아가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만큼, 살아가는 자리가 어떠한가에 따라 글이 달라지고, 아이를 바라보는 눈매가 달라지며, 아이하고 나눌 수 있는 이야기 깊이 또한 달라집니다. ‘설설’ 기는 이 한 마디 말놀이 때문에 ‘설’이라는 낱말을 이렇게밖에 다루지 못하는 일은 슬픕니다.


.. 이순신 장군이 / 활시위를 당기네 // →→→→→ / →→→→→ // 적들이 쓰러지네 / 우리나라를 지켰네 ..  (활)


 시에 문자표를 넣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문자표도 얼마든지 알뜰살뜰 넣을 만합니다. 아무래도 아이들한테 읽히는 위인전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이며, 왜놈이며, 나라사랑이며를 밝힐밖에 없는 제도권 학교 울타리인 터라, 〈활〉이라는 동시는 “우리나라를 지켰네” 같은 실마리 하나로 끝맺는구나 싶습니다.

 이 시가 잘못이라거나 어디가 틀린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 시는 그저 슬픕니다. 틀에 박힌 생각을 틀에 박힌 짜임새로 선보일 뿐인데, 이러한 시를 시라고, 더욱이 동시라 할 수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린이가 읽는 문학을 어른들께서는 너무 얕게 보거나 가볍게 보거나 섣불리 보지 않나 걱정스럽습니다. 어린이가 읽는 문학에 ‘이 문학을 빚는 어른들 삶과 넋과 꿈과 뜻과 빛과 얼과 살과 피와 뼈’가 고스란히 녹아들도록 애쓰는지 힘쓰는지 용쓰는지 근심스럽습니다.

 지난날 이오덕 님이 어린이시를 책으로 묶어 아름다운 문학임을 보여줄 때에도 익히 이야기하셨는데,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만 보는 문학이 아니라 어린이부터 모두 보는 문학입니다. 어린이부터 어른 누구나 즐기는 문학이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린이시라면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즐기는 시입니다. 어린이문학을 다루는 글(평론)은 어른문학을 다루는 글하고 똑같이 써야 하며, ‘문학인가 아닌가’와 ‘문학다운가 문학답지 않은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 사슴아 / 사슴아 // 뿔이 예쁜 / 꽃사슴아 // 왜 뿔이 없니? / 누가 잘라 갔니? ..  (뿔)


 이 나라 들판이나 멧자락에는 들사슴이 없습니다. 들여우도 들늑대도 없습니다. 시골에서 가끔 마주하는 사슴들은 사슴우리에서 풀린 녀석들입니다. 한창 사슴고기가 유행처럼 퍼지던 때에 기르다가, 사슴고기 유행이 지나면서 돈벌이가 안 되어 문닫은 우리에서 사슴들이 굶어죽기 싫어 뛰쳐나온 녀석들이 새끼를 치고 퍼지며 조금 돌아다닙니다. 노루도 매한가지입니다. 다, 사람들이 고기며 가죽이며 뿔이며, 이렁저렁 쓰려고 우리에 가두어 키우던 녀석입니다. 가만히 보면 들짐승이 들짐승다이 살아갈 터전이란 한국에는 모조리 사라졌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몸피가 작아 먹이가 조금 적어도 괜찮다 싶은 짐승만 살아남지만, 이마저도 들과 멧자락에서 먹이를 얻기 힘들어 사람 사는 마을로 내려와야 합니다.

 문학이란, 이 가운데 시란, 또 어린이시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다룰 때에도 얼마든지 문학이요 시요 어린이시가 되지만, 겉훑기로 그친다면 참말 문학인지 시인지 어린이시인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으면서, 눈에 안 보이는 마음과 생각을 살며시 실을 때에 비로소 문학이며 시이며 어린이시입니다. 사슴 머리에 난 뿔을 다루려는 〈뿔〉이라 한다면, 남자 어른들이 사타구니 힘을 기르겠다며 먹는다는 뿔만이 아니라, 사슴들 삶과 이 나라 자연 터전 삶을 함께 아우르면서 생각하여 짧은 글줄에 아름다이 담아내야 합니다. ‘자연보호를 하자. 휴지를 줍자.’ 같은 낡은 독재시대 계몽구호와 같은 글을 적어 놓고, 이러한 글이 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2) 동시 두 자락, 보듬을 얼굴


 동시책 《ㄹ받침 한 글자》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책에 실린 글을 우리 아이한테 읽힐 만한지 가만히 생각합니다. 굳이 이 책에 실린 글을 읽지 않아도 되겠다고 느끼지만, 꼭 세 가지 글은 찬찬히 읽어도 흐뭇하리라 생각합니다.

 어린이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은 모두 시라 할 만하고도 하는데, 어린이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이란 둘레 어른한테서 배운 말을 어린이 스스로 짜고 맞추며 엮은 말입니다. 티없이 바라보거나 생각하는 어린이 말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티있으며 모난 어른들 말을 아이들이 삭이거나 걸러서 길어올린 말이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이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이 모두 시라기보다, 어른 스스로 얼마나 티없으며 아리땁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어린이 말이 시가 되기도 하지만, 그저 군소리가 되기도 합니다. 곧, 어른들 스스로 어른 입에서 터져나오도록 하는 말이 모두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라서 시가 되고 어른이라서 시가 안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살아가는 결이 어떠한가에 따라 이이 말이 시가 되지만 엉터리가 되기도 합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나온 사람 입에서 터져나와야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대학교는커녕 중·고등학교 문턱을 못 밟은 사람 입에서 터져나와도, 이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문학이 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어야 어린이 삶을 잘 헤아리며 좋다 할 만한 시를 쓰지 않습니다. 학교하고는 담 쌓은 여느 아저씨일지라도, 이이 스스로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아름다우면서 해맑을 때에는 이이 입에서 터져나오는 온갖 말이 고스란히 시이자 문학이자 어린이시입니다.

 글을 몰라 종이에 글을 적바림하지 못하더라도, 살아낸 나날이 아리따운 사람들은 입으로 글을 쓰고 입으로 문학을 합니다.


.. 홀로 사는 옆집 할머니 / “홀몸이니 홀가분해.” 하시지만 /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집에 놀러 오셔요 // 홀로 사는 옆집 할머니 / “혼자 먹으니 입맛이 없어.” 하시면서 / 나물 반찬 들고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오셔요 ..  (홀)


 〈홀〉이라는 동시는 제법 눈여겨볼 만합니다. 홀로 사는 할머니 삶을 잘 짚습니다. 다만, 더 살가이 짚지는 못해 아쉽습니다. 이만큼 적바림한 동시로도 고맙습니다만, 이만큼 적바림하며 끝맺을 수는 없는 ‘홀’이 아닌가 싶습니다. 홀로 살아가는 나날을 ‘혼자 = 외롭다’로 못박아도 괜찮은지 궁금합니다. 할머니가 홀로 살아오기까지 걸어온 길과 홀로 살면서 부대낀 아픔과 홀로 살아내며 일구는 아름다움을 함께 드러낼 때에 비로소 〈홀〉이 마무리됩니다.


.. 나는 딸이야 / 엄마도 딸이었어 / 할머니도 딸이었어 // 나도 커서 / 딸 낳고 싶어 / 딸은 엄마가 되거든 ..  (딸)


 〈딸〉은 〈아들〉로 바꾸어도 똑같은 글과 글 얼개입니다. 세 딸을 보듬으며 세 여자 삶을 단출한 글월로 품었기에 퍽 좋구나 하고 느끼면서, 막상 ‘세 딸 세 여자’ 삶이란 무엇인지를 마지막 한 줄에서 다루지 못해 아쉽습니다. 초등학생쯤 되면 이제 아기말 ‘엄마’를 털고 ‘어머니’라 말해야 옳습니다만, 요새 사람들은 워낙 말을 말다이 못 쓰니 어쩔 수 없는 대목이고, 이보다 “딸은 엄마가 되거든”이라는 말마디에서는 미처 짚지 못하는 ‘어머니로 살아가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밝힐 한 마디를 넣으면 한결 빛날 동시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엄마는 잠결에도 / 아기 숨결 느끼고 // 아기는 꿈결에도 / 엄마 살결 느끼고 ..  (결)


 잠든 아기 숨결을 느끼는 사람은 어버이입니다. 아이를 낳았대서 모두 어버이가 되지는 않아요. 아이를 낳기 앞서부터 작은 목숨씨를 사랑으로 보듬으며 사랑으로 기다린 끝에 사랑으로 낳아 사랑으로 기르는 이들이 어버이입니다.

 어버이는 아이 숨결뿐 아니라 손결과 마음결과 이야기결을 나란히 한몸 한마음이 되어 받아들입니다. 어버이 말결이 아이 말결이 되는 줄 몸으로 알고, 어버이 삶결이 아이 삶결로 이어가는 줄 마음으로 깨닫습니다. 아이가 먹도록 마련하여 차린 밥자리는 영양소를 아이 몸에 집어넣는 자리가 아니라, 어버이 손결이 담긴 목숨결을 따사로이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동시집 《ㄹ받침 한 글자》를 하나하나 따지면, 썩 괜찮다 여길 만한 동시일지라도 아쉬운 대목이 참 많이 보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쉽다 할지라도 참으로 ‘수수한 여느 삶자리’를 톺아보면서 나누려는 매무새일 때에는 반갑습니다. 억지스런 말놀이가 아니라 살가운 삶나눔인 동시라는 옷을 입으면 고맙습니다.

 머리로 쓰는 시가 아니라 입으로 쓰는 시입니다. 머리로 읽는 시가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시입니다. 머리로 빚는 말놀이가 아닙니다. 삶으로 일구는 이야기입니다. (4344.2.1.불.ㅎㄲㅅㄱ)


― ㄹ받침 한 글자 (김은영 글,김수현 그림,사계절 펴냄,2008.8.5./78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먼지야, 자니? 산하작은아이들 39
이상교 지음 / 산하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85 ― 사랑 잃고 돈 심은 자리에 시라는 씨앗 하나를
 : 이상교 동시모음, 《먼지야, 자니?》


- 책이름 : 먼지야, 자니?
- 글ㆍ그림 : 이상교
- 펴낸곳 : 산하 (2006.5.12.)
- 책값 : 9500원



 (1) 어린이를 보는 어른 삶


 옆지기가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불러 줍니다. 또는 아기한테 젖을 물린 채 노래를 불러 줍니다. 또는 아기를 눕힌 채 가슴을 살살 토닥이면서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아기 얼굴에 잠이 가득한데 제대로 잠들지 못하면 저도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아기가 잠에서 깨어 놀고 싶다고 할 때에도 아기를 어르거나 놀리거나 안으면서 노래를 불러 줍니다.

 다른 아기 어머니도, 또 아기 아버지도 이렇게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요즈음 많은 아기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신들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기보다는 노래테이프를 돌리거나 노래시디를 돌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머니 목소리나 아버지 목소리보다는 텔레비전 소리를, 또 셈틀 소리를, 또 손전화 소리를, 또 숱한 기계소리와 차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랴 싶습니다.


 〈이사〉

 “이거 너 줄까?”
 개울가에서 주운 거라며
 짝이 돌멩이 한 개를 내게 주었다.

 새알처럼 매끈매끈한
 돌멩이 한 개
 내 손에
 들어왔다.

 짝 마음이
 내 마음속으로
 쏙, 이사 들어왔다.


 지난날 국민학교에 다닐 적에 동시를 읽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동시 외우기 숙제가 꼭 있었고, 국어 시간에는 무서운 선생님이 시외우기를 한 사람씩 꼬박꼬박 시키곤 했습니다. 시 하나를 막힘없이 낱말 하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면 지나가지만, 낱말이나 토씨 하나라도 틀렸다가는 안경 낀 그 선생님 오른손에 들린 굵직한 몽둥이가 어느새 우리 머리통까지 날아와서 딱! 소리를 내곤 했습니다.

 시를 싫어하지 않았고, 시 외우기가 그리 싫지는 않았지만, 빈틈없이 외워서 읊지 못하면 무시무시하게 내리치는 몽둥이 때문에 시를 가까이하고픈 마음은 그다지 들지 않았습니다. 숙제로, 또 백일장 과제로 시를 깔짝깔짝 대기는 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나 꿈을 글 하나에 살뜰히 담아내는 일은 해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몽둥이찜질을 받으며 동시를 외우던 날이 스물 몇 해가 훌쩍 지나간 옛날 일이 됩니다. 우리 아기를 생각하면서 동시모음 하나 쥐어 봅니다.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서 학교 갈 나이는 아직 멀었는데, 우리 아이도 학교에 다닐 무렵, 그 학교 교사는 우리 아이를 비롯해 숱한 아이들한테 시 외우기 숙제를 낼는지, 또 시 외우기를 못하는 아이한테 매질을 할는지, 시를 외우다가 토씨나 낱말 하나 틀리는 아이를 얼굴이 벌개지도록 나무라다고 손찌검을 할는지 궁금해집니다.


 〈책이 된 꽃〉

 꽃이 책이다.
 나비가 읽고 가는
 책.
 꽃내 스민 갈피 갈피를
 더듬이로 읽고 간다.

 꽃이 책이다.
 바람이 읽고 가는
 책.
 새로 돋은 침을 묻혀
 소슬랑소슬랑 넘겨 읽는다.

 꽃이 책이다.
 해님이 읽고 가는
 책.
 포시시 눈맞춤으로
 총총총 읽어 내린다.
 ……



 나이가 들어서 동시를 다시 읽고, 어린이시를 새로 읽습니다. 동시는 어른이 아이한테 베풀어 주는 선물이고, 어린이시는 어린이 스스로 즐기고자 쓰는 시이면서 어린이 동무한테 나누어 주는 선물인 한편, 우리 어른한테도 건네주는 선물입니다. 동시는 처음부터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쓰는 시이기에, 어른들이 동시를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은 어린이 그대로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동시를 쓰는 어른들 마음결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마다 담긴 맛과 멋을 느낄 수 있고, 어린이와 함게 기뻐할 수 있어요.

 마음을 맑게 해 주는 동시가 아니라, 마음 맑은 어린이가 앞으로도 마음 맑은 어른으로 크고, 언제까지나 마음 맑은 사람이 되어서, 어린이 스스로와 어린이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자연 목숨붙이와 삶터를 맑게 돌보아 주기를 바라는 비손이 담긴 동시입니다. 마음이 맑은 어린이가 쓰는 어린이시가 아니라, 어린이 눈높이에서 꾸밈없이 쓰는 어린이시요, 어린이 스스로 어린이 삶을 보여주는 어린이시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쓴 어린이시를 읽으면, 어린이 마음을 잃은 어른들이 미처 깨닫거나 헤아리지 못하는 잘잘못을 돌아볼 수 있는 가운데, 어린이가 무엇을 바라고 꿈꾸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또 무슨 사랑을 나누는지를 곱씹을 수 있습니다.


 〈먼지〉

 책장 앞턱에
 보얀 먼지.

 “먼지야, 자니?”

 손가락으로
 등을 콕 찔러도 잔다.
 찌른 자국이 났는데도
 잘도 잔다.



 아기는 저한테 장난을 치는 어른을 알아차립니다. 아기는 저한테 사랑을 쏟는 어른을 느낍니다. 아기는 저를 괴롭히는 어른을 알아봅니다. 아기는 저를 어루만져 주는 어른 손길을 압니다.

 아기는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을 할 줄 모르기에, 어설픈 어른들은 아기가 어른들 마음이나 뜻을 모르려니 잘못 짚곤 합니다. 그러나 말마디에 담기는 기운이 있고, 눈빛과 몸짓에 배인 낌새가 있습니다. 몸으로 살피는 아기이고, 마음으로 얘기 나누는 아기입니다. 참되게 기울여 주는 마음씀을 아는 아기이고, 사랑으로 다가와 주는 매무새를 느끼는 아기이며, 믿음으로 껴안으려는 손길을 붙잡는 아기입니다.

 우리들 어른은 정치를 하고 경제를 하고 문화를 하고 교육을 하고 과학을 하고 사회운동을 한다고들 하는데, 이런 여러 가지를 하는 동안 우리가 거쳐 왔던 어린 나날을 돌아보고, 지금 어린 나날을 보내는 아기를 둘러보며, 앞으로 태어나 자랄 아기를 톺아볼 수 있다면, 스스로 멈추어 고이는 일이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날을 못 보고 오늘날을 못 느끼며 앞날을 못 살피기에, 자꾸만 낡은 틀과 법과 테두리에 갇힌 채 얕은 셈속과 검은 돈과 먼지에 지나지 않는 끈만 부둥켜안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매듭〉

 엄마를 좇아
 바느질을 한다.
 구멍 난 양말을 꿰맨다.

 “매듭을 지어 놓아야
 실이 풀리지 않는단다.”
 ……


 옆지기 식구들이 살고 있는 일산으로 나들이를 가서 열흘 남짓 머물고 있습니다. 아기한테 이모가 되는 처제는 바깥으로 볼일을 보러 나가거나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면서도 일산집에 머물고 있는 귀여운 아기가 생각이 나서 일찍일찍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 또한 인천과 일산을 오가면서 일을 하느라 고달프지만, 아기 기저귀를 빨거나 안고 어르며 노래를 불러 주거나 함께 놀 때에는 시름이 가십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어른 된 우리들이 어린이 마음을 잃지 않는 매무새만이 아니라, 언제나 ‘내 아이든 이웃 아이이든 살붙이 아이이든’ 둘레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볼 줄 알고 사랑할 줄 알며 껴안을 줄 아는데다가 돕고 함께할 줄 아는 몸짓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세상에는 따스함과 넉넉함이 좀더 넓고 깊이 자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배고파 칭얼대는 아기를 보면서 배고파 울고 있는 이웃을 보게 되고, 졸려서 잠들려는 아기를 보면서 잠잘 곳이 없이 한데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웃을 보게 되며, 신나게 엄마젖을 빠는 아기를 보면서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고단한 비정규직과 장애인과 이주노동자와 농사꾼과 낮은자리 일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큰이모부〉

 큰이모부는 착하다.
 나를 혼내지도 않고
 일찍 자라고 하지도 않는다.

 옷을 벗길 때는
 코나 귀가 뒤집히지 않게
 조심조심 벗겨 준다.
 코를 풀게 할 때도
 휴지로 코 밑을 세게 닦지 않는다.
 ……



 오늘도 인천으로 일하러 돌아오면서, 전철간에서 버르장머리없는 사람을 수없이 부대낍니다. 수없이 부대끼며 생각에 잠깁니다. 전철간 한쪽 구석에 서서 사람들 물결에 휩쓸리거나 거슬리지 않고자 있어도, 어김없이 툭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책을 펼쳐 밑줄을 그어 가며 읽고 있는데 팔꿈치를 툭툭 치면서 미안하다 소리 한 마디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출근 때라 미어터지는 전철 하나를 보내고 뒷차를 기다리며 맨 앞자리에 서 있는데, 어느새 제 앞으로 끼어들어 먼저 올라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툭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그쪽을 쳐다보게 됩니다. 때때로 자기가 치고 지나간 사람 쪽을 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눈을 마주칩니다. 이때, 고개라도 살짝 숙여 준다면 어처구니없는 마음이 가볍게나마 가라앉을 테지만, 똥씹은 얼굴이라든지 그예 메말라 비틀어진 얼굴로 콧방귀 뀌듯 잽싸게 돌려버리는 고갯짓을 볼 때면, 마음이 잔뜩 무거워집니다.

 이 나라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아니된 지 오래되었고, ‘동방 예의지국’이란 웃기는 옛날이야기가 된 지도 오래되었지만, 낯모르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굴 수 있는 이 못나고 헐벗은 마음가짐과 몸가짐은 언제부터 이렇게 골고루 퍼져나갔을까 궁금합니다. ‘이웃사촌’ 사라진 지 까마득하다고 하지만, ‘이웃경쟁자’나 ‘이웃도둑’처럼 여기는 마음은 참으로 언제부터 우리 마음밭에 또아리를 틀고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강아지풀〉

 무릎에 올려
 안아 주고 싶다.
 강아지풀.
 ……



 돈만 버느라 마음이 돈다발처럼 차가워지고 말았는가요. 시 한 줄 읊을 줄 모르고, 아기한테 또 어린이한테 또 푸름이한테 또 젊은이한테 살가이 시 한 줄 읽고 나눌 줄 모르면서, 오로지 돈만 움켜쥐려고 하는 동안 가슴은 차갑게 식어 버리고 말았는가요.

 퀴즈대회에 나가서 ‘우리 말 달인’이나 ‘퀴즈 달인’은 될는지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눌 아름다움은 하나도 모르는 바보가 되고 말았는지요. 대학 졸업장 없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슬기와 가르침은 한줌도 챙기지 않는 얼간이가 되고 말았는지요.


 〈귀뚜라미〉

 밤길을 걸어 돌아오는데
 컴컴한 구석빼기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귀뚤귀뚤 귀뚜르르르

 귀뚜라미가 울자
 컴컴하던 그 구석빼기가 환해졌다.



 아기한테 동시 하나 읽어 주면서 제 마음속으로도 동시라는 씨앗 하나를 심습니다. 아기와 나란히 누운 옆지기한테 동시 하나 읊어 주면서 제 가슴속으로도 동시라는 새싹 하나를 보듬어 봅니다.


 (2) 동시모음 《먼지야, 자니?》


 1949년에 태어났으니 벌써 예순 나이가 된 이상교 님이 쓴 동시를 모은 《먼지야, 자니?》를 읽습니다. 동시모음치고는 좀 두툼하고 책값이 센데, 시는 어렵지 않게, 또 금세 읽어 내립니다. 말끔하게 읽히고 깔끔하게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시와 함께 그림을 엮어 놓고 있어서, 시를 읽는 동안 말마디를 입에서 굴리고, 그림조각을 눈으로 담습니다.


 〈산새〉

 산새는
 노랫소리가 곱다.

 산에서 나는
 동그랗고
 예쁜 산열매를 따 먹고 살아
 노래가 동글동글 곱다.

 산새는
 날개 빛깔이 곱다.

 산에서 나는
 가지가지 빛깔
 산열매를 따 먹고 살아
 날개가 알록달록 곱다.



 드문드문 군더더기가 있네 하는 대목이 보입니다. 한 줄 또는 석 줄쯤 슬쩍 덜어내면 한결 매끄러우면서 깊이가 더해질 텐데 싶은 대목이 보입니다. 오늘날 아이들로서는 도무지 겪어 볼 수 없는 이야기를 쓴 대목이 보입니다.

 냇물이 말라 버린 대한민국이지만, 냇물이 남아나게 하지 않는 이 나라요, 그나마 냇물이 남아서 흐르는 곳에서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 주워 와 책상맡에 놓거나 동무한테 선물을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겠습니까. 무시무시한 물길이 서울부터 부산까지, 또 서울에서 인천으로 난다고 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품을 쓴다는데, 무슨 동시가 있고 어린이시가 있으며 어른시가 있을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산에는 산새가 아닌 부동산투기만 있고, 그나마 남은 산에는 케이블카를 놓느니 구멍을 뚫어서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를 내느니 하고 시끌벅적한 이 나라입니다. 그나마 도시에서 참새나 비둘기를 구경하기도 수월하지 않을 뿐더러, 참새와 비둘기는 새로 여기지 않는 우리들이 되었는데, 그러면 ‘새’란 어떤 짐승을 가리키고, 새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는 좀처럼 생각해 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부모님 자가용으로 학교에 갔다가, 노란 학원차를 타고 학원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오늘날 아이들인데,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도 이와 똑같은 굴레를 뒤집어써야 할는지, 앞으로는 달라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두 다리로 걸어서 학교에 가거나 자전거를 몰고 학교에 가거나 버스를 잡아타고 학교에 갈 아이들이 늘어날 수 있을는지 또한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들하고 골목길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도 골목길은 차츰차츰 사라질 뿐더러, 골목길이 고즈넉하게 남아 있는 우리 동네에서조차 아이들은 걷지를 않고 차를 탈 뿐입니다. 골목꽃과 골목빨래와 골목집과 골목사람 자취를 나누고 싶어도 학원에 매이고 시험교재와 학습지에 매이게 되는 아이들이니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섬돌 밑에 줄기를 밀어낸 길풀을 들여다보자고 할 수 없습니다.


 〈봄눈〉

 보풀보풀 눈송이 속에
 풀씨.

 보풀보풀 눈송이 속에
 풀꽃씨.

 흙에 발이 닿자마자
 풀씨, 풀꽃씨 내려놓고
 보풀보풀 봄눈 숨지고 만다.

 숨진 자리마다
 풀은 돋아 자라고
 눈송이만 한 풀꽃을 매단다.



 눈이 오면 눈사람을 굴리거나 눈싸움을 하거나 눈놀이를 즐기는 우리들이 아니라, 찻길에서 차가 못 다닐까 근심스러워 염화칼슘 뿌려대는 어른이 되고 만 우리들입니다. 고작 차유리에 내려앉은 얇은 눈더미를 긁어서 대충 뭉쳐서 던지고 끝납니다.

 사랑을 잃은 어른이라 사랑을 못 얻는 아이들이 되어 가는구나 싶습니다. 사랑 잃거나 버린 자리에 돈을 끼워넣었으니, 돈은 넘치고 쎄서 모자람 없이 장난감을 사고 엠피쓰리를 들으며 알록달록 새옷을 차려입는 아이들이 되어 가는구나 싶습니다.

 동시가 박제가 되고, 어린이시가 논술지옥이 되는 때입니다. 《먼지야, 자니?》라는 동시모음을 가슴에 안고 조용히 쓰다듬습니다. (4341.12.26.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문학의전당 시인선 32
김정희 지음 / 문학의전당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하나 83 ― 시로 가고, 사람으로 가다, 사랑으로 가는 길
 : 김정희 시,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 책이름 :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 시 : 김정희
- 펴낸곳 : 문학의전당 (2007.4.30.)
- 책값 : 7000원



 (1) 시로 가는 길


 시인 한 사람 알고 지내면서 틈틈이 만나게 되면, 만날 때마다 시집 한 권 읽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시인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시인한테 몇 마디 듣고 이야기를 들어도, 또 물끄러미 시인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시집 한 권 읽는다고 느낍니다.

 그냥저냥 책만 읽고 살다가, 이냥저냥 책쟁이들만 만나고 살다가, 뜻하지 않게 시인과 어우러지는 자리에 끼게 되면,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말없이 찻잔이나 술잔을 들거나 말없이 사진기만 만지작거리게 됩니다.


 오랜만에 친구 만나 거나해진 아버지
 자전거 뒤꽁무니에 나를 앉히며 말했다
 기왕에 가는 거
 저놈에 달도 태우고 가자꾸나

 아버지 등과
 내 배 사이에
 대소쿠리만 한 달이 끼어 앉았다
 셋이서
 창영동 고갯마루 길을
 달려 올랐다  (보름달 속으로 난 길)



 지난 7월 26일, 동네 헌책방 아주머니가 손수 나무질을 하여 마련해 놓은 조촐한 ‘시 다락방’에서 시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제 목소리를 제 빠르기에 맞추어 읽어 나가는 자리였는데, 이런 시읽기를 마친 뒤에 퍽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막걸리집으로 옮겨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멀거니 떨어져서 사진만 찍었고, 어느 만큼 거리를 지키면서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시인은 여느 사람하고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이었고, 시인을 둘러싼 사람도 시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은 시를 쓰고, 다른 사람은 시를 즐길 뿐이었지요.


 고양이 한 마리
 사차선 도로를 횡단 중이다
 화적 떼처럼 달겨드는 불빛파도를 헤치며
 이리저리 발을 놓는
 아찔한 곡예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은 좀체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놈은 흰 차선을 보루 삼아 가까스로 生을 지켜내고 있다
 이승과 저승이 한 線 위에서 흔들린다
 놈은
 목숨줄을 당겨 잡고 힘껏 뛴다 그러나
 어느 자동차 속도의 칼날에 가차 없이 끊어져버리는
 줄.

 순식간에 바닥이 되어버린 놈을
 上弦이 내려다본다
 끝내
 이르지 못한 길의
 광고탑에 내 걸린 교통상해보험 현수막이
 한 옥타브 높게 울어댄다
 초저녁이다  (닿지 못한 길)



 오늘 저녁,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당신 손주 돌잔치를 하는데, 저보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해 옵니다. 그러마 하고, 얼마든지 찍어 드립지요, 하는데, 같이 잔치자리에 가자면서, ‘우리 아저씨 오늘은 (택시) 운전 안 하고 술 드신다고 했는데, 술 드시지 말고 운전하라고 해야겠다’고 하시기에, ‘오늘 같은 날은 (택시기사인 분도 다른 사람이 모는) 택시 타고 가야지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일삯을 안 받고 찍어 주는 돌잔치 사진이요 혼례잔치 사진이며 시읽는잔치 사진입니다. 벌써 석 달이 훌쩍 지나간 7월 끝무렵 시인 한 사람을 만나 찍던 사진도, 그저 부탁을 받으면서 찍는, 그러나 부탁만으로는 찍지 않고 나 스스로 그 시인을 마음에 담고 또 사진으로도 담고 싶어서 찍는 사진이었기에 늘 마음이 벅찹니다. 부풀어오릅니다.

 시인은 시를 쓰고, 읽는이는 시를 소리내어 읊고, 사진쟁이는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사진기 단추 소리와 시 읊는 소리가 하나로 엮이고, 시인이 또박또박 적어내려간 글줄이 사진 한 장 두 장 올올이 새겨집니다.


 반세기 동안이나 吳氏네 식구들을 품어온 집이
 포클레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기왓장들 밑에 엎드려 있던 침묵과
 거기 기대어 허공 바라기 하던 담쟁이덩굴
 담벼락의 소변금지와
 밤 청춘들의 입맞춤을 눈감아주던 능소화가
 일순 세상 바깥으로 쓸려나간다

 길은 희미하다
 먼지로 돌아가는 것들의 비명이
 마을을 흔들어댄다
 ……  (다녀가다)



 시란 무엇일까, 사진이란 무엇일까, 글이란 무엇일까, 예술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문화란 무엇일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가운데, 시읽는잔치 사진은 이백 장 가까이 찍게 되고, 저녁나절 시디 한 장에 구워서 이튿날 우편으로 시인한테 부칩니다. 시인은 사진을 찍어 주기만 해도 고마웠다며 당신이 손으로 이름을 적은 시집을 한 권 내어줍니다. 그러나 저는 벌써 제 주머니에서 돈 칠천 원을 꺼내어 당신 시집을 사서 미리 읽었는데.

 손때 타며 읽은 시집은 한쪽에 꽂고, 손때 안 탄 말끔한 시집은 옆에 나란히 놓습니다.





 (2) 사람으로 가는 길


 제 일터인 도서관에 오늘 찾아온 손님은 둘. 한 분은 “도서관 맞지요? 그런데 여기가 책을 파는 곳입니까, 보러 오는 곳입니까?” 하고 묻기에, “네, 여기는 책을 보는 곳입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니, “네, 잘 알겠습니다.” 하고는 고개숙여 인사하고는 돌아갑니다. 처음 들어서면서 “도서관 맞지요?” 하고 물었으면서, 왜 “책을 파는 곳입니까?” 하고 물었는지 궁금하지만, 그분한테는 당신 주머니를 털어서 책을 사는 일만 즐겁고, 걸상에 앉아서 가만히 책을 읽고 돌아가는 일은 즐겁지 않으신 듯합니다.

 마음에 담는 책이기에 내 물건으로 삼지 못한다고 해도, 찬찬히 책장을 넘겨 읽는 동안 가슴이 꽉 차 오른다고 느끼고 있는데, 이런 생각은 제 섣부르면서 짧은 생각이었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이윽고 다른 손님 한 분 찾아옵니다. 조용히 책을 둘러보고, 이곳저곳 쌓여 있기도 한 책을 살며시 집어서 웃음 띤 얼굴로 펼쳐봅니다. 저는 책상 앞에 앉아서 제 일을 하다가, 매실을 탄 찬물과 찐고구마 하나를 내어드립니다. 손님은 발소리를 죽인 걸음으로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한 권씩 끄집어내어 읽은 다음 제자리에 꽂아 놓습니다.

 책을 그 모습 그대로 즐겨 주는 모습이 고마워, 그동안 찍어 놓았던 골목길 사진 묶음을 슬쩍 건네며, “마음에 드시는 사진 있으시면 한 장 가지셔도 돼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도서관 빨랫줄에 줄줄이 걸어 두어도 괜찮지만, 반가운 손님한테 한 장씩 나누어 주어도 좋습니다. 따지고 보면, 도서관 책들을 바깥으로 빌려 주지는 않아도, 애타게 찾거나 바라는 분이 있으면,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그 책을 찾아내어 선물해 드리기도 합니다. 때때로.


 三伏고개 무사히 넘긴
 똥개 한 마리
 오토바이 뒤꽁무니에 실려 십정동을 떠난다
 누렁이는
   미안허다 미안허다아
 중얼대며 손 흔드는 노파의 가슴에다
 눈빛을 박은 채
 철창바닥에 엎드려 간다
 매일 핥던 밥그릇과 잔등에 머물던 주인의 손길
 누비고 다니던 골목의 냄새와
 사나운 기억들을 끌고
 아구탕 집 아리랑모텔을 지나
 중국식품점 모퉁이를 돌아
 간다
 ……  (십정동―이별)



 골목길을 찍은 사진은 골목길에서 골목사람으로 살아가는 제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발자국입니다. 내 모습, 여기에 이웃 모습, 그리고 우리 모습을 꾸밈없이 담아 보고자 합니다. 잘나지 않았으나 못나지도 않은 모습입니다. 남다르지 않으며 저마다 제 깜냥과 그릇에 따라서 채워 가는 모습입니다. 어여쁘거나 아름답다고 추켜세우지 않는 모습이나 꾀죄죄하거나 지저분한 모습도 아닙니다. 낡은 옷을 입었어도 옷이요, 오래된 신을 신었어도 신이며, 나이먹은 사람도 사람입니다. 나이가 먹었으니 빨리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니며, 오래된 책이라 해서 케케묵은 책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책은 책입니다. 사진 또한 예술 사진도 다큐 사진도 아닌 그저 사진입니다. 사람을 찍어도 사진, 자연을 찍어도 사진입니다.


 해가 서쪽 하늘에 누운 한여름날
 볼일 보고 돌아오는 골목길에
 거친 숨소리 흩어진다
 고개 돌려보니
 한 사내
 홀로
 황홀해하고 있는 중이다 한창
 부끄럼도 없이
 노을보다
 붉은 얼굴로  (십정동―바바리맨)


 처음 사진을 찍던 때부터, 제 사진은 이웃들한테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라는 사람마다 한 장씩, 또는 여러 장씩 찾아 주었습니다. 그러느라 필름값보다 더 많은 돈을 쓰면서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제 사진기에 찍히는 사람들은 자기한테 돌아오는 열매(사진)를 보면서, 하루이틀 지나는 동안 제가 사진기를 들고 앞에서 깝죽거려도 스스럼없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더군요.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렇습니다. 시인을 둘러싼 사람들이 시인하고 꼭 같은 매무새로 어우러지는 모습은, 시인이 제 삶과 살을 바쳐서 이루어 낸 열매인 시를 스스럼없이 누구한테나 나누어 주었기에, 시 하나 받아먹은 이웃사람들도 꼭 같은 시마음이 되는 한편, 당신 스스로도 시인한테 시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는 곁지기가 되지 않느냐 싶어요.


 한길에서
 차에 치어죽은 쥐를 보았다
 죽음이란 저리도 납작한 것이던가

 광고지가 차 바람에 날려가
 놈의 허리께를 덮었다
 놈은 그 순간
 “싼 이자로 돈 빌려드립니다”가 되었다  (변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함께 쓰고 즐기는 시입니다. 함께 찍고 나누는 사진입니다. 그림그리기도, 글쓰기도, 다른 모든 문화와 예술도 서로 어깨동무를 겯으며 합니다. 망치를 들건 호미를 들건 우리들은 서로서로 도란도란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땀꽃을 맺습니다.

 이야기꽃은 서로서로 마음으로 파고들며 일하는 고단함을 잊도록 합니다. 땀꽃은 땅으로 스며들며 우리한테 고마운 밥거리를 선물해 줍니다.





 (3) 사랑으로 가는 길


 시집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를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나서 석 달에 걸쳐 되읽고 새로 읽습니다. 금세 읽을 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시였고, 두고두고 또 읽을 만큼 가슴을 적시는 시입니다.

 시란 이렇구나, 이래서 시를 쓰네, 이러니 시집을 사서 품에 안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는 꿈을 꿀 테지, 하는 생각이 몽글몽글 이어집니다. 그러나 시집 끝자락에 붙은 어느 문학평론가 풀이말은 영 와닿지 않습니다. 시면 시지, 시를 도마에 올려놓은 물고기로 아나 싶은 생각이 그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문학을 배우거나 가르칠 때에 모두 이렇게 배우거나 가르치니까 다들 시를 재미없어 하겠다는 생각이 잇따릅니다. 시를 시 그대로 껴안도록 하지 못하고 울타리를 쌓으려고 하니 시를 쓰는 사람 스스로도 사람들하고 금을 긋고서 고개가 빳빳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시를 시 모습으로 받아먹으면서 자기 몸을 시하고 맞추지 못하는 글로 시를 말하니, 시를 말하는 사람 스스로 참살길을 헤아리는 슬기가 아닌 밥벌이 노릇 하는 평단과 강단에만 서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는
 365일 전경들의 경호를 받는다
 총부리 치켜들고 인천 항구를 밟은 뒤
 반세기가 넘도록
 제가 건너 온 바다만 바라보고 서있는 異國사내
 그의 발밑은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지뢰밭이다
 충돌한다 충돌한다
 빨강과 파랑이, 꽃과 돌멩이가,
 그 틈에서
 조선의 아들들 고추바람 뚫고 밥을 먹는다
 거대한 제국의 채찍을 막느라
 더글라스 맥아더 저
 구리인간의 옆구리를 지키며
 엄동설한 한데 밥을 먹는다

 어디서 보았는가
 들었는가
 이런 광경을
 참으로 기이해서
 눈물이 다 나는  (작은 전설―자유공원의)



 히유, 한숨 짧게 내뱉고 옥상마당으로 올라가 기저귀 빨래를 걷습니다. 오늘은 옆지기가 2/3쯤을 빨고 저는 1/3만 빨았습니다. 그러나 빨고 나면 새 빨래가 나오고, 다 마른 빨래를 걷어 개면 앞서 빨아 널은 빨래가 마릅니다. 하루 내 기저귀 스무 장 남짓이 돌고 돌아 아기 사타구니에 대여지고 대야에 담가지고 두 손에 빨려지고 햇볕에 말려지고 다시 두 손에 개어집니다.

 햇살을 받으며 빨래를 다 걷고 나서 잠깐 뒤로 돌아서 지붕 낮은 골목집 동네를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고작 4층 옥상집이지만, 동네를 훤하게 내려다보게 됩니다. 4층만 해도 대단히 높은 층입니다. 2층만 되어도 이웃집을 건너다볼 수 있으니까요.

 나도 시를 쓸까, 내가 시를 쓰면 어떤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 내가 쓰는 시는 누구한테 즐겁게 읽힐 삶자락으로 다가갈까.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에 앞서, 내가 찍는 사진 하나가 바로 시요, 내가 좋아하면서 손에 살며시 집어드는 책 하나가 시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게 됩니다.


 ……
 편지를 읽는 사이
 마음에 켜진 등불로 한껏 밝아진 나는
 종일 어두워지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별들을 헤치고
 내 안으로 든 기린이
 나를
 詩의 門으로 데리고 들어가
 목을 축여주었다
 오랜만에 단잠 이뤘다  (나뭇잎 편지)



 옆지기는 옛동무한테 손으로 편지를 한 장 써서 우체국에 가서 부치고 옵니다. 저도 며칠 사이로 우리 아버지한테 편지를 한 장 써서 부쳐야겠습니다. 곧 아기 돌도 다가오니, 돌잔치를 할 때 놀러오시라고 편지를 띄워야겠습니다. 우리 아기 돌잔치에는 뷔페니 뭐니 하나도 안 하고, 동네 헌책방골목 ‘시 다락방’에서 우리 아기와 우리 두 가시버시가 이 땅에서 씩씩하고 꿋꿋하고 튼튼하고 싱그럽게 살아갈 힘을 내도록 이끌어 주는 시를 열 꼭지건 스무 꼭지건 골라서 나누어 읽는 자리로 마련하려 하니, 아버지도 시 하나 읽어 주어 우리를 축복해 주십사 하고 편지를 띄워야겠습니다. (4341.10.17.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리한 장마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이노리티 시선 19
정은호 지음 / 갈무리 / 200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해 만에 다시 읽고, 다시 쓰는 소개글입니다 ^^;;;; 예전 글은 너무 부끄러워서~~)


- 책이름 : 지리한 장마,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 글 : 정은호
- 펴낸곳 : 갈무리(2003.10.30.)
- 책값 : 6000원



 ― 우리 삶을 옥죄는 비바람은 무엇일까
 [말을 붙잡는 시 5] 《지리한 장마,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1〉 어떤 끝을 볼 수 있을까


 엊저녁, 잠깐 밤마실을 나옵니다. 언제 사 두었는지 알 길이 없는 김빠진 맥주 하나가 냉장고에 있더군요. 날이 차츰 쌀쌀해지고 있기 때문에, 머잖아 냉장고 돼지코를 뽑을 생각입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어쩔 수 없이 냉장고를 돌렸지만, 추운 겨울에는 냉장고를 쓰지 않아도 먹을거리가 다치지 않아요. 마음 같아서는 여름에도 냉장고를 끄고 싶으나,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더군요.

 아무튼, 냉장고에 들어 있던 맥주를 치워내야 하기에, 안주거리 될 만한 과자부스러기라도 살 생각으로 동네 구멍가게로 찾아갑니다. 여덟 시만 되어도 가게문은 거의 다 내리고 조용해지는 배다리 골목길을 걸으면서.


 오랜만에 쉬는 날
 저녁시장에 갔던
 아내가 내온 방울토마토
 웬 방울토마토?
 퉁명한 내 말에
 요즘 시장에서 제일 싼 게
 방울토마토라 한다
 …  〈방울토마토〉



  사람도 뜸하고 차도 뜸한 길을 설렁설렁 걸어갑니다. 얼마 앞서 다시 연 ‘24시간 불가마 찜질방’을 왼쪽으로 끼고 걷습니다. 저 찜질방은 이 동네에서 얼마나 장사가 되려나. 예전에 장사가 안 되어서 문을 닫았을 텐데.

 사람들 살림집을 밀어내고 산업도로를 닦는다며 파헤쳐 놓은 길 옆을 지납니다. 그나마 마을 분들이 힘을 모아서 이 공사를 멈추게 했지만, 개발업자는 언제 다시 삽날을 들이밀지 모릅니다.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서 살아가는 동네 한복판에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라니……. 참으로 터무니없는 소리요, 어처구니없는 막공사입니다. 동네사람들도 참 어리석었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개발업자와 인천시 담당공무원 들은 ‘여느 길 하나 닦는다’는 거짓말로 동네사람들을 속였더군요. 아무렴. 컨테이너차나 덤프가 씽씽 내달리는 산업도로를 닦는다고 처음부터 말했으면 어느 누가 도장을 찍어 주었을까요.


 양손에 수갑차고
 끌려가지 않아도
 감방에 갇혀 있지 않아도
 우리들 생존의 벌판
 깊숙이 파고든 손길

 노동자 관리리스트
 A, B, C 등급
  A : 특별 관리대상
  B : 잡무 우선배치
  C : 특근 잔업 전혀 없음
 … 〈구속 2〉



 할배와 할매가 번갈아 지키는 구멍가게로 들어갑니다. “안녕하셔요” 하고 고개숙여 꾸벅 인사를 합니다. “어!” 하고 인사를 받는 할배는 가게 불을 켭니다. 손님이 들어올 때에만 가게 안쪽 불을 켭니다. 할배는 텔레비전 역사연속극을 보고 있습니다.

 과자부스러기 몇 점을 집다가, 막걸리도 한 병 집습니다. 늘 마시던 소성막걸리는 다 떨어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누룽지막걸리를 집습니다.

 우리가 고른 물건이 셈대 위에 놓이니, 할배는 뒤쪽에서 주판을 꺼내어 톡톡톡 알을 놓습니다. 속으로, ‘아이고, 사진기 가지고 나올걸. 잠깐 나온다며 사진기를 괜히 놓고 왔구나’ 하고 생각할 즈음, 할배가 한 마디 건넵니다. “옥상에 있는 꽃 사진으로 찍지 않을래?”


 일요일 한 번 쉬어 보는
 절실한 노동자들
 다 버려 두고

 통념도 상식도 다 무시하고

 공공부문
 몇 천 명 사업장
 먼저 쉬어야 하는가

 공익 위해서라도
 공공부문 사업장보다
 선방공 용접공 쉬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노동강도를 따져 보아도
 근무조건 열악한
 작은 공장 노동자들
 먼저 쉬어야 하는 것이 순리다

 몇 천 명 쉬는 것보다
 몇 명 쉬는 게 더 쉬울 것이다  〈주 5일 근무 2〉



 할배는, 셈을 마친 뒤 가게문을 잠깐 내리고 우리를 이끌며 가게 옥상이 올려다보이는 골목 안쪽으로 갑니다. “저기 하얀 꽃 보이지? 희귀한 꽃이라는데 참 예쁘게 잘 피었어.” “그러네요. 지금은 어두워서 찍을 수 없고, 내일 아침이나 낮에 다시 올게요.” “그래, 아침에는 내가 없을지 모르지만, (할머니한테) 얘기하고 사진으로 찍어.”

 가지고 온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길에 생각합니다. ‘할배네 옥상에 온갖 꽃이 가득하던데. 석류도 있고. 그 꽃들을 혼자서만 즐기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셨을까. 보기 좋은 꽃이라면 이웃들한테도 내보이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으셨을까. 골목길 바깥쪽에 크고작은 꽃그릇을 내놓고 키우는 모든 살림집 어르신들 마음도 이와 같을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도화동 어느 집 감나무를 구경하면서 나무가 참 좋다고 말하니 그곳 집임자가 웃으면서 좋아했는데.’


 …
 담배 한 갑에도
 소주 한 잔에도
 온갖 세금들이 다 떨어지고
 의무만 존재할 뿐
 …  〈이민을 꿈꾸는 것은〉



 집에 닿아 먹자판을 벌여 놓고 창밖을 잠깐 내다봅니다. 영화를 찍는다는 대학교 아이들이 헌책방거리에 찾아와서 어제부터 무언가를 찍고 있습니다. 어제는 이른저녁부터 동틀녘까지 퍽 시끄러워서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내 주려나? 동네길에서 밤늦게까지 영화를 찍는다고 부산을 떠니, 그 소리가 집안까지 들려옵니다. 그나저나 저 젊은 아이들이 찍는 영화는 무엇을 주제로 삼고 있을까. 무슨 줄거리를 찍기에, 꼭 헌책방에 와서 찍어야만 했을까. 저 젊은 아이들한테 헌책방이란 어떤 곳일까. 저 젊은 아이들은 영화를 찍기 앞서, 그리고 영화를 찍은 다음에, 이 헌책방거리에 찾아와서 자기 마음밭을 일굴 책을 차분히 즐길 수 있을까.


 아이들 학원비며
 집장만하며 낸 대출금이자
 각종 공과금
 들어갈 건 많고
 손에 묻은 밥풀 같은 월급 쪼개어도
 생활비는 늘 모자란다
 …  〈금 닷돈〉



 남쪽 바다에는 태풍이 찾아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사는 동네에도 거센 바람이 씽씽 붑니다. 아직 비바람으로 몰아치지는 않습니다. 낮에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더니, 매지구름도 보이고 먹구름도 드문드문 보이던데. 문득, 볕드는 날이 줄고 비가 잦은 올해 날씨는, 하늘에 짙게 드리운 먼지띠를 많이 씻어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먼지띠는 고스란히 바다로, 땅속 깊이 스며들었을 테지요. 덕분에 올해는 지난해와는 달리 햇볕 맑게 내리쬐는 날, 가끔이나마 눈이 살짝 부실 만큼 빛살이 좋고 하늘이 파랗기도 했어요.


 정규직은
 아예 모집하지 않는다

 정규직을 모집한다 해도
 젊은 사람 오지 않는 공장

 비정규직 라인에 붙이건만
 점심시간 되기도 전
 말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외국인 노동자들만
 남아서 일하고 있는 공장  〈3D 공장〉



 막걸리를 마시다가 다 마시지 못하고 1/3쯤 남깁니다. 늘 마시던 막걸리가 아니라서 그런지 속에서 잘 안 받습니다. 마개를 꾹 닫고 자리를 치웁니다. 셈틀을 잠깐 켜고 버마사람들 소식을 살핍니다. 이제서야 이 나라 적지 않은 사람들도 ‘미얀마’가 아닌 ‘버마’임을 조금씩 느끼고 있으며, ‘이주노동자’로 이 땅을 찾아온 사람이 아니라, 고향나라에서 민주주의 되찾는 싸움을 하다가 쫓겨나고 내팽개쳐진 ‘망명가’임을 차츰 깨닫고 있을까요. 글쎄, 글쎄. 글쎄, 모르겠습니다.


 …
 축배를 들며
 아이엠에프를 극복했다
 야단이면 무엇 하나

 늘 우리는
 하루 해가 길기만 하다  〈땜방〉



 어제는 도원역 건너편에 있는 닭집에 들렀습니다. 닭집에 앉아서 옆지기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 닭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을 뽑아야 하는데, 아직 못 뽑아서 이렇게 힘들어요.” 하고 말하는 두 분. 아주머니는 쉴 틈 없이 닭을 굽고, 아저씨는 숨돌릴 겨를이 없이 배달을 나가고.

 사람들이 집에 앉아 전화기 단추만 꾹꾹 눌러서 시켜먹기만 하는구나 싶은 한편으로, 이런 밥집이나 술집 일거리조차 안 찾는구나 싶은 생각.

 낮에는 헌책방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머리에 지식만 쌓아 놓고 있는 사람들은 헌책방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무식한 사람들이나 헌책방 장사를 하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라고. 가슴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네들은 헌책방 장사를 할 수 없다고.”


 큰놈 작은놈 데리고
 집 앞 놀이터에 갔다가
 체육공원 잔디밭 간다

 아이들은 신이 났고
 나는 일요일도
 공장에 일하러 간 날들을 헤아려본다
 …  〈일요일 2〉



 저녁 열한 시 넘어까지 다니는 버스. 열두 시 넘어까지 오가는 전철. 버스 소리와 전철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눕습니다. 때때로 짐기차가 지나갈 때면 건물이 웅웅웅 소리를 내며 조금씩 흔들립니다. 우리가 깃든 이 집은 1958년에 지은 집. 어느덧 쉰 해 동안 온갖 소리를 받아들이고 온갖 흔들림에 익숙해졌군요. 앞으로 얼마나 더 긴 세월을 온갖 소리와 흔들림을 껴안으며 이 자리에서 꼿꼿이 제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요. 영화 찍는 젊은이들은 아직도 부산한가 봅니다. 오늘까지만 찍고 내일은 안 올까. 내일도 영화를 찍으러 올까.


 〈2〉 시집 하나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가
 갑자기, 직책이 뭐냐
 직장생활 십 년 넘도록 했으모
 무슨 직책이 있을 거 아니냐고 묻는다

 평생을 다녀도
 직책 같은 것 없이
 급수만 올라간다고 했건만

 직책이 없다는 말에
 마냥 섭섭해 하신다  〈직책〉



 시집 하나를 다 읽어냅니다. 네 해 앞서 한 번 읽고, 사이에 한 번 잠깐 들추었다가 책꽂이에 꽂아 두고는 잊었는데, 보름께 앞서부터 다시 생각이 나더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읽어냅니다.

 시집에 담긴 이야기는 그대로이고, 시집을 써낸 사람도 그대로일 테며, 시집에 나오는 사람들도 그대로일까요. 지난주에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까지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묵은 잡지, 1990년대 첫머리에 나온 어느 잡지를 보니, ‘미술경매 문제 있다’는 특집 꼭지가 있습니다. 특집 꼭지는 ‘1990년대 첫머리 그때뿐 아니라 열 해 앞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뒤로 열 몇 해가 흐른 요즈음은 어떠할까요.

 노동자 전태일 님이 죽은 1970년과, 노동자 배달호 님이 죽은 2003년은, 이 땅에서 노동자들한테 어떤 해였을까요.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정부단체 광고로 곳곳에 나부끼고 있는 2007년 오늘날, ‘경제에 도움이 되는 협정’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쓰는 정책’을 바라기는,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많이 쓰면서 살 수 있는 세상보다는 적게 벌어도 걱정없이 살 수 있고 푸대접을 안 받으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을 바라는 일이란 헛꿈이나 헛생각일까요.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도 일자리를 넉넉히 얻을 수 있는 한편 따돌림을 안 받을 수 있고, 몸과 마음이 고달픈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조금 더 일삯을 받을 수 있으며, 주5일 노동을 ‘5인 미만 사업장’에서 먼저 하면서 이 사업장 살림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경제 움직임이란 바랄 수 없는 일인지. 그치지 않는 먹구름뿐이고, 쉴 사이 없이 찾아드는 비바람뿐인지. (4340.10.8.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