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문학과지성 시인선 216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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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빚는 삶, 삶이 빚는 생각
[시를 노래하는 시 23]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책이름 :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글 : 황인숙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1998.6.12.)
- 책값 : 8000원

 


  생각이 빚는 삶이 먼저인지 삶이 빚는 생각이 먼저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어느 쪽이 먼저가 되든, 생각은 삶을 빚습니다. 삶 또한 생각을 빚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생각하는 결이 고스란히 삶으로 태어납니다. 사람들 스스로 살아가는 결이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슬기롭게 생각을 빛낼 때에 슬기롭구나 싶은 아름다운 삶이 펼쳐집니다. 슬기롭게 삶을 일굴 때에 슬기롭구나 싶은 생각이 샘솟습니다.


.. 어젯밤 잠들기 전 나는 대단한 생각을 해냈다. 그리고 깨자마자 그 대단한 생각을 또 해냈다 ..  (어쨌든 그것부터)


  저녁에 잠들면서 꿈을 꿉니다. 나로서는 이런 꿈은 꾸기를 바랄 수 있고, 나로서는 저런 꿈은 안 꾸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이든 저런 꿈이든 아무렇게나 찾아들 수 있고, 이런 꿈이나 저런 꿈을 나 스스로 갈무리하면서 내가 바라는 대로 찾아들도록 할 수 있어요.


  잠자리에서 아이들 새근새근 잘 자라며 자장노래를 부르며 생각합니다. 자장노래는 밉거나 궂거나 모진 마음으로 부를 수 없습니다. 자장노래를 들을 아이들은 고우며 따사로운 목소리일 때에 즐거이 받아들여 예쁘게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고 개구지게 뒹굴 적에도 아이들 어버이가 예쁜 목소리와 고운 눈빛으로 바라볼 때에 훨씬 신나게 뛰놀 뿐 아니라 한결 개구지게 뒹굴 만할 테지요.


  나는 늘 예쁜 손길로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비질을 할 노릇입니다. 나는 언제나 고운 눈빛으로 나무를 바라보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보금자리를 바라볼 노릇입니다. 예쁜 손길일 때에 예쁘게 쓰는 글입니다. 고운 눈빛일 때에 곱게 나누는 사랑입니다. 예쁜 손길로 밭을 일굽니다. 고운 눈빛으로 빨래를 개고 아이를 안습니다.


.. 여기, 변변히 걸어본 적 없는 자, / 고이 늙지 못한다 ..  (거울들)


  둘째 아이 똥바지를 빨래합니다. 2012년 6월 29일, 둘째 아이는 첫돌을 지난 지 한 달 남짓 되었습니다. 앞으로 둘째 아이가 스스로 똥오줌을 가릴 때까지 내 똥바지 빨래는 죽 이어집니다. 아이는 앞으로 무럭무럭 자랄 테고, 머잖아 똥이며 오줌을 가릴 테지요. 똥이며 오줌을 가릴 뿐 아니라 조잘조잘 수다쟁이가 될 무렵이면, 아이는 아이가 똥이나 오줌을 못 가리며 바지뿐 아니라 방바닥 곳곳에 똥을 바르고 오줌을 퍼뜨린 줄 떠올리지 못할는지 모릅니다. 나도 내가 우리 아이들만 하던 갓난쟁이 적에 똥오줌을 얼마나 퍼질러댔는지 잘 떠올리지 못하고, 내 어머니 손이 얼마나 많이 가야 했는지 되새기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는 내 똥바지나 오줌기저귀를 숱하게 갈았고, 꾸준히 밥을 먹였으며, 한결같이 포근한 자장노래로 잠을 재워 주었어요.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곱게 사랑하고 맑게 믿은 마음빛을 먹으며 오늘과 같이 자랐어요. 나는 내 나름대로 내 마음빛을 새롭게 가다듬어 우리 아이들을 돌봅니다. 우리 아이들은 나와 옆지기한테서 새로운 마음빛을 찬찬히 받아먹으면서 하루하루 자랄 테고, 이렇게 자라난 새로운 힘으로 저희 꿈을 펼치면서 새삼스럽게 저희 사랑을 새록새록 꽃피우겠지요.


  그런데 이 고운 마음빛이 맨 먼저 어디에서 비롯했는지는 모릅니다. 어느 어버이가 맨 먼저 고운 마음빛을 펼쳐 이 땅에 태어났는지는 모릅니다.


  어느 하느님이 빚었는지, 어느 땅님이 빚었는지, 어느 사랑님이 빚었는지, 어느 꿈님이 빚었는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누군가 내가 오늘 이곳에서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꿈꾸었습니다. 누군가 마음속으로 곱게 꿈꾸었기에 내가 오늘 이곳에서 태어나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나는 나대로 오늘 하루 새롭게 꿈 하나 곱게 꾸면서 우리 아이들을 보살피고,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저희 아이들을 차근차근 어루만지며 살아갈 수 있어요.


.. 오, 내 흉한 눈, 죽은 눈. / 생각도 감각도 없이 / 바라보는 것을 시들게 하는 ..  (좀 비)


  생각이 삶을 빚습니다. 좋은 생각이 좋은 삶을 빚습니다.


  생각은 삶을 빚어요. 궂은 생각은 궂은 삶을 빚어요.


  삶이 생각을 빚습니다. 좋게 일구는 삶이 좋게 빛나는 생각을 빚습니다.


  삶은 생각을 빚어요. 궂게 팽개치는 삶이 궂게 나동그라지는 생각을 빚어요.


..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 가지 끝에서 가지 끝으로 / 파르르 떨림이 퍼진다. // 혹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 매우 유창한 듯도 하고 / 몹시 더듬는 듯도 하다. / 오참, 내가 언제 / 잠시라도 나무들에게 / 귀기울인 적이나 있었다고 ..  (오월, 하고도 스무여드레)


  아이들 옷가지 빨래는 날마다 수북합니다. 하루 네 차례 빨래를 해야 비로소 숨통을 틉니다. 나는 내 손으로 옷가지를 복복 비비고 슥슥 헹구며 꾹꾹 짭니다. 내 손은 내 몸에 달려 내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데, 내 마음이 좋을 때에는 내 손은 좋게 움직이고, 내 마음이 무거울 때에는 내 손 또한 무겁게 움직입니다.


  이른아침과 늦은아침과 한낮과 늦은낮에 하는 빨래는 고운 햇살과 맑은 바람이 보송보송 말립니다. 어쩌다가 저녁에 다섯 차례째 빨래를 하고야 말면, 이 빨래는 방안 곳곳에 넙니다. 방안 곳곳에서 천천히 마르면서 집안에 메마르지 않게 도와줍니다. 방안 곳곳에 옷걸이에 꿰어 넌 빨래를 아침에 일어나 걷을라치면 뽀독뽀독 잘 말랐어요. 햇살과 바람 먹으며 마른 빨래처럼 상큼하지는 않지만, 느낌이 참 좋아요. 밤새 우리 식구들 살가이 어루만지며 말랐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요.


  그러고 보면, 빨래를 할 적마다 빨래한테 말을 겁니다.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좋아, 좋아, 좋아.


  이 옷가지를 들고 곱게 개어 옷장에 곱게 놓습니다. 이 옷가지를 꺼내어 아이한테 곱게 입힙니다. 때때로 미운 마음으로 옷을 개거나, 미운 마음으로 아이한테 옷을 입힐 때면, 내 미운 마음은 그만 아이한테 옮습니다. 아이한테 옮은 미운 마음은 다시 나한테 찾아듭니다. 아이가 미운 티끌을 털어내면서 온통 내 가슴속에 미운 가시가 박힙니다.


..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  (말의 힘)


  가는 말이 고울 때에 오는 말이 고울밖에 없습니다. 가는 말이 미울 적에 오는 말이 미울밖에 없습니다. 아, 너무나 마땅한 노릇이라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 하지, 미운 아이 꿀밤 한 대 먹인다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미움’이란 살살 달래고 토닥이면서 ‘사랑’이 되도록 할 마음결이지, 꾸짖거나 나무라거나 괴롭히거나 등돌리면서 못살게 굴어 ‘더 아픈 미움’이나 ‘더 슬픈 미움’이 되도록 할 마음무늬가 아니거든요.


  누구나 사랑을 먹고 싶지, 미움을 먹고 싶지 않아요. 누구나 꿈을 먹고 싶지, 가시를 먹고 싶지 않아요.


  내가 바라보기에 고운 아이이든 미운 아이이든, 나는 그저 ‘아이’라 느끼며 바라보면서 떡 하나 함께 나눌 때에 즐겁습니다. 내가 보기에 모든 ‘아이’들 예쁜 모습을 해맑게 맞아들이면서 나도 떡 한 점 먹고 너도 떡 한 점 먹으렴, 하면서 웃음을 나눌 때에 기쁩니다.


.. 누군가 불 붙여놓은 촛불 앞에서 / 재빨리 기도한 적이 있다. / 그 기도는 지극히 속된 것이었다. / 근사한 시를 쓰게 해달라는 것, / 약간의 돈이 생기게 해달라는 것, / 또, 나를, 용서해달라는 것 ..  (지극히 속된 기도)


  황인숙 님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1998)를 읽습니다. 황인숙 님은 어이하여 “내 슬프게 가라앉은 소담스럽게 고운 이”를 노래할까 궁금합니다. 그러나, 황인숙 님 넋이 이와 같으니 이와 같은 넋에 따라 삶을 누리겠지요. 이와 같은 삶에 따라 이와 같은 넋을 보듬겠지요.


  어느 한때는 슬프다가도 어느 한때는 기쁠 테지요. 어느 한때는 잔뜩 가라앉다가도 어느 한때는 한껏 부풀어오를 테지요. 어느 한때는 내 곁 아름다운 이를 노래하다가, 어느 한때는 내 둘레 가여운 이를 노래할 테지요.


  시를 쓰면서 삶을 짓습니다. 삶을 지으면서 시를 씁니다. 시를 쓰면서 넋을 짓습니다. 넋을 지으면서 시를 짓습니다. 나는 나한테 가장 빛나는 시를 생각하면서 삶을 짓습니다. 나는 나한테 가장 좋은 삶을 생각하면서 시를 짓습니다. (4345.6.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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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공장 - 임성용 시집 삶의 시선 24
임성용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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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지으며 삶을 사랑하기
[시를 노래하는 시 21] 임성용, 《하늘공장》

 


- 책이름 : 하늘공장
- 글 : 임성용
- 펴낸곳 : 삶이보이는창 (2007.7.10.)
- 책값 : 6000원

 


  두 아이가 새근새근 잠든 뒤에도 아버지는 잠들지 못합니다. 온몸이 찌뿌둥한데다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픈지 입을 열어 말 한 마디 꺼내기조차 벅찹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는 말자고 생각하며, 첫째 아이 곁에 누워 가슴을 토닥이면서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내어 나즈막하게 노래를 부릅니다.


  자장노래를 부르는 동안 뜻밖에 내 몸이 한결 나아진다고 느낍니다. 내 마음도 조금은 맑아진다고 느낍니다. 나는 몸이 힘들어 말조차 하기 힘들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말을 한 마디라도 톡톡 내뱉든, 또는 말을 두어 마디 서너 마치 차근차근 읊으면서 스스로 몸을 나아지게 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새근새근 자다가 쉬 마렵다며 일어난 첫째 아이 쉬를 누입니다. 다시 자리에 눕혀 이불을 여밉니다. 나는 맹맹한 코를 흐르는 물에 풀고 씻습니다. 머리는 아직도 어지럽습니다. 방바닥에 드러눕습니다. 잠이 언제 올는지 모르나, 아무튼 이불을 안 덮고 그냥 눕습니다.


  생각에 잠깁니다. 내 머리속에 어떤 생각이 있는가 돌아보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내 머리속에 좋은 생각이 있는지, 궂은 생각이 있는지, 어지럽게 얽힌 생각이 있는지 하나하나 짚습니다. 나 스스로 내 머리에 궂거나 어지럽게 얽히거나 힘든 생각을 가둘 때에 내 마음과 몸 모두 힘들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나 스스로 내 머리에 좋거나 밝거나 홀가분한 생각을 마음껏 춤추도록 할 때에 언제나 내 마음과 몸 모두 가뿐하면서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 그는 장화를 벗으려고 했다 / 비명소리보다 먼저 복숭아뼈가 신음을 토하고 / 으드득, 무릎뼈가 튀어올랐다 / 부러진 홍두깨처럼 아무런 감각도 없는 발을 / 어떻게든 장화에서 꺼내려고 / 그는 안간힘을 썼다 ..  (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이 되고 싶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옆지기한테 어떤 몸짓으로 말을 건네고 싶은지, 두 아이한테 어떤 낯빛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제도권학교 아닌 집에서 좋은 사랑과 꿈과 믿음을 누리도록 하자면, 어버이인 나부터 오늘 하루를 어떻게 돌아보고 이듬날 새 하루는 어떻게 맞이할 때에 즐거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빛내는 생각을 생각해야 한다고 거듭 생각합니다. 생각을 빛내지 못한다면 ‘생각’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좋은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고, 참으로 좋은 밥이 내 몸에 깃들도록 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곧, 밥과 말과 넋 모두 가장 좋을 때에 내 하루가 가장 좋습니다. 밥이며 말이며 넋을 모두 가장 좋도록 추스를 때에 내 삶을 가장 아름다이 돌볼 수 있구나 싶습니다.


  환하게 생각할 노릇입니다. 해맑게 생각할 노릇입니다. 아이들만 환하거나 해맑게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다. 어른들 누구나 환하거나 해맑게 생각할 수 있어요. 아이들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아요. 어른들 누구나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요. 아이들만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지 않아요. 어른들 누구라도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어요.


.. 영치금을 넣는 동안 / 접시꽃보다 키가 작은 딸은 /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꽃들에게 속삭였다 ..  (접견)


  등허리를 반듯하게 펴며 누운 자리에서 생각합니다. 꽃을 키워 본 사람은 누구라도 ‘날마다 꽃을 바라보며 아이 예쁘구나 하고 말하면 꽃이 더욱 예쁘게 핀다’는 일을 겪는다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이 아닌 참말입니다. 날마다 입으로, 마음으로, 생각으로, 몸으로 꽃 한 송이 환하고 해맑은 웃음빛으로 바라보며 인사를 건네고 따사로이 쓰다듬는 손길일 때에, 꽃은 더욱 환하고 해맑게 자랍니다.


  논에서도 밭에서도 이와 같아요. 예부터 소 앞에서 소를 나무라거나 깎아내리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했어요.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하는 듯 보이더라도, 모든 소를 똑같이 아끼고 사랑할 노릇이라고 했어요. 소가 ‘사람 말을 다 알아듣는다’고 했어요.


  논도 밭도 다 알아듣겠지요. 논을 일구는 흙일꾼이 사랑을 담아 땀을 흘리는지, 밭을 매만지는 흙일꾼이 믿음을 실어 땀을 들이는지, 논도 밭도 모두 알아보겠지요. 좋은 땀 흘린 사람한테 좋은 열매 돌려주고, 좋은 꿈 키우는 사람한테 좋은 씨앗 맺어서 내놓겠지요.


.. 저 펄럭이는 것들, 나뒹구는 것들, 피 흐르는 것들 / 하늘공장에서는 구름다리 위에 무지개로 필 것이다 ..  (하늘공장)


  어버이와 아이 사이라 한다면, 사람과 꽃 사이와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며 아낄 노릇이로구나 싶습니다. 나와 옆지기 사이에서도 꼭 같아요. 한결 사랑하며 아낄 노릇이에요. 먼저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을 나눌 노릇이에요. 입으로도 들려주는 사랑을 주고받을 노릇이에요. 손길로 눈길로 생각길로 나란히 사랑을 나눌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먹을 밥이란 좋은 사랑 담은 좋은 밥이어야 해요. 한솥밥 먹는 살붙이가 누릴 삶이란 좋은 사랑 꽃피우는 좋은 삶이어야 해요. 비가 새는 지붕이건, 조그마한 방 한 칸이건, 즐겁다고 느끼며 누릴 때에는 그야말로 즐겁다고 느껴요. 번쩍거리는 큰 집이건, 널따란 방 여러 칸이건, 갑갑하다고 느끼며 옥죄일 때에는 그야말로 갑갑하다고 느껴요.


  사랑을 살아가는 사람일 테니까요. 믿음을 살아가는 사람일 테니까요.


  아이들은 사랑을 받아먹어요. 어른들도 사랑을 받아먹어요.


  글을 쓰는 사람은 글 한 줄에 사랑을 실어요. 글을 읽는 사람은 글 한 줄에서 사랑을 읽어요. 모두들 스스로 가장 좋은 사랑을 살면서 가장 좋은 사랑을 눈길에든 손길에든 글길에든 어디에든 살포시 나누는구나 싶어요.


.. 오른손에 휘감은 붕대를 보고 / 아빠, 또 손 다쳤어? / 아홉 살 딸애가 걱정스레 묻는다 / 그래, 손가락이 부러진 것 같구나 / 흘려 대답한 말에, 왜 다쳤어? / 이번엔 눈을 크게 뜨고 다그친다 / 음, 누구하고 싸웠다 / 아이, 왜 싸워? 싸우면 안 돼! / 시무룩하게 엎드린 아이의 등을 / 아빠는 잔잔하게 두드려준다 ..  (그림일기)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논개구리가 노래합니다. 멧새가 노래합니다. 들판과 멧자락에서 베푸는 밤노래를 가만히 듣다가 생각합니다. 내가 이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이 시골마을에서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내 생각뿐이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나는 언제부터였는지, 이 세 가지 노래를 골고루 듣는 좋은 시골에서 사랑스럽게 살아가고 싶다는 꿈을 꾸면서 생각을 꽃피웠어요. 텔레비전도 자동차도 가게도 손전화도 아닌 숲속 벗님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내 삶과 옆지기 삶과 아이들 삶을 보살핀다면 참 좋으리라 생각했어요.


  스스로 즐겁게 생각할 때에는 참말 어느 때부터인가 아주 흐드러지면서 흐뭇하게 삶을 누리곤 합니다. 스스로 즐겁게 생각하지 못할 때에는 참말 언제라도 아주 고단하거나 갑갑한 삶이라고 느끼곤 해요.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하는 노래는 영 듣지 못합니다.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하는 글은 영 읽지 못합니다. 더없이 몹쓸 짓을 하는 아무개라 하더라도 이런 이들을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하는 이야기는 참으로 못 듣겠습니다. 그런데, 나도 예전에 이런 글, 이를테면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하는 글을 썼어요. 누군가를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을 일삼기도 했어요. 스스로 겪어 보며 하루하루 지나고 보면, 내가 꺼낸 내 슬픈 말은 누구보다 내 삶을 슬프게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깎아내리려 하면 ‘누군가라 하는 사람’이 아닌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내’가 깎이거나 내려갑니다.


  나는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면서, 내 옆지기가 스스로 이녁 삶을 사랑하도록 북돋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면서,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아이들 삶을 사랑하는 길을 찾도록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 나는 아내의 손을 가만 붙잡았다 / 손톱살이 갈라져 피멍울이 잡힌 손 / 나는 그날 처음으로 / 깎지 않아도 저절로 닳아 없어지는 아내의 손톱을 / 정성스레 깎아주었다 ..  (손톱깎기)


  삶을 아름다이 노래할 적에는,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부터 아름다운 꿈을 키웁니다. 삶을 아름다이 노래하는 사람 곁에서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천천히 아름다운 꿈을 생각합니다.


  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이나 환경운동이 덧없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이나 환경운동이 가장 빛날 때에는, 바로 어떤 목소리를 내기보다 스스로 살아낼 때예요. 내가 선 자리에서 살아내고, 나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삶을 일굴 때에 가장 좋습니다.


  즐겁게 흘린 땀이 배어든 맛난 감알을 이웃한테 나누어 줍니다. 이 감알은 이른바, 우리 사회에서 참 훌륭하다는 일을 하는 사람도 먹고, 우리 사회에서 참 몹쓸 짓을 한다는 사람도 먹습니다. 감알은 누구한테나 맛납니다. 이 사람이 먹으니 맛이 안 나고, 저 사람이 먹으면 쓰지 않아요. 누구한테나 달디달아요.


  돈이 있대서 먹을 수 있는 감알이 아니에요. 돈이 있건 없건, 배고픈 이 누구하고라도 나누는 감알이에요. 천만 원을 주니까 감알을 열 알 보내 줄 만하지 않아요. 빈털털이라서 감껍질만 핥으라 하지 않아요. 모두들 똑같이 맛보고 똑같이 먹으며 똑같이 좋은 맛을 누려요. 모두들 좋은 맛을 느낄 때에 ‘그렇구나, 좋은 맛이네.’ 하고 생각하면서, 저마다 살아가는 곳에서 스스로 일구면서 좋아할 ‘좋은 삶길’을 찾을 수 있으면 돼요.


.. 앵두꽃 어루만지고 / 잘 익은 앵두를 먹고 자란 아이는 ..  (봄을 깎는 사람)


  동냥하는 거지한테 밥을 주는 사람은 ‘동냥꾼’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묻지 않아요. 물을 까닭이 없어요. 배고파 하니 스스럼없이 내 밥그릇에서 밥을 덜어 나눕니다. 추운 겨울날 손발 얼어붙은 길손을 불러 불가에 앉으라 얘기합니다. 불을 지핀 사람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는 대수롭지 않아요. 손발 얼어붙은 길손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또 책을 많이 읽었는지 학교를 오래 다녔는지 대수롭지 않아요. 모두 같은 사람이요, 모두 같은 목숨이며, 모두 같은 사랑이에요.


  난 어릴 적에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라는 옛말을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왜 미운 아이한테 떡을 하나 더 준담, 하면서 투덜거렸어요. 예쁜 아이야말로 떡을 하나 더 받을 만하지 않담, 하면서 종알거렸어요.


  그런데 말예요, 예쁜 아이는 언제라도 떡을 마음껏 받아요. 미운 아이는 언제라도 떡을 하나도 못 받아요. 미운 아이라는 손가락질이 찍히면, 이 아이는 그만 ‘좋은 사랑’을 제대로 못 받으며 자꾸자꾸 ‘슬픈 미운 짓’으로 휩쓸려요. 우리가 예쁜 아이한테 떡을 하나 더 주었다고 생각해 봐요. 그러면 이 예쁜 아이는 틀림없이 미운 아이를 불러 얘, 네가 이 떡 더 먹으렴, 하고 내밀겠지요. 어른이 예쁜 아이한테 떡을 더 주든, 어른이 먼저 나서서 미운 아이한테 떡을 더 주든, 언제나 미운 아이가 떡을 더 먹으면서, 시나브로 ‘좋은 사랑’을 깨달아 좋은 꿈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리라 느껴요.


.. 어린 모는 땅에 뿌리를 내리기 전에 / 흙 묻은 손에 먼저 뿌리를 뻗는구나 ..  (흙 묻은 손)


  아이들과 살아가며 아이들한테 더 따숩고 더 좋으며 더 살가운 말과 눈빛과 손길을 못 내밀곤 하는 내 모습을 하나하나 돌아봅니다. 내가 한 짓을 생각하고, 참으로 내가 하고 싶은 사랑을 생각합니다. 이래저래 생각하면, 나야말로 어린 나날부터 ‘떡 하나 못 얻어 먹으며 미운 짓을 하는 아이’로 살지 않았느냐 싶으나, 나는 내가 못 느낄 뿐 ‘떡 넉넉히 받아먹으며 예쁜 아이’로 살았지만, 이런 좋은 삶을 또렷하게 못 깨달으면서 우리 아이들한테 좋은 떡을 즐겁게 나누어 주는 어버이 길에서 자꾸 엇나가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어린 나날 떡을 못 먹고 자랐으면, 이런 지난날은 참 슬퍼요. 그러나, 어린 나날 떡을 못 먹었으면 오늘 떡을 먹으면 돼요. 오늘부터 떡을 먹으며, 오늘은 내가 좋은 어버이로 살아내어 우리 아이들이 좋은 아이들로 자라도록 떡을 실컷 나눌 수 있으면 돼요.


  모든 좋은 꿈은 바로 오늘 이루고, 모든 좋은 사랑은 바로 오늘 누리며, 모든 좋은 삶은 바로 오늘부터 비롯해요.


.. 어머니가 막대기로 깻대를 톡톡 치면 영악한 그놈, 깨벌레는 / 잔뜩 약이 올라 대가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우는 것이었다 / 배가, 배가, 배가 ……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저것 봐라 / 저 숭악한 이빨을 몇 쌍이나 가진 입을 두고 지가 먹지 않았단다 ..  (깨벌레)


  임성용 님 시집 《하늘공장》(삶이보이는창,2007)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임성용 님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가 도시로 돈 벌러 떠나야 하던 숱한 시골아이 가운데 하나였겠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시골에서 나고 자란 좋은 기운을 살려, 좋은 시골어른이 될 수 있으면 훨씬 좋으며 즐거울 삶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이 나라 제도권학교는 시골아이를 시골어른 되도록 놓아 주지 않습니다. 모든 시골아이가 시골 떠나 도시어른 되도록 내몹니다. 시골아이 스스로 흙을 사랑하고 햇볕을 아끼며 물과 바람을 믿으며 한삶 누리도록 하지 않아요. 시골아이 누구나 도시어른 되어 돈벌이에 얽매이도록 내몰아요.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더 사랑을 누리며 즐겁게 살아야 할 사람인데, 이 나라 제도권학교는 시골아이와 도시아이 모두를 슬픈 굴레를 뒤집어쓰도록 그예 내몰기만 해요.


  하늘에 공장이 있다면, 이곳에서는 무엇을 만들까요. 하느님이 공장을 세운다면, 하느님은 무엇을 만들까요.


  공장에서는 무엇을 만들어야 하나요. 공장 일꾼은 무엇을 만들어야 하나요. 사람들은 어떤 공산품을 쓸 때에 즐거울까요. 공장 일꾼은 어떤 공산품을 만들면서 보람차거나 뿌듯한 삶을 누릴 만할까요.


  석유만 먹는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 일꾼은 보람찰까요. 전투기나 잠수함 같은 군사무기에 쓰일 볼트나 너트를 만드는 공장 일꾼은 뿌듯할까요. 살림집 아닌 부동산으로 사고팔리는 아파트를 지어야 하는 건설회사 일꾼은 즐거울까요.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누구나 돈을 번다지만, 막상 삶을 누리거나 빛내면서 사랑을 짓는 사람은 자꾸자꾸 사라지거나 밀려나거나 짓밟히는구나 싶어요. 부디, 삶짓기 사랑짓기 꿈짓기로 아이들을 아끼는 어른들 모두 좋은 이야기 건사할 수 있기를 빌어요. 이 나라 아이들 누구나 해맑은 눈빛을 빛내는 어버이와 함께 좋은 보금자리를 씩씩하게 다스릴 수 있기를 빌어요. (4345.6.2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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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5
손택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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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이 이끄는 삶과 사랑과 꿈
 [책읽기 삶읽기 110] 손택수,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2010)

 


  새벽 네 시 갓 넘긴 아직 깜깜한 마을에서 저 멀리 싯누런 초승달을 바라봅니다. 들판마다 개구리 노랫소리 잦아드는 무렵, 밤을 밝히는 멧새 우는 소리 가늘게 들리고, 마당 한켠 후박나무 우거진 잎사귀는 하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무척 고요합니다. 바람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웃집 마늘밭은 말끔하게 텅 비었습니다. 곧 새로운 싹이 돋아 새로 심은 씨앗이 천천히 자라겠지요.


  엊그제까지 꽤 높다랗게 자라던 상추풀을 떠올립니다. 이웃밭 할머님은 골을 따라 상추를 심으셨는데, 상추는 줄기를 높이높이 올리고 꽃송이를 벌렸더랬습니다. 상추꽃마다 흰나비 찾아들어 반짝반짝 춤추더랬습니다. 사람들은 으레 잎사귀만 달랑달랑 달린 상추를 보지만, 상추가 풀이 되도록 둘 때에는 이렇게 키가 크고 꽃이 맺히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웃 할머님은 손이 달리고, 딱히 뜯어 먹을 사람이 없다 하기에 높이높이 자랄 수 있었다지만, 사람들은 상추이건 당근이건 무이건 배추이건 마늘이건 양파이건 꽃대가 올라 봉오리가 해사하게 벌어지도록 두지 않습니다. 꽃을 보지 않고 꽃을 생각하지 않아요. 꽃과 열매와 씨앗 없는 푸나무는 없으나, 꽃도 열매도 씨앗도 어느 틀에 가두어 지식으로만 머리에 담습니다.


.. 책 앞에서 침이 고이는 건 / 종이 귀신을 아들로 둔 어머니의 쓸쓸한 버릇 /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다고 / 아내도 읽지 않는 내 시집 귀퉁이에 / 어머니 침이 묻어 있네 ..  (육친)


  장미꽃도 꽃이고 튤립꽃도 꽃이며 나리꽃도 꽃입니다. 풀꽃도 꽃이고 들꽃도 꽃이며 나무꽃도 꽃입니다. 산초나무에는 산초꽃이 핍니다. 앵두나무에는 앵두꽃이 핍니다. 사람들이 씨를 받거나 얻어 심는 꽃이 있으나, 사람들 손을 타지 않으면서 널리 퍼지며 살아가는 꽃이 훨씬 많습니다. 아니, 지구별은 사람 손을 타지 않으며 스스로 퍼지고 이어가는 꽃과 풀과 나무가 있어 푸른 빛깔을 건사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도시를 세우고 공장을 지으며 찻길을 닦느라 함부로 망가뜨리는 손길을 애꿎게 뻗치더라도, 빙그레 웃으며 따사로이 이 땅을 보듬는 꽃씨 풀씨 나무씨가 푸른 숨결을 나누어 줍니다.


  이제 사람들은 옷을 손수 짜거나 깁지 않습니다. 가게에서 돈을 치러 사다 입습니다. 집에 재봉틀을 둔다 하더라도 실을 손수 얻지 않습니다. 실을 손수 얻고 천을 손수 마름하면서 옷을 짓는 사람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앞으로 여느 살림을 꾸리면서 식구들 옷을 손수 지을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남을 수 있을까요.


  시골마을 곳곳에 모시풀이 흐드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아마 예전에는 시골마을 누구나 손수 옷을 지어 입었을 테니, 이 모시풀이 이대로 흐드러지기만 하다가 시들어 죽도록 내버리지 않았겠지요. 논이나 밭을 일구며 낫으로 베어 버리거나 불에 태워 죽일 까닭이 없겠지요. 하나하나 알뜰히 건사해서 줄기를 째고 실을 얻으려 했겠지요.


.. 식육점 간판을 가리다 / 잘려 나간 가지 끝에 / 물방울이 맺혀 있다 ..  (나무의 수사학 2)


  우리 집 마당 한켠에서 우람하고 씩씩하게 자라는 모시풀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한겨레가 모시풀에서 실을 얻어 천을 짜고 옷을 지은 지 즈믄 해를 훨씬 넘었다 하는데, 처음에 어떤 사람이 모시옷을 생각했을까 궁금합니다. 어떤 넋으로, 어떤 얼로, 어떤 꿈으로, 어떤 사랑으로, 어떤 마음과 이야기로 모시옷을 그림으로 그리며 즐거이 실을 얻었을까요.


  아마, 맨 첫 사람은 온갖 일을 다 해 보았겠지요.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면서 차츰차츰 익숙해졌을 테고,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또 아이들이 물려받으면서 시나브로 새로운 솜씨가 나타나고 더 낫거나 수월한 솜씨가 태어났겠지요.


  그러고 보면, 먼먼 옛날이 아니라 하더라도 풀줄기에서 실올을 깨닫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갓 돋은 풀은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손가락 한둘로 잡아당기면 톡톡 끊어집니다. 어린이 누구라도 민들레 꽃대를 톡 끊어 씨앗을 훌훌 날릴 수 있어요. 우리 집 아이가 세 살 적에도 강아지풀 줄기를 꺾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쉬 꺾이는 강아지풀이라 하더라도 어느 만큼 자랐거나 비쩍 말랐을 때에는 좀처럼 안 끊어지기도 합니다. 강아지풀 줄기를 여럿 한꺼번에 쥐어 꺾으려 할 때에도 되게 안 끊어집니다.


  유채 줄기를 꺾고 안을 들여다본다든지, 꽤 굵직한 줄기로 오르는 풀 ‘줄기 속’을 살펴본다든지 하면, 풀줄기 속이 가느다란 실처럼 촘촘히 이어진 모습을 헤아릴 수 있어요. 나도 국민학생 적에 ‘풀줄기 속 가느다란 실올’을 바라보며 ‘이렇게 가느다란 실올이 잔뜩 있으니 꺾기 힘들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식구들과 함께 먹을 풀물을 짜면서도 이런 ‘풀줄기 속 실올’을 봅니다. 첫여름 여린 칡싹을 꺾을 때에도 ‘풀줄기 속 실올’을 느낍니다.


.. 비지땀을 흘리며 몇 번씩 밭과 웅덩이 사이를 왕래하면서 / 나는 처음으로 머위와 감자와 방울토마토의 목마름을 생각한다 / 가문 여러 날 뿌리 끝에 쥐고 놓지 않는 한 방울 / 속에 든 구름과 하늘을 생각한다 ..  (물통)


  살아가려는 마음이란 사랑하려는 마음이리라 느껴요. 사랑하려는 마음이란 아름다운 마음이로구나 싶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가녀린 몸을 따뜻하게 덮을 옷을 생각할 수 있었고, 옷을 생각하며 풀줄기에서 옷감이 될 실을 얻는 길을 찾으며, 실 얻는 길을 찾으면서 천을 짜는 길을 생각하여 깨닫다가는, 천을 다시 옷으로 깁는 길을 찾았구나 싶어요. 가느다란 바늘도 생각해서 빚었을 테고, 조금 굵다란 바늘, 이른바 뜨개바늘 같은 바늘들, 대바늘이든 쇠바늘이든 빚는 길을 헤아렸겠구나 싶어요.


  생각이 삶으로 이어집니다. 삶이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은 꿈으로 이어지고, 꿈은 이윽고 지구별 곳곳에 푸른 잎과 맑은 꽃과 소담스러운 열매로 영급니다.


.. 아파트 옆 논에 모내기가 한창이다 ..  (아파트 모내기)


  손택수 님 시집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2010)을 읽습니다. ‘수사학’이 무얼까 생각하면서 시집을 들추다가는 이내 ‘수사학’이든 다른 무슨무슨 학이든 무엇이 대수이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시집 이름이 무엇이든, 또 시에 붙인 이름이 무엇이든, 나한테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나는 시를 읽을 뿐이고, 나는 시를 즐길 뿐이에요. 나는 시를 좋아할 뿐이요, 나는 시와 함께 살아갈 뿐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동안 좋은 마음으로 시를 누립니다. 시를 읽거나 시를 쓰거나 나로서는 언제나 좋은 마음이 감돕니다. 슬픈 마음으로 살아가는 동안 슬픈 마음으로 시를 누립니다. 시를 읽든 시를 쓰든 나는 늘 슬픈 마음이 맴돕니다.


  홀가분한 마음일 때에는 홀가분하게 누리는 시입니다. 고단할 때에는 고단하게 누리는 시입니다. 바쁠 때에는 바쁘게 누리는 시요, 한갓질 때에는 한갓지게 누리는 시예요.


  손택수 님은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썼을까요. 손택수 님 시집을 읽을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아름다움을 찾는 즐거운 넋으로 시를 썼을까요. 아름다움을 찾는 즐거운 넋으로 시집 《나무의 수사학》을 읽을 만할까요. 시를 쓰는 사람은 어디에서 어떤 넋으로 삶을 짓는 사람일까요. 시를 읽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꿈을 키우며 삶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달은 제법 크기에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올려다봅니다만, 별은, 작디작은 별은 시골이라 하더라도 모든 시골에서 언제나 올려다보지 못합니다. 공장과 골프장이 수두룩한 시골에서는 작은 별을 볼 수 없고, 자동차와 높직한 건물이 들어찬 도시에서는 큰 별조차 느끼기 힘듭니다. 달 또한 숱한 등불에 바래고 높은 건물에 가립니다. 달과 별, 해와 구름, 비와 눈, 바람과 흙을 누리지 못하는 터에서 어떤 목숨을 보듬으며 시를 쓰거나 읽을 수 있을까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4345.6.17.해.ㅎㄲㅅㄱ)

 


― 나무의 수사학 (손택수 글,실천문학사 펴냄,2010.6.30./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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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다 그만둔 날 - 김사이 시집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78
김사이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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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
[시를 노래하는 시 20] 김사이, 《반성하다 그만둔 날》


 

- 책이름 : 반성하다 그만둔 날
- 글 : 김사이
- 펴낸곳 : 실천문학사 (2008.9.12.)
- 책값 : 7000원

 


  빨래기계를 올해에 처음으로 들이고는 이레쯤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다가, 한 달 즈음 바지런히 써 보았습니다. 아이들 옷가지 빨래는 날마다 수북하게 쌓이고, 날마다 신나게 빨래해야 하는 만큼, 빨래기계가 있으면 일손을 덜기에 좋습니다. 이불도 척척 빨아내고, 두꺼운 바지나 겉옷도 수월하게 빨아냅니다. 그런데 아이들 옷가지는 하루에도 때 되면 오줌바지에 똥기저귀에 땀에 절은 옷에 흙이 잔뜩 묻은 옷에 끝없이 나옵니다. 빨래기계는 이런저런 옷가지를 한데 그러모아 빨아 준다 할 텐데, 나는 밑빨래를 안 하고 빨래기계에 넣지 못합니다. 오줌 밴 옷가지랑 흙이 잔뜩 묻은 옷을 같이 빨지 못합니다. 물이 빠지는 옷이랑 물이 안 빠지는 옷을 나란히 빨 수 없습니다.


  빨래기계를 한 달 즈음 홀가분하게 쓰면서 저녁이 되면 다시 수북히 새로 쌓이는 빨래를 바라보다가 무엇인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비내리며 축축한 날에는 아침에 한 차례 빨래기계를 돌려서는 옷을 말리기 어렵습니다. 더운 여름을 맞이하니, 저녁에 몇 가지 빨래를 해 놓아 집안이 안 메마르도록 하고 싶습니다.


  빨래기계가 차지한 씻는방 한쪽에 어느새 쪼그리고 앉습니다. 나는 다시 손빨래를 합니다. 빨래기계를 날마다 쓸 때에 ‘가장 낮은’ 물높이로 빨래를 하는데, 이렇게 하더라도 36분이 걸립니다. 내가 손으로 빨래할 때에 몇 분이 걸리나 시계로 잽니다. 12분. 조금 많으면 15분이나 20분. 빨래감이 많은 날은 빨래기계도 42분이나 45분. 그러니까, 빨래기계를 쓰면 시간이 곱배기보다 더 드는 셈입니다. 물도 훨씬 많이 쓸 테고 전기도 꽤 많이 쓸 테지요.


.. 햇볕이 타는 한낮 / 가리봉오거리 / 슬리퍼에 맨발로 / 술 취해서 돌아다니는 후줄근한 남자 / 시장 복판에서 한바탕 몸씨름과 입씨름을 하다가 / 여자에게 허리춤 잡혀 끌려가고 ..  (가리봉엘레지)


  처음부터 손으로 빨래를 하지 않았던 사람은 외려 빨래기계보다 더 오래 품을 들여 빨래를 하리라 생각합니다. 손빨래가 아직 안 익숙하다면, 빨래기계보다 물과 비누를 더욱 많이 쓰리라 생각합니다. 비빔질과 헹굼질은 날마다 꾸준히 빨래할 때에 척척 손에 감깁니다. 어느 만큼 빨고 짜서 널어야 하는가 하는 잣대는 따로 없습니다. 그예 몸으로 느낍니다.


  빨래하는 겨를을 시계로 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제 하루에 네 차례쯤 손빨래를 하는데, 빨래를 하면서 빨래가 무언가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빨래하는 품을 빨래기계한테 맡기더라도 10분쯤은 몸과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손으로 빨래하고 빨래를 끝낼 만한 말미가 들어야 기계한테 일감을 맡기는 셈입니다.


  참말 기계를 쓴대서 집일이 줄어들까 아리송합니다. 오늘날 여느 사내(아저씨나 아버지)들은 빨래기계를 쓸 수 있어 가시내(아줌마나 어머니)들이 집일이 훨씬 줄어 홀가분할 뿐더러, 집에서 겨를을 많이 낼 만하다고 여겨 버릇하지 싶은데, 왜 이처럼 생각할까요. 스스로 집일을 해 보지 않았고, 스스로 빨래기계 같은 연장을 다뤄 보지 않았기에 이처럼 생각할까요. 빨래기계나 청소기를 비롯한 여러 연장을 쓸 때에 집일이 줄어든다면, 집에서 사내들이 이런 연장을 쓸 일이라고 느껴요. 그야말로 ‘힘이 안 드는’ 일이라 하면 사내들이 하면 돼요. 덧붙여, ‘힘이 드는’ 일이라 하면 사내이든 가시내이든 서로 즐겁게 돕고 나누어 맡으면서 하면 돼요.


.. 아침이면 멀쩡하게 출근을 하고 슈퍼에 가고 산에도 가고 / 맑은 햇살에 눈 못 뜨는 나 같은 게 아니라 ..  (숨어 있기 좋은 방)


  아침에 멧풀을 흐르는 물로 헹구고 풀물을 짠 다음,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고, 곧장 식구들 밥을 차리려고 부산을 떨며, 둘째 먹일 죽을 마련해 아이 꽁무니 좇으며 가까스로 한 그릇 다 먹입니다. 이렇게 하느라 아침이 얼마나 지나는가 하고 시계를 들여다 보며 헤아립니다. 풀물을 안 짜면 두 시간 즈음, 풀물을 짜면 세 시간 남짓, 이럭저럭 설거지를 끝내고 그릇을 마당에 내놓아 해바라기를 시키고, 또 이불을 마당에 널어 해바라기를 시키면 네 시간 즈음, 여기에다가 방을 쓸고닦으며 이부자리 모두 마당에 널어 해바라기를 시키고 기지개를 켜면 다섯 시간 남짓 지납니다. 아침 여덟 시부터 손에 물을 묻히니 어느 날은 열 시나 열한 시 즈음 한숨을 돌릴 만하지만, 으레 열두 시나 한 시가 되어야 겨우 한숨을 돌릴 만합니다. 어느 날은 두 시가 되어서 겨우 허리를 펴고 살짝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집일을 알뜰살뜰 예쁘게 건사하는가 하고 스스로 물으면 몹시 남우세스럽습니다. 어지른 책은 제대로 치우지 못하고, 아이들은 갖고 논 놀잇감을 방바닥에 그대로 굴립니다. 뒷밭 쓰레기를 치우며 땅을 갈아엎는 일에 손을 대지 못합니다. 다 마른 빨래를 미처 못 개고 쌓기도 합니다.


  이렇게 어설플 수 있나 싶으나, 이렇게 어설피 살아가는구나 싶습니다. 내가 어디에 마음을 쓰는지 골이 아프고, 내가 어떻게 사랑을 들여 살림을 돌보는지 골이 띵합니다.


  빨래를 하다가, 밥을 하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뒷밭에 물을 주다가, 마당을 쓸다가, 잘 마르는 마늘을 뒤집다가, 빨래를 걷다가, 빨래를 개다가, 오줌바다 된 마루와 방바닥을 닦고 걸레를 빨다가, 비질을 하다가, 쌀을 씻어 안치다가, 또 설거지를 하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다가, 나 스스로 어떤 말미와 겨를과 틈을 마련하여 아이들을 사랑하고 옆지기를 아끼는 삶을 누려야 할까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할 내 삶은 어떠한 길을까 헤아립니다.


.. 땅 끝에서 떠나온 곳 / … / 내 고향보다 더 허름한 빈민촌 같아 ..  (머물기 위해 떠나다)


  이른아침부터 손에 물을 묻히면 손에는 칼이나 걸레나 빗자루를 들밖에 없습니다. 연필도 볼펜도 책도 손에 들지 못합니다. 물이 묻은 손은 마를 새 없습니다. 새삼스레 다시 물을 묻히고, 한결같이 물내음 뱁니다. 물내 나는 손으로 아이 볼을 살살 꼬집다가 꼬질꼬질한 낯이나 손을 느끼면 아이를 씻깁니다. 엊저녁에는 둘째 아이 손톱에 까만 때가 낀 모습을 보고도 손톱을 깎아야겠다는 생각을 못 하며 지나칩니다. 첫째 아이 손톱은 얼마쯤 또 길었을까요. 귀지는 어떠할까요. 둘째 아이는 언제쯤 귀지를 들여다보면 될까요. 아직 오줌가리기를 안 하려 하는 둘째 오줌바다 살림은 언제쯤 끝을 볼 수 있을까요. 둘째가 쓸 오줌그릇을 새로 장만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문득 깨닫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품는 생각은 참으로 나 스스로 사랑하며 아끼면서 즐겁게 품는 생각인지, 하루하루 온갖 일에 끄달리거나 휘둘리면서 억지로 끄집는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하면 참 좋겠구나 하며 저절로 피우는 꽃생각일 때에 나부터 맑게 웃으며 하루가 즐겁겠지요. 저렇게 하며 참 기쁘겠구나 하며 홀가분하게 길어올리는 샘물생각일 때에 나 스스로 밝게 웃으며 하루가 환하겠지요.


.. 항암제 맞으면서 머리카락 홀랑 빠지고 나니 / 가발 찾는 아버지가 참으로 천연덕스럽다 /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묏자리까지 만들어놓고 / 애첩의 품에서 눈을 감을 아버지 / 행복하세요? ..  (애첩의 품에서)


  아이하고 들마실을 하거나 자전거마실을 하다가, 문득문득 느낍니다. 나도 좋고 아이도 좋다고 느낍니다. 내가 우리 아이들만 한 나이였을 때에 이렇게 들마실이든 자전거마실이든 내 사랑스러운 어버이하고 오붓하게 얼크러지며 놀 수 있었으면 참말 기쁘며 아름다웠겠구나 싶습니다. 내 어린 날 내 어버이는 어린 나하고 이런 겨를을 누리지 못했을는지 모르는데, 그무렵 나와 내 어버이가 좋은 웃음을 누렸든 못 누렸든, 오늘 어버이로 살아가는 내가 우리 아이들이랑 옆지기하고 좋은 웃음을 누릴 수 있으면, 이 웃음꽃이 나와 아이들과 내 어버이한테까지 살몃살몃 스며들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사랑을 바라보며 사랑을 누려요. 빨래를 하건 밥을 하건, 내 마음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꽃피워 예쁘게 누리는 하루가 되도록 다스릴 때에는, 언제나 사랑빨래이고 사랑밥이 돼요.


  하루 내내 손에서 물기 마를 새 없으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짬이란 도무지 없다 싶습니다. 아주 빠듯합니다. 나는 틀림없이 집에서 종이책 읽기 아주 버겁습니다. 그런데, 종이책 아닌 다른 책은 늘 읽을 수 있어요. 아이책을 읽고 밥책을 읽으며 빨래책을 읽어요. 걸레책도 읽고 자장노래책도 읽습니다. 둘째 아이 걸음마책도 읽습니다. 내 손에서는 물기 마를 새뿐 아니라 둘째 아이 똥오줌 내음 가실 틈도 없습니다. 곧, 나는 오줌책이랑 똥책도 읽습니다. 뒷밭에 물 주러 갈 때면 밭책과 풀책을 읽습니다. 멧딸 따러 네 식구 노래하며 비탈밭 사이를 오를 때면, 이웃밭책과 들책과 딸책을 읽어요.


.. 한글도 다 못 읽는 여덟 살 아이는 붉은 노을이 어둠에 끌려갈 때 산자락 끝을 따라 언덕을 넘고 밭둑을 걸어 또 다른 언덕에 오른다 ..  (문)


  온누리 모든 삶은 책입니다. 내 삶도 책이고 네 삶도 책입니다. 읍내 저잣거리에 마실을 가는 길도 책입니다. 군내버스 일꾼이 버스를 모는 매무새도 책입니다. 이웃마을 논밭을 바라보며 새삼스럽다 싶은 책을 읽습니다. 크고작은 돌로 비탈논과 비탈밭 이룬 모습 또한 남다르다 싶은 책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책을 읽습니다. 처마 밑 제비집 새끼 네 마리 몽땅 날갯짓 익힌다며, 오늘 새벽부터 이 녀석들 노랫소리 끊깁니다. 어디까지 날아가서 어떤 먹이를 찾고, 어미 제비한테서 어떤 꿈과 사랑을 물려받을까 궁금합니다. 나는 날마다 제비책을 읽습니다.


  늘 읽는 내 나무책이 종이에 담겨 온누리에 두루 펼쳐지는 일은 드뭅니다. 노상 읽는 내 아이책이 종이에 실려 지구별에 골고루 펼쳐지는 일은 드뭅니다. 내가 읽는 제비책이나 참새책이나 까마귀책이나 종달새책을 따로 동물도감이나 식물도감이나 무슨무슨 자연책이나 환경책에서 만난 적은 아직 없습니다. 들판에서 듣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담은 종이책이 있을까요. 저녁부터 깊은 새벽까지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문학으로 다시 빚는 글꾼이 있을까요.


.. 아랫집 할머니처럼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 하며 / 보듬어주길 바란 적 없는데 / 부지깽이 들고 쫓아다니는 것이 화풀이란 것쯤 안다 ..  (바람의 딸)


  글을 씁니다. 새벽 다섯 시 제비 노랫소리와 함께 마을 이장님 새벽 방송 소리를 들으며 글을 씁니다. 시골마을에서는 새벽 다섯 시에 마을방송을 합니다. 도시에서 새벽 다섯 시에 ‘동네방송’을 한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알리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곤 합니다. 도시에서 새벽 다섯 시뿐 아니라 여섯 시 무렵에 이런저런 방송을 한다며 동네가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울려퍼지면 도시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합니다.


  글을 읽습니다. 나는 내 삶을 글 한 줄에 푼푼이 눌러담아 쓰고, 나는 내 이웃 삶 푼푼히 눌러담긴 글 한 줄 읽습니다. 나는 늘 내 삶을 내 가락과 무늬와 빛깔과 내음에 맞추어 글을 씁니다. 내 이웃은 이녁 삶을 이녁 가락과 무늬와 빛깔과 내음에 맞추어 글을 씁니다.


  더 빼어나다 싶은 글은 없습니다. 더 놀랍다 싶은 글도, 더 좋다 싶은 글도, 더 아름답다 싶은 글도 없습니다. 모든 삶은 저마다 빼어나고 놀라우며 좋고 아름답습니다. 모든 글은 다 다른 삶결대로 반갑고 흐뭇하며 기쁩니다.


.. 남자들의 철옹성 같은 연대에 / 홀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가 ..  (살갗으로부터 오는 긴장)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글로 씁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이웃 삶을 이웃이 손수 쓴 글을 읽으며 예쁘게 나눕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넋한테 둘러싸여 하루를 맞이하고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나는 내가 듣고 싶은 소리에 둘러싸입니다. 나는 내가 누리고 싶은 빛깔에 둘러싸입니다. 나는 내가 이루고 싶은 사랑에 둘러싸입니다.


  이제 시집 하나 손에 들고 잠자리에 눕습니다. 한 꼭지 두 꼭지 하품을 하며 읽습니다. 몸이 고단하니까 하품이 나옵니다. 하품을 누르고 졸음을 좇으며 시를 읽습니다. 한 줄 더 읽고 싶어 꾸벅꾸벅 졸며 읽습니다. 한 쪽 더 펼치고 싶어 책장을 손에 쥐다가 이 모습 그대로 잠듭니다. 퍼뜩 깨어 한 쪽을 더 읽기도 하고, 문득 깨다가는 책을 덮고는 그대로 더 쓰러진 채 곯아떨어지기도 합니다. 하루는 흐르고, 하루는 새롭게 찾아옵니다. 하루는 저물고, 하루는 내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 5월 연둣빛 나무 이파리를 보는데 / 휴대전화로, 그래 휴대폰으로 / 해고통보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 해고사유는 ‘잡담’이다. / 그리고 더 이상 회사에 갈 필요도 없었다 / 눈만 뜨면 전쟁을 치르듯이 아이 맡기고 / 30분 일찍 전철에 구겨져가던 내 밥그릇 자리 / 그러나 나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였고 / 비공식적으로 잘린 거다 ..  (무엇을 위하여 종은 울리나)


  김사이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반성하다 그만둔 날》(실천문학사,2008)을 읽습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김사이 님은 이녁 삶을 얼마나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생각할까 하고 가만히 헤아립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전라남도 고흥에서 살아가는데, 나처럼 도시에서 태어나 시골로 찾아들어 아이들이랑 삶을 누리는 이웃은 이 나라에 몇 사람쯤 될까 궁금합니다. 으레, 김사이 님처럼 시골마을을 부리나케 떠나 도시로, 더 큰 도시로 찾아들어야 하는 굴레나 고리나 얼거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힘들거나 가난하거나 슬프거나 아프던 시골집 허름한 살림보다 더 쪼그라들고 외로우며 벅찬 도시살이를 누리더라도, 이 도시를 벗어나 다른 시골마을 작은 집을 꿈꾸며 사랑을 빚기란 만만하지 않은 노릇일까 싶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김사이 님은 왜 ‘뉘우쳐’야 하고, 왜 ‘뉘우치다가 이 뉘우치기를 그만두’어야 했을까요. 뉘우치기보다는 사랑하면 좋을 텐데요. 뉘우치기를 그만두기보다, 사랑을 오래오래 이으면 기쁠 텐데요.


.. 천 원 주고 산 물건이 십 년쯤 되었으니 / 비닐이 벗겨지고 앙증맞은 곰돌이딱지가 너덜너덜해졌다 ..  (곰팡이꽃)


  곰돌이 비누갑하고도 열 해를 살 수 있어요. 작은 앵두씨 하나 심어 열 해를 보살필 수 있어요. 오늘 하루 새 곰돌이 비누갑을 천 원 치러 장만할 수 있어요. 작은 앵두씨를 심기 벅차면 작은 앵두나무 한 그루 이천 원이나 삼천 원쯤에 장만할 수 있어요. 허름한 도시 작은 집에서 곰돌이 비누갑은 열 해를 함께 살며 곰팡이꽃을 피워요. 곰팡이꽃도 꽃이니 무척 소담스럽고 예뻐요. 허름한 도시 작은 집 어딘가에 빈터가 있으면, 꼭 내 삯집 아닌 이웃집 언저리이든 동네 골목 한 귀퉁이가 되든, 시멘트바닥이나 돌바닥을 한 뼘만큼 들어내고 작은 앵두나무 심어 알뜰살뜰 보살펴 열 해를 살아내어 나와 내 이웃 모두 한여름 바알간 앵두알 누릴 수 있어요.


  사랑하기에 좋은 삶이에요. 좋아하기에 사랑스러운 삶이에요. 살아가며 빛나는 나날이에요. 빛나기에 살아갈 만한 나날이에요. 김사이 님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이야기를 김사이 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풀어낼 시노래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4345.6.1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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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6-15 10:20   좋아요 0 | URL
ㅎㅎ 빨래기계를 들여놓으셨군요^^

숲노래 2012-06-15 17:27   좋아요 0 | URL
아... 꽤 되었어요.
요새는 거의 안 쓰지만요 ^^;;;

책읽는나무 2012-06-16 06:16   좋아요 0 | URL
빨래기계가 있어도 손빨래는 계속 해야되는 것 맞아요.
청소기계가 있어도 손으로 걸레질 해야되는 것 맞아요.
편리한 기계들이 곁에 있어도 뒷마무리는 항상 손으로 해야 마무리가 되는 집안일은
정말 끝이 없기도 하고,집안일만큼 정성이 들어가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집안일 하시는 모습 뵈면 어쩜 이리 공감이 가는지 참~~ㅋ

전 그동안 집안일을 하면서 참 힘들다~ 참 하기 싫다~ 참 끝없다~ 만 반복하며
투덜댔었던 것 같아요.헌데 님을 뵈면 집안일을 저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할 수도 있구나! 새삼 깨닫게 되네요.^^
아이들 아가때 눈을 떠 뒷바라지 해주고 숨 돌릴라치면 오후 한 시가 되었던 것같아요.
전 그때 아침 세수 잠깐 했었던 것같아요.너무 바쁠땐 저녁에 아침 세수를 하기도 했었구요.
집에 있는데 왜 그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시간이 부족한지 좀 짜증이 많이 나던때이기도 했었어요.아이들 웃는 모습에 또 잠깐 애써 짜증을 잊곤 했었지만요.
지금 님의 모습 뵈면 그시절이 문득 생각이 나면서 왜 님처럼 즐겁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약간의 후회가 생겨요.^^
지금이라도 잘해야겠어요.또 훗날 후회하지 않으려면요.^^

그시절 시간 없어 책을 읽지 않은 순간에 뭔가 헛헛하다 생각 많이 하곤 했었는데 님의 글을 읽고 보니 저도 저 나름대로 삶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그부분이 가장 좋았어요.^^

숲노래 2012-06-16 13:43   좋아요 0 | URL
마음속 좋은 책을 누구나 즐겁게 느낄 수 있으면
가장 사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저씨'와 '젊은 사내'와 '푸른 아이들' 모두
이러한 삶과 사랑을 잘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작은 기쁨 - 이해인 시집
이해인 지음 / 열림원 / 2008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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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듣는다
[시를 노래하는 시 19] 이해인, 《작은 기쁨》

 


- 책이름 : 작은 기쁨
- 글 : 이해인
- 펴낸곳 : 열림원 (2008.3.17.)
- 책값 : 7500원

 


  깊은 밤, 옆자리에 누운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손을 뻗어 아이 가슴께를 토닥이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이마를 쓰다듬습니다. 이윽고, 쉬가 마렵다며 끙끙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으레 잠자리에서 부시시 일어나 아이랑 함께 섬돌로 내려서서 밤하늘 별이나 달이나 구름을 바라보며 쪼그려앉습니다. 아이가 쉬를 다 누면 아이 손을 잡거나 아이를 품에 안고 방으로 돌아옵니다.


  다시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잘 토닥이고 나도 이내 잠이 드는데, 잠이 들기 앞서 살짝 생각합니다. 볼일 보는 뒷간이 집 바깥에 있으면 여러모로 좋다고. 이렇게 마당에 내려서며 밤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니까요.


.. 시는 나를 데리고 / 나는 시를 데리고 / 마침내는 하늘로 갈 것인가 ..  (시를 쓰고 나서)


  소리를 듣습니다.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내 손가락을 움직여 글을 쓰며 내는 소리를 듣습니다. 옆지기가 바늘을 놀려 뜨개질하는 아주 작으며 부드러운 소리를 듣습니다. 두 아이가 저마다 뒹굴거나 뛰노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시골집을 둘러싸고 숱한 목숨붙이가 얼크러지며 내는 소리를 듣습니다.


  풀잎은 바람과 햇살에 따라 소리를 냅니다. 풀잎은 빗물과 눈송이에 따라 소리를 냅니다. 꽃잎은 나비와 벌에 맞추어 소리를 냅니다. 열매는 얼른 따먹으라며 소리를 내어 부릅니다.


  소리는 귀로 듣습니다. 그런데, 참말 귀로 듣는 소리인지 아닌지 궁금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소리는 내 귓결로 스쳐 지나가니까요. 어느 소리는 번쩍 하고 눈이 뜨이도록 하니까요.


.. 시는 / 내 마음을 조금 더 / 착하게 해 주었다 ..  (시는)


  소리를 듣듯 빛을 바라봅니다. 내 마음을 건드리는 빛을 바라봅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봅니다. 내 사진기로 스미는 빛을 바라봅니다. 살붙이들 눈망울에 어리는 빛을 바라봅니다. 솔솔 익는 내음 풍기는 밥냄비에서 피어나는 빛을 바라봅니다.


  소리도 빛도 늘 내 둘레에 있습니다. 꿈도 사랑도 언제나 내 둘레에 있겠지요. 이야기도 한결같이 내 둘레에 있을 테며, 내 하루를 이루는 온갖 숨결 또한 노상 내 둘레에 있을 테고요.


  소리를 느끼듯 빛을 느낍니다. 빛을 느끼듯 꿈을 느낍니다. 꿈을 느끼듯 사랑을 느낍니다.


  가는 말이 고울 때에 오는 말이 곱다 했지, 오는 말이 고울 때에 가는 말이 곱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으로 소리를 들을 매무새일 때에 내 몸에서 좋은 소리가 퍼지고, 내 몸에서 좋은 소리가 퍼질 때에 나 또한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좋은 소리를 듣는다는 말은, 내가 무언가를 했으니 고맙게 돌아온다는 뜻은 아니에요. 나 스스로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을 때에, 내 귀가 열려 좋은 소리를 알아챈다는 뜻이에요. 곧, 나 스스로 좋은 소리를 내지 않을 때에는, 내 귀가 닫혔겠지요. 내 귀가 닫혔을 때에는 내 둘레에서 제아무리 좋은 소리가 가득하다 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해요. 나한테 오는 말이 아무리 좋거나 곱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하나도 못 들어요. 그러니까, 오는 말이 곱다 하더라도 가는 말이 곱다고 말하지 못해요.


.. 아침에 눈을 뜨면 / 작은 기쁨을 부르고 / 밤에 눈을 감으며 / 작은 기쁨을 부르고 ..  (작은 기쁨)


  사랑으로 온마음 채우는 이는 사랑을 즐거이 나눌 뿐 아니라 사랑을 즐거이 받습니다. 꿈으로 온마음 보듬는 이는 꿈을 즐거이 펼칠 뿐 아니라 꿈을 즐거이 선물받습니다.


  나 스스로 생각할 대목은 사랑이요 꿈입니다. 나 스스로 내 몸과 마음을 그득그득 채우며 돌볼 이야기는 사랑이며 꿈입니다. 다른 무엇으로 내 삶을 채울 수 있을까요. 다른 어느 것이 내 삶에 스며들 만할까요.


  기쁘게 살아가야 기뻐요. 착하게 살아가야 착해요. 아름답게 살아가야 아름답습니다. 해맑게 살아가야 해맑게 웃어요. 마음은 몸이고, 몸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일구고 몸을 일굽니다. 몸을 아끼며 마음을 아낍니다.


.. 초등학교 시절 / 시골집에 놀러 갔을 때 / 두 살 아래의 / 사촌 남동생이 / 나에게 처음으로 / “누나!” 하고 불렀을 때 / 하늘과 햇빛이 눈부셨다 ..  (누나)


  저녁나절, 고단한 몸을 누이며 시를 씁니다. 손에는 볼펜 한 자루 쥘 힘이 없으니, 마음속으로 시를 씁니다. 마음속으로 쓴 시는 지워지거나 잊히지 않으리라 느끼며 시를 씁니다. 마음속으로 쓴 시는 언젠가 환하게 떠올라 종이에 또박또박 옮겨적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나 돌아보며 시를 씁니다. 새 하루를 어떻게 맞이할까 기다리며 시를 씁니다. 하루를 고맙게 마무리짓기에 시를 씁니다. 하루를 새로 열 수 있으니 시를 써요.


.. 소중히 안아야만 / 선물로 살아오는 시간 ..  (오늘도 시간은)


  문득 돌아보면, 열두 해에 걸쳐 의무교육 제도권학교를 다니며 시를 읽거나 쓰도록 배운 일이 없다고 느낍니다. 좋은 스승을 못 만났기에 시를 읽거나 쓰도록 배우지 못했달 수 있지만, 내 마음에서 샘솟듯 바라는 꿈이나 사랑이 애틋하지 않았으니, 나로서는 애써 시를 쓸 수 없었다 할 만하구나 싶어요. 이모저모 생각해 보면, 좋은 스승이 있어서 좋은 시를 쓰지는 않거든요. 좋은 스승이 가르치거나 일깨워야 좋다고 느낄 만한 시를 쓰지는 않거든요.


  좋은 시를 쓰는 씨앗은 늘 내 마음속에 있어요. 좋은 시를 맺는 씨앗은 언제나 내 가슴속에 조그맣게 사랑스레 숨을 쉬어요.


  나 스스로 깨우는 씨앗입니다. 내 손으로 심는 씨앗입니다. 나는 내 사랑씨앗에 물을 주고 바람을 쏘이며 햇살을 비춥니다. 나는 내 사랑씨앗이 시 한 자락으로 태어나도록 북돋우고 보살피며 아낍니다.


.. 가만히 서서 / 책들의 제목만 / 먼저 읽어도 / 행복합니다 ..  (책방에서)


  사랑은 남한테서 받지 않습니다. 사랑은 내가 일으킵니다. 사랑은 남이 베풀지 않습니다. 사랑은 내가 나눕니다. 내 작은 두 손이 사랑을 여는 길입니다. 내 작은 두 눈이 사랑을 이루는 열쇠입니다.


  마음으로 소리를 듣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사랑스레 열면서 소리를 듣습니다. 내 곁 아름답다 느끼는 온갖 목숨들이 따사롭게 들려주는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생각으로 소리를 빚습니다. 스스로 생각을 너그러이 가다듬어 소리를 빚습니다. 내 곁 아름답다 느끼는 온갖 목숨들과 널리 나눌 소리를 빚습니다.


  소리를 들으며 소리를 빚습니다.


.. 누가 종이에 / ‘엄마’라고 쓴 / 낙서만 보아도 / 그냥 좋다 / 내 엄마가 생각난다 ..  (엄마)


  이해인 님 시집 《작은 기쁨》을 읽습니다. 내 국민학생 적이었나 중학생 적이었나, 이해인 님 시집이 퍽 옛날부터 두고두고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으며 읽혔다고 느낍니다. 내 어릴 적에는 이해인 님 싯말이 어떻게 널리 알려지거나 사랑받거나 읽힐 만했는지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나 스스로 느낄 마음이 없었으니 못 느꼈겠지요.


  아이들 재우고 먹이고 놀고 입히고 얼크러지는 자리에서 살아가며 고요히 생각합니다. 누구나 시를 참 쉽게 쓰고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삶을 아끼고 사랑하며 하루하루 누린다면, 시란 참 쉽게 쓰고 쉽게 읽으며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해인 님은 시를 참 쉽게 씁니다. 스스로 시를 쉽게 쓰시니까 이해인 님을 둘러싼 옆지기나 곁지기가 시를 쓸 때에도 쉽게 읽겠지요.


  받아들이는 삶 그대로 시 한 자락이 됩니다. 맞아들이는 삶 그대로 사랑을 부르는 노래가 됩니다. 하늘이 내려주는 사랑이나 노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늘이 사랑이나 노래를 내려준들 내 가슴을 열지 않으면 어느 것 하나 사랑이라고도 노래라고도 깨닫지 못해요. 곧, 내 가슴을 열어 나 스스로 온통 사랑마음과 사랑몸으로 살아낼 때에 비로소 ‘하늘이 사랑과 노래를 내려 주는구나’ 하고 느낄 텐데, 이렇게 사랑과 노래를 느낀다면, 하늘이 사랑을 내려 주니 느낀다기보다, 나 스스로 나한테 사랑과 노래를 베풀기에 느끼는 셈이지 싶어요.


.. 행복한 모습 / 환한 웃음으로 보여주셔요 ..  (어떤 주문)


  엄마를 좋아해서 ‘엄마’ 두 글자 적힌 쪽종이를 보고도 가슴이 설레며 좋다 하는 이해인 님입니다. 누가 베풀어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좋아하셔요. 누가 알려줘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느껴 좋아하셔요.


  스스로 좋아하기에 소리를 들으며 시를 씁니다. 스스로 좋아하기에 삶을 보살필 수 있고 시를 사랑할 만합니다. 스스로 좋아하기에 꿈을 빚고 꿈을 싯말 하나에 살포시 담습니다.


.. 내가 / 하늘 위에 쓴 이름들은 / 바다가 읽고 / 바다 위에 쓴 이름들은 / 하늘이 읽고 ..  (사랑의 이름)


  좋은 아침을 맞이합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좋은 아침을 맞이합니다. 오늘도 앞으로 다가올 숱한 모레와 글피처럼 좋은 아침을 맞이합니다. 더도 덜도 아닌, 나 스스로 좋다고 느끼며 헤아리기에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시를 읽으며 좋은 마음이 됩니다. 좋은 마음으로 시를 읽으니 내 사랑씨앗은 좋은 꽃을 피우고 좋은 열매를 맺으며, 내 손으로 새삼스레 좋은 시 하나를 쓸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오늘도 우리 집 처마 밑 제비들은 새끼들 밥 먹이는 노랫소리로 하루를 엽니다. 나도 우리 집 살붙이들 밥 먹이는 웃음소리로 하루를 열자고 생각합니다. (4345.6.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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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07 07:36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쓸 적에는 몰랐는데, 알라딘서재 대문화면에 6월 7일 오늘이 이해인 님이 태어난 날이라고 나오는군요. 책날개에는 이해인 님 '태어난 해와 날'이 따로 안 적혔는데, 이렇게 애써 밝히지 않는다면, 알라딘서재 대문화면 같은 데에서도 딱히 안 밝혀도 좋은 일이 아닌가 싶어... 군말을 붙입니다.

(어쩌면, 저부터 이런 군말을 붙이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새삼스레 알고 마는 분도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