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똥풀 우리시대 교사시선 1
김광철 / 고인돌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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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목소리
[시를 말하는 시 1] 김광철, 《애기똥풀》

 


- 책이름 : 애기똥풀
- 글 : 김광철
- 펴낸곳 : 고인돌 (2011.12.1.)
- 책값 : 1만 원

 


  시는 노래입니다. 시를 쓴 사람은 노래를 부르듯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사람은 노래를 듣듯 시를 듣습니다.


  노래는 시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시를 쓰듯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듣는 사람은 시를 듣듯 노래를 듣습니다.


  교사가 시를 쓸 때에는 교사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삶을 시로 들려줍니다. 교사가 아이들과 얼크러지며 빚는 삶을 차분하거나 우렁차게 노래할 때에 시가 태어납니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노래하는 삶일 때에 시가 태어나고, 교사와 학생이라는 옷을 벗고 ‘한 사람으로 만나는 삶’이 있을 때에 시와 같은 노래를 즐겁게 부릅니다.


  교사인 김광철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애기똥풀》(고인돌,2011)을 읽습니다. 참다이 이루는 교육을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하는 김광철 님은, 당신이 쓴 시에서 당신 목소리를 낱낱이 담습니다. 이 나라 교육이 나아가기를 바라는 곧은 길을 생각하며 시를 씁니다. 김광철 님 스스로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돌아보면서 시를 씁니다.


  교육은 더 좋은 교육이나 더 나쁜 교육이 없습니다. 사람은 더 좋은 사람이나 더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날씨는 더 좋은 날씨나 더 나쁜 날씨가 없습니다. 그저 교육이고, 그저 사람이며, 그저 날씨입니다. 받아들이는 가슴에 따라 이 교육을 스스로 좋게 여길 수 있고, 저 교육을 스스로 나쁘게 삼을 수 있습니다. 맞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이 사람은 반가이 어깨동무할 수 있고, 저 사람은 얄궂게 등돌릴 수 있어요. 마주하는 삶에 따라 이 날씨는 나한테 좋다 느낄 수 있고, 저 날씨는 나한테 궂다 여길 수 있어요.


.. 여름날 조밭을 온통 뒤덮던 넌 철천지 원수였다 / 뽑고 또 뽑아도 끝이 없는 너와의 씨름 / 바다로 골짜기로 / 다른 애들처럼 물놀이 가고 싶은 소년의 꿈도 / 여지없이 짓밟은 너였지 / 해도 해도 끝이 없던 농사일에 / 시골 소년의 여름날은 / 차코 없는 사슬로 묶인 교소도 ..  (바랭이)


  교사 김광철 아닌 어린이 김광철한테 ‘어린 날 조밭’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조밭을 둘러싼 바랭이풀에 허덕이느라 바랭이풀이 끔찍하게 싫다는 생각만 불러일으키는 곳이었을까요. 조밭에서 낫으로 조를 꺾으면서 흘리던 땀이나 올려다보던 하늘이나 내려다보던 흙은 어떻게 느꼈을까요. 한 사람이 흙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조밭에는 조와 바랭이풀만 자라지는 않았겠지요. 다른 들풀이 자랐을 테지요. 때로는 들풀에서 들꽃이 피었을 테고요. 밭뙈기는 조밭만 있지 않았겠지요. 무와 배추를 심은 밭이 있었을 테고, 감자와 고구마를 심은 밭이 있었겠지요.


  조밭은 지구별에서 어떤 흙땅이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시골마을 조밭은 온누리에서 어떤 삶터였을까 곱씹어 봅니다. 조밭을 일구던 손길은 어떠한 꿈을 꾸던 손길이었고, 이 조밭에서 거둔 곡식을 먹는 사람은 어떠한 마음밭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올해에도 팔당대교 아래에서 고니들을 만났다 / 저 고니들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장소에서 만났다 / 쟤들은 그 먼 길 / 만 리 먼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도 찾아온다 // 나는 그저께 차 몰고 찾아갔던 친구 집을 다시 찾았다 / 분명 저 골목 같은데, 그리 들었더니 그 길이 아니더라 / 또 다른 골목길을 더듬는다 / 그러기를 수차례, 결국은 친구를 전화로 불러내고야 말았다 ..  (철새)


  하나를 보려고 하면 언제나 하나를 봅니다. 하나를 보려고 하니까 하나를 보는데, 하나를 보느라 막상 하나를 둘러싼 여럿이나 다른 하나를 못 보곤 합니다. 하나를 바라보면서 하나를 마음껏 바라보고, 하나를 둘러싼 모두를 살가이 쓰다듬는다면, 내 삶을 이루는 모든 사랑을 아름다이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시를 쓰는 교사 한 사람한테는 ‘고니’ 한 마리나 열 마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본 고니가 올해에 보는 그 고니일까요. 지난해에 본 고니는 지지난해에 본 그 고니일까요.

  사람은 고니를 바라보며 ‘고니’라고만 말합니다. ‘고니 아무개’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참새를 바라볼 때에도, 직박구리나 제비를 바라볼 때에도, 메뚜기나 개구리를 바라볼 때에도 ‘참새 아무개’나 ‘개구리 아무개’라고 말하지 못해요.


  어쩌면, 사마귀가 사람을 바라볼 때에 ‘그저 다 같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마귀를 바라보는 사람이 ‘그저 다 같은 사마귀’라고 여기면, 사마귀도 사람을 그저 다 같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보리밭 보리를 바라보며 다 같은 보리가 아니라, 다 다른 목숨인 보리씨앗이 다 다른 목숨인 보리알을 맺는다고 느낀다면, 보리밭을 가득 메운 어여쁜 보리들은 사람을 바라보며 다 다른 사람들하고 어깨동무하는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매미 노랫소리를 듣고, 풀벌레 노랫소리를 들으며,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며 듣는 노랫소리는 늘 다릅니다. 무논 앞에 서서 개구리들 노랫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개구리마다 목소리가 달라요. 다 다른 목소리는 다 다른 바람결에 실려 내 귓결로 곱게 얼크러지며 스며들어요.


.. 참다못해 기어이 그 녀석의 숟가락을 뺏어 들고 / 밥 한 술 뜨고 그 위에 김치 한 조각 얹어 놓고는 / 기어이 고 녀석 입 속에 밀어 넣고야 만다 / 억지로 받아물기는 하지만 / 여전히 꼭 다문 입술 / 내리깔고 있는 눈길 / 얼르고 달래 보며 / 구슬려도 보고 협박도 해본다 / “얼른 먹으면 놀이터에서 10분 동안 놀다 오게 해 줄게.” / “이거 얼른 먹지 않으면 내일은 굶긴다.” / “한국 사람은 김치를 먹어야지. 너흰 미국 사람 아니잖아.” / 그래도 아랑곳없다 ..  (병아리들의 점심)


  나는 시를 즐겁게 읽고 싶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높이는 시가 아니라, 사랑을 나누려는 시를 읽고 싶습니다.


  목소리를 높인들 시가 되지 않습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른대서 노래가 되지 않습니다. 옥타브가 높아야 듣기 좋은 노래나 멋진 노래가 되지 않습니다. 악기를 많이 타야 놀라운 노래가 뛰어난 노래가 되지 않습니다. 노래는 노래다울 때에 노래입니다. 노래는 결을 살리고 무늬를 빛낼 때에 노래입니다. 곧, 시는 시다울 때에 시입니다. 시다운 결을 살리고 시다운 무늬를 빛낼 때에 시입니다. 이렇게 가야 하거나 저렇게 가야 한다고 목청을 외친다고 시가 되지 않습니다.


  왜 아이한테 밥을 억지로 먹여야 할까요. 왜 아이를 윽박질러야 할까요. 한국사람이 김치를 꼭 먹어야 할까요. 한국사람이 김치를 못 먹을 수 없을까요.


  한겨레가 김치를 먹은 지는 얼마 안 되었습니다. 한겨레는 이천 해나 오천 해 앞서에도 김치를 먹지는 않았습니다. 일만 해나 오만 해 앞서 한겨레는 무엇을 먹었을까요. 일만 해나 오만 해 앞서 먹던 무언가를 오늘날 먹어야 비로소 한겨레다울까요. 오백 해나 백 해 앞서 널리 먹던 무언가를 오늘날 먹어야 바야흐로 한겨레다울까요.


  이주노동자가 낳은 아이도 한국사람이고 한겨레입니다. 한국땅에서 태어나지 않고, 중국이나 러시아나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도 한국사람이고 한겨레입니다. 어느 사람은 김치 같은 먹을거리를 잘 먹지만, 어느 사람은 김치 같은 먹을거리가 몸에서 안 받습니다. 어느 사람은 소젖을 잘 마시지만, 어느 사람은 소젖이 몸에서 안 받습니다. 밀가루가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찬것이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달걀이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다 다른 사람은 다 다른 밥으로 다 다른 삶을 이룹니다.


  아이가 김치 한 조각을 먹고 나서 ‘놀이터에서 고작 10분 놀’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즐거울까요. 아이는 혼자 또는 여럿이서 놀이터에서 어떤 놀이를 10분 동안 할 만한가요. 오늘날 아이들은 공차기나 줄넘기를 빼고, 흙놀이나 고무줄놀이나 뜀뛰기놀이 들을 얼마나 즐거이 누리는가요. 학교는 아이들한테 어떠한 터전일까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삶을 얼마나 바라보거나 느끼면서 제 삶을 씩씩하거나 튼튼하거나 싱그럽거나 해맑게 북돋우는가요.


  아이들이 따르거나 다가오도록 하자면, 교사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 됩니다. 아이들이 믿거나 찾아오도록 하자면, 교사 스스로 사랑스럽게 살아가면 됩니다.


  목소리 높이는 교사는 아이들한테 알맞지 않습니다. 지식과 정보를 주워섬기는 교사는 아이들한테 걸맞지 않습니다. 이론과 비평을 잘 할 줄 아는 교사는 아이들한테 반갑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함께 놀고 함께 먹으며 함께 누릴 수 있는 어버이와 교사가 반갑습니다. 아이들은 함께 사랑하고 함께 꿈꾸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어버이와 교사가 즐겁습니다.


.. 아니다 / 그 길은 정의가 아니기 때문에 아니다 / 진정으로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 그들 욕심의 반은 내려놓아야 한다 / 그 엄혹한 자유당, 공화당 치하에서도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 / 그 개천 자체를 송두리째 메워버리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 물길은 터야 한다 / 누구나 노력하면 할 수 있느는 희망을 줘야 한다 ..  (곽교육감에게도 비추고 있을 팔월 열나흘 달)


  교사 김광철 님은 《애기똥풀》이라는 시집을 내놓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는지 궁금합니다. 교사 김광철 님은 ‘목소리 높이기’ 아닌 ‘삶을 사랑하기’로 시를 쓰는 길을 듣거나 배우거나 마주하거나 찾아나선 적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교사한테서 지식을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교사한테서 삶을 배웁니다. 일그러진 삶을 배우든 아름다운 삶을 배우든,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교사한테서 삶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집에서 제 어버이와 살아가며 삶을 배웁니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아이들은 삶을 배웁니다. 삶 아닌 다른 무엇을 배우지 않아요.


  곧, 삶을 나누는 학교요 집이고 마을입니다. 그러니까, 삶을 쓰는 시요 소설이며 수필입니다. 삶을 노래합니다. 삶을 춤춥니다. 삶을 그립니다. 삶을 찍습니다.


  어떤 삶을 사랑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어떤 삶을 사랑하면서 춤을 추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고 싶은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교사이자 시인으로 살아가려 한다면, 무엇보다 어떤 삶을 사랑하면서 시를 쓰고 아이들 앞에 서고 싶은가를 생각할 노릇입니다.


  시집 《애기똥풀》에서는 바로 이 대목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틀은 시집이지만, 정작 시집이 시집다울 몫인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김광철 님은 교사로 지내는 나날을 시로 썼다고 생각할 테지만, 그야말로 시는 ‘목소리’ 한 가지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글은 목소리예요. 모든 말은 목소리예요. 어떤 글이거나 말이거나 모두 목소리예요. 나는 늘 내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가요. 굳이 ‘나는 이런 목소리를 낸다구!’ 하고 힘주어 되풀이할 까닭이 없어요. 내 살아가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면 이 이야기에서 목소리를 살피고 느끼면서 삶과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려 하지 않고, 온통 목소리로만 꽉 눌러채워 시라는 옷을 입힌다 한다면, 겉보기로는 시라 할는지 모르나, 싯말은 하나도 태어나지 않고 말아요.


  《애기똥풀》은 시집이 되지 못해요. 꼴은 시집이라 하지만, 시집다운 목소리가 없어요. 모양새는 시집이라 할 터이나, 시집으로서 삶을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지 못해요. 겉모습은 시집이 되겠지만, 참교육이든 참교사이든 참배움이든 참꿈이든 참지식이든 참얘기이든,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 되는가 하는 갈래조차 들려주지 못해요.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리는 기쁜 사랑을 시로 적을 수 있기를 빌어요. 맑게 빛나는 냇물을 손으로 떠서 달콤하게 마시는 예쁜 꿈을 시로 노래할 수 있기를 빌어요. (4345.8.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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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8-07 18:26   좋아요 0 | URL
어려운 얘기이지만,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할 얘기이네요.

시를 그냥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시의 품격과 시를 읽는 사람의 품격을 생각해보게 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꾸벅(__)

숲노래 2012-08-07 19:33   좋아요 0 | URL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지만,
어렵지 않고 쉽다고 생각하면 쉽구나 싶어요.

'시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부터
스스로 잘 갈무리하고 나서
시를 쓸 때에
삶이 빛나는 노래가 되리라 느껴요...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 - 조병준 詩의 집
조병준 지음 / 샨티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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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있는 하느님과 시
[시를 노래하는 시 26] 조병준,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

 


- 책이름 :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
- 글 : 조병준
- 펴낸곳 : 샨티 (2007.9.15.)
- 책값 : 9000원

 


  마당에 걸상을 놓고 앉아 파리를 잡으며 시를 읽습니다. 웬 파리가 이렇게 달라붙나 싶어 한 마리 열 마리 두 마리 스무 마리 끝없이 잡습니다. 파리는 무언가 제 먹이가 있으니 떼를 지어 붕붕 날아다니겠지요.


  파리채에 얻어맞아 목숨을 잃은 파리는 마당에 톡톡 떨어집니다. 마당에 파리 주검이 하나둘 늘면 이제 개미가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개미는 파리 주검을 혼자 붙잡고 나르기도 하고, 둘이나 여럿이 함께 들어 나르기도 합니다. 작은 개미는 파리 주검에 잔뜩 달라붙어 파리 주검을 조각조각 뜯어서 나르곤 합니다. 개미들은 모기도 잠자리도 나비도 조각조각 잘라서 저희 집으로 나릅니다. 개미들은 벌레 주검이 생기면 곧 냄새를 맡고는 몰려들어, 이들 주검을 깨끗이 치웁니다.


.. 꽃무늬 벽지 뒤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 베니어합판 뒤로 꿈꾸는 사람들이 들린다 ..  (슬픈 여인숙)


  처마 밑에 어느새 생긴 거미줄이 퍽 큽니다. 거미는 처마랑 빨래줄 사이에 하얀 줄을 드리웁니다. 거미는 제법 커서 마치 하늘을 붕 뜬 채 걸어다니는 듯 보이곤 합니다. 어느 날 나비 한 마리 거미줄에 걸립니다. 나비는 꽤 크게 몸부림을 치고 거미가 가까이 다가섭니다. 그런데 나비가 거미줄에서 풀려나 멀리멀리 날아갑니다. 함께 바라보던 옆지기는 거미가 줄을 끊어 나비를 풀어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럴까, 그럴까, 생각합니다. 거미한테 너무 큰 벌레가 줄에 붙으면 줄이 몽땅 끊어지니 풀어 줄 수 있겠지요.


  지붕 위부터 퍽 높은 전깃줄 사이에 이어진 거미줄에도 잠자리가 걸립니다. 이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는 풀려나지 못합니다. 곳곳에 거미줄이 많고, 곳곳에 잠자리나 나비가 곧잘 걸립니다. 엊그제에는 빗물받이와 처마 사이에 새로 생긴 거미줄에 잠자리가 걸렸기에 손가락으로 줄을 끊어 풀어 줍니다. 거미도 잠자리도, 또 나비도 파리도, 또 개미도 만만하지 않은 삶일는지 모릅니다. 개미는 흙땅 큰돌 밑에 집을 짓곤 하는데, 내가 큰돌을 골라 옮길 때면 개미들은 저희 집 지붕을 잃었다며 수천 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몰려나와 어지러이 헤매며 새 터로 옮기곤 합니다.


  나는 돌을 옮길 뿐이지만, 개미는 집을 잃은 셈입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들길을 달릴 뿐이지만, 때때로 나뭇가지 사이 거미줄을 머리나 자전거로 끊곤 합니다. 나는 밭뙈기 풀을 뽑지만, 밭뙈기 풀숲에 깃들던 벌레는 보금자리를 잃습니다.


  내 작은 움직임이 커다란 물결이 됩니다. 내 이웃이나 동무들 작은 움직임이 커다란 물결이 되어 나한테 찾아들곤 합니다. 나는 나대로 물결이고, 옆지기와 아이들은 서로서로 저마다 다른 물결입니다. 물결과 물결이 만나 출렁거리기도 하고, 살가이 얼크러져 녹아들기도 합니다. 여러 물결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고, 여러 물결은 골을 부리듯 부딪히며 큰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 나뭇잎들도 비를 덮고 따뜻했을 거야 ..  (희생)


  집안에 들어온 모기를 두 손바닥을 짝 부딪혀 잡습니다. 피가 팍 튀는 모기가 잡히기도 하고, 새끼손톱보다 큰 모기가 잡히기도 합니다. 네가 먹은 피는 누가 피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네 커다란 덩치로 우리 피를 얼마나 빨아먹으려 했니 하고 묻습니다. 흐르는 물에 손을 씻습니다.


  내 이웃이든 먼 이웃이든 사람들은 으레 모기향을 태우거나 모기약을 뿌립니다. 모기를 좇거나 잡으려고 갖가지 약을 씁니다. 약을 써서 모기가 해롱거립니다. 그리고, 약을 쓰는 만큼 모기향이든 모기약이든 사람 몸이나 옷이나 집 곳곳에 천천히 스며듭니다. 모기약은 모기도 먹고 사람도 먹습니다. 모기향은 모기도 떨어뜨리고 사람도 떨어뜨립니다.


.. 나무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서성이다 돌아갔다 / 길 잃은 햇살과 강물과 빗줄기들이 / 잠시 수군거리다 떠나기도 했다 ..  (숲으로의 여행)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면 소재지를 다녀오는 길에 딱정벌레 한 마리 길 한복판에 뒤집힌 채 바둥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꽤 큰 녀석이 어쩌다 여기에서 바둥거리나 싶어 걱정스럽습니다. 자전거가 딱정벌레를 안 밟도록 바퀴를 살살 옆으로 비껴 지나갑니다. 조금 달리다가 아무래도 걱정이 가시지 않습니다. 딱정벌레가 스스로 잘못해서 길 한복판에 뒤집혔는지 모르나, 시골길 자동차 뜸한 곳이라 하더라도 때때로 지나가던 자동차한테 치여 이곳에 뒤집혔는지 모릅니다. 자동차한테 치이지 않았더라도 자동차가 일으킨 바람에 그만 뒤집혔을 수 있어요. 내 자전거는 딱정벌레를 안 밟고 지나갔으나, 내 뒤를 따를 자동차는 그냥 밟고 지나가겠지요.


  뙤약볕 내리쬐는 길을 돌아갑니다. 딱정벌레도 이 뙤약볕에 고달프리라 생각합니다. 날개를 살살 건드려 뒤집어 주려 하는데 영 기운을 못 씁니다. 안 되겠네 싶어, 손가락 하나를 뻗어 딱정벌레가 내 손가락을 붙잡도록 합니다. 딱정벌레 겉껍질은 눈부시게 반짝이는 짙푸른 빛깔입니다. 꼭 짙푸른 빛깔 보석 같습니다. 아이들한테 딱정벌레를 보여주고는 길가 소나무 줄기 한쪽에 내려놓습니다. 그늘진 곳에서 쉬든, 이곳에서 먹이를 찾든, 이제 딱정벌레 스스로 살 길을 찾기를 바랍니다.


  다시 자전거를 달립니다. 이제 홀가분합니다. 파랗게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하얗게 빛나며 파란하늘을 물들이는 구름을 바라봅니다.


,, 우리 이모 / 처자식 있는 남자에게 속아 시집가 / 마심이 언니 낳고 서울로 올라와 / 바지락 까서 마심이 언니 시집보내고 / 콩나물 팔아서 마심이 언니 신랑 사철 새 옷 해 입히고 / 마심이 언니 벽제에서 태운 날부터 / 두부 팔아서 / 매일매일 술 마셨다 ..  (우리 이모, 부잣집에 태어나러 가네)


  바람이 불어 후박나무를 찰랑입니다. 바람이 불어 논배미 볏포기를 흔듭니다.


  후박나무는 바람 따라 흔들리면서 열매 떨어진 꽃받침을 하나둘 마당에 떨굽니다. 빨간 꽃받침은 바다에서 자라는 산호 가지를 닮습니다.


  바람 부는 들판에 서면 쏴아아 쏴르르 하며 볏포기끼리 서로 잎사귀 부딪거나 스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다에 설 때에 듣는 물결 소리랑 볏포기가 바람에 살랑이며 낼 때에 듣는 소리랑 비슷하구나 싶습니다.


  잠투정을 하는 작은아이를 안고 마루에 서서 깜깜한 바깥을 바라보면 풀벌레 노랫소리 고즈넉하게 들립니다. 이 풀벌레는 무슨 노래일까, 하고 물으며 아이를 바라보면 아이는 커다란 눈을 더 커다랗게 뜨고는, 응 응, 하고 되묻습니다. 새로 들리는 풀벌레 소리에 따라 고개를 까딱까딱 돌립니다.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가 찾습니다. 한여름이 되어 개구리 노랫소리는 거의 잦아들었지만, 풀벌레 노랫소리 사이에 자그맣게 섞여 함께 들리기도 합니다. 풀벌레와 개구리는 우리 집 작은아이더러 예쁜 아이야 이 저녁에 예쁘게 자야지 아직 안 자고 무엇을 하니, 하고 묻습니다. 작은아이한테 풀벌레들 이야기를 들려주며 천천히 달랩니다.


.. 나는 그저 / 내 살색이 보호색이 될 수 없었던 나라들에서 / 내게 잠시 친절했던 현지인들의 얼굴을 기억했다 ..  (그의 살색은 연한 밀크초콜릿 색이었다)


  조병준 님 시집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샨티,2007)을 읽습니다. 파리를 잡다가 읽고, 모기를 잡다가 읽으며, 잠자리 날갯짓 소리를 듣다가 읽습니다. 식구들 먹을 풀을 뜯다가 질경이 잎사귀 뒤에 오도카니 붙은 작은 알을 바라보던 느낌을 떠올리며 읽습니다. 마당 한켠 꽃밭에서 줄기를 뻗은 수박풀은 줄기가 꺾여 간당간당하더니 그예 다시 기운을 차려 씩씩하게 잎사귀를 키웁니다. 수박풀이 대견하구나 싶어 잎사귀를 살살 쓰다듬습니다. 수박풀 까끌까끌한 느낌을 되새기며 시를 읽습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는 이야기가 시 하나로 태어납니다. 오늘 하루 꿈꾸는 이야기가 시 하나로 거듭납니다. 오늘 하루 사랑하는 이야기가 시 하나로 옷을 입습니다.


.. 아버지, 세 분 작은아버지 모시고 / 됫병 소주 들고 / 큰할아버지, 할아버지, 두 분 작은할아버지 / 무덤들 인사 다닐 때 / 어쩌면 무덤마다 / 돗나물, 취나물, 머위, 고사리, 삘기, 익모초, / 지천으로 널렸을까 ..  (지팡이 아버지)


  무더운 낮이 지나면 조금은 시원한 밤이 찾아옵니다. 조금은 시원한 밤이 지나면 다시 무더운 낮이 찾아옵니다. 아침에는 고운 햇살이 온누리를 밝힙니다. 저녁에는 포근한 달빛이 온누리를 감쌉니다. 낮에는 들판에서 고운 꽃송이와 풀잎을 바라봅니다. 밤에는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빛을 바라봅니다.


  고운 꽃과 풀은 내 마음에 곱게 드리웁니다. 반짝이는 별은 내 가슴에 반짝이며 깃듭니다. 내 손길은 언제나 고울 수 있습니다. 내 눈길은 늘 반짝일 수 있습니다. 내 두 다리는 언제나 곱게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습니다. 내 두 눈은 늘 반짝이면서 착하게 둘레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시듯 / 그의 어머니께서도 즐거운 세상 이야기를 / 아들에게서 얻어듣는 저녁을 / 소박하게 바라시지만, 오늘도 / 이미 밖에서 읽었던 신문을 뒤적이며 / 어머니의 질문들을 수저 소리로 떠넘기고 / 그는 밥상과 함께 어머니를 내보낸다 ..  (안개마을 사람들)


  내 마음은 어느 길을 가고 싶은가 하고 곰곰이 돌아봅니다. 손끝이 다치거나 손가락에 피가 맺혀도 씩씩하게 빨래를 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집일을 하는 나는 누구인가 하고 가만히 헤아립니다. 마음이 움직여서 하는 집일인지, 몸이 더 기운을 내며 하는 집일인지 헤아립니다. 아이한테 궂은 말을 윽박지르는 나는 마음이 움직이는 나인지 몸이 움직이는 나인지 생각합니다. 아이한테 따숩게 자장노래를 부르거나 놀이노래를 부르는 나는 마음이 이끄는 나인지 몸이 이끄는 나인지 곱씹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 나일까요. 나는 어떻게 꿈꾸고 싶은 나일까요. 나는 어떻게 사랑하고 싶은 나일까요.


  나는 어떤 밥을 어떻게 먹고,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고 싶은 나일까요. 어쩌면 나는 내 삶도 꿈도 사랑도 한 번조차 돌아보지 않으면서 오늘까지 이르지 않았을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나는 내 길도 집도 넋도 찬찬히 헤아리지 않으면서 오늘까지 왔을 수 있구나 싶습니다.


.. 한겨울에도 누이들은 / 밤에야 마음 놓고 빨래를 할 수 있었다 / 식구들을 모두 재우고 / 빨래처럼 얼어버린 누이들도 잠에 들었다 ..  (겨울가족)


  시를 쓰는 조병준 님은 스스로 ‘지구별 떠도는 집’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조병준 님 마음이 지구별을 떠도는 집일까요, 조병준 님 몸이 지구별을 떠도는 집일까요. 마음에 따라 몸이 움직여 지구별을 떠도는 삶일까요, 몸에 따라 마음이 움직여 지구별을 떠도는 삶일가요.


  사람은 홀가분하게 온누리를 마실하는 넋으로 이루어진 목숨일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몸뚱이를 놀려 두 다리로 땅을 디디고 두 손으로 이것저것 붙잡으면서 온누리를 눈과 귀와 코와 머리로 겪는 목숨일까 헤아려 봅니다.


  시골집 마루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는 지구별과 나를 생각합니다. 자전거수레에 아이들을 태우고 들길을 달리면서 온누리와 나를 헤아립니다.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기다릴까요. 내 마음을 이루는 하느님은 내가 어떻게 꿈꾸기를 기다리며 지켜볼까요. 내 몸에 깃든 하느님은 내가 어떻게 사랑하기를 기다리며 지켜보고는 따순 햇살이 될까요.


  이제 시집을 덮습니다. 온통 땀투성이가 된 두 아이 옷을 벗기고 함께 씻습니다. 벗은 옷은 신나게 빨고, 마당 꽃밭 한켠에서 자라는 하얀 콩꽃을 바라봅니다. (4345.7.3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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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거미의 사랑 창비시선 259
강은교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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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바라는 소리
[시를 노래하는 시 25] 강은교, 《초록 거미의 사랑》


 

- 책이름 : 초록 거미의 사랑
- 글 : 강은교
- 펴낸곳 : 창비 (2006.2.6.)
- 책값 : 8000원

 


  풀거미가 팔등에 내려앉습니다. 언제 내 팔등에 내려앉았나 싶은데, 아마 풀밭에서 풀을 뜯는 동안 풀잎에서 내 팔등으로 옮겼는지 모릅니다.


  풀밭에는 풀이 있습니다. 흙이 있는 땅에는 풀이 돋고, 풀이 돋아 쑥쑥 자라다가 시들어 죽고는 스스로 거름이 되는 동안 흙이 좋아집니다. 풀뿌리는 흙을 촉촉하고 곱게 붙잡습니다. 풀잎과 풀씨는 흙을 기름지고 예쁘게 어루만집니다.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풀잎을 뜯을 때에, 풀잎에 붙어 한삶을 누리는 자그마한 벌레를 들여다보곤 합니다. 참으로 많은 벌레가 풀잎 사이사이 보금자리를 마련합니다. 참으로 많은 벌레가 풀잎을 먹이로 삼거나 마을로 삼습니다. 사람한테는 고작 풀포기 몇일는지 모르나, 작은 풀벌레한테 풀포기 몇은 널따란 마을입니다.


.. 너의 가슴에서도 철컥 또 너의 가슴에서도 철컥 도시엔 철컥거리는 소리가 마치 우레 소리 같았다니까…… 도시는 철컥 박물관이었어 ..  (‘쇳대박물관’을 나와)


  내 팔등에 내려앉은 풀거미는 몸이 온통 풀빛입니다. 이토록 해맑게 풀빛일 수 있을까 싶도록 풀빛입니다. 처마 밑부터 빨래줄이나 빨래대로 자꾸자꾸 줄을 이어 집을 짓는 거미는 으레 새까맣거나 짙은 흙빛입니다. 이들은 덩치가 꽤 큽니다.


  때때로 몸빛이 말간 거미를 봅니다. 이들 말간 거미는 몸이 그예 물빛입니다. 물처럼 속이 환히 들여다보입니다. 머리도 몸도 다리도 말간 물빛입니다. 물빛 거미가 내 팔등에 내려앉아 걸음을 재촉할 때면, 어쩜 이렇게 말간 물빛 몸으로 살아갈 수 있나 싶어 한참 바라보곤 합니다.


  파리나 모기는 풀숲에서 살아도 풀빛이나 물빛이지 않으나, 거미는 풀빛으로 살거나 물빛으로 살아가곤 합니다.


.. 목도리를 잃어버렸다 / 며칠을 눈에 밟혔다, 그러나 아마도…… // 그것은 지금 누군가인가의 목을 한창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  (목도리)


  뭉게구름이 피어오릅니다. 새털구름이 흩날립니다. 매지구름이 다가옵니다. 먹구름이 낍니다. 때때로 아주 낮게 깔려 땅바닥이나 바닷가를 기어가는 구름을 만납니다. 내가 구름 속에 깃들면, 그러니까 구름이 낮게 깔려 땅바닥을 기어갈 적에 내가 구름하고 만나면, 나는 아주 가느다란 물방울 무늬를 봅니다.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면 구름이고, 가까이에서 한몸으로 섞이면 뿌연 물방울입니다. 멀찍이 떨어졌을 적에는 하얀 빛깔이고, 가까이에서 하나로 얼크러지면 맑은 물빛입니다.


  하늘을 흐르는 하얀 구름을 바라봅니다. 땅을 기고 멧자락을 넘으며 들판을 덮는 맑은 구름을 바라봅니다.


.. 어느날 간장 한 병읠 샀다. 유난히 검은 그 살빛, // 검은 살빛의 그 에쎈스를 숟가락에 담는다, 미역국에 넣는다 ..  (간장의 노래―이렇게도 써본)


  해를 바라봅니다. 새벽에 맞이하는 해는 새빨갛습니다. 아침에 맞이하는 해는 노랗습니다. 낮에 맞이하는 해는 하얗습니다. 그런데, 새벽녘에는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하늘을 베풉니다. 아침녘에는 노란빛으로 온누리를 밝힙니다. 낮에 접어들면 눈부시도록 하얗거나 해맑게 비춥니다.


  햇빛이 어리는 나뭇잎 빛깔이 차츰 바뀝니다. 새벽녘 잎빛이랑 아침녘 잎빛이랑 낮녘 잎빛은 저마다 다릅니다. 사람들이 으레 말하는 푸른 잎사귀란 거의 가장 맑은 한낮에 푸르게 보이는 잎빛이라 할 텐데, 한낮에 푸르게 보이는 잎빛 또한 때에 따라 빛깔이 달라요. 햇빛이 반짝일 때에는 나뭇잎도 반짝입니다. 햇빛에 바람빛이 어리면 나뭇잎은 한결 맑게 반짝입니다. 햇빛과 바람빛에 구름빛이 섞이면 나뭇잎 빛깔은 더 맑으면서 곱게 환합니다.


  나는 나뭇잎이나 풀잎을 딱히 어떠한 빛깔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저 잎빛이라 말할 뿐입니다. 더욱이 봄날 잎빛이랑 여름날 잎빛이랑 가을날 잎빛이 달라요. 잎빛 한 가지를 놓고, 새벽잎빛·아침잎빛·낮잎빛처럼 말하는 한편, 봄잎빛·여름잎빛·가을잎빛러처럼 말합니다.


.. 어둠들에게 이 무덤의 빛은 / 얼마나 클까 / 이 무덤의 도시들, 그림자들에게 ..  (나는 늘―심연 속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 넷)


  활짝 웃습니다. 빙긋 웃습니다. 살짝 웃습니다. 까르르 웃습니다. 웃음마다 다 다른 빛깔이 묻어납니다. 슬프게 울 적에도, 섧게 울 적에도, 아프게 울 적에도, 고단하게 울 적에도, 때에 따라 다 다른 빛깔이 드러납니다.


  웃음은 웃음빛이겠지요. 눈물은 눈물빛이겠지요. 스스로 꾸리는 삶에 따라 삶빛이 다릅니다. 좋아하는 삶을 누리면 좋아하는 삶내음이 곱게 스며든 삶빛이 해맑습니다. 달갑지 않은 삶으로 억지스레 휘둘리듯 내몰리면 고달프고 힘겨운 삶내음이 잔뜩 밴 삶빛이 무겁습니다. 찌뿌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나누는 사랑빛입니다. 풋풋한 사랑빛을 나누기도 하고, 어여쁜 사랑빛을 나누기도 합니다. 상큼한 사랑빛을 나누기도 하며, 달콤한 사랑빛을 나누기도 합니다.


  모든 삶은 빛깔을 띱니다. 옅은 빛이든 짙은 빛이든 맑은 빛이든 흐린 빛이든 좋은 빛이든 궂은 빛이든, 스스로 일구려는 꿈에 걸맞게 빛을 띱니다.


.. 강물은 원래 눈물이야. 깊고 깊은 눈물이야 / 거기 살도 빠져 있고, 피도 빠져 있고, / 그래서 강물엔 원래 피고름이 흐르는데 아무도 그걸 모르지 ..  (낙동강-심연에 비추는 풍경 넷)


  사람들 스스로 일구는 삶에 따라 하늘빛이 달라집니다. 사람들 스스로 숲에 깃드는 살림일 때에는 언제나 눈부시게 파란 하늘빛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건물을 짓고 건물에 깃드는 도시살이라 할 때에는 자꾸자꾸 뿌얘지고 매캐해지며 잿빛이 되고 마는 하늘빛입니다.


  나 스스로 만드는 하늘빛입니다. 공장이 만들지 않고 발전소가 만들지 않습니다. 고속도로가 만들지 않고 삽차나 밀차가 만들지 않아요. 내가 살아가는 터전에서 내가 꾸리는 살림에 따라 나 스스로 만드는 하늘빛이에요. 몇몇 정치 집권자나 경제 우두머리가 무너뜨리거나 망가뜨리는 하늘빛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바라거나 꾀하는 삶에 따라 달라지는 하늘빛입니다. 나 스스로 정치 집권자나 경제 우두머리 생각에 휩쓸려 움직이니까 하늘빛이 뿌얘지거나 새까매집니다. 나 스스로 내 삶빛을 누리지 않으니 어두운 밤에는 별을 하나 못 보는 슬픈 하늘빛이 됩니다.


  별하고 인사하는 별하늘빛을 누리려 한다면, 구름하고 노래하는 구름하늘빛을 누리려 한다면, 무엇보다 내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삶을 고치고, 내 삶을 갈고닦으며, 내 삶을 바꿀 때에, 시나브로 하늘빛이 차츰 맑으면서 고운 빛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대통령을 갈아치우더라도 나 스스로 내 삶을 갈아치우지 않으면 언제나 어둡고 퀴퀴하며 지저분한 하늘빛을 짊어져야 합니다.


.. 그렇다. 이 시대에 / 정말 시는 넘쳐나는구나. / 평화를 노래하는 시들이 / 전쟁처럼 도시에 넘쳐나는구나 ..  (어떤 회의장에서―L.J.N.을 추모하며)


  강은교 님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창비,2006)을 읽습니다. 싯말이 넘쳐난다는 때에 나온 시집을 읽습니다. 강은교 님 말이 아니더라도 싯말은 언제나 넘쳐났습니다. 왜냐하면, 싯말도 넘치고 사람도 넘치며 돈도 넘치거든요. 문화도 넘치고 예술도 넘치며 신문도 넘쳐요. 국회의원도 넘치고 책도 넘치며 아파트도 넘쳐요. 자가용이 넘치고 대학교가 넘치며 회사원이 넘쳐요. 온누리 온갖 것이 넘치는 마당에 싯말이라고 안 넘칠 까닭이 없어요. 글쟁이가 넘치고 그림쟁이가 넘치며 사진쟁이가 넘쳐요. 그저 넘치기만 해요.


  그런데 한 가지, 참말 안 넘치는 자리가 있으니, 시골이 안 넘치고 숲이 안 넘쳐요. 시골사람이 안 넘치고 시골아이가 안 넘쳐요. 전쟁무기는 넘치지만 평화는 안 넘쳐요. 졸업장과 자격증은 넘치지만 사랑과 믿음은 안 넘쳐요. 연속극과 영화는 넘치지만 이야기는 안 넘쳐요. 인터넷과 컴퓨터는 넘치지만 꿈은 안 넘쳐요. 은행계좌와 연금과 보험은 넘치지만, 정작 즐거움과 웃음은 안 넘쳐요.


.. 그러나 시는 결코 잘 쓰는 것이 아니다. / 시는 결코 아름답게 쓰는 것이 아니다. / 시는 나무와 같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뿌리깊은 것이다. / 시는 나무와 같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 잎들 세상에 출렁이는 것이다 ..  (어떤 회의장에서―L.J.N.을 추모하며)


  물질이 넘치고 재산이 넘칩니다. 물건이 넘치고 사상과 철학과 학문이 넘칩니다. 문학이 넘치고 예술과 평론이 넘칩니다. 그렇지만, 삶을 사랑하는 노래는 자꾸 사그라듭니다. 그래, 삶을 꿈꾸는 춤사위는 자꾸 잦아듭니다. 그러니까, 삶을 이야기하는 싯말은 자꾸 자취를 감춥니다.


  사랑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를 씁니다. 사랑을 꿈꾸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를 읽습니다. 사랑을 빛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를 새로 씁니다.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를 새로 읽습니다.


  풀거미는 풀숲에서 풀빛으로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어떤 빛깔로 살아가나요. 나는 어디에서 어떤 빛과 소리와 내음을 나누며 살아가나요.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에는 사랑을 바라는 소리가 고즈넉하게 깔립니다. (4345.7.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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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애지시선 16
김해자 지음 / 애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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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하루를 꿈꾸고 싶어
[시를 노래하는 시 24] 김해자, 《축제》


 

- 책이름 : 축제
- 글 : 김해자
- 펴낸곳 : 애지 (2007.11.15.)
- 책값 : 8000원

 


  궂은 날씨에는 빨래가 안 마릅니다. 하루 내내 두어도 도무지 보송보송해지지 않습니다. 해님이 며칠 비치지 않아도 집안은 축축합니다. 해님이 따사로운 손길을 보내지 않을 때에는 지구별이 살아남을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서로서로 알뜰히 아끼고 사랑하면서 즐거이 얼크러질 때에 비로소 예쁘게 살아갈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사람은 누구나 햇볕을 쬐면서 살아갑니다. 햇볕을 쬐지 못하면 얼굴이며 살갗이며 파리해집니다. 아픈 몸빛이 됩니다. 밥을 먹어 영양소를 몸에 넣더라도, 사람다운 넋을 북돋우는 햇볕을 못 먹을 때에는 자꾸자꾸 몸앓이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날 도시 사회는 사람들이 햇볕을 못 쬐도록 가로막습니다. 버스이든 지하철이든 햇볕하고 동떨어집니다. 시외버스이든 고속버스이든 통유리와 가리개로 햇볕을 막습니다. 건물마다 햇볕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느 건물이든 한낮에도 전기로 등불을 켭니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등불에 익숙해집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 아니더라도 살림집부터 늘 등불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 입시지옥 굴레에 갇히면 시멘트 감옥과 같은 데에서 그저 형광등 불빛에 길들어야 합니다. 학교를 벗어나더라도 학원버스가 학교 문 앞에서 기다리고, 학원은 학교와 똑같이 시멘트 감옥과 같으면서 형광등 불빛만 환합니다.


.. 인천 셋방으로 이사 온 이래 / 목욕한 딸아이 알몸을 뽀송뽀송 감싸주며 / 수천 번 젖고 다시 마르면서 / 서울까지 따라와 두 토막 걸레가 되었던 / 20년의 생애 ..  (인연)


  낮이 없는 도시입니다. 해가 멀쩡히 뜬 낮이라 하더라도 건물이 해를 가립니다. 건물 안쪽은 햇볕도 햇빛도 스미지 못합니다. 전기가 나간다면 건물은 온통 새까맣습니다. 죽음과 같은 어둠이 됩니다. 지하철도 지하상가도 모두 죽음과 같은 어둠입니다. 가게도 회사도 공공기관도 모두 전기를 먹는 형광등 불빛으로 환하게 밝힐 뿐입니다.


  도시에서는 낮이고 밤이고 따로 없습니다. 어디에나 시계가 붙고, 언제라도 시간을 볼 수 있으나, 도시에서는 시계나 시간이 대수롭지 않습니다. 낮 열두 시라도 깜깜할 수 있는 도시요, 밤 열두 시라도 훤할 수 있는 도시입니다.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밤에도 불빛으로 하얀 땅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를 가리켜 문명이요 발전이라고 여기는 듯한데, 더구나 남녘과 달리 북녘은 온통 새까맣다며 비웃거나 불쌍히 여기는 듯한데, 외려 밤에도 낮처럼 환한 남녘땅이야말로 슬프거나 바보스러운 모습이리라 느껴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밤에 쉬지 못한다면, 밤을 밤처럼 누리지 못한다면, 사람들 살아가는 터전은 얼마나 제구실을 한다고 할 만할까요.


.. 양심을 철창에 집어넣는 한 조국이라 부르지 말자 ..  (겨울 편지)


  예쁜 하루를 꿈꾸고 싶습니다. 생각이 빛나고 사랑이 물결치는 하루를 꿈꾸고 싶습니다. 좋은 생각으로 하루를 열어, 좋은 사랑으로 밥을 짓고는, 살붙이하고 예쁘게 나눌 삶을 꿈꾸고 싶습니다. 좋은 웃음으로 말문을 열고, 좋은 이야기로 마음을 북돋우며, 좋은 손길로 따스함을 나눌 삶을 꿈꾸고 싶습니다.


  좋은 햇볕을 누리고 싶습니다. 좋은 햇볕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좋은 햇볕에 내 몸이 알맞게 타고 싶으며, 좋은 햇볕에 빨래가 보송보송 마르기를 바랍니다. 좋은 햇볕에 나무와 풀과 꽃이 푸르게 자라기를 빕니다. 좋은 햇볕으로 좋은 나락이 익어 좋은 사람들 좋은 밥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햇볕을 누리는 사람들이 좋은 사랑을 나누면서 좋은 누리를 일군다면 참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 살로 태어나 살 먹고 살 부벼 살 낳으신 어무이 / 당신이 빚어놓은 이 살로 이 삶 다하도록 살다 / 살 다 벗어던져 아픔 없는 세상에서 만냅시더 고마 ..  (살)


  여름 장마를 맞이합니다. 며칠이고 하늘이 찌부둥합니다. 볕이 들지 않으니 집안이 눅눅합니다. 집안이 눅눅할 뿐 아니라 마당에 내놓는 빨래가 제대로 마르지 않습니다. 해를 보지 못하는 빨래는 바람만으로는 말끔히 마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기계와 저런 장치를 쓰더라도 빨래가 싱그러이 마르도록 할 수는 없어요. 어떤 기계도 햇볕처럼 빨래를 말리지 못해요. 어떤 장치도 해님처럼 풀과 꽃과 나무를 살찌우지 못해요. 어떤 과학도 햇빛처럼 따사로우면서 맑은 빛을 흩뿌리지 못해요. 어떤 기술도 햇살처럼 상큼하면서 아름답지 못해요.


  여러 날 만에 저녁을 앞두고 해가 비춥니다. 아, 좋아라. 아, 고맙구나. 아, 기뻐라. 아, 예뻐라. 방에 두었던 빨래를 몽땅 밖으로 가지고 나옵니다. 둘째 아이가 쉬를 누어 젖은 깔개랑 발닦개를 밖으로 들고 나옵니다. 마당에 죽 넙니다. 해를 바라봅니다. 두 시간쯤 해가 비출 듯합니다.


  둘째 아이가 오줌을 누어 빨래고 쌓은 빨래를 합니다. 신나게 빨래를 하고 신나게 빨랫줄에 넙니다. 다시 해를 바라봅니다. 해를 바라보며 웃습니다. 부디 저녁에도 밤에도 구름이 걷힌 맑은 하늘로 우리 마을 예쁘게 보듬어 주렴, 하고 노래합니다. 밤에 별을 본 지도 오래된 듯한데, 별 좀 구경하게 해 주렴, 하고 속삭입니다.


.. 무덤처럼 컴컴한 골방에서 20년 / 게쉬타포에 쫓기는 안네처럼 살다 늙어간 여자 / 건물이 헐리고 타워팰리스가 들어선다는데 청계천엔 / 고기가 노는 맑은 물도 흐른다는데 손님 끊긴 지 / 오래인 다방 깨진 수족관엔 / 인조 물풀만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데 ..  (황학동 안네)


  집안에 널던 옷가지를 마당으로 내놓고, 아침부터 쌓인 빨래를 말끔히 하고 나니, 낮잠을 자던 첫째 아이가 일어납니다. 살짝 한갓지게 보낼 수 있을까 싶었으나, 이제부터 아이하고 놀아야지요. 그런데 아이는 잠이 덜 깬 모습입니다. 아이더러 졸리면 더 누워서 자도 되고, 다 잤으면 즐겁게 일어나서 놀면 된다고 말합니다. 아이는 조금 더 방바닥에 비비며 뒹굴다가 일어납니다. 아이가 아침을 제대로 안 먹고 노느라 배고플 수 있겠다 싶어, 아버지는 네가 아침에 남긴 밥을 조금 먹었어, 너도 배고프면 네가 아침에 안 먹은 밥을 먹으면 돼, 하고 말합니다.


  아이는 슬금슬금 부엌으로 갑니다. 부엌에 가서 아이가 아침에 남긴 밥을 먹습니다. 아이가 밥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이야 네가 아침에 밥을 차려서 함께 먹을 때에 이렇게 먹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덜 배고프거나 무언가 다른 데에 마음이 있어 아침에 밥을 제대로 안 먹었을 수 있어요. 아이가 밥을 예쁘게 먹도록 어버이로서 예쁘게 이끌어야 했다 할 수 있고요. 더 헤아린다면, 아이가 즐겁게 먹을 만한 밥을 옳게 못 차렸으니 아이가 밥을 제대로 안 먹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즐겁게 먹을 만한 밥차림이 되도록 어버이부터 스스로 밥짓기와 삶짓기를 살가이 못했기에, 이 흐름이 아이한테 고스란히 이어졌을 수 있어요.


  좋은 삶을 생각합니다. 아이하고 누릴 좋은 삶을 생각합니다. 아이하고 나눌 좋은 말을 생각하고, 아이한테 들려줄 좋은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내가 좋은 하루를 누린다면 내 입에서 흐르는 말은 저절로 좋은 말이 될 테고, 내가 좋은 하루를 빚는다면 내 몸사위는 저절로 좋은 몸짓이 될 테지요.


.. 한 집 건너 지하공장 /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 십자약국 골목 파란 대문 / 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 / 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 / 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2과 김정례 ..  (승천)


  시집 《축제》를 읽습니다. 시를 쓴 김해자 님은 “지난날 시는 내게 어렵고 황송한 손님이었다(시인의 말).” 하고 말합니다. ‘황송(惶悚)’은 어떤 뜻일까 싶어 국어사전을 찾아봅니다. “분에 넘쳐 고맙고도 송구하다”를 뜻합니다. ‘송구(悚懼)’는 “두려워서 마음이 거북스럽다”를 뜻한다는데 “‘미안하다’, ‘죄송하다’로 순화”할 말이라는 풀이말이 덧달립니다. ‘분(分)’은 ‘분수(分數)’를 뜻한다는데, ‘분수’는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를 뜻한답니다. 그러니까, ‘황송’이란 “주제에 넘쳐 고맙고도 거북스럽다”를 가리키는 셈입니다.


  시가 어떻게 어렵고 고마우면서도 거북스러운 손님일 수 있을까 싶으나, 스스로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참말 시는 이와 같이 찾아오는 손님이리라 느낍니다. 누구나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시가 자리잡고 소설이 깃들며 수필이 스미겠지요. 기쁘게 여기면 기쁜 시요, 해맑게 여기면 해맑은 시이며, 재미나게 여기면 재미난 시입니다. 슬픔을 달래는 벗으로 여기면 슬픔을 달래는 시입니다. 웃음을 나누는 동무로 여기면 웃음을 나누는 시가 됩니다. 밥처럼 삼으면 밥과 같은 시이고, 노래처럼 삼으면 노래와 같은 시예요.


  삶은 시가 됩니다. 삶은 시로 드러납니다. 삶은 시로 갈무리합니다. 삶은 시로 태어나면서 내 새로운 숨을 불어넣습니다.


  시집 《축제》는 시를 쓴 김해자 님 삶입니다. 김해자 님이 살아온 나날을 적은 시요, 김해자 님 스스로 지나온 발자국을 돌아보는 일기입니다. 일기에는 기쁜 웃음도 적으나 슬픈 눈물도 적습니다. 일기에는 흐뭇한 보람도 적으나 고단한 땀방울도 적습니다. 어느 날에는 연필 쥘 기운마저 없이 건너뛸 테고, 어느 날에는 모처럼 한갓지게 말미를 내어 밀린 이야기를 줄줄이 적겠지요.


  곧, 김해자 님으로서는 하루하루 어려우면서도 고맙고 다시금 거북스러운 하루를 맞이하면서 살아갔으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하루이든 저런 하루이든 김해자 님은 당신 삶을 잔치라 받아들이며 ‘잔치(축제)’라는 싯말을 길어올렸으리라 느낍니다.


.. 선혈이 낭자한 조폭 영화를 보며 / 아름다울 미와 나라 국에 대해 제3자의 본분 내에서 / 진지하게 고찰하며 힘없는 나라의 죄와 / 힘 있는 나라의 정의에 대해 명상했다 ..  (먼 나라)


  나도 내 삶을 들여다본다면 내 하루는 잔치와 같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새롭게 맞이하는 새벽녘은 잔치입니다. 환한 낮이든 구름이 가득한 장마철이든 잔치입니다. 구성진 들새 노랫소리이든 수다스러운 멧새 노랫소리이든 잔치입니다. 어린 아이들 놀음놀이도 잔치요, 이 아이들 치닥거리도 잔치입니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비질이랑 걸레질을 하는 하루도 잔치예요.


  나는 밥잔치를 하고 빨래잔치를 합니다. 놀이잔치이든 노래잔치이든 내 깜냥껏 내 하루를 누리면서 벌입니다. 자전거잔치도 하고 걷기잔치도 합니다. 옆지기는 뜨개잔치를 하고, 서로서로 곧잘 책읽기잔치를 합니다. 읍내로 마실잔치를 다닙니다. 바닷가로 바닷놀이잔치를 떠납니다. 밭흙을 뒤집으며 흙잔치를 합니다. 노랗게 익는 매화나무 열매를 줍거나 따며 열매잔치를 합니다.


  즐거울 때에도 잔치이고, 슬플 때에도 잔치입니다. 홀가분할 때에도 잔치이며, 고단할 때에도 잔치입니다. 아이들 씻기는 하루도 잔치예요. 아이들 손발톱을 깎이는 하루도 잔치예요. 어느 하나 잔치이고, 어느 하나 잔치 아닐 수 없습니다.


.. 전봇대마다 취업공고판마다 기웃거리던 길 / 한 줄에 꿰인 호박꼬지처럼 줄줄이 앉아 작업하던 곳 / 손에 손으로 에이스와 새우깡 따뜻하게 건네지던 곳 / 점심시간 담벼락 아래로 종이에 싼 동전을 내려주면 / 꽈배기과자와 노릿노릿한 찹쌀도너츠가 올라오던 곳 / 야근시간 졸린 잠 쫓으려 커피믹스 가루째 털어넣던 곳 / 유인물 들고 자취방마다 문 두드리던 새벽길 / 머리에 고드름 매달린 채 함께 뛰던 길 / 머리채 잡혀 끌려가던 길 얻어터지다 피 흘리다 / 김포 쓰레기 매립장으로 실려가던 길 / 바람 들이치는 자취방 창문에 고이고이 스치로폼 대고 / 헐거운 부엌문에 이중자물쇠통 달아주던 / 내 어린 첫사랑 끝내 울며 떠나간 길 ..  (공단 길)


  예쁜 하루를 꿈꿉니다. 예쁜 잔치를 꿈꿉니다. 예쁜 이야기를 꿈꿉니다. 예쁜 노래를 꿈꿉니다. 신나게 빨아 신나게 말린 옷가지를 갭니다. 갠 옷가지는 제자리에 착착 얹습니다. 큰아이는 혼자서 저 입고픈 옷을 슥슥 골라 입습니다. 스스로 입고 스스로 벗습니다. 졸리더라도 더 참으며 더 놀고, 고단하더라도 곯아떨어지지 않는다면 잠자리에 들려 하지 않습니다. 참말 잔치일 테니까요. 잔치마당에서 조금 고단하다고 그만 노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더 신나게, 더 개구지게, 더 왁자하게 놀려 하겠지요.


  하루 몫 기운이 다할 때까지 노는 아이들은 고단하게 색색 잠들면서 새 기운을 얻습니다. 새 기운을 얻고는 다시금 새 하루 몫 기운이 다하도록 방방 뛰어놉니다. 그러고 보면, 어른도 아이하고 같구나 싶어요. 하루 몫 기운이 다하도록 스스로 무언가를 합니다. 하루 몫 기운이 다하면 고단히 눈을 감습니다. 한밤을 지나 새벽이 찾아들면 천천히 새 기운을 차립니다. 새 하루에는 어떤 새 잔치를 활짝 열면서 맞이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어떤 마음으로 어떤 꿈을 꾸며 누릴까 하고 생각합니다.


.. 그대들 만나 행복했던 나는 그 기쁨만을 안고 갔으니 / 푸른 하늘 아래 우리 함께 했던 따스한 숨결 / 그 사랑만을 데리고 갔으니 ..  (대화)


  처마 밑이 조용합니다. 이른봄에 찾아든 제비들이 새끼를 까서 바지런히 먹이며 돌볼 때에는 처마 밑이 늘 부산했는데, 새끼들이 모두 자라 저희 날갯짓을 마음껏 뽐내며 하늘을 누비고 나서는 늘 조용합니다. 한동안 새끼 제비들이 처마 밑 보금자리로 찾아드나 싶었으나, 어미 제비 가끔 찾아들어 빨래줄에 앉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뽀로롱 날아갈 뿐입니다. 이제 새끼 제비들도, 어미 제비들도, 훨씬 너른 새 누리를 날아다니면서 몸을 살찌우고 마음을 북돋우겠지요. 가벼우며 힘찬 날갯짓으로 온 들판과 멧자락을 실컷 누비면서 좋은 하루를 누리겠지요. 따사로우며 좋은 날을 지나 천천히 찬바람 찾아들 무렵, 한국땅을 떠나는 기나긴 마실길에 나설 테고, 기나긴 마실길에 나서자면 하루 내내 끝없이 날갯짓하면서 이곳저곳 누비며 날개힘을 길러야겠지요.


  제비들은 어떤 잔치를 빚을까요. 제비들이 하늘에서 날갯짓하며 바라보는 이 땅은 어떠한 삶 어떠한 모습 어떠한 그림일까요. 하늘에서 날갯짓하는 제비가 바라보기에 고속도로나 아파트나 공장이나 골프장이나 발전소는 어떤 터가 될까요. 사람들이 자가용이나 비행기나 기차나 버스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하늘을 날며 살아간다 할 때에는 공장이나 기계나 물질문명이나 도시문화는 얼마나 값있거나 보람있을까요.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려는 사람한테는 무엇이 대수로울까요. 꿈을 꾸며 좋은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람한테는 무엇이 대수로울까요. 사랑으로 아이를 낳아 꿈으로 아이를 보살피려는 어버이한테는 무엇이 대수로울까요. 사랑으로 태어나 꿈을 꾸며 하루하루 누리려는 아이한테는 무엇이 대수로울까요.


  어제도 오늘도 글피도 잔치입니다. 삶은 잔치입니다. 꿈은 잔치이고 사랑도 잔치입니다. 웃음도 눈물도 잔치입니다. 싱그럽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상큼하게 푸른 들판을 바라보는 내 몸뚱이 또한 잔치요, 스스로 좋은 숨결 되어 스스로 좋은 동무로 어깨동무하고픈 내 마음도 잔치예요. 사랑을 먹으며 사랑을 낳고, 꿈을 먹으며 꿈을 낳습니다. (4345.7.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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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7-08 13:15   좋아요 0 | URL
"어제도 오늘도 글피도 잔치입니다. 삶은 잔치입니다" -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 모두 잔치 같은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의 삶도 살펴보니, 감사할 게 아주 많더라고요. 그런데 이걸 잊고 살 때가 많아요. ^^

숲노래 2012-07-08 17:10   좋아요 0 | URL
아... 그러나 '작은 것'에 고마워 하는 마음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날마다 좋은 잔치라 할 때에는
내 삶은 '작지도 크지도' 않아요.
크기로 따지는 '잔치'가 아니라,
좋은 삶이자 사랑이기에 누리는 '잔치'라는 뜻이에요~~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문학과지성 시인선 216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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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빚는 삶, 삶이 빚는 생각
[시를 노래하는 시 23]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책이름 :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글 : 황인숙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1998.6.12.)
- 책값 : 8000원

 


  생각이 빚는 삶이 먼저인지 삶이 빚는 생각이 먼저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어느 쪽이 먼저가 되든, 생각은 삶을 빚습니다. 삶 또한 생각을 빚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생각하는 결이 고스란히 삶으로 태어납니다. 사람들 스스로 살아가는 결이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슬기롭게 생각을 빛낼 때에 슬기롭구나 싶은 아름다운 삶이 펼쳐집니다. 슬기롭게 삶을 일굴 때에 슬기롭구나 싶은 생각이 샘솟습니다.


.. 어젯밤 잠들기 전 나는 대단한 생각을 해냈다. 그리고 깨자마자 그 대단한 생각을 또 해냈다 ..  (어쨌든 그것부터)


  저녁에 잠들면서 꿈을 꿉니다. 나로서는 이런 꿈은 꾸기를 바랄 수 있고, 나로서는 저런 꿈은 안 꾸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이든 저런 꿈이든 아무렇게나 찾아들 수 있고, 이런 꿈이나 저런 꿈을 나 스스로 갈무리하면서 내가 바라는 대로 찾아들도록 할 수 있어요.


  잠자리에서 아이들 새근새근 잘 자라며 자장노래를 부르며 생각합니다. 자장노래는 밉거나 궂거나 모진 마음으로 부를 수 없습니다. 자장노래를 들을 아이들은 고우며 따사로운 목소리일 때에 즐거이 받아들여 예쁘게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고 개구지게 뒹굴 적에도 아이들 어버이가 예쁜 목소리와 고운 눈빛으로 바라볼 때에 훨씬 신나게 뛰놀 뿐 아니라 한결 개구지게 뒹굴 만할 테지요.


  나는 늘 예쁜 손길로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비질을 할 노릇입니다. 나는 언제나 고운 눈빛으로 나무를 바라보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보금자리를 바라볼 노릇입니다. 예쁜 손길일 때에 예쁘게 쓰는 글입니다. 고운 눈빛일 때에 곱게 나누는 사랑입니다. 예쁜 손길로 밭을 일굽니다. 고운 눈빛으로 빨래를 개고 아이를 안습니다.


.. 여기, 변변히 걸어본 적 없는 자, / 고이 늙지 못한다 ..  (거울들)


  둘째 아이 똥바지를 빨래합니다. 2012년 6월 29일, 둘째 아이는 첫돌을 지난 지 한 달 남짓 되었습니다. 앞으로 둘째 아이가 스스로 똥오줌을 가릴 때까지 내 똥바지 빨래는 죽 이어집니다. 아이는 앞으로 무럭무럭 자랄 테고, 머잖아 똥이며 오줌을 가릴 테지요. 똥이며 오줌을 가릴 뿐 아니라 조잘조잘 수다쟁이가 될 무렵이면, 아이는 아이가 똥이나 오줌을 못 가리며 바지뿐 아니라 방바닥 곳곳에 똥을 바르고 오줌을 퍼뜨린 줄 떠올리지 못할는지 모릅니다. 나도 내가 우리 아이들만 하던 갓난쟁이 적에 똥오줌을 얼마나 퍼질러댔는지 잘 떠올리지 못하고, 내 어머니 손이 얼마나 많이 가야 했는지 되새기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는 내 똥바지나 오줌기저귀를 숱하게 갈았고, 꾸준히 밥을 먹였으며, 한결같이 포근한 자장노래로 잠을 재워 주었어요.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곱게 사랑하고 맑게 믿은 마음빛을 먹으며 오늘과 같이 자랐어요. 나는 내 나름대로 내 마음빛을 새롭게 가다듬어 우리 아이들을 돌봅니다. 우리 아이들은 나와 옆지기한테서 새로운 마음빛을 찬찬히 받아먹으면서 하루하루 자랄 테고, 이렇게 자라난 새로운 힘으로 저희 꿈을 펼치면서 새삼스럽게 저희 사랑을 새록새록 꽃피우겠지요.


  그런데 이 고운 마음빛이 맨 먼저 어디에서 비롯했는지는 모릅니다. 어느 어버이가 맨 먼저 고운 마음빛을 펼쳐 이 땅에 태어났는지는 모릅니다.


  어느 하느님이 빚었는지, 어느 땅님이 빚었는지, 어느 사랑님이 빚었는지, 어느 꿈님이 빚었는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누군가 내가 오늘 이곳에서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꿈꾸었습니다. 누군가 마음속으로 곱게 꿈꾸었기에 내가 오늘 이곳에서 태어나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나는 나대로 오늘 하루 새롭게 꿈 하나 곱게 꾸면서 우리 아이들을 보살피고,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저희 아이들을 차근차근 어루만지며 살아갈 수 있어요.


.. 오, 내 흉한 눈, 죽은 눈. / 생각도 감각도 없이 / 바라보는 것을 시들게 하는 ..  (좀 비)


  생각이 삶을 빚습니다. 좋은 생각이 좋은 삶을 빚습니다.


  생각은 삶을 빚어요. 궂은 생각은 궂은 삶을 빚어요.


  삶이 생각을 빚습니다. 좋게 일구는 삶이 좋게 빛나는 생각을 빚습니다.


  삶은 생각을 빚어요. 궂게 팽개치는 삶이 궂게 나동그라지는 생각을 빚어요.


..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 가지 끝에서 가지 끝으로 / 파르르 떨림이 퍼진다. // 혹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 매우 유창한 듯도 하고 / 몹시 더듬는 듯도 하다. / 오참, 내가 언제 / 잠시라도 나무들에게 / 귀기울인 적이나 있었다고 ..  (오월, 하고도 스무여드레)


  아이들 옷가지 빨래는 날마다 수북합니다. 하루 네 차례 빨래를 해야 비로소 숨통을 틉니다. 나는 내 손으로 옷가지를 복복 비비고 슥슥 헹구며 꾹꾹 짭니다. 내 손은 내 몸에 달려 내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데, 내 마음이 좋을 때에는 내 손은 좋게 움직이고, 내 마음이 무거울 때에는 내 손 또한 무겁게 움직입니다.


  이른아침과 늦은아침과 한낮과 늦은낮에 하는 빨래는 고운 햇살과 맑은 바람이 보송보송 말립니다. 어쩌다가 저녁에 다섯 차례째 빨래를 하고야 말면, 이 빨래는 방안 곳곳에 넙니다. 방안 곳곳에서 천천히 마르면서 집안에 메마르지 않게 도와줍니다. 방안 곳곳에 옷걸이에 꿰어 넌 빨래를 아침에 일어나 걷을라치면 뽀독뽀독 잘 말랐어요. 햇살과 바람 먹으며 마른 빨래처럼 상큼하지는 않지만, 느낌이 참 좋아요. 밤새 우리 식구들 살가이 어루만지며 말랐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요.


  그러고 보면, 빨래를 할 적마다 빨래한테 말을 겁니다.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좋아, 좋아, 좋아.


  이 옷가지를 들고 곱게 개어 옷장에 곱게 놓습니다. 이 옷가지를 꺼내어 아이한테 곱게 입힙니다. 때때로 미운 마음으로 옷을 개거나, 미운 마음으로 아이한테 옷을 입힐 때면, 내 미운 마음은 그만 아이한테 옮습니다. 아이한테 옮은 미운 마음은 다시 나한테 찾아듭니다. 아이가 미운 티끌을 털어내면서 온통 내 가슴속에 미운 가시가 박힙니다.


..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  (말의 힘)


  가는 말이 고울 때에 오는 말이 고울밖에 없습니다. 가는 말이 미울 적에 오는 말이 미울밖에 없습니다. 아, 너무나 마땅한 노릇이라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 하지, 미운 아이 꿀밤 한 대 먹인다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미움’이란 살살 달래고 토닥이면서 ‘사랑’이 되도록 할 마음결이지, 꾸짖거나 나무라거나 괴롭히거나 등돌리면서 못살게 굴어 ‘더 아픈 미움’이나 ‘더 슬픈 미움’이 되도록 할 마음무늬가 아니거든요.


  누구나 사랑을 먹고 싶지, 미움을 먹고 싶지 않아요. 누구나 꿈을 먹고 싶지, 가시를 먹고 싶지 않아요.


  내가 바라보기에 고운 아이이든 미운 아이이든, 나는 그저 ‘아이’라 느끼며 바라보면서 떡 하나 함께 나눌 때에 즐겁습니다. 내가 보기에 모든 ‘아이’들 예쁜 모습을 해맑게 맞아들이면서 나도 떡 한 점 먹고 너도 떡 한 점 먹으렴, 하면서 웃음을 나눌 때에 기쁩니다.


.. 누군가 불 붙여놓은 촛불 앞에서 / 재빨리 기도한 적이 있다. / 그 기도는 지극히 속된 것이었다. / 근사한 시를 쓰게 해달라는 것, / 약간의 돈이 생기게 해달라는 것, / 또, 나를, 용서해달라는 것 ..  (지극히 속된 기도)


  황인숙 님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1998)를 읽습니다. 황인숙 님은 어이하여 “내 슬프게 가라앉은 소담스럽게 고운 이”를 노래할까 궁금합니다. 그러나, 황인숙 님 넋이 이와 같으니 이와 같은 넋에 따라 삶을 누리겠지요. 이와 같은 삶에 따라 이와 같은 넋을 보듬겠지요.


  어느 한때는 슬프다가도 어느 한때는 기쁠 테지요. 어느 한때는 잔뜩 가라앉다가도 어느 한때는 한껏 부풀어오를 테지요. 어느 한때는 내 곁 아름다운 이를 노래하다가, 어느 한때는 내 둘레 가여운 이를 노래할 테지요.


  시를 쓰면서 삶을 짓습니다. 삶을 지으면서 시를 씁니다. 시를 쓰면서 넋을 짓습니다. 넋을 지으면서 시를 짓습니다. 나는 나한테 가장 빛나는 시를 생각하면서 삶을 짓습니다. 나는 나한테 가장 좋은 삶을 생각하면서 시를 짓습니다. (4345.6.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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