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사람들 - 하종강이 만난 진짜 노동자
하종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책이름 : 길에서 만난 사람들
- 글 : 하종강
- 펴낸곳 : 후마니타스(2007.2007.7.9.)
- 책값 : 12000원



 이 책 하나 22 ― 한가위에 선물할 책 하나
 : 하종강,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읽으며


 

 〈1〉 명절날 사람들



.. 그렇다. 사람은 ‘사상’이 아니라 ‘삶’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  (태준식 / 73쪽)


 엊저녁, 잠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동인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용산역에 내린 다음, 이곳에 있는 헌책방 〈뿌리서점〉에 들러 명절 인사를 드리고 책을 구경했습니다. 서울로 가는 길과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 옆과 앞에 이주노동자 여럿이 앉습니다. 이들은 크고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들한테도 우리처럼 한가위 명절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고향나라에 남기고 온 식구와 동무 들이 있을 테지요. 오로지 돈만 벌고자 온 한국땅이라고 하나, 나라밖까지 힘겨이 찾아온 이들한테 우리들이 내밀 손길은 ‘품삯 적은 일자리’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느 회사이든, 회사 우두머리를 아버지로 여기고 일터를 집안처럼 생각하며 정성껏 연장을 돌보고 땀흘려 일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몸을 아늑히 쉴 수 있도록, 명절날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마음풀이를 할 수 있도록, 말과 물이 선 땅에서 따돌림이나 푸대접을 받지 않도록 힘쓰는 일 또한 ‘아버지로 여겨질 회사 우두머리’가 할 일이요 우리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눈길을 둘 일이라고 느낍니다.


.. “80년대의 헌신성을 강조하며 열악한 노동조건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선배들에게는 뭐라고 대꾸할 수 있을까요?” 황씨의 대답은 뜻밖에 쉬웠다. “본인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 않잖아요. 지금은 더 많이 누리며 살고 있잖아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겠다는 좋은 뜻으로 들어왔던 젊은 실무자들이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옳은 게 아니에요.” ..  (황정란 / 288쪽)


 느즈막이 인천으로 돌아와서 통닭집에 들릅니다. 통닭집엔 저희와 다른 손님 둘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른 손님 둘은 바로 옆에 저희가 있는데에도 소리높여 서로를 깎아내리고 욕까지 곁들이면서 싸웁니다. 계단에서 얼핏 마주쳤을 때, 저보다 대여섯 살쯤 어려 보이는 젊은 부부입니다. ‘집안일 도와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언제 아이하고 놀아 준 적이 있느냐’고, ‘너는 뭐가 잘났느냐’고 …… 거침없이 싸우는 둘이는 며칠 뒤 맞이할 한가위 명절을 어느 곳에서 어떻게 쇨까요.

 밤늦게까지 길거리장사 하는 분들이 보입니다. 이분들은 한가위 명절을 맞이한 그날에도 손수레를 끌고 이곳까지 나와서 장사를 할까요. 설이든 한가위이든 전철과 버스는 다닙니다. 집집마다 전기가 들어오고 물이 나옵니다. 손잡이를 딸깍 하면 가스가 나오고 단추 한 번 누르면 뜨신 물이 나옵니다. 24시간 편의점 불은 언제나 밝고 약국 불은 그예 들어올 생각을 안 합니다. 명절에는 쉬면서 피붙이와 옛동무를 만나야겠다는 사람도 많겠으나, 명절 대목을 놓칠 수 없다며 여느 때보다 더 늦게까지 일하는 분도 많겠지요.

 선물을 안고 들고 고마운 어른을 찾아뵙는 분도 많지만, 저처럼 벌이가 밑바닥인 사람들은 마음으로만 고마운 뜻을 보냅니다. 자가용에 선물보따리를 싣고 아이를 태우고 피붙이들을 한 사람씩 찾아뵙는 분도 많지만, 택배로 선물보따리를 보내는 분도 많습니다. 문득 궁금한 생각 하나. 우체국이나 택배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여느 날에도 저녁 늦게까지 바삐 일하는데, 명절날에 ‘쉼표 찍는(비번)’ 사람이 있을는지.


.. “평범하고 조용하고 착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던 소녀 김효선은 본래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고3이 되었을 때 “우리 나라에서 장애인은 의사가 된다 해도 환자를 직접 치료하기는 어렵고 연구직 의사로 일할 수밖에 없다”라는 말을 듣고 좌절했다. ‘장애인을 돕는 의사가 되고 싶다’라는 어릴 적부터 가져 온 꿈을 포기하고 이과에서 문과로 전환하면서 특수교육학을 선택했다 ..  (김효선 / 130쪽)


 언제부터 명절날 고향을 찾아간다며 법석을 떨었을까요. 언제부터 우리들은 고향을 떠나 ‘고향 아닌 곳’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일자리를 얻으며 살게 되었을까요. 고향은 명절날 돌아가면 되는 곳일까요.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굴러갈 수 있다고 하는 요즘 세상인데에도, 꼭 서울이나 부산처럼 큰도시에만 다닥다닥 붙어서 살아야 하는가요.

 태어난 고향에서 일자리 마련하며 살 수는 없을까요. 자라난 고향에서 마을 문화와 삶터를 가꾸거나 돌보거나 추스르거나 다독이면서 이웃사촌을 이루어내며 살 수는 없을까요.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야 하며, 얼마나 좋은 일자리를 얻어야 하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만나야 하며, 얼마나 훌륭한 아파트를 마련해야 하며, 얼마나 신나는 놀이문화 시설 들을 누려야 하나요. 얼마나 빠르고 크고 멋져 보이는 자가용을 굴려야 하고, 얼마나 곱고 멋있는 옷을 입어야 하며, 얼마나 맛나고 기름진 밥을 먹어야 하나요.


 〈2〉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 “종교가 사회복지 차원에서 병원을 운영하려면 자선병원을 운영하는 것이 이 시대에 마땅한 거야. 전쟁 직후 폐허에서는 교회가 학교나 병원을 운영하는 것이 시대에 부응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돈 벌려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학교나 병원 사업이야. 더 이상 종교 주식회사가 되어서는 안 되지 …… 노동자들이 큰소리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고 신부님들이 ‘우리도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노동의 가치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야. 성직자들조차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자 천시 풍조에 물들어 있는 거지.” ..  (박순희 / 168쪽)


 오늘 저녁, 도서관 문을 닫고 나서 전철을 타고 일산으로 가 볼까 생각합니다. 이튿날 아침에는 전철을 타고 용인까지 간 다음, 두 다리로 걸어서 음성에 가 볼까 생각합니다. 음성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두 다리로 걸어 볼까 생각합니다.

 사람이 다니라고 놓은 길이었으니까요. 사람 다니라고 놓은 길에 자동차만 씽씽 달리고 있지만, 길에서, 또 길을 둘러싼 마을에서, 또 길을 옆으로 한 사람들 삶터와 자연 삶터에서 이 길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습니다. 이 한가위 명절에.


.. “지난해에 충북에서만 농가 부채 때문에 여섯 명이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어. 농가 부채가 왜 생기는지 알아? 퇴비 공장 하나만 봐도 그래. 환경친화 사업이라고 정부에서 적극 권장하고 농민들은 전 재산 털고 담보 잡혀 가면서 거금을 융자받아 투자했지. 현실성 없어서 전부 다 망했어 …… 그렇게 되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보증 섰던 일가친척, 동네사람들이 모두 거대한 빚에 허덕이면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거야. 정부의 농업 정책 실패 때문에 생긴 농가 부채인데, 당연히 정부가 책임져야지 …… 그 와중에 농협은 고리대금업을 하고 …… 농협 이자가 12퍼센트야. 시중 이자보다 오히려 더 비싸. 이건 농민을 위한 농협이 아니라 완전히 장사꾼들을 위한 농협이야” ..  (안순애 / 38∼40쪽)


 자가용이든 버스든 택시든 기차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더 빨리 달리는 탈거리에 몸을 실으면, 씽씽 지나쳐 버리는 길가와 동네와 자연 삶터를 ‘구경거리’로만 느낄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자전거를 몰아야, 또 자전거를 느긋하게 몰아야, 또 자전거를 몰면서도 자주 쉬어 주어야 찻길과 찻길 옆 마을을 ‘구경거리 아닌 우리 삶터’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두 다리로 꾸욱꾸욱 땅을 밟고 걸을 수 있다면, 걷다가 마주치는 사람들과 고개 숙여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길을 걸으며 먹다 남은 비닐봉지를 아무 곳에나 버릴 수 없겠지요.

 길에 ‘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사람이, ‘내가 발딛고 사는 마을’ 문화를 무너뜨리는 짓을 할 수 있을까요. 내가 발딛고 사는 마을을 아주 작은 힘으로나마 알뜰히 가꾸고자 애쓰는 사람이 ‘내 이웃이 아파하거나 힘들어할 때’ 모르쇠로 지낼 수 있을까요. 내 이웃 아픔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 ‘세상이 어수선하고 법 아닌 법이 판칠 때’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지내면 되지 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 “휴게소에서 앞으로 몇 년쯤 더 일할 생각이냐” 하고 물었을 때, 이경순 씨는 “정년퇴직할 때까지요”라고 답한 뒤 야무지게 덧붙였다. “우리가 그런 곳으로 만들고 말 거예요. 한 번 취업하면 퇴사하기 싫은 직장으로, 그런 평생직장으로 우리가 만들고 말 거예요.” ..  (이경순 / 87쪽)


 전철간에서 내 발을 밟고도 미안하다는 얼굴빛 없이 지나가고 마는 사람도 우리 ‘이웃’입니다. 자전거 탄 사람한테 욕지꺼리 내뱉고 위협운전하는 사람도 우리 이웃입니다. 돈 적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조촐한 마을 공동체를 이루며 지내고 있는 터전에 포크레인 삽날을 밀어붙이며 ‘재개발-도시정화’를 하겠다는 공무원과 개발업자 사람과 시장과 군수 들도 우리 이웃입니다. 수십 수백만 신도를 거느리며 몸집이 커지기만 하는 교회 목사님도 우리 이웃입니다.

 열무 1500원어치를 사는데 떨이라고 하며 돈을 더 안 받고 1500원어치를 더 얹어 주는 저잣거리 아주머니도 우리 ‘이웃’입니다. 자전거 탄 사람이 앞에 있으면 살그머니 뒷등을 깜빡이면서 안전거리 마련하여 뒷차를 막아 주는 운전기사도 우리 이웃입니다. 아무 돈벌이가 되지 않아도 기꺼이 몸과 시간을 바쳐서 우리 삶터 구석구석 그늘진 곳까지 찾아와 땀흘리는 자원봉사 활동꾼도 우리 이웃입니다. 날마다 먼지 뒤집어쓰면서 헌책 하나 캐내어 꼼꼼히 손질한 다음 책시렁에 갖추어 놓으며 ‘좋은 책 알아볼 책손’을 기다리는 헌책방 일꾼도 우리 이웃입니다.


.. “피해자들은 평생 입 다물고 어둠 속에 숨어 울며 살았는데, 가해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고 잘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살았던 이 더러운 세상을 내 자식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발끈을 야물게 고쳐 매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  (박영란 / 59쪽)


 어젯밤 누군가 술 체한(‘술 취한’이 아닌 ‘술 체한’이라고 느낍니다. 술도 안 받으면서 꾸역꾸역 집어넣으니 몸이고 마음이고 온통 뒤틀려서 체하고 마는) 목소리로 고래고래 외치며 병을 집어던져 깨뜨리는 소리가 살림집까지 들려왔습니다. 아침에 길에 나가 보니 병조각이 그대로 있습니다. 술병 깨져 어지러진 이 골목길을 누가 치워야 할까요. 술병 집어던진 이는 자기가 한 짓을 떠올리고나 있을까요.


 〈3〉 우리들이 만나는 사람은


 한울노동문제연구소를 꾸리는 하종강 님은 대학교 강의도 나가지만, 무엇보다도 노동자들 삶이 한결 나아지기 바라는 마음으로 조각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며 사람을 만나면서 지냅니다. 쉴 틈이 있을까요? 글쎄, 쉴 틈이 있다기보다는, 당신 하는 일을 놀이처럼 느끼며 더 다부지게 뛰고 있지 싶은데.

 지난해부터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에다가 《철들지 않는다는 것》에다가 《길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내놓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 2006년 5월에 나왔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2007년 7월에 나왔으니 열넉 달 사이에 책 세 권입니다. 할 말이 많은 분일까요? 그동안 할 말을 가슴속에 묻어 두고 사셨던 분일까요?


.. 이 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조금이라도 진보적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태일기념관에 한번 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전태일 열사의 기념관을 그 모양으로밖에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진보운동의 수준이다. 그런 마당에 내가 낸 세금으로 박정희기념관을 짓는다고 생각하면 길을 걷다가도 가슴이 막힌다. 전태일기념관을 나라돈으로 번듯하게 지을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  (156쪽)


 우리들이 들을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나눌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만날 사람은 누구이며, 날마다 부대끼거나 스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들일까요.

 명절날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한테 무엇이며, 한자리에 둘러앉아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부모님하고, 딸아들하고, 사촌 오촌 육촌 칠촌 팔촌 들하고, 고향동무나 선후배하고, 우리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안부인사만 나누고 돌아서곤 합니까. 고향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로 나누십니까. 지금 우리들이 마음을 기울이거나 함께할 만한 이야기를 꺼내어 머리를 맞대십니까.


.. 내가 전혀 만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불굴의 의지를 가진 활동가가 아니라, 망설이면서 노동운동에 끼어들었다가 그 경험을 평생 동안 짐으로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활동 때문에 고통받으면서 열등감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우리의 활동 범위 밖에 있지만 여전히 역사의 주인인 사람들을 만나는 데는 실패했다. 어쩌다 어렵게 만나도 자신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많이 만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가까운 동료나 친척에게조차 자신의 직업을 감추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차마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이댈 수가 없었다 ..  (337∼338쪽)


 하종강 님이 만나 도톰한 책 하나로 묶은 ‘우리 땅 노동자 이야기’들은, 한 분 한 분 곱씹고 되새겨 보면, 모두 우리 자신이요 이웃 이야기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우리 아이가, 우리 동무가 바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노동자’이니까요.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면서 우리 이웃입니다. 정규직으로 걱정없이 지내면서 연봉 1∼2억을 너끈히 받으면서 몇 억짜리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 또한 우리들이면서 우리 이웃입니다. 명절날 찾아뵐 분들한테 이 책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드릴까 합니다. (4340.9.23.해.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7-09-23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가슴 아픈 동감입니다~~~~ 저도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프레이야 2007-09-23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담아갑니다. 일깨워주시는 글 고맙습니다.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 대한민국 1호 여군 헬기 조종사 피우진 중령이 걸어온 30년 군 생활의 기록
피우진 지음 / 삼인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이름 :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 글 : 피우진
- 펴낸곳 : 삼인(2006.11.21.)
- 책값 : 9000원



 이 책 하나 19 ― 사람이 땅개 되어 뒹구는 군대
 :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를 읽고



 인천으로 살림뿌리를 내리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다기보다 만나기 어렵다고 느꼈던 고향 동무를 다시 만납니다. 예전에는 어깨동무였다면 이제는 옆동네에 사는 사람, 이웃입니다. 인천공설운동장 건너편에 자리한 체육사에서 일하는 고향동무는 제가 펴내는 1인 잡지를 읽고 한 마디 합니다. “야, 조정래 씨 소설이 금서야? 나는 군대에 있을 때 《태백산맥》하고 《아리랑》 읽었는데. 보안과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도장 찍어 달라고 하니까, 아무것도 안 보고 그냥 찍어 주더라. (내무반 검사할 때) 도장 찍혀 있으니까 아무 문제 없고.”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잦아들었지만, 한동안 헌책방 일꾼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못살게 굴고 구속까지 시키려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지난달입니다. 그리고 그때 ‘불온도서’로 찍힌 책들 목록에는 ‘조정래 씨 소설’이 빠짐없이 올라 있었어요. “그 사람들은 내용 안 봐. 도장 찍혔는가 안 찍혔는가만 봐.” 고향동무 말마따나 보안검열을 하는 사람은 ‘불온도서가 왜 불온도서인지’ 따지지 않습니다. ‘불온도서 목록에 올라와 있으니까 불온도서’일 뿐입니다. 세월이 달라졌다면, 사회가 거듭난다면 ‘불온도서라는 목록이 있어야 한다고 해도 이 목록에 실릴 책은 달라져야’ 합니다. 아니, 불온도서라는 책이 있을 수도 없지만, 억지로라도 불온도서가 있다고 한다면.


.. 전역 심사를 하기 위해 상이 등급 판단을 위한 전공유무심사도 다시 했는데, 나의 상이 등급은 최하위인 7급으로 나왔다. 근무 여부를 결정짓는 장애 등급은 상위의 2급으로 판정되어 전역 대상이 되었는데, 막상 연금 액수가 걸린 상이 등급은 최하위인 7급으로 나온 것이다. 나는 전공상심사를 주관한 의무부서에 항의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지금 활동하는 데에 아무 이상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상이 없다면 장애 등급은 왜 2급이란 말인가. 전역은 시키되 연금은 많이 줄 수 없다는 말인가? ..  〈244쪽〉


 지지난달, 헌책방 일꾼을 국가보안법 잣대로 들볶고 괴롭히던 때, 군대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습니다. 2007년 여름, 헌책방 일꾼은 ‘조정래 씨 소설을 팔았다는 까닭’으로 구속이 될 뻔했지만, 1997년 봄,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 부대에 있던 스물세 살 젊은이는 ‘조정래 씨 소설을 불사르지 않았다는 까닭’으로 한 줌 재가 될 뻔했습니다.

 ○   ○

 1997년 봄, 강원도 양구군 동면, 대우산 선점중대에서 내무반검사를 하던 중대장은 1소대부터 화기소대까지 사병 캐비넷을 샅샅이 뒤지면서 ‘불온도서 색출’을 합니다. 이때 불온도서로 찍힌 책 들은, 《태백산맥》, 《아리랑》, ‘한겨레신문사에서 찍은 책’ 들과 몇 가지 섹스소설. 얼추 쉰 권 남짓 걸려든 불온도서를 불사르는 몫은 저한테 떨어집니다. 낑낑대며 책을 들고 소각장으로 갑니다. 몇 가지 책을 찢어서 태우다가 《태백산맥》과 《아리랑》까지 태우는 일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태백산맥》까지만 태우고 《아리랑》은 소각장 한쪽 구석에 잿더미를 쌓아서 안에다 숨겨 놓습니다.

 하지만 중대장은 남김없이 찢어서 태웠는가를 알아보려고 몰래 소각장에 왔고, 불쏘시개로 하나하나 뒤적이다가 한쪽 구석에 안 태우고 숨겨 놓았던 《아리랑》을 보고 맙니다. “너 이 새끼, 간첩이지!” “…….” “너 같은 새끼들 죽이는 거는 아무것도 아냐! 그냥 총질해서 죽인 다음에 철책 안쪽에 집어던져 놓고 월북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


..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취급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선택한 길이기에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버티고들 있습니다 …… 그나마 저마저 항공병과를 떠나면 우리 후배들은 어찌 될는지요. 규정을 운운하며 여군들에게만 철저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그들은 과연 규정을 얼마나 지키며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들 있는지 ..  〈234쪽〉


 1997년 12월 31일, 함박눈이 쉬지 않고 쏟아지던 도솔산을 내려왔습니다. 눈이 많이 와서 차가 내려갈 수 없으니 하룻밤 더 자고 가라는 대대장 말에, “걸어서라도 가겠습니다!” 하고 외치면서. 눈밭에서 뒹굴다가 골짜기에서 떨어지더라도 군막사에서는 1분도 더 있기 싫었던 전역동기들. 그예 대대장은 억지로 작은 군짐차 하나 바퀴에 쇠사슬 감아서 내려보내도록 했고, 걸어서 한 시간 길이던 곳을 덜덜덜 천천히 달리는 짐차가 두 시간이 걸려서야 비로소 산밑마을, 팔랑리에 닿습니다. 속속옷과 깔깔이는 후임병한테 빼앗겼고 장갑까지 빼앗긴 동기들도 있어서 두 시간 동안 벌벌 떨어야 했지만, 부처님오신날까지 녹지 않는 도솔산과 대우산 눈을 올려다보면서 ‘이제 눈은 참말 싫어’ ‘이 차에서 얼어죽더라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 테야’ 하고 이야기하던 우리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서울에 닿아 전철을 타고 한강다리를 지나며 인천 부모님 집으로 갈 때는 저녁 여섯 시가 넘어갈 무렵. 붉게 노을지는 햇살이 전철에 깃들었고, 저녁햇살은 머리 희끗한 아저씨 얼굴로도, 꾸벅꾸벅 졸다가 떨어뜨린 생활정보지로도 비추었습니다. 저 아저씨가 이런 시간에 왜 전철에서 생활정보지를 보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줄은 한 주쯤 지난 뒤 알았습니다. 아이엠에프.


.. 나는 그 여군 장교를 고소하고 문제를 공론화시키라고 여군 하사관에게 충고했지만 본인이 주저하였다. 실상 그런 일은 아주 흔하다곤 할 수 없지만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여군들은 대개 혼자 눈물을 흘리며 잊어버린다. 군 생활을 거기에서 끝낼 생각이 아니라면 부사관이나 하급 장교들이 여군 고위직 간부와 정면 대립하기는 힘든 것이다. 자기 부하를 남군의 노리개로 전락시키는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는 사람은 대개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녀 또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고 이해해야 하는 걸까? ..  〈201쪽〉


 아이엠에프는 전역하고서 한 주가 지나서 알았으나, 열 해가 지나도록 몰랐던 일이 있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군대에서 ‘멀쩡히 있던 짐차 엔진이 한낮에 과열로 터져서 죽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와 ‘대인지뢰를 밟고 두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무엇을 뜻했는지를. 대인지뢰를 밟고 둘이 죽었다고 하던 그날 밤, 저도 밤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지뢰 터지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지오피 옆옆 소초에서 있던 일이었는데.


.. 언론은 그런 행사에 참석한 여군 장성, 전투기 조종사, 수석 졸업자 등등 성공한 여군들에게만 카메라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50년 넘는 세월 동안 남성 중심의 군 문화 속에서 여성의 자리를 찾기 위해 피땀 흘려온 사람들은 이름 없는 대다수의 여군들과 사회 각지에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도와준 분들이다 ..  〈6쪽〉


 그제 밤마실을 하다가 옆지기한테 군대 적 이야기 하나 들려줍니다. 마침 빵집 옆을 지나가고 있었기에 그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첫 휴가를 나와서 친구들한테 크림 잔뜩 있는 케익을 하나 사 달라고 했어요. 생일도 아닌데 무슨 케익이냐는 친구들한테, 그냥 크림케익이 먹고 싶다고 했어요. 군대에 가서 첫 훈련으로 혹한기훈련을 뛰었는데,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을 만큼 배고프지, 행군은 끝나지 않지, 그때 중대장이 뭔 일로 앵돌아져서 열여덟 시간 동안 못 쉬게 하고 산악행군을 했는데, 이등병이라고 처지면 미움받고 까이는 거 뻔하고, 밥도 안 멕이고 무거운 군장 멘 채 걷기만 하자니 죽을 맛이었어요. 그런데 내 앞에 가는 고참이 숲길에서 눈을 떠서 먹더라고요. 옳거니 나도 눈이라도 먹자 싶어서 자꾸자꾸 눈을 퍼먹었어요. 속으로 생각했지요. 난 진짜 케익 싫어하는데, 이 눈을 케익으로 생각하며 먹자. 그러니까 뒤에서 걷던 고참이 불쑥 한 마디 했어요. ‘야, 너무 많이 먹지 마. 탈난다.’”


.. 우리 사회에는 나이 어린 사람이 정면으로 지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풍토가 있다. 원칙과 예의를 들먹이며 항의하는 나를 대견하게 보고 격려해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못마땅하게 보는 경우가 늘 더 많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학교 선생에게 100대까지 맞아 보기도 했다 ..  〈35쪽〉


 첫 휴가 받고 세상바람을 쐬게 되던 날(1996년 2월) 고향동무들이 고기를 사 주었습니다. 불쌍한 군인은 고기도 못 먹을 테니 고기 잔뜩 먹으라고. 저는 한손으로는 크림케익을 먹고 한손으로는 고기를 먹었습니다. 혼자서 케익 한 통 다 먹었습니다. 맛은 없더라구요.


.. 군대라서 남녀 차별이 없을 거라는 건 나 혼자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제도적으로 이미 여군은 남군을 보조하는 것으로만 정해져 있었다 ..  〈46쪽〉


 군대에서 벗어난 지 열 해가 지났습니다. 몸은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마음이나 몸이나 군대에서 못 벗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앞으로도 군대에서 못 벗어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몸짓이나 말투나 생각이나 마음까지도.

 군대에서 벗어나서 대여섯 해가 지난 때였나, 어릴 적부터 저를 알던 고향동무들이 ‘너 왜 그렇게 무섭게 말하냐?’고들 물었습니다. ‘왜?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했습니다만, 군대에 있을 적 아침부터 밤까지 욕이란 욕은 죄 주워섬기면서 모든 말마다 욕을 달았던 버릇이 씻기지 않았어요. 잠자리에 들 때만은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았지만,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눈알을 부라리며 미친년 개잡놈 씨부랄새끼 들을 주워섬기며 살던 말짓과 몸짓을 도무지 털어내지 못했어요. 저만 못 느끼고, 제 둘레사람들은 다 느끼고 있었어요. 이제는 그나마 욕설은 조금만 내뱉도록 추슬렀지만, 마주한 사람을 칼로 후비는 듯한 말투나 말씨까지는 추스르지 못했습니다.


.. 군기를 잡는 것과 기를 죽이는 것은 다르다 ..  〈61쪽〉


 살아남자고, 죽을 수 없다고, 나를 골로 보낸 뒤 군대 의문사로 지워버리겠다는 그 중대장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고, 주먹질이면 주먹질 욕질이면 욕질 삽질이면 삽질, 그 온갖 이야기가 그저 숨죽인 채 대물림되도록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아직도 살아남아야 하나요. 아직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나요.

 머리에 별이란 것을 단 녀석이 부대방문을 한다는 계획이 연중행사 가운데 하나로 잡혀 있으면 ‘도로보수’라는 이름으로 한 달 동안 산골짜기 부대 흙길을 도톰하게 메우는 일을 합니다. 별 단 개새끼가 탄 찌프가 잔돌에라도 튕겨서 움찔하면 대대장한테 불호령이 떨어진다나, 중대장이 진급을 못한다나……. 연대에서도 설설 기면서 덤프를 지원해 주며 어디선가 모래를 퍼 옵니다. 덤프가 지나가면서 모래를 술술 뿌립니다. 그러면 주특기 100 우리들 땅개는 삽 한 자루씩 들고 조르르 서서 고 흙길이 올록볼록 하나 없이 반반하게 되도록 두들기고 밟습니다. 행정보급관은 옆에 서서 삽질이 어수룩한 땅개를 발로도 차고 주먹으로 배를 어루만져 주기도 합니다. 땅개니까,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이라면 10종이고 개라면 9종이었으니까. 비라도 오는 날이면 낮이고 밤이고 모든 훈련과 행사를 접어두고 ‘비상 출동’이 내려졌지요. 모래 다 쓸려내려간다고. 모래 쓸려내려가지 않도록 출동해서 물골을 트고 모래를 잡아 두라고.


.. 함께 조종사가 되었던 여군 동료들은 모두 정조종사가 되어 보지 못하고 항공단을 떠났다. 우선 후배가 가장 먼저 군을 떠났다. 출산 때문이었다. 여군도 결혼은 할 수 있지만 아이를 낳으면 전역을 해야 했다. 그것이 규정이었다. 참 우스꽝스런 제도이다.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여군이 무슨 성직자도 아닌데 결혼까지 못하게 하는 건 너무 말도 안 되니까 결혼은 허용한 듯한데 막상 출산을 하면 강제 전역시킨다. 결국 결혼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이건 비합리적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제도다 ..  〈79쪽〉


 괴로워하는 후임병을 보면서, 익살쟁이 고참병 한 사람이 “야, 북한 애들은 천삽뜨기 운동(천 번 삽질을 한 다음 허리 한 번 펴기) 하잖아. 그러면 우리는 만삽뜨기 운동 하자. 헤헤헤.” 저도 따라 웃었지요, 헤헤헤. “하나, 둘, 셋, 넷, 다섯, …… 스물, …… 서른, 어 허리 폈네. 허리 왜 펴? 죽을래? 헤헤헤. 다시 만 번. 하나, 둘, 셋, ……”

 삽질을 해 보면 백 번을 뜨고 허리 한 번 펴도 힘든 판인데.

 그런 우리를 보며 행정보급관이 힘을 북돋워 준다면서 하는 말, “야, 늬들은 말야, 군대에서 좋은 거 배운다는 거 잊으면 안 돼. 늬들이 전역해서 뭐 할 일 있겠어? 공사판에나 가서 일해야지. 그때 우리 부대 야상 입고 나가란 말이야. 야상에 백두산 그려진 거(제가 나온 부대에서 쓰는 사단 무늬) 입고 가면 오천 원을 더 받아, 오천 원을, 알아?”


.. 어느 날 밤이었다. 10시 반쯤 잠을 자기 위해 누웠는데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문을 열라는 것이었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내가 비행학처로 오기 전의 처장이었다. 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처장들하고 술 한잔 했는데, 2차로 여기서 한잔 더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취침중이라 안 된다며 문을 열어 주지 않자, 그는 “왜? 술이 없어서 그래? 술하고 안주는 내가 다 준비할 테니까 어서 문이나 열어” 하면서 …… “여자 아니라도 취침중인데 취해서 찾아와 무조건 문 두드리는 건 결례 아닙니까?” “결례? 남자들은 상관이 술 마시자고 찾아오면 황공해 하면서 얼른 문 열어 줘. 내 부하 중에 너 같은 앤 하나도 없어. 알아?” “그럼, 그런 부하 찾아가세요. 왜 싫다는 사람에게 그러십니까?” ..  〈144쪽〉


 적으면 열아홉, 많으면 스물여섯이었던 젊은이들. 저도 젊은이였을까요. 제 입영동기인 또래 동무는 소대 배속을 받은 첫날부터 고문관으로 찍혀서 전역하는 날까지 눈치밥과 미움밥과 주먹밥을 먹었습니다. 제가 병장 때 들어온 스물여섯 살짜리 후임병은 열아홉 살밖에 안 된 이등병 고참한테도 뒷간으로 끌려가서 얻어맞고 몰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울고 있는 스물여섯 살짜리 고참(그때 제 나이는 스물셋)한테, “○○○ 이등병, 밖에 나가면 형이었을 텐데, 다들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어. 나도 그 꼴 보기 싫어서 남들보다 군대 일찍 들어온 편이지만, 내 바로 위에 동갑내기가 있었거든. 그 자식 생각만 하면 전역하고 대구에 가서 그놈 찾아내서 족치고 싶은데, 어쩌겠어. 살아야지. 진짜 힘들겠지만, 일 년 참아야지. 3소대 ○○○도 스물네 살에 들어와서 진짜 고생했는데, 이제 일병 달고 나니 많이 나아졌잖아. 이 좆 같은 곳에서 개죽음 당할 수 없잖아. 미쳐버릴 수 없잖아.” 하고 이야기하며 담배 한 개비 내밀었습니다. 이런 달래기가 몇 번 이어졌습니다. 아니, 거의 날마다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곧 전역할 사람, 스물여섯 살짜리 이등병, 중대장보다 한 살 어리고 모든 소대장들보다 나이 많은 이등병은 앞으로 스물넉 달을 군대에서 견뎌내야 할 사람.


.. 입맞춤을 당한 후에도 마찬가지다. 이 한 번의 일로 그 여군 장교가 사단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노라고 군 검찰에 바로 고소할 수 있었을까? 나는 모든 여군들이 그러기를 바라고, 나라면 당연히 그랬겠지만, 대개는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일개 소위가 자기 부대의 사단장을 고소하여 그것이 제대로 처리될지 자신할 수 없고, 만약 흐지부지 끝나면 그 후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  〈196쪽〉


 저보다 열한 살 어린 고향후배 한 사람이 지난주에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훈련소에서 한창 설설 기고 있겠군요. 그 어린 넋은, 아니 그 젊은 넋은 군대에서 얼마나 젊디젊은 넋 그대로 이어갈 수 있을까요. 옛날과 견주면 ‘좋아졌다’고 하는 군대이지만, 군대가 아무리 좋아진다한들, 남과 북이 총부리 맞들고 싸우는 지금 형편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미국한테 식민지처럼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다니며 온갖 무기를 사들여야 하는 쇠사슬을 끊지 않는다면, 나라가 아닌 권력을 지키는 군대 조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다면, 총이 아닌 낫과 연필을 들고 평화를 가꾸는 마음으로 우리 삶을 돌려놓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 땅에서 새로 태어나서 자랄 젊은 넋들은 어찌 될는지요. 아이를, 사내아이를 낳아야 할까요. (4340.9.5.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달을 밟으면 떠나고 싶다
이재호 지음 / 다해출판사 / 1993년 12월
평점 :
절판


(판이 끊어져서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책이름 : 페달을 밟으면 떠나고 싶다
 - 글쓴이 : 이재호
 - 펴낸곳 : 깊은사랑(1993.12.10.)



 이 책 하나 18 ― ‘자전거 여행’을 왜 하나?
 : 《페달을 밟으면 떠나고 싶다》를 읽고



 가끔 자가용을 얻어타고 어디로 갈 때면, ‘참 빠르네’, ‘참 아늑하네’ 하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운전면허증이 없어 차를 몰 수 없지만, 차를 장만할 돈이나 차를 굴릴 돈도 없습니다. 그런 저조차 ‘이렇게 자가용으로 다니기에 좋은 우리 세상이니까 사람들이 자가용을 장만해서 다니려고 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더욱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젊은 어버이라면, 아이를 안고 업고 하며 온갖 짐을 바리바리 등에 메고 손에 들고 하기보다는 차에 꾸역꾸역 싣고 다니는 편이 한결 낫다고 느낄 테고요. 사랑하는 두 사람도, 대중교통보다 자가용으로 나들이 다닐 때가 더 오붓하고 즐거웁다고 느낄 테지요.


.. 상범이네 집은 신림동. 버스로 나가서 지하철을 타야 되는데 돈이 500원밖에 없으니 어쩐다? 이거 오나가나 돈이 문제군. 낯도 말도 모르는 유럽에서도 히치하이크를 했는데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못하랴. 주차장 출구에서 손을 들고 있었다. 삼십 분이 지나도록 빈 차들이 그냥 지나간다. 쟤가 저기서 뭐 하나 하는 눈치다. 그러고 있노라니 비행기 옆 좌석에 앉았던 형님이 탄 차가 미끄러져 와 선다. “여기서 지금 히치하이크하는 거냐?” “예. 그런데 잘 안 서는데요.” “참 나 원, 여기가 유럽인 줄 아나. 하도 세상이 뒤숭숭해서 안 태워 줘. 태워 주었다가 일 당하면 어쩌려고?” ..  〈166쪽〉


 어젯밤, 옆지기와 밤마실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밤마실은 손 잡고 두 다리로 걸으며 동네 골목길을 둘러보기. 천천히 동네 골목집을 구경하고 밤바람을 느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새로 연 가게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얼마 앞서 문을 닫은 가게가 쇠문에 붙여놓은 쪽지를 읽으며, ‘그래, 장사가 참 안 된다더니’ 하며 혀를 끌끌 찹니다. 술 마시고 큰소리로 떠들며 걷는 젊은 무리를 보다가, 술에 체한 아저씨 두 분이 손 잡고 걷는데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그러다가 어느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한 잔 더 걸치러 가시나?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불을 반짝반짝거리며 같은 골목길을 왔다갔다 하는 젊은이 둘. 동네 순찰을 하는 경찰차. 경찰차는 왜 차 지붕에 ‘경찰’이란 큰 글자판을 붙였을까. 저렇게 안 붙여도 경찰인 줄 다 알 텐데. 둘이 짝이 되어 걸어다니며 순찰을 돌던 경찰(의경인 듯)들은 동네 손바닥공원 걸상에 앉아 다리쉼을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는 분을 만나 인사를 나눕니다. 늦은때인데도 여태까지 일을 하셨나 봐요.

 어느덧 밤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갈 즈음, 오른발목이 퍽 저립니다. 옆지기 말, “아스팔트를 밟는데 무슨 나들이냐”고, 흙을 밟으며 다닐 수 없고 아스팔트를, 또는 시멘트를 밟아야 하는데, 무슨 나들이가 되겠느냐고.

 그러고 보니,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닦은 길은 ‘바퀴 달린 탈거리’가 다니기에 좋은 길일 뿐, 사람이나 짐승이 두 다리나 네 다리로 걷기에는 몹시 나쁜 길입니다. 제 오른발목이 저린 까닭도, 딱딱한 아스팔트만을 밟아야 하니 무게가 고스란히 눌리며 아프게 되었을 듯.


.. 배낭 무전여행이야말로 우정이 시험받는 최적의 기회일 거야 ..  〈156쪽〉


 미국과 일본은 지구에서 찻길을 가장 많이 닦은 나라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우리 나라가 일본이나 미국을 앞지를 만큼, 또는 엇비슷할 만큼 길을 많이많이 늘렸지 싶어요. 충주에 살 때, 자전거로 전국 여기저기를 다니는데, 길 없는 곳이 거의 없다고 할 만했습니다. 차들 뜸한 넓고 시원한 새길이 있는데, 그 옆으로 시원한 새길과 같은 크기로 다른 새길을 또 닦고 있는 모습을 참 자주 보았습니다. 이 새길은 모두 자동차가 다니기 좋으라고 닦는 길입니다. 시골에서는 사람들이 걸어서 이웃 마을로 갈 만한 길이 없고, 한 마을에서도 자동차에 시달리느라 안전하게 걷기 나쁩니다(경상도 어느 시골에는 ‘노인 보호구역’ 푯말이 서 있어서, 자동차들이 제발 천천히 달려 달라고,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마음써 달라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새길 닦기’는 ‘사람이 다리나 무릎이나 발목이 시큰거리지 않도록 즐겁게 걸을 수 있는 흙길이나 숲길’이 아닌 ‘바퀴 달린 탈거리만 아늑하게 달릴 수 있는 길’, 바퀴 달린 탈거리 가운데에도 기름을 먹어야만 굴러갈 수 있는 쇳덩어리만 달릴 수 있는 길로 닦지 싶어요.


.. 달력의 그림에서도 가장 멋있게 그려져 있던 나라 스위스. 바젤에서 시내 구경을 하고 역 앞에서 한 할아버지에게 길을 물으니 친절하게도, 자전거를 타고 가기에 좋은 길과 약간은 힘들지만 풍경이 멋진 길이 있다고 가르쳐 준다. 힘이 들더라도 멋있는 길로 가야 되겠지? … 스위스에 들어서니 역시 산악 지방은 산악 지방이다. 고갯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눈으로 보기엔 좋았는데 자전거를 타는 나에겐 죽을맛이었다 ..  〈142, 146쪽〉


 어릴 적이 참 좋았다고, 옛날이 참 좋았다고 말씀하는 어른들이 많습니다. 당신들 어릴 적에는 논에서 새우도 잡고 붕어도 잡고 미꾸리도 잡으며 놀았다고, 냇가에서 가재도 잡고 재첩도 주워서 국 끓여먹으며 놀았다고, 나무 빽빽한 산에서 길을 잃고 들짐승 소리를 들으며 벌벌 떨기도 했다고, 너른 바다에서 헤엄을 치며 낚시를 즐길 수 있었다고, …… 들들들 이야기를 합지요. 그래, 그 지난날, 당신들 어릴 적이 참말 좋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좋은 당신들 지난날처럼, 지금 아이들이 살아가는 오늘날도 ‘지금 아이들과 당신 어른들 모두 좋을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지키고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 어른들은 ‘그 좋은 자연과 놀잇감’을 당신들 어릴 적에만 즐기고 다 무너뜨리거나 없애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참말로 당신 아이들을 걱정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 많이 버는 회사에 다니라는 뜻’에서 논밭을 쓸어내고 재벌들 높은 건물을 세우도록 마음을 쓰십니까? 참말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산과 들을 밀어내고 높은 아파트를 세워 이곳에 보금자리를 트십니까?

 “옛날이 좋았지” 타령을 하는 만화며 동화며 문학이며 다큐멘터리며 그림이며 …… 쏟아내는 당신 어른들은, 당신들한테만 즐거웠고 요즘 아이들한테는 하나도 알 수 없는 세상 이야기를, 요즘 아이들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자연 이야기를, 이제는 자연 삶터가 옴팡지게 무너져서 씨가 다 말라버린 이 땅에서, 어깨 우쭐거리면서 ‘자연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들!’ 하고 콧방귀를 뀌며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 난 왠지 모르게 독일사람들에게선 무뚝뚝한 인상을 받았고 프랑스사람들에게선 한없이 친절한 인상을 받았다. 그 친절함과 자유로움이 좋았다 ..  〈137쪽〉


 아이들이 컴퓨터게임을 즐길 수밖에 없는 사회 터전으로 바꿔 놓은 우리 어른들입니다. 아이들이 빈터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소꿉놀이며 숨바꼭질이며 말타기며 공차기며 자치기며 제기차기며 말뚝박기며 딱지치기며 두꺼비집이며 닭싸움이며 씨름이며 …… 들을 할 수 없게 빈터를 죄 없애고 자동차 세워 놓는 자리, 이른바 주차장으로 바꿔 놓은 우리 어른들입니다. 아이들이 뛰어놀 골목길에서는 자가용이 씽씽씽 달리며 아이들한테 경적을 된통으로 먹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야, 이놈들아, 위험하게 길에서 놀면 어떡해!”

 이런 제기랄, 아이들이 길 아니고 어디서 놀라고요? 길 아니고 놀 곳이 있습니까? 아파트에서는 주차장 말고 놀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나라 80∼90%가 산다고 할 수 있는 도시에서, 아이들이 놀 곳은 길과 주차장 말고 어디가 있습니까? 동네에 공원이 얼마나 있고, 공원이 있어도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만한 넉넉한 빈터가 있는지요? 제가 사는 인천 중ㆍ동구 쪽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찧고 까불고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신나게 뛰어놀 빈터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찧고 까불며 놀 빈터가 없다는 소리는, 어른들 또한 마음놓고 두런두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쉴 만한 자리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모여서 오붓하게 나들이도 하고 몸도 쉴 만한 자리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 그러나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지금의 내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것이리라. 자신이 직접 페달을 구르지 않으면 한치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 마을에 처음 들어간 동양인 또는 한국인으로서 받는 칙사 대우 등은 기차 여행으로는 경험하기 힘들 것이다 ..  〈111∼112쪽〉


 엊그제 빗길에서 자전거를 탈 때입니다. 제 옆을 스치고 가는 여러 버스들은 ‘빗길에 자전거를 달리니 얼마나 힘겨울까?’ 하고 걱정해 주었는지 모를 일입니다만, 멀찍이 돌아서 조용히 지나가 주었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어느 마을버스는 제 뒤에 바싹 붙어서 신나게 경적을 먹여댑니다. 그러다가 위험하게 자전거 앞으로 확 끼어들면서 모르 비틀어 버스정류장에 서더군요. 이리하여 자전거도 버스 옆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한편, 버스 뒤를 따르던 다른 차들도 옴짝달짝 할 수 없었습니다.


.. 물론 가장 중요한 건 힘 주어 페달을 굴려야만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였다. 그러나 그 평범한 진리가 나에겐 가장 힘든 고역이었다. 도중에 배낭을 메고 도보여행을 하는 어떤 아버지와 아들을 만났다. 한 달 예정의 여행이란다. 그렇게 한 달 동안 프랑스를 남에서 북으로 횡단할 계획이라는데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사고의 발상과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단지 물질의 풍요 때문일까? 이 의문은 여간해서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 유명한 콩비앵 궁전을 둘러보았는데 궁전 자체보다는 주위에 조성해 놓은 공원이 더 멋있었다. 이름모를 꽃들과 뛰노는 다람쥐와 토끼들 ..  〈73∼75쪽〉


 서울에서 살던 때, 가끔 한강 자전거길을 지나갈 때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말이 ‘자전거길’이지, 걷는 사람과 개 끌고 나온 사람과 인라인 타는 사람과 아이하고 배드민턴 하는 사람과 자전거 타는 사람이 한데 섞여서 참 어수선하고 아슬아슬했습니다. 자전거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은 흔들흔들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 하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옆길로 팩 꺾어서 큰 사고가 일어날 뻔한 모습이라든지, 그예 사고가 나고 마는 모습을 흔히 보았습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끼리도 무슨 ‘빠르기 겨룸’을 그리도 해대시는지…….

 가만히 보면, 한강을 따라 닦은 찻길 옆으로 자전거 달리는 길을 두 줄로 마련했을 뿐, 정작 그 길을 자전거로 즐겁게 오가면서 회사를 다니라고, 학교를 다니라고, 저잣거리 들러서 물건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닦지 않았구나 싶습니다. 한강 자전거길로 들어서는 푯말 찾기 참 어렵고, 들어서는 길목도 아슬아슬하거나 힘겨운 한편, 빠져나가는 구멍도 몇 군데 없어요.


.. 여유가 없었지만 중고 자전거를 한 대 구했다. 어차피 우리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면서 살지는 않으니까. 구체적인 계획이라는 것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가다가 돈 떨어지면 포도밭에서 일 좀 해 주고 벌어서 가자고 생각했다 ..  〈66쪽〉


 자동차를 왜 타십니까? 자동차를 타는 까닭이 있으십니까? 자동차를 몰고 어디를 오가십니까? 자동차를 타고다니며 무슨 일을 하십니까?

 자동차를 몰고 나와 자동차를 만나지는 않겠지요.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는 일을 하고자 자동차로 어딘가 움직이겠지요. 자기가 가려는 어느 곳으로 자동차를 몰고 간 다음에는 차에서 내릴 테지요. 아무리 못해도 한 걸음쯤은 걸으시겠지요.


.. 어렸을 적 보았던 만화영화 〈캔디〉에서 캔디의 꿈속의 연인이 늘 파이프를 불던 곳이 바로 이곳 스코틀랜드라는 것이 실감났다. 이렇게 산 좋고 물이 좋으니 스카치 위스키가 만들어질 수 있겠지 싶었다 ..  〈60쪽〉


 이 세상을 왜 사십니까? 사람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까닭이 있으십니까? 돈을 왜 버십니까? 부지런히 일해서 번 돈을 어디에서 누구와 어떻게 쓰십니까? 어릴 적부터 집이며 학교에서 가르치기를, ‘가난한 이웃과 나누라’ 했는데, 이 나라 온갖 곳에 수없이 들어찬 예배당과 절집에서는 ‘내 재산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라’ 하는데, 참말로 ‘우리 님들이 번 돈을 님들 가난한 이웃한테 나누는 일’을 즐기고 계신지요? 아직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아 이웃과 나누기 버겁다고 느끼시는가요? 얼마쯤 벌어야 넉넉한 살림이고, 얼마쯤 버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일까요?

 아이들한테는 무엇을 물려주렵니까? 당신들이 온삶을 바쳐서 부지런히 일하고 얻은 돈을? 아파트를? 자동차를?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면 좋겠습니까?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을 하며 지내면 좋겠습니까?


.. 철도여행을 자전거여행으로 바꾸게 된 것은, 내 힘으로 유럽을 가는 데까지 가 보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유럽이 넓으면 얼마나 넓겠냐 하는 마음으로 ..  〈50쪽〉


 저는 인천에서 사진책 도서관 하나 조그맣게 열어서 꾸리고 있습니다. 뭐, 이곳을 찾아오는 책손은 뜸합니다. 앞으로 차츰 늘 수 있겠지만. 아무튼, 저도 나중에 아이를 낳아 이곳 도서관에서 아이를 가르치면서 함께 놀며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문득문득 헤아리곤 합니다. 저는 뒷날 제 아이가 될 사람한테 무엇을 물려주겠느냐고. 무엇을 가르쳐 주겠느냐고. 무엇을 보고 느끼도록 이끌겠느냐고. 어디를 함께 다니고 어떤 사람과 만나고 어울리며, 무슨 밥을 먹이고 무슨 옷을 입히고 어떠한 살림집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림을 꾸려나가겠느냐고.

 ‘우리 아이한테 도서관 책들을 물려주면 좋을까?’ 하고 혼잣말로 묻다가는 도리질을 칩니다. 아니라고, 우리 아이한테는 도서관 책이 아니라, 어버이 될 사람이 도서관을 꾸리는 동안 하나둘 그러모으게 된 책들, 하나둘 읽으면서 차곡차곡 늘어난 책들에 담긴 뜻을, 이 수많은 책을 애써 펴낸 지은이들 마음을, 이 책을 읽으며 마음에 새긴 것을 세상에 어떻게 풀어내면 좋을까 하는 움직임이나 몸부림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 나에겐 모두가 고맙고 소중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고맙고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아무것도 모르는 유학생을 유혹해서 학비를 사기치는 사람도 있고, 영국의 실정이나 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임금도 상습적으로 체불하는, 같은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악덕 업주들도 있고, 서로 헐뜯고 시비 끝에 서로를 고발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  〈38쪽〉


 두어 달 앞서부터 제 몸이 많이 무너졌습니다. 먼저 오른무릎이 무너졌습니다. 한 달 남짓 자전거를 쉬니 좀 나아집니다. 그런데 오른무릎이 나을 즈음 되어 오른팔꿈치가 무너집디다. 보름 남짓 자전거를 또 쉽니다. 하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네요. 제 먹고사는 방편이 글쓰기인데(그렇다고 글써서 글삯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지만. 한 달에 글삯 5만 원 벌기도 벅찹니다), 글을 써서 돈이 되든 안 되든 어찌 되었든 꾸준히 써내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오른팔꿈치는 하루도, 아니 잠깐도 쉴 틈이 없군요. 도서관 책을 갈무리하고 걸레질을 하노라니 이 또한 쉴 겨를이 없네요. 어쩌면 오른팔꿈치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싶고, 아프면 아픈 대로, 저리면 저린 대로, 쑤시면 쑤신 대로 참아야지 싶습니다. 저보다 힘겹게 사는 분이 많고, 저보다 아프게 사는 분이 많은데, 참말 푸념만 늘어놓고 마는군요. (4340.8.19.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핑크스의 코
리영희 지음 / 까치 / 1998년 11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스핑크스의 코
- 글쓴이 : 리영희
- 펴낸곳 : 개마고원(1998.11.30.)



 우리 나라에는 아직 공안부서 경찰이 있습니다. 아직 있을 뿐 아니라 꽤 많이 있는 듯하며, 요즘 들어 실적 올릴 일이 없어진 탓에 부서 예산이 줄어드는 일과 정리해고 되는 일에서 벗어나고자 동네 헌책방 일꾼을 ‘좌경용공사범’으로 몰아붙이며 들볶습니다.

 동네 헌책방을 들볶는 일을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했을 테며, 자기들로서는 언제나 들이밀기 좋은 ‘국가보안법’이 있기 때문에, 동네 헌책방은 아주 만만합니다. ‘동네 헌책방에서 사고팔아서 말썽이 된다’고 공안부서 경찰이 말하는 ‘불온 이념도서’는 ‘교보문고 같은 새책방에서 팔린 뒤, 이 책을 사서 본 이가 내놓아서 헌책방에 들어온 책’입니다. 공안 경찰은 헌책방 일꾼을 붙잡아서, “이 책을 어디서 사 왔느냐? 누구한테 팔았느냐?” 하고 심문합니다. 하지만 헌책방 일꾼이 누구한테 언제 샀는지 하나하나 떠올릴 수 없는 노릇. 고물상에서 뭉텅이로 주워 온 책들을 어찌 낱낱이 떠올릴 테며, 이 책들이 누구한테 팔렸는지 어찌 하나하나 되새길 수 있을까요. 공안 경찰들이 ‘어디에서 흘러나온 책’인가 알고 싶다면,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와 알라딘과 예스24와 인터파크와 …… 이런 새책방 ‘판매명단’을 압수하면 될 일입니다. 교보나 영풍 같은 곳 ‘마일리지 카드’를 압수해도 손쉽게 쭉 뽑아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말썽이 되어야 한다면, 맨 처음 새책방에서 이 책을 사서 읽은 사람들이 말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아가, 이런 책을 펴내어 시중에 내놓은 출판사가 말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이런 책을 써낸 사람(지은이)들이 말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책이 나왔을 때 ‘좋은 책 나왔으니 사서 읽으시오’ 하고 소개글을 썼던 기자와 교수들이 말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도 시중 새책방에 깔려 있는 《스핑크스의 코》 같은 책은 ‘빨갱이 리영희’가 썼다고 해서 ‘불온 이념도서’라고 도장을 찍습니다. 제법 널리 읽혀서 웬만큼 ‘책 좋아하는 사람’ 집에는 다 꽂혀 있을 뿐 아니라, 이 책을 안 꽂아 둔 도서관이 없고, 리영희 교수 만나보기를 안 해 본 언론매체도 없으나, 공안 경찰은 오로지 하나, ‘한 놈만 팬다’는 법칙(?)을 따라서, 가장 힘없고 이름없고 돈없는 동네 헌책방만 겨냥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대로 ‘아직 국가보안법이 있었어?’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네’ 하며 혀를 차거나 ‘그깟 헌책방에서 일어난 일인데, 뭐’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빨갱이’ 리영희 교수가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 소비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의 유행 창조자들은 젊은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드러내보임으로써 ‘풍요한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여성이 배꼽을 드러내거나 반나체가 되는 새 유행의 옷을 남보다 먼저 걸치는 것을 ‘여성 해방’의 ‘실천적 행위’로 미화하는 소비주의 경제와 그 광고산업의 돈줄을 장악하고 잇는 것은, 압도적으로 남성들이다. 경제력을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이 여성의 육체에 수백만 원짜리 옷을 입혔다 벗겼다 하거나, 여성들의 손에 다이아몬드를 끼웠다 빼었다 하는 유행을 ‘현대화’니 ‘풍요’로 미화할 때, 그런 유행 속에서 현대화와 풍요를 찾으려는 여성은 남성의 지배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없다. 오히려 더욱 깊이 예속 상태에 빠지게 된다 ..  〈88∼8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고 싶은 고향을 내발로 걸어 못가고 - 일본군 '위안부' 조윤옥, 역사의 증언 3
안이정선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일본군 ‘위안부’ 조윤옥, 가고 싶은 고향을 내 발로 걸어 못 가고
- 글 / 정리 : 안이정선
- 펴낸곳 : 아름다운사람들(2006.1.31.)
- 책값 : 12000원



 조용히 지내고 있던 동네 한복판으로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뚫겠다는 인천시장 정책에 반대하고자, 지난주에 인천시청하고 무슨 개발공단에 집회를 하러 갔을 때입니다. 이곳 공무원들은 두 가지로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첫째, 모른 척. 둘째, 낯찌푸리며 길 막기와 입 막기.

 시청뿐 아니라 구청 공무원들, 시골에서는 읍사무소와 면사무소 공무원들, 이들이 어떤 일을 하려고 움직일 때, 정작 그 일(정책)로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나서며 이야기를 듣거나 묻는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자신이 공무원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여태 한 번도 없으니까요.

 경찰은 예나 이제나, 또 앞으로나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블랙리스트’에 올릴 목적으로. 경찰 사진에 찍힌 사람은 나중에 ‘일반 회사나 공무원 사무소’에 일자리를 얻으려고 할 때 피해를 받습니다. 어떤 집회에 왜 나갔느냐는 따지지 않고.

 공무원들은 우리들이 내는 세금으로 달삯을 받습니다. 공무원들이 쓰는 모든 물품과 시설, 그리고 공무원이 깃드는 건물 또한 우리들이 낸 세금으로 만들고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공무원한테 우리들이 소리내어 말할 자리란 없습니다. 우리들이 소리내어 말한다 해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한두 번 듣는다고 해도 서류에 몇 글자 끄적이고 말 뿐.


.. 이 책은, 그러니까 조윤옥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위안부’ 피해자의 일대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대에 의해 해체된 가족으로 살다가 60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뛰어 사흘 밤을 함께 보내고 다시 기약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한 가족에 대한 슬픈 기록이기도 하다.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의 상처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평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의 고향방문이라는 간절한 소원을 위해, 부끄럽게도 우리 정부는 일제 강점기에 무력했듯이 해방 후 50년이 지난 뒤에도 수수방관, 속수무책으로 해 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  〈22쪽〉


 일본군 성노예로 몸과 마음이 피멍든 분들은 정부가 아닌 바로 우리들 손으로 보듬고 껴안았습니다. 실태조사와 현지조사부터 아픔을 달래고 피해보상을 외치는 목소리까지도. 한편, 일본군 성노예로 다친 분들한테 등을 돌리거나 눈길을 안 두는 이들 또한 바로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4340.6.16.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