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건호 전집 - 전20권
송건호 지음, 강만길 외 엮음 / 한길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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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현대인물사론》


 송건호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2001년에 세상을 떠났고, 2002년에 스무 권짜리 ‘송건호 전집’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전집이 나오면서, 당신이 써 온 낱권책은 모두 품절이나 절판이라는 길을 걸었고, 40만 원짜리 전집이 아니고서는 당신 글을 읽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08년 오늘날, 송건호라고 하는 분 책을 하나씩 따로 읽고 싶다면 헌책방을 가야 합니다. 헌책방에는 당신이 쓴 《민족지성의 탐구》며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며 《서재필과 이승만》이며 《김구》며 《의열단》이며 《한국현대사》며 《한나라 한겨레를 향하여》며 《분단과 민족》이며 《드골 평전》이며 《민중과 자유언론》이며 《소크라테스의 행복》이며 《민주언론, 민족언론》이며 《무지개라도 있어야 하는 세상》이며 《민족통일을 위하여》며 《동양의 고사》며, 또 아이들한테 읽히려고 쓴 위인전이며, 수많은 책을 어렵잖이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1984년에 펴낸 《한국현대인물사론》이라는 책은, 김구ㆍ여운형ㆍ김창숙ㆍ안재홍ㆍ이동녕ㆍ안창호ㆍ이승만ㆍ김교신ㆍ한용운ㆍ신채호ㆍ함석헌ㆍ이광수ㆍ최남선ㆍ이용구, 이렇게 열네 사람 이야기를 담습니다. 김교신 꼭지를 읽어 봅니다. “김교신은 45세의 젊은 나이로 그렇게도 그리던 민족의 광복을 몇 달 앞두고 세상을 떴다. 그의 평생은 파란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생전에 높은 요직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한낱 중학교의 평교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대주의가 도도히 흐르는 기독교계에서 그처럼 기독교의 민족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은 없고 그토록 독실하게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교회와 서양 선교사를 외면하고 오로지 하느님과 성경만을 의지한 기독교인은 없었다(276쪽).”는 대목에 눈이 멎습니다.

 교과서에 이름이 실려 익히 알 만하거나, 이래저래 무슨 행사 때마다 들먹여지거나, 우리 나라 곳곳에 크고작은 기념관이나 기념빗돌이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고, 어떤 마음과 넋으로 이 땅에서 살아갔는가를 얼마만큼 헤아리고 있습니까. 북한산국립공원이 왜 국립공원인지, 지리산국립공원은 국립공원으로서 얼마나 뜻이 있는지 헤아리면서 그곳을 찾아가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일터에 가서 하루 여덟 시간, 또는 더 길거나 짧은 시간을 바치면서 하는 일은 우리 은행계좌에 들어오는 돈을 넘어서 얼마나 우리 삶터를 북돋우거나 돌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는 밥과 물과 바람은 우리 몸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밥과 물과 바람이 지금 어떤 형편인지 알고 있습니까.

.. 일제 36년 간 조선에는 숱한 인물들이 나왔으나 지식 청년이나 일반 청년에 관계 없이 조선 청년대중에게 가장 폭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마 춘원 이광수를 따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광수는 세상이 다 아는 문인이었으나 지금과는 달리 일제 때의 춘원에 대한 기대는 단순한 문인으로서보다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서였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얼마 후 1946년 여름쯤 되지 않았을까. 어느 날 이광수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조그맣게 보도된 일이 있다. “초췌한 모습의 이광수, 아내와 합의 이혼 수속차 종로구청에 출현”, 대체로 이런 내용의 기사였는데 머지않아 친일파로 단죄될 이광수가 재산을 보호하고자 아내 허영숙과 합의 이혼하고 재산을 아내의 이름으로 명의 변경했다는 보도였다. 8ㆍ15 후의 춘원은 온데간데 존재도 없었다. 8ㆍ15 전까지만 해도 민족의 우상처럼 존경받던 춘원이 해방이 되자 ‘친일파 이광수’로 변해 욕설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세상이 변하니까 하룻밤 사이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달라지나 싶어 인생의 무상함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  (이광수 꼭지/348쪽)

 송건호 님이 거쳐간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와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여기에다가, 온몸 바쳐 태어나게 한 〈한겨레〉는 오늘날 얼마나 힘차고 야무진 붓끝으로 우리한테 밝고 고운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까. 〈조선〉 기자와 〈한겨레〉 기자는 얼마나 송건호 님 발자취를 톺아보면서 당신들 발걸음을 튼튼하게 이 땅에 내딛고 있습니까.

 책이 없어서 사람을 못 보지는 않을 테지요. 사람이 없다고 책을 안 보지는 않을 테지요. 마음이 없고 뜻이 없어서 몸을 안 움직이고 어깨동무를 안 할 뿐일 테지요. (4341.5.1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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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조국, 한국 범우 세계 문예 신서 6
다카노 마사오 지음, 범우사 편집부 옮김 / 범우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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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48 ― ‘한국’은 누구한테 고향나라인가
 : 다카노 마사오, 《마음의 조국, 한국》



- 책이름 : 마음의 조국, 한국
- 글 : 다카노 마사오
- 옮긴이 : 편집부
- 펴낸곳 : 범우사(2002.7.15.)
- 책값 : 9000원


 (1) 골목을 걸으면서


 아침에 보건소로 찾아갑니다. 보건소에서 ‘아기 밴 어머니’한테 철분제를 준다고 해서 옆지기가 보건소로 전화해서 여쭈어 본 뒤 찾아갑니다. 전화를 마친 옆지기는 ‘지난겨울에 보건소에 찾아갔을 때에는 병원에서 임신증명서를 떼어 오라’고 하더니 이번에 전화하니 보건소 직원이 예전에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시치미를 뗀다며 성을 냅니다.

 성을 낼 만합니다. 그때 우리는 동네에 있는 보건소 두 군데에 찾아갔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중구 보건소에 먼저 찾아갔더니 주소지가 동구로 되어 있으니 동구 보건소로 가라고 해서, 동구 왼쪽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보건소까지 퍽 먼거리를 걸어서 갔습니다(집부터 동구 보건소까지는 중구 보건소까지 가는 거리 세 곱). 그러니 동구 보건소 직원은 ‘보건소에서 해 주는 기초검사는 병원에서 먼저 진단을 받고 임신증명서를 떼 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중구 보건소 직원은, 우리가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낳으려 한다고 하니, 그러십니까 하고는 검사를 해 주려다가 주소지 때문에 그리로 가라고 했습니다. 크지도 않은 동네에서 멀찍이 떨어진 보건소까지 가라는 대목에서는 씁쓸했지만, 공무원들 일이 이렇구나 하고 느낄밖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 가다가 쓰러져 죽은 시체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 구두 등속을 털어가는 사람들. 나도, 그 무리 속에서 또 남은 찌꺼기를 털며 살아왔다. 불타버린 벌판의 패전국이 되어버린 일본. 규슈 하카다의 암시장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꽁초를 피우고 필로폰을 맞고 나이프칼을 휘두르며 들개처럼 굶주림을 면해 온 슬프고 쓰라린, 그러나 죽고 싶다거나,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이름은?” “다카노 마사오.” “써 봐.” “쓸 줄 몰라.” “장난치지 마!” 느닷없이 걷어차며 마구 때린다 ..  (19쪽)


 철분제를 받은 옆지기가 보건소를 나오면서, 보건소 직원이 준 책을 넘깁니다. 무언가를 골똘히 찾습니다. 펼친 자리를 가만히 읽습니다. 뭘 그리 읽나, 집에 가서 읽지 했는데, 안에서 그 직원한테 ‘아이 밴 달수에 견주어 배가 더 나온 듯한데 왜 그러한가?’ 하고 물었을 때 아무 대답을 못해 주었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준 책(보건소에서 만들어서 나누어 주는 책)에는 이 물음에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 비자연장과 외국인등록증 수속, 재학증명서, 은행잔고 증명서, 신원보증서, 사진 2장, 수수료 합계 6만 원. 축산대학의 교환유학생인 요시노 씨의 수속은 3분 정도로 끝났는데 나에게는 “부모는? 직업은? 목적은?” 하며 집요하게 묻는다. 그것도 더듬거리는 일본어로. “구 만주에서 돌아온 전쟁고아로서 재일조선인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할아버지의 모국어를 배우고 싶은 염원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그런 나이로 이제 와 공부해서 뭘 하려고? 그런데 부모는 무엇을 하고 있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끝이 없으니 나는 화가 칠밀어 …… 공무원의 거만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 들어갈 때, 수강증을 보여주어도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데 말을 못하기 때문에 “나는 일본인이고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일본어로 말하니까 겨우 통과시켜 주었다. 학교 정문에서도 경비원의 제지를 받는다. 차림새로 판단하지 말라! 교수님들에게는 꼬박꼬박 인사하면서! ..  (38∼39,41쪽)


 여러 날 찌뿌둥하고 바람 또한 세게 불며 쌀쌀해졌던 날씨와는 달리 오늘 하루는 따뜻합니다. 따사로운 햇볕을 느끼며 천천히 걷습니다. 만석동을 지나 화수동을 걷습니다. 다섯 층이 안 되는 네 층짜리 화수아파트가 보입니다. 아까 보건소로 오던 길에 옆지기는 “꼭 하니가 살던 아파트 같다.”고 했습니다. 으잉? 뭔 소리여? 했더니, 만화 〈달려라 하니〉에 나오는 ‘하니’가 살던 옥탑방 같은 느낌이랍니다. 그런가? 하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봅니다. 음, 어쩌면. 어쩌면 그럴는지도. 그러고 보면, 이제 만화영화 ‘하니’가 살던 옥탑방 같은 집은 거의 다 사라지지 않았는가? 전국에 그와 비슷한 집이 얼마나 남았을까? 돈도 절도 집도 피붙이도 없이 외로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겨우 깃들일 만한 값싸고 조그마한 집은, 그러면서도 마당이 조촐하니 있는 집은 어디에 있을까? 나중에 〈달려라 하니〉를 영화로 만든다고 할 때에는 옥탑방 있는 집이 죄 없어진 다음이 될 텐데, 그때 옥탑방 집을 억지로 새로 만든다고 큰돈 들이고 법석이지 않을까? 그런데 옥탑방을 새로 지을 만한 자료는 어디에서 얻을까?


.. 대학제 준비가 여기저기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지난 세월 반권력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던 서울대학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그때 당시의 학생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확인하고 싶다 ..  (76쪽)





 부동산 앞을 지나갑니다. 세거리 골목길을 나누는 모서리에 자리한 부동산. 이름은 부동산인데, 가게 앞과 안쪽까지 꽃그릇이 가득합니다. 간판이 없다면 이곳은 꽃집으로 알지 부동산집으로는 안 알겠구나 싶습니다. 화평동 냉면거리 들머리에 섭니다. 이 길을 지나갈 때마다 ‘손님 끌어들이기’에 바쁜 목소리에 시달리기 싫어서 고단합니다. 그렇다고 이 길을 안 지나가며 빙 돌아가기도 싫고.

 맛있으면 스스로 찾아가서 먹지 않겠나, 먹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찾아가면 그만 아닌가 싶지만, 우리 나라 어느 관광지를 가도 손님 잡아당기는 목소리 그득합니다. 지난겨울에 자전거 타고 소래와 오이도에 갔다가 아주 질려서 다시는 가기 싫어졌습니다.


.. 최근, 야간중학생이라는 것, 졸업생이라는 것을 감추는 학생이 점점 늘어나고 있따고 들었다. 배운다는 것을 왜 수치스럽게 생각하는가. 글자와 말을 빼앗긴 우리들의 서러움과 고통과 분노와 분함. 그리고 배운다는 것. 산다는 것의 진실한 의미와 감동을 필사적으로 되찾은 우리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  (82∼83쪽)





 다른 길로 가자고 생각하다가 마침 화수시장이 보여서, 시장에 가서 찬거리를 장만하기로 합니다. 들머리가 조그마한 화수시장으로 들어섭니다. 안쪽이 많이 어둡습니다. 장사하지 않는 자리가 제법 많습니다. 오늘은 쉬는 날인지 모릅니다. 한 바퀴 빙 둘러보다가 ‘고무신 집’이 한 곳 보입니다. 오, 고무신 집? 참말 고무신 파는 집인가? 가게 앞에서 두리번두리번하니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 “뭐 찾아요?” “네, 고무신 까만 녀석 있어요?” “네, 몇 문이에요?” “이백칠십이요.”

 흰고무신과 보라고무신은 어느 저잣거리에서도 팔지만 검정고무신은 파는 곳이 몹시 드뭅니다. 도시에서 고무신 신고 다니는 사람이 없을 터이니, 고무신 장사를 안 할 테지요. 신는 사람만 있다면 무슨 신이든 안 팔겠습니까. 시골 신집이나 오일장을 찾아가야 할 텐데 하며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습니다. 지금 신고 있는 고무신이 거의 닳아 바닥에 구멍이 날 판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곳 화수시장에 고무신 가게가 예전 간판 그대로 걸어놓고 있다 함은, 요 둘레 동네에서는 검정고무신을 찾는 사람이 쏠쏠히 있다는 소리일까요.

 문제는 값. 설마 도시라고 한 켤레에 만 원을 부르지는 않겠지? 뒷주머니에 넣고 있던 오천 원짜리를 꺼내어 내밉니다. 거스름돈을 안 주십니다. 헛. 오천 원이라고?

 “아저씨, 검정고무신은 삼천 원이잖아요, 털신하고 보라고무신이 오천 원이고요.” 하고 대꾸를 할까 하다가 그만둡니다. 시골까지 검정고무신 사러 가자면 찻삯에다가 시간에다가 품에다가 만만치 않게 드니까, 그 값을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동네 저잣거리 한켠에 고무신 집 간판을 그대로 살려놓고 있는 보람을 이천 원으로 값해 드려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 예배가 끝난 후에 두 사람과 헤어져 여성들의 희망에 따라 젊음의 거리인 이화대학 거리에서 쇼핑하는 데 동행했다. 하라주쿠를 연상시키는 골목길에 넘쳐나는 젊은이들과 거리 양쪽으로 빽빽이 들어선 패션가게들. 이상하게도 구두점이 많은 것은 왜일까? 음악이 아니라 소음으로 위협해 와 다시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저 젊은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한국의 재생은 가능할 것인가? ..  (107쪽)


 화수시장을 나옵니다. 튀김닭집이 세 군데 잇닿아 있는 골목으로 접어듭니다. 차가 들어오지 않는 호젓한 골목길입니다.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집을 허물고 난 빈자리에 남은 흙을 일구어서 마련한 텃밭이 있습니다. 빼곡하게 심어 놓은 푸성귀 텃밭이 있는 골목에서 잠깐 발걸음을 멈춥니다. 배추흰나비가 팔랑거리며 날아다닙니다. 골목집 아저씨 한 분이 당신 집 앞 길가에 한 줄로 이어놓은 푸성귀 그릇을 손질합니다. 이 건너편으로도 옛 집터에 가꾼 텃밭이 있습니다. 텃밭은 아주 야무지게 손질되어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곳 화평동 골목집 할매와 할배 손길을 탔으리라 봅니다.


..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  (216쪽)


 “우리, 박정희 할머님 댁에 들렀다 가요.” 옆지기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마, 하고 대꾸하며 골목길 바깥으로 나옵니다. 저쪽 골목길로 극작가 함세덕 선생 옛집이 바라다보입니다. ‘함세덕’이라는 분이 어떤 극을 썼고 어떤 일을 했는지는 뚜렷이 모릅니다. 다만, 한국전쟁 때 인민군 편에 있다가 죽었다는 마지막 이야기만 얼핏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때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안 살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남녘에서도 모르고, 북녘에서는 알까 모를 일입니다. 그저, 함세덕 선생이 살았던 옛집이 바로 이곳, 인천 동구 화평동, 이른바 ‘냉면골목’이라는 새이름이 붙은 자리 안쪽에 조용히 깃들어 있음은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분 옛집은 ‘생가 복원’ 계획도 없이 묻혀져 있는 한편,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운명입니다. 전국을 휩쓰는 재개발(뉴타운) 바람과 맞물려, 이 동네도 재개발로 싹 쓸어버리면, 그나마 터라도 남아 있고 옛 기와집 자취가 고스란히 있는 함세덕 선생 옛집을 비롯한 모든 근현대 유적지와 서민 살림집 원형은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될 뿐입니다.


 (2) 그림할머니와 만나고


 ‘그림할머니’ 박정희 님 일터인 〈평안수채화의 집〉 앞에 섭니다. 수채화집 유리문에 종이 한 장 붙어 있습니다. 종이에는 박정희 할머님 연락처가 손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안 계신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문에 적힌 또다른 손글씨인 ‘미세요’대로 문을 밉니다. 열립니다. 안쪽에 있는 덧문에는 ‘돌려서 미세요’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말을 따르며 돌려서 밉니다. 열립니다. 문에 걸린 딸랑이가 딸랑딸랑 울립니다. 조금 뒤 안쪽에서 “누구 오셨어요?”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네!” 하고 길게 대꾸하면서 안쪽 방으로 들어갑니다.

 안쪽 방에는 그림을 배우는 할머니와 아주머니 들 해서 모두 다섯 분이 앉아 있습니다. 네 분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박정희 할머님은 그림 그리는 분들 사이에 앉아 계십니다. 얕은 찻상을 팔걸이로 삼고 앉아 계십니다.





..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은 도태된다. 참으로 필연과의 투쟁이다. 왜 나는 서울에 와 있는가? 왜 한국어를 배우는가? 글을 안다는 것(배운다는 것),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것 등의 차원이 아니다. 유학생활에 익숙해진 젊은 여성들은 유창한 영어로 서슴없이 질문하므로 필요 이상으로 분통이 터지고 주눅이 든다. 영어를 배울 거면 뉴욕에 가야지, 영어 같은 건 쓰지 말라. 다 한국어로 하라고 외치고 싶지만 말이 안 나오는 이중의 안타까움! ..  (31쪽)


 옆지기는 ‘여기서 그림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하고 여쭙니다. 할머님은, “내가, 그림 그린다면서 여기 와서 궁둥이 붙이고 앉아 있는 사람한테 달마다 5만 원씩 받고 살아.” 하고 말씀합니다. “월요일에 아침 열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그리는데, 도시락까지 싸 와서 맛있게 먹어.” 하고 덧붙입니다.

 올해로 여든여섯이 된 박정희 할머님은, 우리가 묻지 않은 이야기를 줄줄줄 늘어놓으십니다. ‘서방님(옆에 앉아서 그림 그리는 분들이 ‘서방’이 아닌 ‘영감’이라며 말을 고쳐 줍니다)’하고 예순두 해를 같이 살았는데 먼저 떠나버리니 가슴이 허전한데도 당신은 아이들을 이끌고 수채화 그린다면서 돌아다니고 있더라고. 젊어서는 살림하느라고 집 바깥에를 못 나가고, 이제는 늙어서 몸이 성하지 않으니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그제는 어느 분이 강화에 같이 가자고 하면서 차로 데려다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하도 기쁘고 좋아서 밤새 잠이 안 오셨다고, 그래서 새벽 세 시부터 잠을 못 자고 기다렸다고, 그렇게 하고 차를 얻어타고 강화에 가서 하루 내 그림을 그리다가 저녁에 돌아왔는데, 집 앞에서 내리고 보니 몸이 아주 녹초가 되어서 걷지도 못하고 네 발로 기어서 엉금엉금 집에 겨우 들어와서 누웠다고. 이제는 누가 집 앞으로 자동차를 끌고 와서 태워서 나들이를 시켜 주지 않으면 다니지 못한다고. 옆지기한테 아이가 있느냐고 묻다가, 배속에 아기가 있다고 하니, “철이 다 난 다음에 애를 낳는 것도 기뻐요.” 하면서 손뼉까지 치며 기뻐해 줍니다. 할머님이 딸만 줄줄 낳은 이야기를 하니, 옆에 있던 할머니가, 딸은 가게 갈 때 같이 가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는데, 아들이나 며느리하고는 아무것도 안 된다면서, 딸이 참 좋다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 내가 배우고 있는 한국어 교과서도 한국어와 영어의 설명만 있는 것이다. 하물며 시험에도 영어의 설명이 있다 ..  (73쪽)


 얘기를 들으면서 벽에 차곡차곡 붙여놓거나 그림틀에 담아 놓은 그림 들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할머님이 낸 책 두 권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볼 때와, 이렇게 두 눈으로 볼 때하고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할머님은 벽에다가 흰테이프로 그림을 착착 붙여놓기도 합니다. 누가 보면, ‘작품에다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아요?’ 할 성 싶기도 하지만, 더없이 할머님다운 그림걸이가 아니랴 싶습니다.

 저는 제가 찍은 사진을 빨래집게로 집어서 빨랫줄에 착착 걸어놓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누런테이프로 해서 벽이나 문에 붙여놓곤 했습니다. 떠올려보니, 예전 우리 집에 놀러오시는 분들이 ‘작품에다가 테이프를 그렇게 붙여놓으면 어떡해요?’ 하고 물었구나 싶습니다. 그림이든 사진이든, 작품으로 여기면 작품이지만, 작품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나 스스로 즐기고 싶고, 내 이웃하고 더욱 가까이 즐기고 싶어서 이렇게 붙여놓습니다. 언제라도 스스럼없이 즐기고, 언제라도 떼어낼 수 있습니다. 다음 그림이나 사진이 나오면 다음 그림이나 사진을 붙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이나 사진은 누구한테라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습니다. 어디 돈을 바라는 사회단체가 있다면 잘 여미어서 그림틀이나 사진틀에 담아서 알맞는 값을 받고 팔아서, 그림이나 사진 판 값을 모두 바치기도 합니다.


.. 암기할 수밖에 없다, 라고 선생님과 동급생들이 입을 모아 말하지만, 나는 그런 방법을 써 오지 않았었다. 암기는 하지 말라, 아무리 하더라도 사전에는 이기지 못한다. 만물박사는 되지 말라, 너희들이 만물박사가 된다 하더라도 백과사전에는 이기지 못한다. 너희는 왜 야간중학에 왔는가? 왜라는 의문에 매달릴 때 그것이 너희들에게는 진짜 공부이다 ..  (81쪽)





 박정희 할머님이 그리는 수채그림을 ‘미술사’라는 테두리로 보면 어떤 대접을 받을까 하는 데로 생각이 이어집니다. 글쎄요, 우리 나라 미술 역사에서 수채그림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는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어떤 사람들 어떤 그림이 들어가 있을는지.

 역사에 담는 그림은 무엇이며 역사로 다루는 그림은 무엇일는지. 미술평론가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그림을 보면서 글을 쓰고 논문을 쓰고 책을 쓰는지. 신문이나 방송에서 알리는 그림잔치 소식은, 어떤 그림을 그린 사람들 소식을 알리는지.


.. 선생님께서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학생들은 텔레비전, 돈, 연인, 꽃이라는 등의 대답이었지만, 나는 “꿈을 주세요”라고 큰소리로 대답하자, 선생님과 학생들은 모두 놀라 숨을 들이켰다 ..  (91쪽)


 할머님은 옆지기보고 “그러면, 지금 한 장 그리고 가지?” 하고 묻습니다.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다른 아주머니들도, “그래요, 지금 그리고 가요?” 하고 묻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아침밥도 안 먹은 몸. 그리고 제 몸은 몹시 안 좋습니다. 지난주부터 앓는 몸살이 아직 다 안 떨어졌습니다. 입술과 코가 부르트고 입안이 다 헐고 부어서 말하기도 힘들고 숨쉬기도 벅찹니다.

 다음주부터 와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몇 번 거듭 말씀을 드리며 자리를 물러나옵니다. 옆지기는 나보고도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하는데, 어찌해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그림을 그리고픈 마음도 있으나, 그러자면 십만 원인데. 요즘 우리 형편에 오만 원까지는 더 치를 수 있다지만 십만 원이라면.

 그러나 여든여섯 그림할머님한테 그림을 배울 수 있는 나날도 앞으로 얼마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때는 기다리지 않는 법이라고, 언제 찾아오는지 알 수 없는 법이라고, 왔는지 모르고 지나치다가는 그예 돌이킬 수 없게 되는 법이라고, 나중에 돈이 조금 넉넉해져서 그림을 그릴 틈이 주어진다고 할 때에는 그림할머니가 이 세상 분이 아닐 수 있어요. 그때 가서 아이고, 저번에 그림 배우자고 할 때 배울걸, 하고 땅을 친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 1일 1과, 소화해 가는 수업은 선생님도 허탈하겠지만 우리 쪽은 더욱 허탈하고 비참하다. 배운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의 원점을 확신하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왔는데, 이 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  (93쪽)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송림초등학교 앞에서 이삼학년 쯤으로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가 계집아이 것으로 보이는 신발 한 짝을 땅바닥에 패대기를 쳤다가 하늘 높이 집어던졌다가 발로 찼다가 하면서 천천히 걷습니다. 아이 옆으로는 윤선생영어교실 사람들이 어깨띠를 두른 채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구스르는 일’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찰 한 사람이 지나갑니다. 파란 조끼를 입은 공공근로 아저씨 두 분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 사람도 아이가 신발 한 켤레를 패대기치고 던지고 밟고 차고 하는 짓을 말리지 않습니다. 슬쩍 한 번 보았다가 지나갑니다. 우리 둘이 아이 바로 뒤까지 걸어갑니다. “어이?” 하고 아이를 부릅니다. “네?” 하고 뒤돌아보는 아이한테, “네 신발은 아닌 듯한데 이렇게 던지고 차고 하니?”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너희 반 여자아이 것은 아니고?” “아니오, 떨어져 있던 거 주웠어요.”

 아이를 타일러서 보냅니다. 옆지기와 함께 초등학교 앞으로 돌아와서 문간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습니다. 아까는 아이 하는 짓을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그제야 다가와서 이것저것 묻습니다. 웃는 낯으로 이러쿵저러쿵 대꾸해 주었지만.






.. 김혜미자 씨의 안내로 국립도서관에 갔다. 이 건물은 전두환 대통령 시대에 일본에 조사원을 보내어 그것을 참고로 건축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넓은 부지에 8층 건물의 초근대적인 도서관으로, 인터넷실, 컴퓨터실, VTR, CD, 신문열람실, 별관의 식당 등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러나 이곳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의 사람일 듯 싶다. 09:00시부터 17:00까지가 개관시간이고, 오늘도 학생 중심의 젊은이들밖에 없었다. 특히 지방 사람들에게는 전혀 인연이 없는 시설이다 ..  (147쪽)


 집으로 돌아옵니다. 한쪽에 쌓아 놓은 상자더미를 뒤적거립니다. 영화잡지를 오려서 겉에 붙여놓은 상자 하나를 꺼냅니다. 끈이 옥매듭으로 되어 있어 가위로 끊습니다. 안을 열어 유치원 때 받은 상패와 사진을 꺼내고, 거의 서른 해가 묵은 주판을 꺼냅니다. 어릴 적 형하고 놀던 탁구채와 탁구그물을 꺼냅니다. 탬버린을 꺼냅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쓰던 스케치북을 꺼냅니다. 형이 고등학생 때 쓰던 학교 허리띠를 꺼냅니다. 42인치짜리라 그런지 참 깁니다. 고등학교 교련옷 바지가 한 벌 나옵니다. 우표 담은 상자가 하나 있고, 수류탄 모형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1991) 동인천 대동화방에서 퍽 비싼 값을 치르고 샀던 그림물감이 하나 나오고, 국민학생 때 형한테 물려받아서 쓰던 벼루도 하나 나옵니다. 붓도 한 묶음 있으나 털이 다 빠져서 못 씁니다. 파레트도 있습니다만, 파레트를 마지막으로 쓰고 난 뒤 씻어 놓지 않아서 녹이 다 슬고 못 쓰겠군요. 그렇지만 그림물감 하나는 아직도 쓸 만합니다. 열일곱 해를 묵은 그림물감이란 말이지? 후후.





 (3) 한국말 배우는 일본 할아버지와 《마음의 조국, 한국》


 《마음의 조국, 한국》을 세 번째 읽고 덮습니다. 이제는 책꽂이에 고이 모셔 놓으려 합니다. 다카노 마사오 할아버지. 1939년에 만주에서 태어난 할아버지는 만주땅에서 아버지를 잃고(전쟁으로 죽음), 어머니하고는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에 헤어져서 끝내 못 만납니다. 어린 나이부터 홀몸이 되어 길거리에서 양아치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길에서 굶은 데다가 꽁꽁 얼어붙어 죽을 뻔했는데, 넝마주이로 있던 재일조선인 한 분이 마사오 씨를 거두어들여서 살려냅니다. 이때 스무 살짜리 철부지 양아치 마사오는 처음으로 ‘세상에도 빛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고, 자기 이름은 있어도 자기 이름을 한 글자도 쓸 줄 모르던 어두움에서 깨어납니다. 스무 살에 야간중학교에 들어가 스물네 살에 마치면서, 일본땅에서도 ‘글 한 줄 모르며 살아가는 아주머니와 아저씨와 할머니’가 몹시 많음을 처음 알게 됩니다.


.. 스무 살에 도쿄의 아라카와 구중 야간학급에 가입학. 일본인이 되기 위해 호적을 만들고 야간중학생이 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학교 책상에 앉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차별없는 사회를 알았다. 일본에 헌법이 있다는 것을, 아동헌장이, 교육기본법이, 학교교육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살 권리’와 ‘배울 권리’를 빼앗아 가는 놈들은 누구 하나 지탄받지 않고, 빼앗긴 우리가 왜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는가. 한 장의 종이쪼가리로 ..  (20∼21쪽)


 철부지 양아치한테 빛을 베풀어 준 넝마주이 할아버지는 어느 날 아침 싸늘한 주검이 됩니다. 공무원들은 넝마주이 할아버지 주검을 쓰레기 치우듯 갖다 버립니다. 젊은 마사오가 할 수 있던 일은 오로지 주먹을 부르르 떨고 이를 덜덜 갈기. 그렇지만 이때 일을 잊지 않습니다. 마음에 새깁니다.

 어느새 자신을 거두어 준 넝마주이 할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된 마사오 씨. 자기 앞으로 남은 삶을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며 어떤 사람으로 보내야 하는가를 놓고 몹시 머리앓이를 합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가기로 합니다. 한국으로 가서 한국말을 배우기로 합니다.


.. “일본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은 어디입니까?”라고 흔히 질문을 받는다. 다른 나라 학생은 바로 자기 나라의 명소를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는 야간중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로 나타낼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 도쿄의 ‘긴자’라고 말하는 자기 자신이 서글펐다 ..  (86쪽)


 1998년에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와 봉천동 어머니학교에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거의 해마다 틈을 내어 한국에 찾아옵니다. 지난 2007년 5월에도 한국을 찾아왔습니다. 마사오 할아버지는 한국에 와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찾아가서 할머님들을 뵙습니다. 인사동 한쪽 귀퉁이에 자리를 마련해서 ‘인간선언’ 네 글자를 새긴 옷을 입고 글을 대자보 비슷하게 써붙이면서 당신이 쓴 책을 손수 팝니다. 책을 팔면서 한국사람들하고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젊은 사람한테는 젊은 넋이 무엇인가를 귀기울여 들으려고 하고, 나이든 사람한테는 나이든 사람 얼이 무엇인가를 귀담아서 들으려고 합니다.


.. 거리에서 익히는 말은 살아 있어 빛이 난다 ..  (209쪽)


 어쩌면 올해 5월에도 다시 한국을 찾아올는지 모릅니다. 벌써 4월에 한국을 찾아와서 길거리에서 한국을 느끼고 한국사람을 만나셨는지 모릅니다. 마사오 할아버지는 “거리에서 익히는 말은 살아 있어 빛이 난다”고 했는데, 올 2008년 한국사람들 말도 살아 있다고 느끼실까요. 당신한테 ‘마음 조국’인 한국은, 당신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베풀어 주고 있는가요. (4341.4.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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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43 ― 할머니한테 듣는 ‘사람 사는’ 슬기
 : 타샤 튜더,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 책이름 :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 글 : 타샤 튜더
- 사진 : 리처드 브라운
- 옮긴이 : 공경희
- 펴낸곳 : 윌북(2006.8.20.)
- 책값 : 9800원



 (1) 비와 술과 골목가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저녁입니다. 이제 막 여섯 시를 넘겼는데 날은 꽤 어둡습니다. 매지구름이 짙게 깔렸습니다. 이번 비는 지난주에 내린 비처럼 차갑지는 않습니다. 조금 쌀쌀하기는 하지만, 참말로 봄을 부르는 비로구나 싶습니다.

 봄내음 맡으면서 밟아 줄 흙이 없는 도시이지만, 나긋나긋한 바람을 느끼면서, 집에서 가까운 송현시장으로 걸어가 보면, 아주머니랑 할머니랑 차려놓은 고무다라이에는 풋풋한 봄나물이 가득가득. 찬거리로 무엇을 살까 망설이다가 나물다라이 앞에 멈추자, 나물집 아주머니는 “이거는 냉이고, 이거는 진달래고, 이거는 취나물이고 ……” 하면서 하나하나 알려줍니다. 이름을 알아보는 나물이 있지만, 언뜻선뜻 아리송한 나물이 있는데, ‘젊은이가 고것도 모르남?’ 하는 투는 조금도 없습니다. 마치 어린아이한테 가르쳐 주듯 차분하게 알려줍니다.


.. 1830년대의 미국인들은 젊은 조국에 대해 열등감을 지녔다. 그들은 유럽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나라면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보면 안다. 이 순결한 나라를 상상해 보자.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밑에 덤불이 자라지 않는 숭고한 나무들, 순수한 강과 호수, 하지만 우리는 이 나라의 숲을 없애버렸다. 나무는 사람들의 적이었고, 땅을 개간하느라 거대한 뿌리와 밑동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에 자욱했다. 우리 국민은 받은 것의 가치를 제대로 몰랐다 ..  (130쪽)


 시장을 죽 둘러보니 봄나물을 이곳처럼 가지가지 늘어놓고 파는 데가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사고, 앞으로도 이 집에 자주 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묻습니다. “어떻게 주세요?” “한 근에 1500원씩이요.” “음…….” 무슨 나물을 할까 망설입니다. 쑥을 할까? 냉이를? 홑잎나물을? 그래도 이때 아니면 먹기 힘든 나물을 먹자는 생각으로, 진달래 한 근과 냉이 한 근, 취 천 원어치를 삽니다. 취나물은 천 원어치만 사는 데에도 거의 한 근만큼 담아 줍니다. 가만히 보면, 한 근어치 산 다른 나물도 말이 한 근이지, 아주머니가 저울도 안 달고 담아 주는 품새가 한 근 반이나 두 근쯤 될 듯.


.. 20∼30년 간 기른 화초에서 새싹이 움트는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설레는 일이다 ..  (34쪽)


 집으로 돌아와서 옆지기하고 나물무침으로 밥을 먹습니다. 큰 그릇에 된장을 비벼서 나물밥을 먹습니다. 취나물은 물에 씻어서 그냥 먹습니다. 물에 씻을 때 보니, 나물집 아주머니가 먼저 손질을 깔끔하게 해 두셨습니다. 흙도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문득, 한 근 천오백 원은 무척 싼값이 아니냐 싶습니다. 봄철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나물을, 하나하나 손질해서 파는데, 아주머니 품삯을 헤아리면 다문 500원이라도 더 받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 어머니와 오빠는 내가 중요한 일에 무관심하자 몹시 실망했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여자 청년 연맹(상류 여성들의 사회봉사 단체)’과 ‘빈센트 클럽’을 심드렁해 했으니까. 보스턴 사교계에 데뷔하는 것도 그렇고. 난 오로지 정원에서 일하고 소젖을 짜고 싶어했다 ..  (42쪽)


 냠냠짭짭 맛나게 밥을 먹다가 또다른 생각이 듭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아주머니는 저한테 내내 높임말을 쓰셨습니다. 아주머니 나이를 헤아리면 저는 아들 뻘일 텐데, 아들도 맏아들이 아니라 막내아들쯤 될 텐데, 어쩌면 손주를 본 할머니일지 모르는데.

 아주머니는 당신 나물집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한테 높임말을 쓰지 않았을까요. 또한, 나물이름을 제대로 모르는 젊은내기한테도 높임말로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요. 그저 돈 몇 푼으로 사먹을 줄은 알아도 손수 들판이나 산으로 가서 뜯거나 캐어 먹을 줄 모르는 우리들 젊은내기를 안쓰럽게 생각할 수도 있을 터이나, 귀엽고 애틋하게 돌아보아주는 마음결은 아니었을까요.


.. 나는 개들을 제대로 먹이려고 무척 애를 쓴다. 깡통에 든 사료는 먹이지 않는다. 꿈에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녀석들에게 집에서 만든 수프나 염소 고기를 먹이고, 마늘을 듬뿍 먹게 한다 ..  (56쪽)


 우리 집 둘레에는 자그마한 구멍가게가 골목마다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우리 동네 구멍가게는 열한 군데? 아니 큰길 건너편까지 치면 열다섯? 열일곱? 스물? 걸음이 닿는 데까지 치면 서른이나 마흔 군데가 넘습니다. 전철역 둘레까지 치면 쉰 군데도 넘고 예순 군데, 아니 백 군데까지 헤일 수 있을 만큼 아주 많습니다.

 이 구멍가게는 말 그대로 ‘구멍 하나 낸 듯한’ 가게들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당신님들 사는 집에서 방 한 칸을 터서 만든 구멍가게로 보입니다. 달삯 받고 내어주는 그런 가게가 아니라, 조그맣게 꾸리면서 골목집 동네사람을 마주하며 장사하는 가게입니다. 골목골목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디 먼 데까지 가서 장만해 오기에는 멋쩍고 그때그때 써야 할 자잘한 물건을 갖추고 있는 가게입니다. 150원짜리 볼펜부터 귀후비개에 손톱깍이에 라면에 장기판과 바둑알에 100원짜리 소시지에 50원짜리 초콜릿과 알사탕을 갖춘 작은 가게.

 며칠 앞서였습니다. 우리 동네 골목가게 가운데 한 곳에 찾아갑니다. 저는 이곳이 그다지 내키지 않아 발길을 끊고 있는데, 옆지기가 가 보자고 합니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구멍가게거든요. 그러면 옆지기 구경삼아 가야지 하고 들어갑니다. 들어갔으니 무어라도 하나 들고 나와야겠다 싶어서, 저는 막걸리 한 병을 고르기로 합니다. 냉장고를 열고 막걸리 한 병을 꺼내는데 유통기한이 두 주 지났습니다. 헉, 두 주나 지난 막걸리……. 꺼낸 막걸리를 집어넣고 옆엣것을 봅니다. 한 주 지난 막걸리입니다. 다른 막걸리 유통기한도 비슷비슷.

 뒤에서 구멍가게 할머니가 부릅니다. “왜? 유통기한 지났어?”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말을 거듭니다. “뭘, 젊은 사람들이 눈이 좋으니까 알아보지.”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모두 ‘유통기한 지난 막걸리’를 치울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유통기한이 두 주가 지난 막걸리라면 석 주 앞서 들여놓은 물건일 텐데, 맥주나 소주가 아닌 막걸리를 이렇게 두고 있다니. 한두 병도 아닌 모든 막걸리가.


.. 하지만 오래된 물건들을 지닌 것은 내가 소중히 다루기도 했고, 집안 어른들이 잘 간수한 덕분이다 … 나는 다림질, 세탁, 설거지, 요리 같은 집안일을 하는 게 좋다. 직업을 묻는 질문을 받으면 늘 가정주부라고 적는다. 찬탄할 만한 직업인데 왜들 유감으로 여기는지 모르겠다. 가정주부라서 무식한 게 아닌데. 잼을 저으면서도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을 … 물레질, 뜨개질, 직조를 하노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자급자족하고 싶고, 내가 쓰는 물건을 어떻게 만드는지 익히고 싶다 … 내 물레는 1700년대부터 집안에서 쓰던 것이라, 페달이 많이 닳아서 매끄럽다. 혹시 오래된 나무의 감촉을 좋아하지 않는지? 쇠처럼 차지 않고 손에 닿는 느낌이 부드럽다 …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이다. 난 하루에 한 시간씩 천을 짠다. 이런 일은 조금씩 조금씩 해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 우리는 선물을 다 직접 만들려고 애썼다. 뜨개질을 하고 종이상자를 꾸미고 나무를 깎아 엄마 거위와 아기 거위 네 마리를 만들었다 ..  (142∼158쪽)


 제가 단골로 가는 구멍가게, 가장 자주 찾아가는 구멍가게에는 냉장고에 술이 하나도 없는 날이 있습니다. 이곳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늘 알맞춤하게 물건을 갖추어 놓기 때문에, 그날 따라 잘 팔려서 금세 동이 나는 물건이 있으면 더 팔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더 많은 돈을 벌고자 더 많은 물건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물건이 떨어져서 없으면 “오늘은 다 팔렸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하면서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다음 구멍가게로 갑니다. 다음 구멍가게에도 우리가 바라는 물건이 없으면 또다른 구멍가게로, 그 옆에 있는 구멍가게로, 또 그 구멍가게에서 스물이나 서른 걸음 떨어져 있는 구멍가게로 갑니다.

 이 가운데 어느 집은 밤늦도록 불을 켜 놓기도 하지만, 웬만한 집들은 저녁 열 시나 열한 시면 문을 닫습니다. 더 일찍 닫는 집도 있습니다. 그저 주어진 대로, 있는 그대로 동네사람을 만나고 동네장사를 합니다.


.. 바랄 나위 없이 삶이 만족스럽다. 개들, 염소들, 새들과 여기 사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다. 인생을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에게 해 줄 이야기는 없다. 철학이 있다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자신 있게 꿈을 향해 나아가고 상상해 온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라면, 일상 속에서 예상치 못한 성공을 만날 것이다.’ 그게 내 신조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내 삶 전체가 바로 그런 것을 ..  (174쪽)


 어제는, 단골 구멍가게 할배 할매가 저녁을 자시고 있더군요. 집에 곁달린 구멍가게에 밥상을 차려놓고 두 분이 마주앉아서 저녁을 자시더군요. 그래서, 한 말씀 여쭈었습니다. “아이고, 저녁 드시는데, 사진 한 장 찍어야겠네요!”


 (2) 몸 냄새


 오늘은 조금 나아졌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집과 도서관을 잇는 계단에 담배 연기 자욱하고 냄새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도서관은 3층에 있고, 우리 집은 1957년에 지은 집이라 그때 문화를 보여주듯이 계단이 참 많습니다. 올라오는 계단짬에는 언제나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아래층에서 일하는 학습지 도매상 아저씨들이 담배를 태운 뒤 계단에 그냥 버려 놓습니다. 이걸 어찌할까 어쩌면 좋나 한참 생각한 끝에, 빈 깡통 하나 놓으면 될까 싶어서, 큼직한 참치깡통 하나를 놓았습니다. 계단짬에 버려진 담배꽁초는 비질을 하여 깡통에 쓸어 넣습니다.

 이렇게 하니 아래층 일꾼들이 계단짬에 꽁초 버리는 일이 줄어듭니다. 그래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담배를 태울 때 깡통 옆에서 태우곤 합니다. 이웃한 다른 가게 일꾼도 우리 계단으로 놀러와서 담배를 태웁니다. 아마, 당신네들 일하는 가게 임자가 담배 태우는 모습을 싫어하는가 봐요.


.. 저녁에 염소 우리에 내려가다가 날씨가 추워지리란 걸 깨달았다. 맨발로 걸으면, 땅의 냉기가 느껴져 다음날 날씨를 짐작할 수 있다 ..  (25쪽)


 그런데 말이지요, 어제 아침에, 이 담배깡통에 불이 났습니다. 갑자기 웬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나 해서 들여다보니까, 누군가 불을 제대로 안 끄고 깡통에 넣어서, 그 안에 있던 종이컵이며 종이붙이(담배 태우는 이들이 버린 쓰레기)에 불이 옮겨 붙었더군요.

 콜록콜록 재채기를 하면서 물을 부어서 불을 끕니다. 그러는 사이 담배 냄새가 제 몸에 배어듭니다. 몇 초 안 되는 짧은 동안임에도 옷이며 몸이며 온통 담배 냄새가 …….


.. 내 삽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아, 본인의 창의력에 흠뻑 사로잡혀 계시는군요’라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상업적인 화가고, 쭉 책 작업을 한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내 집에 늑대가 얼씬대지 못하게 하고, 구근도 넉넉히 사기 위해서! ..  (37쪽)


 계단가 창문을 활짝 열고 여러 시간 있으나 냄새가 안 빠집니다. 오늘까지도 냄새는 다 빠지지 않습니다. 하긴, 불타며 나던 냄새가 빠진다 해도 새로새로 담배를 피우실 테니, 새로운 냄새가 자꾸자꾸 올라올 테지요.

 아이고, 담배 냄새가 이리도 모진지, 이리도 오래 가는지, 이리도 안 빠지고 남는지 이번에 처음 압니다.


.. 난 항상 삽화의 가장자리에 나뭇가지나 리본, 꽃을 그린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가장자리를 꾸미지 않은 적도 없다. 사람들은 가장자리 그림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을 찾아내기를 즐긴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 나오기 때문일 터다. 젖소의 어느 쪽에서 젖이 나오는지, 말을 탈 때 어느 쪽으로 올라타야 하는지, 어떻게 건초더미를 만드는지 난 훤히 알고 있다. 그러니 적당히 짐작으로 그리지 않는다. 내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내 손자들, 친구들이고, 주변 환경은 실제 내 환경이다. 꽃들은 내 정원이나 주변 들판에서 자라는 것들이다 ..  (53쪽)


 그러나, 우리 몸에 배어 있는 냄새는 담배 냄새만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 몸에는 술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 몸에는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과 운동선수한테는 땀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제가 충주에서 살던 때, 자전거를 타고 서울 나들이를 할라치면, 적잖은 사람들이 제 옆에 앉거나 서기를 싫어했어요. 몸에서 땀 냄새가 너무 난다고. 하루 대여섯 시간 넘게 자전거를 타는 사람 몸은 아무리 씻고 씻어도 땀내가 빠지지 않습니다. 땀내를 자연스럽게 여기거나 좋아한다면 모르되, 요즘 사람들은 몸에서 땀내가 나도록 몸을 쓰는 일이 드물다 보니까, 이 냄새가 더없이 고약하거나 괴롭다고 느낄밖에 없구나 싶어요. 여름에는 춥게 살고 겨울에는 덥게 살잖아요. 자가용뿐 아니라 버스나 전철도 에어컨 바람이 얼마나 빵빵한가요. 요즘 도시사람한테는 땀흘릴 겨를이 없어요.


.. 정원을 가꾸면 헤아릴 수 없는 보상이 쏟아진다. 다이어트를 할 필요도 없다. 결혼할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가 아직도 맞고, 턱걸이도 할 수 있다. 평생 우울하거나 두통을 앓아 본 적도 없다 ..  (68쪽)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한테는 흙냄새와 거름냄새, 사무실에서 펜대 잡고 일하는 사람한테는 사무실 냄새와 펜 냄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한테는 기름 냄새가 납니다. 누구나 자기가 일하는 곳 냄새를 몸에 풍깁니다. 누구든 자기가 몸담은 곳 냄새가 몸에 스밉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하고 부모 삶을 몸에 받아들이듯, 우리들 어른도 우리가 깃든 곳 문화와 느낌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옳은 마음과 생각으로 옳은 일을 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저절로 옳고 아름다운 쪽으로 자리잡습니다. 우리가 얄궂은 마음과 생각으로 비뚤어진 일을 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비틀리고 뒤틀리고 구린내를 풍깁니다.

 우리 생각에 따라, 우리 마음 가는 데에 따라, 우리 몸이 움직이는 데에 따라, 우리가 깃든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 냄새는 바뀝니다. 꼭 시골에서 산다고 하여 자연스러운 냄새가 가득하지 않아요.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라 해서 억지스럽거나 딱딱한 잿빛 냄새를 풍기지 않습니다.


.. 가을마다 배가 열리면 나는 병조림을 만든다. 시장에서 산 것보다 훨씬 맛이 좋다 ..  (115쪽)


 저는 충주 산골짝에 살 때부터 고무신을 신었습니다만, 도시인 인천에 와서도 고무신을 신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무신 값이 쌉니다. 한 켤레에 3000원이거든요. 그러나 값보다 좋은 대목은, 고무신을 신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땅을 한결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어요. 바닥이 아주 얇으니, 제 발이 밟는 대로 땅 느낌을 받아들입니다. 시골에서는 흙 느낌을 받아들이고 도시에서는 아스팔트나 시멘트 느낌을 받아들입니다. 이러는 동안 제 몸부터 흙을 밟을 때 제 몸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시멘트나 아스팔트를 밟을 때 제 몸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느낍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서 기를 때가 되면, 이 느낌이 고스란히 제 몸에 남아 있을 테니, 아이한테도 무엇을 가르치면 좋고, 무엇을 보여주면 좋으며, 무엇을 함께하며 살아야 하느냐 하는 생각을 추스를 수 있으리라 봅니다.


 (3) 사람이 살아가는 뿌리를 밝히는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우리 옛사람한테 물려받은 우리 나라 우리 땅 우리 바다 우리 하늘 우리 산과 들 우리 논밭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입으로는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을 읊을 줄 알지만, 몸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라고 느낀다면, 시화호와 새만금을 어찌 ‘죽음이 떠도는 바다’로 만들 생각을 하겠습니다. 원자력발전소를 왜 이리 자꾸 늘리려고만 하겠습니까. 전기를 덜 쓰면서 발전소를 줄일 수 있는 삶으로 바꿔야지요. 찻길이 모자라다고 외치지 말고, 찻길을 줄여서 우리 삶터를 고이 지켜야지요. 자동차를 만들어 팔아야 나라살림이 북돋울까요. 자동차 만드느라 더러워지는 이 나라 삶터는 얼마나 큰돈을 들여야 되살릴 수 있는데요. 아니, 더러워지고 무너진 자연 삶터는 돈으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온전히 마음에 달려 있다. 난 행복이란 마음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이곳의 모든 것은 내게 만족감을 안겨 준다. 내 가정, 내 정원, 내 동물들, 날씨, 버몬트주 할 것 없이 모두 ..  (22쪽)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타샤 튜더 할머니 책을 봅니다. 사진이 많이 들어가서도 그렇지만, 금세 읽고 한 번 더 읽고, 두 번 다시 봅니다. 며칠 사이에 여러 번 다시 봅니다. 그러고도 아쉬워서 다시 한 번 더듬은 뒤, 이제야 책꽂이에 살며시 얹어놓습니다.


.. 조경 계획 같은 것은 없다. 난 계획해서 화초를 심지 않고, 되는대로 쑥쑥 심는다. 많은 꽃이 뒤섞여 자라는 게 좋다 … 뱀의 얼굴을 찬찬히 본 적이 있는지? 얼마나 낙천적으로 생겼는지 모른다. 늘 배시시 웃고 있다 ..  (86쪽)


 타샤 튜더 할머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당신은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고픈 대로 자기 삶을 꾸리려고 하다 보면, 어느 누구도 돈을 갖다 앵기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일해서 먹고살아야 하니 그림을 그릴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할머님은 먹고살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요, 당신이 남긴 이 책 《행복한 사람, 타샤 투더》를 읽어 보니까, 그저 당신 입만 채우는 먹고살기가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는 삶을 꾸려 나가는 길’ 가운데 하나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지고 훌륭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밥은 밥이고 삶은 삶이면서 꿈은 꿈일까요. 밥을 놓을 수 없는 가운데 삶 한 자락을 다부지게 붙잡은 타샤 투더 할머님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품어 온 당신 꿈이 소록소록 묻어난 《행복한 사람, 타샤 투더》를 읽으면서, 또 책을 덮으면서, 할머님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옵니다. ‘네가 아무리 기쁘게 살더라도 그 기쁨이 너한테만 기쁨이라면 너한테도 기쁨이 아닐 수 있다, 네가 아무리 슬프게 살더라도 그 슬픔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 수 있다면 너한테는 슬픔이 아닐 수 있다’는 목소리가. (4341.3.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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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학의 논리 창비신서 44
최원식 / 창비 / 1988년 3월
평점 :
절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책은, 알라딘에는 안 뜹니다. 헐...

 



 - 책이름 : 황해에 부는 바람
 - 글쓴이 : 최원식
 - 펴낸곳 : 다인아트(2000.8.30.)
 - 책값 : 9000원


 이 책 하나 39 ― ‘눈감고 꼼짝않으면’ 어르신이 아닙지요
 : 최원식, 《황해에 부는 바람》을 덮고 나서


 (1) 어느 한 곳에서 태어나서 산다는 일이란


 국민학교 다닐 적부터 고등학교 다닐 적까지, 지역 사회나 역사를 배울 때면 속이 쓰렸습니다. 갑갑했습니다. 지역 자연 삶터를 배울 때에도 까마득했습니다. 도무지 제 고향 인천이라는 데에서 다른 곳과 견주어 내놓거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어 보여서 그러했습니다. 인천에서 나고자란 훌륭한 어른이라든지 빛나는 분들 또한 보이지 않았습니다.

 철없던 그때, 지역 어르신으로 누가 있는 줄 어찌 알았으랴만, 우리들 철부지들이 알아볼 수 있는 자료나 책은 얼마 없었기에 더욱 어려움이 컸습니다. 문교부에서 만든 〈자연〉 국정교과서로 배우던 국민학교 여섯 해 내내, 가장 어렵고 싫고 짜증나고 괴롭던 숙제 가운데 하나는, “우리 지역 천연기념물로 무엇이 있을까요?”라는 녀석. 허허 참, 그때나 이제나 인천에 어떤 천연기념물이 있는가요. 이제는 ‘직할시’에서 ‘광역시’가 되어 옹진군이 인천에 들어왔으니 백령도 물범을 슬쩍 끼워넣어도 되나요?


.. 초기에 개혁이 비교적 순조로왔을 때 호남은 그 어떤 지역보다도 (김영삼) 문민정부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는 얘기를 최근에 흥미롭게 들었다. 정부 정책의 보수 회귀는 스스로 국민 통합의 절호의 기회를 반납함으로써 오늘날의 기이한 지방할거주의의 틈입을 불러온 꼴이다. 역설적이지만 중앙정부가 국민 통합의 실질적 상징이고자 노력할 대 진정한 지방자치도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28쪽/1995)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제가 치를 대입시험이 수학능력시험과 본고사 두 가지로 바뀌었습니다. 이리하여 제가 받는 학교교육은 제 앞선 형이나 누나와는 사뭇 달라집니다. 그러면서 ‘교과서 아닌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주문이 떨어집니다. 교과서는 여러모로 답답하다고 느껴 왔기에 속으로 참 잘 되었구나 생각했는데, 다른 동무들은 ‘공부할 건수만 더 늘어나’ 괴롭다고 했습니다. 중3 때부터 그랬지만, 이때부터 제 가방은 교과서 아닌 책이 절반이나 1/3쯤 차지합니다. 지루한 수업 때에는 교과서 아닌 책을 교과서 밑에 숨겨 놓고 읽고, 자율학습 때에는 대놓고 읽습니다.


.. 일본의 어느 도시를 가도 도서관과 박물관은 그 지역 시민의 자존심의 상징으로 도시의 중심에 뚜렷하다고 하지 않는가? ..  (86쪽/1990)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부터 헌책방 나들이를 합니다. 이때, 인천에서 나고자란 몇몇 문학가 또는 문학평론가를 알게 됩니다. 첫 번째로는 이가림 시인, 다음으로는 최원식 교수.

 가뭄에 단비 내리듯한 이런 분들 책을 하나둘 새로 알게 되고 즐겨읽으면서, ‘왜 이런 분들 글은 우리가 인천에서 배우는 교과서에는 못 실리’는지 궁금해집니다. 또한 ‘이런 분들 책은 왜 우리가 사는 인천에서 널리 알려지며 읽히지 못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이 궁금함은 아직 못 풀고 있습니다. 다만, 지역 어르신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형편, 지역 문화를 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노릇, 지역 역사를 서민 눈높이에서 헤아리며 살아가는 틀거리가 없음은, 인천뿐 아니라 우리 나라 다른 곳도 비슷비슷하다고 느낍니다.


.. 내가 머카서(맥아더)의 공적을 격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익을 수호했던 미국의 장군이었다. 아무리 탁월한 무훈을 세웠어도 외국 장군의 동상을 시의 중심에 모셔놓고 경배하는 도시는 아마도 세계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다 … 어찌하여 외국 장군의 동상은 이처럼 정성들여 멀쩡하게 잘 만들면서, 여타의 인천 기념조각들은 그처럼 조잡할 수 있을까? ..  (90쪽,92쪽/1995)


 인천 아닌 데에 사는 또래 동무나 선후배들이 듣거나 아는 인천은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인천은 바닷가에 있다. 공장이 많아 공기가 더럽다. 서울과 가깝다. 서울과 가까운데 가 보면 볼 게 없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뜬다더라. 인천은 술값이 싸더라. 당구값도 싼데 인천 다마는 세더라. 요새 여기에 하나 덧붙이면, 월미도 바이킹은 사람 죽이도록 재미있더라. 아저씨가 내키면 끝없이 돌리고 또 돌려 주더라.


.. 우리의 학식은 과연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던가? ..  (202쪽/1990)


 국민학교 적 〈사회〉 숙제로 ‘우리 동네 사회와 경제가 어떠한가’ 하는 숙제로 적어낸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집 앞에 경인고속도로 들머리가 있고, 제2부두가 있어서 쉴새없이 자재와 수출입 물건을 실어나른다. 우리 집 앞에는 제일제당 공장이 있고, 학교 가는 길에는 연탄공장이 있어서, 이곳에서 만든 연탄은 기차에 실려 서울로 간다, 개항 100주년 기념탑이 있고(이 끔찍한 탑은 몇 해 앞서 드디어 철거되었습니다), 자유공원에는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한미수교가 아닌 함포외교에 따른 강제개항이었는데 ‘수교’라는 말로 눈속임을 하는. 이 탑은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이 있다는둥 ……. 지금 돌아보면 하나같이 부끄러운 모습이 ‘내 고향 인천 자랑거리’였고, 저뿐 아니라 다른 동무들도 비슷비슷한 줄거리로 숙제를 내놓았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이런 이야기를 가르쳤습니다.





 (2) 서울


 돈 많이 벌며 잘사는 작은아버지 두 분은 서울에 살았습니다(한 분은 인천서 살다가 서울로 갔다가 목포로 옮기시고). 때때로 우리 집 네 식구가 인천에서 서울 강남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갈 때면, 하인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한참 동안 달려 서울역까지 갑니다. 그런 뒤 택시를 타고 가는데 길은 얼마나 멀고 택시미터기 돈은 얼마나 빨리 올라가든지. 나중에 2호선이 뚫리고 나서 택시삯은 덜 들었지만, 구역마다 촘촘히 선 신호등에 막힐 때면 제가 짜증이 다 났습니다. 생각해 보니, 인천에 신호등이 처음 생긴 역사도 짧고, 제 어릴 적까지는 그닥 안 많았습니다.

 인천 공기가 썩 맑지 않았습니다만,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숨이 턱턱 막혀서 일부러 입을 앙다물며 숨을 참기도 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내릴 때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메스꺼웠습니다. 서울사람들은 이런 지하철을 어떻게 타고다니나 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고 보면 요사이 서울 작가들은 뭐 하는지 모르겠다. 귀향할 것도 아니면서 고향타령이나 하든지, 서울의 겉모습에 취해서 관념적 포우즈 속에 생뚱맞은 소리나 하고 있지, 이 중요한 공간을 하나의 지방으로 탐구하는 작업은 가물에 콩나기다 ..  (36쪽/1995)


 그런데 뒷날 제가 서울에서 여덟 해 남짓 살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어릴 적에는 머리 아프고 숨쉬기 어려운 서울에서는 안 살 테야 하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이 그렇게 쉽게 깨질 줄은.

 서울 나들이를 할 적마다 저를 보는 서울사람들이 ‘너, 서울사람 아니지?’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저 사람(어른)들은 어떻게 그걸 다 알까 싶어 놀랐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인천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보면, 내 느낌으로도 ‘저 사람은 인천사람 아니네’ 하는 티가 물씬 풍겼습니다. 말씨도 다르지만 몸짓도 다르고, 바라보는 눈길과 눈썰미가 다르거든요.


.. 우리 사회는 특히 5ㆍ16 이후의 개발독재 아래 농촌 및 지역의 독자성은 파괴되고 서울로 지나치게 통일되었다. 더구나 민주주의의 진정한 기초라고 일컬어지는 지방자치제도가 오랫동안 유보됨으로써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이 서울을 향해 질주하였던 것이다 ..  (53쪽/1991)


 서울과 얽힌 옛말이 여럿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 서울 가는 놈이 눈썹을 빼고 간다. 서울 가서 김 서방 찾는다. 서울놈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 서울서 매 맞고 송도서 주먹질한다.

 이런저런 옛말을 듣고 배우면서 늘 ‘왜 사람을 서울로 보내야 하나? 자기가 나고자란 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면서 자기가 나고자란 곳을 알뜰살뜰 키우면 되지 않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큰일을 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말은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흔히 들었습니다. 사람이 크려면 물이 좋은(?) 곳에서 커야 한다고 말하고, 사람 많은 곳에 가야 돈도 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며 늘 ‘왜? 왜? 왜 자꾸 서울 이야기만 해? 우리 동네 이야기는 왜 안 해?’ 하고 대들듯 따졌지만, 저한테 돌아오는 대꾸는 한결같이 ‘넌, 아직 어리구나.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커서 큰물을 한번 먹어 봐야지.’ 한 마디.


.. 요즘 경인선은 살풍경이다. 인천과 서울 사이가 이제는 빈틈없이 시멘트 건물로 들어차 숨이 막힌다. 경인선 개통 한 세기만에 서울과 인천 사이에 시골은 멸종하고 말았다 ..  (101쪽/1996)


 아버지가 빚까지 얻어가며 마흔여덟 평짜리 새 아파트로 집을 옮기지 않았다면, 저는 인천에 눌러앉지 않았겠느냐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옛날 일이지만.

 그곳이 좁은 우물일지라도, 더 많은 사람과 더 넓은 세상을 못 보는 일이라고 해도, 제가 나고자란 곳에서 조용히, 고즈넉히, 아옹다옹을 하든 쿵떡쿵떡을 하든 제가 선 자리에서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집안 문제를 넘어서, 대학입시 원서를 내야 하는 때가 다가와 고3 담임이 상담을 할 때, ‘웬만하면 인천에 있는 대학교에 가라’는 말에 불뚝불뚝 싫은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왜 거기를 가야 하는데? 재단비리가 철철 넘치는 그곳에 왜 가야 하는데(그때는 끔찍했는데, 이제는 이 비리 문제가 많이 풀렸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학문은 인천에 있는 대학에서는 안 가르쳐 주는데?

 한낱 고3 수험생이 어떤 건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인천이든 서울이든 대구이든 부산이든 제주이든, 대학교에서 꾸리는 학과가 거의 똑같은 모습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서울에 있으면 서울이라는 곳 특성을, 제주에 있으면 제주라는 곳 특성을, 대전에 있으면 대전이라는 곳 특성을 키우는 대학교여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했습니다. 왜 모든 대학교가 한결같이 영문과 일문과 경영학과 의학과 기계공학과 전자공학과 건축과 법학과 무역학과 …… 똑같은 학과를 꾸리고 있는지.


.. 정부는 굴업도 주민 9명이 찬성한다는 것을 방패로 이 중대한 문제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 온갖 쓰레기들은 지방으로 내려보내면서 좋은 것은 전부 서울에 두는 특별시민들과 쓰레기들을 뒤집어쓴 채 핵쓰레기만은 재고하라고 애원하는 지방사람들과 과연 누가 진짜 지역이기주의자들인가? 더구나 요사이 거대언론들은 입만 열면 환경보호를 외치고 있는 중이니 ..  (225쪽,226쪽/1995)


 이런저런 싸움(담임하고 벌인 싸움)과 걱정과 실랑이 끝에, 인천에 있는 대학교에는 원서를 넣지 않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 세 군데에 원서를 넣었고, 두 군데에서 붙어 이 가운데 한 곳에 들어갑니다. 이름하여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종합대학교’인데, 다른 곳과 달리 ‘서양어대’와 ‘동양어대’가 나뉘어 있는 모습이 다르기는 해도 ‘상대’과 ‘법대’가 있고, 용인에는 이공계열학과가 있습니다. 재미있지요.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이렇게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면. 더욱이 이 대학교 신문방송학과는 꽤나 이름났고, 무역학과 역사도 오래되었으니. 서울이란 참, 대한민국이란 참.





 (3) 몸으로 겪어내기


.. 가끔 인천바다도 바다냐는 핀잔 같은 말을 듣습니다. 그때는 그냥 웃고 마는데, 한번 구경 온 사람과 직접 그 속에 사는 사람이 보는 바다는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작은 사물도 그것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사물과 나 사이의 깊은 친교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44쪽/1998)


 1994년에는 인천 왼편 끝에서 서울 오른편 끄트머리께까지 머나먼 전철길을 따라 오징어가 되고 떡이 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1995년부터는 집을 뛰쳐나와 신문사지국에 들어가 신문을 돌리며 혼자살림을 꾸리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군대를 마친 뒤 다시 서울로 가서, 내처 살았습니다.

 이러는 동안 고향이라는 곳은 이름 두 글자만 남고 몸이고 마음이고 훌훌 떨어져 갑니다. 좋아하지 않는 곳이면서 ‘일’ 때문에, 또 ‘책’ 때문에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거의 모든 출판사가 서울에 몰려 있고, 크고작은 알뜰한 헌책방이 서울에 쏠려 있습니다. 걸어서 몇 분 거리로 종로서적(이제는 사라졌으나)과 교보문고와 영풍문고가 모여 있으며, 끝까지 버티고 있는 인문사회과학책방도 서울에 서너 곳 있습니다.


.. 아마도 인천에서 아니 전국적으로도 가장 근사한 일본식(식민지 때) 주택의 하나로 꼽힐 터인데, 교회가 사서 까뭉개고 주차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자동차를 모시기 위해 이 아름다운 건축을 이처럼 파괴하다니. 율목동을 관통하는 도로를 뚫는다고 당당한 기와집 근업소를 흔적없이 부숴버린 몰지각이 다시금 생각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째서 역사의 흔적을 지우지 못해 안달일까? ..  (96쪽/1996)


 2003년 가을부터 서울을 벗어나 충북 충주에서 일합니다. 삶터와 일터가 서울에서 벗어나니, 서울이 사람을 얼마나 잘 빨아들이는구나 깊이깊이 느낍니다. 시골에서는 책방 하나 구경하기 어렵고, 면내나 읍내로 나들이를 나온다 한들 바라는 책 하나 찾을 수 없습니다. 한두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시골버스를 기다리느니, 삼십 분에 한 대씩 있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편이, 책방 나들이에 한결 나았습니다. 사람을 만나려고 해도 서울로, 책을 사려고 해도 서울로, 뭐를 하려고 해도 서울로 …….

 서울에 있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했던 ‘서울 쏠림’을 어릴 적에 이어 다시금 느끼면서, 서울사람은 서울사람대로 서울 아닌 곳 사람은 서울 아닌 곳 사람대로 ‘외로 쏠린 마음’으로 살아가며 서로 못 만나고 있구나 싶더군요. 넘치게 누리는 사람도 딱하고 모자라서 못 누리는 사람도 안쓰럽고.


.. 내 발로 밟고 내 눈으로 보면서 확인한 중국은 독서로 안 중국과 다른 점도 많았거니와, 같다고 하더라도 실감한다는 일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감득했던 것이다 ..  (165쪽/1998)


 지난 2007년 4월, 충주 산골자락에서 고향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또 충주에서 돌아오기 두어 달 앞서부터, ‘동네 한복판 꿰뚫으려는 산업도로’ 막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처음 이 ‘산업도로 계획과 인천시 행정’을 맞닥뜨렸을 때,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다 벌어지는구나, 거짓말이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네 한복판 집을 싹 쓸어내어, 너비 50∼70미터에 길이 400미터 남짓 하게 파헤쳐 놓은 땅을 두 눈으로 보고 그 땅을 두 발로 디디고 서 보니, ‘이거 장난이 아니네. 이거 참말 밀어붙이려나 보네. 이거 밀어붙여서 이 동네를, 이 삶터를 어떻게 망가뜨리려는 속셈이야?’ 하는 생각이 절로 샘솟았습니다.

 새 대통령이 되신 이명박 씨께서 밀어붙이려고 하는 ‘서울-부산 물길(경부운하)’이 한 나라를 더욱 모질게 두 동강으로 쪼개어 버리는 끔찍한 재앙이라면, 두 번째 인천시장을 하고 계신 안상수 씨께서 몰아세우고 있는 ‘중ㆍ동구 관통 너비 50미터 산업도로’는 인천을 더더욱 아프게 두 동강으로 갈라 버리는 못난 재앙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서울-부산 물길’ 문제는, 이 물길이 놓일 터를 우리가 몸소 다녀 보면서 느끼지 못하면 살갗으로 와닿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고용창출 효과-경제성장 효과’라는 숫자놀음에 놀아나기 쉽습니다. 인천 ‘중ㆍ동구 관통 너비 50미터 산업도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 몸소 와 보고 싹 쓸려버린 동네 한복판 허허벌판을 두 눈으로 보고,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이 ‘폭탄 맞은 듯한 모습’을 내려다보지 않고서는, 또 동네 골목길을 거닐어 보지 않고서는, 그리고 서민 동네 바로 옆에 우람하게 늘어서 있는 중화학공장 들을 쳐다보지 않고서는, 살갗으로 와닿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지역발전-균형발전’이라는 허울좋은 사탕발림에 놀아나기 좋습니다.





 (4) 최원식 교수님, 다 아시면서……


 우리 나라 내로라하는 지식인, 또는 ‘사회 어르신’ 들은 ‘서울-부산 물길’ 문제를 높은 목소리로 나무라고 있습니다. 계층과 직업과 성별과 학문갈래 모두를 넘나들면서 한목소리로 꾸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 또는 ‘지역 어르신’ 들은, 당신들 고향이자 어린 날과 젊은 날 추억이 물씬 담겨 있는 곳, 또 당신들 고향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 삶터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판인데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동네 주민이 당신들을 찾아뵈면서 이곳에 이런 문제가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이곳 문제와 얽힌 자료를 꾸준히 보내드려도 아무 말이 없고 아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 저는 시립도서관 근처에 살기 때문에 가끔 제 아이들을 데리고 율목동으로 산책을 나가 옛 근업소, 박두성 선생의 집, 그리고 인천 유일의 주정공장 터였던 기와집 등을 둘러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길이 뚫리고 이 기와집들은 흔적이 없던 것입니다. 물론 도시계획 좋습니다. 그러나 새길을 뚫기 전에 보존해야 할 유적은 없는지 그 동네 토박이들의 의견을 청취해서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은 그 쇠락한 기와집들을 무어 그리 애석해 하느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온고이지신이란 말이 있듯이 미래의 창조적 발전은 전통의 힘으로부터 솟아오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  (178쪽/1989)


 최원식 교수님, 이제는 입을 여실 때가 되지 않았는가요. 교수님이 율목동에 사실 때에는 그 동네 ‘보존해야 할 유적’을 하루아침에 허물어버린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탓하고 나무라고 꾸중하는 글을 쓰셨는데, 이제는 율목동 아닌 다른 동으로 집을 옮기신 탓인지, 당신 예전 집터 둘레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마음을 안 기울이셔도 좋은지요. ‘우리 앞날을 슬기롭게 키워 나가는 힘은 전통에서 비롯한다’고 말씀하시던 그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요. 대학교 강단에서 제자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신가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아무리 교수님이 당신을 스스로 가리켜 ‘저(최원식)는 백면서생입니다’ 하고 털어놓는다 하더라도, 몸도 안 쓰고 입도 안 쓰면서 어떻게 당신 몸과 마음이 깃든 ‘지역’ 문화와 사회와 역사를 지키거나 가꿀 수 있습니까.


.. 자, 인천을 한번 둘러보십시요. 우리 고장 인천은 아름답습니까? 아닙니다. 개발이란 이름 아래 인천은 가장 자연파괴적인 도시로 저렇게 잿빛으로 누워 있습니다. 온갖 폐기물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  (233쪽/1996)


 ‘지역 어르신’이라면서 섬김을 받으나, 섬김에 값하는 마음씀이 보이지 않으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지역 지식인’이라는 떠받듬을 받으며 대학교 교수 자리를 얻으나, 떠받듬에 값하는 몸씀이 보이지 않으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한테는 ‘세상을 꿰뚫어볼 줄 아는 눈’이 틀림없이 올곧게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한테는 ‘세상흐름을 날카롭게 파헤칠 줄 아는 눈’이 환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요, 이런 눈만 있으면 무엇하지요? 눈은 있는데 입이 없다면? 입은 있는데 몸뚱이는 없다면? (4341.3.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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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상 이야기 - 어느 프랑스인이 본 처가의 나라 꼬레
에릭 비데 지음, 니코비 그림, 최미경 옮김 / 눈빛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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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이 책을 읽으며 '단점이 많이 느껴진다'고 했지만,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 책을 쓴 에릭 비데라는 사람이 얼마나 '우스갯소리'로 지금 우리 한국 사회와 문화에서 문제가 되는 대목을 '웃음으로 넘기며 비판해 주며 껴안고 있는'지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이는 '몰라서 대충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느낌과 생각을 이 책 하나를 읽으면서도 제대로 잡아채지 못한다면, 우리들 눈길이나 눈높이는... 우리 세상과 사회를 제대로 못 읽고 겉핥기로 그쳐 버리지 않을까요? 진작에 읽었던 책이지만, 이제서야 느낌글을 하나 띄웁니다.


- 책이름 : 한국의 일상 이야기
- 글 : 에릭 비데
- 그림 : 니코비
- 옮긴이 : 최미경 옮김
- 펴낸곳 : 눈빛(2003.11.15.)
- 책값 : 8500원



 이 책 하나 13 ― 돈만 많이 벌게 해 주면 좋아?
 : 에릭 비데, 《한국의 일상 이야기》



 (1)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침을 먹습니다. 무김치와 배추김치와 마늘절임과 조개젓, 이렇게 네 가지 반찬을 차려 놓고 먹습니다. 밥은 누런쌀에 누런콩으로 지었습니다. 콩은 하루 동안 불리고 누런쌀도 서너 시간은 불린 뒤 짓습니다. 밥그릇이 넘치지 않을 만큼 밥을 담습니다. 밥을 풀 때면 더 담고픈 마음이 굴뚝같은데, 흰쌀밥이라면 두 그릇쯤 먹어야 속이 든든하다고 느끼나, 누런쌀밥일 때에는 한 그릇으로도, 때로는 반 그릇으로도 든든합니다. 한 숟가락 떠서 적어도 서른 번에서 쉰 번은 씹어야 목구멍으로 솔솔 넘어갑니다.


.. 피맛골의 입구 안내판에 써 있는 것처럼, 서울의 역사 유적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지역인데, 이 지역을 철거한다는 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 서울시의 도시개발정책 입안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목표인 모양이다 … 공동의 자산인 환경이, 개인의 자산인 부동산과 영업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당하는 것이다 ..  (168쪽)


 오늘은 일산 나들이를 가는 날. 설거지를 마친 뒤 가방을 챙기고 길을 나섭니다. 배다리 철길다리 밑을 지나 건널목을 두 번 건넙니다. 한 시 조금 넘은 때인데 학교옷 차려입은 고등학교 아이들이 많이 보입니다.

 참외전거리를 지납니다. 과일가게 늘어선 이곳에서 물고기 몇 가지를 파는 할머님은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덥건 춥건 따뜻하건 시원하건, 할머님은 늘 그 자리에서 꼭 그만한 차림새로 손님을 기다립니다.

 과일가게 끝에 자리한 양과자집에 들릅니다. 일산 같은 새도시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옛날 양과자를 두 근 삽니다. 양과자집 아저씨는 낡은 저울로 무게를 답니다. 집에서 당신이 손수 붙인 흰 봉투에 과자를 담습니다. 푸짐한 봉투 둘을 옆지기 가방에 넣습니다.


.. 사실 서울이 가지고 있는 자연과 시골스런 모습이 바로 서울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서울의 매력은 즉각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매력은 깊이, 내부에 숨겨져 있고, 그래서 이태원, 강남, 인사동 등 누구나 찾는 거리만을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진정한 모습을 위해서는 찾아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내의 높은 사무실이 있는 건물들, 사람이 넘치는 백화점 등, 도쿄ㆍ뉴욕ㆍ파리에 비해서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서울의 매력은 도보로, 산보를 하면서 코를 들고 바람을 쐬며, 김기찬의 사진에 등장하는 것처럼 뒷골목을 다닐 때 발견하게 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산에 등산을 가기는 하지만 도시에서는 거의 걷지 않는다. 그런데 걸어다녀야만 두 건물들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시장을 발견할 수 있고,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야채밭, 복잡한 골목 구석에 있는 맛있는 허름한 식당, 막다른 골목에 끼어 있는 구멍가게를 보게 되는 것이다 ..  (109∼111쪽)


 은행에 들러 돈을 찾습니다. 통장이 다 되어 새것으로 바꿉니다. 이참에 전기값(살림집 3660원, 도서관 7960원)을 낼까 하고 창구 직원한테 내밉니다. “아, 공과금은 안 받습니다. 공과금 수납은 저기 문 옆에 있는 기계에서 하시면 되고요, 쓰는 방법은 옆에 있는 직원이 알려줄 것입니다.” 고작 두어 달 앞서까지만 해도 공과금을 받던 은행인데.

 기계로 낼까 하고 잠깐 생각하다가 그만두기로 합니다. 아직 우리 동네 우체국에서는 공과금을 받아 주고 있으니 그리로 가야겠어요.


.. 한국의 진정한 커피숍은 사실 정교하게, 그럴듯하게 실내장식을 한 그런 카페가 아니었다 … 즉 미국에서 들어온 이들 커피숍의 유일한 목표는 뉴욕이나 방콕, 도쿄, 서울이 모두 같은 양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 대학로 같은 데서는 실내장식을 잘해 놓았다는 구실로 프랑스식으로 말하자면 양말 짠 물과 같은 미국식 커피를 황당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  (60쪽, 79쪽)


 은행에서 나선 뒤 지하상가로 들어갑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몇 없다고 느꼈으나 지하상가는 바글바글입니다. 사람숲을 헤치며 전철역 쪽으로 갑니다. 지하상가를 거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지하상가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인천이라는 곳에서는, 동인천역과 제물포역과 주안역 둘레에 건널목이 없거든요. 부평역은 몇 군데 있지만 한참을 돌게 되어 있고, 정작 역 앞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래, 어디에든 지하상가만 꼬불꼬불 어지러이 빼곡빼곡 만들어 놓고, 이곳 사람들 장사를 해야 한다면서 건널목 놓기를 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걷기 힘든 어르신들, 몸이 아프거나 고단한 사람들, 짐을 잔뜩 짊어진 사람들, 유모차를 끄는 어버이들,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 바퀴걸상을 타고다니는 사람들, ……은 어쩌지요. 지하상가 장사꾼들 ‘장사권리(상권)’가, 보통사람들 ‘사람권리(인권)’보다 앞서야 하나요.


.. ‘절도 있는 음주’라고 술병에는 적혀 있지만, 한국인들의 지침서에는 술이든, 목욕탕 물이든, 설거지용 물이든, 난방이나 냉방용 에너지 또는 식사 준비건 항상 절도를 잊고 넘치게 하라고 되어 있다. 매일 남한에서 버리는 음식물만으로도 북한의 주민을 먹여살릴 수 있다고 작가 황석영은 어떤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  (37쪽)


 동인천역에 들어옵니다. 전철이 한참 들어오지 않아, 모두들 한참을 기다립니다. 서울로 떠나는 전철이지만, 낮에는 아주 드문드문 다닙니다. 서울 지하철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전철 시간을 ‘서울 가는 보통 편’과 ‘용산 가는 급행’을 사이사이 맞추어 놓으면 사람들 기다리는 시간과 수고를 훨씬 덜 텐데.

 십 몇 분을 기다린 끝에 소요산 가는 전철 하나 들어와서 탑니다. 제물포역에서 여대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잔뜩 탑니다. 우리 옆자리에 둘이 앉고 둘이 서서 신나게 수다를 떱니다. 연예인 ㅇ씨 두다리 걸치기 문제, 자기네 커플링이 얼마짜리네 하는 문제, 내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으면 어찌하겠느냐 하는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얼마나 옆사람들 수다떨기에 굽히지 않으면서 책읽기에 마음을 쏟을 수 있느냐고 하느님이 시험하는지 모를 일.

 이 여대생들이 서울까지 가는가 싶어서 속으로 한숨을 후유 하고 쉬는데, 부처님이 도와주셨는지 부평역에서 모두 다 내립니다.

 하지만 부평역에서 우루루 타서 우리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큼직한 엉덩이와 허벅지로 자꾸 옆으로 밀어붙이는 아주머니들. 다리 쫙 벌리는 늙수그레 아저씨도 싫지만 엉덩이를 자꾸 밀어붙이는 늙수그레 아주머니도 싫습니다. 두 번째 시험인가요?


.. 나는 “사소한 요소들이 어설플 때 시장은 특히 아름답다”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너무 완벽한 시장은 시장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백화점ㆍ쇼핑센터, 또는 미국인들이 말하는 쇼핑몰이 된다 ..  (50쪽)


 그예 책읽기를 접고 눈을 감습니다. 그냥 자자. 마음을 달래자.

 전철 장사꾼 서너 사람이 지나가고 목소리 높은 사람들 조잘거림이 여러 차례 물결칩니다. 이제 전철은 종로3가. 드디어 내릴 곳. 잠깐 사진관에 들러야 합니다.

 겉옷을 입고 큰가방을 뒤에 멜 즈음, 나이든 아저씨 한 분이 제가 앉던 자리에 앉으려고 잽싸게 다가옵니다. 제가 앉던 자리에 아직 사진기가 얹혀져 있는데. 그 사진기 깔고 앉으시려고요? 아직 짐을 추스르지 못했지만 얼른 사진기를 듭니다. 한두 푼짜리도 아니지만, 한두 푼짜리가 아니라 해도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하면 사진기 망가지기 쉽습니다.

 한 번 더 큰숨을 몰아쉽니다. 내릴 문 앞에 섭니다. 전철이 서고 문이 열립니다. 우리 옆에 선 아주머니 한 분이 먼저 내립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들이 내릴 즈음, 타려고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파란옷을 입은 늙수그레 아주머니 한 분이 깡총 뛰듯 전철에 올라타며 제 오른팔께를 밀칩니다. ‘뭐여?’ 하고 잠깐 사이에 속으로 빠르게 생각하다가 오른팔에 살짝 힘을 줍니다. 아주머니는 “어머나?” 하면서 튕겨집니다. 내릴 사람이 다 내릴 때까지 기다리며 뒤에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아주머니 한 분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먼저 타구선!” 하고 다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말합니다.


.. 손때 묻은 사물에 대한 애착, 일상용품에 대한 이런 애정의 관계는 한국의 현대 사회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한국의 사회에서는 신상품이 광고되고 판매원 등을 통해서 판매가 촉진되며, 사용하던 물건은 버려지거나 바로 교체가 된다 … 광란의 소비는 넘치는 폐기물 처리의 문제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더 철학적인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 사회는 신상품, 새 것, 최신 제품의 사회이다 보니, 대부분의 가정에 십 년 이상 된 물건이 있는 경우가 드물다. 신제품에 대한 열광은 특히 컴퓨터ㆍ휴대폰 등 신기술 상품에 대해서 심하지만, 자동차의 경우에도 그러해서 아직도 거의 새차이고, 번쩍거리는 데도 바꾸는가 하면, 주택의 경우도 이삼십 년 이상을 넘는 경우가 없다 ..  (39쪽)


 옆지기가 작은볼일을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음, 종로3가 전철역에서 작은볼일이라……. 넓디넓은 종로3가 전철역이지만 뒷간 하나 찾기란 몹시 까다롭습니다. 지금까지 알아내기로는 두 군데에 있습니다. 모두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가서 맨 끄트머리 구석에 있습니다. 우리가 내린 곳에서 가까운 쪽에 있는 데로 가 봅니다. 생각했던 대로, 뒷간으로 드나들 만한 문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네. 밑으로 들어가서 갔다 와야겠네요.”


.. 개고기 소비에 대해서 분개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소를 먹지 않고 숭배하는 인도인들이 타 대륙의 쇠고기 소비를 금지해 달라는 압력을 넣으면 타 대륙에서 쇠고기 소비 금지를 수락할 것인가. 또 이슬람교도들이 돼기고기 먹는 것을 금지시키려 한다면 얼마나 가소롭다고 여길 것인가. 인간과 희귀동물에 대한 금식사항을 제외하고는 채식주의자처럼 모든 고기를 삼가지 않는 한, 각 문화 내에서 수용가능한 동물 간의 계급을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  (84∼85쪽)


 13번 나들목으로 해서 밖으로 나옵니다. 바깥에서 맨 먼저 우리를 반기는 모습은 기호 ○번 아무개 후보 걸개천. 기호 ○번 아무개 후보 걸개천은 다른 후보 걸개천과 견주어 엄청나게 많이 나붙었습니다. 문득, 저 아무개 후보가 내건 약속이 무엇이었는가 헤아려 봅니다. 으흠, 으흠, 으흠 …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른 후보 약속하고 그다지 다를 것 없어 보였는데. 그래도 한 가지 뚜렷하게 떠오르는 아무개 후보 약속은 ‘새 집을 50만 채 짓겠다’인데, 새 집이란 다름아닌 아파트 한 가지.


.. 오늘날의 한국은 빨리 돈벌기, 비양심적이라도 쉽게 노력없이 버는 돈에 대한 열망이 강한 것 같다 … 실업자는 사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배척하는 대상이며,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수입원을 상실한 이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  (40쪽)


 2001년부터 단골로 다니고 있는 ㅅ사진관에 닿습니다. 맡겨 놓은 사진을 찾고 티맥스400 필름 열 통을 삽니다. 벌써 여러 달 앞서부터 흑백필름 사기는 하늘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제가 즐겨쓰는 일포드델타400 필름을 주문해 놓은 지도 석 달은 된 듯한데 아직 한 통도 못 받고 있습니다. 오늘 어렵게 장만한 티맥스400 필름도 얼마 앞서 조금 들어온 녀석들이라고 합니다. 필름 한 통 값이 거의 6000원. 예전과 견주어 무척 많이 올랐는데, 앞으로는 이 값보다 더 많은 돈을 치르더라도 물건이나 제대로 구경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너무도 반가운 이 필름에 입을 맞추고 껴안으며 가방에 챙겨 넣습니다.


.. 분당에서 나는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도시는 영혼이 없으며, 도대체 사람을 맞이할 줄도 모르는 그런 곳인 것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울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는 주거지역 중의 하나이다 … 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나는 계속해서 머리속에 질문을 던져 보곤 했었다. 어떻게 똑같이 생긴, 정감 없는, 환경을 무시하는 아파트를 계속해서 짓고 있는 것일까? 이런 종류의 아파트 건설계획은 이미 오래 전에 프랑스에서는 중단이 된 상태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여기저기 조금만 여행을 다녀 보면, 아무리 조그마한 도시라도 어디나 높게 치솟은 아파트들이 있으며, 이런 아파트들은 계속해서 땅위로 솟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  (91∼92쪽)


 3호선 전철을 탑니다. 종로3가에서 3호선 줄기 자리는 매우 좁습니다. 이 좁은 자리에 보호문을 놓는 공사를 합니다. 좁은 종로3가 전철역에는 앉을 자리, 걸상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은 쉼없이 전철역 바닥을 걸레질로 닦습니다. 가방이라도 내려놓을까 했지만 축축하게 젖은 바닥에 내려놓지는 못합니다. 구파발 가는 차는 보내고 대화 가는 차를 탑니다. 터덜터덜 달리는 전철이 구파발을 지나고 드디어 밖으로 나와 햇볕 보이는 창밖 모습이 펼쳐집니다. 오늘은 얼마만큼 새로 ‘올랐나’ 하고 북한산 둘레를 헤아립니다. 그동안 짓고 있던 아파트들은 거의 공사가 끝난 듯합니다. 그런데 그 아파트들 앞으로 펼쳐져 있던 논이 죄다 갈아엎혔습니다. 그 자리에도 아파트를 또 올려세우려나? 이러다가 구파발 전철역 둘레부터 대화역 있는 데까지 죄 아파트만 득시글득시글해지는 건 아닐는지?


.. 한국에 대한 관광안내 책자를 펴 보면, 어떤 책이든지 항상 서울에 있는 동대문과 남대문시장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한다 … 이제 몇 년 지나지 않아 남대문은 미국이나 유럽, 또는 길건너 명동에서 보는 것과 같은 엄청난 규모의 쇼핑센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전통적인 시장은 정감 있고, 근접한 하나의 장소로, 차갑고 특성 없는, 영혼이 없는 현대식 건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시장이 현대의 삶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  (53∼54쪽)


 옆지기 부모님이 사는 일산에 닿습니다. 고맙게 차려 주시는 저녁 밥상을 받습니다. 옆지기 아버님이 말씀합니다. “이명박을 찍어야 나라가 살지.” 옆지기 어머님이나 동생도 비슷한 생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생각해 보면, 옆지기네 식구들뿐이 아니라 요즈음 만나는 둘레사람들이라면 너나없이 이렇게들 이야기합니다. “경제를 살리려면 이명박밖에 없다”고, “우리 같은 서민이 살려면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노무현 찍어 놓으니까 보라고, 이렇게 경제불황에다가 다들 먹고살기 어려워서 난리를 치잖아” 하고.

 ‘우리 아버지는 이번 대통령 뽑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려나?’ 하는 생각이 슬며시 꿈틀꿈틀 합니다. 참말로 당신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서, 먹고살 수 있게 해 줄 만한 대통령감을 찾고 있을까요. 먹고살 만한 높낮이는 어느 만큼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먹고살 수 있으면 될까요.

 돈이 안 중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볼 것이란 오로지 돈 하나뿐일는지요. 옆지기 아버님은 우리 옆지기한테, “진짜로 (대학교) 간판 없이 살 거야? 중졸로 끝낼 거야? 간판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합니다. 옆지기 대신 제가 한 마디 거듭니다. “우리는 간판이 없는 길을 가고 있는걸요. 그리고 간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면서 벽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벽을 허무는 일을 하고 있는걸요.”


.. 외국인들에게 서울의 대로를 건넌다는 것은 두려운 경험이다. 운전자용 불이 빨간색으로 바뀌기를 한참을 기다린 후에 겨우 보행자용 녹색불이 들어오는 데다, 겨우 반쯤 건너면 벌써 보행자용 신호가 깜빡이면서 신호가 곧 바뀔 것이라는 표시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한없이 긴 지하도나 육교가 없는 곳의 이야기이다 ..  (41쪽)


 잠자리에 들기 앞서 잠깐 창밖을 바라봅니다. 아파트 8층인 이 집에서 제법 멀리 내다볼 수 있습니다. 밤에도 불빛이 반짝반짝합니다. 자동차 불빛도 번쩍번쩍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남녘땅 온누리는 밤이 되어도 수많은 불빛으로 환할 테지요.

 옆지기 부모님 사는 이곳 둘레에는 옷가게가 잔뜩 있는데, 모두들 제법 장사가 되는 듯합니다. 우리야 옷 살 일이 없고, 평일 낮이나 아침에만 이 앞을 지나다녀서 사람 구경을 거의 못했습니다만, 어제 들어오는 길에도 새로 문을 연 옷가게들을 보았습니다. 듣는 이야기로는, 주말이 되면 차 댈 곳이 없이 바글바글하다던데.


 (2) ‘한국사람 삶’을 프랑스사람 눈길로


.. 한국 사회는 금융관련 범죄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대하다. 2000년 7월에 3만5천 명이 대통령의 사면의 혜택을 받았는데, 3만 명이 경제사범이었다. 반면에 소위 사상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몇 년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부유한 가정ㆍ명문대와 명문고 출신의 사기꾼들이 노조위원장이나 사회변혁을 부르짖는 사람들보다 대우를 받는다 ..  (153∼154쪽)


 《한국의 일상 이야기》가 우리 말로 나온 지 네 해가 지났고 머잖아 다섯 해가 됩니다. 글쓴이 에릭 비데 님은 네다섯 해 사이에 한국땅에서 어떤 모습을 새로 보았고 어떤 모습이 달라졌다고 느끼고 있을까요. 또는, 자기가 한국사람 삶을 바라본 이야기책을 펴내던 때하고 지금하고 그다지 달라진 구석이 없다고 느낄는지, 또는 자기 눈으로 보았을 때 안타까운 쪽으로 고꾸라지거나 벼랑으로 치닫고 있다고 느낄는지.

 우리들은 제대로 느끼지 못하거나 대충 지나치는 우리들 하루하루요 우리들 한삶인 《한국의 일상 이야기》는, 나라밖 사람이 바라보고 나서 글로 끄적였기에 책으로 묶여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라안 사람이 바라보고 나서 글로 끄적였다면 책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요? 아니, 나라안에 있는 우리 스스로 우리들 하루하루가 어떠하고 우리 한삶이 어떠한 줄을 찬찬히 헤아리거나 살피고 있기나 한지요?

 우리 사회를, 우리 문화를, 우리 교육을, 우리 얼을, 우리 넋을, 우리 정치를, 우리 경제를, 우리 과학을, 우리 예술을, 우리 아이들을 우리 스스로 얼마나 곱다시 껴안으며 보듬고 있을까요. 아니, 껴안기나 할까요. 보듬기나 할까요. 그저 돈만 많이 벌 수 있게 해 주면 그만이라고들 여기지 않나요. 그 돈이라는 것도 지금 곧바로 앵겨 주면 될 뿐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나요. 앞으로 어떻게 되든. 앞으로 이 나라 아이들이 어떻게 살건 말건. (4340.12.1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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