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내가 본 나쁜 점만...

우선 편집의 불만 -> 쉬리 때와 마찬가지로 스펙터클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인물들 사이의 관계나 심리적 발전 과정이 지나치게 축약되어 있어 부자연스러울 정도다. 이는 <쉬리>에서도 고스란히 보였던 단점...

둘째 이데올로기적 균형의 문제 -> 키타조센의 사람들은 한 유형으로 단순화된다. 그냥 잔인한 적이다. 쉬리 때도 마찬가지다. 북조선 사람들 중에서 인간적으로 보이는 인물은 기껏해야 남한 사람에 의해 어느 정도 감화된 인물들 뿐이다.

가족과 전쟁을 대비시키는 일의 맹점 -> 한국전쟁은 단순히 가족을 파괴한 전쟁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전쟁이고 민족통일전쟁이고 국제전이고 어떤 면에서는 내전이기도 했다. 물론 그걸 다 영화 속에 담아내면 그 감독은 천재겠지만... 여하튼 이 영화는 그런 모든 시각들을 버리고 가족과 전쟁을 대비시켰다. 그리고 전쟁 이전은 평화를 전쟁 이후는 잔혹과 슬픔으로 그린다. 그러나 전쟁 이전부터 혼란은 시작되었다. 이 전쟁 이전의 혼란을 제외시킨 것은 의도했든 안했든 이데올로기적 균형감각을 상실하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가족과 전쟁의 대비에 기초하고, 전쟁의 피상적인 이미지를 주로 강조한 영화다. 한국전이 무슨 전쟁인지 혹은 한국전만의 특수성 따위는 그려지지 않는다. 유럽의 어느 전쟁으로 바꿔도 내용상 무리가 없을 정도다. 이 영화에서 역사를 기억하거나 배운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쁜 말만 했다. 일부러 그래봤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02-10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2-12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빠기 2004-02-1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분히 나쁜 말만 할 수 있는, 어떤 이에게는 나쁜 말밖에 할 수 없는 영화입니다.

간달프 2004-02-2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쟁의 코드가 극적이고 드라마틱하니까"라고 예단하고 서사 영화가 필요로 하는 극적인 요소를 깔아뭉갠 것이 이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영화의 내적 구조보다는 외부적 환기에만 지나치게 의존한 것이 이 영화의 한계이자 강점같아요. (예를 들어 형이 광적으로 변신하는 심리적 과정이 너무 허술하게 짜여져 있지요.) 이 영화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긴장(과 해소)은 (영화 내적인) 극적 긴장이라기 보다는 이미지 폭격을 통한 긴장이거나, 외부의 환기에 의존하는 긴장이라고 봐요. 그래서 영화가 끝나면 눈물과 함께 피곤함이 몰려오지요. 나로썬 이 영화가 (역사적으로 나쁠 뿐더러) 영화적으로도 좋은 영화라고 말하기 힘들군요.

간달프 2004-02-25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제규 영화는 모두 봤지만, 언제나 느끼는 것은 그는 극영화(feature film)보다는 광고나 뮤직비디오 쪽에 더 재능이 있는 감독이라는 생각... 혹은 나도 헐리우드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과도한 집착에 길을 잃은 감독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마슈레이가 헤겔과 스피노자를 대립시키고 후자의 손을 들어준 것, 신중형이 파노프스키가 뒤러를 통해 유럽 르네상스를 축으로 하는 유럽중심주의를 구축하는 과정을 비판한 것, 츠베탕 토도로프가 그의 <일상 예찬>에서 17세기 네델란드 장르화에서 발견한 (나의 개인적인 造語지만) '비연속적이면서 순간적인 영혼의 도약' 등은 뭔가 공유하는 바가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그의 '까이에 쇼비지' 시리즈 중 <곰에서 왕으로>편에서, 대칭성 사회와 비대칭성 사회를 대립시킨다. 문화와 자연의 구도가 문명과 야만의 구도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여기서 불교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에 주목한다. 불교는 비대칭성 사회 속에 자연의 힘(空)을 다시 끌어들여 문명과 야만의 구도를 해체하고 문화와 자연의 구도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비대칭성 사회는 외부성(자연)을 내부성(사회)으로 끌어낸(테크네) 사회다. 대칭성 사회에서 자연은 인간을 위협하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베푸는(포이에시스) 존재이고, 곰(혹은 범고래, 표범, 연어 등)은 인간(특히 샤먼이나 전사)과 자연이 제한적으로 교류하는 신비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비밀스런 어떤 것을 끌어내어(테크네) 그것을 자기들 사회 속으로 가져온다. '검'이나 '불과 물을 다루는 능력' 등이다. 자연의 비밀을 가진 곰(곰의 비밀)이 인간 세계로 끌어들여와지고 곰은 곧 왕이 된다. 자연의 비밀을 획득한 왕은 절대자가 되고 인간 세계는 그 절대자를 중심으로 서열화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이전의 대칭성을 상실한다. (반지의 제왕에서 원정대는 사우론이란 악 자체를 제거하기 보다는 반지를 파괴한다. 왜 그렇게 번거롭게? 위의 설명에 따른다면 반지는 자연에서 추출된 검으로 대칭성을 파괴한다. 따라서 사우론이 아닌 반지가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대칭성 사회에 외부는 없다. 자연마저도 이제는 내부의 일종으로 분석,해체,재조립되는 것이 된다. 헤겔식으로 보자면 인간의 안티테제였던 자연과의 대립이 지양되어 인간 세계 속으로 '발전적으로' 흡수되는 것이다. 대립, 지양, 발전이란 구도는 서양에서 좌파든 우파든 공유했던 모델로 그들이 외부로 팽창할 때마다 대립된 외부는 지양되어야 할 자연이 된다. '동양'도 그런 자연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우리(cage)가 완성된다. 공간적 팽창과 함께 과거와 미래도 함락된다. 네버네버 랜드의 동물원의 일원으로 태어나 우리는 거기서 나고 크고 죽는다. 우리의 존재는 네버네버 랜드의 위대함을 장식하는 존재로 머문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코나투스'를 상실한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순간 외부를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불교는 그 외부를 재빠르게 포착하게 해주는 신념체계인지도 모른다. 외부를 발견하는 순간 거대한 우리(cage, we)는 공허한 것이 된다. 우리는 각자 훨훨 날아갈 수 있다. 츠베탕 토도로프의 <일상예찬>에서 예찬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패트리어드: 늪 속의 여우

<매트릭스>의 네오와 스미스,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와 골렘. 일마들은 이렇게 적대적 짝(적대적 쌍둥이)을 이루고 있다.  네오와 스미스, 프로도와 골렘은 자유의지의 두 얼굴 혹은 양극을  대표하고 탐욕과 무절제의 자유(스미스, 골렘)는 자기 희생과 헌신의 자유(네오, 프로도)에 의해 정복됨으로써 그 뻔할 뻔자의 교훈적 이야기가 완성된다. 이런 적대적 쌍둥이 관계가 이 영화 <패트리어트>에서도 나타난다.  전설적 영웅 벤자민 마틴(멜깁슨 분)과 잔혹한 영국군 장교 윌리엄 태빙턴(?  분)이다. 

이 짝패는 잔혹하다는 점에서 대칭을 이루지만 전자는 죄의식에 몸을 떨고 후자는 무도덕적 냉혹함으로 흔들림이 없어 여기선 비대칭을 이룬다. 왜 이런 짝패를 만들었을까?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에서처럼 일부러 균열을 만들고 다시 그것을 더 큰 비젼으로 통합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더 큰 비젼이란 '미국 독립'이란 숭고한(?) 비젼이다. 식민지는 식민지배자들에게 소위 문명적 규범를 맘껏 넘어설 기회의 벌판이다. 여기서 두 명의 식민자(인디언 흉내를 내는 미국인과 여우 사냥을 즐기는 듯한 영국군 장교)가 열라 자유를 누리며 폭력을 행사한다. 한 놈은 인디언을 몰살했고 다른 한 놈은 식민지 미국인을 몰살하는 중이다. 학살자라는 점에서 둘 다 차이는 없지만 벤자민 마틴은 네오나 프로도처럼 한갓 양심은 좀 남은 놈이다.  그리고 그 쥐톨만한 양심에 기대어서 제국으로부터 미국의 독립 정당성을 구축한다. 물론 당연히 날림공사지만...      

설상가상으로 멜 깁슨이 분한 벤자민 마틴에게 진짜 어메리칸 네이티브, 즉 인디언의 이미지를 씌운 것은 그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그 많던 인디언은 다 어디 가고 저기 도끼 하나 들고 휘둘며 뛰는 백인 하나만 남았는가? 그 많던 인디언 다 죽이고 그 땅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이미지까지 도둑질을 한단 말인가? 얼마 전 본 클린트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와 정확히 정반대에 위치하는, 양심도 없는 '국가의 탄생' 영화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간달프 2003-12-28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자민 마틴의 캐릭터는 <지옥의 묵시록>의 커츠 대령(맞나?) 캐릭터와 비슷하다. 식민지 변경을 지배하고 그 곳에서 문명 바깥의 자유를 누리며 고통받는 아웃사이더가 조금 소프트해진 채 그려진다고 할까? <리쎌웨폰>의 멜깁슨의 이미지와도 겹치니 겸사겸사? <지옥의 묵시록>의 말론 브란도는 아예 죽임을 당해야 하지만 <패트리어트>과 <리쎌 웨폰>의 멜깁슨은 국가과 가정의 품에 안전하게 다시 안긴다. 부르조아적 삶에 식상한 사람들이 안전한 일탈과 회복의 사이클을 투사하기에 적당한 캐릭터가 아닐런지?

간달프 2003-12-2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에게 식민지는 일탈과 매혹, 공포의 심연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못 알아들을 말을 하거나 아예 말을 못하거나 심하면 이 영화처럼 그 존재가 (소문만 남거나) 지워져 버린다. 식민지 '벌판', '밀림', '늪', '숲' 따위는 문명의 일원이 서구인이 '여우', '늑대', '인디언'이 되는 짜릿함을 제공하면서 그로 인한 죄의식도 함께 붙여둔다.

간달프 2004-01-05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정작 벤자민 마틴(멜 깁슨 분)이 뒤집어 쓰고 있는 인디언의 이미지마저도 인디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침입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바로 '플로벨' 자신이 그녀 대신 말했고, 그가 그녀를 대변하고 소개하고 표상했다."
 


Mystic River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일방통행로 속에서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이런 인간에게 남는 인생이란 결국 자기 합리화와 회피적 망각 뿐이다. 똑같은 상황이 끊임없이 돌아오고, 그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스스로 무뎌져야 한다.

여기서 人間史는 성숙이나 자각이 아니라 억압된 회한과 무감각의 무한 축적으로 귀결된다. 삶은 상표만 달리 한 채, 끝도 없이 동일한 폐기물로 쌓이기만 하는, 쓰레기 하치장의 산과 같다. 난지도 위에 꽃길과 공원을 만들듯이 우리는 단지 포장만 바꿈으로써 인생을 그야말로 '견딘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렇게 잘 견딘다는 사실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마지막 퍼레이드 장면에서 보여준다. 견디는 일을 퍼레이드로 바꿀 수 있는 능력, 악몽을 길몽으로 변화시키는 이 놀라운 능력 덕에 인간은 공룡 이후 지구에서 가장 번창하는 종이 되었다.

영화의 핵심은 세 명 중 한 명에 의해 차의 빈 자리는 꼭 채워져야 되고, 그 한 명은 자기 이름을 다 쓸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일종의 섭리와 같은) 구도인 듯 하다. 그 구도에 인간이 손을 댈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에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차원이 밑에서부터 발목을 부여잡고 있고, 위로부터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다. 그리고 데이브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처럼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삶은 중단된다. 그가 죽은 후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開明은 뒤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어렴풋이 알지만 스스로 무시할 뿐이다. 아내의 품에 안겨서...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간달프 2003-12-18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의 '올드보이'든, 이스트우드의 '미스틱리버'든 모두 호흐의 <어머니와 아이들>이란 그림 속에서 창밖을 응시한 채 뒤돌아선 아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소위 걸작이라고 뇌까려지는 것들은 대개 안보이게 초월적이다. 현실을 맹렬하게든, 나태하게든 어떤 방식으로 살아도 그걸 극한으로 몰아붙이면 끝이 보이고 결국 낭떠러지 앞에서 망연자실해진다. 이런 태도를 '종교적' 태도라고 봐야 할까? 아마도 종교적인 것이란 스파크처럼 번쩍하다 사라지는 것이리라. 사람이 손대면 개구리가 된다.???

간달프 2003-12-1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에서 한 남자는 범죄자로, 다른 한 사람은 형사로 나온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인간 세계를 의미하는 Middle Earth가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공간이듯 그 둘은 서로를 적대적 보충물로 삼는 하나의 (온전해 보이는) 세계, 즉 인간의 세계다. 그런데 그 세계엔 구멍이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그것이 '절대반지'로, <미스틱 리버>에서는 야구공을 삼킨 하수구 구멍으로 보인다. 이 구멍은 세상의 온전함을 위협하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이다.

간달프 2003-12-18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식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의 역사에 대한 비극적 알레고리같은 것으로? 제 이름을 다 쓰지 못하고 잊혀진 미국 역사 속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로... 공동체적 봉합(surture) 행사로서의 퍼레이드, 데이브를 납치한 '헨리'와 '조지'라는 이름이 주는 능글맞음, 범죄와 정부(형사)의 공모적 뉘앙스,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는, 징그러운 family value... 가히 "국가의 탄생" 수준이다...
 


올드보이

 

우진(유지태 분)이 오대수(최민식 분)에게 궁극적으로 일깨우고자 했던 것은 오대수가 자신의 일을 '기억조차 못한다'는 사실, '인지 불가능한 상태', '무지'였다.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왜 그리 무감각했을까? 이유는 그가 그의 혀를 놀렸을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질서와 안녕을 보지하려는) 익명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였다. 대수가 평범한 소시민으로 그려지는 것은 그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평범할수록 진부할수록 '사회'의 무의식적 대리자(편재하는 경찰관)가 된다. 그리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자에게 가공할 상처를 입힌다.

따라서 우진은 그에게 처방을 내린다. 1단계는 대수를 치명적인 사회의 오염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 2단계는 사회에 의해 오염된 대수의 머릿 속을 복수심으로 말끔히 청소하게 하는 것(그래서 감금되기 전의 대수와 감금 후의 대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순수한 복수심의 화신이자 사회의 그물망 밖의 존재...) 3단계는 그를 다시 사회("더 넓은 감옥")로 돌려보낸 후 우진과 유사한 경험(근친상간)을 겪어보게 한다. 4단계는 자신의 과거를 '정말로' 자각하고 스스로 혀를 자르고 자기 딸을 애인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일이다.

혀를 자르는 부분은 외디푸스 신화를 연상시키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외디푸스는 자기 눈을 찌르고 어머니-아내를 떠나지만, 오대수는 자기 혀를 자르고 딸-아내에게로 돌아간다. 외디푸스 신화는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회/가족제는 보호된 후 모두가 불행해지지만, <올드보이>에서는 복수가 완료되면서 사회/가족제는 파괴된 후 모두가 행복해진다.

르네 지라르의 개념틀을 빌자면, <올드보이>에는 두 가지 폭력이 있다. 순수한 폭력과 불순한 폭력... 오대수의 혀는 순수한 폭력이다. 이 폭력은 사회를 보호하는 폭력으로 사회 구성원의 '무지', '인지불능'을 조건으로 행해진다. 부주의함은 이 폭력의 핵심적 성격이다. 물론 당하는 놈에게는 그냥 말 그대로 '폭력'이다. 우진의 누나가 죽어야 했던 것처럼... 우진이 대수에게 가하는 폭력은 불순한 폭력이다. 순수한 폭력은 무지의 상태에서, 사회(질서)의 정당화를 통해 익명적으로 행해진다. 반면 불순한 폭력은 주인이 확실하며 사회/질서에 대해 위협적이다.

복수심은 불순한 폭력이다. 그것은 법이나 공권력과 같은 것에 의존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수가 산낙지를 질겅질겅 씹는 일, 우진의 뼈와 살을 아작아작 씹어먹어 버리겠다는 충동에 가깝다. 복수심으로 이빠이 충전된 생명력...  여기서 왠지 모를 희열을 느끼는 나는 변태일까? 복수가 완수되면 생명력도 고갈되고 삶도 지속될 수 없다. 우진은 자살한다. 대신, 죽으면서 자신을 닮은 種을 하나 복제하고 떠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대수에게 우진은 은인이다. 진부하고 흐리멍텅하며 미분화된 상태의 대수라는 '인간'을, 눈을 부라리며 생명력으로 가득찬 '야수'로 업그레이드시킨다. 퇴화를 통한 진화일까? 혹시 이 영화 해피엔딩일까?

 


고야, <1808년 5월 3일>, "총을 쏘는 프랑스군의 뒷모습에는 얼굴이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간달프 2003-12-01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민의 무기는 익명적 다수성이고 귀족의 무기는 동원적 전능성이다. 평민은 다수의 그림자 속으로 자기 얼굴을 숨기고, 귀족은 자기 얼굴에 잔인함과 자애함의 이중가면을 씌운다. 귀족의 도덕은 폐쇄적이고 근친적이다. 반면 평민의 도덕은 번식적이다. 평민의 힘은 번식과 확대를 통해 강화되지만, 귀족의 힘은 독점과 집중을 통해 강화된다. 대수와 우진의 싸움은 평민의 도덕과 귀족의 도덕 사이의 싸움이기도 하다.

간달프 2004-01-1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염세적이다. 인간은 본디 착한데 사회는 인간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회가 만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 만악의 근원을 파괴하려는 자 조차도 그 악에 발목이 잡혀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착하든 악하든 무슨 짓을 하든 숙명적으로 자멸한다. 여기서 박찬욱의 위치는? 혹시 스스로 선지자연하는 것인가? 말세를 전파한 요한 흉내내기인가?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