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스 이벤스의 '강'과 '바람'
- <강의 노래>, <센느가 파리를 만나다>, <미스트랄>

요리스 이벤스의 위 세 편의 영화를 보고 그의 일평생의 중심 주제가 '강'과 '바람'이라는 점을 주지받자 불현듯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의 충격적인 마지막 엔딩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프리드리히의 그림도... 


Caspar David Freidrich

카스파 디비트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라는 그림에는 한 사람이 해변에서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까지 펼쳐진 저 괴물같은 바다를 보면서 서 있다. 이 괴물도 생각을 할까? 이 괴물을 경험하면 다른 모든 사상이 다 해체되지 않을까? 니체가 바로 이와 같은 바닷가의 수도사다. 그는 괴물을 바라보면서 규정되지 않는 사상은 일단 사라지게 하고,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 만들기 위한 시도를 준비한다. 왜 확고한 이성의 제국을 떠나서 미지의 열린 바다로 가야만 하는지 언젠가 칸트가 물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머물라고 충고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순수오성의 나라를 단지 두루 살펴본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 측량도 했으며, 또한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에게 그에 맞는 적당한 자리를 정해주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폭풍우 치는 넓은 대양으로 둘러싸인 섬이다. [...] 이 대양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으며, 종종 녹고 있는 빙하가 대륙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코 끝낼 수 없는 모험을 하려는, 하지만 이러한 모험심을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선원들이 결국에는 이 대양에서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발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가 결국에는 실망하게 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3,267)

하지만 니체는 바닷가로 떠났다. 니체의 사상과 함께 가면 목적지가 없다. 그 어떤 성과나 결론도 없다. 오직 끝나지 않은 사고의 모험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종종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모험적 영혼은 노래를 불러야만 하지 않을까? (루디거자프란스키, 117)

[...]

칸트는 이 섬에 머물면서 폭풍우 치는 대양에서 저 악명 높은 물 자체 Ding an sich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쇼펜하우어는 과감하게 더 나아가서 이 대양을 의지라고 명명한다. 니체에게 절대적 현실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며, 괴테의 말을 빌자면 영원의 바다, 다양한 활동, 작열하는 삶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이렇게 이해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어떤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총체적 개념이다. 인식될 수 없는 것들의 대양이라는 칸트의 비유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디오니소스의 철학자 니체는 나중에 자신의 책 <즐거운 학문>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드디어 우리의 배가 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인식하는 자들의 모든 시도가 다시 허용된다. 바다, 우리의 바다가 다시 열렸다. 이렇게 '열린 바다'는 예전에는 결코 없었던 것이다." (3,574) (루디거자프란스키, 118)

요리스 이벤스의 '바람'(혹은 미스트랄)은 칸트나 니체의 '거친 바다'와 비슷하다. 그리고 요리스 이벤스가 <미스트랄>에서 재치있게 언급하듯이 사람들은 바람에 저항하기도 하고 바람과 놀기도 한다. 사람들은 방풍림이나 방풍벽을 쌓아서 바람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고 마을과 도시, 문명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바람 속에서 놀고 연기하기도 한다. 요리스 이벤스에게 강이 코스모스의 세계라면 바람은 카오스의 세계다. '강'은 문명과 연관된다. "센느가 파리를" 만나고, <강의 노래>에서는 문명적 정의를 위해 세계 노동자들의 대동단결을 통해 자본가의 독점을 깨부수자고 부추킨다. 강의 세계는 부덕과 부조리, 비참이 존재하지만 인간 이성에 의한 혁명과 재생이 가능한 질서와 조화의 세계다. 프롤레타리아의 신성한 노동의지와 사회주의 국가의 도래로 그것이 가능케 되는 세계로 그려진다. 반면에 바람의 세계는 그 바깥, 아니 '내재된 바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니체의 <두 개의 방> 이론을 연상시킨다.

"니체는 예술의 '두 개의 방' 이론을 주장한다. 높은 문화는 "사람들의 뇌 속에 말하자면 두 개의 방을 만든다. 하나는 학문을 느끼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이 아닌 것을 느끼기 위한 방이다. 이 방들은 서로 붙어 있으며, 혼란이 없고, 서로 분명하게 나뉘어지고, 서로 연결 가능하다. 건강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한 곳에는 동력이 있으며, 다른 곳에는 제어기가 있다. 환상과 편파성과 열정은 열을 발산하는 것들이다. 열이 과다하면 불길하고도 위험한 결과가 나올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을 막는 것은 학문, 인식의 학문이다." (2,209) (루디거 자프란스키, 305~306)

에른스트 베르트람은 그의 책 <니체-한 신화의 시도>에서 니체를 빌어 '문화'와 '문명'(혹은 독일적 문화와 프랑스적 문명)을 구분하는데 문명은 삶의 유지이며 삶을 안심시키는 것이라면, 문화는 삶의 근원적인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 본다. "문화는 음악의 디오니소스적이고 비극적인 정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문명은, 이것도 물론 필수적인 것이지만 밝고 긍정적인 우리가 살 수 있는 분야에 머문다. 문명은 합리적이지만 문화는 합리성을 초월해서 음악적이고 신비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여전히 영웅적이다."(루디거 자프란스키, 499) [...] "편히 사는 데에는 문명이면 충분한데, 도대체 왜 문화가 필요한 것일까? [...]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일에서 내가 격었던가 - 모든 것이 순조로우면, 그러면 역시 모든 것이 다 끝이 난다." (베르트람, 353) (루디거 자프란스키, 501)

    * 루디거 자프란스키, <니체 -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 오윤희 역 (문예출판사,2004)

    *  European Foundation Joris Ivens - http://www.ivens.nl/

    * 미스트랄(Mistral)이란? - 프랑스의 론강을 따라 리옹만으로 부는 강한 북풍. 하강류(下降流)와 좁은 골짜기로 휘몰리는 분류효과(噴流效果)로 거세지며, 스콜성의 한랭건조한 바람이어서 농작물에 많은 피해를 준다. 론강의 삼각지대인 프로방스지방에서 불어오는 북서풍과 뒤랑스계곡에서 불어오는 북동풍이 합류하는 주변이 가장 강하다. 일반적으로 저기압이 티레니아해 또는 제노바만에 위치하고 고기압이 아조레스에서 중부 프랑스로 진출할 때에 분다. 미스트랄은 한번 불기 시작하면 수일간 계속되는데, 특히 마르세유에서는 연간 거의 100일 동안이나 이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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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글쓰기(혹은 여타의 창작행위)를 통해 자기, 본질, 진리, 전체에 이를 것이란 망상에 빠지기 쉽다. 이 망상은 글쓰기에 근엄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장점이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근엄한 것이 더 이상 쿨하지 않은 요즘에는 그것도 별로 인 듯 하다.

글쓰기에 대한 망상을 이젠 거꾸로 돌려보자. 글쓰기(혹은 여타 창작행위)는 환원 혹은 졸이는(boiling-down)하는 것이 아니라 부피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내가 쓴 것이 나다. 10자를 쓰면 나는 10자고, 100권을 쓰면 나는 100권이다. 10자를 쓰나 100권을 쓰나 알맹이가 없으면 내가 아니라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자그만 책은 그걸 강변한다. ^^  

이를 삶에 대한 망상으로 번지게 해보자. 우리는 마치 어떤 외재적 삶의 공식 혹은 심연의 삶의 원칙이 미리부터 우리를 지배한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이 착각으로 인해 초래된 삶으로부터의 자기 소외에 절망한다. 세상을 탓한다. 삶을 죽이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이 비정한 현대 사회를! 그러나 조금만 틀어보면 자신의 착각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착각으로 두 가지 죄악을 범한다. (1) 우선 자기 삶의 음악과 춤을 죽였다.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을 썰렁하게 만들고 주변사람들도 썰렁하게 만들었다. (2) 그리고 춤추려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객관적 돌뿌리'를 선사한다. 객관적 돌뿌리는 바로 춤을 포기한 그 자신이다. 다른 삶의 암세포가 되는 것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殺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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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6-30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착각 잘 알면서도 절대 걷어내지 못하더군요,

간달프 2004-07-03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착각... 감옥이자 궁전이거들랑요... ^^
 

적합성(congrutiy)와 인접성(contiguity)의 사고

적합성의 사고는 범주성의 사고다. 그것은 사고행위를 위해 일단 한 단계 위로 올라간다. 神/理神/合理 따위의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낯선 존재를 만난다. 이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도대체 신은 왜 저런 존재를 만들었을까?" 혹은 "신이 만든 세계에서 저 낯선 존재의 자리는 어디일까?" 따위의 질문을 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아마도 적합성/범주성의 사고의 시초였을 것이다. 반면 인접성의 사고는 어떨까? 나는 낯선 존재를 만난다. 나는 그 낯선 존재가 나의 적인지 친구인지 아니면 도구가 될지 쓰레기가 될지 생각해본다. 적합성의 사고가 수직적 연관 속에서 이뤄지는 사고라면, 인접성의 사고는 수평적 연관 속에서 이뤄지는 사고다. 소와 펭귄, 그리고 풀을 예로 주고 소와 가장 연관있는 것을 찾으라고 한다면, 적합성의 사고자는 소와 같은 동물인 펭귄을, 인접성의 사고자는 소의 먹이인 풀을 선택할 것이다. 서양에서 '자유연상'이나 '의식의 흐름 기법'이니 하는 것은 어쩌면 서구 사유 전통 속에 존재한 인접성의 사고가 그럴 듯한 명칭을 부여받는 순간이 아닐까 한다. 자유연상이니 의식의 흐름이니 하는 것들은 수직적 사고를 잠시 멈추고 수평적으로 가보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 만큼 서구인들에게는 수직적 사고가 너무 뿌리깊었기 때문일까? 니스벳의 책에서 이를 다루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동양/서양의 이분법을 내밀었다.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인 것을 전형으로 삼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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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ip James의 컴백

마틴 스콜세지는 미국과 미국 문화의 기원을 탐색하는 그의 여정에서 '블루스'를 선택했다. 빔 벤더스의 이 영화에는 미국 대중 문화의 핵심요소가 모두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좋다. 그걸 간단히 세 명의 사라진 블루스 가수를 다룸으로써 전달한다. 눈 먼 윌리 존슨, 스킵 제임스 그리고 J.B. Renoir... 이들은 각각 공유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유점은 '너머'이고 차이점은 각각 '너머', '견딤', '넘어'다. 견디거나 넘어서는 것은 결국 너머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종착된다. 스킵 제임스의 노래는 자신의, 혹은 흑인이나 고통받는 자들의 삶을 노래로 지어부름으로써 이 세상에서 삶을 미소지으며 '견디게' 하는(혹은 Skip하게하는) 방법이다. 반면 J.B.Renoir의 노래는 동정도 정의도 없는 세상에 대한 즐거우면서도 격렬한 외침이면서 그런 세상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자기/요나를 삼킨 고래는 그를 다시 토해낼 수 밖에 없다고 그는 노래 부른다.) 그러나 이 두 명은 모두 눈 먼 윌리 존슨과 마찬가지로 저 '너머'에 대한 동경을 공유한다. 스킵 제임스는 불뚝거리는 삶을 노래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영가 가수가 되고 르느와르는 시키지도 않은 영가를 부르면서 좌중을 썰렁하게 한다. 빔 벤더스는 블루스의 뿌리가 바로 눈 먼 윌리 존슨이 추구했던 '너머'의 세계에 대한 동경에 있음을 거의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그것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광대한 우주와 보이저호로 도장을 찍어놓는다. 그들의 노래는 보이저호에 실려서 그들이 예상하지 못해던 방식이긴 하나, 지구 너머의 세계로 지금도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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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12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Kant로 버무려서 본 영화 <트로이>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라는 책을 보다가 ‘실천의 근본형식들’이란 장을 읽었는데 기가 막히게 도 어제 본 영화 <트로이>의 인물들의 구도와 들어맞는 것 같다.


" 칸트의 실천철학은 그 출발에 있어서 기술적 기량, (행복을 추구하는) 실용적 수완 그리고 도덕적 행위가 인간 삶에서 궁극적으로는 결코 부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양될 수 없는 서로 간의 긴장 관계 속에 서 있다는 근본 신념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인간 행위가 전혀 상이하고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근본 원칙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은 [...] 인간 삶의 실제 상황이다."


" 칸트 사상이 지향하는 바는, 행복과 성공만으로는 인간 실존의 크기를 채울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만약에 우리가 스스로의 요구에 견뎌낼 수 있으려면, 이것들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들은 결코 충분한 확보가 아니다. 이것들은 부족함, 즉 칸트의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에서의 표현을 빌리면 "공허함"(A 393)을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공허함은 보다 높은 차원의 행위 영역에서 채워질 수 있다. 단순한 전략가 또는 실용주의자의 행위가 최후에는 피할 수 있는 그 어떤 실패에서 좌절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는 인간 행위의 온 의미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한 실용적 행위에서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그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한다." 


"기술적인 것의 차원은 결코 자체 목적이 아니며, 항상 단지 수단으로서의 기능만을 갖는다. 그것은 일단 행위를 가능하도록 만들지만 아직 그 행위를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 기량의 명법들은 단지 가언적으로만 명령한다. 수단의 사용이 갖는 필연성은 언제나 목적이라는 조건하에 제약된 것이기 때문이다. [...] 실천철학은 기량의 규칙들이 아니라 수완의 규칙과 도덕성의 규칙을 포함한다. [...] 이제 여기서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임의적인, 관심의 전면에 놓여있는 의도보다는, 이른바 모든 의도들의 의도, 즉 행복이 문제시된다. [...] 수완의 명법들은 ..... 개연적인 조건하에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실연적이고,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조건하에서, [...] 임의적 목적들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부과된 목적들에 관계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행복해지고자 한다. 이는 행위의 기본 전제로서 주어져 있다. 그러나 칸트는 분명히 강조한다. "나는 '네가 마땅히 행복해야만 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의욕하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것을 행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실용적 명법들은 가언적으로 강요하지 절대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도덕성의 도덕적 규칙은 어떤 가능한 (개연적) 의도들이나 실제로 주어져 있는 (실연적) 의도들의 전제하에서 타당할 뿐 아니라 "정언적이고 단적으로 명령한다." 그것은 기술적이거나 실용적인 고려는 도달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엄숙함을 인간 행위 안으로 가져오며, 그 행위에 "직접적이며 내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면 "그 행위는 마치 천상에서 이뤄지는 것같이 그렇게 순수하다."


 

위의 인용문을 나름대로 모식화해 보았다.


<----------------A/a의 공허------------------------>


<---------B/b의 공허------------->


 

         X절대적/필연적 

 

    B실연적

 

   A개연/임의적

     x지혜/도덕적 명법 

 

 

    b수완의 명법

   a기량의 명법

 

 


<--------------------------------------------------------------------->

                          완전한 의미  (“인간 행위의 온 의미의 충족”)


A/a와 B/b는 각각 실존을 다 커버하지 못하는 “공허”를 수반한다.



아가멤논, 오딧세우스, 아킬레우스 비교해 보기


아가멤논은 기량의 명법에 충실하고 임의적 목적에 좌우된다. 그는 무도덕과 변덕스런 탐욕의 전형으로 그의 아비부터 자식들까지 모두 임의적 목적에 의해 변덕스레 휩쓸려 초래된 파국으로 고통받는다. 아킬레우스는 자기 준칙이 절대적 규칙이 되게 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 기준을 절대자, 즉 신에게 맞추고 신과 경쟁한다. 그는 절대적이고 단적인 목적에 충실하다. 실존의 온 의미를 충족시키고자 하며 이로써 자기 정체성 발견에 이른다. 오디세우스는 주어진 목적(실연적 목적)에 충실하다. 그는 이타카 약소국 출신으로 주어진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여 효과를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인용문에도 보듯, 주어진 의도는 그 자체로 마땅한 것은 아니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수완을 발휘해 트로이 원정에 결정적 승리를 공헌했으나 자기 실존의 온 의미는 모르며 자기 정체성 발견에도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에서) 풍랑 속의 바다와 섬들 사이에서 난파당하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돈다. 자궁같은 칼립소에 잠겨있다가 거기서 탈출하고, 사이렌의 자아를 삼키는 유혹을 극복하는 과정은 자기 의식으로 한 단계 씩 전진하는 모습일런지 모른다.


자기만의 욕동의 좁은 세계에서 나온 임의적(개연적) 목적에 휩쓸린 아가멤논은 짐승처럼 사라진다. A/a너머에는 그것보다 월등히 드넓은 ‘공허’가 펼쳐지나 아가멤논은 그 공허를 자각할 만큼 나아가지 못하고 사라진다. 반면 오딧세우스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얻어진 세계(주어진 세계)에서 나온 실연적 목적에 충실한다. 그는 아가멤논이 요구한 출병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리스 연합군의 트로이 원정에 참가한다. 그것은 조국 이타카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아마 세상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딧세우스의 부류일 것이다. 그들은 트로이를 정복해도 정처없는 항해를 멈출 수 없다. 트로이를 정복해서 배의 창고를 채워넣지만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반면 아킬레우스는 신과 대면한다. 신은 절대고 신은 모든 것이다. 절대는 바깥이 없는 것이고 단적인 것이다. 따라서 공허도 없다. 신과 대면하고 신과 씨름하는 일을 칸트는 도덕적인 명령과 연관시켜서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그걸 예술적 유희와 연관시켰다. 아가멤논과 프리아모스의 신은 give-and-take의 신이다. 보통 인간과 별다를 것이 없다. 헥토르의 신은 변덕스런 신이다. 그에게 신이란 인간과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다. 헥토르의 신은 마치 유대교의 신과 유사하다. 그래서 그런지 헥토르는 겸손함과 경건함의 모범이다. 아킬레우스의 신은 질투의 대상이고 경쟁의 대상이다. 아가멤논의 신은 신의 인간화를 통해 인간과 유사해진다면 아킬레우스의 신은 인간의 神化를 통해 인간과 유사해진다.  

 

 

 

우리가 일리아스나 그 밖의 대부분의 그리스 문학에서 듣는 비극적 음조는 이 두 가지 힘, 즉 인생에 대한 정열적인 희열과 변경할 수 없는 인생의 테두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 사이의 긴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나뭇잎의 생명과도 같다. 바람은 나뭇잎을 대지에 뿌린다. 생명력이 넘치는 숲은 다른 나뭇잎을 품게 되어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난다. 그와 같이 인간의 세대는 나타나고 사라진다.

 

이와같은 사상과 이미지는 호메로스에게만 있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그 독특한 심각성은 그 내용에 있으며, 또한 그 내용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장려한 헤브라이의 유사물에서는 이러한 심각성을 찾아볼 수 없다.

 

  인간에 대해서는, 그 나날은 풀잎과도 같다. 들꽃과도 같이 사람은 인생을 보낸다. 바람이 불면 생명은 사라지고, 꽃이 핀 장소는 이제 그 꽃을 알지 못한다.

 

이 시의 색조는 비하와 체념의 색조이다. 즉 인간은 신에 비할 떄 풀잎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이미지는 영웅의 행동이나 업적에서 볼 때 전혀 다른 색조를 띠고 있다. 인간은 無比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고귀한 소질과 찬란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구별이 없는 나뭇잎과 마찬가지로 같은 법칙을 따라야 한다. 거기에는 어떠한 로맨틱한 항의도 있을 수 없으며 -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를 제약하는 제일의 법칙에 대해 어떻게 항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 또한 우리가 중국인에게 보는 바와 같은, 개인은 숲 속의 나뭇잎을 구성해가는 先祖에 불과하다는 체념적인 수용도 없다. 그 대신 비극의 정신인 열정적인 긴장이 있는 것이다.

 

[...] 비극적 긴장을 설명해 줄 것이다. 생명의 위험이 처했을 때만이 가장 가치있는 것을 갖게 된다는 것은 인생의 유한성, 또는 인생 모순의 특징이기도 하다. 영웅은 아마도 죽음에 직면해서만이 용기를 입증하며, 자기의 영광을 획득하는 것이다. 美는 그 이웃으로 위험과 죽음을 가지고 있다.

 

[...] 美는 영광과 같이, 설혹 그 대상이 눈물과 파멸일지라도 추구되어야만 한다. 트로이아 전쟁의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이 생각이 아니었던가. 왜냐하면 그리스 기사도의 완성자인 영웅 아킬레우스는 이 선택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신은 그에게 평범한 생활의 장수와 영광스러운 요절의 양자택일을 주었던 것이다. 이 신화를 처음 만든 자가 누구이든 간에 그는 거기에서 그리스 사상뿐만 아니라, 그리스사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 문화사-문화와 역사와 삶, H.D.키토, 김진경역 (탐구당, 2004) 107-109 

 

[...]중국 주자학과 일본 주자학을 함께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의 경우, 예를 들어 주자 같은 사람들은 과거에 의해 관직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과거라는 것은 중국의 고등문관시험같은 것으로, 당나라시대부터 시작되어 20세기까지 기본적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과거에서는 어쨌든 능력만 있으면 어떤 계급출신자라도 상급관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대부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은 이른바 독서인이자 문인으로, 정치가로서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계급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에게도 똑같이 신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언어와 비극,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도서출판b,2004)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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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6-01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제가 훨 어설프지만 엇비슷한 생각을 한 건 분명한데.. 제 생각은 머리 속에서만 요리조리 맴돌다..." 아 몰라... 브래드 피드가 멋지다 "란 표현 밖에 못하는 데, 님의 글은 ......흐흑
" 아킬레우스는 신과 대면한다. 신은 절대고 신은 모든 것이다. 절대는 바깥이 없는 것이고 단적인 것이다. 따라서 공허도 없다"....." 니체는 그걸 예술적 유희와 연관시켰다."...이래서 제가 저 두 존재를 사랑한다는 거 아닙니까 !!!
아킬레우스의 신은 인간의 神化를 통해 인간과 유사해진다~~ !!! 제가 생각한 게 그거 라니깐요 ....

sunnyside 2004-06-0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트로이] 보고 와서 다시 읽겠습니다~ (본다고 이해할 수 있을랑가는 또 다른 문제이건만. -.- ^^; )

짜우 2004-06-0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이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이지만, 신도 영웅도 인간덕목의 전형을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 애국심과 건실한 덕목에 충실한 헥토르, 명예심에 휩싸인 아킬레스,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패리스와 여인들,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공명심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아가멤논과 그의 형, 내가 그속에 투영될 수 있다면 아가멤논 적이겠지만, 헥토르처럼 살고 싶어할 것 같다. 글구 아킬레스가 마지막 사랑을 찾아 떠남은 좀 짜증났다. 너무 완벽한 전형을 하나 만들어가게 되었기때문에....." 조금씩은 아쉬움이 남는 모델들이 많이 보여서 하나의 영웅이 아니라 모든 영웅들이 만들어졌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