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Vermeer를 세이렌을 향해 가는 오딧세우스에 빗대보는 것은 어떨까? 그는 세이렌의 노래에 매혹되지만 그의 몸은 배의 마스트에 묶여있다. 이와 유사한 내적 긴장이 그의 그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베르메르의 그림에는 그가 활동했던 동시대의 장르화가들과 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는데 그가 포착한 일상은 미덕이 아니라 모호함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인간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모호함이 아니라 그림 속의 모호함이다. 당신 화란의 여타 장르화가와 달리 그는 인간보다는 인간을 넘어선 것에 더 천착했으며 회화야말로 그런 일을 맡을 자격이 있다고 여긴 듯 하다. (그의 <회화의 알레고리>나 <천문학자>) 그는 일상을 화폭에 담아도 사람이 아니라 빛에 더 관심이 있다. 아마도 일상의 사람에 관심을 보인 유일한 예는 <진주목걸이를 한 소녀>가 아닐까? 그러나 이 그림 역시 모호함을 담고 있다. (이 불명확성 덕에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비견된다고 한다.) 이 모호함의 영역은 인간(특히 부르조아 공동체 내의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세이렌의 영역'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빛과 빛깔에서 세이렌의 노래에 도취된다. (따라서 구름은 흰색일 수 없다.) 하녀 그리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그는 그녀에게서 관능의 노래까지 듣게 된다. 관능도 빛과 빛깔의 영역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마스트에 묶인 밧줄을 풀어버리고 저 세이렌의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릴까? 하지만 그는 바다 앞에서 멈추어 선다. 합리적인 이성을 아끼는 부르조아라면 그의 멈춰섬/견뎌냄을 '미덕'으로 찬양했을 사태다. 사실 베르메르는 17세기 네델란드의 도시들이 이뤄놓은 다양한 성과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던 (개신교로부터 개종한) 카톨릭 신자이자 근대적 이성의 찬미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선 뭔가 중요한 것 - 삶 그 자체 - 을 잃어버린다. (이것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언급한 "계몽 이성의 역설"이기도 하다)

세이렌과 오딧세우스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카프카의 <세이렌의 침묵>이란 짧은 글이다. 카프카는 이 신화를 오딧세우스가 아닌 세이렌의 시각으로 보여준다. 가뭇한 수평선 위로 오딧세우스의 배가 나타난다. 오딧세우스는 밧줄과 밀납으로 자신의 몸과 귀를 모두 붙들어 매고 있다. 그걸 본 세이렌은 어이를 상실했다. 특히나 밧줄과 밀납을 창안한 자신의 얄팍한 지혜에 도취된 오딧세우스의 의기양양한 얼굴에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세이렌은 아무 노래도 부르지 않는다. 이것이 세이렌의 가장 무시무시한 막강의 무기였다. 오딧세우스는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세이렌의 노래로부터 안전하다고 착각했다. 오딧세우스는 얼핏 세이렌들을 본다.

"스치는 시선으로 그가 먼저 본 것은 고개를 돌리고 깊이 숨을 쉬는 세이렌들과 그들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 그리고 반쯤 열려진 입이었다."

                  (카프카, <오드라덱이 들려주는 이야기> 중 "싸이렌의 침묵" p.91 (문학과 지성사))

이 구절을 보니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녀 그리트는 오딧세우스의 세이렌이었을까? 베르메르는 그녀의 속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래서 그의 아내가 언급하듯 "음란하다") 밧줄을 풀지는 못한다. 베르메르에게 어떤 식으로든 -  오만한 어리석음이든  자기구속적 나약함이든 - 연민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딱 그만큼, 열정과 절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상태로 정지함으로써 묘한 긴장을 남긴다.


 


화가의 아틀리에, 혹은 화가의 알레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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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9-09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정과 절제 사이의 긴장선 상에 아슬아슬한 상태로 정지함으로써의 묘한 긴장.....^^
재미있는 글 감사드리며 .....__ & _ !!


정답 : 추천 , 펌

간달프 2004-09-09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셨나요? 이 영화 적극 추천합니다.

간달프 2004-09-1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u are a fly on his web. We are all."

베르메르의 장모가 하녀 그리트에게 한 말이다.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대사다. 그 뜻이 명확한 듯 하면서도 모호하다. 왠지 자꾸 되뇌이게 된다.
 


스필버그, '미국'이라는 동화

난 스필버그의 영화는 언제나 미국과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교육의 장이라고 생각해왔다. 영화라는 장르는 유독 미국이란 나라에선 오락적 지향과 함께 그런 교육적 지향이 매우 두드러졌었다. 파시즘의 원조는 독일이나 소련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영국이나 미국도 무시못할 기여를 했다. 히틀러나 스탈린의 선전선동정책은 바로 1차대전 기간 동안 영국과 미국의 매스미디어 선전술을 밴치마킹한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나 독일에서는 새로운 매체를 전위적으로 전유하려는 시도가 문화계에서 강했지만 그것을 탄압하고 영미모델의 미디어 효과를 추구했던 것이다. 스필버그 역시 그 연장선 속에서 나는 이해하고 있다.

톰 행크스는 '전형적인 미국인'의 아이콘이다. 그는 신대륙에 처음 발을 내딛는 - 그래서 유럽적인 것과 상관없는 - 순진한 야만인이다. '터미널'은 미국의 은유다. 이곳엔 온갖 언어와 인종이 교차한다. 이 펄펄 끓는 마그마를 다스리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공항안전관리국장의 방식(이것은 부시행정부의 방식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나보스키의 방식이다. 그리고 나보스키의 방식이 미국의 방식이라고 영화는 주장한다. 나보스키는 미국이 이민자들의 나라이며, 미국은 못 다 이룬 꿈이 이뤄지는 나라라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한 인물이다. 또한 공항당국에 대한 '어중간한' 비판적 시각 역시 미국적인 것이다. 관료주의나 큰 정부에 대한 반감은 미국 역사의 뿌리로 까지 소급할 수 있는 것으로 오늘날 신보수주의의 형태로 계씅되고 있다.

순진한 야만인의 모습은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의 전형적인 등장인물인데, 예를 들어 <Saving the Private Ryan>에서 밀러 대위는 독일어 통역병과 대비되어 유럽적("낡은 유럽")이지 않은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부각시켜주는 인물이다.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이며 쇠약하고 의존적인 통역병에 대비되어 실천적이고 독립적이며 건장하고 인간적인 밀러 대위가 되는 것이다. 그 역시 못 다 이룬 꿈 - 거창한 꿈이 아닌 소박한 꿈 -이 있고 그것이 미국의 꿈이라고 주장한다. 순진한 야만인은 (1) 꿋꿋이 혼자 해나가거나 (2) 현자(mentor)의 지도,관심의 영향을 받는다. 대체로 이 mentor는 말 그대로 우연히 만난 현자("천사"에 가깝다)이거나 아버지, 또는 국가가 된다. <터미널>에서는 그것이 (째즈를 사랑했던) 아버지이고 <라이언일병구하기>에서는 (유럽적인 '큰 국가'가 아닌 작고 사려깊은) 국가/미국 혹은 잠재적이나마 '신의 가호'가 된다. 신의 가호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단지 그 아우라가 미국이나 아버지의 뒤를 비추는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는 미국적인 것에 대한 메타포로 가득하다. <클로즈 인카운터>는 (미국적 시원의 정서라고 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인간들의 공포와 환희의 이중적 감정을 담고 있으며 <E.T.>나 <Jurassic Park>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이 미지의 세계에서는 옛 전통에 찌든 어른보다는 아이나 아이같은 어른이 더 유능하다. <E.T.>와 <Jurassic Park>에서는 아이가 어른의 귀감이며 아이를 통해 어른들이 갱생된다. 이것은 다시 새로운 미국을 통해 낡은 유럽이 갱생한다는 이데올로기적 뉘앙스를 환기시킨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20세기에 세계적 청년문화의 발상지가 되며 전세계에서 '나보스키'같은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종합하자면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로 '미국'이란 동화를 쓰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미국이 그 동화와 일치할 수 없다는 것 쯤은 미국 근현대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금새 알 수 있기는 하다) 그 속에는 악한 자라기 보다는 길을 잘못 든 자가 있고 너무 순진해서 결국에는 성공하고야 마는 半-어른이 있다. 이 성공하는 자는 가족이란 가치를 깊이 존중하고, 독립적이지만 겸손하고 어리숙하지만 용기와 끈기가 있는 자다. 너무도 건전해보이는 그의 세계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지만 동시에 너무 건전해서 삶과 세계의 심연 따위는 보지 못하거나 그런 것 따윈 허황된 것이란 태도를 드러낸다. 그의 영화가 한없이 매력적이면서 또 동시에 한없이 가벼워보이는 이유이다. 미국이 계몽주의의 산물이면서도 계몽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던 이중적인 나라라는 점도 이와 부합한다. 계몽의 궁극적 목표(어른이 되는 것)는 미국인의 길과는 약간 다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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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9-05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달프님 영화 평은 정말 재미있어요, 저 역시 비슷한 이유로 그의 영화를 보며 울며 웃지만
창 너머의 따듯하고 더 할나위 없이 행복한 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웃음짓는 성냥팔이 소녀의 허한 기분 비슷한 것도 동시에 느끼거든요. ^^ 쓰고 보니 좀 격한비유 같긴 합니다만.

간달프 2004-09-05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레시~~^^ "성냥팔이 소녀의 허한 기분"... 절묘한 비유군요. 언젠가 무단으로 써먹겠습니다. ^.~
 


 

[...]1933년 1월 벤야민은 청소년 대상 라디오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마지막회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1927년의 미시시피 홍수에 관한 실화였다. 이것은 "자연"재해로 보이지만 사실은 국가가 자초한 재난이다. 미국 정부는 항구 도시 뉴올리언스를 구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공권력을 발동하여 수마일의 강안 상류를 막고 있는 댐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그 지역 농토에 예상치 못했던 파괴를 초래한 조치였다. 벤야민은 청소년 청취자에게 나체스(Natchez) 농부 형제 이야기를 들려준다. 생산 수단 전체를 잃고 고립된 그들은 범람하는 강물을 피해 지붕 위에 올라갔다.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형은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물 속으로 뛰어든다. "잘 있어, 루이스! 너무 오래 걸린다. 이걸로 충분해." 그러나 끝까지 버텨낸 동생은 지나가던 보트에 구조되었으며, 살아남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원제 The Dialectics of Seeing) 김정아 역, (문학동네, 2004) p.60

코끼리는 힘, 충성, 기억의 지속, 인내, 지혜, 행복한 결혼생활을 의미한다. 흰 코끼리는 태양에 속한다. 불교 - 코끼리는 부처의 성수(聖獸)이다. 흰 코끼리는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의 꿈에 나타나 이 세상을 구원할 왕의 탄생을 알려주었다. 흰 코끼리는 삼보(三寶)의 하나인 법(法), 보살의 탈 것, 동정, 사랑, 친철을 상징한다. 코끼리는 아축여래(阿축如來)의 탈것이다. 기독교 - 코끼리는 뱀의 적인 예수의 상징이므로 발 밑에 뱀을 밟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 정결, 자비의 상징이다. 그리스로마 - 지성을 나타내는 신 헤르메스/매르쿠리우스의 부수물이다. 플리니우스에 의하면 코끼리는 신앙심이 돈독한 동물로 태양과 별을 숭배하며, 초승달이 뜨면 강에서 몸을 씻어 정결히 하고 천국을 부른다고 했다. 로마 미술에서는 장수, 불사, 죽음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힌두교 - 코끼리는 지혜의 신 가네샤가 타는 것이다. (보통은 가네샤의 모습이 코끼리이고 탈것은 쥐로 되어 있다) 신성한 예지의 힘, 사려, 왕위, 무적의 힘, 장수, 지성을 뜻한다. 동쪽의 수호자인 인드라 신은 코끼리 아이라바타를 타고 있다. 세계는 코끼리가 떠받치고 있다.

         진 쿠퍼, <그림으로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이윤기 역 (까치,1996) p.121

자기가 가짜이고 어떤 필연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된 도오루(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속의 주인공)는 자기가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이렇게 역사의 네 번째 반복은 소극으로 변하고, <풍요의 바다>는 그 타이틀과는 반대로 '공허의 바다'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 주인공과 미시마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인식'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마 이 공허함 때문에 미시마 유키오는 지금 '의미하는 것'으로서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행동이 가진 배후를 찾으려고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시마가 설치한 덫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 자기 행동의 '공동 空洞'안에 엄청난 해석의 바람이 불어닥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미시마가 죽은 것은 1970년, 즉 1960년의 고도경제성장이나 신좌익운동이 그 정점을 넘었던 시점입니다. 미시마는 이른바 우익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좌익 과격파에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격파가 그때까지의 좌익과는 달리, 뭔가 적극적으로 실현해야 하는 이념이나 이해를 갖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부정함으로 목적없는 행동의 과격성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시마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공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그는 신좌익 집회에 나아가 "그대들이 천황이라 말해주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연대하고 싶다"라고 언명하고 있습니다. 즉 미시마는 입장은 달랐지만, 그 당시 급진주의radicalism의 태도와 깊이 결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언어와 비극> 조영일 역 (도서출판b,2004) p.18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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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8-29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76000

글 ,  재미있네요 ......  ( 흐흐 그리고 6000 힛 잡았어요`!! ㅎㅎ )

 


간달프 2004-08-29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스! 6000힛... ^^ 하루에 20쯤 힛트하면 1만은 언제쯤 넘을까나?

간달프 2004-08-31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속에서 나체스 형제 중 불어난 물에 자진해 뛰어든 형은 가해자-아이들이고, 동생은 피해자-살아남은자-아이들이다. 영화 속에서 이 학살극이 의미하는 바는 '공허함'이다. 가해자-아이는 혁명을 열렬히 고대했던 베토벤을 연주한다. 그러나 연주가 잘 안되고 아이는 베토벤의 악보에 엿을 먹인다. 혁명의 전망이 보이지 않자 아이는 살인게임이 열중한다. 역겨우리만치 짜증스러운 공허함을 가장 극악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가해자-아이와 피해자-아이 사이에 경계따윈 없다. 감독이 각각의 아이들에게 동등한 이름을 배당했듯이 아이들은 모두 다 똑같이 공허하다. 국가-미국의 부산물. 영화 속 하늘은 오즈의 관조/체념적인 하늘과 달리 신의 심판을 준비하는 하늘이다. 영화 속에서 하늘은 파국의 - 이미 처음부터 파국이다 - 전주를 우르릉거리기 시작한다.

간달프 2004-09-05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에 대한 정성일과 전찬일의 논쟁을 보고 - 특히 전찬일의 "모더니즘 스타일의 반복" 운운한 것에 대해서...

모더니즘은 근대성(특히 부르조아 자본주의)에 대한 서구의 자기반성의 형태 중 하나였다. 과거의 모든 전통적 양식에 反한 래디컬한 입장들이 개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인 우리는 그것을 마치 무슨 전범처럼 받아들였다. 모더니즘의 당대에 대한 혁명성은 석화되고 데생용 아그리파상이나 다를 것 없이 유입된 것이다. (또한 모더니즘이 서구의 초극이란 입장에서 동양적인 것의 발견이란 코드로 전환되기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모더니즘 스타일의 지루한 반복이라고 비판한다면 옳다. 그러나 딱 그 수준, 그 차원에서 한해서만 전찬일의 비판에 수긍할 수 있다.

한마디로 '모더니즘의 지루한 반복' 따위는 없다. 오직 모더니즘을 지루하게 받아들인 한국적 상황 속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따라서 전찬일의 비난은 지시대상도 없이 허공을 맴돈다. 우리는 그런 비난을 하기 전에 영화 자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고 있는지 면밀히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영화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를 대할 때도 반드시 필요한 자세다.

전찬일의 비판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점은 그 영화가 "설명하지 않는 척 하면서 설명하려한다"고 비난한 점이다. 감독이 설명하려 했는지 아닌지 전찬일은 어떻게 아는 걸까? 동성애, 나찌 선전, 총기 구매 싸이트 뭐 이런 것들을 보여주면 뭔가 설명하는 것인가? 뭘 설명하는 것일까? 영화가 나찌즘이 총기애호가 동성애가 콜럼바인 학살극의 원인이라고 설명했다는 말인가? 이 정도가 소위 아시아 최대 영화제의 주요 인사란 자가 영화를 해석하는 방식인가? 영화를 제대로, 혹은 진지하게 볼 생각이 있었다면 "모더니즘의 지루한 반복"이라고 지레 단언하기 보다는 이 영화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부터 제대로 보려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서 "지루한 반복" 운운해도 늦지 않지 않은가?

예를 들어, 나찌 시대 다큐물이 나오는 장면은 어떤 식으로 읽을 수 있을까? 영화 전체와 함께 엮어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이 부분에 대한 나의 해석은 이렇다. 아이들은 나찌 다큐에 그다지 큰 관심은 없다. 여기서 나찌는 아이들의 행동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나찌 시대가 가지고 있는 어떤 조건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목한 것은 그 다큐의 멘트 중에서 나찌의 상징이 힌두교에서 온 것이라고 언급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묘하게 영화의 제목도 환기시킨다. (코끼리, 그것은 힌두교에서 매우 중요한 聖獸로 세계를 떠받치는 동물이다.) 나찌와 힌두교라? 나는 그것이 (서구) 근대의 초극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당시엔 서양의 종말에 대한 논의가 무성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를 "모더니즘 (스타일의 지루한) 반복"이라고 언급한다면 맞는 말이다. 모더니즘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서구 근대성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 것이니까... 따라서 (누군가 지루하다고 여기는) 모더니즘 스타일이 이 영화가 추구하는 바와는 딱 맞는 것일 수도 있다. 모더니즘 형식이 모더니즘의 내용과 만난 것이다. 그게 무슨 잘못인가? 그렇다면 전찬일의 비난은 정말 공허해진다.

오히려 민감한 사람이라면 "모더니즘 스타일" 어쩌구하는 판에 박힌(아그리파상이 지루하다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판에 박힌) 비난을 하기 보다는 나찌 - 코끼리 -모더니즘 -근대의 초극 - 콜롬바인 학살 따위를 연결시키고 있는 감독의 사고방식을 비난했어야 하지 않을까? 좀 더 면밀히 읽어보자면 독일이나 일본에서 '근대의 초극'이라 할 때, 여기서 '근대'는 실상 영미식 자본주의 혹은 국제주의를 칭한다. 콜럼바인 하이의 아이들의 삶은 오늘날 전세계를 쥐고 흔드는 영미식 삶이기도 하다. 그리고 학살자-아이들은 그 삶의 파생물이자 그 삶을 종식시키려는 존재다.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이 영화는 매우 위험한, 그리고 동시에 래디컬한 질문은 해대는 영화가 된다. "이대로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은 걸까?"라고 말이다. 아이들의 학살 행위를 이런 식으로 은밀하게 정치화해도 되는 것일까? 나아가 스타일 상으로나 분위기 상으로 매우 초월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이것은 학살 행위를 형이상학화 내지 숭고화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이에 나는 답을 할 수 없다.

간달프 2004-09-11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스 반 산트는 영화 속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적 실험을 하고 있다. (물론 유클리트 기하학에 대한 여집합적 의미에서...) 그의 영화는 그런 면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콜럼바인고 학살 사건)의 외부성을 포착하고자/진입시키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윤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its_jazzy 2004-09-12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찬일과 정성일의 논쟁을 읽은 적이 있는데 '모더니즘 스타일의 반복'운운하는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웹상에 띄워져 있는 글들은 논쟁의 일부만을 발췌한 것인가요?

간달프 2004-09-12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 21 대담에서 봤는데요. 웹이 아니라 지면으로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its_jazzy 2004-09-1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달프 님의 지적은 제게도 따끔한 지적이 되었기 때문에 한번 보고 싶어서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찬찬히 다시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진의 '비극'에 대한 생각은 마르크스나 크립키의 "목숨을 건 도약"이나 "어둠 속의 도약"과 밀접히 연관된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은 개인적 의도와 사회적 결과의 불일치의 문제일 것이고, "비극적"이라 함은 이런 의도되지 않은 결과에 대해(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개인이 온전히 책임을 져야하며,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나 이유에 대해 어느 누구도 어떤 합리적인 설명을 명백히 제시해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을 요즘 현실에 적용해 본다면, 예를 들어 유영철 연쇄 살해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무관한 나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를 죽여없앰으로써 모든 것이 해소될 수 있다고(혹은 보복으로써 죄값을 치르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극적 인식'의 결여의 결과다. 비극적 인식의 결여는 결과적으로 사회의 은폐를 초래하고 범죄자를 희생양 삼아 악한 공동체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기독교에 대한 나름의 분석에서, 예수란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공동체의 종교였던 유대교가 세계종교인 기독교로 도약했다고 설명한다. 유대교 제의에서 희생양은 공동체의 모순을 대신 뒤짚어쓰는 속죄양인데 공동체 속의 성원들은 공동체의 죄를 모두 희생양에게 지운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라는 희생양이 아무 죄도 없음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공동체의 자폐적이며 자기만족적이며 동어반복적인 상태를 끝장냄으로써, 공동체의 종교가 아닌, '세계종교'가 된다.

이와 유사한 형식이 박찬욱의 복수극 영화들에서도 보인다. 그의 복수극에서 중요한 것은 타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이 순전히 사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고, 따라서 사적 복수로는 모든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건들의 배경에는 '사회적인 것'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클라이막스인 복수의 장면은 하나의 희생제의처럼 그려지는데, 복수하는 자는 공동체의 제사장이고 죽임을 당하려는 자는 죄를 뒤짚어쓴 희생양이 된다. 이 희생양에게 죄가 있는가 없는가? 박찬욱의 영화들은 이 점을 아리송하게 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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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8-26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생양에겐 선택된 죄가 있지요.....ㅎㅎㅎ 그것도 어떨수 없는....
종교는 인류의 죄의식이 만들어낸 희비극의 시작이 아닌가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자는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자이다. 모든 장소를 고향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는 이미 상당한 힘을 축적한 자이다.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자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12세기 독일 스콜라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의 <Didascalion>의 말로, 아우엘바하의 <Philologie der weltliteratur>와 Edward Said의 <Orienatalism>에서 재인용되고 있음.

Bourne Identity와 Bourne Supremacy

'Bourn(bourne)'은 '경계', '한계'를 의미하는 古語. 1편은 주인공 본이 처한 상황을 의미하는 제목이었다면, 2편의 제목은 재미있게도  'Bourne is Supremacy' 라는 의미가 된다. Supremacy는 어느 누보다도 많은 힘, 권위 그리고 지위를 누리는 자리라는 의미로 경계 위에 선 '본'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인간"이란 의미도 된다.

그렇지만 영화에는 두 가지 요소가 충돌하고 있는데 원작자의 경계적(무소속의/고향없는) 정체성에 대한 찬양과 감독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기억의 책임이란 문제가 공존한다. (감독 폴 그린그라스는 아일랜드판 광주학살을 다룬 <블러디 선데이>의 감독이기도 하다.) 아마도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CIA의 랜디에 대비되는 본의 모습이 부각되려면 감독의 색깔이 좀 죽어줘야 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생 빅토르 후고의 유명한 문장을 영화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는 영화 속에서 세 인물을 골라낼 수 있다. 우선 "주둥이가 노란 미숙자"는 트레드스톤의 전 책임자였던 남자(자칭 애국자)가 되고, "이미 상당한 힘을 축적한 자는 CIA의 랜디 국장이, 본은 "완벽한 인간"이 된다. 자칭 애국자인 남자(배역상 이름을 기억못함^^-이하 애국자)는 미국이 고향/조국인 사람이고 랜디는 진실이 고향/조국인 사람이라면 본은 온 세상이 다 타향/타국인 사람이다.

랜디는 시종일관 보편적 '진실'의 세계 속에 사는 사람이다. 이에 대해 양측에 그런 것 따윈 없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애국자와 본)이 있는 것이고 애국자는 자멸하지만 본은 다시 자기 본디 정체성엔 무심한 채 어디론가 날아간다. 본의 기억상실증은 초반에는 짐이었지만 후반에는 날개같은 것이 된다. 단 기억상실증 속에서 기억해야될 책임이 있는 것을 복구한 후에 그렇게 된다. 여기엔 감독의 주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 같다. 여하튼 영화는 주인공의 정체성이 자명하게 밝혀지는 것을 계속 지연시킨다. 영화가 끝나도 관객은 그가 본디 누구였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곤 본의 마지막 대사로 그런 것 따윈 "피곤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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