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아킬레우스나 헥토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헌이나 전승은 없다고 한다.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에게해가 암흑시대로 접어들고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준비되면서 창작되거나 과대포장된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단지 이름과 영광만 있는, 어쩌면 '암시'에 더 큰 기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두 인물들은 여타 인물들의 비루함에 대비되며, '탁월함(아레테)'으로 변별된다. 아가멤논은 권력욕에 눈이 멀었고 프리아모스는 자만과 자기도취에 빠졌으며 파리스는 여색에 무너졌다. 그런 모든 불완전한 인간들에 대해, 호메로스는 '탁월한', '완벽한', '신이 질투할 만한'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쑤셔넣은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수백년간의 암흑기 이후 그리스인들에게 처세술이자 윤리교과서처럼 암송되어졌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사실상 당시 판도의 중심인물은 아가멤논이다. 아가멤논을 중심으로 놓고 수많은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 영웅들이 사방으로 연결된다. 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배치하면 세상은 황량하고 무의미하며 쓸쓸해 보일 것이다. 우선 그의 아버지 이야기부터가 아주 잔혹하다 .그의 아버지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의 살벌한 복수극(세네카의 <티에스테스>)은 아마 박찬욱의 <올드보이>에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 오레스테스, 엘렉트라의 이야기(아이퀼로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도 끔찍스런 이야기다. 모두가 인간의 무절제한 탐욕과 욕정에 휘둘려 초래된 잔혹스런 결과에 대한 이야기다.

아킬레우스를 다른 인물들과 결정적으로 변별시켜 주는 것은 그의 초월에의 의지다. 그는 불멸의 신과 필멸의 인간을 비교했고 인간의 유한성을 초월하고 신을 능가하길 원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만의 준칙'이 되었다. 다른 인물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그려냈다면 아킬레우스는 위를 꼬나보면서 자신을 그려냈다. 그는 신을 질투했고 업신여겼다. 신은 영생을 누리지만 그로인해 권태에 갇혀있다. 인간은 모두 죽지만 이름을 남길 수 있으며, 매순간 마지막 삶을 살기에 권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영화 속 아킬레우스의 행위의 준칙이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사촌이 아니라 전우였다. 아마도 헥토르-파리스에 대응하는  형제애를 만들어 극적 대칭 구도를 만들 요량으로 그렇게 바꾼 모양이다. 그 덕에 아킬레우스는 무지막지한 전쟁기계에서 좀 더 인간 쪽으로 움직였다. 거기다가 브리세이스까지 넣었고, '죽음을 초월하는 명예'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으로 결말을 잡아서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했다. 개인적으로는 가슴을 찌른 창을 뽑을 때 그 창에 횡경막과 영혼이 함께 걸려나오는 식의, 내면적 세계와는 전혀 인연없는 호메로스 시대의 거친 인간을 보고 싶었지만 너무도 인간적인(?) 헐리우드 영화에 그런 그로테스크한 요구는 과욕이겠지. 대신 이런 군상은 박찬욱의 <올드보이>나 강제규의 <태극기휘날리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삼천포로 빠지지만, 아무래도 한국인들은 도시인보다는 들판의 인간 쪽에 더 익숙한 모양이다. 한국의 근대사야말로 황량하고 쓸쓸한 들판의 역사였으니... 내면적 세계는 사치였을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는 '양심'을 모르고 '양심적' 병역거부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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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5-30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이를 그렇게 보셨군요...은근히 님 리뷰를 기다렸습니다. ^^;;

간달프 2004-05-31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극우와 극좌

극우는 내부의 폭력을 외부로 전가시키려는 경향인 듯 하고, 극좌는 갈등의 경계를 미분하려는 경향이라고 봐도 될 듯 하다.

극우의 극단적 형태는 전면전(total war)이고, 극좌의 극단적 형태는 자기 해체(Self-distruction)이다.

극우는 궁극적으로 '공멸'을 부르고 극좌는 궁극적으로 '자멸'을 부른다.

이런 식으로 보면 1,2차 세계 대전과 전후 냉전은 모두 극우적 과정이었다. 일본의 극좌 학생운동은 분파주의를 거듭하다가  아사마 산장에서 자멸적인 최후를 마친다. 극우는 외부를 적 혹은 희생양 삼아 하나로 뭉치지만, 극좌는 가능한 갈등의 경계를 모두 활성화시켜서 스스로를 해체해 버린다. 한 때 유행하던 해체주의도 아마 그런 경향의 연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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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살인의추억> <말죽거리잔혹사> <실미도> <태극기휘날리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등 최근의 대다수 한국 영화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듯 하다. 나는 이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명시적으로는 '허우적거림'을, 암시적으로는 '탈출'을 내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판타지(올드보이), 큰 역사(태휘, 실미도), 작은 역사(살인의추억, 말죽거리잔혹사, 효자동이발사), 일상(여자는남자의미래다) 등의 각기 다른 배경 속에서 공통적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대체로 모든 인물들은 허우적거린다. 그들은 자신이 누군지 잘 모르며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 같다. 기껏해야 범인(혹은 자기들을 허우적거리게 만든 장본인들)이 누구인지 알고자 할 뿐이다. 나쁘게 말하면 남의 탓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은 어느 한 순간도 자기 자신과 만나는 환희(혹은 소크라테스를 빌어서 "자신과 일치하는 것" homolegein autos heauto)에는 이르지 못한다. 방황과 좌절이란 측면에서 그들의 영화는 사춘기적이다. 그들이 자주 다루는 것은 '폭력'과 '섹스'다. 사춘기에는 누구나 폭력과 섹스에 집착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 경향이 가장 심하다. 거의 유아적이다. 끊임없이 남의 탓 만 하면서 자기 인식에 실패한다. 어쩌면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장이 멈춘 것이다. 그는 우울한 피터팬이다. 그는 실험영화의 인큐베이터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김기덕의 영화는 좀 색다른 것 같다. 물론 그의 영화에도 자기 인식의 환희 따위는 없지만 그것을 향해 겁없이 돌진하는 용기는 더 큰 것 같다. 그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봄(Spring/Seeing)은 유기적 순환계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자기 인식에 이른 '눈뜸'의 봄(Seeing)으로의 업그레이드를 암시하는 듯 하다. '봄'의 이중성은 (김우창의 책제목을 빌어서) "풍경"(사계,순환,전체,자연,순리,윤회 따위)으로부터 "마음"이 독립되는 순간을 함축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어른스럽다.

대개 이들 감독들이 '모래시계 세대'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한국은 민주화되었고 이 세대는 민주화의 주역이지만 아직 그들은 자기 스스로의 주인에는 이르지 못했거나 이르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한국이란 나라는 지금도 일본과 함께 미국의 위성국가(satellite state)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인과 일본인들을 어린애 다루듯이 한다. 그러나 언제가는 곧 경을 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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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5-18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가는 곧 경을 칠 거다..... 무섭고도 시원하네요.

간달프 2004-05-1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을 친다" .... 뜻과 달리 말이 참 경쾌하지요? ^^
 


송환

김동원의 <송환>은 언뜻 우리 시대의 알레고리처럼 비춰졌다. 우리 시대란 민주화 이후의 시대를 말한다. 우리도, 비전향장기수들도 모두 과거에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나라와 싸워야 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선택한 나라와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나라와 싸우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왜냐하면 적과 내가 너무 명쾌하게 구분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잔인한 고문을 하고 비인간적인 회유를 했지만 그것이 악랄하면 악랄할수록 나의 의지는 더 강해지고 숭고해졌다. 반면 자신이 선택한 나라와 싸울 때는 - 대개 그 나라와 싸우게 될지 몰랐지만 결국 싸우게 된다 - 적과 나를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그에 저항하지만 헛발질로 끝나기 일수다. 헛발질이 늘어갈수록 스스로 초라해진다. 그래서 더 어렵다. 비전향장기수들이 송환된 이후, 그들의 부고가 심심찮게, 생각보다 빠르게, 많이 전해졌다. 왜일까? 악랄했던 '자유대한'의 억압과 마수도 훌륭히 극복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빨리 세상을 등졌을까? 헛발질이 너무 많아서? 민주화 이후의 우리는 어떤가? 헛발질을 너무 많이 했다. 헛발질을 너무 한 나머지 민주화 이전의 시대를 흠모하기까지 한다. 헛발질 속에서 잃는 것은 아마 '명징한 의지'일 것이다. 그것이 두려워 어떤 이는 '칼의 끝'이나 '가야금 현의 끝'에서 자명한 숭고함을 찾아헤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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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t in Translation> - 잉여와 소외, 공간과 장소

- 영화의 소재는 진부할지 모르는 멜로이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방법은 시대적이고 참신하다. 영화 속 두 인물은 각각 도쿄라는 장소에 대해 잉여와 소외를 표상한다. 여주인공에게 도쿄는 자신의 자리(장소)가 없는 곳이다. 그녀가 도쿄에서 경험하는 존재감은 잉여성이다. 남자주인공에게 도쿄는 자기 일과 자기 자신이 극명하게 분리되는 곳이다. 그가 도쿄에서 경험하는 존재감은 소외성이다. 이렇게 약간 다르지만 엇비슷한 두 존재감이 뒤얽히는 과정이 영화의 줄기다.

- 공간(space)은 비어있는 물리적 연장(material extension)이라면 장소(place)는 (의미로) 가득 채워진 공간이다. 여기서 질문! 왜 이 영화는 하필 도쿄를 택했을까? 혹자는 뉴욕이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두 주인공에게 도쿄라는 장소에 대해 (문화적) 외부자이다. 문화적 내부자에게 장소는 마치 공간처럼 현상되는 경향이 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어떤 사람에게 너무 익숙한 장소는 '장소'가 지니는 개성적 성격이 무화되고 등질화된 '공간'처럼 현상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 <Taxi Driver>의 '뉴욕'과 비교해 보면 보다 분명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Taxi Driver>의 트래비스에게 뉴욕은 (의미 가득한 개성적) '장소'라기 보다는 (텅 비고 무의미한) '공간'에 가깝다. 너무 익숙해서 무의미한 장소, '공간'에 가장 근접한 장소인 것이며, 여기서 트래비스가 느끼는 것은 '공허'다. 반면 도쿄는 문화적 외부자들에게 이미 의미로 꽉 채워진 장소다. 그들은 여기서 끼여들 여지를 찾기 힘들다. 이것은 트래비스가 느낀 '공허'와는 정반대의 정서이다. (트래비스는 가공할 공허에 맞서서 질서를 창출하고자 한다.) 공허는 장소가 공간화된 결과이고, 잉여와 소외는 장소의 배타성이 가져온 결과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요한 장소들은 대체로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호텔, 관광지, 그리고 도쿄거리다. 호텔은 유니버셜한 장소로, 어떤 면에서 뉴욕의 원격적 연장(extension)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남자 주인공에게 뉴욕-동경의 호텔은 자신의 job의 연장이다. 결국 동경까지 뻗친 소외성의 연장인 것이다. 관광지는 그야말로 장소 그 자체, 개성적 의미로 가득차있으면서 문화적 외부자인 인물을 밀어내는 장소이다. 여자 주인공에게 일본의 관광지는 그녀의 잉여성을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장소이다. 마지막으로 도쿄거리다. 이 장소는 뒤섞임, 혼성의 장소다. 여기서 만난 일본인들은 전형적으로 알려진 일본인들과 매우 다르며 의미심장하게도 두 주인공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자라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Translation -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경계에서 발생하는 일이며, 다른 것이 뒤썩이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런 상황은 급속도의 시공간의 압축을 경험하는 우리 시대의 공통 경험을 잘 반영한다. 우리에게 이 상황은 혼돈, 길잃음의 느낌을 준다. 제목 그대로 "Lost in Translation"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는 아닌가 보다. 그 혼돈 속에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발견하니 말이다. 이 영화는 異文化간의 접속과 혼재가 심해지는 이 시대에 개연적인 사랑을 재치있는 감수성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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