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에서의 죽음 Mr. Know 세계문학 38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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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만의 나이 37세에 쓰여진 이 단편은 그의 20대에 가졌던 동성애적 경험과 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로 살게 될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조망을 보여준다. 
 
성공이라는 것, 존경과 자신의 분야에서의 권력. 그 때 예술가는 결국 그의 생에 결함되어있는 어떤 것 때문에 길을 떠난다. 괴테의 이탈리아로...그리고 우연히 만나는 그리스 로마적 아름다움의 이상. 걸어다니는 하얀 조각상과 같은 미소년. 작가는 짝사랑에 빠지고 그 아름다움을 지상의 것으로 구현하다 콜레라로 죽음으로 이끄는 소년의 배웅을 받으며 죽음을 맞는다. 

작가에 의해 [품위손상의 노벨레적 비극]이라 불린 이 작품은 이성의 세계를 조명하는역할을 담당해온 예술가에게 죽음으로 맞바꿀 수 있는 감정과 비극의 영역이 존재함을 보인다. 그는 이것이 더 행복했고 그가 평생 쌓아온 세계보다 더 큰 희열을 안겨준다고 느꼈다. 결과는 죽음이다.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바쿠스)적 세계의 충돌에서 그 중간에 섰던 자는 아센바흐처럼 재가 되어버린 바쿠스가 될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세계에서 예술만이 구원이라고, 니체는 비극만이 아폴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의 진정한 예술이라고 불렀다. 

어떤 불륜은 감정의 쓰나미에서, 일상의 지겨움에서 비롯된다. 그 때 추문과 추락에 대한 두려움은 잊혀지고 인간은 과감히 죽음으로 치닫는다. 고도로 계산된 예술기법들과 감정을 건드리는 상황설정들. 우리 시대의 이런 예술적 바그너와, 현재의 세상이 아름답고 균형있으며 품위롭고 따뜻란 것임을 세뇌시키는 주위의 많은 프리드리히 황제에 대한 역겨움은 이해하지만 과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라면 이런 선택을 할까? 마취되어진 바쿠스의 축제도, 세상이란 아무 탈 없는 곳이라 출세만 하면 성공한다는 성공시대의 가식도 진정 자신을 신의 자녀로 여기는 사람에게 또다른 야바위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술이라는 이름이 일탈과 동일시되고 이성이 기득권의 안정과 혼동된다면 이런 착각은 여전히 끝나지 않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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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9-10-23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소설을 영화로 먼저 봤는데 타치오 역으로 나온 스웨덴 아역 배우가 얼마나 예쁘던지! 소설 속의 묘사와 정말 똑같아요. 영화 안 보셨으면 추천합니다.
 
마음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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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소세키의 나이 48세인 1914년에 아사히 신문에 연재한 그의 비교적 후기작품이다. [자신의 마음을 알고자하는 자에게 인간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이 작품을 권한다]고 그가 말한 이 작품 속의 인간은 무엇인가? 그것은 호손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같은 [죄를 저지를땐 모르고 자신의 죄에 나중에야 놀라게 되는 존재]이다. 1963년이래 고교 국정교과서에 실린 그의 이 책은 근대적 일본인에게 윤리성의 근거로서의 자신에 대한 반추라는 도식을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는 돈맛을 알게된, 조금만 손을 뻗으면 얼마든 타인을 제맘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추악한 자신에 대한 반성이다.

제2의 화자인 [선생先生]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교훈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라는 걸 알려준다. 이것은 한편으로 아프리카 콩고의 정글에서 인간을 발견하였던 조셉 콘라드의 반향이 들려오는 듯도 하다. 인간 자신에 대한 긍지가 끝을 모르고 치솟던 19세기말과 20세기의 초에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은 인간의 밑바닥을 보았다. 어쩌면 이러한 자신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누구도 옆사람을 참아줄 수 없는 시대였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점잖은 신사와 상냥한 숙녀의 속마음의 경멸과 무시를 당하지 않고야 이것을 어찌알까? 욕망을 참지 못하는, 주위의 인간을 증오하는 인간들은 곧바로 얼마후 두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어떠함을 서로에게 보여주었다.

인간은 정말 추악하기 그지 없는 존재다. 바로 내가 그렇단 것이 선생의 자백이다. 그리고 대책이 없다는 것이 더 서글픈 사실이다. 거짓말과 위선.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이기주의. 자기만족을 위해 휘두르는 줄세우기. 두려움 심어주기. 달콤한 감언이설. 상대를 돈과 성욕, 호기심을 이용하여 노예로 만들기. 나란 존재도 하나도 다름없는 이 어두움 앞에서 나 또한 좌절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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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 선생 방랑기 범우문고 187
김상용 지음 / 범우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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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48. 1902년에 태어나 소학교 시절 나라는 일본의 손에 넘어가고 식민지의 국민으로 살아왔다. 25에 일본유학을 마치고 이화여전에 자리를 잡을 때만 해도 모든 일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영문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로서의 삶이었던 거다. 나는 문학을 사랑했고 자연과 산과 그 속에 살아가는 순박한 이들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내 나이 42살 때 아이들의 징병문제가 불거지고 일본은 대학에 있는 우리들에게 징병이라는 것이 조선인이 진정한 일본인으로 거듭나는 귀한 기회임을 알리는 역할을 하도록 요구했었다. 잘못 생각 했었다는걸 안다. 변명할 마음은 없다. 나는 그런저런 욕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출세코자 한 것도 아니었다. 인생이 그런 것일뿐.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해방. 할 일은 많았고 네 삶은 짧다. 정신 없이 돌아가는 좌우의 싸움. 내가 관여할 일도 아니고 나는 한 시인으로, 학자로만 살고프다. 미국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지금. 이 험난한 세상에 아직도 사람들은 살고 있고 꽃은 피고 잎은 진다. 사는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또 글을 쓰고 공감하는 사람들을 보고 삶의 이유들을 찾아가리라. 인생은 요강 같아 멀리서 보면 그럴듯 하지만 가까이 가서보면 또 파헤쳐 열고 보면 온통 찝지름하고 지린내나는 어두컴컴한 것일뿐인걸 요사이처럼 잘 느끼는 때가 또 있을까? 올 여름은 유난히 더울 모양이다. 6월인데 벌써 이리 마르고 찌는걸 보면... 

1950년 40고개에 올라 생을 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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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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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타인을 이해하는데 자기자신에 대해 생각하는대로 남을 평가한다.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소망, 약점, 속마음이 있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도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특히 가족을 통해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타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또 그런 이해 위에 서로를 미워하기도 사랑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유진 오닐이 이 작품을 살아있는 동안 공개하지 않길 원한 이유를 알만하다. 이 희곡은 오닐의 인간에 대한 이해, 자신에 대한 생각, 그것을 만든 자기 가족에 대한 생각이 고스라니 다 들어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이 죽은 후에는 알리고 싶었다. 중독에 취약한 인간, 그 자신도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소뇌 질환의 희생자이다. 투사projection의 정신구조, 내가 이 꼴이 된 것은 모두 가족 때문이다. 그들 때문에 중독 되었고 병들었으며 죽어가고 있고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표면적 화해, 상대에 대한 미움과 애정을 느끼나 번번히 자신의 필요-외로움, 한 사람을 공동의 적으로 몰아 투사의 대상임을 합리화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위한 합작-를 위한 일시적 받아들임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깨어진 부모자식, 부부 형제의 관계, 수전노 부모와 부부간의, 부자간의 원망과 중독과 멸시의 인간관계는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어서 작품을 가치있게 한다. 막장 드라마 한편과 같은 리얼스토리 가정 파탄극은 그래서 여전히 공감을 일으킨다.

[무엇이 가족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따뜻한 대답이었던 [가족의 탄생]이라는 김태용 감독의 영화가 있었다. 영화는 그 사람을 위해 내 삶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 가족이라고 말한다. 과연 자기 이외에는 누구를 위해서도 손해보려 않는다면 우리는 혈연이라도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가족이 손해보는 이 사람을 옹이삼아 불어나며 생겨난다. 예수님은 이런 가족이 되어주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정의하신다. 그리고 인간이 사는 목적중 하나가 이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우리는 나의 가족에게조차도 이웃이 되어주지 못하는 존재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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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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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 본 인간역사의 미래는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다. 비관주의적 역사전망이 득세하는 현재의 관점이 어느 정도 객관적 살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역사란 인간 이성의 발전이며 인간의 이성은 과거에 항상 그러하여 왔듯이 이번에도 20세기말의 위기를 극복하여내고 인간의 인간다움을 달성하리라고 믿고 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이해의 발전과 비이성의 극복이라는 과거로부터 도도히 흐르는 물결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류가 참 인간이 되고자 하는 그 의지를 완성하고 말 것이라고 내다본다. 비록 인간을 착취하는 개인과 국가가 한동안은 위세를 떨치는 듯해도 그 아래 고통받던 인간들이 이런 흐름을 극복해내 온 것이 지나간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비록 프롤레타리아의 타락이 마르크스의 예언을 지연시켰다 할지라도 경제 식민지의 인민들이 일어설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 이유는 고통받는 인간의, 고통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의지와 결합된 이성은 언젠가 그 숨길을 만들어내고 말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엘룰의 견해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기술에 대한 혐오와 인간성에 대한 기술의 압도는 카의 이러한 이성에 대한 믿음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 이성의 산물이기는 하나 기술은 이성의 한계를 이미 벗어나 스스로 자라고 팽창하고 있다. 이런 기술의 자율적 지배력을 무력화 시키지 못하므로 이성은 카가 말하는 인류의 향도성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종말론적 전망이다.  

현재의 세계는 어떠한가? 자본주의는 세계를 모두 집어삼킨후 커다란 배앓이로 휘청거리고 있다. 한번도 머리를 맞대어본적이 없던 세계 재무장관이 협력을 위해 모여앉았고, 자본주의하는 괴물의 고삐를 움켜쥐고 있다고 자신하던 미국마저 그 포악스러움 앞에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공황은 사실 장난같은 한 두 나라의 파산이나 환율폭등으론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믿을 것인가? 그 이성은 땜질이 아닌 다른 종류의 혁명을 가져올 힘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

나의 믿음, 즉 내가 근본하고 사는 행동의 동인은 이 일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가? 움츠리고 주위의 눈치를 보며 참호안에 숨으라고 하나? 아니면 이제 이 와중에 복지의 혜택에서 난민으로 밀려나게 될 수 많은 병든 자들을 위한 어떤 방법을 모색하라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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