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 의학의 탄생 - 의학적 시선의 고고학 이매진 컨텍스트 11
미셸 푸코 지음, 홍성민 옮김 / 이매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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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자신이 공간,언어,죽음에 대해 다룬 책이라고 말한 이 책은 18세기에서 19세기초에 걸친 의학적 시선의 변천 과정을 [고고학적] 기법으로 써내려가며 어떻게 주관적이며 실상과 유리되어 있던 의학이 현재 임상의학의 실증적, 부검적, 병리학적 태도를 가진 학문으로 탄생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단순히 이것은 임상의학 하나의 변화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닌 언어가 그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이며 현대철학의 한 모형의 성취를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임상의학은 증상이라는 시니피앙을 질병이라는 시니피에와 동일시하는 시도이며, 증상이라는 언어적 작용을 이해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부검으로 몸 위에 보여짐으로 확인되는, 결국 말하여지고 보여지는 곳에 질병이 존재함을 밝히는 인식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석과 같은 언어모델에 따라 실제세계를 그려나가는 과정의 살아있는 본보기인 셈이다.

[보이게 된] 의학은 증상symptom의 시간적 과정을 조직tissue에서의 공간적 변화와 연결하며, 이런 보여주는 사체의 개방성 안에서 죽음은 삶과 질병을 이해하는 역할에서 더 나아가 삶과 질병의 본질로서 자리하게 된다. 죽음의 개념하에 환자의 특성은 개별적으로 이해되며, 비로소 죽음으로 바라본 개인 공간화의 언어적 포착이 가능하다. 끝이 죽음이라는 것에서 모든 것은 개별화, 공간화, 언어화된 것이다.

나는 죽음이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변화를 파악하는 우두머리임에 푸코에 동의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우리가 지금 이해하는 그 위치에 서 있다. 하지만 그런 현실 이해가 결국 지금 우리의 불만의 이유는 아닌가?  만약 우리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면 이런 우리의 이해는 똑같은 고고학적 접근을 통해 어떻게 발견될까? 이제 개별화는 우리의 반응에 의한 것이 된다. 질병은 생명에 이르기 위해 죽음을 거치게되는 과정의 일부가 된다. 그렇다면 의학은 생명의 존재와 그 중요성에 대한 확인의 시선으로 변하게 된다.결국 실마리를 어디로 잡는가는 우리를 전혀 다른 시선의 존재와 인식과 행위로 이끄는 것이다.    

푸코의 고고학적 접근은 현재의 의학을 이해할 뿐 아니라 앞으로의 전망에까지 매우 적확하다. 결국, 의학이 분류학적 이해(객관주의, 분류학)에서 증상적 접근(주관주의, 진단학)를 거쳐 증후적 실증주의 이해(객관주의,병리학)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보여준 것이다. 또한 말미에 앞으로 이 과정이 현상학적 병인 메카니즘의 구축(주관주의, 질병이 말하는 진원지에 대한 가설에 의거한 메카니즘 규명)을 이룰 것을 예언하기도 한다. 실제 이후 의학은 이 과정을 거쳐 지금은 네트워크형 확률이론으로서의 생명시스템 이해(객관주의, bioinformatics)로까지 와있다. 어쩌면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교대와 인식이해 확대의 나선형 진행이 인간과학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학이 모두의 오랜 노력으로 도달한 그 경로가 과연 [인간과학적 철학]이 눈여겨 보고 따라야 하는 방향이라는건 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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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윤동주 전집
윤동주 지음, 홍장학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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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의 나이로 생을 마친 윤동주의 17살부터 25살까지의 시들과 서너편의 산문이 묶인 그의 일대의 작품 전집이다. 윤동주의 시는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어리고 단순하고 사랑스럽다. 서시나 별헤는 밤, 자화상의 그가 아닌 사과, 거짓부리, 애기의 새벽, 봄의 그는 내가 알던 윤동주가 아니다.

괴로움 이전에 순진함과 해맑은 눈을 가진 친구와도 같은 이여, 만약 나와 이곳에 같이 살았어도 매일 보고픈 그였을텐데. 시인은 항상 아름다운 감동을 주고 보지 못했던 것을 밝혀주며, 어렴풋이 입가에 맴돌던 것을 번득 정신들게 끄집어내던 이들이 아닌가?  윤동주는 분명 그런 시인임에도 다른 이들과는 달리 먼 존재가 아닌 그냥 가까이 하고픈 사람이다. 글에도 그렇듯 시에도 사람이 묻어나나보다. 그의 시에 묻어나는 그는 아름다운 친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동주의 모습 그대로이다. 과장이 묻어나지 않는 와삭 깨문 능금과도 같이 있는 그대로의...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 나는 28이 지나고부터 점점 동주의 모습에서 멀어져만 가는것만 같다. 나는 내가 아닌 사람으로 자꾸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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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김세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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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장 18-25절)

인간 즉 내 안에 있는 악을 발견하고 인정하기에는 나이가 필요한 것 같다. 이 책이 그래서 어릴 때 읽을땐 읽혀지지 않던 부분이 있었던걸께다. 35살의 스티븐슨은 스릴러 추리물과 같은 이 책에서 지킬의 자술서를 통해 인간의 이면을 자세히 기술한다. 인간에게는 두가지 면이 존재하며 그 중 악의 면, 혹은 초인의 부분은 그 힘이 분출되도록 두면 결국 그 인간 전체를 파괴하고 말 것이라고. 만약 지킬은 약을 마신 후 자신이 원했다면 천사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 원한건 문명과 사람들의 눈 때문에 감추어야했던 욕망들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스티븐슨이 원하였던것이 아니라고 내가 원하는것이 아니라고 누가 말하랴? 죄의식 없는 초인.

악은 만족을 모르는 흡입구이다. 욕망은 만족을 모르고 욕망을 실현하는 자는 스스로를 붕괴시켜나간다. 그만 두리라는 결심을 한적은 얼마나 많던가? 하지만 정작 결심할수록 강해지는 결심할수록 힘들어지는 선한 삶. 미워하지 않으려 화내지 않으려 욕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 깊어가는 마음의 습관들. 자유롭게, 이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살면 더 이런 것에서 해방될꺼라고? 그건 거짓말이다. 그 때는 정말 돌아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만다. 이건 인류가 수천년간 경고한 그리고 속아온 가르침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뒤집어서 악을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는 삶은? 그것을 더 건강한 것으로 여기는 시대정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초인의 세계, 니체가 권하는 인간. 새 세계는 한 인간에게 구토를 유발한다. 추악한 자신과 타인의 모습. 인간은 심미안을 좀처럼 거두지 못한다. 추악한 삶과 아름다운 삶은 혼동되기 어렵다. 

여전히 악을 잠깐 즐기라는, 그건 죄도 아니라는 속임수는 아주 잘 먹히고 그것에서 자유롭기에는 인간은 너무 그걸 좋아한다. 그게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돌아서면 까먹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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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범우문고 54
헤밍웨이 지음, 김회진 옮김 / 범우사 / 198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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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바다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베푼다. 그것은 노력 없이 얻어지지 않지만 그걸 얻은 자는 그것이 선물임을 안다. 그저 또 그 일을 반복하고 할 때마다 최선을 다할 뿐이지만 어느덧 손안에는 내가 만들 수 없는 아름다운 보물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참 삶이란 경이롭고 감격스러운지 모르겠다.

고통의 순간들, 인내의 시간들, 무너져내리는 몸과 마음의 한계들...그것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비록 앙상한 것 밖에 남지 않고 비록 남들이 몰라준다해도 나는 알고 있다.혹 나를 이해해 주는 그 누군가가 또 알아줄지도...작가에게는 세상에 내어놓는 책이 그러하고, 우리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한순간 순간의 삶의 궤적이 그러하다.

노인은 바다를 사랑한다. 바다는 거칠고 때로 생명을 위협하지만 바다는 모든 것을 베풀어주는 어머니이다. 그곳에서만 삶의 수단, 삶의 고통, 삶의 의미가 있기에 노인은 간절한 야구소식을 뒤로 하고 그물을 손질하여 바다로 나아간다. 그곳은 살아가야하는 곳이고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은 청새치가 아닌 바다에 기대어 사는 것 자체인지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흉터들, 햇볕에 타버려 생긴 종양, 늙어 말 안듣는 몸. 이 모든 것이 노인의 바다에서의 숨겨진 분투를  말 없이 보여줄 뿐이다. 우리의 삶은 남에게 내세워 이야기할 대단한 것이 끝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인생을 건 나의 아는 것 배운 것이 이것뿐이어서 걸어온 어제, 걸어갈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래서 언젠가 초원을 거니는 사자의 꿈만큼이나 위대하고 아름다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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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임마누엘 칸트 지음 / 서광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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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썼을까? 미국의 독립전쟁과 함께 많은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이 끊임 없던 18세기말,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을 마친 그에게 평화를 위한 조항들을 쓴다는 것이 무슨 뜻이었을까? 

그의 결론은 전쟁을 하되 서로간에 신뢰를 깨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그쳐야만 지속되는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어느 군정국가가 다른 나라와의 평화를 위해 공화정이 되려하는가? 그에게 전쟁이란 마치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손처럼 정의로운 도구이다. 서로 관세장벽을 포기하듯 정치적 준칙을 따르면 평화가 오리라는 그의 주장은 진담인가 농담인가? 그는 철학자의 국가지배를 꿈꾸는 18세기의 플라톤주의자였던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에 가까운 공격은 지속되고, 지난 10년동안만 해도 얼마나 많은 지역에 중화기들이 인간의 생명을 앗아갔는가? 핵무기를 실험하는 국가와 무인 폭격기를 개발하는 나라들 사이에서  또다시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고 평화를 가질 수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칸트의 이야기는 마치 인간에 대한 고발과도 같다. 이렇게 하면 평화스럽게 살 수도 있지...하지만 인간은 절대 그렇게는 못할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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