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집
이황 지음, 윤사순 옮김 / 현암사 / 199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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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주가 된 1568년, 68세의 노학자 이황은 17세의 어린 왕이었던 선조가 성학의 기본을 쉽게 이해하도록 [성학십도]를 썼다. 이 도표는 정주계의 총결산서로 (1) 태극도 (2) 서명도 (3) 소학도 (4) 대학도 (5) 백록동규도(6) 심통성정도 (7) 인설도 (8) 심학도 (9) 경재잠도 (10) 숙흥야매잠도로 이루어져 있다.

태극도는 우주의 생성원리와 창조를, 서명도는 인간 생성의 원리를, 소학은 인의 시작의 원리로서 개인품행을, 대학은 이에서 발전한 인간관계와 정치를 이야기하고 동규는 이를 위한 가장 근본의 방법인 오륜을 설명한다. 심통성정도는 사단칠정의 요약으로 유교심리학의 원리를, 인설은 유교의 행동과학을,심학도는 이를 위한 심리훈련의 항목을 보인다.경재잠도는 행동훈련의 항목을 상황별로 기술하고, 숙흥야매잠도는 이를 시간별로 보여준다.

성학십도의 근본에는 敬이 있으며 이를 일상생활 가운데 실천하고 훈련함으로 仁의 경지에 이르도록 뒷받침하는 철학적 배경과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철인치자가 아닌 인의치자로서의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왕에 대한 수행지침인 셈이다. 서양정치론이 치자의 독특성과 우월성에 뿌리를 둔 반면 성학십도가 보여주듯 왕이나 백성이나 동일한 [인간됨]을 목표로 하는 인생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부동심과 천명에 순종하는 마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플라톤이든, 아우렐리우스 황제든, 바수데바 왕자든 인류의 공통된 희망이었다. 어쩌면 많은 옛사람들에게 너무나 자명했던 이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 우리 삶의 척박함의 이유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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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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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이 보여주는 이명준은 광장을 찾기에 실패한 사람이다. 또 마땅히 찾아야 할 광장을 찾지 못한 우리이기도 하다. 4.19는 새로운 자유의 바람을 서울의 공기에 불어넣었고 그 때 이 책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분단과 자유, 꿈과 좌절의 그 시대의 사람의 고민과 같은 진동수를 가졌기 때문이리라.

광장은 공감이다. 모여서 느끼는 같은 마음, 너도나도 좋은 일을 같이 해보자고 들뜨는 마음, 우리 따로 다른 골방에 있다 나왔는데 어찌 그리 마음이 척척 맞는가하는 탄성. 그럴줄 알았다,해방은. 그리되었어야 했다, 해방은. 그 광장이 서로를 물고 뜯는 곳이 되었다. 다른 구호를 쓴 플랭카드 아래 적과 백의 스크럼이 서로 원수가 되었다.

광장은 자유다. 옥죄지 않는 공간, 돌아가는 강강수월래처럼 우리가 뛰기에, 같이 웃기에, 웃다 웃다 지쳐 눈물 짓기에 넉넉한 자유였어야 했다. 고문은 大韓 백성의 것이 아니고, 감옥은 더 이상 가둘 사람이 없어야 했다. 이명준은 그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고 새로운 광장을 찾고자 했다. 그는 북에서도 실패했고 스스로 광장을 허무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래서 광장은 공허이다. 말로 채워지는 공간,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공간이다. 숨쉬는 나의 혈육, 사랑하는 내 겨레 그 사람들로 꽉꽉 채워져야 했을 광장이 말만 가득한 내 겨레를 못박는 광장이 되었다. 이명준이 찾은 대용품은 바다이다. 상호교감하는 살아있는 광장이 아닌, 일방적이고 내적이기만 한 빈 공간, 서로의 자유를 마주보며 자신의 자유를 느끼는 광장이 아닌, 자유의 도피처로서의 내면적 깊이의 바다에 그는 가라앉는다. 실패한 인생, 실패한 나라, 불쌍한 백성. 박정희, 김일성, 전두환, 김정일.

2002년 시청앞은 붉게 물들었고, 2003년 그곳은 다시 촛불과 인공기 소각과 전경버스로 채워지고, 2004년 찬 공기만이 살벌한 이 백성의 머리위를 허허히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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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샴발라 총서 2
정창영 엮어옮김 / 시공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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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의 슈랏다(세계관)인 책이다. 바수데바를 섬기는 바가바타 종교의 시편이면서 [마하바라타]중 한 권으로, 기원전 4,5세기 뱌사하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베다 가르침의 결론인 [우파니샤드]의 내용을 응축하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의 구도를 알려주는 독특성으로 인해 가장 많이 힌두인에게 읽히는 책이라고 하다.

내용은 주인공 아르주나와 친구 바수데바(브리슈니 족의 왕자의 모습으로 그의 전차몰이를 하는 최고신의 현신, 크리슈나)의 대화내용이다. 아르주나의 존재론적 질문[크리슈나여, 도대체 삶이 무엇이길래 이런 동족살인의 전쟁을 해야 합니까?]에 대한 대답으로 크리슈나는 [신과 일체가 되어 윤회의 쳇바퀴에서 탈출하기위해, 고통과 유혹의 시험대인 삶을 책임과 선행, 무위와 수행으로 살다 죽는] 길을 제시한다.

그 방법으로 아루주나에게 제시되는 것이 카르마 팔라 탸가(행위의 열매 포기)이다. 프라크리티(질료세상)의 삿트바 구나(고요한 氣), 라자스 구나(활동적 氣), 타마스 구나(어두운 氣)가 만들어내는 마야(환영)에 현혹 되지 말고 푸루샤(신성)를 좇아 아트만(참자아)에 이르러 브라흐만과 합일하여 머무르라고 한다. 활동적 전사인 그는 라자스 구나에 지배되기 쉬우므로, 출발은 이 중 카르마 요가(수행의 길)를 통해 나아가야 하며, 그러나 즈냐나 요가(지혜의 길)와 박크티 요가(공양의 길)와 어우러져(이런 구분이 나중엔 없어지니까) 사마디(몰입)의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 자는 이미 전생의 수행이 탁월하거나 크리슈나에게 사랑받는, 혹은 그를 사랑하는 자라고 한다.

분명 다른 종교에 대한 흡수력를 가진 체계이다. 또한, 다양한 계층과 기질의 사람을 흡인하는 매력이 있다. 그렇다고 기성의 정치,경제 체제와 충돌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 범위와 체계를 무시하거나 혹은 격리를 통한 자기보호를 한다고 하는 편이 맞는 것 같다. 힌두는 상대적 우월성에 의한 유일성을 주장한다.인도 페르시아, 바빌론 문화의 다신교 상황에서 우위를 주장하며, 다른 신들도 아수라의 일종이나 하위신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도 마호메트과 예수, 여호와와 알라, 붓다와 베다를 아우르는 대안으로 제시코자 하는 현대 힌두교적 흐름과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보며, 서양문명일반에 미친 힌두의 영향을 본다. 쇼펜하우어와 카뮈 뿐 아니라 현대의 여러 작가와 고대 힌두와 접한 그리스인들의 생각도 이해할만 해진다. 가깝게는 불교를 거쳐 나타난 우리 작가에서도...  김수현이 썼던, 불치병을 앓으며 예정된 자신의 죽음에 절망하며 울부짖던 드라마가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는 유태인답기는 하지만 죽음 앞에 인생의 참된 의미인 사랑을 스토아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스토아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 기만성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직면과 내적 고요]를 이야기한다. 인류의 공통된 경험인 죽음, 인간은 그 앞에서  자신이 죽음을 의식하는 동물 이상의 인격person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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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영구 옮김 / 푸른숲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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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접한 건 [트라비에게 갈채를]이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전 동독의 국민차인 2기통 트라비를 타고 시속 40km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어떤 동독의 라틴어 선생님 가족의 이야기이다. 거지취급하는 서독의 친척과 아우토반에 오르자 욕하며 쌩쌩 지나가는 옆차들. 그들이 따라가는 여정이 바로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의 행로이다. 좋은 자동차와 집, 발전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잃은 것을 이 선생님은 찾아가고 있었다. 가족과 인생, 예술과 의미들...

괴테는 이길을 1786년 9월 3일에 출발헸다. [새벽 3시에 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그의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성공과 바이마르 공국의 추밀 고문관 자리를 떠나 그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여행을 떠난다. 20 여개월의 이 여행은 그를 원래의 자리, 그의 인생의 목표로 돌아가게 했고 그의 문학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이 책은 이탈리아를 갈 기회가 있었던 어느해 떠나기전에 손에 잡았다. 괴테의 삽화와 그 풍속의 로마는 이제는없고, 그곳은 패션과 관광객의 거리였다. 트라비의 가족이 보았던 것처럼 그곳엔 [인생의 의미]가 없었다. 여행은 내 마음의 상자에서 벗어나는 방법일뿐, 의미를 찾는 건 어쩌면 아무도 나를 [그 어떤 누구]로 대하지 않는 껍데기가 벗겨진 나의 상태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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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자서전
벤자민 프랭클린 지음, 이계영 옮김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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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대에 미국민에 의해 만들어진 두 목록이다. 당시에는 요즘 사명선언서 만들기가 낯설지 않은 것처럼 이런 목록을 많이들 만들었나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목록은 1723년에, 벤저민 프랭클린의 목록은 1728년경 작성되었다. 두 목록의 의도는 동일하다. 자기관리, 방만하게 시간을 흘러가게 두는 것이 아니라 다잡아 알뜰하게 쓰겠다는 뜻이다. 내용상에도 유사점이 많다.절제와 결단, 근면과 진실, 온유와 정의. 서로 참조하여 만든 목록처럼 당시의 청교도적 정서를 반영하는 리스트이다.

하지만, 목표는 다르다. 프랭클린은 본인이 이야기 했듯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고자 하는 계획이었다.원래부터 타고난 것 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영향으로 빠져들 수 있는 성향이나 습관 모두를 정복]하고자 했다. 에드워즈의 목표는 사랑의 은혜에 대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한 자신을 드리는 삶이었다.

그래서 방법에 있어서도 프랭클린은 [마음속의 신념만으로는 실수를 막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조그만 수첩을만들어 한페이지에 한 덕목씩 할애하여 한 주일에 한덕목씩 실천하기로 했다.]고 하며 에드워즈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만약 나의결심들이 하나님 뜻에 합당하다면 이 결심들을 지킬 수 있도록 능력 주실 것을 겸손히 간청한다.]고 한다.

두 목록은 비교적 [좋은] 두 사고방식을 대변한다. 종교적 삶과 [광신적] 삶. 여기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현재 느끼고 사는지가 결정되어진다. 언제부터인가 종교적 삶으로 기울기 시작한 추를 다시 光信으로 옮겨야 함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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