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의 힘 - 윤리학-정치학 잇기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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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공화국의 위기』에서 권력power과 폭력violence이 확실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둘은 일심동체다. 가정 내 부모, 자식 간의 위계질서, 군대와 직장 내 직급과 직책, 국가 기관에 의한 공권력 등 권력은 폭력을 내포한다. 이때 폭력은 물리적 힘뿐만 아니라 언어 폭력, 시선 폭력, 냉소와 무관심, 심리적 억압, 가스라이팅 등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형태를 포함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상적 권력은 ‘노오력’에 의한 당연한 권리로 둔갑하기 십상이다. 견제받지 않으려는 검찰, 감시받지 않는 언론, 국민을 의식하지 않는 국회에 이르기까지 민주국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갑질과 권력 남용은 일상이 되었으며 그것이 폭력인 줄도 모르고 매일 폭행당하며 사는 시민들의 무감각은 놀랄 만하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에게 폭력은 불평등, 능력주의, 혐오와 닿아 있다. 오랫동안 동성애와 여성주의 운동 최전선에서 혁신적이고 전복적인 사유와 실천으로 신뢰를 쌓아온 저자의 ‘비폭력’은 일관성 유지하며 새로운 정치철학과 윤리학에 화두를 던진다. 주디스 버틀러는 “비폭력은 바로 폭력장 안에서 윤리적 사안이 된다.”라고 주장한다. 비폭력은 평화주의자의 개념적 선언도 아니고 일상에서 말하는 범법행위를 넘어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는 문제다. 비폭력의 범위와 한계는 개인과 사회마다 기준이 달라 여전히 논쟁 중이다. 하지만 저자는 “폭력을 가하는 것이 극히 정당해 보이고 당연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의무적 선택지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가능한 선택지로 주어지는 저항적 실천이 비폭력”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비폭력은 수동적, 소극적 대응 방식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태도라는 의미다.

두 가지 측면에서 비폭력을 정의하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전투적 평화주의”라고 불렀던 그것을 공격적 비폭력으로 재검토해볼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갈등과 논쟁을 외면하고 좋은 게 좋은 거니 덮고 넘어가자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전투적 평화주의를 ‘공격적 비폭력’이라는 표현하는 지점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들리는 두 단어의 조합이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그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간 인류가 걸어온 야만의 세월은 특정 시대의 정치 형태와 전통과 문화 때문이 아니다. 지금, 오늘을 사는 나와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인간의 내면에 숨은 이기적 욕망과 자본주의에 물든 탐욕적 태도가 그 자체로 폭력이다. 노력한 만큼 벌고, 능력이 닿는 한 많이 가질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못 가진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요란하다. 평등의 가치는 침묵을 지키고 오로지 정의롭지 못한 자유, 그들만의 자유, 교묘하게 포장된 자유가 공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뒤덮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평등에 참여하지 않는 비폭력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고귀함, 전쟁을 반대한다는 평화주의에 머무는 추상적 비폭력은 현실 개선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내놓지 못한다. 비폭력의 힘은 저항과 실천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페미니즘 투쟁과 트랜스젠더 투쟁은 서로 이어져야 한다. 여성 살해를 성테러sexual terror의 일환으로 이해한다면, 이 두 투쟁은 서로 이어져 있을 뿐 아니라, 이 두 투쟁과 퀴어 투쟁, 동성애 혐오와 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투쟁, 지나치게 높은 비율로 폭력과 방치에 노출되어 있는 비非백인들의 투쟁도 모두 이어져 있다.” 폭력이 사회적 불평등의 악화 요인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불평등한 위치에 놓인 노동자, 소수자의 권리 강화, 폭력에 대한 강력한 처벌 등 제도적 장치를 주저하는 이유가 뭘까. 주권자는 누구의 편에서 어떤 정책에 동의하며 누구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현실 개선 노력에 의지를 보이는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적응하며 사는 게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비폭력을 힘과 연결한다는 것, 비폭력 실천을 폭력이 아닌 힘(저항과 생존의 연대 협력에서 표면화되는 힘)과 연결한다는 것은, 비폭력이 약하고 무익한 수동성이라는 관점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거부하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실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폭력이 정당화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줘야 할까. 일상의 폭력들,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폭력적 현실 앞에서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말로 눙치면 그만일까. 누군가는 점진적인 변화와 노력을, 누군가는 근본적인 혁명과 개선을 이야기하지만 역사를 되돌리고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기주장에 힘을 실어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하든 판단과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선거철에 철새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숨 쉬듯 비판적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언제나 위험과 폭력은 내가 선이요, 진리라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성찰하지 않고 겸손함을 모르는 위선은 그 자체로 타인을 향한 폭력이다.

비폭력의 힘을 주장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깊고 넓은 사유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니 어쩌면 매번 내 삶의 태도와 우리가 사는 현실을 찬찬히 돌아보게 된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며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의식하지 못하는 무지의 폭력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비폭력은 공격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윤리적 삶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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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What's Up 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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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Ⅰ: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995)

『아우슈비츠의 유산: 기록과 증언. 호모 사케르 Ⅲ』(1998)

『예외 상태. 호모 사케르 Ⅱ-1』(2003)

『왕국과 영광: 경제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학을 위하여. 호모 사케르 Ⅱ-2』(2007)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3부작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은 거대한 서평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배경 지식 없이 책 읽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아래 적어 놓은 책들의 계보는 ‘생명 정치학’이라 명명할 만한 사상의 축대를 쌓기 충분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미셸 푸코와 한나 아렌트와 칼 슈미트가 주축을 이룬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찰은 그대로 호모 사케르 탄생에 바탕을 이룬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 책에서 “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다.”(156쪽)라고 정의한다. 태어나는 순간 차별 없이 모두 시민이 되는 세상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았다. 피부색, 성별, 재산 유무, 출신 성분, 사회적 계급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인간일 수 있는가. 평등이라는 개념은 인류 역사에서 희한하고 기발한 최근의 발명품이다. 말하자면 왕은 거지에게 갑질할 수 없으며 둘의 목숨값이 같다는 주장이 상식이 된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 과정과 결과에 경의를 표하지도 않고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배려와 혜택이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것처럼 자유와 평화도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착각하기 쉽다. 고대 그리스의 호모 사케르도 정치 체제와 사회 제도에서 유래했다. 노예와 여성은 물론 외국인은 시민이 될 수 없던 시대에 시민은 특권층이었다. 신에게 바쳐질 희생 제의에 사용할 수는 있으나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

“사케르Sacer란 건드렸을 경우 자신이나 남을 오염시키는 그런 사람 혹은 사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신성한’ 또는 (대략 유사하게는) ‘저주받은’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유래한다. 사람들이 지하 세계의 신들에게 바친 죄인은 성스럽”지만 저주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이 논의의 시작과 끝은 다시 수용소로 모인다. 깔때기처럼 아우슈비츠로 모여드는 현대 사상의 계보는 서구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선과 악,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이성과 감정, 관념과 유물 등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끝없는 혼돈과 파괴로 치닫는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은 새로운 생명정치적 주권의 특권적인 부정적 준거였으며, 따라서 죽여도 처벌받지 않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호모 사케르의 명백한 사례였다.”는 단 하나의 문장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판 호모 사케르는 유대인으로 마감됐을까. 인간은 그리 지혜로운 동물이 아니다. 망각과 합리화의 능력을 갖춘 존재다. 주권이 가진 퓌시스와 노모스의 이중적 속성은 호모 사케르를 바라보는 양가성을 증명한다. 예외는 일종의 배제다. 생명 혹은 인간으로서 ‘예외’에 해당하는 존재가 가능한가. 인류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예외인가. 유색인종은 백인의 예외인가. 장애인은 정상의 예외인가. 성소수자는 이성애자의 예외인가. 비기독교인 기독교인의 예외인가. 시민은 권력자의 예외인가. 노동자는 자본가의 예외인가. 청소년은 어른의 예외인가. 노인은 젊음의 예외인가……

하나의 프레임에 갇힌 사람의 아집과 독선이 주체적이고 신념에 찬 태도로 칭송받기도 한다. 아감벤이 주장하는 호모 사케르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아무 곳에도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없는 게 아닌가. 아감벤은 근대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으로 인권과 새로운 노모스를 정리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 존재할까. 얼마 전에 석방된 ‘조두순’은 어떤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존재가 아닐까. 어느 시대에도 호모 사케르는 존재하는 게 아닐까. 죄는 미워해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사형제 존폐 논란은 언제 끝날까. 범죄자를 옹호하는 말로 아감벤을 오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일 오늘날에는 명백하게 규정된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말은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언젠가, 누구든 우리는 모두 잠재적 호모 사케르가 될 수 있다는 경고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경계를 허무는 일, 아니 경계를 지우고 구별 짓기를 끝내는 날은 아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욕망과 비인간적 속성조차 인간의 본성으로 치환하고 그 적응 노력을 자기계발로 선망하는 시대다. 좋은 삶, 내 삶의 가치는 숨은그림찾기처럼 점점 더 어렵고 난해해진다. 비슷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윌리를 찾는 일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 돼 버렸다.

* 『호모 사케르』에서 아감벤이 인용, 소개한 책들

아리스토 텔레스 『형이상학』 『정치학』『니코마코스 윤리학』『영혼론』

미셸 푸코 『앎에의 의지』『성의 역사』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혁명론』『전체주의의 기원』

플라톤 『필레보스』『프로타고라스』『법률』『국가』

칼 슈미트 『정치 신학』『노모스』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가타리, 들뢰즈 『천개의 고원』

발터 벤야민 『운명과 성격』『폭력 비판론』『서한집』

홉스 『리바이어던』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카프카 『법 앞에서』『소송』『노트』

칸트 『도덕 형이상학』『실천 이성 비판』『공동 판결에 관해』

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

장 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바타이유 『에로스의 눈물』

페르슈어 『인종 위생학』

칼 빈딩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제거에 대한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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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리커버 개정판) - 국내 최초 수메르어·악카드어 원전 통합 번역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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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없는 역사는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최초의 인간이 지구에 살았던 모든 순간이 기록된 건 아니다. 땅속에 묻혀 흔적이 남아 있거나 기록이 발견되지 않으면 우리가 과거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문명을 이루며 문자를 발명한 후에도 인간은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러고 보면 과대 포장과 확대 해석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도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 어쩌면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는 일은 불가능한 지도 모른다. 기록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이며 권력과 부를 거머쥔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가장 오래된 역사는 무엇일까.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수메르의 역사다.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스, 오뒷세이가 역사와 신화의 혼재인 것처럼 길가메쉬라는 실존 왕에게 입힌 화려한 신화의 옷은 당대의 현실을 가늠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한다. 시간이 흐르면 왜곡된 사실도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되는 것일까.

실증주의 역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과장된 기록으로 인류의 과거를 가늠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신화일까. 보헤미아 프라하 출신의 독일 시인 릴케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서사시’라고 했다. 초야권까지 소유한 실존 인물 길가메쉬가 현실에서 채우고 싶은 욕망은 없어 보인다. 단 한 가지, 죽음을 극복하려는 일련의 과정이 길가메쉬 서사시의 뼈대를 이룬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공포. 인간이 달나라에 가는 시대에도 단 한 번뿐인 삶에 정답을 찾지 못한 건 아닐까. 모두 죽는다는 전제가 삶의 목적과 방법을 오히려 왜곡하기도 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며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도록 독촉하는 건 아닐까.

수메르어는 그림문자(5100년) 이전에 발명된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악카드어(4600년), 에블라어(4300년), 히브리어(3000년)으로 이어지는 기록의 역사는 현존재를 먼지만큼 아득하게 만들어버린다. 천문학과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겸손’이다. 타인과 세상을 보는 눈이 어떠하든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든 존재의미를 찾기 어렵다. 수천 년 전 수메르에는 엔메르카르-루갈반다-두무지-길가메쉬로 이어지는 막강한 권력자가 있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인 수메르가 “그리스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특히 길가메쉬 서사시는 호메로스의 ‘교과서’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오디세이아뿐만 아니라 고대 영국의 영웅 서사시이며, 게르만족 최고의 서사시인 〈베어울프(Beowulf)〉에서부터 북유럽의 신화 연대기 〈잃어버린 이야기들(The Book of Lost Tales)〉의 집필자인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의 장편소설 〈반지의 제왕(The Lora of The Rings)〉에 이르기까지 영웅 문학의 출발점이요, 최고(最古) 정점에 길가메쉬 서사시가 우뚝 서 있다! ”

수메르의 권위자가 쓴 영역본을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책을 고민했으나 라틴어를 공부한 천병희의 판본을 믿듯 수메르어와 악카드어 기록을 직접 해석한 김산해의 책을 선택했다. 그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악카드어의 기록은 길가메쉬 서사시의 여러 판본으로 치자면 최후대에, 달리 말하면 마지막 개작(改作)DP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성서의 기록보다 적어도 수백 년이나 앞서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학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인간이 2000여 년간이나 믿어온 ‘진실의 혼돈’이었다.”라고 말한다. “히브리 신호와 그리스 신화에 앞서 악카드어로 기록된 원본들이 있었다! 악카드어로 기록되기 전에 수메르어로 기록된 진짜 원본들이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최초의 신화, 최초의 서사시를 접할 수 있는 시기에 태어난 행운을 잡은 것이다. 이것은 4000여 년 전 수메르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뒤부터 부활하기까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혜인 셈이다! ”라는 감탄은 길가메쉬 서사시가 가진 역사적 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한 권의 책으로 남은 기록이 아니니 순서를 정하고 수메르어 기록과 악카드어 기록의 조각들을 맞춰 배열하는 작업은 오롯이 번역자의 몫이다. 450쪽에 달하는 부담스러운 분량이지만 지루함을 덜기 위해 사진과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기 때문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번역투의 문장도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어나 고대어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배경 지식에 해당하는 긴 각주는 본문을 읽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건너뛰지 말고 꼼꼼하게 살피는 편이 낫다.

신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엔키가 창조한 ‘인간’은 오늘도 고단하다. 매일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눈을 뜨는 건 어쩌면 하루살이로 매일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닐까. 또 하루 저물어 가고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오늘을 살았을 테지만 어둠이 내리면 잠자리에 들고 다시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내일을 산다. 그 종착역이 어디든 4800여 년 전 길가메쉬가 느낀 두려움 대신 자기 삶의 끝을 가늠해 보면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얼마나 계속될지 모를 미래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잠자는 자와 죽은 자는 얼마나 똑같은가! 죽음의 형상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도다! 바로 그것이다. 너는 인간이다! 범인이든 귀인이든, 꼭 한 번은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하고, 하나처럼 모두 모여든다. -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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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읽고 갑니다 ~ 리뷰 당선되신거 축하드립니다 *^^*

sceptic 2022-03-08 18:21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 김누리 교수의 한국 사회 탐험기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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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독일의 음유시인 볼프 비어만의 시구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하는 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절망을 설교하는 자는 개자식이다.” 그래, 환멸 속에서도 한 걸음 나가야 한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 253쪽

여기저기 옮겨지는 촌철살인의 단문들. 그리고 가슴을 녹이고 공감을 일으키는 미문들. 선동적이고 자극적인 호소문들. 우리 삶은 어쩌면 수많은 텍스트로 둘러싸인 거대한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닐까. 유튜브와 인스타, 틱톡으로 무장한 감각적 영상들이 뇌를 자극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짤막한 시구절에 열광한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라는 문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라는 말로 2차대전의 비극과 참상을 표현했던 브레히트처럼 김누리는 볼프 비어만의 입을 빌려 이 시대의 희망과 절망을 비튼다. 그럼 충분히 절망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었을까. 근대 이전 계급 사회에서도, 구한말의 혼란과 일제 강점기에도, 해방의 혼란과 한국 전쟁의 틈바구니에도, 반민특위가 해체와 자유당 부정선거에도, 군사 쿠데타와 유신정권에도, 5․18과 박종철 고문치사에도 절망할 권리가 없었을까.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랜 전통과 문화의 결과물이라고 착각한다. 유구한 역사와 고유한 정신문화가 내재한 민족이라는 환상처럼 어이없는 일이다. 때때로 자기만의 정신 승리법과 대리만족은 재벌과 연예인 걱정만큼 정치인에 대한 환호와 경멸로 나타난다. 누군가 이 절망을 바꿔 줄 거라는 기대만큼의 크기로 실망은 분노로 치환된다. 역사는 언제나 그 희망이 헛되고 헛되었음을 증명한다. 68혁명의 혜택(?)을 한 줌도 받지 못한 한국은 겨우 87년 체제가 자리를 잡는 듯했지만 신자유주의와 함께 IMF라는 후유증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여기는 어디이며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냉정한 현실 인식 없는 긍정과 희망만큼 절망적인 상황이 또 있을까. 비판적 거리 두기를 비관적 냉소주의로 받아들이면 ‘절망할 권리’는 모든 사람이 당당하게 누릴 수밖에 없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쓴 칼럼을 주제별로 엮은 이 책은 관념적 현실 비판이 아니다. 뻔한 시론時論의 지겨움은 논리 없는 자가당착, 진영논리를 앞세운 반대, 계급 이익을 앞세운 이기주의, 반성과 대안 없는 비난 때문이다. 김누리는 독일의 현실을 자주 언급하며 유럽과 미국 그리고 대한민국을 비교하며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현상을 통해 본질적인 문제를 들여다보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대체로 눈앞에 선거, 단기적 이익 앞에서 대증요법에 급급하다. 단기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지난 일을 잊는 데는 수준급이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일도 감당하지 못하는 다이나믹 코리아의 현실 때문이 아니라 멀리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태도와 본질적인 문제 해결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불안사회, 무례 사회, 방관 사회, 노예 민주주의를 언급하는 책의 서문은 ‘환멸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제와 다른가. 10년 20년 전과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그대로인가. 사회 현상을 관찰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노력은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기본적인 태도다. 정치 혐오는 노예가 되는 지름길이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다. 약한 자아를 가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광장 민주주의’는 이루었지만 ‘일상 민주주의’는 이루지 못한 한국 사회의 ‘이상한 현실’을 설명해 준다.” 일상 민주주의가 사람들의 의식과 태도를 규정한다. 자신의 한계는 스스로 정한다. 말과 행동은 생각의 자기 검열을 통해 드러난다. 관습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희망은 없다.

사회, 정치, 교육, 대학, 외교 등 주제별로 엮인 글이 지난 8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굵지한 사건을 환기하며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다. 대체로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이라는 환상이 깨어진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려는 상황에서 우리는 또다시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돼 있다는 알렉시스 토크빌의 비아냥을 떠올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김누리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 집단의 인식은 지극히 천박하다. 이들은 대개 이 사회의 교육과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수한 ‘우등생들’인 까닭에, 이들의 천민성은 그대로 사회의 성격을 대유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자를 ‘모범생’으로 길러내는 무례사회에 미래는 없다.”라는 말로 기득권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됐다는 환상을 버리고 일상 ‘속’의 민주주의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호소다. 시스템과 제도를 바꾸는 대신 현실에 ‘적응’하며 독자 생존에 몰입하는 순간 현실이 지옥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부모도 스펙이라는 말 앞에 할 말을 잃고,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훈계하며, 돈 되는 일이 아니면 관심 갖지 말라는 충고를 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경제다.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신봉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환상은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 고문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니 가난과 실패는 모두 네 탓이라는 암묵적 합의와 인정이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모범생과 우등생을 일치시킨다. 국영수 성적이 좋은 소수 카르텔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는 시스템을 고치는 대신 그 자리에 끼지 못해 안달을 하고 내 자식만은 그들의 리그에 참여시키고 싶은 욕망이 앞서는 한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있다.

5년마다 바뀌는 대통령제,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가 가진 폐해를 생각해보지 않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서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찬반을 결정하는 한 절망은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교육 시스템 자체를 바꾸려는 노력보다 ‘내 자식’에게 유리한 방식을 고민하는 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유럽의 대다수 나라들이 하는 대로 ‘정의로운 교육’을 실천하면 된다. 구체적으로 네가지를 폐지해야 한다. 첫째는 대학입시 폐지, 둘째는 대학 서열 폐지, 셋째는 대학 등록금 폐지, 넷째는 특권 학교 폐지가 그것이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상식이자 일상이다.”라는 말은 헛된 망상으로 들린다. 답을 모르거나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고민과 선택의 문제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행복한 미래? 지옥같은(빨리 읽지 말 것) 현실? 오늘과 내일 앞에 붙는 수식어는 정치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써야 한다는 자각이 ‘절망할 권리’를 잃게 한다.

라이피즘lifism이라 명명한 주의, 주장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프로파간다로 작동하긴 어렵다. 역사적으로 어떤 이데올로기도 다수에게 통용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파시시스트 히틀러도 합법적 권한을 위임받아 아우슈비츠를 만들었고 다수 대중은 이를 지지했고, 그 불가피성에 동의했다. 수구세력의 저항과 기득권 전쟁이 언제 한 번이라도 만만했던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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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착각 - 뇌과학과 인지심리학으로 풀어낸 마음의 재해석
닉 채터 지음, 김문주 옮김 / 웨일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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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우리 신체에서 1.4 킬로그램에 불과하다. 현대 의학은 물질적 존재로서 몸의 각 부분을 해부해서 그 역할과 기능을 밝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의 작동방식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 복잡한 생각들은 시냅스를 비롯한 뉴런의 작용으로 선택과 판단을 이끌어 행동에 옮기게 한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 본능적인 움직임은 물론 철학적 사고에 이르기까지 알 수 없는 경로를 거친다. 자유의지에 의해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조절한다는 자부심은 인간을 오만하게 한다. 다른 어떤 동물과 구별되어 자연을 지배한다는 착각.

닉 채터의 도발적인 주장이 담긴 ‘생각한다는 착각’은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급진적이다. 지금까지 밝혀낸 뇌의 비밀에 대한 과학적 판단과 무관하게 인간 뇌의 작동 방식은 평면적이고 표피적이란다. 심오한 정신적 깊이 따위는 없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내적 심연은 과연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에 불과한 걸까.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행동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든다. 다양한 인지 실험과 착시, 환상 같은 예시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박살 내는 저자의 말에 혼란스럽다. 무의식에 기반을 둔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은 허구에 불구한 것일까. 표피적 과정에 집중할 때 겨우 마음의 본질에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믿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영리하며 논리적인 생명체다. 심연으로부터 길어올린 생각과 이성적 판단이 인류의 삶을 진보시켰고 문명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기존의 믿음은 모두 잘못된 것일까.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아무리 설명하고 합리화해도 파편적이고 즉흥적인 선택에 불과하다니! 절체절명의 순간, 깊은 고뇌와 사유를 거친 행동이 그 결과에 대한 구구절절한 이유 찾기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란 말인가.

철학자이자 정치 운동가인 버트런드 러셀은 1901년 가을에 감정적 통찰력의 순간에 관한 인상적인 글을 썼다. “나는 어느 날 오후 자전거를 타고 나갔고, 시골길을 따라 달리는 도중에 불현 듯 내가 알리스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 순간까지도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이 사그라질 수조차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이러한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바로 파멸이다.” - 151쪽

러셀의 자서전에 소개된 일화는 다양한 장면에서 인용된다. 저자는 이 장면이야말로 “탐구의 깊이와 풍부함과 무한한 범위는 모두 완전히 속임수다. 내면세계 같은 것은 없다. 찰나적인 의식적 경험의 흐름은 광활한 생각의 바다 위로 반짝거리는 수면이 아니라, 그냥 그게 전부다.”라고 주장한다. 꿈의 분석과 뇌 촬영에서 진짜 동기를 찾을 수 없고 과정과 결과를 밝혀내는 어설픈 설명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또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마음의 깊이라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 책의 절반을 할애한다. 감정, 상상력, 선택 등 우리의 생각은 모두 단편적이고 즉흥적이라면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 의식과 무의식은 경계가 없다. 의식적인 판독과 그 판독을 만들어내는 무의식적 과정을 통해 우리 생각을 해부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뇌가 저지르는 속임수의 희생자들이다. 우리 뇌는 순간적으로 색깔과 사물, 기억, 신념, 선호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지어내며, 합당한 이유를 술술 뱉어내는 멋진 즉흥 기관이다. …… 마음은 평면이다. 그 표면이 그곳에 존재하는 전부다.”라는 문장을 한참 들여다보지만 반박할 증거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 몸부림쳤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떻게 이런 감정과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는 건 순전히 착각에 불과한가. 겨우 나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타인과 세상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겨우’가 아니라 그 착각을 인정하는 일이야말로 인간 존재에 대한 궁극적 비밀일까. 겸손과 두려움은 앎의 세계를 들여다본 자들이 받는 형벌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때로 모든 게 혼란스럽고 부질없게 느껴진다. 오직 모를 뿐이라고 일갈한 스님의 깨달음을 받아들이더라도 다음이 궁금하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는 모두 자기 합리화 과정에 불과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일이 너무 힘겹다. 저자의 말대로 마음이 평면이니 미래를 꿈꾸고 만들어 갈 수 있는 마지막 문장도 합리화에 불과한 게 아닌가.

생각의 ‘감옥’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고, 만들어진 것처럼 해체될 수도 있다. 마음이 평면이라면, 우리가 마음과 삶과 문화를 상상해 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감동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또 현실로 이뤄낼 힘을 지닌 셈이다. -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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