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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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존엄사가 사회적 의제로 부상할 때가 되지 않았나. 현대 의학은 두근거리는 삶이 아니라 심장박동 연장술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기술의 발달과 인간의 존엄 사이의 디커플링 현상은 핵가족 시대, 콩가루 집안에 닥친 필수적 사회문제가 되었다. 누구나 늙는다. 누구나 병들고 죽는다. 자연스러운 순환 과정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출생률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육아와 보육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죽음은 오롯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된다. 과연 그런가. 당신의, 아니 나의 마지막을 상상해 본다. 병원 중환자실 or 요양병원 or 고급 실버타운인가. 아니면 남편과 아내, 며느리와 사위, 자식들에 기댈 예정인가. 그도 아니면 형제자매, 조카 등 친족에 의지해야 하는가.

안락사를 넘어 존엄사 문제는 한 인간의 생을 마무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영화 《아무르Amour, 2012》는 노부부의 죽음을 다룬다. 영원한 사랑보다 먼저 찾아온 죽음 앞에서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한동안 사랑의 끝 혹은 삶의 종착역을 생각하게 한 영화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은 자전적 소설이다. 사르트르와 여동생 푸페트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실제 1963년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보부아르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 그 이듬해 이 책을 출간했다.

150여 쪽 분량의 짧은 작품이지만 내용은 깊고 어둡다. 욕실에서 넘어진 어머니가 두 시간을 기어 전화기까지 가는 장면을 묘사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우리들의 부모님,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진행형의 현실이다. 죽음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인간의 몸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후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수술을 하고 동생과 교대로 어머니를 돌보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미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떨친 딸에게도 어머니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모녀지간이 모두 그렇지 않으나 보부아르는 당시 어머니를 기독교적 가치인 동시에 부르주아적인 가치, 나아가 가부장적 질서의 대변자로 간주했다. 애증의 관계였으나 늙고 병들어 죽음을 눈앞에 둔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 미묘하다.

타자로서 아들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순간, 딸이 어머니를 대하는 순간 오히려 관계가 편안하다. 거리 두기는 코로나 시대가 만든 사회적 질서가 아니라 가장 친밀한 부모와 자식간에 지켜야할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부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식이나 죄책감과 미안함에 허덕이는 부모나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이 반드시 경제적 대가,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도 복잡한 심리적 관계가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도 있다. 보부아르는 아주 담담하게 “엄마는 천국이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고 병에 걸렸는데도 불구하고 엄마는 현세에 무척이나 집착했고, 죽음을 동물적으로 두려워했다.”라고 적는다. 객관적 거리가 불가능해 보이지만 관찰자의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본다. 딸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인지 그 내밀한 관계를 짚어보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다만 아주 오래전부터 딸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볼 여지를 준다. 집집마다 모녀마다 사연인 말할 수 없을 만큼 길다. 사적인 관계가 일반화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보부아르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의 여성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죽음을 앞둔 어머니는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야.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무서운 거지.”라고 고백한다. 병상에 누워서야 “너무 다른 사람들만을 위해서 살았구나. 이제부터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노인네가 될 테다.”라고 말한다. 누구나 겪는 때늦은 깨달음과 후회. 우리는 조금 더 일찍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없을까. 몸이 늙고 병들어서야 뒤돌아보는 대신 사는 동안 염두에 둘 순 없을까.

어느 누구도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기 삶의 마무리를 스스로 선택할 수는 있어야하지 않을까. 어떻게든 조금 더 오래 사는 게 능사는 아니다. 보부아르가 관찰한 대로 인간의 존엄과 죽음은 아주 거리가 멀어진다. 생의 마지막을, 딸들과 이별하는 순간을 생생하게 바라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너무 일반적이고 당연한 과정이라서 특별한 장면이나 기록으로 남길만한 요소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보편적 정서와 마음의 물결이 지나치게 생생하다. 그래서 오히려 불편하다.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그것은 불확실한 자기 삶에 가장 확실한 단 하나의 미래다. 숱한 이야기를 남긴 채, 미련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모두 떠난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온전히 하루라도 더 오래 사는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이라는 보부아르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살아남은 자들에게나 적용될 수사에 불과한 게 아닐까.

30쪽에 달하는 강초롱의 <타인에 대한 애도를 통해 자기 자신과 화해하기>는 보부아르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에게 길잡이 역할을 한다. 어머니 죽음에 대한 애도가 결국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이라는 분석은 지극히 살아남은 자의 이기적 관점으로 읽히지만 논리의 비약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자기 위로와 자기 기만이 모든 인간의 합리화 기제라면 아들이 아버지를 극복하고 딸이 어머니를 이겨내는 것도 지난한 삶의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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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 - 철학의 개념과 번역어를 살피다 메멘토 문고·나의 독법 2
신우승.김은정.이승택 지음 / 메멘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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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책은 없지, 누가 이걸 좀 써줬으면 좋겠는데, 이 분야를 좀 정리하는 사람은 없나... 책을 읽다 문득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다. 번역본을 느낄 때마다 느끼는 한계 때문에 원서에 대한 욕망이 커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발번역에 분노하고 비문에 고개를 젓는 대신 원문을 읽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숨 쉬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누군가 대신해주길 기다린 건 아닐까 싶다. 게으른 독자의 탐욕을 채워줄 출판사, 번역가, 전문가의 노력에 기대고 산지 오래다.


너무 늦었지만 꼭 필요한 책을 만나 읽는 내내 반가웠고 논의의 출발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는 ‘철학’의 자리에 문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등도 놓여야 한다.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를 최재천이 ‘통섭統攝’으로 번역하면서 벌어진 논쟁부터 의학, 법학 용어에 이르기까지 일본식 한자어로 중역된 거의 모든 분야의 용어들이 때때로 낯설고 이해를 방해하며 오독의 여지를 남긴다. 언어는 사물과 개념을 확정하고 의미를 포착하는 도구다. 한국어에 대응하는 마땅한 단어가 없으면 지식 체계가 어그러진다. 어떤 개념에 상응하는 정확한 용어는 학제 간에 통합과 발전의 기본적 토대다. 필자와 독자 사이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거나 모호한 지시 대상은 대상을 흐리게 하고 문해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처음 번역되는 개념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합의 없이 번역가, 학자에 의해 최초로 도입된 용어는 그대로 정착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혼란과 갑론을박의 비용은 상상하기 어렵다. 특히 철학이 그렇다. 누구나 쉽게 원전을 읽고 자기만의 ‘철학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2차 저작물에 의한 해설과 설명이 없으면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아 철학은 ‘난해한 것’,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만들었다. 물론 지식은 일차적으로 체계적인 개념의 구조물이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익히며 코끼리 다리를 더듬듯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하지만, 일상에서 활용되는 의미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된다면 철학은 아득히 멀고 흐릿한 성안에 갇히게 되지 않을까.

책 전체 분량은 많지 않다. 철학 용어 14개를 골라 신우승이 문제를 지적하고 새로운 용어를 제한하면 김은정과 이승택이 반론을 한 후 신우승이 다시 정리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주장-반론-재반론’의 과정이 흥미롭고 각자의 생각이 보태져 논의가 확대된다. 그렇다고 해서 최종적으로 제안된 용어가 정답은 아니다. 이 책은 이런 논의의 촉매로서 충분하다. 이런 논쟁은 계속 이어져야 마땅하며 궁극적으로 한국어로 철학하기가 가능해져야 한다. 철학뿐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의학, 법학, 역사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다. be동사가 없는 한국어에서 ‘존재’는 ‘이다’와 ‘있다’로 번역해도 충분할까. 객관적, 형이상학, 인식하다, 공리 등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용어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일은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는 기분이 든다.

철학이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라면 그 도구인 언어부터 명확해야 한다. 논리적인 사고, 이성적 판단은 수많은 생각과 생각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사유의 도구인 언어는 발화된 순간 청자에게 이해와 오해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행동으로 증명되고 결과로 나타나기 전까지 그 숱한 혼란은 모두 개념의 혼란과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짧지만 강렬한 책은 ‘필수’적이며, 독자에서 충분히 만족감을 준다. 책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 책이다. 신우승, 김은정, 이승택은 공교롭게도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대학원과 박사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니 출발선에서 습관적으로 개념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 아니다. 질문과 의심의 학문인 철학에서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 논쟁이 이런 식으로라도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싶다. 함석헌 등 순우리말로 철학하기 운동을 벌인 선배들이 없지 않으나 오히려 낯선 순우리말이 철학에서 멀어지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서양 철학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과 개념이 어떻게 갈무리되는지는 오로지 번역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조금 더 정확하고 분명한 한국어가 통용됐으면 좋겠다. 게으른 독자의 소망은 누군가에 의해 조금씩 이뤄질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이렇게 고민하고 땀 흘리는 분들의 수고에 경의를 보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읽고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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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 -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작지만 강력한 이야기
필립 볼 지음, 고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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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발견은 각 개인의 동기와 능력, 가끔은 특이한 성격에 좌우된다. 원소의 발견에는 통찰력뿐 아니라 결단력, 상상력, 야심이 필요하다. 물론 행운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 8쪽

거시적 관점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코스모스의 세계에 대한 확장적 사고력은 인간을 우주로 보냈다. 반면 미시적 관점은 세상의 근본에 관심을 기울인다.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한 인류의 생각은 철학적 고민에서 출발해서 이제 첨단과학의 영역이 되었다. 나와 세계를 미분하면 무엇이 남을까.

고교 졸업 후 처음 보는 주기율표는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원자 번호 30번 이후의 원소들은 외계어다. 비주얼 히스토리를 표방한 『원소』는 세상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을 제시한다. 원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장 작고 원초적인 물질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의 역사는 단순한 흥미를 넘어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인간의 역사는 질문의 역사다. ‘왜’ 그런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만물은 유전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을까. 수많은 과학자들은 무엇을 바라 한평생을 그 작고 단단한 세계에 몰입했을까.

만물의 근원을 찾아 떠난 여행은 그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연금술로 이어졌고 전기로 분해한 원소에서 선 스펙트럼, 인간이 원소를 만드는 단계로 발전해왔다. 기초과학은 문명의 토대를 이루며 수많은 분야에 응용되어 인간의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건축, 의학뿐 아니라 핵전쟁에 이르기까지 화학의 역할과 기능은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다. 필립 볼은 원소의 사회적 의미와 철학적 접근을 배제한다. 철저하게 원소의 ‘역사’에 집중한다. 고대 철학자부터 최근의 사례까지 꼼꼼하게 점검하면서 객관적 사실들을 설명한다. 문명발달을 이끈 구리, 금, 은, 철에서 시작해서 주기율표의 마지막 줄 테네신, 오가네손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원소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책은 과학 이론도 실험 도구도 필요 없다. 주기율표를 암기해도 소용없고 실생활에 응용할만한 정도와도 무관하다. 원소 하나하나를 앞세워 그것이 발견된 경위와 인류에 미친 영향을 살핀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궁극의 미시세계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또 다른 눈으로 살펴볼 수 있다. 작지만 아름답고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원소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아테네에 아카데미아를 세운 건 기원전 380년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는 앎의 세계를 향해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항해를 계속했다.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는 현대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는 현실의 어제를 살피면 겸손해진다. 한없이 낮은 자세로 세상을 살필 수 있다면 외부 세계를 조금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 각 장에 소개된 과학과 문명사 연표도 눈에 띈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의 시초가 됐을 해저 케이블을 깔아 최초의 대서양 횡단 전신을 주고받은 건 1858년의 일이다. 자전거가 유럽과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유행하며 급증한 시기는 1890년경이다. 먼 과거에서 최근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고 또 생각보다 아득하다. 아주 잠깐 세상을 사는 우리가 알고 경험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언제나 그렇듯 정확하고 분명한 세계가 주는 안도감은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우리에게 다른 방식의 위로를 건넨다. 이치에 맞는 생각은 합의하기 힘든 수많은 인간에게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깨우친다. 아주 작고 아름다운 원소의 역사를 통해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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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얼굴들 - 빛을 조명하는 네 가지 인문적 시선
조수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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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이다. 우리가 눈으로 구별하는 모든 사물은 빛으로 윤곽을 드러낸다. 반사된 색으로 컬러를 구분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고유의 빛깔로 오해한다. 태양과 조명처럼 발광체를 제외하면 모두 반사체에 불과하다. 스스로 색을 만드는 게 아니라 흡수할 수 없는 색을 되비칠 뿐이다. 우리는 사과를 볼 수 없다는 선언부터 생각을 뒤집고 관습적 사고에 경종을 울린다.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지 기능이 얼마나 오해의 산물인지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낯설다. 본다는 행위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진실이라 믿지만 눈과 빛을 이해한 후에는 모든 게 의심스럽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들은 이야기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빛으로 세상을 읽는 조명디자이너 조수민의 『빛의 얼굴들』은 개인적인 취향을 저격한 책이다. 전복적 사고, 낯설고 신선한 관점, 새로운 지식과 정보, 대상에 대한 저자의 애정,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 객관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까지 읽고 싶은 책의 요소를 두루 갖췄다. 조수민은 빛과 조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다. 오랜 ‘업력’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공부와 관찰은 객관적 설명만으로도 읽은 이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깊은 관심을 유도한다. 빛은 직진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달이 반사체라는 사실까지 빛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며 저자는 빛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특히, “이 시간 동안 이 각기 다른 두 가지 하늘빛은 하늘을 뒤덮으며 하루 중 그 어느 때보다 근사한 장면을 연출한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이 땅 위의 모든 존재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 주는 이 아름다운 빛의 시간을 우리는 ‘골든아워Golden hour’라고 부른다.”는 설명에 공감하며 하루에 두 번 지구가 빚어내는 빛의 향연에 공감했다. 단순히 석양을 좋아한다는 시각적 현란함을 넘어 골든 아워가 주는 위로와 감동이 인간의 생체 리듬과 맞물려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골든 아워 : 태양이 뜨고 지기 약 30분 전후, 일광이 금색으로 빛나는 황혼의 시간을 일컫는 말. 사진, 영상,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매직 아워Magic hour라고 불리기도 한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에서 청취율이나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 또는 ‘심장마비나 호흡 정지, 대량 출혈 등의 응급 상황에서 인명을 구조할 수 있는 금쪽같은 시간’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직사광과 천공광에 대한 설명은 집안 곳곳에 천편일률적으로 배치된 형광등과 간접 조명 효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밝기에 따른 느낌과 분위기는 빛의 색감, 눈의 피로, 사물의 형태까지 영향을 준다. 맑은 하늘에 햇빛이 쨍한 날과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흐린 날의 차이는 생각보다 단순하지만 그 의미와 활용은 인공 조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들의 99퍼센트는 빛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100퍼센트는 빛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라는 조명 디자이너 제니퍼 딥턴이 새삼스럽다. 읽을수록 우리가 아는 빛과 내 삶에 영향을 주는 빛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빛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빛이 공간을 채우는 방법, 공동체 사회에 미치는 빛의 영향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높지도 크지도 않다. 감성에 호소하지도 않고 개인적인 취향을 직접 드러내는 부분도 많지 않다. 오랫동안 조명을 디자인하며 생각하고 느낀 빛에 대한 철학과 좋은 조명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주장과 설득이 아니라 설명과 조언에 가깝다.

수천만 원짜리 루이스 폴센의 조명이 아니어도 좋다. 수입산 명품 조명이 아니면 어떤가. “좋은 조명은 비싸지만, 좋은 빛은 비싸지 않다.”라는 저자의 말은 비싼 조명을 산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빛 환경을 얻는 것도 아니며, 좋은 빛을 얻기 위해 무조건 고가의 조명을 사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조명의 재료와 가격이 아니라 공간에 어울리는 조명의 위치와 배열이 좋은 빛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무와 동식물의 기름, 석탄과 석유의 시대를 지나 전기로 빛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인류의 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아졌으며, 어둠을 밝히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부유층만의 특권이 아니다.” 오히려 빛 공해가 인류의 밤을 괴롭힌다. 눈부시게 밝고 환한 빛은 문명발달을 상징한다. 그러나 불면과 각종 질병을 유발하기도 하고, 자연의 순환에 맞춰진 인간의 생체 리듬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적절한 빛, 좋은 조명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빛과 조명에 대한 앎이 사물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더 나은 삶에 영향을 준다. 조수민이 말한 빛의 얼굴들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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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푼짜리 오페라.남자는 남자다 을유세계문학전집 54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길웅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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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없다. 읽어야만 하는 책이 없는 것처럼. 사건의 우연성은 근대소설의 특징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송곳이다. 도서관 서가를 산책하다 우연히 집어 든 책 『서푼짜리 오페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대표작이다. ‘남자는 남자다’가 앞에 실렸으나 제목은 순서가 바뀌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에이비드 핸드의 말을 그대로 신뢰한다면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책에 손이 가는 건 관심과 선택의 과정을 거치는 희박한 확률이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사건이다. 우연을 부풀려 운명을 창조하고 필연을 강조하려는 태도만 버린다면 해석 없이 사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시간은 흐르고 세계는 변하며 인간은 죽어간다. 극단적 허무와 염세주의가 아니라면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를 수용하고 적응하며 사는 게 모든 생명의 본질이다.

우선 앞에 실린 「남자는 남자다」에 관한 이야기다. 정체성을 포기하고 집단 속에 편입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갈리 가이의 내면 풍경 대신 외부적 효과와 상황적 아이러니를 적극 수용한다. 집단의 일원으로 개조된 갈리 가이는 자동화기 분대원 누구보다 가장 군인다운 군인, 즉 전쟁 기계로 변한다. 개인의 정체성이 소멸하는 극한 상황이 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브레히트는 부품처럼 개인을 대체할 수 있는 군대조직의 비인간적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전혀 다른 존재로 변신 가능하며 집단 속에서 역할과 의미가 개인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이 작품은 여전히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묻는다. 사적인 존재로서 갈리 가이가 아니라 집단 속에서 갈리가이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 나약한 개인이 사라지고 자기 역할과 임무에 충실한 조직의 일원으로서 ‘남자’는 진정한 ‘남자’가 되는 걸까.

브레히트가 이 비인간적 파편적 존재로서 개인을 긍정하는 이유는 세계 변혁의 가능성 때문이다. 집단 속의 개인을 중시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은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삭제된다. 이후에는 반파시즘, 반군국주의적 경향이 뚜렷해진다. 진정한 사회주의 집단의 힘은 개인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같은 맥락이지만 지향점과 방법에서 차이가 날 뿐이 아닌가. 여러 차례 개작되었다고 하나 작품 외적 영향과 브레히트의 사상적 변모를 모두 추적하며 읽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통해 사회 변혁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작품 곳곳에 낯선 시도로 반영되어 있다. 형식은 내용을 규정하고 내용은 형식을 창조한다. 인도 주둔 영국군 자동화기 분대의 활약상은 거절 못하는 사나이 갈리가이가 제라이아 집으로 변신하는 과정과 맞물려 시대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폴리 살아 있는 가장 비속한 것, 가장 연약한 것이 인간이야.”라는 직설 화법이 굳이 갈리 가이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읽히지는 않는다. 등장인물 누구도 ‘연약함’에서 자유롭지 않다. 산전수전 다 겪은 군인부터 생선파는 여인까지 그렇다. 각자의 연약함은 신념과 가치의 혼란이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 만큼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게 있을까. 정치적 이념, 종교적 신념, 삶의 가치관 모두 그렇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과의 관계는 잔인한 형벌이다. 반면 갈리 가이처럼 적응형 인간의 민낯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어쩌면 그것이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우리의 내면에 가깝기 때문이겠지만. 어느 쪽이든 극단은 중도를 이기지 못한다. 중용의 도는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1928년 베를린에서 초연된 『서푼짜리 오페라』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공을 거뒀고 브레히트를 세계적인 극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미 산업혁명이 진행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병들고 타락한 시민사회의 질서에 대한 비판을 읽을 수 있다. 거지 두목과 갱스터의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경찰과의 유착관계,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관점 등 일그러진 사회의 단면들이 폭로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의와 불의는 같은 옷을 입고 서로의 얼굴을 가린다. 그럴듯한 외피를 걸친 사람들의 속내가 자본주의 욕망과 닿아 있고 그것은 다시 시민사회 질서를 깨는 부도덕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찰이 도둑과 내통하고 사랑도 상품처럼 사고파는 대상이라는 사실이 시민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피첨과 매키스는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며 착취를 일삼는다. 그 대상은 물론 선량하고 힘없는 시민과 동료다. 거지, 창녀, 깡패로 표현된 그들은 사실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그들이 겪는 관계 양상과 자본으로부터의 소외현상은 고위공무원, 대기업 사원, 전문직 종사자의 관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생존을 위한 경쟁,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외면하는 모습은 시대의 변화가 무색하게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민사회의 도덕적 기본 원리인 가족, 결혼, 신뢰도 결국 물질적 토대를 유지하는 수단이라는 설정은 뼈아프게 다가온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자본과 권력이 정의와 공정의 가치까지 독점하는 현대 사회에서 더욱 절실하다. 브레히트의 희곡이 여전이 무대에 올려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현실의 모순을 인식하고 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은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의 영향을 문학에 반영했다. 독자가 현실의 모순을 깨닫고 변화가 시작될 거라는 나이브한 생각은 낭만적 사랑만큼 허망해 보인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혁명에 대한 열정과 세계 변혁을 추동하는 힘은 브레히트의 꿈에서 출발했던 게 아닐까.

극 중에 삽입된 노래, 서사극과 비유극의 형식적 실험 등 전통에서 벗어난 도전이 브레히트를 또 다른 면에서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거나, 극중극, 화자의 등장 등 낯선 요소는 이질적이지 않고 새로움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면이다. 물론 초연될 당시에 이런 요소는 파격에 가까웠을 테지만 낯설게 하는 효과는 시대를 막론하고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즐거움이다.

이 작품은 존 게이의 『거지의 오페라』를 원작으로 했다. 극의 중심축을 이루는 칼잡이 매키와 조나단 제레미아 피첨의 갈등은 서민들의 아귀다툼 같은 비극이다. 가진 자들의 싸움이 아니라 없는 자들 간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그들은 물론 자본을 이용해 권력과 결탈하지만 결국에는 파멸에 이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편견은 삶을 불편하게 한다.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지 못한 시스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들만의 잔치와 패권 놀음이 때때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맹목적 지지와 몰입으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감정과 분노는 희극에 가깝다. 서푼짜리 오페라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 혹은 교훈이 있다면 현재를 사는 각자의 태도와 방법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차피 모든 해석과 평가는 작품을 거친 개인적 트림에 불과한 것.

무대 뒤에서

도대체 인간은 무얼 먹고 사나요?

도대체 인간은 무얼 먹고 사냐고? 시시각각

사람을 괴롭히고, 벗겨 먹고, 덮치고, 목 졸라 퍼먹지.

인간은, 자신이 인간임을

철저하게 망각함으로써만 살 수 있어.

- 2막 6장,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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