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이란 무엇인가? 해탈, 깨달음, 깨어남이라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근본적으로 직관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첫째, 이 모든 현상의 씨앗은 비인격적인 의식이라는 것. 둘째, 우리가 구하고 있는 해탈이라는 것은 발현되지 않은 것의 잠재적 형태라는 것. 셋째, 찾는 자가 바로 찾고 있는 그 자체라는 것!

1. 근본적 상태에서는 그저 "존재"만이 있으며 여기에는 어떤 지식이나 조건, 속성, 형태, 자기 정체성 등이 없다.

2. 그러다가 (그런 것이 그것의 본성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명확한 이유가 없이 "내가 존재한다"는 개념(비인격적인 의식)이 일어나게 된다. 이 의식에 의해서 세계가 살아있는 꿈으로 펼쳐지게 된다.

3. 의식이 자신을 현상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형태를 지닌 물리적 몸이 필요하며 의식은 자신을 그 몸으로 동일시하고 그렇게 해서 "나"의 가상적인 객관화와 함께 "굴레"의 개념이 생겨난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할 때마다 개체는 순수한 주관성(무제한의 잠재성)을 객관적 대상(제한된 현상)으로 바꾸어버린 "원죄"를 범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4. 어떤 객관적 대상도 자기 스스로의 독립된 존재는 지니고 있지 못하므로 그 대상은 이 삶의 꿈(living-dream)에서 스스로 깨어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 착각 속의 개체는 "절대" 또는 "실제" 또는 아무거나 또 다른 대상을 찾는다.

5. 여기까지가 분명하다면, 이제 거슬러 올라가 우리가 의식이 생겨나기 전 원래의 모습은 무엇이었던가를 찾아 내어야 한다.

6. 이 단계에서 우리는 몸도 아니고 의식도 아니며 오로지 모든 의식이 있기 이전의 이름붙일 수 없는 온전한 잠재성의 상태일 뿐이라는 "깨달음"이 있게 된다. (의식 속에서는 그 상태가 무슨 이름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은 개념일 뿐이다)

7. 그렇게 해서 이 고리는 완전하다. 찾는 자가 곧 찾아진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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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쓰는 글은 순간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내가 만들어낸 시는 그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내 생각, 내 손, 나를 둘러싼 공간과 내가 느낀 감정들일 뿐이다.

당신이 당신 내면에 있는 것들과 손을 잡았을 때 당신은 더 이상 당신 안에 있는 것들과 싸우지 않는다.

당신은 좋은 시를 쓰고, 그 시에서 떠나라.

시에 들어가 있는 단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 몸을 빌어 밖으로 표출되었던 "위대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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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마음에서 제일 먼저 '번쩍'하고 빛을 내는 불씨이다.

이 불씨의 뿌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잠재력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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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식민주의적 죄의식을 과거의 역사에 대한 국민적 책임감이나 집단적 유죄의 범주로 상정하느냐, 아니면 사회적인 개인으로서 현재 자기 사회에서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자기 성찰과 반성의 범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에둘러서 독일과 이스라엘의 관계 속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예컨대 독일인들이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에 대해 집단적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이스라엘 혹은 유대민족 전체에 대한 반사적 정당화로 흐르기 십상이죠. 그것은 다시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에 가하고 있는 억압과 공격, 혹은 제국주의 정책을 사실상 추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식민주의적 죄의식은 식민주의의 작동 방식과 현실 논리, 즉 술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야지, 자기 민족을 식민주의의 주체로 설정하는, 주어에 대한 단순비판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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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가 내게 주는 교훈은, 또다시 식민주의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부모 세대와는 달리 우리도 식민주의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폐허 위에 펄럭이는 이스라엘의 국기에서 나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한반도의 자화상을 읽는다. 한반도의 전후 지식인인 내게 '세습적 희생자의식'이 무서운 것도 그 때문이다. 그로 인해 우리도 식민주의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그 어두운 자화상에 쉽게 눈을 감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한반도의 집단적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세습적 희생자라는 자기 규정은 잠재적 식민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자기 성찰을 근원적으로 가로막는다. 자기 성찰을 포기한 도덕적 정당성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임지현 교수의 '오만과 편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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