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사랑한다.
나는 네가 어떤 인생을 살든 너를 응원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네 날개를 마음껏 펼치거라.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할아버지가 얼마남지 않는 자기 인생을 끝에 서서 손녀딸에게 해주는 마지막 말로서 이처럼 아름다운 말을 보지 못했다.
내 마지막을 지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도 이런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1.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 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 꿈 속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마주치게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을 수 없을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그리움을 해소해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서받을 수 없을까?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서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이성의 검열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에서 정해지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 알랭 드 보통 -
늙은 아내 한밤중에 길쌈하다가
산 비 막 내리는 소리 들었네
"드락 보릴랑은 내 거둘 테니
당신은 일어날 필요 없어요."
눈을 감으면
어린 때 선생님이 걸어오신다.
회초리를 드시고
선생님은 낙타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는 항시 추억한다
-- 옛날에 옛날에 --
낙타는 어린 시절 선생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의 옛 이야기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의 오후.
그대가 태사공의 <사기>를 읽었다 하나, 그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읽지 못했구료. 왜냐하면 <항우본기>를 읽으면 제후들이 성벽 위에서 싸움 구경 하던 것이 생각나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악사 고점리가 축을 연주하던 일이 떠오른다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늙은 서생의 진부한 말일 뿐이니, 또한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가지고 살금살금다가가, 손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책을 저술할 때입니다.